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멈칫.
혼잡한 가게를 빠져나온 화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이내 멈칫한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리 샤오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버린 게 아니었나.
가버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사실 평범하게 인사하고 헤어질 사이도 아니니까. 애초에 이런 허름한 식당에 사이좋게 마주 앉아 있었던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국수 사 먹고 싶은데 돈이 없다, 라는 말에 미친놈 보듯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그대로 발길을 돌려 걸어가버릴 때만 해도 그냥 가버리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멈춘 발소리 사이로 들려온 가게가 어디냐는 물음에 푹 숙였던 화수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그때 그냥 돈만 빌려주면 된다고 할걸. 괜히 함께 와서 못 보일 꼴만 잔뜩 보였다. 뭐 이전이라고 그리 좋은 꼴을 보였던 것도 아니지만.
“죄송합니다.”
터벅터벅, 걸어온 화수가 사과부터 했다.
“뭐가?”
되묻는 리 샤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문제는 이 무표정이 정말 그런 것쯤 아무렇지 않아서 짓는 건지, 너무 기가 막혀서 짓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주신 건데…….”
“빌려달라던 거 아니었나?”
“아, 물론 돌려드릴 건데.”
“그럼 상관없잖아.”
의외로 전자였던 모양. 하긴, 조금 전 제가 돈 빌려달라고 할 때 짓던 표정에 비하면 이건 아주 다정한 축에 속했다.
“그럼. 감사했습니다. 돈은 나중에 보내드리죠.”
네 돈으로 사 먹은 거 뱉든 말든 내게 사과할 필요는 없다는 딱 자른 말을 듣고 나니 더는 말을 붙일 여력이 없었다. 무엇보다 기운이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열 그릇은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작 한 입도 먹지 못하고 나온 터라 배가 고팠다. 하지만 다시 뭔가를 먹을 생각은 나지 않았다. 입안에 남은 고깃국 냄새에 속이 니글거렸다.
“안 가?”
조금 전 배를 부딪쳤던 게 문제인가. 멍하니 배를 문지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내려왔다. 화수가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제가 물을 말이었다. 님이 가셔야 제가 가죠. 건방지게 제가 먼저 돌아설 수는 없잖은가. 물론 그를 입 밖으로 말할 순 없으니 그저 가만히 리 샤오를 올려다보는 게 고작이었지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리 샤오는 미동도 없었다. 아. 안 가냐는 말이 묻는 게 아니라 안 꺼지고 뭐 하고 있냐, 라는 의미였나? 잠시 대치하고 있던 화수가 뒤늦게 깨달았다.
“그럼.”
“차는 이쪽이야.”
하지만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려고 할 때였다. 리 샤오가 까딱 고갯짓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설마.
“태워주시려고요?”
“돈 없는 거 아니었나?”
물으면서도 확신은 없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라는 핀잔이 돌아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돌아온 대답은 오히려 순순했다. 얼떨떨한 기분에 잠시 멍하게 있는 화수에게 리 샤오가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걸어가는 게 편하다면-”
“고맙습니다.”
사실 리 샤오의 생각과 달리 일단 인력거를 잡아타고 유곽에서 돈을 받아 주면 되는 터라 굳이 아쉬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화수는 조용히 고맙다는 인사로 긍정의 뜻을 비쳤다. 그 바람에 하려던 말이 잘렸으나 리 샤오는 별다른 지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발의 방향을 틀어 걸었을 뿐. 따라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화수의 걸음도 그 뒤를 따랐다.
그사이 거리는 더 혼잡해져 있었다. 해가 지면 폭죽을 터트리는 행사가 있을 예정이라 슬슬 거리로 나온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펑, 펑. 벌써부터 폭죽을 터트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나고 있었다.
앗.
여느 축제가 그러하듯 안 그래도 좁은 길에 멋대로 좌판을 펼친 장사치로 길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필 길 양쪽에 좌판이 열려 그 물건을 구경하는 인파로 점점 길이 침범되어 아예 길이 없어진 곳도 생겼다. 물론 그런 혼잡함 속에서도 전혀 앞을 가로막히지 않고 걸어가는 리 샤오와 달리 화수는 뒷걸음질 치던 이에게 발이 밟혔다.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사나운 날인 모양이었다. 발등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지만 화수의 시선은 앞을 향했다. 잠시 머뭇거린 것뿐인데, 앞서서 가던 이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발등이 밟혔을 때보다 화수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물론 자각하지는 못했다.
낑낑대며 인파를 헤쳤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화수의 몸은 뒤로 밀렸다. 초조한 기분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화수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틈을 찾아 헤맸다. 제대로 앞으로 나가고 있는 건지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화수는 고집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 때였다.
턱. 불쑥 빈 공간 사이로-그 사이에 빈 공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들어온 손이 화수의 손목을 붙잡았다. 낯선 손길이었지만 화수는 그것을 뿌리치지 않았다. 크고 단단한 손의 감촉으로 주인을 알아차리기 전에 화수는 이미 코끝에 닿는 달큰한 향을 맡았다. 본능적으로 그 손을 꽉 붙들자 그대로 확 몸이 딸려 나간다.
제가 빠져나가려고 할 때는 늪에 빠진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던 몸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그곳을 벗어났다. 물론 그곳을 벗어나기 무섭게 이번엔 저를 기가 막히다는 듯 내려다보는 눈빛에 숨이 콱, 막혀왔지만.
“뒤따라오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군.”
“……죄송합니다.”
이번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화수는 조용히 사과를 했다. 리 샤오 역시 아주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굳게 닫혔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비교적 간단한 통보였다.
“저리로 가지.”
리 샤오가 향한 곳은 길의 좌측으로 빠지는 좁은 샛길이었다. 아마도 차는 이 길의 끝에 난 큰길에 있을 테니 그 길로 가면 돌아가야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화수는 그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 리 샤오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앞으로 펼쳐진 혼잡한 길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조금 돌아가는 길이라도 한적한 쪽이 나을 듯했다. 조금 전처럼 사람들 사이에 갇히는 건 사양이었다.
“앞장서.”
리 샤오가 말했다. 흐트러진 옷자락을 펴고 있던 화수가 머뭇거리다 걸음을 내디뎠다. 발소리가 바싹 붙는다. 아마 조금 전처럼 놓치는 일이 없도록 나름 배려해주는 것이겠지만 화수로서는 그게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뒤꼭지가 따끔거렸다. 걸음도 뭔가 어색했다. 사실 걷는 것을 한 번도 의식한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한번 의식하니 자연스럽게 걷는 게 의외로 어려웠다. 자꾸만 박자가 엉키는 데다 아무렇지도 않게 흔들던 팔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제 몸인데, 제 몸이 아닌 느낌. 결국 화수가 어깨를 주저앉히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휙, 하고 뒤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옆에, 서서 가면 안 될까요?”
사실 나란히 서서 간다는 것도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지만 앞서서 가는 것보다는 나을 듯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화수를 응시한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그런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화수는 그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안 된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뭐. 다소 멋대로 여기며.
탁탁탁.
세 걸음으로 거리가 좁혀졌다. 바로 뒤에 바싹 붙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다. 조금 전 어이없어하던 표정이 더 짙어졌지만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명령은 없었다. 의외로 멀뚱히 서 있는 화수를 찌푸린 얼굴로 흘낏, 노려본 것을 끝으로 리 샤오가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눈치채지 못하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화수도 그 걸음을 쫓아 걸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못해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냥 앞서서 걸을걸. 아니면 그냥 그 혼잡한 길로 갈걸.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나는 인력거를 타고 가면 된다고 할걸. 후회에 후회가 꼬리를 물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길이 한적해진 것은 좋은데, 덕분에 이번엔 숨 막힐 듯한 적막이 화수를 휘감았다. 그나마 간간이 지나가던 사람들마저 자취를 감췄다. 사실 그건 축제가 한창인 상점가와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를 감당해야 하는 화수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화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어쩔 줄 모르겠는 자신과는 달리 옆에서 걷고 있는 리 샤오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평온한 기색이었다. 왠지 억울한 기분마저 드는 화수였다.
“무슨 할 말이라도?”
힐끗힐끗, 곁눈질을 하다 딱 걸렸다. 전혀 모르는 줄 알았는데. 눈이 떡하니 마주친 화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나마 침묵이 깨져서 다행이다 싶었다.
“볼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상점가에.”
“없어.”
물론 그런 화수의 기대는 단숨에 박살났지만.
너랑 사이좋게 얘기하면서 갈 생각 없으니 그냥 닥치고 있으라는 뜻이라고 알아들은 화수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또 그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냥 구경 나와본 거야.”
“…….”
나직이 덧붙이는 말에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눈매가 기름해졌다. 설마.
“축제 구경 나오신 겁니까?”
“안 되나?”
“아뇨. 안 될 리가요.”
사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하지만 또 다른 말은 딱히 떠오르지 않아 뭐라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던진 질문인데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 대답을 들으니 놀랄 수밖에. 의외로 반전이 있는 사내였다.
그나저나 표정을 숨긴다고 숨겼는데, 티가 났나. 저를 보는 리 샤오의 눈동자가 조금 날이 서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그 표정이 오히려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모르는 척 시선을 피하고 있던 화수가 결국 지그시 보는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막 항복선언을 하려고 할 때였다.
“죄송-”
“그런데.”
불쑥, 예고도 없이 리 샤오의 입이 다시 열렸다. 툭, 하고 가볍게 던진 말이 생각보다 묵직했다.
“발은 왜 그래.”
“예?”
눈앞의 사내가 무슨 말을 할지는 늘 예상키 어려웠으나, 이 질문은 정말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눈을 깜빡이던 화수가 되물었다.
“무슨-”
“왜 절뚝거리냐고.”
사실 일부러 숨기려고 못 알아들은 척한 것은 아니고 일종의 습관이었다.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려도 받아줄 사람이 없는 아이가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습관. 물론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리 샤오는 거짓말할 생각 따위 하지 말라는 듯 쐐기를 박아버린다.
“앉아.”
아니라고 잡아떼기엔 너무 늦었고, 그렇다고 또 사실대로 말하기에도 퍽 난감해진 화수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리 샤오가 까딱, 턱짓을 한다.
두 사람이 걸어 나온 샛길의 끝은 작은 개천을 따라 난 길과 맞닿아 있었는데 길의 아래쪽인 개천으로 사람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큰 돌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리 샤오가 가리킨 것이 그 돌 중 하나였다.
사실 아프긴 해도 앉아 쉴 정도는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리 샤오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어 일단 가서 앉았다. 하지만 단순히 앉아서 쉬라는 말인 줄 알았던 화수의 생각과 달리 리 샤오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은 화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생각.
“뭐, 뭐 하는-”
화수가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붙잡힌 발목이 들리자 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찌릿하고 허리를 울리는 그 아픔에도 눈앞의 광경은 부서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리 샤오는 여전히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앉아 신발을 벗겨내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랬지?”
다행히 피가 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아프게 짓이겨진 발등은 그 잠깐 새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는 리 샤오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묻는 어조는 분명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 전에,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가.”
“…….”
솔직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배고파서 우는 모습까지 보였는데 이게 뭐라고, 싶지만 뻔뻔하게 구는 짓도 한두 번이었다. 평생 보일 흉한 꼴을 하루에, 그것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보이고 있으니. 아닌 척해도 점점 정신이 부스러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그냥 따라오는 것도 못해서 심지어 발등까지 밟혔냐고 또 한심해하는 눈빛과 마주하겠다 싶었는데 의외로 아무 말이 없었다. 심지어 리 샤오의 고개는 여전히 숙여진 채라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덕분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고, 무슨 말을 할지에 온 신경이 쏠려 리 샤오가 무릎을 꿇고 있다는 엄청난 사건은 조금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화수가 고개를 좀 더 앞으로 숙였지만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다시 흐르는 침묵과 제 발등만 보고 있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화수가 괜스레 변명을 늘어놓는다.
“보기엔 이래도 못 걸을 정도는 아닙니다.”
이상하네.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고 자신했는데.
사실 절뚝거렸다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발등이 닳을 때마다 아프긴 해서 조금 끌듯이 걸었을 뿐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안 건가 싶었다. 제가 맘먹고 숨기려고 하면 류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귀신같은 사내였다.
“그만 주십시오.”
민망한 마음에 화수가 손을 뻗어 리 샤오의 손에 들린 신발을 가져왔다. 아니, 가져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손을 피하듯 리 샤오가 몸을 일으켰다. 화수의 신발은 여전히 그의 손에 들린 채였다. 한 번 더 손을 내밀었지만 리 샤오는 제 할 말만 이을 뿐이다.
“잠시 식혀.”
“…….”
다 괜찮으니까, 그냥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의외로 신발을 벗고 찬바람을 쐬니 살 만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화수의 기색을 느꼈는지 리 샤오가 옆으로 와서 앉았다. 이번에도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조금 전만큼 미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마 볼 게 있어서 그런가. 조금 전 두 사람이 걸어오던 삭막한 길과 달리 이곳은 그나마 시선을 둘 곳이 많았다.
개천도 있고 하다못해 개천을 따라 심어진 나무도 있고. 비록 여기 심어진 나무들은 그리 나이가 먹은 나무가 아니라 잔가지에 듬성듬성 난 꽃들이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았다.
“해수야~!”
부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화수의 손이 멈칫했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저만치에서 신이 난 사내아이 둘이 앞서서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더 작은 여자아이가 뒤따른다.
“잠깐만! 같이 가아~”
오빠들의 속도를 따라잡기가 힘들었는지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던 여자아이가 우는소리를 했다. 하지만 이미 신이 난 사내아이들이 속도를 늦출 리 없었다. 거리는 점점 벌어졌고 결국 발치를 보지 않고 뛰던 여자아이가 그대로 앞으로 철퍼덕 넘어졌다.
“아.”
보고 있던 화수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조금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곧 맨발임을 깨닫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으, 으, 으앙!”
그사이 넘어진 충격에 잠시 굳어 있던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사실 아픈 것보다 손에 들려 있던 사과 사탕-사과를 조청에 담갔다가 굳힌 길거리 과자-이 흙투성이가 된 것 때문이 더 컸다. 아쉬운 마음에 나무 막대를 들어 확인해봤지만 아무리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눈에도 사탕은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두두둑, 흙덩이가 떨어지는 광경을 보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
하지만 곧 그 눈이 크게 벌어진다. 누군가 엎어진 아이의 옷 뒷덜미를 잡아 휙, 일으켜 세웠던 것. 그리고 놀랍게도 그건 리 샤오였다. 일어나는 것도 못 봤는데 저긴 언제 갔지. 놀란 것은 화수뿐만이 아니었던지 커다란 리 샤오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이 댕그래져 있었다. 거친 손길이었지만 덕분에 울음은 쏙 들어간 상태였다.
“걸을 땐 발밑을 잘 보고 걸어야 한다고 배웠을 텐데.”
어쩐지 그 말이 아이에게만 하는 충고가 아닌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게다가 애초에 반쯤 얼어 있는 아이에게 그 말이 귀에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아 더 그랬다.
그나마 제게 말을 할 때보다는 누그러진 말투였지만 워낙 크고 위압감이 넘치는 사람이라 아이는 말 그대로 얼음땡 상태였다. 잘생긴 얼굴이 먹히는 건 어른에게만인 모양이었다.
“기다려.”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에게 짧게 이른 리 샤오가 걸음을 옮긴다. 기본적으로 명령형인 건 자신에게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힐끔, 아이의 시선이 화수에게 닿았다. 아마도 두 사람이 같이 있던 모습을 보고 이유를 알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사실 화수만큼 리 샤오를 모르는 이가 또 없었다.
어깨를 으쓱인 화수가 고개를 틀었다.
아.
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다행히 이유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리 샤오는 조금 전 아이들이 건너온 작은 교량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 교량 한가운데 작은 좌판이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주인인, 나무로 된 좌판에 색색의 과일 사탕들을 꽂아놓은, 가게였다. 아마 경쟁이 치열한 상점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밀려나 아쉬우나마 이곳에 자리를 편 모양이었다.
쯧. 절로 혀가 차졌다. 아무리 자리가 없다고 해도 여기에 자리를 잡다니. 다니는 이라고는 자신들과 조금 전 아이들이 고작이었다. 애초에 저런 주변머리니 이런 호시기에 자리 하나 못 잡고 밀려난 것이겠지만.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꾸벅꾸벅.
리 샤오에게 노인이 허리까지 굽혀가며 연신 인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 조금 전 국밥집 아낙이 받았던 그 은전을 받아 들었겠지. 가끔은 저런 호사도 있어야지. 세상 다 산 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며 화수가 돌아오는 리 샤오를 시선으로 훑었다.
잘난 얼굴은 멀리서 봐도 잘난 모양이었다. 꽤 먼 거리임에도 단숨에 돌아왔다. 제법 빠르게 걸은 듯한데 숨이 찬 기색도 없었다.
슥.
그렇게 들고 돌아온 사과 사탕을 아이에게 내민다. 제 앞에 놓인 사과 사탕과 리 샤오를 번갈아 보면서 고민하던 아이가 조심조심 손을 뻗더니 이내 홱, 낚아채듯 가져간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사탕은 사탕인 모양이었다. 역시 아이는 얼굴보다는 먹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놓고 조금 찔리는 화수였지만.
“해, 해수야!”
저만치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오빠들이 슬그머니 동생을 불렀다. 사탕까지 사다 준 리 샤오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덕분이었지만, 여전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먼 곳에서 동생만 부르는 게 고작이었다. 이제 가도 되나? 눈치를 보는 아이에 리 샤오가 말없이 몸을 돌렸다.
후다닥, 조금 전 충고가 무색하게도 불안하게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려왔지만 리 샤오는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먹어보시게요?”
사실 돌아온 리 샤오의 손에는 사탕이 두 개 들려 있었다. 하나를 떨어트렸으니 두 개를 쥐여 주려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직 손에 들린 사탕을 보며 화수가 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인가 싶겠지만 무려 축제를 구경하러 나온 리 샤오이니 그런 일도 해보고 싶어진 게 아닐까 싶었던 것.
하지만 곧바로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눈빛과 마주해야 했다.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런 것은 입안으로 삼켜졌다. 제 앞으로 불쑥 내밀어진 사과 사탕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속으로 생각한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겠지만.
“저요?”
눈을 가늘게 뜬 화수가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며 묻는다. 입 닥치고 사탕이나 먹으라는 소린가, 싶었지만 돌아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먹고 싶은 거 아니었나?”
무슨. 오해받는 것에 익숙한 화수지만 이런 모함은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태연했다.
“뚫어져라 보기에 먹고 싶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만.”
뚫어져라 보긴 했지만, 그걸 그렇게 오해한 모양이었다.
“먹어. 이번에도 먹고 싶다고 울지 말고.”
“…….”
억울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오해의 상당 부분에 지분이 있는 사람으로서 할 말이 없었다.
가만히 입을 꾹 다물고 화수가 그의 손에서 사탕을 받아 들었다. 자신은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아무리 변명을 해봐야 믿을 것 같지도 않고, 일단 그 일에 대해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저 빨리 머릿속에서 지워줬으면 좋겠다, 그런 헛된 바람을 하며 받아 든 사탕을 반사적으로 한입 베어 물었다.
아그작. 굳었던 조청 가루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일단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견디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편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단것이라면 질색이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입안에 남아 있던 불유쾌한 잔해가 단 냄새로 덮였다. 아그작. 아그작. 얇게 덮였던 조청만 긁어 먹는다. 시선이 느껴졌다. 먹고 싶지 않았다고 해놓고 열심히 먹고 있는 꼴이 퍽 어이없을 것 같긴 했다. 뒤늦게 깨달은 화수가 민망한 기분에 볼을 긁었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반쯤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 좋아하시나 봐요.”
조금 전 아이를 일으켜주던 행동이 다소 거칠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일으켜 세워주고, 사탕까지 사 주지 않았던가. 그래서 보기와 달리 아이를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그렇게 추측해서 물은 것이었다.
“아니. 질색이야.”
하지만 한 번 망설이지도 않고 돌아온 즉답에 화수의 표정이 더 난감해졌다. 역시나 알다가도 모를 사내였다.
그럼 왜. 차마 입 밖으로 내서 묻지 못하고 생각만 하는 화수를 귀신같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우는 건 더 질색이라.”
아, 예.
우는 아이를 달래준다고 생각했던 그 행동은 말 그대로 울음을 멈추게 하기 위한 것뿐인 모양이었다. 리 샤오답다 싶었다.
“넌.”
그걸로 대화가 끝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질문이 돌아왔다. 질문이 돌아올 줄 예상 못 했던 터라 아삭, 하고 안쪽 사과를 베어 물었던 화수가 그대로 고개만 틀었다.
“아이 좋아하냐고.”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이어간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일단 대답했다.
“아뇨. 저도, 아이들은 좀.”
화수 역시 아이는 질색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순 없어서 그나마 순화했다.
“그래?”
“네.”
도통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공통 분모였다.
“드실래요?”
대화랄 것도 없는 대화가 끊어질 낌새에 초조해진 화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먹고 있는 사탕에 닿는 시선이 느껴져 지나가듯 가볍게 물은 것이었다. 당연히 까불지 말라고 한 소리 들을 거라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그냥 해본-”
굳이 안 봐도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그렇게 생각한 화수가 조용히 제 말을 물리려고 할 때였다.
아삭. 예상치 못한 소리가 귓전를 두드렸다. 제 어깨 너머로 불쑥 들어왔던 얼굴이 천천히 뒤로 물러선다. 어깨에 리 샤오의 몸이 닿았다. 그곳만 불에 덴 듯 뜨끈했다. 그대로 굳어 있던 화수의 고개가 천천히 꺾었다.
“달군.”
미간을 살풋 찌푸린 리 샤오가 여상히 감상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리 샤오를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보고 있으려니 고개를 살짝 기울인 리 샤오가 되묻는다.
“왜. 먹어보라고 한 거 아니었나?”
“……아뇨. 맞습니다. 먹어보란 거.”
먹으란 말이 아니었던 거냐고 되묻는 리 샤오에 화수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왜 제 것 뺏긴 표정이지?”
“…….”
사실 물으면서도 리 샤오가 먹는다는 선택지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먹은 게 아깝다거나 더럽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런 적 없다고 하면 그럼 왜 그런 표정이냐는 질문이 되돌아올 것이 뻔해서 눈을 굴리고 있었더니 청천벽력 같은 물음이 되돌아왔다.
“하나 더 사 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사양하죠.”
단것은 이것이면 충분했다. 올해 먹을 치를 다 먹은 기분이었다. 예의를 차린 대답과 달리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화수에 리 샤오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의외로 비위가 좋네. 흘끔흘끔, 다시 조용해진 옆을 살피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딱 떨어지는 겉모습은 누구와 술잔도 돌려 마시지 않을 것 같은 사내였지만, 그리 오래 전장을 누비는 생활을 했으니 남들과 음식을 나눠 먹는 일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을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그렇게 질색하는 자신의 것을 먹었다는 사실은 다소 믿기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한 화수는 남은 사과 사탕을 빠르게 먹어치웠다.
괜한 일의 원흉을 없애자, 그런 의도였지만 리 샤오의 눈에는 사탕을 빼앗기기 싫어 빠르게 먹어치우는 모습으로 보인다는 건 몰랐다.
“그만 가죠.”
여기서-정확히는 사탕 가게 주변에서- 벗어나는 게 좋겠다, 입안으로 남은 사과를 욱여넣은 화수가 몸을 일으켰다. 리 샤오가 말릴까 신속하게 벗어두었던 신발에 발도 꿰었지만 이번엔 리 샤오도 말릴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몇 걸음 걸어간 뒤 뒤돌아섰을 때는 리 샤오도 몸을 일으켜 화수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앞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때였다. 자연스레 리 샤오의 어깨 너머에 닿았던 시선이 멈칫한 것은. 남의 눈에 띌 만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리 샤오의 고개가 뒤로 향했다.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엔 화수의 눈이 크게 동요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개를 돌린 리 샤오에게는 들키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해가 어둑어둑해지자 한적한 길에도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상점가로 향하는 길이리라. 그 별것 없는 광경 속에서 화수의 시선을 붙잡은 건 가족으로 보이는 한 무리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무리에서 삐죽 튀어나와 느린 가족들의 발길을 재촉하는 사내아이가 쓰고 있는 여우 가면이었다.
특별히 시선을 빼앗길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여우 가면뿐만 아니라 원숭이나 토끼 같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 가면은 춘분절 축제 때 열리는 좌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과일 사탕만큼이나 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가만히 뒤돌아선 리 샤오의 기색을 살폈다.
“왜.”
다시 고개를 돌린 리 샤오가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혹 뭔가를 눈치채는 게 아닐까. 괜스레 뜨끔해서 긴장하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도 되돌아온 질문은 다소 허무할 정도로 평범했다. 그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애초에 눈치챈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말이었다. 기억이란 것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무게로 남아 있지는 않으니까. 누군가에게는 평생 남을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조금 전 아이들과의 일화처럼 그냥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불과할 수 있었다. 무슨 자의식 과잉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화수가 쓰게 웃었다.
“잘못 봤네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지만 그쪽이 더 그럴 듯해 슬쩍 대답을 얹었다.
“죄송합니다.”
가던 발길을 멈추게 한 것에 대한 사과도 했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사과에도 리 샤오의 발은 움직이지 않는다. 발치를 보고 있던 화수가 슬그머니 시선을 올렸다. 어째서인지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습관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딱히 짚이는 것이 없었다.
“기가 막히는군.”
굳어 있는 화수를 아랑곳하지 않고 리 샤오가 나직이 내뱉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리 샤오의 시선이 자신을 빗겨가 좀 더 위를 향해 있다는 걸 알았을 테지만 긴장한 탓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묘하게 날이 선 어조에 화수의 손끝이 움찔했다.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가 알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화수는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눈앞의 사내는 가만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시선만으로도 제 입으로 자신의 잘못을 술술 불고 용서를 구할 법한, 말 그대로 사람을 꿰뚫는 눈빛이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화수조차도 그냥 털어놓는 게 좋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할 정도로.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고민 같은 게 필요 없었다는 말이 더 맞겠지만.
“뛸 수 있겠어?”
불쑥, 시선을 내린 리 샤오가 물어왔다. 무슨. 화수가 눈으로 되물었다. 물론 뛸 수 있냐는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차에 상황과는 맞지 않는 질문을 들으니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반사적으로 되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투둑.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발치의 바닥이 짙어졌다. 휙, 고개가 들렸다. 이번엔 들린 눈꺼풀 위로 툭, 하고 굵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단숨에 속눈썹이 젖어들었다. 고개를 내리는 화수의 표정도 일그러져 있었다.
소나기였다.
“저리로.”
쏟아지는 빗속을 뛰던 리 샤오가 화수의 팔을 잡아당겼다. 웃옷으로 머리를 덮어쓴 채 앞만 보고 달리던 터라 순간 당기는 힘에 비틀거렸지만, 단단한 손이 화수의 팔을 잡고 있어 균형을 잃지는 않았다.
문 닫은 가게 앞 처마 밑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처마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것을 피해 화수가 가게 쪽으로 몸을 바싹 붙였다. 그러다 흘낏, 고개를 꺾어 가게 안을 살핀다. 혹시나 했지만 안타깝게도 허름한 가게는 일찍 문을 닫은 것이 아니라 아예 장사를 접은 듯했다.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가게 안에서는 사람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포기한 화수가 조용히 몸을 바로 했다.
쏴아아아.
처음부터 심상치 않던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다 이제는 아예 동이째로 들이붓는 형국이었다. 뿌연 물안개까지 이는 처마 너머를 멍하니 보고 있던 화수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 잠깐 사이에 입고 있던 얇은 와이셔츠가 흠뻑 젖었다. 희고 얇은 셔츠가 젖자 살이 다 비쳤다. 바싹 달라붙은 가슴팍으로 조그만 돌기가 도드라졌다.
비를 맞을 때는 추운 것도 몰랐다. 오히려 비를 피하고 나니 뒤늦게 한기가 몰려왔다. 초봄 날씨는 비가 오지 않아도 쌀쌀한 편이었고, 지금은 비까지 내려 온도가 확 낮아졌다.
아.
화수가 들고 있던 양복을 입으려다 말고 멈칫한다. 안쪽주머니에 넣어둔 약봉지가 생각난 탓이었다. 다 젖은 셔츠 위에 이것을 입으면 약봉지도 젖을 것이 분명했다. 고민하던 화수가 도로 손을 내렸다. 화수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추워서만은 아니었지만 화수는 그냥 추워서 몸을 떠는 것으로 하고 싶었다.
“여기 있어.”
지나가는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빗줄기는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처마 너머만 보고 있던 리 샤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여느 때처럼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다급하게 자신을 붙잡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어디 가십니까.”
당겨진 옷자락과 그 옷자락을 붙들고 있는 손, 그리고 그 손의 주인 얼굴까지. 차례로 훑어 올라간 리 샤오가 미간을 살풋 찌푸린다. 곧바로 손이 떨어져 나갔지만 사실 리 샤오의 표정이 험악해진 건 손 때문이 아니었다.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눈동자 때문이었다.
“차에.”
덕분에 답지 않게 리 샤오의 입이 다시 열렸다.
“차 가져올 테니까, 여기 있어.”
“비가, 많이 오는데요.”
그러니까, 가져오겠다는 거였다. 저 혼자였다면 그냥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칠 비였다. 하지만 문득 고개를 내린 리 샤오의 시야에 화수의 젖은 손이 들어왔다. 피부 자체가 얇은지 사내 주제에 손끝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
역시 거슬려. 무표정하던 얼굴에서 눈매가 좁혀졌다. 자꾸만 초조해지는 기분이 짜증났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잖아.”
“…….”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화수가 가만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짜증이 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애초에 저만 아니었다면 이미 리 샤오는 돌아가 비를 맞을 일도, 이렇게 다 낡아빠진 가게 앞 처마 밑에 몸을 구겨 넣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조금 잘해준다고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그가 제게 베푼 친절은 질색하는 아이에게, 더 질색하는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쥐여 준 사과 사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계십시오. 제가 가서 우산이라도 구해오겠습니다.”
화수가 걸음을 내디뎠다. 질색하는 비지만 저를 싫어하는 리 샤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철벅, 비싼 구두가 물웅덩이를 디뎠다. 하지만 화수에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화수의 신경은 정작 물웅덩이를 밟은 다른 사람의 구두에 있었다. 그에게 붙잡힌 팔이 우릿했다.
“뭐 하는 거지?”
투두둑. 단숨에 젖어버린 속눈썹에 화수가 눈을 뜨는 것이 조금 늦었다.
“우산을-”
“누가 너한테 그딴 거 가져오라고 했나?”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난 눈동자에 화수도 당황했다. 하지만 곧 납득했다. 그는 화수가 자신이 여기 있으라고 한 명령을 거역한 사실에 화가 난 것이었다. 예전에는 일부러 그랬지만 이번엔 그럴 생각이 없었던 터라 화수가 순순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 잠깐 사이에 새까만 머리칼이 흠뻑 젖었다. 목덜미며, 안 그래도 젖었던 셔츠가 더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것이 리 샤오의 시선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리 샤오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몇 번 달싹이던 젖은 입술이 도로 닫혔다. 아무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입이 열린 쪽은 리 샤오였다.
“이것도 일종의 손님을 유혹하는 기술인가?”
“…….”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젖은 얼굴을 털던 화수가 뒤늦게 고개를 숙여 제 몰골을 확인했다.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하지만 곧 난처한 표정은 사라졌다.
“왜.”
오히려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얼굴이 젖은 탓에 미소가 더 미끄덩했다.
“당기십니까.”
“까불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물론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 샤오는 미간을 일그러트릴 뿐, 화수의 팔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든 망설임 없이 놓고 가버릴 수 있는 사내라는 걸 아는 터라 그리 안심할 수는 없었다. 조금 초조한 기분에 제안을 하는 입술이 빠르게 열렸다.
“사탕값이라 생각하셔도 됩니다.”
“싸군.”
자신의 자존심을 짓이기듯 중얼거리는 말에도 화수는 아무렇지 않았다.
“워낙에 싸구려 구멍이라서요.”
애초에 제가 리 샤오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이런 것밖에는 없었다. 그나마 이것이라도 있어 다행이었다. 물론 제게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 * *
처음엔 눈에 헛것이 보이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필이면 이 시간에, 이 혼잡한 곳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과 조우할 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잘못 볼 수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 혼잡한 인파 속에서도 그 새하얀 얼굴은 선명하게 눈에 와 박혔다. 짜증나게. 가늘어진 눈매에 짜증이 서렸다.
돌아서려고 했다. 마주쳐서 좋을 것도 없고, 그렇다고 사이좋게 인사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 샤오의 걸음은 멈춰 있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리 샤오의 걸음이 움직인 건 조금 뒤였다. 화수가 오던 발길을 되돌렸을 때였다. 처음엔 저를 보고 돌아섰나 싶었지만 이내 그런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화수는 자신을 피해 돌아선 것이 아니었다. 피하기는커녕 저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기가 막혔다. 리 샤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실 저도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치려고 했으면서 화수는 모르고 지나친 것임에도 화가 치밀었다. 감히. 하지만 리 샤오는 자신이 걸음을 내디딘 게 녀석이 눈앞에서 사라지려고 할 때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고작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이유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녀석이 자신에게 등을 보였고 녀석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리 샤오는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고작 이런 녀석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다는 상황이 더 화를 돋웠다.
이렇게 끝도 없이 화가 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리 샤오는 화가 나면 머리가 더 차갑게 식는 유형이었다. 하지만 최근 앞뒤 재지 않고 몸부터 움직이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 원인에 늘 녀석이 있었다. 녀석만 보면, 이 얼굴만 보면 늘 미칠 것 같은 감정이 뒤섞였다. 그게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예측불허.
녀석은 리 샤오에게 그런 존재였다. 아무것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이런 녀석이라고 결론지으면 그런 리 샤오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예측을 단숨에 깨부쉈다. 그게 리 샤오를 미치게 했다.
이 이상 화가 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녀석의 어깨를 잡아 돌렸지만,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는 순간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다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살기가 치밀어 오른 것도. 비를 맞아 흠뻑 젖은 몸은 그저 손님을 돋우는 수단에 불과했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에 녀석을 죽여버리지 못한 것도. 무엇 하나 리 샤오의 예상범주 내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빌어먹을 녀석을 끌고 문 닫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더더욱. 정말 미쳐버린 건지도 몰랐다.
쾅.
한 손으로 밀었을 뿐인데 미닫이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미 집기 같은 것은 다 빼둔 터라 사람의 출입만 막아놓은 용도라고는 해도 쇠로 된 잠금쇠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부서져 나갔다.
부서지는 잠금쇠가, 열어젖혀지는 문이 어쩐지 제 꼴 같아 화수가 어깨를 떨었다. 물론 리 샤오는 사정 봐주지 않고 그대로 화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드륵. 문이 도로 닫혔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가게 안은 어두컴컴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거기다 습기까지 머금은 탓에 농도가 더 짙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닫힌 문 앞을 지키고 선 인영人影 때문이었다. 역광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긴장한 몸의 모든 신경이, 리 샤오를 향해 서 있었다. 성큼. 리 샤오가 걸음을 내디뎠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왜일까. 화수는 자문했다. 리 샤오가 거리를 좁혀오면 늘 도망치고 싶어졌다. 어떤 상황에도,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난처해하면서도 도망치는 법이 없는 화수가. 떨어지는 것이 싫어 차라리 제게 화를 내는 쪽을 택했으면서. 그런데 리 샤오가 거리를 좁히면, 틈을 벌리고 들어오면, 화수는 도망치고 싶어졌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뭐란 말인가. 이런 기분을 화수는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게 화수를 혼란스럽게 했다.
지금도, 가까스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른 채 버티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화수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도망치려고 했다가는 말 그대로 목덜미를 뜯길지도 모른다는 걸.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패기覇氣로 눈앞이 어찔했다. 속으로 억눌러둔 패기覇氣가 다 갈무리되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것인데도 그 정도가 엄청났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기분을 상하게 한 만든 대상이 누군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아.”
가볍게 배를 미는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몸이 뒤로 밀렸다. 손등 위로 얇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대로 밀려 뒤로 넘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이내 뭔가에 걸려 그런 꼴은 면했다. 손님들을 받았던 낡은 나무 탁자였다.
삐걱. 그 탁자에 엉덩이가 걸쳐졌을 때 다른 집기들은 다 챙겨 갔으면서 왜 이 탁자만 덩그러니 놓고 간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나무 탁자 위에 걸터앉을 수밖에 없었다. 리 샤오가 그대로 몸을 바싹 붙였기 때문이다.
코끝에 훅, 하고 젖은 물비린내가 끼쳤다. 그 역시도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비를 맞아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옷을 벗기려는 손길에 화수가 입을 열었다. 사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제 옷은 제가 알아서 벗을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 본인의 젖은 옷을 벗으시라는 의미에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말을 하던 화수가 그대로 굳었다. 처음엔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고.
“입 다물어.”
두 번째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바닥까지 까라져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부터 아무것도.”
“…….”
“어떤 것도 하지 마, 넌.”
“…….”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시선을 마주하던 화수가 입을 열었다.
“하면 어떻게 됩니까.”
목이라도 졸리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의외로 픽, 하고 웃음을 흘린 리 샤오가 이내 글쎄, 하고 여상히 중얼거렸다. 웃음기는 싹 지운 얼굴로.
“궁금하면 한번 해보든가.”
“…….”
단순히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자신도 정말 몰라서, 모르겠으니 한번 확인해보려면 직접 해보라는 말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게 탁해진 눈동자에, 소름이 쭉 끼쳤다. 화수가 손을 떨어트렸다.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네. 이번에도 당연히 건방지게 굴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얌전히 물러나는 화수에 리 샤오가 미간을 좁혔다. 운이 좋은 녀석이었다. 아니, 눈치가 빠른 건가. 녀석은 마치 리 샤오의 한계치를 더듬어 확인하겠다는 듯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제 목숨을 담보로 걸고서. 그런 주제에 오래 살고 싶단다. 그런 모순이 신경을 긁었다.
슥.
손가락을 걸어 타이의 매듭을 끌어 내렸다. 얇은 폭의 넥타이는 취향이 아니지만 눈앞의 녀석과는 썩 잘 어울렸다. 매듭만 풀어헤친 타이는 그대로 목에 걸어둔 채 손을 다시 위로 끌어 올렸다.
이번엔 셔츠 단추였다. 툭, 툭, 반질한 손톱이 움직일 때마다 앞이 열렸다. 젖어서 쉽게 풀어지지 않을 단추가 한 번 걸리지도 않고 풀어졌다.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바지 안에 들어 있던 셔츠가 끌어 올려지고 마지막 단추마저 풀어 헤쳐졌다.
“흣.”
벌어진 셔츠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분명 똑같이 비를 맞은 몸인데, 차갑게 식어 한기마저 드는 화수의 몸과 달리 리 샤오의 손은 뜨거웠다.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았다. 손이 닿은 살갗이 낙인이 찍힌 것처럼 후끈거렸다.
더듬어 들어온 손이 작은 돌기를 건드렸다. 아랫배가 둥글게 접히며 화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손은 물러서지 않았다. 조금 전엔 더듬던 손끝에 닿았다면 이번엔 분명히 의도적인 손길이었다. 손가락으로 젖꼭지 주변, 유륜을 빙글이자 돌기가 꼿꼿하게 서는 것이 느껴졌다. 주변 살갗이 예민해져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빙글.
엄지와 검지로 바짝 선 젖꼭지를 잡아 돌렸다. 등줄기가 찌릿찌릿했다. 목덜미의 솜털이 다 섰다.
“사내도 빨아주면 아래가 젖나?”
“글쎄, 읏, 요.”
애매한 대꾸에 리 샤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지만 화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만지는 맛도 없는 사내의 젖을 굳이 빨아댈 이유가 없었다. 굳이 별다른 애무 없이도 화수의 아래는 잘 열렸고, 물건을 받아내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궁금하면 확인해보시든가요.”
“…….”
눈매가 더 가늘어졌다. 웃는 건지, 화가 난 것인지 구별하기 힘든 표정이었지만 아마도 후자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엔 일부러 그런 것이기도 했다. 그만 제 젖꼭지에서 관심을 돌리고 싶은데 평범하게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한다고 그러겠다고 할 리 샤오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맞춤을 할 필요 없다고 했을 때처럼. 제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는 편이 오히려 리 샤오의 반감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돌려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화수의 예상은 빗나갔다.
슥, 상체를 구부린 리 샤오가 그대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젖은 살덩이가 바짝 선 젖꼭지를 꾸욱 짓누르듯 핥아 올렸을 때에야 화수는 제가 제 무덤을 팠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늦은 깨달음이었지만.
읏.
끝을 세운 혀로 돌기를 빙글이던 리 샤오가 이번엔 그것을 쭉쭉 빨았다. 없는 살집을 억지로 끌어모아 콱 깨물었다가 다시 쭉, 빨았다. 허리가 찌릿했다. 둥글게 접혔던 아랫배가 이번엔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그, 으읏, 그-만.”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화수가 리 샤오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다 다시 가슴을 콱, 물렸다. 벌을 주듯, 사정없이 이를 박아 넣었다.
“악.”
얇은 살갗에 이가 박히는 느낌이 생생했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트는 화수를 리 샤오는 놓아주지 않았다. 쯕, 젖은 소리와 함께 뜨거운 기운이 사라졌다. 한 손에 화수의 두 손을 그러쥔 리 샤오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끌어 올렸다. 억지로 끌어 올려진 시선이 시커먼 눈동자와 마주했다.
“분명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
“내 말이 그냥 해보는 말 같아?”
“……죄송, 합니다.”
여상한 말투였지만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만큼이나 머릿속에 와 박혔다. 이 평온한 상태로 얼마든지 제 목을 조를 수도 있는 사람이 리 샤오였다.
“그래서.”
“…….”
숨죽인 채 굳어 있는 화수에게 리 샤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젖었어?”
빗겨 있던 시선을 다시 천천히 끄집어 올렸다. 한 박자 늦게 조금 전 대화가 다시 이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휙휙, 정신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겨우 잠깐 머뭇거린 사이,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것도 내가 직접 확인해봐야 하나?”
“궁금하신 게 앞입니까, 뒵니까.”
“내가 관심 가질 게 뒷구멍 말고 뭐가 있는데?”
“그럼 젖었네요.”
“…….”
사실 이런 말들은 화수에게 아무런 타격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을 빨아준다거나, 앞을 만져 가게 해준다거나 하는 행동들이 더 곤란했다.
쿵. 거칠게 밀린 상체가 그대로 뒤로 젖혀졌다. 아픈 것보다 눈앞이 쑥- 꺼지는 기분이 먼저였다. 가벼운 둔통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웅크리는 몸을 오해한 것인지 리 샤오가 배를 누르며 몸을 바싹 붙였다. 자연스럽게 얼굴이 가까워졌다. 눈이 마주쳤다. 마주한 눈동자가 더 탁해졌다.
역시 곤란해. 찍어 누르듯 꾹- 눌러오는 뜨거운 입술에 화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입을 열었다.
혀가 들어왔다.
입안을 가득 채우며. 분명 살덩이는 고체인데 이상하게 물처럼 입안 구석구석 한 치의 틈도 없이 모든 곳을 빠듯하게 채우는 기분이었다. 콱 틀어막힌 것처럼 숨이 찼다. 가슴이 얕게 헐떡인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감긴 눈 안으로 물기가 차올랐다.
혀가 마주 비벼졌다. 힘으로 짓누르고, 도망치고, 다시 쫓아온 살덩이에 농락당하듯 휘감긴다. 질척질척한 젖은 소리가 맞닿은 입술 틈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머리 위로 눌러진 두 손이 바르작거리자 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은 두 손, 상대는 고작 한 손인데도 전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심지어 두 손을 결박한 채 한 손으로 화수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지익.
지퍼가 아래로 내려지고 바지가 속옷째 끌어 내려졌다. 그 와중에도 입술을 맞닿은 채였다. 아래가 서늘했다.
“오늘은 평범하군.”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입술이 떨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쏟아져 들어오는 공기를 들이켜느라 그가 한 말을 자각한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아.
헐떡이던 화수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진다. 평범하다는 말도 과분할 정도로 지나치게 수수한 제 흰색 속옷을 떠올린 탓이었다. 오늘은 정말 리 샤오와 마주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입은 속옷이었다. 오늘 제가 보인 온갖 행태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화수의 귀는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이젠 더 보일 추태도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위안을 주는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다리 사이로 들어온 커다란 손이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렸다. 민감한 살이 쓸리자 화수가 허리를 떨며 무릎을 오므렸다.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힉.”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은 리 샤오가 이번엔 무릎 뒤를 붙잡아 그대로 쭉- 밀어 올렸기 때문이다. 무릎이 가슴팍에 닿았다. 엉덩이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덕분에 숨겨져 있던 주름진 곳이 고스란히 리 샤오의 시야에 잡혔다.
“잡고 있어.”
리 샤오가 짧게 명령했다. 화수가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이번엔 제 다리를 붙잡았다. 그럼에도 리 샤오의 한 손은 여전히 허벅지를 눌러 붙잡고 있었다.
“으…….”
다른 한 손이 엉덩이골을 가볍게 쓸어 올렸다. 잔뜩 오므라져 있던 주름진 곳이 꼼지락거리면서 개폐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안 젖은 것 같은데.”
오물오물 움직이고는 있어도 그리 물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폭.
손가락을 주름 가운데 가져다 대자 옴찔거리며 열렸다 닫혔다를 하던 입구가 손가락을 꽉 물었다. 물린 손가락을 살살 돌리자 조금 전보다 훨씬 큰 움직임으로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벌어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가락을 더 집어넣었다. 마디 하나가 안으로 삼켜졌다. 손가락을 구부려 고리처럼 만든 뒤 옆으로 벌리자 맞닿아 있던 점막이 벌어지며 측, 하는 젖은 소리가 났다. 아.
“안이 젖었군.”
다소 평온한 어조로 감상을 털어놓자 외로 꺾은 화수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검지로 벌려놓은 틈으로 가운뎃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이번엔 마디 하나까지가 아니라 아예 끝까지 힘을 주어 밀어 넣었다. 엉덩이가 단단해졌다. 하지만 쑤셔 넣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꾸역꾸역 손가락을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마디 하나가 아니라 손가락 전부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중간쯤엔 벌리고 있던 검지는 빼고 가운뎃손가락만 집어넣었다. 빡빡한 것은 입구만이라 오히려 입구를 통과하자 그다음은 쉬웠다. 슥, 잡아 뺀 손가락을 다시 끝까지 집어넣었다. 엉덩이에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부분이 닿을 때까지 집어넣은 뒤 안에서 빙글였다.
그전까지는 손바닥이 앞을 향해 있었다면 이젠 손등이 앞을 향해 있었다. 각도를 달리해 다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 잠깐 사이에 다시 다물어진 틈을 파고 벌려서 길을 냈다.
“아, 으. 으.”
악문 입술 사이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축 늘어져 있던 화수의 것이 바짝 머리를 세우고 있었다. 제 것을 넣을 때 기억을 더듬어 손가락의 방향도 바꿔봤는데 역시나 이쪽으로 긁어 올릴 때 더 느끼고 있었다.
달라붙는 내벽을 비틀어 떨어트리며 손가락을 뺐다가 그 내벽이 다시 제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푹, 하고 집어넣는다. 퍼드득, 허벅지가 튀어 올랐다.
“꽉, 잡아.”
그렇게 경고한 리 샤오가 다시 한 번 더 손가락을 잡아 뺐다. 그리고 이번엔 검지도 함께 집어넣었다. 좁게 난 길을 그렇게 짓이기고 벌렸다. 화수의 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푹.
푸욱.
푹. 푹-
손가락이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점점 달라붙는 점도가 낮아지는 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달라붙지도 않고 단단하게 길을 냈다. 척척한 젖은 소리가 점점 짙어졌다.
손가락이 안에서 다시 방향을 바꿨다. 조금 전까지는 뒤쪽을 긁더니 이번엔 앞을 긁듯 손바닥이 앞을 향했다. 분명 제 것과 뒷구멍은 연결되어 있지 않는데도 앞을 긁자 반쯤 서 있던 성기가 바싹 머리를 세웠다.
배꼽 아래가 들끓었다. 아랫배가 단단하게 올라붙었다가 허물어지기를 반복했다. 엉덩이도 마찬가지였다. 동그란 엉덩이에 옴폭한 보조개가 생겼다가 없어진다. 손가락을 문 입구가 쭈압쭈압, 손가락을 먹어치우듯 빨아 당겼다. 탐욕스러운 아래 입으로 손가락을 뿌리 끝까지 집어넣고 꽉꽉, 더 찔러 넣었다. 구멍과 성기의 사이, 맨질한 피부가 부풀어 올랐다. 호흡이 엉켰다. 들어오는 박자가 엉망이었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지, 지금.”
헐떡이던 화수가 입을 열었다. 경고를 무시한 것이었지만 다행히 크게 문제 삼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몇 번 더 무심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살짝 속도를 늦췄다.
“몇, 개쯤.”
슥, 도톰한 손가락 끝이 안을 문지르는 감각에 발가락이 꽉 오므라든다. 허벅지가 벌벌 떨렸다. 대답 같은 건 돌아오지 않으려나, 싶었는데-이미 물어놓고 뒤늦게 깨달은 것도 우습지만- 의외로 순순히 대답이 돌아왔다.
“세 개.”
“그럼.”
하아. 틀어쥐고 있던 한숨에 섞어 말을 내뱉은 화수가 다시 뒷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넣어도 될 것 같은데.”
내려다보는 눈빛이 사나웠다.
“결정은 내가 한다고 했을 텐데.”
“아는데.”
아는데 왜 그런 헛소리를 하고 있냐는 눈빛에 화수가 덧붙였다.
“그래줬으면, 해서.”
“…….”
솔직한 심경이었다. 넓히는 건 그만하면 됐으니, 그냥 넣어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용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싶었지만 리 샤오는 굳은 표정으로 미동도 없었다. 그런 리 샤오를 올려다보던 화수가 이내 말을 물렸다.
“죄송- 흣…….”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수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쑥, 안에 박혀 있던 손이 뽑혀 나갔다. 딸려 나가던 내벽이 쩍쩍, 소리를 내면서 손가락을 놓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쓱.
움츠러든 채 부들거리던 몸이 억지로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엉덩이가 나무 표면을 쓸고 미끄러지다 마지막엔 허공에서 멈췄다. 거친 움직임에 탁자가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아래를 끼우고 사타구니를 바싹 붙이는 리 샤오에 화수는 일순 숨을 멈췄다.
이렇게까지 흥분했으면서 그리 집요하게 아래를 넓혀줬단 건가. 조금 믿을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지금도 이 얼굴만 봐서는 전혀 흥분한 사람이라고 믿을 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식지 않아 다행인가. 지금 이 상황에서조차 그런 안도감이 먼저 드는 건 자신이 곤鯤이라서일까. 화수는 조금 궁금해졌다.
삐걱.
아래쪽으로 흔들리던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엔 미는 머리 쪽으로 탁자가 덜컹거렸지만 체중을 실어 누르는 힘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고정되었다.
아…….
내려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야생의 맹수를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두렵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눈동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심장이 뛰었다. 혹여 그 소리를 리 샤오에게 들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사실 그럴 일은 요원해 보였다. 빗소리가 더 요란해졌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비가 오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툭. 툭. 단추가 풀어지는 소리가 텅 빈 공간을 채운다. 손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도 맹수의 시선은 화수를 향해 있었다. 이미 몸으로 누르고 있어 도망칠 수도 없건만, 그럼에도 리 샤오는 언제고 화수를 도망칠지도 모르는 먹잇감처럼 눈으로, 시선으로 눌렀다.
응시하는 시선을 견딜 수 없어 먼저 물러선 쪽은 화수였다. 유일하게 자유가 허락된 고개만 옆으로 꺾었다. 풀썩. 그 시선 안으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교복이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내던진 젖은 상의가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그 위로 셔츠가 내려앉았다. 하나씩 하나씩 풀어내던 상의 단추와는 달리 셔츠는 목 부분 단추 몇 개만 풀고는 그대로 머리 위로 끌어 올려 한 번에 벗어 던졌다.
그렇게 상체가 드러났다. 근사한 근육이 적당히 붙은 어깨가 반지르르했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수축되고 이완되는 모든 근육들이 마치 그린 듯이 아름다웠다. 마치 맹수가 온몸의 근육을 다 움직여 우아하게 걸어오는 장면을 보는 기분이었다. 선이 아름다운 여인의 몸이 아닌 남자다운 몸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화수는 눈앞의 맹수를 보면서 처음 깨달았다.
엉덩이에 맞닿은 앞섶이 바짝 서다 못해 바지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화수의 여린 살에 거친 면이 문질러지자 안 그래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곳이 붉은 핏빛을 띠었다. 미간을 살풋 찌푸린 리 샤오가 바지 지퍼를 열어 속옷 안에 있는 것을 빼냈다. 속옷을 뚫고 나올 듯하던 거대한 기둥이 밖으로 튕겨 나왔다.
그냥 봐도 경도가 느껴질 만큼 단단해진 살덩이에 핏줄이 다 서 있었다. 바짝 선 것을 몇 번 손으로 문지르자 끄트머리에서 짙은 흰색의 액체가 새어 나왔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긁어 귀두 부분에 문질렀다. 끝만 들어가면 그다음은 쉽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슥슥. 젖은 귀두가 엉덩이 사이에 문질러졌다. 미끄덩거리면서 단단한 끝이 입구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물오물거리던 입구가 꽉, 꽉, 오므라들었다. 기대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화수를 휘감았다.
슥, 슥, 엉덩이골 사이를 몇 번 더 문지르던 리 샤오가 옴폭한 주름 가운데에 귀두 끝을 댔다. 마치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폭, 하고 맞춰 들어갔다. 물론 지금부터 들어갈 부분은 그렇게 귀엽게 폭, 하고 맞춰질 수준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을 모르지 않는 화수가 숨을 멈췄다. 천천히 밀고 들어올 것을 예상해서. 고통스럽긴 해도 그 고통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고통스럽기만 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만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불쑥. 예기치도 못한 낮은 음성이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화수야.”
잘못 들은 것인 줄 알았다. 그럼에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이 커지고 아래로 깔고 있던 시선을 위로 들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치 화수가 놀라 시선을 들 것까지 모두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리 샤오가 그대로 기둥을 밀었다. 마주한 눈이 웃은 듯도 했다. 물론 확실하진 않았다.
-!!!
푹, 단단한 끄트머리가 아래를 짓이기듯 벌리고 들어오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기 때문이다. 아래가 빠듯했다. 그 커다란 것이 반쯤 그대로 박혀 들어온 듯했다.
씨발. 화수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들어오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그런 짓까지 한 것은 말 그대로 악취미였다.
고작 이름 하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리 샤오는 한 번도 화수의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었다. 설마 몰라서 부르지 않은 것은 아닐 테고, 아마 이름을 부를 정도의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그런 주제에, 이런 순간에, 하필 이 순간을 노려서, 이름을 부르다니. 저는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는데, 상대에게는 삽입을 위해 신경을 돌릴 용도에 불과했다니. 그게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찢기듯 벌어진 아래보다, 심장이 더 지끈거렸다.
“화수야.”
더 열받는 건 그 의도를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떨리는 심장이었다. 일부러 이런다는 걸 알면서도, 답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에 아래가 벌렁거리며 벌어졌다. 커다란 기둥이 단숨에 끝까지 들어왔다. 화수의 목이 뒤로 꺾였다. 벌어진 입에서 신음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하아.”
대신 쫀득하게 조여드는 내벽에 리 샤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살덩이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달라붙었다. 리 샤오의 것을 터트릴 기세로 꽉꽉, 조여 물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살덩이들을 뜯어내듯 밖으로 기둥을 뺐다. 딸려 나오던 내벽이 제자리로 돌아가기도 전에 다시 푹, 하고 쑤셔 넣었다. 내벽이 기둥에 딸려 안으로 다시 밀려 들어갔다. 거친 움직임에도 조금 전 시간을 들여 벌려놓은 보람이 있는지 내벽은 쉽게 흐물흐물해지고, 다시 길을 냈다.
뻑뻑하던 내벽이 이내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뿌리를 잡지 않아도 들락이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자 리 샤오는 기둥을 놓고 대신 허벅지를 꽉 눌렀다. 그리고 푹, 집어넣었다. 진저리를 치는 허벅지를 힘으로 누르자 하얀 허벅지에 손자국이 남았다. 쯔윽, 천천히 잡아 빼자 이번엔 화수의 꽉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허릿짓이 빨라졌다.
“힉, 아, 아-으…….”
푹, 푹, 푹, 기둥을 박아 넣을 때마다 손아래 허벅지가 버둥거렸다.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러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의식적인 행동인 모양이었다. 벌어진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졌다. 허공에 뜬 엉덩이에 굵은 기둥이 들락이는 모습이 적나라했다.
“아, 아, 응-.”
덜컹, 덜컹, 난폭하게 미는 힘에 탁자가 들썩였다. 그럴 때마다 화수는 아랫배를 꽉, 조였다. 사실 리 샤오가 붙잡고 있어 넘어가거나 할 일은 없었지만 반사적으로 긴장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 움츠러드는 몸을 리 샤오는 사정 봐주지 않고 억지로 벌리고 들어왔다. 꽉꽉 조이는 내벽을 벌리고, 안을 죽죽, 긁어 올렸다. 앞뒤로 움직이던 방향을 바꿔 이번엔 위에서 아래로 박아 넣었다.
끼익끼익끼익, 덕분에 조금 전처럼 크게 흔들리는 일은 없었지만 이번엔 나무 탁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럴 때마다 화수의 엉덩이도 바싹 올라붙었다. 조이는 힘에 자지가 아플 지경이었다.
“조이지 마.”
“으-읏.”
누군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압니까. 경고하듯 내뱉는 말에 화수도 할 말이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소리는 고작 신음소리뿐이었다.
츳, 하고 혀를 찬 리 샤오가 그때까지 발목에 걸려 있던 바지를 아예 벗겨내 휙, 하고 내던졌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덜컹거리는 탁자에 리 샤오의 것을 물고 있는 입구가 확 쪼여져 기둥은 빠지지 않고 안을 채우고 있었다.
“걱정 마.”
바지로 결박되어 있던 두 다리를 벌려 제 허리를 감게 한 리 샤오가 말했다.
“절대 안 떨어트릴 테니까.”
“…….”
얼떨떨해하는 표정을 오해한 것일까. 리 샤오가 손을 뻗어 화수의 손을 잡았다. 심지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붙잡은 손에 깍지가 끼워지자 화수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곧바로 리 샤오가 거의 끝까지 뺐던 성기를 찍어 누르듯 다시 집어넣었다. 기둥 끝이 또 다른 각도로 내벽을 죽- 긁어 올리자 화수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위로 쳐올리는 힘에 엉덩이가 위로 밀렸지만 붙잡힌 손의 반동으로 다시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힉-.”
퍽. 내려오는 박자에 맞춰 한 번 더 허리를 쳐올렸다. 반동 때문인지 조금 전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기둥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부들거리던 내벽이 다시 달라붙기 전에 재차 허리를 잡아 뺐다가 박아 넣기를 반복했다.
“아으-응.”
허리가 고정되지 않으니 들어오는 각도가 매번 달랐다. 게다가 이젠 안이 젖어 기둥이 들어올 때마다 더 깊은 곳을 찌르고 나갔다. 이러다 배가 뚫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깊고 거칠었다.
자꾸만 배에 힘이 들어갔다. 엉덩이가 올라붙었다. 조금 전 경고가 떠올라 조금 긴장했지만 리 샤오는 크게 상관없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들락일 때마다 쿨쩍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젖은 내벽으로는 아무리 화수가 힘을 주어도 움직임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 아아, 아.”
리 샤오가 몇 번 더 허리를 움직였다. 풀죽어 있던 화수의 것이 갑자기 튀어 올랐던 그 각도를 찾기 위해. 그러다 어느 순간 신음만 내뱉던 화수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잠-까, 아, 아.”
찾았다. 느긋하게 되뇐 리 샤오가 당황한 기색으로 화수가 바동거리는 손을 꽉 붙들었다. 그리고 방금 그 각도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허리를 쳐올렸다. 붙잡힌 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바르작대던 손이 어느새 리 샤오의 손을 꽉 붙잡아왔다. 리 샤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읏, 으, 아, 응, 아으…….”
퍽, 퍽, 퍽, 리 샤오의 사타구니가 엉덩이를 두들겼다. 엉덩이가 두들겨질 때마다 내벽이 확확, 조여들었다. 물론 젖은 내벽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나가는 기둥을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질척질척, 리 샤오의 것이 들어와 있는 부분에서 젖은 소리가 더 노골적으로 나기 시작했다. 내장이 다 녹아버린 게 아닐까, 그런 걱정마저 들었다. 그럴 정도로 리 샤오의 것은 뜨거웠다. 달궈진 쇠몽둥이로 아래를 꿰뚫리고 휘저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으아-”
눈앞이 아득해졌다. 감은 눈 안으로 물기가 차올랐다. 바짝 선 화수의 것이 줄줄 묽은 액을 싸고 있었다. 리 샤오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아직 싸지 마.”
“…….”
나직하고 분명한 지시가 떨어졌다. 화수가 헐떡이면서 겨우 눈을 떴지만, 흐릿한 시야 때문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손님 기분 맞추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니까.”
하지만 아마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시야가 분명치 않아 다행이었다. 아무리 화수라도 여러 번, 그것도 몸을 섞고 있으면서 그런 표정과 대면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시야가 선명해져도 바로 마주하지 않도록 시선을 빗겨나가게 두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리 샤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상체를 구부린 탓이었다. 손은 여전히 깍지를 껴 고정시킨 채 상체만 구부려 가슴을 파고들었다. 젖꼭지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화수의 얼굴 위로 난처한 표정이 번졌지만 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다고 그만둘 리 샤오도 아니었다.
깨물깨물, 이를 세워 젖꼭지를 살짝살짝 물었다 놓는다. 주변을 혀로 빙글이자 별로 크지도 않은 돌기가 바짝 섰다. 곤란해. 화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읏.”
젖꼭지를 물릴 때마다 찌릿찌릿한 자극이 배 아래쪽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슬쩍 허리를 뒤로 빼봤지만 아래가 연결된 채로는 소용없는 짓이긴 했다.
“역시 앞도 젖는군.”
앞 같은 건 관심 없다더니 직접 확인해본 모양이었다. 이러면서 싸지는 말라니. 무슨 악취미인가 싶었다.
“꼴에 사내란 말이지.”
“…….”
“왜. 기분 나빠?”
“아니요.”
진심이었다. 물론 상대는 전혀 믿을 생각이 없는 듯했지만.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지?”
“그냥, 가슴으로 느끼는 건 오히려 계집 쪽이 아닌가 싶어서요.”
“……역시 그 입은 다무는 게 좋겠어.”
눈매를 일그러트린 리 샤오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화수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가슴에서 관심을 떼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니 상관없었다.
노려보던 리 샤오가 고개를 조금 위로 끌어 올렸다. 입술이 화수의 가슴을 타고 올라 옴폭한 쇄골,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었다.
“자국은.”
제법 아프게 깨물린 화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남기지 말아주세요.”
“왜. 다른 손님이 싫어하나 보지?”
싫어해서라기보다는, 실은 진 사장의 놀림거리가 되는 게 싫었다. 이런 자국을 남기는 사람은 리 샤오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다른 곳은 몰라도 목 부분은 가게에 돌아갔을 때 한조가 눈치챌 가능성이 높았다. 제대로 된 화대를 받고 손님을 받는 게 아니라, 들키면 조금 곤란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구구절절 말하기도 구차해서 대충 리 샤오의 질문에 동조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예, 뭐.”
묻는 리 샤오의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아서 방심한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여긴 일이 이렇게 험악한 상황을 만들 줄은 몰랐다.
“장사 좆같이 하는군.”
물론 알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만. 애초에 화수는 뭔가를 변명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손님 앞에서 다른 손님 얘기 꺼내는 건 어디서 배운 버릇이지?”
무엇보다도 지금은 손님을 받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화를 돋우는 쪽을 택할 화수였다.
“몸뚱이가 제 유일한 장사 밑천이라서요.”
눈앞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화수는 태연히 눈꼬리를 접었다. 겁 없이 구는 것도 적당히 하라던 진 사장의 충고가 떠올랐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애초에 화수는 적당히 같은 건 배운 적이 없었다.
“……으-아으.”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아래가 뽑히는 것 같았다. 뽑히는가 싶던 아래로 다시 달궈진 쇠몽둥이가 박혀 들어왔다. 엉덩이가 단단히 조여들었다. 하얀 가슴팍이 울긋불긋했다.
하지만 그 커다란 것이 들락이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꿈틀거리는 내벽을 짓이기듯 벌리고 리 샤오의 살덩이가 안을 빠듯하게 채웠다가 이내 쑥, 빠졌다.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아, 으, 아.”
푹, 푹, 강하게 쳐올리는 힘에 기둥이 부피를 더했다. 빠질 땐 내장을 다 뽑을 듯 잡아 뺀다. 정말 아래가 다 없어져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 자꾸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식은땀이 났다. 이제는 안뿐만 아니라 겉까지 모두 젖었다.
“정신 차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나직한 경고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는 화수는 미간을 살풋 일그러트렸다. 이게 시작도 안 한 거면 어쩌라는 말인가. 조금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기분과는 별개로 경고를 한 리 샤오는 허리를 앞으로 밀 뿐이다.
쑥, 미끄러지듯 안쪽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기둥에 허공이 들린 두 다리가 버둥거렸다. 하지만 버둥거리는 두 다리의 발목은 리 샤오의 손에 붙들린 상태라 별 소용은 없었다.
다만 이번엔 경고 없이 발목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발가락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발목이 꽉 옥죄어졌다. 그러면서도 허리를 움직이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
“흣, 으, 읏……, 으.”
반쯤 들어왔다가 끝까지 들어오고, 아예 귀두 끝까지 다 잡아 뺐다가 끝만 잘게 들락인다. 그냥 들락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에 엉덩이 안쪽이 묵직해졌다. 마치 안쪽에 물이 가득 차오르는 것처럼.
하지만 기분 탓만은 아닌지 들락이는 접합부에서 이제는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밖에서 쏟아지는 빗소리가 이렇게 큰데, 그럼에도 자신의 몸에서 나는 소리는 감춰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미칠 것 같은 기분. 화수가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리를 들썩였다.
“아으응.”
발목을 붙잡혀 무릎만 구부려진 다리가 벌벌 떨렸다. 슥슥슥슥, 그대로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자 안이 흐물흐물해졌다. 벌리면 벌리는 대로 문지르면 문지르는 대로 길이 나고,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이 생생했다.
“힉- 익.”
진저리를 치는 발목을 리 샤오는 너무도 쉽게 제압했다. 그나마 자유롭게 두었던 두 다리를 바깥쪽으로 활짝 벌렸다. 바싹 땅겨진 허벅지 안쪽 피부가 아플 지경이었다. 물론 그 아픔을 느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번엔 위에서 아래로, 성기가 박혀 들어왔다.
푹, 푹, 푹, 안 그래도 굵은 기둥에 체중까지 실리자 안이 더 벌어지고, 더 깊은 곳이 찔렸다. 내벽이 벌벌 떨렸다. 토기가 일었다. 몸을 뚫은 기둥이 그대로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읏, 으, 으!”
척, 척, 척, 질척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엉덩이를 두들겨 맞는 것 같은 기분에 엉덩이가 쪼여들었다. 숨이 엉켰다. 들락이는 박자를 예상할 수가 없었다. 깊게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얕게 들어오고, 얕게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배를 꿰뚫듯 들어온다. 작살에 몸을 꿰뚫린 물고기처럼 화수는 파드득거렸다.
“……힉, 히익-!”
그렇게 미치겠는 와중에도 몸은 솔직했다. 들락이는 엉덩이 안쪽이 근질거렸다. 정확히는 입구 쪽 부근이 근질거리는 듯했지만 사실 확실치 않았다. 제 몸인데도, 전혀 제 몸 같지가 않았다.
“아, 아, 안, 응-”
헐떡이던 화수가 급하게 손을 아래로 내뻗었다. 리 샤오를 밀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워낙 다급해서 그런 것뿐이었다.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허리를 미는 손은 맥없이 리 샤오의 손에 붙잡혀 결박됐다. 왼쪽은 발목을 오른쪽은 손목을 붙잡힌 채 그대로 삽입당했다.
“아, 아, 으, 아-. 응……!!”
엉덩이 안쪽이 점점 더 묵직해졌다. 이번엔 물이 아니라 시뻘건 쇳물이 몸 안쪽을 가득 채웠다. 아래가 흐물흐물해지고, 그게 온몸을 들끓게 했다. 아랫배가 단단해졌다. 아무리 힘을 주어 버티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마저도 뒤를 꿰뚫리니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조차 않았다.
아아아.
결국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던 화수가 앞이 쑥 꺼지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벌어진 입에서 제대로 신음이 흘러나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온몸이 끝도 없이 아래로 끌어 내려지는 감각. 토정이었다.
“하아.”
흠칫. 눈도 뜨지 못하고 사정감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화수가 낮은 한숨소리에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이번엔 제 잘못만은 아니었다.
“누가 멋대로 싸도 된다고 했지?”
“…….”
그래서 그만두라고, 말하려고 한 것인데. 전혀 듣지 않은 쪽은 리 샤오였다. 물론 지금 그런 것을 따져 물을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지금 이게 장난인 것 같아?”
“…….”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건 아무리 겁 없는 화수도 알 수 있었다. 얼어붙은 공기가 따끔따끔거려 고개를 저을 수조차 없었다. 굳은 채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있으려니 잠시 그런 화수를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손을 내뻗었다.
처음엔 목이 졸리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리 샤오의 커다란 손이 제 목덜미를 향해 내뻗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화수는 미동도 할 수 없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제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버릴 듯했다.
슥.
하지만 리 샤오의 손이 닿은 곳은 화수의 목에 걸려 있던 넥타이였다. 존재도 잊고 있었던 타이가 목을 긁으며 빠져나갔다. 셔츠 한 겹이 그 사이에 있었음에도 마찰열에 목덜미가 뜨끈했다. 갈무리되지 못한 숨 때문에 가슴이 얕게 할딱인다. 불안한 시선이 리 샤오를 쫓는다.
손목이라도 묶으려는 걸까. 하지만 그런 화수의 예상과는 달리 타이가 향한 곳은 조금 더 아래쪽이었다.
설마.
뒤늦게 뭔가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잠까, 히-익.”
쓱, 어찌해볼 틈도 없이 타이가 아랫도리를 조였다. 실크로 된 보드라운 천이었지만 유난히 얇은 살갗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온몸이 퍼드득, 튀어 올랐다.
아직 사정감이 남은 살덩이는 손으로 만지는 것에도 민감했다. 하물며 그것이 묶였으니 느껴지는 자극은 상상을 초월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쭉, 났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러면서도 아랫배로는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몸이 통제를 벗어난 느낌에 화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온몸을 떨었다.
“으, 으…….”
본능적으로 아래로 향하던 손은 곧바로 리 샤오의 손에 붙들렸다. 두 손이 머리 위 탁자에 눌려 고정되었다. 숙여진 리 샤오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을 향해 리 샤오가 태연히 물어왔다.
“아파?”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질적이었다. 마치 이 고통의 원인이 자신이 아닌 것마냥. 실제 겪고, 당하고 있는 화수조차도 순간적으로 착각할 뻔했다.
“아으응-”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상관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말로 하는 건 못 알아 처먹는 거 같아서.”
“…….”
저를 올려다보는 화수의 턱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제 좀 알아듣겠어?”
“…….”
대답은 없었지만 그런 화수의 모습에 만족한 듯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던 리 샤오가 화수의 몸에서 제 것을 쑥, 뽑아냈다. 부르르, 몸을 떠는 화수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붙잡혔던 팔이 들려 몸이 일으켜졌다. 일으켜지기 무섭게 몸이 뒤집혔다. 눈앞에 탁자가 있었다. 상황을 머리로 인식하기 전 등 뒤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짚어.”
“…….”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
다행히 멍한 머리보다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내뻗어진 손이 탁자를 짚었다. 두 번 말하게 하면 이번엔 어떤 체벌이 내려질지 절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세워진 다리가 벌벌 떨렸다. 아무리 힘을 주어 버티려고 해도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바싹 다가선 리 샤오가 화수의 두 다리를 벌리고 그 안으로 자신의 아래를 집어넣었다.
“아, 아-”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바싹 선 것이 비벼졌다. 안 그래도 얇은 피부인 데다 이미 셀 수 없이 비벼진 탓에 잔뜩 부어 있는 부위를 델 듯이 뜨겁고 단단한 것이 비벼대자 뜨끔한 통증마저 일었다.
“힘줘.”
배 아래로 들어온 손이 화수의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엉덩이가 벌어졌고 구멍에 맞춰진 기둥이 다시 안을 파고들었다. 찌걱, 거리며 밀고 들어오는 기둥에 엉덩이가 조여들었다. 하지만 삽입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끄러지듯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아.”
리 샤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꽉 문 것도 모자라 쭉쭉, 빨아먹고 있었다.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내쉰 리 샤오가 반쯤 남은 기둥을 끝까지 한 번에 집어넣었다.
“으아. 아, 으.”
반사적으로 엉덩이가 뒤틀렸다. 하지만 이미 그럴 것을 예상했다는 듯 리 샤오가 한쪽 손으로는 배 아래쪽을, 다른 한쪽 손으로는 등허리를 눌러 꽉 화수를 고정시킨 뒤였다.
“으, 으.”
고개를 숙인 화수의 입에서 어쩔 줄 모르겠는 신음이 줄줄 새어 나왔다. 누르고 있는 등허리가 꿈틀꿈틀,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리 샤오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끝까지 다 집어넣은 것을 빙글여 휘저은 뒤 쑥, 잡아 뺐다. 그리고 끄트머리까지 잡아 뺐던 것을 퍽, 하고 박아 넣었다.
탁자를 짚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잡을 것이 없어 나무 탁자를 긁어 내리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안에 들어왔던 것이 도로 뽑혀 나갔다.
“이제 힘 빼.”
꽉꽉 조여대는 화수에 리 샤오가 이번엔 조금 전 명령과 아예 반대되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그게 화수의 의지로 불가능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철썩.
자꾸만 꽉꽉, 조여대는 화수의 엉덩이를 리 샤오가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엉덩이를 맞는 순간 확 조여들었던 내벽이 이내 흐물흐물해졌다.
철썩. 이번엔 아예 허리를 콱, 밀어 넣으며 엉덩이를 두들겼다.
“아으응.”
화수가 진저리를 쳤지만 아랫배를 붙잡은 손이 앞으로 도망치려는 몸을 단단히 붙들고 있어 아무 소용 없었다.
퍽. 퍽. 퍽. 퍽.
허릿짓이 빨라졌다. 들어올 때 확 조여들었다가 나갈 때 흐물흐물해지는 내벽이, 속도가 빨라지자 점점 박자가 엉켰다. 기둥이 들락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나갈 때 조이고, 들어올 때 흐물흐물해졌다.
“히-익.”
그러다 어느 순간엔 완전히 흐물흐물해진 곳으로 기둥이 박혀 들어왔다.
“시, 싫어…….”
화수의 몸에서 나온 기름이 아예 연결된 부분에서 줄줄 새고 있었다. 질척, 질척. 젖은 소리도 노골적으로 커지고 있었다.
“싫어?”
허물어지는 화수의 몸을 추어올리던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손안에서 화수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앞을 세우고서, 뭐가 싫다는 거지?”
“…….”
화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도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앞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가 팽팽하게 당겨져 피부가 쓰라렸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다행히 리 샤오는 거기에 대해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버텨.”
그렇게 경고한 리 샤오가 화수의 다리 사이에 끼워놓았던 두 다리를 바깥쪽으로 옮겼다. 한 손으로 배를 끌어 올리고 제 다리 사이에 화수의 엉덩이를 꽉 끼웠다. 그러고는 이제는 위에서 아래로 박아 넣기 시작했다.
푹, 푹, 푹, 시뻘겋게 달궈진 쇠몽둥이가 박혀 들어왔다. 다리가 오므려지자 입구가 좁아져 들락일 때마다 부피가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아프진 않았지만 안이 가득 차는 느낌이 이상했다.
“아, 아, 아. 으, 응. 응…….”
좁은 내벽을 죽죽 긁어 올린다. 위에서 아래로 죽, 긁어 내렸다가, 아래에서 위로 밀어 올리듯 긁는다. 내벽이 부들부들 떨렸다. 움찔움찔, 거리며 쇠기둥을 조였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흐으응……!”
단단한 끄트머리가 어딘가를 확, 긁어 올렸을 때 화수의 엉덩이가 아래로 꺼졌다. 버티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지만 이번엔 경고가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체중을 실어 꺼지는 엉덩이를 따라 내려왔다. 도망치는 것 따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쫓아온 기둥이 다시 끝까지 들어왔다. 체중까지 실어 조금 전 긁어 올렸던 부위를 더 분명하게 문질렀다.
“아으응!”
엉덩이가 근질거렸다. 사실 엉덩이보다 더 근지러운 쪽은 팽팽하게 조여진 앞쪽이었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화수에게는 그런 것을 구별할 정신이 없었다. 어느 쪽이든 화수를 미치게 만드는 건 똑같았다.
“가만히.”
나직이 중얼거리며 리 샤오가 퍽, 하고 허리를 쳐올렸다. 진저리를 치는 화수의 등을 콱 탁자에 눌러 고정시켰다. 손바닥 아래로 미세한 경련이 느껴졌다. 경련하는 몸을 누른 채 조금 전 그 각도로 허리를 추어올렸다.
슥, 하고 빠졌던 기둥이 퍽, 하고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뒤로 빠졌던 기둥이 다시 들어올 줄 알고 숨을 멈췄다가 들어오지 않자 숨을 내쉰 순간, 퍼억, 하고 박혀 들어왔다. 안이 빠듯했다. 숨이 헐떡였다. 박자가 엉켜, 숨을 쉴 틈을 찾지 못했다.
“아, 으, 으, 아.”
호흡이 엉키니 꼴사나운 신음들이 마구 터졌다. 다행히 색기라고는 전혀 없는 신음소리에도 리 샤오는 전혀 식지 않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오히려 점점 더 기둥이 커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바닥을 딛고 있던 발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딜.”
비틀거리는 몸짓을 도망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리 샤오가 화수의 허리를 꽉 눌렀다. 난폭한 삽입이 다시 시작되었다.
잘게 들락이고 깊고 강하게 들어온다. 빨랐다가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화수가 헐떡였다. 비벼지는 구멍이 뜨끈했지만 사실 화수의 모든 신경은 묶인 제 성기에 있었다.
싸면 안 돼.
잔뜩 발기한 것이 또 가버리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몰라 몸이 벌벌 떨렸다. 붕鵬도 아닌데 왜 이렇게 몇 번이고 발딱발딱 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괜한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이런 고생도 하지 않았겠지만, 이미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다.
방법이 없었다. 먼저 가지 않도록 집중하는 것밖에는. 하지만 리 샤오는 마치 화수의 몸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화수가 느끼는 곳을 죽죽, 긁어 올렸다.
몇 번이고, 화수의 구멍을 뚫고 또 뚫었다. 아래가 다 녹아버릴 것 같았다.
“아아으.”
밀려 올려진 내장이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니, 기둥 자체가 몸을 꿰뚫어버릴 것 같았다. 꼬치에 꿰어진 고기 신세가 된 것 같았다. 등줄기가 축축했다.
눌린 목덜미가 젖어 있었다. 거친 삽입에 입고 있던 셔츠가 흘러내려 등이 다 드러났다. 새하얀 어깨, 등을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그리고 한곳에 멈췄다.
퍽.
오른쪽 견갑골 위에 시선을 둔 채 거칠게 박아 넣는 리 샤오의 눈빛이 무시무시했다. 만약 눈앞에 사람이 있었다면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도 있을 법한 눈빛이었다. 화수의 날개에 잇자국이 나 있었다. 분명 제가 남긴 자국은 아니었다.
“이래놓고 자국을 남기지 마?”
허공을 응시하는 눈빛이 더 흉흉해졌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화수는 그 눈빛을 볼 수가 없었다.
“아, 아, 앗, 아아…….”
정신없는 와중에 무슨 소리를 들은 듯했지만 그것을 되물을 틈은 없었다. 쉬지 않고 계속되는 삽입에 등줄기가 올라붙었다. 온몸이 쩌릿쩌릿했다.
묶인 화수의 끝에서 투명한 액이 줄줄 흘렀다. 싸고 싶은데, 싸고 싶어 죽겠는데 못 하는 고통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사내들이 왜 그렇게 색사라면 미친놈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지를 이제야 이해할 것 같은 화수였다. 화수가 이마를 탁자에 비비며 애원했다.
“제발, 아, 제발, 어떻게, 좀.”
미칠 것 같았다.
지금 같아서는 이것만 풀어주면, 쌀 수만 있게 해주면 리 샤오의 발가락이라도 핥을 수 있을 듯했다.
“가고 싶나?”
헐떡이며 애원하는 화수에게 리 샤오가 나직이 물었다. 화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못 한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몸이 자유로웠다면 분명 무릎을 꿇고 빌면서 애원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렇게 압박당하고 있어 그런 꼴을 면해 다행이다 싶었다.
“아직은 안 돼.”
하지만 그런 화수에게 돌아온 것은 딱 자른 거절. 그렇게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리 샤오의 목소리에서 조금 전에 비해 확 기분이 상한 것이 느껴졌다. 물론 조금 전에도 기분이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울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아직은, 이라는 단서가 붙은 것을 보면 그나마 아예 풀어줄 생각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이 이런 것이겠지.
“읏, 아, 응, 으으응.”
퍽, 퍽, 퍽, 퍽, 삽입이 아니라 숫제 엉덩이를 두들겨 맞는 것 같았다. 체중과 반동 때문에 더 깊이까지 들어와 박혔다. 바닥을 딛고 있는 발가락이 꽉 조여들었다. 안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일었다.
“아아……, 아, 아-”
쭉쭉 빨아대는 내벽에 성기를 뽑았다가 박아 넣었다. 굵은 귀두가 주욱, 안을 긁어 올렸다. 화수의 것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다행히 끝을 묶인 탓에 토정은 하지 못하고 액만 줄줄 흘렸다.
“힉-, 익-!”
대신 안이 확 조여들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오므라든 안을 찢어발기듯 뽑아낸 기둥을 다시 한 번 집어넣었다. 퍽, 이번엔 기둥이 아닌 뜨거운 것이 안을 쳤다. 그것이 리 샤오로 가득 찬 곳을 다시 한 번 빠듯하게 채웠다. 아래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감각에 화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긴 손가락이 매듭 사이로 들어와 타이를 풀어 내렸다. 배꼽 아래에서 들끓던 화기가 그대로 밖으로 튀어나왔다. 벌어진 입에서 갈무리하지 못한 신음이 터졌다.
“아아아-”
눈앞이 쑥 꺼졌다.
“흣.”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조임으로 물고 있던 자지를 꽉 물었다. 안을 가득 채웠던 정액이 뿌직뿌직,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감각에 화수가 한 번 더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웅크리는 몸을 리 샤오가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앞의 견갑골에 콱, 이를 박아 넣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건방진 소리를 하면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그런 일은 없었다. 그대로 화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슥.
허리를 굽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상의를 집어 들었다. 바닥에 쌓였던 허연 먼지가 고스란히 묻어난 검은 장교복을 보고 리 샤오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그는 옷을 소리 내어 털지 않았다. 조용히 팔을 꿰면서도 눈으로는 탁자 위를 훑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마치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시선은 이미 그곳에 가 있었다.
그 날카로운 시선 끝에 새하얀 몸이 들어왔다. 화수가 입은 것은 흰 셔츠가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다 흘려 내려 팔에 걸쳐 있다고밖에 할 수 없었지만. 리 샤오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진다. 결국 반쯤 팔에 걸려 있는 옷을 도로 내렸다.
풀썩.
화수의 몸 위로 상의가 덮였다. 그런 와중에도 화수는 미동조차 없었다. 이내 리 샤오가 방향을 틀었다.
삐걱. 안 그래도 낡은 데다 습기까지 머금은 나무문이 뻑뻑했다. 문을 열자 물비린내가 더 짙어졌다. 지나가는 소나기인 줄 알았던 비는 여전히 부슬거리고 있었다. 처마 밑으로 크고 작은 물웅덩이가 잔뜩 생겨나 있었다. 발끝에 걸린 웅덩이 중 하나가 유난히 색이 짙었다.
화수의 상의였다. 어디 갔나 했더니, 끌려 들어가기 전 흘린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리 샤오가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으로 물에 닿지 않은 부분을 잡아 올리자 빨래통 속 천처럼 물을 잔뜩 머금은 상의가 끌려 올라왔다.
툭.
아무리 봐도 회생이 불가능해 보여 도로 놓으려던 때였다. 리 샤오가 잡고 있던 곳이 옷의 아래쪽이었던 터라 본의 아니게 뒤집어 들었던 옷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집어 든 종이봉투도 상태는 젖은 옷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로 집어넣으려던 리 샤오가 멈칫했다. 물에 젖은 봉투에서 한약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꿔 봉투를 열자 더 작게 종이로 접어둔, 조그만 뭉치들이 보였다. 하나를 꺼내 쥐고 나머지는 다시 양복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찰박찰박. 젖은 소리에 고개를 들자 빗속을 뛰어다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우산 있어요! 우산이요!”
우산을 팔러 다니면서 정작 본인은 비를 홀딱 맞고 있었다. 뛰어오던 아이가 사람 기척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달려왔다가 이내 멈칫한다. 눈치를 살피다 리 샤오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그제야 얼굴에 화색을 띠며 달려왔다.
“우산 드릴까요, 나으리?”
아이의 머리에 쓰고 있던 천 모자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니.”
딱 잘라 고개를 내젓는 리 샤오에 아이의 얼굴 위로 긴장감이 서린다. 우산을 살 게 아니면 자신을 왜 불렀나, 싶었던 것.
“우산은 됐고.”
“……그럼, 요?”
“심부름 하나만 해.”
“아, 예!”
우산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건지, 괜히 험한 꼴을 당하지 않을까 싶어 잔뜩 졸아 있던 아이가 의외로 평범한 내용에 안도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리 샤오가 나열하는 몇 가지 정보를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혹여 잊기라도 할까 입으로 되뇌기까지 했다.
“자.”
뻗어지는 손에 반사적으로 내밀었던 손바닥 위로 동전이 놓였다. 위로 들리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심부름값.”
“……가, 감사합니다, 나으리.”
사실 그냥 시켜도 되는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런데 종일 우산을 팔아도 못 버는 돈이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아, 이거, 이거라도 쓰셔요.”
고작 심부름 한 번에 이리 큰돈을 받는 것이 조금 양심에 걸렸던지, 아이가 들고 있던 우산을 꺼내 내밀었다. 나무 살에 한지를 발라 만든 우산이라 한 번 쓰고 버려야 하는 것이었지만 리 샤오는 필요 없다는 말 대신 바닥에 두라는 듯 턱짓을 했다. 바닥에 내려놓으려던 아이가 젖은 바닥에 머뭇거리다 가게 입구 옆, 벽 쪽에 얌전히 세워두었다.
“얼른 갔다 올게요!”
굳이 다시 돌아올 필요는 없는 용건이었지만 리 샤오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함박웃음을 지은 아이가 다시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제는 우산 정도는 써도 되건만 신이 난 아이는 은전을 쥔 채 달리는 것 말고는 무엇도 생각이 나지 않는 듯했다.
빗소리에 묻혀 찰박거리는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쯤 리 샤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찾아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다 이내 멈칫한다. 상의 안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게 생각난 탓이다.
하필. 한쪽 눈썹이 살풋 위로 올라간다. 잠시 고민하던 리 샤오가 몸을 돌렸다. 닫아둔 문을 다시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잠시 열린 문 앞에서 멈춰 시선을 준다. 사람이 나갔다 들어오는데도 아래로 감긴 눈은 미동조차 없었다. 한쪽 눈매가 찌푸려진다. 저벅저벅, 다가서는 걸음에 어쩐지 속도가 높아져 있었다.
그래놓고 정작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입만 떼면 사람 성질을 긁는 녀석이 눈을 감고 있으니 조금 봐줄 만했다. 잠시 멈춘 채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손을 뻗었다. 숨은 쉬는 건가, 싶었던 것.
슥.
손이 화수의 얼굴을 향해 내뻗어졌을 때였다. 거짓말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말간 눈동자에 리 샤오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 멈췄다. 라이터만 가지고 도로 나갈 생각이었던 터라 열어둔 문틈으로 빗소리만이 내려앉은 침묵을 가득 채웠다.
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침묵을 깬 쪽은 화수였다.
“저도.”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미 익숙한 일이라는 듯 반쯤 몸을 일으키며 그대로 손을 내뻗었다. 나른하게 내리깔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어느새 다가온 새하얀 손이 리 샤오의 입에 물린 담배를 가져갔다. 그제서야 저도, 라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습관이 돼서.”
화수가 가져간 담배를 입에 물 때까지도 리 샤오는 미동도 없이 굳어 있었다. 아차 싶어진 화수가 뒤늦게 사과를 했지만, 그건 안 하니만 못한 사과였다.
사실 리 샤오가 굳어 있었던 이유는, 화수가 짐작하는 것처럼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었다. 타인이 제 입에 물린 담배를 가져가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전혀 경계하지 않았음을, 심지어 그것이 전혀 기분 나쁘게 생각되지도 않았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이 녀석에게,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힐 정도로 경계를 풀고 있었다는 데 충격을 먹고 잠시 굳어 있었던 것이지만, 그를 화수가 알 리 없었다.
게다가 화수의 사과를 듣는 순간, 정확히는 습관이라는 부분에서, 리 샤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더없이 사나워졌기 때문에 더더욱, 진실을 알기 어려워졌다.
“죄송합니다.”
이미 입에 문 것을 돌려줄 수도 없어 손에 쥔 채 화수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나마 내려다보던 시선이나마 떨어져 나갔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일어났으면, 옷부터 입어.”
“네, 네.”
의외로 고저가 없는 목소리에 화수가 황급히 탁자 위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바닥을 딛는 순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니, 고꾸라질 뻔했다. 붙잡아주는 커다란 손이 아니었다면 얼굴을 바닥에 갈아버릴 뻔했다.
“죄송-”
“일부러 그러는 거야?”
“…….”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 같으면 애초에 움직이지 마.”
“…….”
그 말이 단순히 걷는 것만 얘기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먼저 도발한 쪽은 자신이었다. 그래놓고 또 저만 몇 번이나 가고, 결국에는 기절까지 해버렸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 것도 당연했다. 이제는 사과를 하기도 민망해져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화수를 밀치듯 탁자에 앉힌 리 샤오가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집어 올렸다. 미리 말을 했으면 제가 주워 줬을 거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알았다고 하더라도 감히 리 샤오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고맙, 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져 묻는 대신 고맙다는 인사로 대신한다.
바지를 건네받은 화수가 다리를 꿰었다. 젖은 데다, 아무렇게나 벗어 바닥을 나뒹굴었던 터라 바지 여기저기에 얼룩덜룩한 무늬가 생겼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감시하듯 노려보고 있는 시선에 몸이 마치 남의 몸처럼 삐걱거렸다. 그래도 고꾸라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겨우 두 다리를 꿰어 넣은 뒤 막 바지 버클을 잠그려고 할 때였다.
“이건, 안 입어도 되나?”
리 샤오의 손에 들린 것은 화수의 흰 속옷이었다.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린 화수가 그것을 홱 낚아챘다.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낚아챈 것은 바지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었다. 정신이 없긴 없는 모양이었다. 리 샤오만 앞에 있으면 이상하게 멍청이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제 몸이 제 통제를 벗어난 느낌.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눈앞에 보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는 걸 보면 제 성격도 어지간하다 싶지만.
“상의는 밖에.”
바닥을 훑는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리 샤오가 한마디 한다. 아. 뒤늦게 끌려 들어오면서 떨어트렸던 것을 기억해냈다. 안 봐도 어떤 상태일지가 짐작되어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옷은 둘째 치고, 그 안에 넣어둔 약봉지가 생각난 탓이었다.
“변상은 하지.”
이것까지. 그렇게 덧붙인 뒤 리 샤오의 시선은 바닥을 나뒹구는 넥타이를 향했다. 어두운 색 타이에 엉겨 붙은 하얀 점액질을 본 화수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됐습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화수가 정중히 거절했다. 제가 뿌린 씨앗이기도 했고. 애초에 저도 하고 싶어서 한 것이었다. 몸을 파는 남창이긴 하지만 제 물건까지 변상하라고 할 만큼 궁색한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왜. 내가 사주는 건 받기 싫은가?”
“…….”
화수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이거 혹시. 설마, 하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 주시겠다는 말이었습니까?”
“그럼 훔쳐서 줄까 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변상이라고 하기에 또 돈으로 준다는 말인 줄 알았다.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리 샤오가 허리를 굽혀 엉망진창인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 정액인데도 손에 닿고 싶지 않은 것을 잘도 집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남의 속옷도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었지. 확실히 비위가 좋긴 한 모양이었다.
“이건 잘도 받아놓고, 내 건 싫단 말이지.”
“…….”
어떻게 알았지?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리 샤오의 짐작대로 이 넥타이는 진 사장이 준 것이었다. 무역업을 하고 있는 진 사장은 가끔 특이한 물건들을 던져주곤 했다.
보통 손님이 주는 선물은 거절하는 화수이지만 진 사장의 것은 귀찮아서 그냥 받아 썼다. 처음 몇 번은 거절도 해봤지만 진 사장이 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소용없더라는 경험을 한 뒤로는 더 이상 거절하지도 않았다. 의외로 진 사장의 취향이 화수의 취향과 비슷해 제가 산 물건들보다도 손이 더 가서 더욱 그랬다. 눈앞의 넥타이도 그런 물건 중 하나였다.
그게 그렇게 자존심이 상했나.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날카로워진 이유를 화수는 그렇게 짐작했다. 안 그래도 조금 전 정사 중에 다른 손님을 언급해서 기분이 상했는데, 자신이 주겠다는 건 거절하면서 다른 손님이 준 것은 받았다면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선물이라면.”
화수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평소라면 상대가 자존심이 상했든, 기분이 상했든 상관도 하지 않았을 화수가, 지금은 눈앞의 사내의 화를 조금이나마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물론 예쁜 말이나 행동으로 푸는 방법 같은 건 모르니, 그가 원하는 거라도 해주자 싶었다. 그러면 조금 기분이 풀리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하지만 화수는 운이 나쁜 편이었다. 특히 리 샤오와 관련되는 일에는 유독 더 그랬다.
“대장.”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리 샤오와 화수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반쯤 열린 틈새로 보이는 얼굴의 주인은 리 샤오의 수하인 카이였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대답이 한 박자 늦긴 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눈으로 확인하긴 했으나 본인에게 직접 대답을 듣는 것으로 더 확실해진 리 샤오의 안위에 이번엔 망설임 없이 카이의 시선이 화수에게로 옮겨갔다.
여러 가지 의문들이 카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질문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눈앞에 놓인 몇 가지 정황들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뿐. 몇 가지는 추측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잠시 상점가를 둘러보러 간 리 샤오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이유. 눈앞의 사내가 원인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웬만한 것은 대충 다 정리한 카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실제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테지만, 바로 이런 낡고 지저분한 장소에서 리 샤오가 이 사내를 안았다는 거였다. 정리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지저분한 것은 딱 질색하는 리 샤오가. 이런 먼지투성이인 장소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 옷을 벗고, 몸을 섞었다니.
심부름꾼 아이가 이곳을 가리켰을 때만 해도 카이는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카이의 예상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사실 지금도 눈으로 보고는 있지만 머리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인지 부조화의 상태였다. 심지어 그의 손에 들린 묘한 물건을 보자-군데군데 묻은 하얀 것이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것일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시점에서 이미 틀려먹은 가설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카이의 머릿속은 더욱더 혼란해졌다. 하지만 그 혼란한 정신으로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저 남창만 관련되면 자신의 대장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이상해진다는 걸. 그것만은 확실했다.
“차에서 기다릴까요.”
“됐어.”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읽은 카이가 물었다. 질문이긴 했지만 당연히 그러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고 한 발 뒤로 물러서려고 했으나 딱 자른 대답이 돌아왔다. 한 발 뒤로 뺏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그러다 몸을 돌린 리 샤오가 문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옆으로 비켜서며 문을 좀 더 열었다. 리 샤오가 지나오기엔 조금 좁아 보였기 때문이다. 문을 닫다가 다 못 닫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리 샤오가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도 한 발 앞서서 걸어간 카이가 가게 바로 앞에 세워둔 차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오르는 리 샤오를 확인한 후 문을 닫았을 때였다.
“저기.”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카이가 몸을 틀었다. 화수가 입구에 서 있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바로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타시죠. 가게까지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카이의 말에 화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내밀었다. 그제야 카이는 그것이 리 샤오의 상의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리 샤오가 겉옷을 입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남에게 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지하는 것이 조금 늦었다.
“가져가.”
뒤늦게 옷을 받아 들려는 순간 창문이 내려진 차 안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보다 먼저 인식한 쪽은 화수였다.
“괜찮-”
“타고 갈 거 아니면, 입어.”
“……고맙습니다.”
타고 가든지, 옷을 입고 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이쪽이 그나마 나았다. 머쓱한 표정으로 카이가 손을 뒤로 물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화수가 천천히 그것을 꿰어 입었다. 몸이 가늘긴 하지만 그래도 키가 큰 편인데도 리 샤오의 옷을 입은 화수는 어른 옷을 입은 아이의 꼴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젖은 셔츠가 가려지긴 했다. 그나마 눈 둘 곳이 생겼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들를 곳이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는 화수의 시선은 바닥에 나뒹구는 제 상의에 있었다. 그런 화수의 시선을 따라 카이도 시선을 돌려 회생불능의 옷을 발견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라도 그것만으로는 상황의 추측이 어려웠다. 양장점이라도 가려는 것인가.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사실 빈약한 추측이었다. 이미 천이 망가진 옷을 뭐 어쩌겠는가.
“그럼.”
리 샤오가 기다리고 있는 터라 카이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짧게 인사한 카이가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카이.”
다시 한 번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 카이가 걸음을 멈추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눈앞의 사내를 억지로라도 태우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빨리 안 타고 뭘 꾸물거리고 있냐는 타박이 돌아오리라 추측했건만, 다음에 들려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 녀석, 돈 줘.”
“……아, 네.”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화대를 지불하라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카이가 주머니를 뒤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알아서 드렸어야 했는데.”
카이가 지폐를 꺼내 내밀었지만 화수는 그것을 받아 들지 않았다. 조금 충격받은 표정으로, 그것을 가만히 보던 화수가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사내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가 싶어 카이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표정을 지운 화수가 그것을 낚아채듯 가져가더니 그대로 카이를 스쳤다.
찰박찰박.
카이의 시선이 화수를 따라 움직였다. 어라? 하는 사이 이미 화수는 차창 문 앞에 서 있었다.
“화대는 이미 받은 것으로 아는데요.”
“…….”
“이딴 거 안 주셔도 제 주제가 남창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휙, 하고 던지듯 안으로 돈을 집어넣는 손을 단단한 손이 꽉, 붙잡았다. 뿌리치려고 했지만 힘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오히려 화수의 몸이 차 쪽으로 바싹 당겨졌다.
그제야 차 안의 리 샤오의 표정이 보였다. 감히 남창 주제에 건방지게 군다고 화를 잔뜩 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얼굴은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굳이 따지자면, 기가 막혀하는 표정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것이 추측만은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리 샤오가 입을 열었다.
“돈 없는 거 아니었나?”
“…….”
일순 침묵이 흘렀다. 당황한 표정으로 굳어 있던 화수가 머뭇거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건, 화대가 아니라.”
“…….”
“……죄송합니다.”
대답은 없었지만 화수는 조용히 사과했다. 정작 본인도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챙겨줬는데, 괜한 자격지심에 욱해서 또 사고를 치고 말았다. 물론 당장 차비가 없어도 상관없었기 때문이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은 쪽은 자신이었다. 뒤늦게 후회했으나, 소용은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 오늘만 몇 번을 듣는 건지 모르겠군.”
“…….”
바스락. 기분이 상한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화수의 손에 종이를 쥐여 준다. 그것을 화수도 조용히 쥐었다. 손목을 붙잡았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붙잡혔던 손목이 뜨끈했다. 지켜보던 카이가 슬그머니 앞좌석에 올라탔다.
“저기 있는 우산 가져가.”
비슬비슬 물러서는 화수에게 나직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문 앞을 보자 우산이 놓여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차가 출발한 뒤였다. 빗속으로 사라지는 차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화수가 방향을 틀었다. 그러곤 문 앞에 놓인 우산을 집어 들었다.
이건 또 언제 사뒀대.
팡. 소리를 내며 종이우산이 펼쳐졌다.
아마도 제가 잠든 사이에 가버릴 생각으로 사둔 모양이었다. 차가 도착하기 전에 깨지 않았다면 어둡고 낯선 가게 안에서 혼자 일어났을 거라 생각을 하니 등줄기가 오싹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 때문인지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꽃 다 지겠네.”
어깨를 움츠렸던 화수가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어쩐지 쓸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이내 빗속으로 걸음을 내딛는 화수의 얼굴은 종이우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 * *
흘낏.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카이가 슬쩍 뒷좌석을 살폈다. 리 샤오는 좌석에 몸을 깊게 묻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늘 그렇지만 자신의 상관의 기분은 표정으로는 알기가 어려워 괜스레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러다 문득 이쪽을 향한 눈과 떡하니 마주치고 말았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리 샤오는 이미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제 시선이 다소 노골적이었던 모양.
“축제 구경은 잘하셨습니까.”
민망한 마음에 카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요즘처럼 바쁜 시기에 한가롭게 축제 구경-굳이 따지자면 구경보다는 탐색에 더 가깝겠지만-이라니 믿기 어려운 소리였지만, 카이는 자신의 대장이 지금처럼 유독 사람이 많이 몰리는 이 시기면 이곳 상점가를 돌아다니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그 가벼운 질문에 마주한 눈동자가 탁해졌다. 그의 등 뒤로 갈무리되지 못한 짜증스러운 기색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입을 다무는 쪽이 좋았나,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끝이 난 줄 알았던 대화가 이어졌다. 카이의 고개가 한 번 더 꺾였다.
“난 돌아가라고 한 것 같은데. 그렇게 전하지 않았나?”
“……아.”
물론 아이는 제대로 전했다. 늦어질 것 같으니,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라고. 그 명령에도 아이에게 위치를 물어 찾아온 것은 카이였다. 처음엔 비 때문에 늦는가 보다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산장수를 심부름까지 보내면서 본인은 오지 않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인 줄 알았다면 그냥 돌아갔을 테지만.
“아무래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할 것 같아.”
“…….”
“죄송합니다.”
“됐어.”
고개를 숙여 잘못을 고하자 시큰둥한 대꾸가 돌아왔다. 표정을 살폈지만 기분을 알 수 없는 표정은 여전했다. 그나마 고개가 창밖으로 꺾이는 것을 보고 카이도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물론 곧바로 원상복귀되었지만.
“카이.”
“예.”
아무래도 거슬렸을까. 어떤 이유로든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은 맞으니까. 긴장한 채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상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황당했다.
“혹시 배고파서 울어본 적 있나?”
“예?”
“못 들었으면 됐어.”
“아니요.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못 알아들어서 되물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가 싶어, 저도 모르게 되물었던 거다. 게다가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의 질문인가. 돌아가면 독방에 처넣고 밥도 주지 않겠다는 말인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제 상관은 그렇게 에둘러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배고파서 울 리가 없잖습니까.”
그러니 카이도 순수하게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땐 있고?”
“……어릴 때도 사실.”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어릴 땐 물론 있었겠지만, 제가 기억하는 한도에서는 없었다. 배가 고프면 먹을 걸 먹으면 됐으니까. 철이 일찍 든 편인 카이는 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하는 바른 생활 어린이였다.
“보통은 그렇겠지?”
“네, 뭐.”
“…….”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좋은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카이도 별생각 없이 되물었던 것이고.
“왜, 누가 배고파서 울었습니까?”
“…….”
상점가에서 우는 아이라도 마주친 걸까. 가볍게 생각하며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날카로웠다.
“알아서 뭐 하게.”
“……죄송합니다.”
순간적으로 리 샤오의 기분이 좋아 보여 잠깐 방심했다. 사실 별것 아닌 질문이었기도 하고. 하지만 리 샤오는 경계의 날을 세운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마치 제 것을 빼앗아 가려는 이를 보듯이. 이유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카이도 그것만은 알아차렸다.
“주제넘었습니다.”
카이의 거듭된 사과에도 날이 선 경계는 풀리지 않았다. 난감한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손이 불쑥 앞으로 내밀어진다. 살았다, 싶어 냉큼 시선을 내렸다.
리 샤오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작게 접은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뭔지 알아봐.”
“……네.”
카이가 손을 내밀자 손바닥 위로 툭, 하고 젖은 종이가 떨어졌다. 희미하게 한약재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약인 모양이었다.
그것을 찢어지지 않도록 수첩 사이에 끼워 넣었다. 흘끔, 뒤를 살폈지만 리 샤오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뒤였다. 휴우. 카이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쏴아아아아. 조금 잦아들었던 빗줄기가 다시 굵어지고 있었다. 풀 먹인 종이우산 따위로는 어림도 없는 비가.
* * *
“화수야!”
발끝만 보고 걷던 화수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검은 차였다. 벌컥, 차 문이 열리고 튀어나오듯 나온 진도현이 검은 우산을 펼친다. 물기가 잘 스며들지 않는 천으로 된 우산이었다. 그것과 똑같은 것이 화수에게도 있었다.
서양의 외국인들은 잘도 이런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낸다며 자랑 겸, 선물로 떠안기고 간 것이었다. 물론 애초에 비 오는 날 밖에 나가는 것을 꺼리는 화수에게 우산은 유용한 물건이 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대단한 물건은 방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안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종이우산 위로 검은 우산이 덧씌워졌다. 여전히 물방울이 흘러내렸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훨씬 안락해졌다.
“어쩐 일이야?”
“하.”
정작 태평한 얼굴로 묻는 화수에 진도현이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는다. 하지만 곧 나직이 대꾸했다.
“저녁에 들른다고 했잖아.”
“한가하시네.”
흐응, 하고 작은 소리를 낸 화수가 빈정거렸다. 평소라면 맞받아쳤을 진도현이 조금 굳은 얼굴로 할 말을 잇는다.
“이미 도착했어도 몇 번은 도착했을 녀석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내가 애야? 어련히 알아서 가려고.”
“애가 아니니까 더 문제지.”
“…….”
그렇게 말하는 진도현의 시선은 화수가 입은 상의에 있었다. 뒤늦게 화수도 제가 어떤 꼴인지를 깨달았다. 난감한 기분에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안으로 씹은 것이라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진도현의 눈매가 기름해진다. 저를 빤히 보는 시선.
“내 옷은 망가져서.”
화수가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중얼거린다. 더 캐물을 줄 알았던 진도현이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일단 타.”
젖은 화수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걸 발견한 탓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화수의 팔을 당겨 차에 태운 진도현이 문을 거칠게 닫았다. 그리고 빠르게 반대편으로 돌아온 진도현도 차에 올라탔다.
“옷 벗어.”
“…….”
올라타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출발하는 반동에 젖혀지는 몸을 차 시트에 묻고 있는데 진도현의 짧은 명령이 내려졌다. 돌아보는 화수의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하지만 화수가 생각한 것 같은 그런 의도의 명령은 아니었다.
“그거 벗고 이거 입어.”
“……괜찮은데.”
제 상의를 벗어 내미는 진도현에 화수가 머뭇거린다. 하지만 진도현은 딱 잘라 말했다.
“젖었잖아.”
“…….”
여기에 대해서는 더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듯 단호한 진도현의 기세에 화수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손에 뭘 쥐고 있는 거야. 버려줘?”
옷을 벗는 움직임이 뭔가 더디다 했더니, 손에 뭘 쥐고 있느라 그랬던 모양. 묻긴 했지만 사실 버리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미 손을 내밀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던질 요량으로 반대편 손으로는 창문도 조금 내렸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의외의 것이었다.
“버리는 거 아니야.”
“…….”
답지 않게 언성까지 높인 화수가 진도현이 뺏어 가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뒤로 물렸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별 관심이 없던 것에 관심이 생겼다. 진도현은 그런 성격이었다. 화수도 해놓고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도현이 전광석화처럼 화수가 물린 손목을 콱 붙잡았다.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버티는 듯하던 손에서 힘이 빠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당연했다. 애초에 힘으로 화수는 진도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툭.
화수의 손에서 떨어진 것을 본 진도현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그려졌다. 뭐 대단한 물건이기에 그러나 싶었던 게 무색하게도 화수의 손에서 떨어진 것은 별 특별하지도 않은 평범한 담배 한 개비. 너무 황당해서 손에 힘이 빠진 틈에 화수가 빠져나가 담배를 다시 냉큼 쥐었다. 피식. 진도현의 입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이 정도는 내가 줄 수 있는데.”
태연한 척하고는 있지만 귀 끝이 살짝 달아오른 것을 보니, 본인도 좀 부끄럽긴 한 모양이었다.
“젖은 담배 맛이 얼마나 고약한지 모르지?”
“말릴 거야.”
고급 담배는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제법 고가로 거래되는 물건이라 귀한 것이긴 했다. 그렇다고 그걸 또 버리지 않고 젖을까 봐 손에 꽉 쥐고 있었다니. 고급스러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은근 이렇게 궁상맞은 구석이 있었다.
“너무 궁상맞지 않아?”
그게 또 귀여운 점이지만.
“누구랑은 달리 돈이 넘쳐나는 형편이 아니라서요.”
“그러니까, 돈이 넘쳐나는 누구한테, 달라고 하라는 거잖아. 귀엽게 조르면 얼마든지 줄 텐데.”
“귀엽게, 아래로 졸라야 할 것 같아서.”
피식. 일자로 벌어진 입술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그게 우리 화수 특기잖아.”
뭐 그렇긴 하지만. 시큰둥하게 중얼거리는 화수를 향해 진도현이 손을 내뻗었다. 손에 쥔 담배를 가져가버릴까 봐 긴장하며 주먹을 꽉 움켜쥔 것이 무색하게도 진도현의 손은 화수의 옷에 향했다. 정확히는 다른 이의 옷이었지만.
톡. 톡. 대충 몇 개만 잠가둔 단추를 열고, 옷을 벗긴다. 제 손에 들린 물건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화수도 슬쩍슬쩍 몸을 움직이면서 진도현의 움직임을 도왔다. 축축한 옷이 벗겨지자, 갑자기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다문 턱이 덜덜덜 떨릴 정도였다. 그제야 화수는 자신의 몸이 흠뻑 젖어 있다는 걸 자각했다. 진도현이 빠른 손놀림으로 제 옷을 입혔다. 하지만 화수의 떨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속도 좀 내.”
제 옷을 여며주며 진도현이 운전기사를 재촉했다. 엔진 소리가 요란해졌다.
진도현이 화수의 몸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본능적으로 화수의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이미 들어왔던 손은 빠져나간 뒤였다. 손에 들린 담뱃갑을 보고서야 진도현이 자신의 옷 안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려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또 놀리는 소리를 듣겠다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진도현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러고는 운전석과 옆 좌석 사이에서 동그란 손잡이 부분을 잡아 뺐다.
그것을 가져와 담배 끝에 대자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 타는 냄새가 났다. 라이터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타고 올라오는 연기가 눈으로 들어간 건지 진도현의 한쪽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비가 와 공기가 축축한 탓인지 바로 불이 붙지 않아 몇 번이고 담배를 빨았다. 담배를 빨아들일 때마다 안 그래도 단단한 턱 선이 더 예리해졌다.
“자.”
그렇게 애써서 불을 붙인 담배는 화수의 입에 물렸다. 손이 부자연스러운 화수를 대신해 손까지 빌려주고서. 덜덜덜 떨리는 입술로 그것을 쭉 빨았다. 매캐한 연기가 입안으로 확 끼쳐 들어오고, 목구멍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이상하지. 분명 빨아들이는 건 연기인데, 불이라도 삼킨 것처럼, 몸이 후끈해졌다. 탈력감에 젖은 듯이 나른해지는 몸을 가죽 시트에 기댔다.
후우.
화수에게 한 번 물려주고, 그것을 다시 제 입술에 가져와 빨아들인다. 그것을 보고 있던 화수가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물려 있는 담배를 도로 가져갔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이미 몸에 밴 습관 같은.
“왜.”
가져간 담배를 입에 문 화수가 어쩐지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것을 진도현은 놓치지 않았다.
“맛이 이상해?”
“……아니.”
느릿한 대꾸. 담배를 빠느라 그런 것이었지만 묘하게 박자가 늦었다. 진도현이 다시 화수의 손가락째로 가져와 한 번 더 깊이 빨아들였다. 독하긴 해도 맛은 아주 좋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새를 못 참고 화수가 한 번 더 제 입으로 가져가 다시 깊이 빨아들였다. 이번엔 멈칫하는 움직임이 없었다. 독해서 그랬나? 의심의 시선이 거두어졌다.
화수가 눈을 감은 채 다시 한 번 더 숨을 빨아들였다. 지지직, 종이 타는 냄새가 코끝에 머물렀다.
이상했다.
리 샤오의 입에 물렸던 것을 가져와 물었을 땐, 입술이 타버릴 것 같았는데. 심장이, 뛰었는데, 미친 듯이. 조금 전 진도현의 입술에서 가져와 물었을 때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왜인지를 모르겠는, 불길한 예감.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고뿔 걸리는 거 아니야?”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린 화수를 향해 진도현이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화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고뿔이 들려고 그런 것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는 할 수 없어, 그저 입술을 꽉, 깨무는 수밖에 없었다. 손에 들린 담배는 여전히 힘껏 움켜진 채였다. 마치, 그것이 자신을 지탱해줄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이.
* * *
똑똑.
“들어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던 리 샤오가 이내 문득 고개를 갸웃거린다. 카이라고 생각했는데, 카이라면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는 대신 바로 들어왔으리라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역시나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카이가 아니었다. 예상 밖의 인물이자, 가장 보기 싫은 인물. 진도현이었다.
“약속도 없이 불쑥, 죄송합니다.”
그러면서도 성큼 들어서는 걸음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리 샤오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서류철을 덮었다.
“무슨 일이지?”
책상 앞쪽으로 다가서는 사내에게 리 샤오가 고개만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툭. 책상 위에 커다란 종이가방이 놓였다.
“이거,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잘 세탁된 제 옷이라는 건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표정 없던 얼굴에 살짝 짜증이 섞였다. 끼익. 등이 의자에 기대졌다.
“빌려 간 본인은 뭐 하고?”
건방지게,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마치 들은 것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진도현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화수가 앓아누워서요.”
“앓아누웠다는 핑계라면 이미 한 번 써먹지 않았나?”
“안타깝게도, 이번엔 정말로 앓아누워서요. 그 독한 녀석이 웬일로.”
“…….”
리 샤오가 입을 다물었다. 그날의 홀딱 젖은 화수가 떠오른 탓이었다. 게다가 진도현의 말대로 그 독한 녀석이 어지간히 심하게 앓아누운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옷을 이리 다른 사람 편에 보냈을 리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 속을 뒤집는 게 취미인 녀석이 아닌가. 건방지게도.
“그날 화수가 신세를 많이 졌다구요.”
“…….”
사실 화수의 입으로 들은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 정도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리 샤오의 기분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마치 물속의 진흙이 바닥에 가라앉듯. 리 샤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틈에 서서히, 하지만 분명하게 침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는 적당히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사탕값이라 생각하셔도 됩니다.’라던 녀석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제가 얼마나 멍청했는지도.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천천히 리 샤오의 눈이 아래로 감겼다가 다시 뜨였다. 바닷속 회오리처럼 아래가 들끓는 건 순식간이었다.
“뭘 얼마나, 적당히, 했으면 하는데?”
“…….”
묻는 어조는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진도현은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와 지금의 사내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하지만 진도현도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럴 거면 이리 직접 찾아오지도 않았다.
“망가트리지 말아달라는 말입니다. 그래 봬도 녀석은 제 소중한 사업 파트너라서요.”
픽. 그런 진도현에게 돌아온 것은 비웃음이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
“뻔히 물어뜯기라고 짐승들 아가리 속으로 밀어 넣어놓고, 소중한 사업 파트너다?”
“…….”
“개소리 잘 들었으니, 꺼져.”
“…….”
핵심을 정확히 찔러오는 묵직한 말에 진도현도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화수를 아귀 무리에 던져놓고 아귀들이 녀석을 뜯어먹는 사이에 이득을 챙긴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 진도현이 일이 좀 곤란하게 되었다 싶은 건 단순히 그 부분을 찔려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비난에 양심이 찔린다든가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진도현 사장은.
그가 놀란 부분은 리 샤오가 보인 반응 때문이었다. 적당히 살살 다뤄달라고 부탁하면, 당연히 리 샤오의 성격상 앞으로는 그럴 일 자체가 없을 거라고, 애초에 녀석에게 가지는 흥미는 하룻밤 유흥일 뿐이라고 그리 나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앞으로도 화수를 망가트린다는 전제하에, 감히 제게 하라 마라, 명령하는 것에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진도현의 계산 안에 없던 일이었다.
곤란한데.
시종일관 웃는 낯이던 진도현의 표정이 처음으로 찌푸려졌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면, 아직은 본인도 자각하고 한 말은 아니라는 것 정도? 일단 진도현은 물러서기로 했다.
“그럼, 다음에 뵙죠.”
괜히 들쑤셔 자각하게 되는 건 더 곤란할 테니. 지금은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흥미를 잃게 하는 게 가장 안전했다. 문제는, 화수가 적당히 가지고 논다고 흥미를 잃을 만한 녀석이 아니라는 데 있지만. 그런 진도현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돌아선 그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걱정하지 마. 소중한 사업 파트너가 망가지더라도 수지타산이 맞도록 보상해줄 테니까.”
걸음을 내딛는 진도현의 미간이 전에 없이 험악해져 있었다. 물론 그것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도현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