소설리스트

03. (4/21)

03.

“힉.”

막다른 복도의 끝에서 별생각 없이 오른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던 여설이 불쑥 제 앞으로 나타난 인영에 기겁을 하고 몸을 움츠렸다.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유곽은 오히려 불을 켜지 않는 한낮이 더 어둡고 으스스한 분위기가 있었다.

다행히 낯익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낯익은 얼굴이 반가운 얼굴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여설이 버럭 성질을 냈다.

“기척 좀 내고 다녀!”

화수였다.

“귀신인 줄 알았잖아.”

“…….”

어쩌라고. 사실 화수로서는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다가 괜스레 뺨을 맞은 격이었지만 별다른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반응을 대신한 화수는 다시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어휴. 저 싸가지. 얼굴을 찡그린 여설도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결국 다시 방향을 틀었다.

“얘!”

휘적휘적, 기척도 없이 걷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돌아보는 얼굴을 향해 여설이 입을 열었다.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눈으로 되묻는 화수에도 여설의 입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홍위라는 그 작자, 집안이 쫄딱 망했대.”

“…….”

“그러니, 그 인간 앞으로 여기 얼씬도 못 할 거라고.”

“…….”

“그냥 알고나 있으라고.”

“알겠어.”

겨우 입이 열렸다 싶었더니 고작 나온 말이 알겠다, 이 말 한마디라니. 물론 알고나 있으라고 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좀 더 기쁜 표정 정도는 지을 줄 알았다. 저 같으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소식에 화수는 마치 남의 일처럼 시큰둥했다. 기가 막혔지만 됐다, 너한테 뭘 바라겠니, 하고 여설이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아.”

화수의 입이 다시 열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관두라며 몸을 돌리던 여설이 어느새 귀가 쫑긋해져서 뒷말을 기다린다. 느릿하게 화수의 입이 열렸다.

“그 연고, 효과 좋더라. 비싼 건가 봐?”

“아.”

귀한 약이긴 했다. 하지만.

“효과가 좋은 거 맞아?”

어째 그날보다 상처가 더 심해진 듯한 화수의 얼굴을 보면서 여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수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읏.

깜빡 잊고 입술을 벌렸던 화수가 눈매를 일그러트린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더듬더듬 만진 손끝에 또 붉은 피가 묻어났다.

“조심 좀 하지.”

그것을 찌푸린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 곧장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도현이었다.

“어디 봐.”

술잔을 내려놓은 진도현이 손을 내뻗었다. 턱이 당겨졌다. 찢어진 입술을 보는 진도현의 눈살도 살짝 찌푸려진다.

“약은 바르는 거야?”

상처가 꽤 깊었다. 오히려 그날보다 더 심해진 것 같은 모양새였다.

“바르는데.”

진도현의 손에서 턱을 빼내며 화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꾸 다시 찢어져.”

성가셔 죽겠다. 그 통증이 일 때마다 자동적으로 소환되는 그 얼굴도.

“이래서야 한동안 손님 받긴 힘들겠네?

“……왜?”

지금도 이렇게 손님을 받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면서 입술 끝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술잔을 홀짝이고 있던 화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진도현이 흘끔, 물기를 머금은 붉은 입술을 보며 대꾸했다.

“그 입으로 손님 물건 물긴 어려울 거 아냐.”

“아.”

그제야 화수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었는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눈 밑의 점이 짙어진다.

“뭐 한입에 쏙 들어오는 작은 물건들이 더 많아서. 그다지.”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화수에게 진도현이 다시 질문을 되돌렸다.

“리 샤오는?”

“…….”

불쑥 튀어나온 이름에 화수의 눈이 기름해졌다. 내내 시큰둥하던 눈빛이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 물건은 어때. 겉모습만큼, 대단해?”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

빙글거리는 얼굴을 화수가 가만히 응시했다. 응? 말해봐. 마주한 눈동자가 태연히 재촉해온다. 화수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재밌어하는 게 분명했다.

“대단해. 겉모습만큼이나.”

게다가 진도현은 꽤나 집요한 사내였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화수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뭐 굳이 말 안 하고 버틸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

“어. 이제 됐지?”

그러니 이 이야기는 그만두자는 듯 시선을 내린 화수가 술잔을 비웠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자신의 묘한 태도가 진도현을 자극한다는 걸 화수는 몰랐다. 진도현이 내뻗은 손이 화수의 뒷덜미를 쓸어 올렸다. 정확히는 뒷덜미에 난 울긋불긋한 자국을.

“흣.”

예기치 못한 손길에 화수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곤 이내 뒷덜미를 손으로 감싸면서 진도현을 노려본다.

“뭐 하는 거야.”

잔뜩 주름이 잡힌 미간을 느긋하게 감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저 하고 싶은 얘기만 이어가는 진도현이었다.

“꽤 집요한 유형 같던데.”

“…….”

울긋불긋한 자국이 뒷덜미에만 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도현은 잘 알고 있었다. 화수는 모르는 듯하지만 그날 화수의 등은 말 그대로 꽃이 만발한 홍매화나무였다.

“좋았어?”

“…….”

마주한 화수의 눈동자가 이채를 띄었다. 곧바로 대답을 내놓을 줄 알았던 화수가 순간 머뭇거리는 것을 진도현은 놓치지 않았다. 이상하게 입안이 말랐다.

“글쎄.”

“왜. 거친 것 좋아하잖아.”

화수답지 않은 애매한 답변에 진도현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언제나 솔직한 화수였다. 좋은 걸 좋지 않다고 내숭을 떠는 일도 없었다. 진도현이 화수를 좋아하는 부분 중 하나였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닐 테고. 물건만 대단하고 의외로 밤기술은 대단치 않은 모양이지? 그런 추측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그 순간 화수의 입에서 툭, 하고 흘러나온 말에 살짝 위로 말려 올라갔던 입꼬리가 도로 주저앉는다.

“기억이 잘 안 나.”

제가 생각해도 조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

시종일관 빙글거리던 진도현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하지만 화수의 시선은 진도현을 향해 있지 않았다. 허공을 향해 있었지만 그 공간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

“그냥, 몇 번이고,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사정했다는 것밖에는.”

“…….”

“나중엔 나올 게 없는데도 좆이 서더라. 솔직히 그땐 좀 무서웠어.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

“생각해보니, 좋진 않았던 것 같네.”

더듬더듬 기억을 더듬던 화수가 결론을 내렸다. 그 말과 표정에서 거짓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도현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한 화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참, 홍위라는 인간 집안이 망했다며? 그거 진 사장 작품-”

“언제까지 나불댈 거야?”

그제야 화수의 눈살이 살풋 찌푸려진다. 단순히 제 말을 잘라먹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살을 찌푸린 화수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왜 갑자기 불이 들어온 건데?”

“그래서 싫어?”

진도현이 화수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상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어느새 화수의 몸은 뒤로 반쯤 눕혀진 상태였다. 물론 그 위를 진도현이 올라타고 있었다. 피식, 하고 웃은 화수가 이내 눈빛을 바꾸면서 대꾸했다.

“싫을 리가요.”

진심이었다. 제게는 이 정도가 딱 좋았다. 어차피 그날 같은 정사는 두 번은 없을 터였다.

* * *

막 입구를 통과했을 때였다.

멈칫.

거짓말처럼 건물 중앙으로 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이를 발견한 화수의 걸음이 멈췄다. 이쯤 되면 운명이지 않은가. 물론 그 운명이 지독히도 악연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저벅저벅.

계단을 다 내려온 리 샤오가 화수의 정면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화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리 샤오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화수를 스쳤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이미 저만치 멀어진 리 샤오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것도 몇 번 당했다고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머리를 쓸어 올린 화수가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한 걸음 내딛기도 전에 뒤편에서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출입통제 제대로 안 하나? 개나 소나 멋대로 드나들게 두라고 경비병이 있는 건 아닐 텐데.”

“죄, 죄송합니다.”

가만히 있다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경비병이 난처해하는 것을 본 화수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제가 들어온 게 불만이시면 총감님께 말씀하시죠. 괜한 곳에 화풀이하지 마시구요.”

“…….”

그제야 드디어 마주한 눈이 새파랗게 일렁인다. 반사적으로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지만 화수는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오늘은 총감님이 부르셔서 온 거라서요.”

“…….”

이번에는 진짜 목이 베일지도 모르겠다, 흉흉한 눈을 마주하며 화수는 조금 각오를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낀 경비병만 벌벌 떨면서 리 샤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사실 그를 도와줄 의도였다면 그냥 자신은 그대로 올라가버렸어야 했다. 제 얼굴만 봐도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이니까. 그런데도 왜 뒤돌아섰을까. 또 그렇게 끼어들었으면 비위를 맞춰도 모자랄 판에 자신은 왜 굳이 이렇게 기분 나쁠 말만 골라서 해대고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저를 모르겠는 화수였다.

물론 혼란한 마음과는 달리 화수의 표정만은 태연했고, 그런 화수를 보는 리샤오의 눈빛은 흉흉했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눈빛이리라. 긴장으로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사실 실제로는 몇 초밖에 되지 않았지만 화수에게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휙.

금방이라도 제 목을 베어버릴 것 같던 리 샤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온몸을 짜부라트릴 듯 짓누르던 압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아. 화수의 입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벅저벅, 군홧발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화수가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한 걸음도 채 걷기 전에 무릎이 꺾였다.

“괜찮습니까?!”

옆에 서 있던 경비병이 황급히 손을 내뻗었지만 화수가 황급히 손을 내밀며 그것을 거부했다. 단호한 얼굴에 경비병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괜찮습니다.”

불안한 걸음이었으나 화수는 고집스럽게 제 발로 걸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조금 전 태연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표정을 감추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계단 난간을 붙잡은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무슨 기분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이가 물었다. 그의 옆을 비운 건 아주 잠깐에 불과했는데, 그 잠깐 사이에 급격히 기분이 저조해진 리 샤오에 카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에서 밖으로 내려오는 그 잠깐 사이에 이토록 기분이 나빠질 일이 뭐가 있는지 전혀 짐작도 되질 않았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라고는 하지만 분명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카이는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대기했다. 리 샤오가 자동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탁. 빠르게 문을 닫고 카이도 차에 올랐다.

카이까지 탑승을 마치자 자동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딴 얼굴로, 잘도 돌아다니고 있군.”

“누가 말입니까?”

“…….”

카이가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흘끔, 뒤를 살폈으나 창밖을 향한 리 샤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경무국장이라도 마주쳤나. 요즘 경무국에서 제3국을 경계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비웃었으면 비웃었지 고작 경무국장 때문에 저렇게 기분이 나빠질 리 샤오가 아니었다.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와중에도 자동차는 조용히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차가 거의 총독부 건물을 벗어났을 때였다.

“멈춰.”

“예?”

“멈추라고!”

명령보다 뿜어내는 패기覇氣에 운전병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동차가 멈췄다. 하지만 차가 제대로 멈춰 서기도 전에 차 뒷문이 열렸다.

“따라올 것 없어.”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따라 내리려던 카이를 멈춰 세웠다.

“들어가서 총감님만 뵙고 나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총감님은 무슨 일로, 라는 질문은 꺼내지도 못했다. 대답을 해줄 리 샤오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건물을 향하고 있었다.

걸음이 빨라졌다.

단숨에 출입구를 통과해 계단을 오를 때는 거의 뛰고 있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급히 달려가고 있는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가서 뭘 어쩔지도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그저,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 말고는 무엇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이 발길은 돌리는 것이 맞으니까. 그러나 그 건방진 얼굴이 거슬려 미칠 지경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총감실 문 앞이었다. 잠시 숨을 골랐다. 노크를 하려고 들었던 손을 도로 내렸다. 방 안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확 짜증이 치밀었다. 리 샤오가 곧장 문고리를 잡았다. 덜컥, 하고 걸릴 거라고 생각했던 문고리가 그대로 걸림 없이 돌아갔다.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방 안 풍경이 드러났다. 하지만 예상했던 광경은 아니었다.

“응? 무슨 일인가, 리 샤오 부장?”

문을 마주 보고 있는 의자에 앉아 있던 총감이 먼저 리 샤오를 발견했다. 문을 등지고 앉아 있던 화수의 고개도 천천히 꺾였다. 새까만 눈동자가 순진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리 샤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체스판을 발견한 탓이었다. 그제야 리 샤오는 자신이 화수의 깜찍한 거짓말에 놀아났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이름을 가진 이가 또 있을 리는 없고. 믿을 수 없는 기분에도 고개는 이미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분명 제가 아는 그 리 샤오였다. 깜빡깜빡. 화수의 눈꺼풀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머리가 활동을 멈춘 것같이 멍했다.

“무슨 일이냐니까?”

총감이 재차 물었다. 그제야 멀뚱히 서 있던 리 샤오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더니 화수의 팔목을 잡아 일으켰다. 별로 힘도 준 것 같지 않은데도 휙, 하고 화수의 몸이 그대로 들렸다.

“죄송합니다만, 이 녀석 좀 제가 빌려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묻는다.

“상관은 없지만, 무슨 일로.”

“확인할 것이 있어서요.”

총감의 눈에 의아한 빛이 서렸지만 리 샤오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듯 들고 있던 비숍을 내려놓는 총감에 그제야 멍하니 있던 화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감사합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리 샤오는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화수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투둑. 화수가 손에 쥐고 있던 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론 그건 총감의 퀸이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 이미 와본 적이 있는 리 샤오의 방이었다. 여기가 이런 분위기였던가. 예전이라고 해서 그리 좋은 추억이 있던 곳은 아니지만 오히려 지금에 비하면 그때가 나았던 것 같다.

고작 방 안에 들어왔을 뿐인데 이상하게 사방이 막힌 감옥에 갇힌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문 앞을 지키고 선 리 샤오 때문이리라. 지옥문 앞을 막고선 야차 같은 표정으로 리 샤오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화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확인할 것이란 게-”

“거짓말로 사람을 가지고 노니까 재밌나?”

“…….”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건방지다는 말이라면 몰라도 거짓말로 사람을 가지고 논다니. 물론 사소한 거짓말은 한 적이 있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만큼의 거짓말은 한 적이 없었다. 말 그대로 화수의 거짓말은 별것 아닌 것들에 한정이었다.

“그런 적 없는데요.”

적어도 리 샤오에게는. 오히려 리 샤오에게는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것들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오해를 받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하지만 돌아온 것은 콧방귀도 뀌지 않는 리 샤오였다.

“그런 적이 없다?”

“네.”

“뻔뻔하기까지.”

“리 샤오 부장님이야말로 생사람 잡지 마시죠.”

“총감님도 네 손님인 척 거짓말했잖아.”

“손님 맞습니다만.”

“특별한 추가금이 잔뜩 붙는 손님인 척했잖아.”

“제가 언제-”

말을 하던 화수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봬도 웬만한 젊은이보다 나으신걸요. 매번 제가 진이 빠져서 항복을 외쳐야 겨우 놔주시는-”

사실 그때 그건 화수의 잘못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일부러 열받으라고 하긴 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제 생각났나 보지?”

화수의 표정을 읽은 리 샤오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닥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항복할 화수도 아니었다.

“차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거짓말한 적은 없는데요. 전 체스 얘기를 했을 뿐인데 그걸 음란한 쪽으로 오해하신 건 리 샤오 부장님이시죠.”

하.

리 샤오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렇군.”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오히려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리 샤오를 보고 알았다.

그냥 순순히 잘못했다고 할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리 샤오가 긴 다리를 성큼 내디뎠다. 순간적으로 화수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리 샤오를 피해 뒷걸음질 치던 화수의 등 뒤로 딱딱한 것이 닿았다. 책상이었다. 책상에 가로막혀 더 이상 뒷걸음질 치지 못하는 화수의 앞을 어느새 바싹 다가선 리 샤오가 가로막았다.

흘끔. 의도한 것은 아니고 본능적으로 퇴로를 찾아 옆을 흘끔거리는 화수에 리 샤오가 두 손으로 책상을 짚어 화수를 가둔다. 바싹 다가온 체취에 화수가 그대로 굳었다. 긴장으로 입안이 바싹 말랐다. 털끝 하나 대지 않고도 리 샤오는 화수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슥.

느긋하게 고개를 숙인 리 샤오가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누구와 달리 난 음란한 손님이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등줄기가 오싹, 하고 올라붙었다.

오싹오싹.

입술에서 나온 온기가 살갗을 스칠 때마다 몸의 모든 감각이 곤두섰다. 화수가 몸을 뒤로 물렸다. 두 팔에 가둬진 상태라 도망칠 곳은 뒤쪽뿐이었다.

콱.

그러다 귓불을 물렸다. 통증보다는 찌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할짝. 뜨거운 살덩이가 물었던 곳을 핥아 올렸다. 마치 상처를 어루만지는 짐승처럼.

“흣-”

화수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츠렸다. 차라리 깨물리는 쪽이 더 나았다. 움츠린 목을 리 샤오의 입술이 더듬었다. 진득하게 훑어 올리고 쭉쭉 빨았다. 목덜미가 빨리는 느낌은 기묘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점점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납작한 배가 동그랗게 올라붙었다. 앞쪽이 간지러워 허벅지를 오므리자 그 사이로 리 샤오가 들어왔다. 그의 허벅지가 화수의 사타구니를 눌렀다.

“아읏, 응…….”

서걱한 천에 비벼진 끄트머리가 젖는 느낌이 났다. 아득한 기분에 화수가 눈을 감고 엉덩이를 뺐다. 그래 봐야 도망칠 수 없었지만 그것을 다 알면서도 화수는 늘 도망치고 싶었다. 눈앞의 사내가 화수를 그렇게 만들었다. 물론 당사자인 리 샤오가 알면 말도 안 된다고 기가 막혀하겠지만.

“안달나게 하려는 건가?”

리 샤오가 책상을 짚고 있던 손으로 화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바싹 붙은 아래가 비벼진다. 맞닿은 사타구니가 뜨끈했다. 다행히 리 샤오의 것도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안도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으려니 고개가 기울여졌다.

“이건.”

입술이 닿기 직전, 화수가 고개를 꺾었다. 살짝 스친 살갗이 불에 덴 듯이 뜨끈했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몸은 팔지만 입을 맞추는 건 거부한다, 그런 뜻은 아니었다.

“저는 여인이 아니니까요.”

아마도 습관 같은 것이리라. 평범하게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일에 더 익숙한 사내의 습관. 그리고 그것이 화수는 조금 견디기 힘들었다.

콱. 턱을 붙잡혔다. 우악스럽게 턱을 붙잡은 손이 화수의 고개를 도로 정면으로 향하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새까만 눈과 마주했다.

아.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진다. 혹시 입을 맞추려고 한 것이 아니었나? 뒤늦게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로 열이 몰렸다. 화수가 급히 사과했다.

“죄송-”

“내가.”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 샤오의 입이 열렸다.

“왜 그 말을 들어줘야 하지?”

“…….”

다행히 착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굳이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다고 얘기한 것이 어째서 하지 말라는 말이 되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흉흉해진 눈동자를 보며 화수가 쓰게 웃었다. 물론 그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으르렁거리던 리 샤오가 입술을 삼켰다. 순간적으로 지난번처럼 콱 물린다고 생각한 화수가 입술을 다물었지만 턱을 붙잡은 손에 억지로 입이 벌려졌다. 벌어진 입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사타구니가 문질러졌다. 살덩이가 더 깊이 들어왔다.

몸이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몸을 쫓아온다. 체중을 실어 미는 힘에 상체가 그대로 넘어간다.

으, 아.

뒤로 몸이 쑥 꺼지는 느낌에 화수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의외로 느껴지는 통증은 없었다. 쫓아온 리 샤오의 손이 화수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은 입맞춤이 그대로 이어진다.

집요해.

밭은 숨을 내뱉으면서 화수가 감상을 털어놓았다. 물론 그 밭은 숨마저 맞닿은 입안으로 사그라졌지만.

입맞춤은 집요했다. 각도를 달리해 몇 번이고 겹쳐졌다. 살덩이로 입안이 가득 찼다. 두 살덩이가 비벼졌다. 으깰 듯 짓이기다 엿사탕처럼 살살 굴린다. 목구멍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가 입천장을 비빈다. 등줄기가 오싹오싹거렸다. 호흡이 엉켰다. 다 삼키지 못한 침이 입안에 가득 고였다. 질척대는 소리가 더 짙어졌다. 사내를 받아들인 아래에서 나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화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마도 숨이 부족한 탓이리라.

어쩔 줄 모르고 있던 화수의 손이 리 샤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당기는 것도 밀어내는 것도 아닌 어설픈 손길이었다. 하지만 그 어설픈 손길에 입맞춤은 더 거칠어졌다.

쯕.

살덩이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민망했다. 멍하게 있으려니 지분거리던 리 샤오가 콱, 하고 도톰해진 윗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입술을 깨무는 건 버릇인 모양이었다.

“정신 차려.”

허공을 부유하던 눈의 초점이 선명해졌다. 선명해진 시야에 외꺼풀의 길고 서늘한 눈이 들어왔다. 곧게 뻗은 콧날도. 미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금방이라도 저를 꿰뚫을 듯한 날카롭고 형형한 눈동자로 경고했다.

아래가 서늘해졌다. 버클을 푼 바지가 아래로 끌어 내려지고 있었다. 아래를 본 리 샤오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왜인지는 누구보다도 화수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러고, 체스를 두러 왔단 말이지.”

바지 안은 속옷도 없이 검은 가죽 가터벨트만 착용한 상태였다. 아무리 고급 옷감으로 지어진 옷이라고 해도 겉옷은 겉옷이었다. 서걱한 천에 비벼졌던 끄트머리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새하얀 허벅지 사이에 벌겋게 달아오른 성기가 바짝 서 있는 모습은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 다른 손님을 받을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화수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다시는 리 샤오가 자신을 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제대로 갖춰 입고 나섰다. 다시는 그런 꼴로 다리를 벌리고 싶지 않았다.

“진짜, 미치겠군.”

기가 막히다는 듯 리 샤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그 광경에 발정하는 리 샤오 자신이었다. 성기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오랜 전투로 굶주렸을 때도 이렇게 발기한 적이 없었다.

제기랄. 욕설을 내뱉은 리 샤오가 제 바지 버클을 풀었다. 속옷을 뚫고 나올 듯 발기한 것을 꺼냈다. 그리고 그대로 화수의 엉덩이에 문질렀다. 구멍이 걸렸다. 입구가 부드러웠다. 그대로 밀면 제 것을 다 삼킬 것 같았다. 오물거리며 제 것을 쭉쭉 빨아들이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더 참을 수가 없어졌다.

끄트머리를 잡고 밀었다. 살짝 들어가던 것이 그대로 밀려 나왔다. 당연했다. 여자의 구멍과는 엄연히 다른 곳이니까. 계집과 할 때 멀쩡한 구멍을 두고 이곳으로 즐기는 사내들도 있다고 해서 굳이 왜 그런 짓을? 하고 의아해했었는데, 그걸 제가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구멍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냥, 넣으셔도 됩니다.”

건방진 입이 말했다. 긴 눈매가 찌푸려진다.

손가락으로 입구를 벌렸다. 쯕, 젖은 소리가 났다. 벌어진 입구에 끄트머리를 댔다. 폭, 하고 맞춰지는 살덩이를 힘을 주어 밀었다. 오므라져 있던 살덩이가 미는 힘에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으응-”

건방진 소리를 하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일단 끄트머리만 집어넣은 채로 리 샤오가 화수의 배를 눌렀다.

“힘줘.”

명령과 동시에 허리를 밀었다. 빠듯하게 안이 뚫렸다. 반사적으로 리 샤오가 시키는 대로 힘을 주었던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응……, 읏…….”

입구가 조여졌다. 하지만 리 샤오의 손가락이 입구를 벌리고 있었다. 오므라졌던 입구가 벌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리 샤오는 그대로 허리를 밀었다. 투둑, 소리를 내며 안이 확 벌어졌다.

-!!!

“하아.”

꽉꽉 조여오는 감각에 리 샤오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지만 화수는 아예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손바닥 아래 아랫배가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이 좋았다. 씨익, 하고 웃은 리 샤오가 아랫배를 다시 눌렀다.

그리고 반쯤 남은 기둥을 그대로 밀어 넣었다.

“아, 아-”

화수가 배를 누르고 있는 리 샤오의 손목을 밀었다. 사실 밀려면 리 샤오의 몸을 밀어야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몸을 압박하고 있는 건 다른 것이었지만 배를 누르고 있는 손 때문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리 샤오는 순순히 손을 뗐다. 배부른 맹수는 너그러운 법이었다. 물론 다른 배를 채울 수 있으니 그런 것이었지만.

“힉.”

구멍을 벌리고 있던 손가락도 뺐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화수의 발목을 잡았다. 허공을 부유하고 있던 두 다리를 붙잡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읏, 읏, ……아-”

안이 빡빡했다. 쫀득한 내벽이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리 샤오는 집요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잘게 흔들어 떨어트린 뒤 반쯤 뺐다가 다시 밀어 넣는다. 안이 벌어지고 내벽이 다시 조여들었다. 쭉쭉, 빠는 내벽을 다시 떨어트렸다. 끄트머리까지 쑥 뺐다가 다시 질러 넣었다.

“아아…….”

붙잡힌 발목이 바동거렸다. 그런 발목을 꽉 움켜쥔 채 다시 잡아 뺐다. 그리고 퍽, 하고 쳐올리자 아랫배가 동그랗게 올라붙었다.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어쩔 줄 모르고 다리가 벌벌 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건방진 소리를 하던 입도 신음만을 겨우 내뱉는 게 고작이었다. 짜증스럽던 기분이 옅어진다.

붙잡고 있던 발목을 어깨에 걸치게 했다. 허리를 붙잡고 빠르게 허리를 쳐올린다.

“아, 아, 으, 아, ……읏.”

퍽, 퍽, 퍽, 굵고 길쭉한 기둥이 안을 쑤시고 들락였다. 그럴 때마다 착착 달라붙던 내벽이 어느새 단단해져서 길이 나고 있었다. 엉덩이 안쪽이 질척였다.

“아니, 흣.”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화수가 처음으로 반항을 했다. 리 샤오의 손이 화수의 것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건, 됐, 응, 으응. 응-!”

화수가 헐떡이며 말했지만 리 샤오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정말 그만두길 원하면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이미 늦은 일이었지만.

“싫, 읏, 읏, 으응-, 응…….”

슥슥슥, 손안의 살덩이를 흔들면서 허리를 움직이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앞과 뒤를 모두 점령당한 상태에서 화수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흔들리고, 신음하는 것밖에는.

뒤를 뚫리면서 동시에 앞도 자극당하는 건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닮아 있었다. 좋으면서도 괴로웠다. 물론 괴로운 것과 별개로 화수의 것은 바짝 서서 줄줄 액을 흘리고 있었다.

“싫다면서, 질질 싸고 있잖아.”

벌벌 떠는 화수를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비웃듯 중얼거렸다. 화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행히 이미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어 크게 티는 나지 않았지만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화수가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왜. 부끄럽나?”

“……읏, ……읏.”

“어째서 뒤로 느끼는 것보다 앞으로 느끼는 걸 더 부끄러워하지? 보통은 반대 아닌가.”

“아, 응, 응, 아-”

물론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대답을 들을 생각이었다면 허리를 쳐올리는 것을 멈췄을 테니까.

퍽, 퍽, 퍽, 퍽, 기둥이 깊이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기둥이 안을 치고 나갈 때 거친 손이 화수의 것을 콱 움켜쥐었다. 박자가 엉망이었다. 들어올 줄 알고 잠시 숨을 멈췄을 때 앞이 문질러지고, 그 바람에 밭은 숨을 내쉬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둥이 미끄덩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호흡이 엉켰다. 아랫배가 올라붙었다. 눈앞이 하얗게, 그리고 까맣게 부서졌다.

“가, 갈, 것-”

화수가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일갈이었다.

“안 돼. 아직 가지 마.”

그럼 문지르는 손이라도 멈춰주든가.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런 제대로 된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아, 읏, 으응-”

벌어진 입에서는 밭은 숨과 한 음절로 된 신음을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눈앞으로 물기가 차올랐다. 제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이 확 꺼졌다.

제 것이 퍼드득, 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흣.”

사정으로 엉덩이가 확 조여들었다. 리 샤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 화수의 배를 적시는 하얀 정액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손안의 것이 아직도 부들부들 떨면서 사정하고 있었다.

잔뜩 조여든 엉덩이를 리 샤오가 벌렸다.

“아, 직, 잠, 깐- 아응…….”

화수가 헐떡이며 반항했지만 리 샤오는 사정 봐주지 않고 억지로 잡아 뺀 것을 쑤셔 넣었다. 벌을 주듯 여전히 사정 중인 몸으로 찔러 들어오는 감각에 화수가 진저리를 쳤지만 리 샤오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누가 멋대로 가도 된다고 했지?”

음산하게 중얼거리면서 이번엔 퍽, 하고 강하게 쳐올렸다. 그럴 때마다 화수의 것에서 찔끔찔끔 남아 있던 액이 밀려 나오듯 삐져나왔다. 손을 내뻗은 화수가 리 샤오의 팔을 붙잡았다. 사실 의도하고 붙잡은 것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행동을 신호로 리 샤오가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앗, 읏, 응, 응…….”

퍽, 퍽,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위로 딸려 올라가는 화수에 리 샤오가 그대로 상체를 숙였다. 엉덩이가 들리고 무릎이 어깨에 닿았다. 그 위로 리 샤오가 들어왔다. 위에서 아래로, 조금 전과는 다른 각도로 찍어 누르듯 들어왔다. 체중이 실린 성기는 조금 전보다 더 커진 것처럼 안을 빠듯하게 벌리며 들어왔다.

“아으으.”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쑥, 빠진 기둥은 다시 한 번 안을 찌르고 들어왔다. 푹, 푹, 푹,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각도를 달리해 마구 들어왔다. 주욱, 주욱, 젖은 귀두가 안을 긁어 올릴 때마다 엉덩이에 선명한 보조개가 생겼다.

“읏, 으, 응-!”

호흡이 엉켰다.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신음도 엉망이었다. 꼴사나운 신음이 마구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리 샤오는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허릿짓이 더 거칠고 빨라졌다. 퍽, 퍽, 퍽, 사타구니가 엉덩이를 때리듯 두들겼다. 밑이 빠질 것 같았다.

“아응-!”

흐물흐물해진 아래를 가득 채우고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간다.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리 샤오는 사정 봐주지 않고 오므라드는 엉덩이를 잡아 벌리며 다시 한 번 기둥을 쑤셔 넣었다.

흣.

낮은 신음과 함께 뜨거운 액체가 배 속을 퍽, 하고 쳤다. 벌벌 떨던 화수가 엉덩이를 조였다. 눈앞이 쑥 꺼졌다.

믿을 수 없게도 두 번째 사정이었다. 허공에 뜬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사정감으로 웅크리는 움직임을 리 샤오는 도망치려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바둥거리는 몸을 꽉 끌어안으면서 리 샤오가 화수의 입술을 찾아 벌렸다.

윗입도 아랫입도 리 샤오의 것으로 가득 찼다.

어느 곳 하나 흠뻑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

낯선 곳에서 눈을 떴던 화수가 이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더불어 몇 번의 정사 끝에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도. 대체 몇 번을 간 거야. 질린다는 표정으로 화수는 기억을 더듬다 곧 관두기로 했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던 것.

그날처럼 리 샤오는 볼일을 끝내고 가버린 모양이었다. 그나마 방바닥에 던져놓고 가지 않은 것을 고마워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불 꺼진 방 안은 어두웠다. 그럼에도 방 안 풍경은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렵지 않았는데, 그걸 화수는 자신이 어둠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밖으로 난 창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달빛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달빛 아래 가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던 리 샤오가 있었다. 어째서 이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반쯤 창문 쪽으로 향한 책상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이는 리 샤오였다.

깜빡깜빡, 화수의 눈이 깜빡였다. 혹시 아직 잠이 덜 깨서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을 몇 번을 깜빡여도 리 샤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슴이, 뛰었다.

동시에 어째서?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소리 내어 묻는 대신 화수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처음엔 단순히 눈을 감고 있는 거라 여겼다. 그러다 자신의 기척에도 전혀 움직임이 없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리 샤오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람도 잠을 자긴 하는구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웬일인지 그 당연한 일들을 리 샤오에게 대입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자신과 한 공간에서 잠을 자고 있는 리 샤오라. 조금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의 앞에서 화수의 걸음이 멈췄다. 잠든 리 샤오를 깨우려고 왔음에도 화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 깨버릴까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눈앞의 얼굴을 훑었다. 저만 보면 기분 나쁘게 찌푸려져 있던 얼굴이 조금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이게 아마도 리 샤오의 평소 표정이리라. 자신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조금은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잠든 리 샤오를 깨워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화수는 조금 욕심을 냈다. 긴 눈꺼풀과 곧게 뻗은 콧날, 일자로 닫힌 입술선, 그리고 강인한 턱 선을 화수의 시선이 차례로 훑어 내렸다. 검게 그을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깨끗한 피부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얕은 숨이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한 화수가 시선을 좀 더 아래로 끌어 내렸다.

늘 끝까지 잠가져 있던 제복 단추가 가슴께까지 풀어헤쳐져 있었다. 단단한 목선과, 그 아래로 이어진 근사한 근육까지 살짝 드러났다. 이상하게 입안이 바싹 말랐다.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는데 화수가 고개를 숙였다.

힐끗. 그렇게 끌어 내려진 시선 끝에 의자 손잡이 위에 놓인 리 샤오의 오른손이 들어왔다. 검을 잡는 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길고 유려했지만, 손등에 돋은 얕은 핏줄이 사내의 것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저 손가락이 보기와는 달리 실제로는 아주 크고, 굵다는 걸 화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손가락이 거칠게 밑을 뚫으며 들어오던 압박감을 떠올리자 아랫배가 우릿하게 앓아 내렸다. 그 바람에 화수의 눈살이 살풋 구겨졌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순간.

-!

거짓말처럼 리 샤오가 눈을 떴다.

“뭐지?”

자다 일어난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선명한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만약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잠든 척한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님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죄송합니다.”

입을 열어 해명하려던 화수가 이내 포기하고 사과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잠든 얼굴을 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쁠 판에 그런 음탕한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지금 저 무표정한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왜.”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해야 했던 모양이다.

“목이라도 조르려던 참이었나?”

담담히 묻는 말투와는 달리 내용은 무시무시했다. 화수가 황급히 고개를 내젓는다.

“그럴 리가요.”

“…….”

“전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을 텐데요. 잊으셨습니까.”

“…….”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화수를 그저 가만히 응시하고만 있던 눈동자로 툭, 하고 한마디를 던진다.

“그래?”

하지만 그렇게 되묻는 눈동자에서 경계의 빛은 전혀 없었다. 그제야 화수는 그 말이 그냥 가볍게 던진 농담에 가까운 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맥이 탁 풀렸다. 설사 그랬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여유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정작 그 가벼운 농담에 간담이 서늘해진 사람으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리 샤오가 농담 같은 걸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리 샤오가 눈매를 좁히며 느릿하게 중얼거린다.

“하는 짓만 봐서는 죽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에 더 가깝길래.”

“…….”

이번엔 완전히 농담만은 아니라는 걸 화수도 알 수 있었다. 머뭇거리던 화수가 살짝 화제를 틀었다.

“깨우지 그러셨습니까.”

깨어나는 즉시 돌아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리 샤오는 의외로 자리에 앉은 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앉은 리 샤오에게서 조금, 피곤한 기색이 느껴졌다. 요즘 정무국내 알력다툼이 치열하다는 소리를 지나가듯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미안한 마음에 화수가 중얼거리자 리 샤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그러게.”

아무래도 달빛만으로는 시야가 선명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치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리 샤오가 짓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허공을 응시하던 리 샤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왜. 뒤에 손님이라도 기다리고 있나?”

“그런 것이 아니라.”

어차피 오늘은 정무총감을 상대하는 날이라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오히려 저 때문에 리 샤오의 일정이 어그러진 것이 아닐까 싶어 한 말인데 그런 뜻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변명을 하던 화수가 이번에도 도로 입을 다물었다. 괜히 그런 말을 했다가 내가 너 같은 것 때문에 일정을 어그러트릴 사람 같냐고, 기분만 상하게 할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놓고 살짝 눈치를 살핀다.

왜 또 말을 하다 마냐고 오히려 더 기분을 상하게 한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리 샤오는 그것에 대해서는 문제 삼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조금만 더 있어. 데려다줄 테니까.”

“네?”

슥슥,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리 샤오가 중얼거린다. 사실 그가 자신을 데려다줄 거라고는, 아니, 애초에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들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저도 모르게 되물었지만 리 샤오는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심심하면 꽃구경이라도 하든지. 좋아하잖아?”

“아.”

까딱이는 고갯짓에 화수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창 쪽으로 향했다.

활짝 열린 창 너머로 분홍빛의 물결이 보였다. 얼마 전 봤을 때만 해도 아직 다 피지 않은 꽃봉오리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굵은 가지 잔가지 할 것 없이 사람 주먹만 한 꽃송이가 한 치의 틈도 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잔가지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어질 정도였다. 이미 떨어진 잎이 나무 주변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뒤임에도 그랬다.

그런데,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나?

문득 의문이 일었지만 화수는 입을 열어 묻지 않았다. 겨우 찾아온 작은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다. 아예 방향을 틀어 창에 바싹 다가섰다. 바람이 일었다. 화수가 눈을 감았다. 살짝 낮아진 밤공기에 꽃내음이 섞여 있었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때였다. 뒤편에서 조금 낮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보러 와도 좋아.”

“……네?”

하필 그 순간 다시 한 번 바람이 일었다. 머리가 흐트러질 만큼 강한 바람이었다. 물속에 빠진 것처럼 숨이 차는 기분에 어깨를 부풀렸던 화수가 뒤늦게 고개를 꺾었다.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멍한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리 샤오가 눈매를 찌푸리며 제안을 거두었다. 아마도 그런 화수의 반응을 거절이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내키지 않으면 관두고.”

“아뇨. 아니요. 좋아요. 좋습니다.”

화수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심지어 몇 걸음 리 샤오를 향해 다가갔다. 그만큼 다급했다.

“갑작스러워서 그렇지, 내키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

답지 않게 변명이 길었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노력에도 리 샤오는 아무 말이 없었다. 표정도 무표정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을 바라보며 화수는 잠시 대기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와도, 될까요?”

대답을 기다리다가는 말라 죽을 것 같은 기분에 화수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이게 뭐라고 배가 다 앓아 내렸다. 다행히 굳게 닫혔던 리 샤오의 입이 열렸다.

“뭐, 꽃이 남아 있는 한은.”

“…….”

태연한 척했지만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 없었다.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알겠다고 해야 하나, 대답을 고르고 있던 차에 아, 하고 리 샤오가 조건을 붙였다.

“물론 아무도 없을 때 숨어드는 건 안 돼.”

“네. 명심하지요.”

그건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았다. 화수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꼬리가 아래로 향했고 눈 아래 점이 짙어졌다.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서 짓는 미소였다. 하지만 그것이 리 샤오의 기분을 거슬렸을까.

“늘 그런 식으로.”

“……네?”

답지 않게 리 샤오가 말을 하다 멈췄다. 잠시 기다리던 화수가 되물었지만 이번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깜빡깜빡.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눈을 깜빡이면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리 샤오가 불쑥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자신에 대해 리 샤오가 궁금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화수가 긴장해서 허리를 바짝 세웠다. 묘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기대를 박살내듯 리 샤오의 질문이 이어졌다.

“매번 그렇게 먼저 싸버리면 손님들이 싫어하지 않나?”

“…….”

“오히려 돈은 내가 받아야 할 것 같던데.”

“…….”

반짝이던 화수의 눈동자가 천천히 흐릿해졌다. 하지만 화수의 입꼬리는 반사적으로 위를 향했다. 마른침을 삼키는 화수의 목울대가 들썩였다. 눈꺼풀이 느리게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말려 올라간다. 그렇게 다시 드러난 눈동자는 평소의 말끔한 눈동자로 돌아가 있었다. 그 반질한 눈동자로 대꾸했다.

“그런 착각을 하시는 걸 좋아하시거든요. 손님들은.”

“…….”

풀어 쓰면, 그것 역시 손님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한 연기였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착각에 빠진 손님들에 리 샤오도 포함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조롱에 가까운 그 말의 뜻을 모를 리 없는 리 샤오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험악해졌다.

하지만 화수는 이미 벗어두었던 가면을 뒤집어쓴 상태였다. 이 가면을 쓴 화수는 결코 상처받는 법이 없었다. 접힌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그 웃음과 반대로 리 샤오의 미간의 주름은 더 깊어졌다.

“너-”

똑똑.

못마땅한 표정의 리 샤오가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던 그 순간.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하필 말을 하려던 그 순간에 방해받은 것이 짜증스러웠던지 되묻는 리 샤오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카입니다.”

문밖에서도 멈칫한 기색이 느껴졌다. 카이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리 샤오는 카이를 건물밖에 대기시켜놓았다는 걸 깨달았다. 기가 막히게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잊고 있을 수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까맣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문밖에서 다시 질문이 되돌아왔다.

“괜찮으십니까?”

많은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묻고 싶은 바는 많겠지만 대답이 돌아올 만한 질문만 한 것이었다. 역시나 리 샤오를 잘 알고 있는 카이였다.

“괜찮아.”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리 샤오가 대꾸했다.

“그럼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니.”

뒤돌아서는 발걸음을 리 샤오가 붙잡았다. 문에서 멀어지던 걸음이 멈췄다.

화수는 당연히 리 샤오가 이대로 일어나 혼자 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데려다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건 조금 전 평화로웠을 때 이야기고, 건방진 소리를 해대는 자신을 굳이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돌아가.”

하지만 다음 순간 리 샤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난 좀 더 있다 돌아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건 카이도 마찬가지였던지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물론 이유를 되묻는 일은 없었다. 대신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그럼 차는 두고 가지요.”

리 샤오도 거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로 발소리가 문에서 멀어졌다. 방 안에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눈이 마주쳤다. 눈치를 살피던 화수가 슬그머니 물었다.

“혹시, 저 오늘 못 돌아갑니까?”

이대로 묻어버리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굳이 리 샤오가 남아 있을 일이 뭐가 있나 싶어 불안하긴 했다. 그런 화수를 향해 리 샤오가 대꾸했다.

“왜. 겁은 나는 모양이지?”

“…….”

화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나마 그렇게 되묻는 리 샤오의 표정이 그리 험악하진 않았다. 확실히 조금 전 얇은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감은 사라진 뒤였다. 카이가 아주 적절한 순간에 끼어들어준 덕분이었다. 물론 본인은 자신이 무슨 도움을 주었는지 전혀 모를 테지만.

“꽃구경한 뒤에 데려다준다고 했잖아.”

리 샤오가 설명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 가볍게 툭, 하고 답을 던졌다. 화수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어쩐지 제 기억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걸고넘어질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하지만 화수의 애매한 표정을 오해했는지 리 샤오가 덧붙인다.

“그냥 돌아가고 싶으면 일어나고.”

“…….”

화수가 대답 대신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발길이 향한 곳은 창가였다.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화수는 앞만 보고 걸었다. 맨발로 걸어간 화수가 반쯤 열린 창문을 활짝 다 열었다.

볼에 닿는 바람이 서늘했다. 하지만 화수는 고집스럽게 창가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이 물러서는 순간 이 짧은 꽃놀이가 끝이 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눈송이처럼 연분홍빛의 꽃잎이 흩날렸다.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사실 화수는 그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화수의 모든 신경은 온통 뒤쪽을 향해 있었다.

시선. 숨소리. 살짝씩 움직일 때마다 나는 옷감이 스치는 소리.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숨은 어떻게 쉬는 것이었더라. 너무 당연히 해오던 것까지 엉켰다.

“추워?”

“힉.”

그런 것에 정신이 팔려 리 샤오가 바로 뒤에 온 사실도 몰랐다. 불쑥- 머리 위에서 내려온 낮은 목소리에 놀란 화수가 숨을 들이켰다. 어깨를 움츠린 채 천천히 고개를 틀자 곧바로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쳤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와 있었던 거지? 라는 의문은 차치하고.

“아뇨. 안 추운데요.”

화수는 황급히 변명부터 했다. 하지만 리 샤오의 표정은 더 무표정해졌을 뿐이다. 그러더니 휙, 하고 발길을 돌린다. 화수의 눈매가 살풋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어깨를 늘어트리려는 순간.

툭.

화수의 어깨 위로 묵직한 것이 덮였다. 리 샤오의 코트였다. 돌아가려던 게 아니라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코트를 가지러 갔던 모양이었다. 후끈하게 몸을 감싸는 온기에 그제야 화수도 제 몸의 체온이 많이 떨어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은데.”

멋쩍어진 화수가 중얼거리자 곧바로 차가운 일갈이 쏟아졌다.

“별것도 아닌 일로 짜증나게 하지 마.”

“…….”

화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변명을 해봐야 기분만 상하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았다.

그 때였다. 찌푸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손을 내뻗었다. 순간적으로 화수가 몸을 움츠렸다.

“뭐야.”

사실 맞을까 봐, 겁을 집어먹었다기보다는 갑자기 커다란 손이 다가오니 반사적으로 움츠러든 것뿐이었다. 실제, 목이 졸린 적도 있었고. 하지만 정작 리 샤오는 그런 화수의 반응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내가 때리려는 줄 안 건가?”

“…….”

기가 막히다는 듯 묻는 리 샤오에 화수는 그저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리 샤오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오히려 화수의 어깨가 조금 전보다 더 움츠러들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눈치를 살피고 있으려니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이 천천히 다시 움직였다. 얼굴에는 기막히고 짜증난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손은 최대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위험하지 않으니 놀라지 말라는 듯. 괜스레 화수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그렇게 다가온 손가락이 화수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리고 다시 뒤로 물러선다.

“아.”

그렇게 물러나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하얀 꽃잎. 그것을 보는 순간 화수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조금 전 불어온 바람에 섞여 들어온 꽃잎이 머리에 붙어 있었고, 그 꽃잎을 리 샤오가 떼어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친절을 무려 때리려는 것으로 오해했으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전적이 있다고는 하나 사실 그때 목이 졸렸을 때 말고는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는 리 샤오였다. 심지어 이건 제가 생각해도 너무 건방지게 굴었다 싶었을 때조차도 맞지는 않았다. 아마 리 샤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워낙 위협적이라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걸로 변명이 되진 않는다.

“죄송합니다.”

얼굴을 찌푸린 화수가 순순히 사과했다. 하지만 리 샤오의 못마땅한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눈치를 살피던 화수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기분이 풀리시겠습니까.”

다른 이라면 물건을 빨아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지만, 천하의 화수도 눈앞의 사내의 기분을 푸는 방법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항복선언을 하듯 묻는 화수에 리 샤오가 불쑥, 다시 입을 열었다.

“웃어봐.”

“네?”

“웃어보라고.”

“…….”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내였다. 미간을 살풋 찌푸린 화수가 되물었다. 무슨 질 나쁜 장난인가 했지만.

“그거면, 정말 기분이 풀리시겠습니까?”

“해봐.”

아예 본격적으로 보겠다는 듯 한 발 뒤로 물러서기까지는 하는 리 샤오에 화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표정을 갈무리한 화수가 평소처럼 눈을 반달로 접어 눈꼬리를 내렸다. 눈 밑의 점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그렇게 말고.”

하지만 그리 쉽게 끝낼 리 샤오가 아니었다.

“네?”

“조금 전에 웃었던 것처럼 웃어봐.”

모호하기 짝이 없는 리 샤오의 주문에 화수가 되물었다.

“제가, 어떻게 웃었는데요?”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이.”

“…….”

차라리 물건을 빠는 쪽이 더 쉬울 것 같았다. 화수가 대꾸했다.

“지금도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이 웃고 있는 건데요.”

“…….”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경련이 날 정도로 웃고 있는데,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화수의 노력에도 리 샤오는 좀처럼 만족하지 못했다.

“관둬.”

얼굴을 찌푸리며 아예 고개까지 돌려버리는 리 샤오에 화수가 한껏 끌어 올렸던 입꼬리가 도로 내려갔다. 하여간 성격이 나빴다.

“차라리 빨아드릴까요?”

화수가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면서 물었다. 물끄러미 보던 리 샤오가 대답했다.

“상관은 없지만, 빠는 것만으로는 안 끝날 텐데, 괜찮겠어?”

“…….”

흥분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어투였지만 리 샤오가 결코 빈말은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화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머리 위에서 얕은 바람이 일었다.

그가 주문한 웃음은 웃지 못했지만 적어도 기분은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 * *

어?

문을 나서던 화수가 멈칫했다. 뒤이어 표정 없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번진다. 그러느라 멈춰 있는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진도현이 다가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화수를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민다. 물론 그 손을 물끄러미 보기만 하는 화수에 진도현이 알았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부터 했다.

“오늘 약방에 가는 날이잖아?”

“기억력도 좋으시네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데려다주지 않았던가? 물론 그땐 유곽에 있다가 나가는 길에 태워준 것이지만. 하지만 그런 화수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우리 화수라면 각별하잖아? 마침 지나는 길이기도 하고, 그 김에 데려가서 우리 화수 맛있는 거 좀 먹이려고 들렀지. 요즘 너무 마른 거 같아서.”

“퍽 한가하신가 봅니다?”

“무슨 섭섭한 소릴. 바쁜 시간 일부러 쪼개서 온 사람에게.”

“네네. 아주 눈물 나게 고맙네요.”

건성으로 대꾸하는 화수에도 진도현은 전혀 기분이 상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다. 저 괴롭히는 재미로 부러 바쁜 시간 쪼개서 온 것이 분명했다.

“따라올 것 없어. 내가 잘 데려갔다가 얌전히 이 자리에 갖다놓을 테니까.”

화수의 뒤에 서 있던 류를 향해 진도현이 말했다. 류는 돌아서지는 않았지만 걸음을 내딛지도 않았다. 화수가 흘낏 고개를 돌려 말했다.

“잘됐네. 오늘은 나 말고 진짜 아가씨들 호위를 해.”

도성은 올해도 춘분절 축제가 한창이었다. 덕분에 축제를 즐기러 나갈 준비를 하는 이들로 유곽이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노는 꼴을 못 보는 한조조차도 춘분절 축제에 가는 건 허락해주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노는 기회를 버릴 이들도 아니고 무엇보다 축제라는 말이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건 만국 공통이었다. 물론 그저 내 방 툇마루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게 훨씬 더 즐거운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모르긴 몰라도 류도 그런 재미없는 꽃놀이보다는 제대로 된 것을 더 좋아할 터였다. 그럴 나이기도 했고. 어깨를 으쓱인 화수가 타박타박 걸음을 옮긴다. 기다렸다는 듯 진도현이 문을 열어준다.

“타실까요?”

빙글거리는 얼굴을 향해 미간을 찌푸려준 뒤 화수가 차에 올라탔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바쁜 시간 쪼개서 왔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지 차에 오른 진도현은 잠깐만이라고 하고서는 오는 내내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차피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는 사이도 아니라 오히려 화수는 편했다.

“장터 고기 국수.”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화수가 툭, 하고 대답을 내놓았다.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진도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별일이네. 제가 묻기는 했지만 사실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화수는 뭔가를 먹고 싶다고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입 자체가 짧기도 했고 먹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 화수가 무려 장터 고기 국수가 먹고 싶다니. 진도현으로서는 신기할 수밖에.

“그게 왜 갑자기 먹고 싶은데?”

눈동자까지 반짝이는 진도현에 뒤늦게 화수도 볼을 긁적이며 중얼거린다.

“글쎄. 갑자기 생각이 나네. 안 내키면 꼭 안 먹어도 돼.”

“안 내켜도 먹으러 가야지. 무려 우리 화수가 갑자기 먹고 싶어진 것인데.”

“그렇게 먹고 싶은 건 아니라니까.”

투덜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관두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정말 먹고 싶은 모양이네. 진도현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런데 네가 국수 좋아했던가?”

“……아니.”

국수라면 질색이었다. 배곯던 시절에 퉁퉁 불은 국수로 겨우 허기를 채우던 기억 때문에 밀가루 국수는 생각만으로도 신물이 올라왔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게 먹고 싶어졌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차가 멈춰 섰기 때문이다. 약방 입구, 바로 앞이었다.

“들어갔다 나와.”

“같이 안 들어가?”

막 문을 열고 내리던 화수가 멈칫한다. 진도현이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집어 들었다.

“난 이거 좀 검토해야 해서.”

“…….”

“왜. 우리 화수 혼자 못 가겠어요? 아빠가 따라가줄까요?”

“…….”

정말로 바쁜 와중에 저 태워주겠다고 온 건가 싶어,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정작 저런 시답지 않은 소리를 지껄인다. 얼굴을 확 일그러트린 화수가 대꾸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탁. 신경질적으로 닫히는 차 문틈으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삐져나왔다. 무슨 걱정을 한 것인가 싶었다. 세상 한가한 사내가 진도현인데.

“어쩌지?”

평소 늘 하던 대로 약을 타서 나온 화수에게 진도현이 다가왔다. 진도현답지 않게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급히 가봐야 할 일이 생겼어.”

자동차 옆에 선 이는 진 사장의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그가 직접 진 사장을 찾아오기까지 한 것을 보니 어지간히 급박한 일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화수는 묻지 않았다. 사정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안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일도 없으니까.

“괜찮아. 가봐.”

굳이 기다릴 것도 없었는데. 지금도 초조하게 자신과 진도현을 보고 있는 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도 제가 나오길 기다린 모양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데려다주지 않아도?”

피식. 화수가 웃었다.

“애도 아니고 혼자 집도 못 찾아갈까 봐? 걱정 말고 가세요.”

“인력거 잡아줄게.”

평소 같으면 우리 애기는 혼자 못 가잖아, 라며 장난을 칠 진도현이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핀다.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일도 아니었다. 그리 중요한 약속도 아니고. 그럼에도 미안해하는 진도현을 보니 조금 기분이 묘했다. 짜증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제게 다정한 사내였다. 하지만 태생이 다정하지 못한 화수는 마음과 달리 내뱉는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여긴 안 잡히지. 큰길이면 모를까.”

큰길에서 많이 떨어진 곳이라 인적도 드물었다. 보통 인력거를 타고 올 때면 기다리라고 하고 볼일을 보곤 했다.

“그럼 타. 큰길까지 태워줄 테니까.”

“됐어. 조금 가다 보면 있겠지. 내 걱정은 그만하시고, 진 사장이나 빨리 타고 가시죠? 직원분 아주 애가 타 죽습니다.”

“정말 괜찮겠어?”

“…….”

연신 묻는 진도현에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적당히 하고 가시죠? 눈빛을 읽은 진도현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걸음을 옮긴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기도 했고.

“저녁에 들를게.”

그래도 마지막까지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시든가요. 열린 창문을 향해 중얼거린 화수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차가 단숨에 속도를 높였다. 뿌연 흙먼지가 일었다. 뿌연 먼지를 손으로 휘휘 저으며 화수도 걸음을 내디뎠다.

멈칫.

하지만 이내 내딛던 걸음이 멈춘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 얼굴에 스쳤다. 선 채로 고민하던 화수가 이내 방향을 틀었다. 조금 전 가려던 방향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비켜요, 비켜!”

축제 기간이라는 걸 깜빡했다. 보통 때에도 혼잡한 상점가는 축제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게다가 설상가상 가뜩이나 좁은 길에 짐을 잔뜩 실은 수레까지. 화수가 황급히 길 바깥쪽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수레와 사람들을 신경 쓰느라 정작 마주 오던 아이를 보지 못했다.

“윽.”

화수의 배에 머리를 갖다 박은 아이가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저도 배를 맞았지만 화수의 신경은 넘어진 아이에게 있었다. 급히 상체를 숙인 화수가 아이를 향해 물었다.

“괜찮니?”

“…….”

하지만 정작 넘어진 아이는 대답 없이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달려가버린다. 제 차림이 좋은 것을 보고 겁을 먹었나. 붙잡을 새도 없이 말 그대로 후다닥,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아이를 멍하니 보고 있던 화수가 슬그머니 아랫배를 문질렀다. 놀라서 느껴지지 않던 통증이 그제야 느껴졌던 것.

우릿한 배를 문지르던 화수가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배를 문지르다 보니 제가 이곳을 온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수의 걸음이 빨라졌다. 조금 전 아이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

화수의 시선이 멈췄다. 사실 눈앞의 가게는 가게라기에는 비루한 지붕만 겨우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공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리마다 사람은 바글바글했다. 싼값에 간단히 배를 채우기에 국수만큼 만만한 것이 없었고 무엇보다 저만치서부터 맡아지는 고기 국물 냄새가 사람들의 발길을 절로 잡았다. 물론 화수는 애초에 제 발로 온 것이었지만.

“혼자 왔어요?”

사람으로 바글바글한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막 손님이 빠져나간 자리를 대충 행주로 훔친 여인이 화수를 향해 물었다.

“네? 아, 네.”

여인이 조금 전 대충 닦은 자리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그럼 여기 앉으세요.”

어찌 보면 다행한 일이었지만 하필이면 그 자리가 사람들이 한 줄로 쭉 앉아 있는 맨 안쪽 자리였다. 조금 망설이는 듯하던 화수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힐끔힐끔. 화수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좁은 길을 비집고 들어가는 상황이라 자연스럽게 그리되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모가 컸다. 한눈에 봐도 귀한 집 도련님 같은 사내가 이런 허름한 가게 구석을 기어들어가고 있으니 시선이 안 몰리려야 안 몰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화수에게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시선이 몰리는 일 같은 건 화수에게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평범한 시선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뭐로 드릴까요?”

힘겹게 자리에 앉기 무섭게 질문이 돌아왔다.

“국수요.”

화수가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두 냥이요.”

“아.”

이어지는 여인의 말에 화수가 평범하게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움직임이 그대로 굳었다. 화수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진다.

“왜 그러슈?”

양복 안주머니 속에 있어야 할 지갑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바지 주머니와 바깥 주머니도 뒤적였지만 분명 안주머니 속에 두었던 지갑이 그곳에서 나올 리 없었다.

“아니, 지갑이.”

머뭇거리며 중얼거리는 화수에 여인이 단박에 얼굴을 굳히면서 쐐기를 박았다.

“여긴 외상 같은 거 안 돼요.”

잘 차려입은 거지였구만. 그런 표정이었다. 사람이 많은 시장통에서는 의외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뇨, 죄송합니다. 나중에, 다시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화수가 다시 한 번 사람들 틈새를 비집는다. 이번엔 아까 전과는 조금 결이 다른 시선이 화수를 향했다.

쯧,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그런 중얼거림도 뒤꼭지에서 들려왔다. 귀까지 벌겋게 물들인 화수가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왔다.

우뚝.

한참을 앞만 보고 걷던 화수의 걸음이 이내 멈췄다. 무의식적으로 안주머니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빈 주머니를 확인하다 뒤늦게 뭔가를 깨달았다.

그 망할 꼬마 녀석.

조금 전 제 배에 머리를 갖다 박았던 그 녀석이 깜찍하게도 소매치기였던 모양이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축제 인파 속에는 으레 그런 녀석들이 끼어들어 있다는 걸 깜빡했다. 평소라면 이리 혼잡한 길을 저 혼자서 돌아다닐 일이 없는 터라 방심하고 있다 당하고 말았다. 화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짜증나.

사실 별일도 아니었다. 지갑에 든 돈 정도야 구걸하는 아이가 달라고 해도 선뜻 줄 수 있는 화수였다. 다만 문제는 지금 저 고기 국수가 너무 먹고 싶다는 거였다. 물론 돌아가서 돈을 가지고 와 사 먹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되돌아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일었다.

이게 뭐라고. 이제 이 정도는 몇 그릇, 아니 수십 그릇은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있는데. 그런데 정작 먹고 싶을 때 먹을 수가 없다니 짜증이 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금 배가 고픈가 싶던 것이 급격히 고파졌다. 허기가 느껴지자 서러운 기분이 몰려왔다.

아, 진짜 왜 이래.

스스로도 조금 이해할 수 없는 감정 기복이었다.

애도 아니고. 기껏 이걸 못 먹는다고 울고 싶어지다니. 아예 못 먹는 것도 아니었다. 돌아가서 돈만 가져오면 먹을 수도 있는데. 아니, 애초에 자신이 왜 이런 비루한 음식을 먹겠다고 이러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곽에 차고 넘치는 게 고급 요리였다. 그럼에도. 머리로는 그런 것을 다 알면서도 화수는 서러웠다. 서러워서 울고 싶었다.

걸음을 내디뎠다. 뭐 훔쳐서 먹을 수도 없으니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터덜터덜 발길을 돌리는 화수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평소라면 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했을 테지만 지금 화수의 머릿속에는 뜨끈한 고기 국수밖에 없었다. 휙. 붙잡힌 어깨가 돌려졌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사람을 보고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던 화수의 눈이 커졌다. 화수를 돌려세운 이의 동공 역시 조금 커졌다. 하지만 이내 눈매가 기름해진다.

“무슨 일이야.”

리 샤오가 물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낮고 날이 선 어조. 하지만 대답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화수에 리 샤오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무슨 일인지 말하라잖아!”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 독한 녀석이 눈물을 다 흘리고 있나, 불안과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해 언성을 높이는 리 샤오에 화수가 꾹 닫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돈 좀 있으세요?”

툭.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기, 국수 두 그릇이요.”

탁. 탁. 국수가 가득 든 그릇이 두 사람의 앞에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그릇을 보고만 있자 팔짱을 끼고 있던 리 샤오가 툭, 하고 한마디 던진다.

“안 먹어? 눈물까지 뚝뚝 흘릴 정도로 먹고 싶었던 거잖아?”

“…….”

진도현의 놀리는 말투가 이토록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반박할 말이 한마디도 없었던 화수가 무릎 위에 얌전히 놓아두었던 손을 들어 작은 통에 가득 채워진 나무젓가락을 하나 꺼냈다. 그것을 쪼개어 리 샤오에게 내밀자 그가 말없이 젓가락을 노려본다. 괜한 짓이었나. 화수가 슬그머니 손을 뒤로 물리려고 할 때였다.

턱.

내뻗어진 손이 젓가락을 가져간다. 그러더니 그것을 서로 비볐다. 나무젓가락에 붙어 있던 잔가시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 사람도 이런 걸 아네. 심지어 알고 있었지만 잊어버린 저도 있는데. 화수가 볼을 긁적이고 있으려니 이내 잘 비벼진 젓가락이 화수의 그릇에 꽂혔다.

슥.

그릇이 화수의 앞으로 좀 더 밀어졌다.

“먹어.”

눈치를 보던 화수가 리 샤오의 명령에 슬그머니 젓가락을 집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를 젓가락을 헤집어 풀고, 이내 크게 한 젓가락 집어 올렸다. 갓 삶은 탱글탱글한 면발이 젓가락 위에 걸쳐져 있었다. 후후, 화수가 대충 바람을 불어 면을 식혔다. 급한 마음에 그 잠깐도 안달이 났다. 입술을 살짝 대보고 괜찮겠다 싶어 면발을 한가득 입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다 식지 않아 뜨거워서도, 너무 많이 욱여넣어서도 아니었다.

토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스스로가 믿을 수 없어서 두어 번 더 우걱우걱 씹었다. 그러자 확실해졌다. 진짜 토할 것 같았다.

미치겠네.

먹고 싶어서, 이 국수를 못 먹는 상황이 너무 서러워서 다 큰 사내가 길가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입안에 국수를 집어넣자마자 확 비위가 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생난리를 다 부려서 얻어먹는 국수에 토할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없는 터라 입에 문 채 잠시 굳어 있던 화수가 눈을 딱 감고 그것을 삼키려고 할 때였다.

“뱉어.”

어떻게 알았지? 그런 의문보다는 본능이 더 강했다.

왝.

불쑥 앞으로 내밀어진 빈 그릇에 화수가 입안에 물고 있던 것을 뱉었다. 입안에 있던 것을 뱉어내고 나자 그나마 살 것 같았다. 물론 다른 의미의 목숨이 위험한듯했지만. 기가 막히다는 눈빛에 화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이고. 먹는 음식 가지고 이게 다 뭐 하는 짓이래.”

어디서 난 그릇인가 했더니 옆자리의 손님이 먹고 난 그릇이었던 모양이다. 자리를 정리하러 왔던 여인이 얼굴을 찌푸린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음식점 주인에게는 실례되는 행동임에는 분명했다. 화수가 급히 사과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미안-”

탁.

화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무 탁자 위에 은전 두 개가 놓였다. 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면 충분한가?”

“아, 물론이죠. 충분하다마다요.”

충분하다는 말로 퉁치기엔 지나치게 큰돈이었지만 화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큼 은전 두 개를 앞치마에 집어넣는 여인에 화수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

그렇게 말한 리 샤오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물론 다 먹기는커녕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화수 역시 황급히 그를 따라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그래도 잘 먹었다는 인사는 잊지 않았다.

< 2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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