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6/21)

05.

“둬. 이따 먹을게.”

화수가 손을 휘적거렸다. 하지만 나가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르는 척 누워 있던 화수가 결국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이불을 확 젖히며 일어났다.

“이따 먹는다니까.”

물론 그렇게 말해놓고 어제도 오늘도 계속 끼니를 걸렀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류도 자리를 지키고 선 것이고. 차라리 잔소리를 하면 상관 말라고 반박이라도 하겠는데, 이러고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으니 그게 더 당해낼 수가 없다.

슥.

일어난 화수 앞으로 수저가 내밀어졌다.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제가 그것을 내던지더라도 류는 조용히 새것을 가져와 들이밀 게 분명했다. 그런 실랑이조차 귀찮아진 화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수저를 받아 들었다. 드러난 손목뼈가 더 도드라져 있었다. 답지 않게 며칠이나 고열로 앓아누운 탓이었다.

“맛없어.”

그릇 속 죽을 한 수저 떠서 입으로 가져갔던 화수가 투덜거린다.

당연한 일이었다. 쌀로만 쑨 죽이 무슨 맛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류는 핀잔하는 대신 동치미가 담긴 작은 종지를 밀어주었다. 수저로 동치미 속 무를 건졌다. 썽둥썽둥, 큼지막하게 썰린 무는 수저로는 잘 집어지지 않았지만 화수는 바로 앞에 놓인 젓가락을 집는 것도 귀찮다는 듯 몇 번이고 헛손질을 하다 결국 빈 수저로 돌아갔다. 아쉬운 표정으로 수저에 묻은 동치미 국물만 빨곤 다시 죽을 떴다.

맛이 없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잘 넘어가기는 잘 넘어갔다. 고열 때문인지 먹는 족족 속의 것을 다 게워냈던 터라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괜찮았다. 손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뒤늦게 허기가 몰려왔다.

“괜찮은데.”

죽 한 그릇이 금방 바닥이 났다. 더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기다렸다는 듯 빈 그릇을 들고 일어서는 류에 화수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관두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설사 화수가 관두라고 했다고 해도 도로 돌아오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화수의 말을 들은 류의 걸음이 좀 전보다 빨라져 있었다.

쩝.

들고 있던 수저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멀뚱히 앉아 기다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움직였다. 한쪽 벽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빈 옷걸이가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빈 옷걸이는 아니었다.

“아니, 그걸 왜 진 사장이 갖다줘?”

“왜? 안 돼?”

따져 묻는 화수에 진도현은 오히려 되물었다. 물론 그렇게 물으니 안 될 이유는 없었던 터라 화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제가 돌려주는 것보다 진 사장 편에 받는 걸 상대도 더 원할 테고. 그럼에도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 옷걸이를 노려보던 화수가 문득 고개를 내리고 무릎으로 걸었다.

드륵. 그 아래 놓인 자개 서랍장을 연 화수가 그곳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마치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문이 열렸다. 천천히 고개만 틀자 문 앞에 선 류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야.”

화수가 변명했지만 류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 표정 그대로 멈췄던 걸음을 내디뎠다.

탁. 그러고는 다시 떠 온 죽그릇을 빈자리에 내려놓았다. 서랍을 닫은 화수가 다시 슬그머니 교자상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피우려던 거 아니라고.”

한 번 더 덧붙이는 화수에게 류가 수저를 다시 내밀었다. 사실 입맛은 다 달아나버렸지만 지금은 선택권이 없었다. 얌전히 수저를 받아 들었다.

“오늘 나 받을 손님 없지?”

죽을 한입 떠 먹은 화수가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사실 대답을 바라고 물은 질문은 아니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돈 좀 갚으러. 덧붙이는 말에 순간 류는 말려야 한다는 것도 잊고 그대로 굳었다. 받으러도 아니고, 갚으러라니. 대체 무슨 상황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것을 알 리 없는-알았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화수는 빠르게 손을 움직여 죽그릇을 비워갔다. 아무래도 저를 싫어하는 이를 상대하려면 죽 한 그릇으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 전 서랍에서 꺼낸 지폐가 손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심장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 * *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자꾸만 빨라졌다.

흘끔, 혹 수상해 보이지 않을까 싶어 계단을 오르던 화수가 뒤를 살폈다. 그러다 입구에 서 있던 경비병과 눈이 마주쳤다. 화수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경비병의 얼굴에 홍조가 번졌지만 이미 화수가 몸을 바로 한 뒤였다.

뛰어오르고 싶은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화수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하아.

낯익은 방 문을 앞에 둔 채 화수가 심호흡을 했다. 사실 어떻게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가로질렀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한 것은 그런 정신으로도 용케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찾아왔다는 점이었다. 습관이라는 게 신기하긴 했다. 그렇게 서서 마음의 준비를 하던 화수가 드디어 결심한 듯 손을 들었다.

똑똑.

경쾌한 소리가 적막한 복도를 울렸다. 입안이 조금 말랐다. 하지만 호기롭게 문을 두드린 것이 무색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었다가 이내 멈췄다.

뒤늦게 그가 방에 없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일을 문 앞에 서고서야 깨달을 만큼 화수는 들떠 있었다. 자신이 들떠 있었다는 것도 지금에서야 알아차렸지만.

맥이 탁 풀렸다. 잠시 문 앞에 장승처럼 서 있던 화수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복도를 걸어 나오는 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그 느린 걸음으로도 복도 끝에 금방 다다랐고 어쩔 수 없이 계단을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딱 첫 계단을 디뎠던 화수의 걸음이 멈췄다.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칫.

오르던 걸음도 멈췄다. 물론 화수가 기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굳어 있던 화수의 얼굴이 한순간에 복사꽃처럼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안녕하십니까, 룽오 부장님.”

화수의 미소에도 룽오 부장의 눈빛이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묻는다. 경계하는 눈빛은 그대로였다.

“여긴 무슨 일이지?”

“…….”

순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리 샤오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 룽오 부장이 어떤 오해를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그런 오해를 받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리 샤오라는 게 걸렸다.

룽오 부장이 제3국 부장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는 소문은 화수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룽오 부장이 리 샤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가 싫어하던 내무국 지옌쯔 국장을 어떻게 고꾸라트렸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라 괜한 빌미를 주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국장님 만나러 왔나?”

하지만 다행히 룽오 부장의 시선은 오른쪽이 아닌 왼쪽을 향해 있었다. 뒤늦게 그 층에 경무국장의 방도 있음을 깨달았다. 사실 본래 건물의 가장 위층인 이곳은 경무국장과 부장인 룽오 부장이 나란히 차지하고 있던 장소였다. 룽오 부장이 그것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모른다. 헌데 바로 그 방을 리 샤오가 차지한 것이다.

모르는 이들은 방의 위치 같은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늘 권력을 욕망하는 이들에겐 그런 사소한 점이 가장 자존심을 긁었다. 심지어 리 샤오와 룽오는 같은 부장이었다. 그럼에도 밀려난 쪽은 룽오였고, 그것이 룽오의 음습한 욕망을 자극했을 터이다.

그래서 화수는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 뭐.”

그래도 룽오 부장의 말에 슬쩍 동조한 것뿐,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그럼, 지금 들어가면 안 되려나.”

룽오 부장이 고민하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화수가 나왔으니 당연히 색사를 나눈 직후일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화수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물론 룽오의 시선이 다시 제 쪽으로 향했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금 전과 다름없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 밑의 점이 짙어졌다.

“네, 조금 있다 들어가시는 것이.”

하지만 나을 겁니다, 라는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쿠당-!

갑자기 뒤편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에 화수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하필이면 소리가 난 쪽이 국장의 방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난감해진 화수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건 아주 찰나였다. 안 그래도 큰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린 문틈으로 손이 먼저 보였다.

“윽, 으, 으, 사, 살려-”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기어 나오는 이는 경무국장이었다. 굳어 있던 화수의 몸이 뒤로 밀쳐졌다.

“국장님!!!”

엉덩방아를 찧은 후에야 룽오 부장이 자신을 밀치고 앞을 튀어 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기어 나오던 경무국장은 목을 움켜쥔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런 국장을 룽오 부장이 끌어안았다.

“의무병! 의무병!!!”

비명 같은 외침이 커다란 건물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달려오는 발소리가 건물 전체를 울렸다.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새끼 붙잡아.”

사람들의 등에 업혀 계단을 내려가는 경무국장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험악한 외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룽오 부장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화수는 도망치지 않았다. 사실 도망칠 수 없었다는 말이 더 맞았다. 기가 막히게도 이 모든 것은 제가 뿌린 씨앗이었다.

운도 참 지랄 같지.

처음으로 리 샤오를 찾아왔다가, 룽오 부장을 만나고, 경무국장을 만나러 왔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하필 그때 마침 경무국장이 독살을 당할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비 오는 날 벼락을 네다섯 번 연속으로 맞을 확률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또 이상할 것도 없었다. 늘 화수는 운이 나빴다. 오히려 좋았던 것이 손에 꼽았다. 물론 그도 다섯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했지만.

곧바로 달려온 경비병 둘이 화수의 두 팔을 포박하여 그를 붙잡아 일으켰다. 화수는 반항도 하지 않고 얌전히 몸을 맡겼다.

저벅저벅.

룽오 부장의 발이 화수의 발치 앞에 와서 멈췄다. 화수가 고개를 들었다. 변명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그런 움직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철썩.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수의 얼굴이 반대쪽으로 꺾였다.

철썩. 철썩.

다시 반대로 꺾였다가, 원래 위치로 돌아온다. 단숨에 입안이 부풀어 올랐다. 통증은 그다음이었다. 머리가 멍했다. 입안이 찢어졌는지 삼키는 침에 피 맛이 났다.

“경무국장을 죽이려고 한 것도 모자라, 감히 내 앞에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

“…….”

어쩐지 룽오 부장은 경무국장을 해치려고 한 것보다 감히 자신의 면전에 대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 것에 더 열이 받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해명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어떤 변명을 하든 거짓말을 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으니까.

휙.

화수가 입을 다물고 있자 화가 더 돋는지 씩씩거리던 룽오 부장의 팔이 위로 다시 올라갔다. 화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두 팔이 붙잡혀 뒤로 물러서는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화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를 악다물며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느껴져야 할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없는 건 통증만이 아니었다. 살을 치는 살벌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쯤 하시죠.”

낮게 까라진 목소리. 꽉 감겼던 화수의 눈이 번쩍 떠졌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코끝에 닿는 향이 먼저였다. 확 풍기는 달큰한 향에 화수의 눈이 반사적으로 향의 주인을 찾는다.

제 앞을 가로막고 선 커다란 등. 후려치려던 팔을 붙잡은 단단한 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볼 수 없었지만, 그래서 다행이다 싶었다. 결코, 좋은 표정은 아닐 테니까.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나를 말리는 겁니까?”

룽오 부장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면서 손을 빼려고 했지만 리 샤오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얼굴을 찌푸린 룽오 부장이 결국 손에서 힘을 빼자, 그제야 리 샤오도 붙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이 새끼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이러는 겁니까?”

아릿한 손목을 문지르며 룽오 부장이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그걸 알아보려면, 말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짓말에 대한 화풀이는 나중에 하시고.”

“……아니, 누가.”

정곡을 찔린 룽오 부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뒤늦게 변명을 늘어놓지만 이미 리 샤오의 시선은 옮겨간 뒤였다.

내려다보는 눈과 눈이 마주쳤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준 것이었다. 화수의 얼굴에 긴장감이 번졌다. 조금 전 룽오 부장과 마주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긴장해서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그런 화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입을 열었다.

“늦게 오라고 했을 텐데. 전달 못 받았나?”

정말 네가 경무국장을 죽였나, 라는 질문이 돌아오리라는 생각과 달리 제게 돌아온 질문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화수가 더듬거리며 사과했다.

“죄송, 합니다.”

저를 보는 리 샤오의 표정이 워낙 험악해 저도 모르게 나온 사과였다. 순간 정말 제가 그런 약속을 했나,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리 샤오는 태연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룽오 부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뭐 하는 겁니까, 지금?”

“짜증내는 겁니다.”

일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었던 룽오 부장이 따져 물었지만 돌아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뭐라고요?”

“약속 시각 어기는 걸 질색해서요. 제가.”

하. 룽오 부장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표정은 전혀 웃긴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지금, 이 녀석이 리 샤오 부장을 만나러 온 거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말 안 하던가요.”

“안 했습니다!”

“잘했군요.”

“……뭐라고요?”

룽오 부장은 앵무새처럼 연신 같은 질문만 되뇌고 있었지만,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리 샤오가 구사하고 있는 화법은 듣는 사람이 바로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상대가 이해하든 말든 제 알 바는 아니라고 할 리 샤오였지만.

“말이 나는 건 질색이니,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고 오라고 주문했는데, 제대로 한 모양입니다.”

“…….”

이쯤 되면 룽오 부장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리 샤오는 지금 화수를 감싸고 있었다. 꿍꿍이가 뭔지를 알 수 없을 뿐. 룽오 부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경무국장님이 독살당하신 거 알고 하는 소립니까?”

“아직 돌아가신 건 아닙니다만.”

순간 룽오 부장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화수는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냉정을 찾은 룽오 부장이 나직이 경고했다.

“국장님이 깨어나셔서 자기를 죽이려고 한 이를 숨겨주었다는 걸 아시면 아무리 리 샤오 부장이라도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요.”

하지만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 리 샤오도 아니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죠. 깨어나시면 누가 범인인지도 알게 될 테니까요.”

태연히 받아치는 리 샤오의 말에 이번엔 화수의 눈이 커졌다.

“국장님이 깨어나시기 전에, 사건 현장부터 보전해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엄한 곳에 화풀이하는 것보다는 그게 우선인 듯한데 말입니다.”

리 샤오의 턱 끝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조금 전 경무국장이 나온 방이었다. 룽오 부장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사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화수를 의심하는 건 너무나도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심지어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더라도 일단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화수를 잡아 족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화풀이라는 리 샤오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는 건, 상대가 바로 그 리 샤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리 샤오가 화수를 감싸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고.

그게, 룽오 부장의 자존심을 마구 짓밟았다.

“카이.”

물론 룽오 부장의 기분이야 어떻든 전혀 상관없는 리 샤오가 뒤편에 선 카이를 불렀다. 이름이 불린 것만으로 리 샤오가 내리는 명령을 이해한 카이가 경비병들을 향해 지시했다.

“놓고, 따라와.”

슬쩍, 룽오 부장의 눈치를 살피긴 했지만, 경비병들도 슬그머니 붙잡고 있던 화수를 놓고 카이의 뒤를 따라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룽오 부장도 전에 없이 험악한 표정을 지을 뿐 경비병들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저벅저벅.

비틀거리는 화수의 손목을 움켜쥔 리 샤오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몇 걸음은 끌려가던 화수가 이내 제 발로 걸었다.

“후회할 겁니다.”

그런 리 샤오의 등 뒤로 다시 한 번 룽오 부장의 저주 같은 경고가 쏟아졌다.

“그것도 두고 보면 알겠죠.”

물론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 리 샤오가 아니었지만.

* * *

머리가 멍했다. 모든 일들이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현실감이 없는 부분은 리 샤오가 자신을 믿어주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사실 지금 상황이 태평하게 그런 것이나 궁금해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가 지금 가장 궁금해하고 있는 부분은 고작 그것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발끝만 보고 가던 화수가 고개를 들었다. 열어젖힌 문을 단단한 등이 앞서서 통과했다. 그 뒤를 따라 화수도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온 화수가 문을 닫고 돌아섰을 땐, 이미 리 샤오는 방을 가로질러 책상 앞에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책상 가장자리에 살짝 몸을 기댄 리 샤오는 창을 등지고 선 탓에 표정이 잘 보이질 않았다. 한 발 다가서면 잘 보일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대치한 상태로 침묵이 흘렀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 머뭇거리던 화수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내내 묻고 싶었던 물음이었다.

“어떻게-”

하지만 하필 그 순간 리 샤오도 불쑥 질문을 던졌다.

“누가 시킨 거지?”

“…….”

덕분에 어떻게 아셨습니까, 라는 질문의 뒷부분은 그대로 입안으로 삼켜졌다. 질문을 머릿속으로 인식하는 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잠깐의 시간도 참을 수 없다는 듯 리 샤오의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진 사장인가?”

“…….”

이번엔 다행히 곧바로 질문의 의미를 알아들었지만 오히려 이번엔 알아듣지 못하는 편이 나을 뻔했다. 진 사장의 이름을 들은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지금 상황에, 그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탓이다. 그것이 리 샤오에게는 다른 의미로 보일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녀석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멍청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화수가 더듬거리며 되물었을 땐 이미 리 샤오는 팔짱을 풀고 기댄 몸을 일으켜 세운 뒤였다. 겨우 몸을 세운 것뿐인데도 순간 제게서 멀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 화수가 급히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조금 전,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 화수는 늘 눈치가 빨랐다.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기질이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상대와 없는 이를 구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몸이 먼저 알았던 거다. 눈앞의 사내가 자신에게 호감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제게 한 발 다가선 화수를 보는 리 샤오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경멸.

혐오.

멸시.

그 비슷한 단어들을 모두 섞어도 그의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익숙한 일인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서늘했다.

“진 사장은.”

그럼에도 화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변명하고 말았다.

“진 사장은,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조금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저를 믿어주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달리는 시선이 리 샤오를 향했다. 그런 절박한 심정이 리 샤오에게 닿았을까. 리 샤오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 바다가 잔잔해지듯.

“그래?”

“네.”

하지만 화수의 눈엔 그것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리 샤오의 기분은 알기가 힘들었다. 가만히 되묻는 리 샤오의 물음을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한 화수가 고개까지 끄덕였다. 가슴이 얕게 뛰었다.

저벅저벅.

하지만 그런 화수의 기대를 비웃듯 단 몇 걸음으로 거리를 좁힌 리 샤오가 화수의 턱을 잡아 올렸다.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럼 너 혼자 경무국장을 죽이려고 했단 말이지.”

“…….”

화수의 눈동자에서도 천천히 생기가 사라졌다.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었다. 리 샤오는 자신을 믿어서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란 건가?”

“…….”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여 상처 입은 표정을 드러내진 않았을까, 겁이 났다. 하지만 그 순간 턱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도망치고 싶어 하는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그 입은 언제까지 다물고 있을 거지? 나불대지 않아야 할 때는 잘도 나불대더니.”

“…….”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제가 입을 열면, 상대의 기분을 긁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기분을 긁지 않아도 상대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물론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건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입을 닫고 있던 화수가 결국 되물었다.

“제가 아니라고 하면, 그 말은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역시나 예상대로 마주한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조금 가라앉았던 눈동자가 다시 탁해진다.

“믿고 안 믿고는 네가 고려할 일이 아니라고 말해줬을 텐데. 그건 내가 결정해.”

“…….”

붙잡힌 턱이 아릿했다. 화수도 더는 버티지 않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경무국장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걸 믿으라?”

“믿고 안 믿고는 제 알 바가 아니잖습니까.”

하. 제가 한 말을 그대로, 아니 배로 돌려주는 화수에 리 샤오가 입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물론 뭐 이런 건방진 녀석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이었지만 화수는 담담했다.

자신을 믿지 않는 상대를 상대하는 건 오히려 쉬웠다. 리 샤오가 자신을 믿어줬다고 생각했을 때가 화수는 외려 더 혼란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런 요행이 있을 리가 있나. 화수가 쓰게 웃었다.

“지금 상황이 장난인 줄 아는 모양이지?”

“…….”

장난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화수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수가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리 샤오의 말대로 자신에게는 어떤 선택권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화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두는 것 말고는.

“이딴 얼굴이 되고서도, 말이지.”

“…….”

툭, 하고 내뱉은 말에 내내 담담하던 화수의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뒤늦게 퉁퉁 부은 얼굴이 생각난 탓이다. 아픈 것도 잊을 만큼 정신이 없긴 했다. 화수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볼을 가렸다. 가린다고 가려질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지만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게다가 손이 닿는 순간 느껴지는 통증에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신음을 흘릴 뻔했지만 다행히 그것은 참았다. 하지만 고개가 비틀렸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지만 이번에도 리 샤오의 화를 돋울까 봐 일순 화수의 몸이 굳었다. 다행히 이번엔 별다른 말 없이 턱을 붙잡고 있던 손이 순순히 물러갔다.

“그럼 질문을 바꾸지. 돌려 말하니 못 알아 처먹는 것 같으니까.”

대신 물러갔던 손이 이번엔 화수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리고 묻는다. 마치 밥은 언제 먹었냐고 묻는 듯한 여상한 말투였다.

“비상砒霜은 언제부터 먹였던 거지?”

“…….”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리 샤오의 질문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질문은 눈앞의 물건 때문에 조금 뒤에서야 머릿속으로 입력되었다. 리 샤오의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진 종이뭉치는 화수가 너무나 잘 아는 물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것이었으니까.

“어떻게.”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시선이 위로 더듬어 올라갔다. 날카로운 눈빛이 기다렸다는 듯 화수를 잡아챘다.

“제법 순진한 얼굴이야.”

“…….”

손을 뒤로 물린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감상하듯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 자신을 향해 있는데 이상하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하마터면 나도 깜빡 속을 만큼.”

“…….”

하지만 곧 깨달았다. 눈을 마주칠 수 없는 건 리 샤오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 순진해빠진 표정으로 얼마나 많은 사내들을 속여먹었지?”

노려보는 시선과 마주치고서야 알 수 있었다.

“이거 어디서 나신 겁니까? 혹시 드셨습니까?”

따지듯 묻는 카이의 표정이 심각했다. 리 샤오의 눈매도 살짝 찌푸려졌다.

“대체 뭐길래.”

“비상砒霜입니다.”

물론 극소량이긴 하지만, 이라는 뒷말이 덧붙여졌으나 리 샤오의 표정은 손에 들린 작은 종이 뭉치에 있었다. 카이의 말대로 극소량이라고 해도 독이었다. 그래서 혹 리 샤오가 먹기라도 했을까 카이가 긴장한 것이고.

독살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이 생각났다. 언제든 이 건물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무엇보다 그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 존재. 사실 그런 화수를 향한 룽오 부장의 의심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구체적인 물증이 없어 물러선 것이었다. 물론 그 물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리 샤오는 화수를 구해주었지만.

사실 구해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누구보다도 화수에게 화가 나 있는 사람이 리 샤오였다. 만약 제가 먼저 발견했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바로 화수를 감옥으로 보냈을 것이다. 하필 제가 싫어하는 룽오 부장에게 맞고 있지만 않았다면, 며칠 새 그따위로 말라빠진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사람을 홀리는 면상은 그대로여서, 아니, 오히려 더 가련해진 얼굴로 사람 눈을 잡아끌었다.

이딴 빌어먹을 얼굴을 하고 이런 엄청난 일을 하러 왔단 말이지. 기가 막혔다. 리 샤오의 손이 화수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마음만 먹으면 이따위 가는 목 같은 건 한순간에 부러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주한 얼굴은 가만히 제 목을 맡기고 있었다. 마치, 리 샤오가 제 목을 부러트릴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처럼. 그것이 리 샤오의 신경을 긁었다.

“누가 시킨 건지 말해.”

처음부터 녀석이 했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녀석을 살려둔 것은 배후를 밝히려는 목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몰라서 물은 것도 아니었다. 고작 돈 때문에 이런 멍청한 짓을 할 녀석도 아니고, 그렇다고 협박으로 움직일 녀석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녀석이 이토록 위험한 일에 동참했다는 건 그만큼 상대가 녀석에게 대단한 의미를 가진 이라는 말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재수 없을 만치 매끈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 건방진 얼굴을 떠올리자, 기분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가라앉았다.

“그럼 편히 죽을 순 있을 거야.”

진심 어린 충고였다. 상대에게는 전혀 닿지 않는 듯했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리 샤오가 발뺌하는 화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건방지게도 녀석은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제 시선을 이렇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는 이는 흔치 않았다. 그런 주제에 곤鯤이라고? 개가 웃을 일이었다.

“정말, 입니다.”

그래도 보는 것만큼 아무렇지 않지는 않은지, 말하는 호흡이 헐떡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자신에게 매달렸다. 거짓말이 아니라며, 제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듯. 그렇게 연신 애원하고 있었다.

미쳤군. 리 샤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수의 절박한 표정이, 그의 눈동자가 정말 진실을 말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제 손에 거짓말의 증거를 쥐고 있으면서도 순간 그런 기분이 든 걸 보면 대단한 녀석은 녀석이었다. 사실 이런 녀석이니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러놓고 이리도 태연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꺼져.”

리 샤오가 붙잡고 있던 목덜미를 던지듯 놓았다. 더 쥐고 있다간 정말 부러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사 목을 부러트린다고 해도 그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나오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그게 리 샤오의 기분을 한없이 가라앉힌다. 그럼에도, 이 목을 부러트릴 수가 없어서.

“국장이 살아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라도 해.”

“…….”

나직이 내뱉는 말을 들으면서 화수는 가만히 조금 전 부러질 뻔한 목을 더듬었다. 마치 목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사실 국장이 살아나야 제 결백을 증명해줄 테지만, 화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는 믿을 생각이 없는 상대에게 믿어달라 매달리는 멍청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평소라면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었다. 의심받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저,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더할 수 없이 미움받고 있는 주제에. 멍청하게도.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물러났는데 이상하게 지금이 더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억눌린 것처럼 목이 아팠다.

“그럼.”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화수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리 샤오는 자신의 책상 쪽으로 몸을 돌린 뒤였다. 창문 너머로 이제는 꽃잎이 다 떨어진 나무가 보였다. 역시나, 자신에게 꽃놀이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았다. 화수도 천천히 뒤돌아섰다.

“한 가지만.”

뻗은 손이 손잡이를 잡았다. 그것을 돌리고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붙잡았던 손잡이를 돌리는 대신 화수는 불쑥 입을 열었다.

“물어도 됩니까?”

그냥 그대로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화수는 도저히 그냥 포기할 수가 없어서, 결국 손잡이를 놓고 뒤돌아섰다.

허락은 없었다.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창을 등지고 선 리 샤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절은 아니니까. 그렇게 멋대로 추측한 화수가 입을 열었다.

“그걸 다 알면서, 왜 도와주셨습니까.”

내내 궁금했던 것.

이미 제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면서 대체 왜 그 순간 끼어들어 자신을 구해준 것인가.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제가 싫으면서, 심지어 룽오 부장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도대체 자신을 구해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따져 물으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궁금했다. 화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침묵이 흘렀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화수를 휘감았다. 그냥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어야 했다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안타깝게도 화수의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하.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웃음을 흘리는 사람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안광이 흉흉했다. 화수는 한 발 뒤로 물러서고 싶은 것을 겨우 억눌렀다.

“누가 누굴 도왔다는 거지?”

“…….”

“착각하지 마. 룽오 부장이 범인을 잡았다고 나대는 꼴이 보기 싫었을 뿐. 너 따위를 내가 도울 이유가 뭐가 있어?”

“…….”

“아니면, 기껏 도와줘놓고 왜 의심하냐고 따지는 건가?”

“……죄송합니다.”

조금 전 연신 뺨을 두들겨 맞았을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도 더 머리가 멍했다. 하지만 그 멍한 머리로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냥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 정도로 화가 나게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고개를 숙여 사과한 화수가 몸을 돌렸다.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붙잡았다. 하지만 손잡이를 붙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화수가 왼손으로 오른손을 덮었다. 그럼에도 손잡이를 돌릴 수가 없었다.

어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붙잡은 손잡이가 저절로 돌아갔다. 멍하니 열린 문을 보고 있자 그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오세요.”

카이였다.

“돌아가서 얌전히 계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누구도 만나지 말고, 가만히. 혹, 도망치려는 생각 같은 걸 하고 있다면 그만두는 편이 좋습니다.”

뇌가 없는 게 아니고서야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말해두는 편이 좋을 듯해 덧붙였다. 하지만 정작 눈앞의 사내는 도망칠 생각은커녕 당장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경무국장의 독살 사건에 연루되어 의심을 받는 상황이라니. 리 샤오가 아니었다면 이미 화수는 취조실로 끌려갔을 터였다. 정무국 내의 취조실은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물론 그것이 단순한 괴담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데려가.”

카이가 턱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화수의 팔을 부축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멍하니 있던 화수가 다가오는 손을 피해 한 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면.

“제가, 제 발로 걷겠습니다.”

살 만한가 보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슬쩍 카이의 눈치를 보던 병사-그는 리 샤오의 차를 운전하는 운전병이었다-가 상관의 표정이 딱히 나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한 발 앞서서 걸었다. 화수의 걸음이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가는 것까지 확인한 뒤, 카이가 빠르게 방향을 틀었다.

“상태는.”

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리 샤오의 질문이 돌아왔다. 카이는 당연히 리 샤오가 궁금해할 사실부터 고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말에 안심할 줄 알았던 리 샤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죽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곧 리 샤오의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범인은 지목했고?”

“아니요.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의식이 없는 혼수상태였고, 지금도 조금 위험한 상태라고 합니다.”

조금 전 보았던 굳은 표정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던 모양. 의식이 없다는 제 말에 리 샤오의 표정이 아주 조금이지만 느슨해지는 것을 카이는 놓치지 못했다. 덕분에 카이의 머릿속은 다소 혼란해졌지만.

“경무국장을 노릴 만한 이들이 얼마나 있지?”

“물론 그런 원한을 가진 이들은 차고 넘치지만, 행동으로 옮길 만한 이들은 몇 안 됩니다.”

다소 모호한 답변이었으나 이미 카이의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미 대략적인 명단이 한 줄로 세워졌다. 의자에 앉아 보고를 듣던 리 샤오가 이번엔 다르게 물었다.

“그 안에 진도현도 있어?”

“진도현, 사장 말씀이십니까.”

이번 질문은 카이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라 리 샤오의 질문을 그대로 되묻고 말았다. 흘낏. 그럼 제가 말한 진도현이 진도현 사장 말고 누구겠냐는 듯 저를 향한 시선에 카이가 황급히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못 알아들어서 되물은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상황에서 나올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있습니다. 최근 진 사장이 따낸 토목 공사 건을 자신의 처조카에게 주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들여온 자재를 통관시켜주지 않으면서 압박을 한 모양이더군요. 그 안에 자재들만 들어 있는 건 아니었을 테니까요.”

겨우 그 정도로 감히 경무국장을 죽였을 리가 있겠냐고 하겠지만 진 사장이 따낸 토목 공사 정도의 규모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말이 좋아 양보지 이번 한 번 양보해서 끝난다고 볼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까.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모든 영역이 함락당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상대가 경무국장이라도 물러설 수는 없었을 테다. 아니, 경무국장이라 작업을 들어간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그만한 본보기도 없을 테니까.

물론 진 사장 정도 되는 거물이어야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정말 죽였을 거라는 가정보다는 그럴 만한 깜냥이 되느냐에 중점을 둔 답변이었다.

하지만 카이의 대답에도 정작 물었던 리 샤오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톡, 톡, 책상 위에 얹어둔 손가락이 매끈하게 깎아놓은 나무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침묵한 채 대기하던 카이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손가락이 멈칫하더니 리 샤오의 시선이 위로 올라왔다. 잘못한 것도 없이 긴장이 되었다. 리 샤오의 눈빛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카이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순순했다.

“물어.”

“혹시, 화수라는 남창을 의심하고 계신 겁니까?”

진 사장의 이름이 나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리 샤오가 나서서 화수를 구해준 일만 없었다면 카이도 굳이 묻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리 샤오는 화수를 구해주었고, 심지어 본인이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룽오 부장이 그리 순순히 물러났을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 리 샤오는 화수가 범인이라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카이는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되돌아온 것은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리 샤오의 차가운 눈빛이었지만.

“그럼 대체 범인이 누구라는 거지?”

“…….”

퍽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카이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피하고 있던 카이의 머릿속으로 이번엔 다른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런 거면 굳이 조금 전 룽오 부장을 막아서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물론 조금 전 룽오 부장의 행동은 누가 봐도 화풀이에 가까웠지만, 어차피 경무국장을 죽이려고 한 범인이라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들었다. 나서서 구해준다고 해도 겨우 잠깐의 소나기를 피하게 해주는 것밖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에 반해 정작 리 샤오가 부담해야 할 위험은 과도했다. 경무국과 제3국이 주도권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알력다툼을 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리 샤오를 경무국장을 죽이려고 한 범인으로 지목할 만큼 간 큰 인간은 없었다.

하지만 이 일로 룽오 부장은 당당하게 리 샤오의 이름을 용의선상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것을 리 샤오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럼에도 리 샤오는 룽오 부장의 앞을 막아섰고, 심지어 화수와의 관계까지 인정했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그나마 그땐 화수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을 만한 근거라도 있어서 나섰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가. 이번만큼은 카이도 도저히 상관의 계획-당연히 계획이 있다는 전제하에 생각하고 있었다-을 짐작할 수 없어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 샤오의 반응은 카이의 예상범위를 벗어났다.

“카이.”

“예.”

“질문은 하나라고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여상한 말투였지만 카이가 급히 머리를 숙였다. 뒤늦게 자신이 꽤나 주제넘은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숙인 머리 위로 리 샤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말 진도현 작품인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조금 전 말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여상한 말투였지만, 그 말의 무게마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리 샤오의 명령이 아니라도 최우선적으로 알아봐야 하긴 했다. 리 샤오의 안위가 카이의 안위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급히 몸을 돌리려던 카이가 다시 뒤돌아섰다.

“룽오 부장에 대해 자세히 좀 캐봐.”

“……룽오 부장이요.”

리 샤오의 말을 되뇌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이가 이내 뭔가를 알아차리고 되물었다.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목소리까지 죽여서.

“혹 룽오 부장도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니.”

“…….”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카이의 추측은 간단히 깨부숴졌다.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해져서. 왜. 안 되나?”

“아닙니다. 알아보겠습니다.”

카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혼란한 머릿속과는 달리 대답하는 카이의 얼굴은 담담했다. 요즘 들어 자주 겪어서 그런가. 상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도 이제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는 것이 익숙해진 카이였다.

“너.”

방 안으로 들어서던 진도현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진도현이라도 이런 일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그가 손을 뻗어 화수의 턱을 붙잡았다.

“얼굴 꼴이 왜 이래.”

기껏 사람 꼴로 돌아왔다 싶었더니. 붙잡은 턱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중얼거리는 진도현을 보니, 기가 막혔다. 화수가 진도현의 손을 밀쳐냈다.

“지금 내 얼굴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나한텐 제일 중요해. 대체 어떤 새끼가 이랬어?”

웃으면서 묻고 있었지만 사실 진도현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화수의 눈에 그런 것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화수가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이곳은 듣는 귀가 많은 곳이었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모를 일이었다.

“경무국장이 독살당했어.”

“알아.”

“알아?”

“뭐야. 겨우 그 일 때문에 연통을 한 거야? 난 또, 내가 보고 싶어선 줄 알고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왔는데.”

“내가 용의자야.”

“…….”

이건 몰랐나 보다. 당연하겠지만. 용의자라면 이렇게 멀쩡한-완전히 멀쩡하다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으나- 모습으로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없을 테니까. 진도현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그게 무슨.”

“아니라고는 했는데. 진 사장까지 휘말리게 될지도 모르겠어.”

담담한 어조로 화수가 중얼거리는 말에 진도현의 미간이 확 일그러진다.

“지금 그게 문제야?”

“그럼 뭐가 문젠데.”

“…….”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화수에 진도현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제야 화수가 자신에게 연통을 한 진짜 이유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용의자가 됐으니 어떻게 해야 하냐고, 도와달라고 저를 찾은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화수는 제가 의심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연락을 한 것일 뿐, 만약 제가 관련이 없었다면 아예 연락조차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독한 녀석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게 기가 막혔다. 그게 또 녀석답다 싶지만.

“경무국장이 불러들였던 거야?”

“……그건 아니야.”

좀 살 만해지니 그새 손님을 받았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 게다가 대답하는 모양새가 어딘지 석연치 않았다. 진도현이 되물었다.

“그럼?”

“…….”

화수의 시선이 자신을 비켜나가 있었다. 그런 화수를 보는 진도현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어이?”

“리 샤오 부장 만나러.”

재촉하듯 저를 부르는 진도현에 결국 화수의 입에서 툭, 하고 대답이 튀어나왔다.

사실 별것도 아닌 질문이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대답을 피하는 것이 이상타 싶더니. 화수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리 샤오의 이름에 진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는 화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묻는 목소리도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변명할 말을 찾느라 화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냥, 내가, 돌려줄 게 있어서.”

“옷은 내가 가져다줬잖아.”

“있어. 중요한 거.”

거짓말은 아니었다. 돈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 물론 스스로도 궁색한 변명이라 구체적으로 말하지도 못하면서. 다행히 진도현도 거기까진 따져 묻지 않았다. 기가 막히다는 듯 낮은 한숨을 내쉰 진도현이 되물은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리 샤오 부장을 만나러 가서는 왜 갑자기 경무국장을 죽인 용의자가 된 건데?”

“못 만났어.”

“뭐?”

“방에 없더라고. 돌아 나오던 길에 하필 계단에서 룽오 부장과 떡하니 마주쳤어.”

“그럼 그렇다고 말을-, 뭐, 말해도 믿지는 않았겠군.”

“…….”

따지듯 묻던 진도현이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 그런 진도현의 추측과 실제는 조금 달랐지만 화수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의 추측대로 사실대로 말했다고 해서 룽오 부장의 의심을 피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도 용케 이 정도로 끝이 났네.”

진도현의 시선이 퉁퉁 부은 화수의 볼에 닿아 있었다. 화수가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만지작거리며 변명하듯 중얼거린다.

“리 샤오 부장이 도와줘서, 일단은.”

“뭐야. 만난 거야?”

“일 다 벌어지고 나서, 올라오다가 봤나 봐.”

“……운하고는.”

“그러게.”

리 샤오가 조금만 일찍 왔거나, 그것도 아니면 화수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이런 사건에 얽힐 일도 없었을 터라, 중얼거리는 진도현의 목소리에 아쉬운 기색이 잔뜩 묻어났다. 하지만 정작 맞장구를 치는 화수의 목소리는 남의 일인 양 담담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아니었을 경우로 가정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을 원망하는 법도 없었다. 그저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더 익숙한 화수였다.

“그나마, 리 샤오 부장이 있어 불행 중 다행인가.”

“…….”

사실은 그 역시도 제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말을 해야 하나, 조금 고민했지만 결국 화수는 입을 다물었다. 룽오 부장 덕분이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나서서 화수가 범인이라고 밝힐 생각은 없어 보였으니까. 아마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경무국장이 깨어나면 알아서 밝혀질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고, 그렇게 되면 화수로서도 오히려 결백을 밝힐 수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경무국장이 살아나지 못하고 이대로 죽어버릴 때였다. 이쯤 되면 그의 말대로 경무국장이 살아나길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이 제 기도를 들어줄 리 없다는 것과는 별개로.

“경무국장을 만난 건 아니란 말이지.”

“어.”

진도현도 비슷한 결론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그럼, 경무국장만 일어나면 해결되는 거네.”

“그렇게 쉽게 일이 풀릴까.”

별것 아니라는 듯 낙관적인 결론을 내놓은 진도현과 달리 화수는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화수의 탓만은 아니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재수 없는 팔자를 타고났다. 그래서 저뿐만 아니라 저와 함께 있는 사람까지, 그렇게 만든다고 했다. 그게, 화수가 가장 두려워하는 어미의 저주였다.

“걱정 마. 난 운을 타고 난 사내거든.”

물론 그런 화수의 두려움을 알 리 없는 진도현은 가벼운 농으로 상황을 종결시켰다. 그러고는 장지문 밖을 향해 이른다. 사실 처음부터 하고 싶던 말이었다.

“류. 가서 차가운 영견領絹 좀 만들어와.”

하지만 기다릴 필요도 없이 곧바로 문이 열렸다. 이미 준비해두었던 물그릇과 깨끗한 명주천이 바닥에 놓였다.

“내가 할 테니까 진 사장은 그만 돌아가. 괜히 나랑 엮여서 좋을 게 없어.”

와이셔츠 소매를 걷는 진도현을 향해 화수가 한마디 했지만 진도현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갑자기 내외해봐야, 그게 더 의심을 살걸.”

“…….”

세상 모든 일이 우스운 사내는 이번 일조차도 우스운 모양이었다. 물론 이미 늦었다는 진도현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괜한 불똥이라도 튈까 봐 일단 피하고 보고, 설사 의심을 사더라도 자신과는 관계없는 사이라고 발뺌하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만큼 자신만만하다는 뜻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태평하게 구는 진도현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좋았다.

“겨우 좀 볼만한 얼굴로 돌아왔다 했더니.”

“으.”

물기를 짠 영견이 볼에 닿았다. 화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에 투덜거리던 진도현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아파?”

“아니. 차가워서.”

“엄살은.”

퉁명스럽던 말투와 달리 한없이 조심스럽던 손길이 조금 전보다 더 솜털처럼 가벼워졌다. 볼에 닿는 시원한 기운에 화수가 눈을 감았다. 젖은 머리칼을 넘기는 손길에도 화수는 고개를 뒤로 빼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은 여전했지만 어차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일이 흘러가는 대로 두고 보는 것밖에는.

뭐, 두고 보면 알겠지.

눈을 감은 채 화수가 누군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뇌었다.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번만큼은 조금 믿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닌, 제 주변 사람을 위해서라도.

* * *

멈칫.

먼저 걸음이 멈춘 것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리 샤오였다. 멈춘 리 샤오와 달리 진도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안녕하십니까.”

그의 걸음이 멈춘 것은 리 샤오를 두어 걸음 앞에 둔 위치에서였다. 태연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진도현에 리 샤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진 사장이 여긴 무슨 볼일로?”

두 사람이 대치하고 선 곳은 바로, 병원 1층 대합실이었다.

“경무국장님이 위독하시다는데, 당연히 들여다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뵙고 내려오시는 모양입니다.”

감히 네가 어떻게 여길 왔냐는 의미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진도현은 뻔뻔했다.

역시, 보통 사내는 아니라고 혀를 내두르며 카이는 황급히 리 샤오의 기분을 살핀다. 리 샤오의 표정은 차가웠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눈빛은 여전했다. 최소한 병원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일만은 없길 바라면서 카이는 두 사람을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위독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개나 소나 들여다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더 잘 알 텐데.”

“뵙지는 못하더라도, 오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제게는 각별한 분이시라.”

“개도 밥 주는 주인은 알아본다, 라는 건가?”

“뭐, 그리 봐주시면 감사하지요.”

“…….”

대놓고 무시하는 말에도 진도현은 별다른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영광이라는 듯 고개까지 살짝 숙인다. 리 샤오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아아. 지금이라도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하나, 카이가 살짝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리 샤오의 명령이 들려왔다.

“병원 경비를 더 강화하고, 개새끼뿐만 아니라 벌레새끼 한 마리도 들여보내지 마.”

“알겠습니다.”

카이의 대답이 돌아오기 무섭게 리 샤오가 멈췄던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의외로 진도현이 순순히 옆으로 비켜섰다. 카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진도현의 입이 다시 열렸다.

“깨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멈칫. 내딛던 걸음이 다시 멈췄다. 리 샤오의 고개가 꺾였다.

“그건 깨어났으면 좋겠어서 묻는 건가, 아니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서 묻는 건가?”

“당연히 전자지요. 제가 경무국장님이 죽길 바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제 뒤를 캐고 계시니, 더 잘 아실 테지만요.”

스릉.

검을 빼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리 샤오의 검이 진도현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진도현의 표정이 그제야 굳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주인 무는 개새끼가 말은 잘하는군.”

눈앞의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분명 살기였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단순히 겁을 주려고 빼어 든 검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진도현도 알아차렸다. 진도현의 변명에 리 샤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오해?”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진도현이 말한 단어를 되뇌며.

리 샤오의 표정만 봐서는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지만 사실 목을 겨눠지고 있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쪽이 더 섬뜩하긴 했다. 차라리 대놓고 화를 내는 편이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도, 대응하기도 쉬운 데 반해 이런 조용한 분노는 언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니, 대응 자체가 불가능했다.

“예. 저는 정말로 경무국장님이 깨어나시길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입니다.”

“…….”

“아마 저보다 더 그 일을 간절히 원하는 이도 없을 겁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정작 어찌 되든 상관없는 당사자보다도, 제가 좀 더 절박할 터였다. 하지만 그런 진도현의 진심을 리 샤오는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뭐, 녀석의 입에서 진 사장의 이름이 새어 나올 일은 없을 것 같더군.”

“…….”

“여기선 필요할 땐 저 좋을 대로 써먹다가 쓸모없어지면 버려버리는 걸, 사업파트너라고 하는 모양이지?”

“…….”

진도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리 샤오의 말에 기분이 상해서는 아니었다. 설마.

“화수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제는 대놓고 꼬리 자르기를 하는군.”

대화를 하는 내내 들던 위화감의 이유를 알았다. 마주친 리 샤오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지난번 자신이 찾아갔을 때 부탁을 빙자한 경고를 했던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 샤오의 대답으로 자신이 괜히 이상하게 느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분명 리 샤오는 화수를 범인이라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녀석을 도와주셨다고 들었는데요.”

“도와줬다는 말만 하고, 들켰다는 말은 안 한 모양이지?”

“뭘, 들켰다는 말입니까?”

“경무국장이 먹은 독약, 녀석이 먹인 거잖아. 그것도 꽤나 오랫동안 공들여서. 물론 진 사장은 전혀 모르는 일일 테지만.”

“…….”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진도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물론 이미 확신을 하고 있는 상대의 눈에는 그저 계획을 들켜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보인다는 게 문제지만.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신 겁니다. 녀석이 독약이라니요. 그런 짓을 할 녀석이 아닙니다.”

진심이었다. 물론 녀석이 독하고, 냉정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자신의 몸에 해당되는 것 일뿐. 그마저도 제 안위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심지어 오랫동안 치밀하게 독을 먹여 독살을 하려고 했다니, 그거야말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차라리 칼로 찔러죽였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런 진도현의 변명에도 리 샤오는 표정변화가 없었다. 이미 진도현이 그렇게 나올 줄 예상했다는 듯.

오히려 이렇게 억울해하는 표정을 보니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변명할 생각도 없어 보이던 녀석의 가라앉은 눈동자에 비하면 이쪽이 그나마 기분은 덜 긁었다.

“내 손에 그 증거가 있는데, 발뺌을 하시겠다?”

“증거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고, 리 샤오의 말을 반박하려던 진도현이 말을 멈췄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뭔가가 있었던 것. 조금 전과는 다른 표정으로 진도현이 다시 물었다.

“그 증거, 저도 좀 보면 안 되겠습니까.”

“함부로.”

그러느라 저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내밀어진 모양이었다. 곧바로 리 샤오의 경고가 내려졌지만 이미 목에서는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검이 목을 겨누고 있다는 것도 잊을 만큼 진도현의 신경은 한곳에 쏠려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내 기분이 누구 하나 죽여버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

여상한 말투였지만 말의 무게마저 가볍진 않았다. 하지만 진도현도 쉽게 물러서진 않는다.

“보여주시죠, 그 증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대치하던 리 샤오가 피식, 하고 웃었다.

“왜. 내가 증거도 없이 이러는 것 같아?”

“그런 것이 아니라-”

자꾸만 겹겹이 쌓이는 오해에 진도현이 질문을 바꿨다.

“혹시, 그 증거라는 게 녀석이 가지고 있던 약입니까?”

“이젠 좀 기억이 나는 모양이야?”

아예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건 힘들겠다 싶으니, 방법을 바꾸기로 했냐고, 대놓고 빈정거리는 말에도 진도현은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기가 막혔다. 물론 그 기가 막힌 대상은 눈앞의 사내는 아니었다.

“충분히 그런 오해를 살 수 있겠지만, 그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검이 목에 바싹 다가왔다. 어디 한번 마저 지껄여봐, 라는 허락의 제스처였지만, 헛소리를 하면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도현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그건, 다른 사람을 먹이는 용도가 아니라, 녀석이 먹는 약입니다.”

“그딴 개소리를 지금 나더러 믿으라-”

“임신을 피하려고 먹는 약입니다.”

멈칫.

위로 들리던 리 샤오의 검이 순간 그대로 멈췄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진도현이 뒷말을 이었다.

“녀석이 곤鯤이라는 건 알고 계시지요.”

“…….”

“정히 못 믿으시겠다면 그 약을 처방해주는 의원을 데려와 보이겠습니다.”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실 아무리 타당한 근거를 내세워도 화수가 비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표정도 없는 리 샤오를 살피는 진도현의 기분은 초조하기만 했다. 그나마 리 샤오가 아직까지 그 일을 공개적으로 까발리지 않았다는 점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

“데려온다는 말도 못 믿으시겠다면, 지금 함께-”

“독을 먹고 있었다고?”

기다리다 못한 진도현이 다른 제안도 꺼내놓았지만, 정작 리 샤오가 믿을 수 없는 쪽은 다른 부분이었던 모양.

“아주 극소량이라 생명에는 크게 지장이 없습니다.”

독이라는 단어가 주는 충격이 커서 그렇지 사실 그리 특별할 일도 아니었다.

임신을 피하기 위해 약을 먹는 것은 손님을 받는 유곽의 여인에게는 흔한 일이고, 비소가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나 아주 극소량에 불과해 사실 생명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물론 오랫동안 복용하는 경우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대부분 그 전에 머리를 올려줄 사내를 찾거나,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경우라도 특정 상대를 찾아 각인을 하는 방법으로 대체하곤 했다. 각인을 하는 것이 그 상대 외의 다른 손님의 아이를 가질 일은 없으니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이긴 했다. 다만 화수처럼 각인이라면 질색을 하는 경우에는 해당사항이 없었지만.

“본인은 입이 없는 모양이지?”

“…….”

그러게 말입니다. 기가 막혀하는 리 샤오의 심정을 지금 누구보다도 공감하는 이가 바로 진도현이었다. 상대가 오해를 하든 말든 변명 같은 건 하지 않는 녀석이라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지만 심지어 이런 일에까지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는 데에는 진도현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마 국장님이 일어나시면 오해가 풀릴 거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대신 변명을 해주는 진도현이었다. 리 샤오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누그러져 있다는 것을 확인한 덕분이었다. 물론 그 누그러졌다는 것이 험악에서 황당으로 옮겨간 것에 불과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럼 오해는-”

그나마 오해는 풀린 것 같아 안심하고 있을 때였다.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를 그리 긴하게 나누고 계십니까.”

불쑥, 끼어든 귀에 익은 목소리.

목을 겨누고 있는 검 때문에 고개를 돌리진 못했지만 마주한 리 샤오의 표정이 다시 굳어진 것을 보니 제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철컥.

굳어 있는 사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목을 겨누고 있던 검이 조용히 검집 안으로 사라졌다. 자유로워진 진도현이 몸을 틀었다. 그사이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옆으로 바싹 다가온 이의 얼굴이 바로 들어왔다. 역시나 예상대로의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룽오 부장님.”

진도현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지만 대놓고 무시당했다.

“진 사장과도 친밀한 사이인 줄은 몰랐는데요.”

힐끗, 진도현을 훑은 시선이 리 샤오에게서 멈췄다. 리 샤오의 시선과 룽오 부장의 시선이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오신 김에 검사라도 받아보시죠. 검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친밀해 보인다니, 아무래도 시력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니까.”

“…….”

눈이 삐었냐는 말을 이렇게 정중하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룽오 부장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하도 뒤로는 아랫도리까지 맞춘 사이면서 앞에선 아무 사이도 아닌 척, 사람 뒤통수 치는 경우를 많이 봐서 말이죠.”

누굴 말하고 있는지는 굳이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모를 리 없는 리 샤오는 태연히 진도현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떨어뜨렸다. 그러더니.

“저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서.”

란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기가 막혔지만 룽오 부장의 표정이 뭐 씹은 표정이 되는 것을 보니 진도현도 반박할 생각이 사라졌다.

“그래서, 무슨 비밀 얘기들을 나누고 계셨습니까?”

돌려 말해서는 리 샤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룽오 부장이 가면을 벗어 던졌다. 물론 그가 어떻게 굴든 리 샤오의 반응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내가 진 사장과 나눌 비밀 얘기가 뭐가 있습니까?”

“그거야 모르죠. 그렇지만 두 사람이라면 나눌 이야기는 차고 넘칠 것 같은데요. 뭐, 범인을 빼돌린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유일한 증인인 피해자의 입을 막아버린다거나.”

“상상력이 풍부하시군.”

“상상력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요.”

아마 룽오 부장은 리 샤오와 진도현, 두 사람 중 하나가 화수를 이용해 경무국장을 처리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럴 만한 정황들은 차고 넘겼고. 오히려 진도현 입장에서는 리 샤오가 끼어들어준 덕분에 의심의 화살에서 빗겨나간 감도 있었다.

물론 어째서? 라는 의문은 남았지만.

“그럼.”

잠시 대치하고 있던 리 샤오가 짧은 인사와 함께 걸음을 내디딘다.

그런 리 샤오의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옆으로 물러섰던 룽오 부장의 얼굴이 이내 잔뜩 구겨졌다. 리 샤오에게는 일부러 힘으로 억누르지 않아도 타인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시중을 들게 만드는 위압감이 있었다. 아마도 태어날 때부터 제왕으로 살아온 이의 타고난 기운이겠지만, 사실 그것이 가장 룽오 부장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룽오 부장은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능력이었으므로.

그게 리 샤오가 가진 배경에도 겁도 없이 그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유였다. 게다가 사람들은 리 샤오가 이곳으로 보내진 것이 권력승계를 위한 수순이라고 하지만 룽오 부장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럴 거면 굳이 여기까지 보낼 필요도 없이, 본국에서 자리를 만들었겠지. 그러니 정말은 리 샤오에게 본국을 물려줄 생각은 없고-이미 자리를 잡고 후계자로 점찍어지는 이만 다섯이 넘었다- 위험한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트려두려는 목적 정도가 아니겠는가, 라는 것이 룽오 부장의 추측이었다. 애초에 룽오 부장이 본 리 샤오는 전혀 권력욕이 없었다. 그걸 총독이 모를 리 없었다. 물론 그런 주제에, 남들은 평생을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자리에 떡하니 올라 있어 배알이 꼴려 미칠 것 같았지만.

어리석은 경쟁심이었으나 사람은 본래 객관적으로 자신의 깜냥을 판단하는 것이 어려웠다. 심지어 이렇게 열등감을 자극하는 이가 앞에 있을 때는 더더욱.

자신은 경무국장으로 승진하고, 리 샤오는 그리 좋아한다는 전장으로 돌아가면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닌가, 그렇게 저 좋을 대로의 생각을 하면서 룽오 부장은 조금 전 리 샤오가 내려왔던 계단을 올랐다.

“화수가 다니는 약방이 어딘지 알아봐.”

물론 자신의 부하에게 명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왜 말하지 않았어?”

화수의 고개가 꺾였다.

“네가 먹는 약이라고.”

아. 의아한 기색이 번져 있던 눈이 그제야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았다는 듯 살짝 찌푸려진다.

“어차피 말해도 믿지 않았을 거야.”

“그런다고 입을 다물어? 이런 상황에서?”

“그런다고 독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내가 먹던 약이라고, 다른 사람이 못 먹는 것도 아니잖아.”

“…….”

“어차피 경무국장만 깨어나면 다 해결될 텐데, 뭐.”

“말은 잘한다.”

무사히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서. 기가 막히다는 듯 핀잔하던 진도현이 화수의 손에 들린 잔을 빼앗듯 가져왔다.

“뭐야. 술이 아니네?”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리라고 생각해 빼앗은 것인데, 의외로 잔에 든 내용물은 진도현의 예상 밖의 것이었다.

“술 맞아. 단술.”

기가 막혀하는 진도현의 손에서 도로 술잔을 가져온 화수가 어깨를 으쓱인다. 술잔에 든 것은 바로 식혜였다. 피식, 진도현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어쩐지 묘하게 퉁퉁 부운 얼굴로 잔을 홀짝이고 있다 했더니.

“잘했네.”

아마도 류의 작품이겠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 약은 왜 가지고 있었던 거야.”

평소 소지하고 다닐 만한 약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진도현의 질문은 당연했다. 게다가 총독부 건물을 가면서 그것을 가지고 가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그러게.”

하지만 이번에도 화수는 별다른 변명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 일을 설명하려면 그날의 일을 모두 말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그러자면 자신의 꼴사나운 행동들을 모두 고백해야 하기 때문도 있었지만, 사실 그날의 기억을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누구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진도현도 더는 그 부분을 탓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 데다, 어쨌든 제가 수습은 했으니. 진도현이 그 일에 대해 꺼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슬슬, 약은 끊는 게 어때?”

“……싫어.”

약을 끊으면 어쩌라는 거냐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진도현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조심하면 돼.”

“일도 일이지만 이렇게 오래 복용하면 위험하다는 거 알고 있잖아.”

“죽기밖에 더하겠어?”

“너-”

“난 진 사장과 자는 게 좋아. 진 사장은 아닌가 봐?”

하아. 어느새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목을 감아오는 화수에 진도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홀리는 미소에 눈 밑의 검은 점이 짙어져 있었다.

“각인하고, 나랑만 자면 되잖아.”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진심이었다. 하지만 진도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는 거절에 진도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것을 본 화수가 말을 정정했다.

“난 아이가 싫어.”

“…….”

순간 ‘리 샤오의 아이도?’라고 물을 뻔했다. 스스로도 왜 그런 질문을 하고 싶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도현은 그대로 질문을 삼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어 물으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진도현은 손을 내뻗어 화수의 벌어진 가슴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아기 만드는 건 좋아하잖아.”

피식. 화수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건 그렇지만.”

흣. 손가락으로 작은 돌기를 꼬집듯 빙글이자, 화수의 입에서 앓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해도 돼?”

“선택권이 있는 질문이야?”

“아니, 없어.”

그러면서 왜 묻는 거야.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거부하는 기색은 없었다. 진도현이 제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고 화수를 무릎 위에 포개 앉혔다. 그러느라 흐트러진 침의가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새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흣. 으, 응.”

그러면서도 이미 앞으로 내뻗어진 진도현의 손은 화수의 앞섶을 파고들어가 있었다. 물건을 쥐고 흔들자 단숨에 화수의 새하얗던 목덜미가 벌겋게 물이 들었다. 손에 힘을 더 주어 쥐자 화수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옷이 좀 더 흐트러지고 덕분에 견갑골까지 드러났다. 새하얀 피부에 열기가 오르자 더 선명해진 잇자국이 보였다. 마치 낙인처럼 새겨진 그것은 제가 남긴 것이 아니었다. 제가 남긴 것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진도현의 눈동자가 사나웠다. 물론 화수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진도현이 화수의 날갯죽지를 콱 깨물었다. 그동안 수없이, 시도해왔던 것처럼.

“힉.”

화수가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등을 물린 아픔 때문은 아니었다. 등을 깨무는 것과 동시에 진도현이 화수의 것을 더 콱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진도현이 다른 손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제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멋대로 날아가버리는 일이 없도록. 진도현은 날갯죽지에 좀 더 세게 이를 박아 넣었다.

“안 서네.”

진도현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린다. 엎드린 채 진도현을 받고 있던 화수가 아래를 확인했다. 제 몸 안에 박혀 있는 물건은 이미 더는 서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잔뜩 발기해 있으니 남은 것은 하나였다. 진도현의 말대로 완전히 쪼그라들어 있는 제 것을 확인한 화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별로 안 내켜?”

아파서일 리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묻자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그냥, 해도 돼.”

란다.

“뭐야. 정말 별로인 거야?”

되묻는 진도현의 표정이 조금 전에 비해 확연히 굳어 있었다. 그것을 본 화수가 급히 입을 열었다.

“특별히 진 사장이 별로인 게 아니라, 요즘 좀, 그러네.”

“……언제부터?”

요즘이라는 것을 보니, 이번이 처음도 아닌 모양이었다. 진도현이 따지듯 묻자 이번엔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글쎄, 좀 됐나?”

“…….”

“진 사장이랑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직, 몸이 덜 회복되서 그런가.”

“…….”

녀석답지 않게 변명을 주절거리는 모습에 진도현의 미간이 좀 더 찌푸려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확실히 안색이 나빴다. 본래도 하얀 얼굴이 이제는 핏기라고는 없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앓아누운 동안 잘 먹지도 못했던 탓에, 안 그래도 조그만 얼굴이 지금은 제 주먹만 해져 있었다.

낮게 한숨을 내쉰 진도현이 화수의 몸에 박혀 있던 제 것을 뺐다. 쯕, 소리를 내며 젖은 살덩이가 떨어져 나오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안을 빠듯하게 채우던 것이 갑작스럽게 빠져나가는 느낌에 허리를 떨던 화수가 뒤늦게 몸을 뒤집었다.

“그냥 해도 되는데.”

“됐어. 이미 식었어.”

어차피 제 것이 서든 안 서든 받는 건 뒤니까 상관없지 않나, 싶었지만 진도현의 표정은 이미 흥이 식어 있었다. 물론 식은 건 기분만인지 진도현의 것은 여전히 반쯤 서 있는 상태였지만.

잠시 고민하던 화수도 이내 머리를 툭, 하고 늘어트린다. 등불의 빛이 번진 천정이 마치 물속처럼 흐리게 흔들렸다. 그것을 보는 화수의 가슴도 옅게 할딱였다.

지익. 꺼낸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났다. 종이 타는 냄새에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던 화수가 몸을 빙글여 모로 누웠다.

지이익. 살짝 고개를 기울인 진도현의 볼이 홀쭉해졌다. 삐딱하게 문 담배 끄트머리에서 새빨간 불길이 일었다 사그라졌다. 담배를 문 자세에서마저도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삐딱한 진도현과는 달리 담배마저 정자세로 물고 있던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으려니 흘낏, 시선이 내려왔다.

“왜?”

“……아니.”

너무 뚫어져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진짜 보고 있던 건 그 너머의 다른 존재였지만 어쨌든 제 행동을 깨달은 화수가 뒤늦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정작 진도현은 그런 화수의 행동을 다른 의미로 이해했다.

“아무리 그렇게 애타게 봐도 안 줘.”

“……왜?!”

물론 달라고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안 준다고 하니 서운한 것도 사실이라, 따져 묻는 화수에 진도현은 태연히 대꾸했다.

“거기도 못 세우는 녀석한텐 금지야.”

힐끗, 진도현의 시선이 제 아랫도리를 향하는 것을 본 화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담배 때문에 거기가 시드는 거면, 그럼 대체 진 사장이나-”

말도 안 된다는 듯 투덜거리던 화수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물었던 담배를 손으로 옮겨놓던 진도현이 이어질 말이 들려오지 않자 다시 시선을 위로 올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한 화수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본 진도현이 되물었다.

“또 누가 담배를 피우면서도, 거기는 절대 안 시드는데?”

“…….”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녀석이 오늘따라 표정관리가 시원찮았다. 사실 화수 스스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되뇌려고 했다는 것에 당황한 탓이 컸다. 그게 뭐라고. 하지만 정말 별것이 아니면 굳이 이렇게 입안으로 삼킬 이유도 없었다.

앞으로 나오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있는 화수를 대신해 진도현이 슬쩍 퇴로를 만들어줬다.

“뭐, 대부분 다 그렇지. 우리 화수 거시기 빼곤.”

“……아주 뽕을 뽑으시겠습니다?”

눈매를 일그러트린 채 투덜거리고 있지만, 사실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화수였다.

“당연하지. 이자까지 복리로 쳐서 1원 한 장까지 다 받아낼 거니까.”

“무섭네.”

“어흥.”

무섭기는커녕 시큰둥하기 짝이 없는 맹수의 울음소리에 화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화수를 내려다보던 진도현이 이불을 끌어와 화수의 머리까지 다 덮었다.

“그만 자. 난 이것만 피우고 갈 거니까.”

“가게?”

삐죽, 얼굴만 내민 화수가 물었다. 기묘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멈칫하고 진도현이 시선을 내렸다.

“안 갔으면 좋겠다는 소리로 들리네.”

“아니, 뭐, 평소엔 새벽까지 하다 가니까. 그냥 간다니까 이상해서.”

몸은 섞어도 같이 자는 일은 질색하는 녀석이라 제가 잘못 들었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

볼을 긁적이면서 변명하는 화수에 진도현이 피식, 하고 웃었다. 하지만 이내 질문을 되돌리는 진도현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이지?”

“물론, 저죠.”

알면 그만 떠들고 자라는 듯 진도현의 손이 화수의 눈을 눌렀다. 화수 역시 별다른 반항 없이 얌전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가린 손이 뜨끈했다. 누군가처럼. 며칠간 불면에 시달렸던 것이 거짓말처럼 수마가 몰려들었다. 암전되듯 모든 것이 깜깜해졌다.

* * *

끼익.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렸다. 그 열린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화수였다.

터벅터벅.

걸어 나온 화수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일도 없이, 한쪽 방향으로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 그리고 그 걸음이 멈춘 것은 바로 담벼락 아래 세워진 검은 자동차 앞에서였다.

똑똑.

앞 유리를 두드리자, 닫혀 있던 창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지만 화수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은 그 너머인, 뒷좌석 쪽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지키고 있지 않으셔도 도망 안 갑니다.”

사실, 갈 데도 없었다.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경무국장의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화수 때문에 손님 발길이 딱 끊긴 유곽인데, 그런 가게 앞에 누가 봐도 총독부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차가 이렇게 떡하니 서 있으니 가게에서 일을 하는 직원들부터,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집사영감까지 불안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정히 못 믿으시겠다면-”

“타.”

제가 어떻게 하면 믿겠냐고 물으려는데, 내내 입을 꾹 다문 채 무시하던 리 샤오가 불쑥 말문을 열었다.

사실 이번에도 무시당하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아무 반응도 없는 리 샤오에 다시 말을 붙여보려고 하던 찰나였다. 그런데 무려 돌아온 말이 차에 타라는 것이라니. 목소리가 듣고 싶은 나머지 제가 환청을 들었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타시죠.”

어느 틈에 차에서 내린 카이가 뒷좌석 문을 연 채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카이를 물끄러미 보던 화수가 슬쩍 물었다. 목소리는 최대한 죽인 채.

“혹시, 저 잡혀가는 겁니까?”

카이의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 그건 아니실 겁니다.”

하지만 카이답지 않게 대답이 모호했다. 요즘 제 상관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미묘한 차이를 느꼈는지 화수가 다른 질문을 꺼냈다.

“경무국장님은-”

“살아 계십니다.”

카이의 즉답에 그제야 화수의 표정도 조금 풀렸다.

“그럼.”

어서 타시라, 재촉하는 눈빛에 화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마 제 발로 지옥문을 열고 들어가는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이리라.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화수는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 리 샤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얕게 뛰었다.

“장 선생한테 들러.”

리 샤오의 명령에 일순, 멈칫했던 카이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뒤를 향해 되묻는다.

“장 선생, 이요.”

물론 제대로 듣지 못해 확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아한 까닭이었다.

“왜. 안 돼?”

하지만 다행히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 살풋 미간을 찌푸린 채 되묻는 리 샤오에 카이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출발해.”

짧은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나고, 차도 별 문제없이 출발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해결되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화수였다. 할 얘기가 있어서 타라는 건 줄 알았는데 갑자기 어딜 가며, 장 선생은 또 누군가. 의문투성이인 화수의 시선이 슬쩍 카이를 향했지만 그런 화수의 눈에 들어오는 건 카이의 뒷모습뿐이다. 물론 눈이 마주쳤다고 해도 카이 역시 영문을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라 별다른 소득은 없었을 테지만.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묻지?”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순간 한쪽 눈매가 일그러진다. 티 안 나게 흘낏거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 이쪽으로는 시선도 한 번 안 주더니 그건 또 언제 봤나 싶었다.

“그럼 어디 가는 건지 물어도 됩니까?”

어차피 들킨 거. 그냥 뻔뻔하게 묻기로 했다.

“그래도 겁은 나는 모양이지?”

“……비루한 차림으로 끌려가고 싶지는 않아서요.”

급히 생각해낸 변명이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그냥 해본 말은 또 아니었다. 지금 화수가 입고 있는 옷은 보통 손님을 받지 않을 때 입는, 삼베로 만든 호복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리 샤오를 의식해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갈아입고 나왔지만-잠시 얘기하러 나오는데 차려입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아- 어쨌든 앞을 끈으로 여미는 침의에 가까운 옷이라 바깥을 나다닐 차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 샤오의 대답은 비교적 간결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

도대체 그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이, 끌려가는 것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지, 어차피 가면 그런 사소한 것은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으리라는 의미의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지를 알 수 없어 화수의 불안은 더 깊어졌지만, 더 이상 리 샤오의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화수의 불안한 마음과는 별개로 자동차는 한 번 멈추는 일도 없이 빠르게 속도를 냈다.

“도착했습니다.”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선 차가 처음으로 멈춰 선 곳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였다. 잔뜩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통유리로 된 진열창에 나란히 옷 본 세 개가 진열되어 있는 가게는 누가 봐도 평범한 양장점이었다.

장 선생이 바로 이 장 선생이었구나. 재단사 장 선생이라면 화수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 옷을 맞춰본 적은 없었지만. 고가의 가격도 가격이지만 애초에 이곳은 화수 같은 화류계 인사는 손님으로 받지 않았다. 고위급 간부나, 집안이 좋은 부자들이 이곳의 주 고객층이었다. 딱 리 샤오와 같은.

“뭐 해?”

따라 내려도 되는 건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더니, 곧바로 질책 같은 질문이 날아왔다. 황급히 차 밖으로 나오자 뒤로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무의식적으로 돌아간 시선에 뒤편에 서 있던 카이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을 거라고 했잖습니까. 어깨를 으쓱이는 카이의 얼굴에 뿌듯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사실 달갑진 않았다. 오히려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던 그때보다 지금이 화수는 더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저기, 기다리시는데요.”

난처한 표정으로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에 황급히 몸을 돌리자 어느새 가게 출입문을 붙잡고 서 있는 리 샤오가 보였다. 화수의 걸음이 날듯이 움직였다.

“어서 오세요.”

엉겁결에 리 샤오가 붙잡고 있는 문을 통과해 들어가자 마침 안쪽에서 나오던 직원과 떡하니 마주쳤다.

“방문 약속은 하셨나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 있는데, 바로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따로 약속은 하지 않았는데.”

직원의 얼굴 위로 난처한 기색이 번졌다.

“아, 그럼 지금은 좀 곤란하시겠는데요. 선생님께서는 다른 손님을 상대하고 계셔서-”

“리 샤오 님?”

그 때였다. 난처한 표정으로 거절하고 있던 직원의 뒤로 불쑥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니, 가게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연통을 주셨으면 제가 찾아뵈었을 텐데요.”

놀란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이는 나이 지긋한 중년의 사내로, 아마도 그가 소문의 장 선생인 모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리 샤오 님을 몰라보고 큰 실례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직원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리 샤오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늘 제 주인 혼자 그의 집으로 호출되어 다녀왔기 때문에 실제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실수가 용납되는 것은 아니었다. 손님께 대접할 차 온도를 맞추지 못했다고 가게에서 쫓겨나는 판에, 하물며 이런 거물급 손님을 못 알아본 것도 모자라 쫓아버릴 뻔했다니. 지금 당장 쫓겨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꽉 움켜쥔 두 손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리 샤오가 궁금한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럼, 괜찮은 건가?”

“물론입니다.”

애초에 리 샤오는 다른 이가 자신을 알아보든 말든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평생을 상대가 먼저 알아봐주고, 대우를 받아왔던 탓에 그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굳이 상대가 알아봐주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장 선생도 그런 리 샤오의 의외의 성격은 소문으로 들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겪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역시나 괜한 우려였던 모양이다.

“이리로 들어가시죠.”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장 선생이 앞장을 섰다. 뒤따라오는 발소리를 확인하며 걷던 장 선생이 응접실 입구에서 몸을 틀었다.

“그나저나 새 양복을 맞추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혹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심지어 그때 맞춘 양복이 이제 겨우 가봉을 끝낸 상태인데 다시 자신을 찾았으니 당연히 무슨 일이 있나 싶었던 것. 하지만 의외로 돌아온 답변은 평범했다.

“오늘은 내가 아니라 저 녀석 것을 맞추러 온 거야.”

힐끗, 눈짓으로 가리키는 리 샤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틀었던 장 선생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무리 리 샤오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고는 해도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로 화려한 얼굴을 한 사내가 그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의아한 이는 장 선생만은 아니었던 모양.

“저요?”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화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옷이라니. 저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질문에 리 샤오의 미간이 확, 찌푸려진다. 마치,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그럼, 너를 내 옷 맞추는데 구경꾼으로 세워두려고 여길 데려왔을까 봐?”

“…….”

사실 그만큼 어이없는 소리라는 뜻으로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화수에 리 샤오가 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물론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기가 막히는군.”

“…….”

하지만 사실 완전히 그런 이유라고 확신했다기보다는, 어쨌든 볼일이 있어 왔겠거니 했지, 제 옷을 맞추러 왔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지만, 왜요?”

애초에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리 샤오 부장님이 제게 옷을 사 줄 이유가, 없잖습니까.”

다른 손님들처럼 자신의 환심을 사고 싶은 것도 아닐 테고. 전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묻는 화수에 리 샤오가 오히려 질문을 되돌렸다.

“이유가 왜 없지?”

“……무슨.”

“변상해 주겠다고 했을 텐데.”

“…….”

리 샤오의 말에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설마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냥 스치듯 지나간, 정말 별것 아닌 약속이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이야기를 하던 중간에 카이의 등장으로 흐지부지되어버렸고.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울 판에, 심지어 그 별것 아닌 약속을 지키겠다고 싫어 죽겠는 녀석을 데리고 여기까지 오다니. 기가 막히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그게 또 리 샤오답다 싶기도 했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수를 리 샤오는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 변상은 싫다고 했던가.”

“…….”

여상한 말투였지만 화수의 얼굴은 굳었다. 당연히 그 다음 수순은 싫으면 관두라는 말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화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싫다고 한 적은-”

“그럼 선물이라고 해두지.”

변명하려던 화수의 눈이 커졌다. 이건 전혀 다른 의미로 예상치 못한 단어였다.

“선물이라면.”

이번엔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받겠다던 것 아니었나?”

멍하니 굳어 있던 화수는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아뇨. 맞아요. 선물이라면 받겠다고 한 거,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리 샤오의 말에 동의하던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뒤늦게 지금의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졸지에 리 샤오에게 당당히 선물을 요구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생각을 증명하듯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다소 억울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굳이 오해를 하든 말든 상관없기도 했지만, 사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해야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있을지를 몰라서가 더 컸다.

그렇지만 실제 화수에게 시선이 몰린 이유는 그가 생각하는 이유와는 조금 달랐다. 그저 리 샤오를 아는 이들에게는 무려 그가 직접 선물을 해주겠다고 데려온 존재가 신기하고 놀라웠을 뿐. 화수가 생각하는 그런 오해는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리 샤오는 누가 선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해서 순순히 그럴 마음을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모르는 이는 화수뿐이다.

“그럼, 된 거지? 장 선생.”

질문을 하긴 했지만, 더 이상 화수의 의견 같은 건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리 샤오의 시선은 장 선생에게로 옮겨갔다. 별다른 지시는 없었지만 리 샤오의 신호에 장 선생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걸음을 내디뎠다. 등 뒤로 바싹 다가서는 기척에 순간적으로 화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런 화수의 반응에 장 선생의 움직임도 그대로 멈췄다. 계속해도 되는 거냐는 장 선생의 눈빛에 리 샤오가 툭, 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치수를 재는 것뿐이야.”

별것 아닌 말에 제 앞에 선 몸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하지만 완전히 경계가 풀린 것은 또 아니라 장 선생은 재빨리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줄자를 꺼내 들었다.

“가만히, 서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아이를 달래듯 나직이 중얼거린 장 선생이 본격적으로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어깨와 팔의 길이를 재는 장 선생을 가만히 보고 있던 화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망가진 건 넥타이, 뿐인데요.”

딴지를 걸려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넥타이 하나에 대한 변상 치고는 너무 과하지 않나, 싶었다. 다시 한 번 리 샤오의 시선이 다시 저를 향했다. 괜히 또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인가 싶어 긴장한 화수를 보는 리 샤오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이자라고 생각하든지.”

“……이자, 요.”

이자를 요구받은 적은 있어도 받은 적은 없었던 터라 그 단어를 되뇌는 화수의 얼굴이 기묘했다. 그것도 원금의 몇 십 배, 아니, 어쩌면 몇 백 배일지도 모르는 이자라니. 게다가 그걸 마치 밥 한 끼 사 주겠다는 말처럼 가볍게 하고 있었다. 역시나 높으신 양반들의 사고방식은 따라가기가 힘이 들었다.

“잠시, 팔을.”

때마침 끼어든 장 선생 덕분에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장 선생이 시키는 대로 두 팔을 들어준 뒤 다시 고개를 틀었을 때는 이미 리 샤오의 시선은 직원이 가져다 놓은 찻잔으로 옮겨간 뒤였다. 중단이 아니라 아예 끝이 난 모양이었다.

“자세가, 아주 좋군요.”

가슴둘레를 재고, 등 길이로 넘어간 장 선생이 감탄했다. 혼잣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본격적인 칭찬의 말이 이어졌다.

“균형도 제대로 잡혔고, 근육이 좀 더 붙으면 좋겠지만 아름다운 몸이네요.”

“……감사합니다.”

어차피 손님에게 하는 의례적인 칭찬이겠으나, 듣기 나쁘진 않았다. 물론 너무 진지한 말투라 듣는 입장에서는 다소 민망하긴 했지만. 함께 듣고 있던 리 샤오가 비웃진 않을까 싶었으나 다행히 리 샤오는 아예 이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지도 않았다.

“마침 오늘 새로 들어온 원단이 있는데, 역시 주인은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키가 작고 살집이 있는 앞 손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원단이라-워낙 고가이기도 했고- 꺼내놓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봐도 눈앞의 사내에게 딱이다 싶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장 선생이 사라지고, 내내 장 선생이 불러주는 숫자를 받아 적던 직원마저 찻주전자를 채우러 사라지자 응접실 안엔 적막만이 흘렀다.

“와서 앉아.”

서 있는 편이 더 편한 게 아니라면. 찻잔을 내려놓으며 리 샤오가 덧붙인 말에, 사실 서 있는 편이 더 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걸음을 내디뎠다.

“고맙습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화수가 불쑥 입을 열었다. 흘낏, 새까만 시선이 제게로 향한다. 뭐가? 하고 물어오는 눈빛에 화수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선물에 대한 인사를 안 한 것 같아서.”

“……이자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었나?”

“죄송합니다. 너무 과한 듯해서 물은 것이지 내키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뒤늦게 그에 대한 사과도 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고맙다면서.”

불쑥, 정신을 잡아채는 목소리에 멍하니 허공을 부유하고 있던 시선이 들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데요.”

“부담돼서 어쩔 줄 모르겠는 표정.”

“그런 거 아닙니다.”

“…….”

당황한 화수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그 말을 반박하는 대신 그런 화수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다. 결국 화수가 졌다는 듯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귀신같은 사내였다.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정작 거기까지 말해놓고 다시 머뭇거린다. 리 샤오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냥?”

재촉하듯 되묻는 리 샤오에 머뭇거리던 화수가 결국 입을 열었다.

“경무국장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옷을 입어볼 수는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잠깐 했을 뿐입니다.”

“…….”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거짓말 따위는 통하지 않을 테니 속마음을 숨길 수도 없었다. 단숨에 무거워지는 공기에 화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침묵이 길지 않았다는 점이다.

“살아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줄 알았는데.”

“뭐, 세상 일이 그리 좋게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유난히 자신에게는 박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 어깨를 으쓱이는 화수에 리 샤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날, 거긴 무슨 일로 왔던 거지?”

“…….”

순간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질문에서 말하는 그날과 거기가 언제, 어디를 말하는 건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 이유는 리 샤오가 그 질문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해서였다. 지금 이 질문은, 자신이 그곳에 다른 목적으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묻는 것이었으니까. 제가 말하는 바를 그대로 믿어주지는 않겠지만, 이미 화수가 범인이라고 정해두고 묻던 그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이번에도 눈만 깜빡이고 있는 화수의 반응을 오해했는지 리 샤오가 한발 뒤로 물러섰다.

“말하기 싫으면 관둬.”

그냥 물은 것이니 잊어버리라는 듯. 그래서였을까. 당황한 화수의 입에서 내내 입안에서만 맴돌던 대답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빌린 돈 갚으러, 갔었어요.”

“…….”

“그날, 밥값이랑, 차비 빌린 거.”

혹,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싶어 설명을 덧붙였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기가 막히다는 듯 보던 리 샤오의 눈빛이 덧붙여지는 설명에 험악해지고 있었다. 사실 카이도 구별하지 못하는 미묘한 차이였지만 화수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대신 리 샤오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고작, 그것 때문에 왔다고?”

“…….”

물론 그 말이 얼마나 황당하게 들릴지는 누구보다 화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뜻 말하지 못했던 거고.

하지만 그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유가 그날 화수가 리 샤오를 만나러 갈 수 있는 유일한 핑계거리였다. 물론 그런 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화수 스스로도 자각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한 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것은 리 샤오였다.

“그렇게 나한테 빚진 채로 있는 게 싫었단 말이지.”

“……예?”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에 화수의 고개가 들렸다. 당황한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지만 이미 오해를 하고 있는 리 샤오의 눈에는 그저 정곡을 찔려 당황한 사람의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건.”

한 박자 늦게 입을 뗐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늦었지요. 어울릴 만한 것이 워낙 많아서 다 챙겨 나오다 보니.”

때마침 원단을 가지러 갔던 장 선생의 등장으로 화수는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변명을 입안으로 삼켰다.

허나 장 선생이 오지 않았다고 해도 입술을 달싹이다 그대로 닫았을 것이다. 사실 화수조차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까. 차라리 알았다면 거짓말이라도 했겠지만, 저도 모르는 것을 감추는 법을 화수는 배우지 못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두 사람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읽은 장 선생이 물었지만 대답을 내놓는 이는 없었다. 이미 리 샤오는 화수의 말을 들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봐.”

눈도 마주치지 않던 리 샤오가 화수에게 고갯짓을 한다.

“이것도 싫은 게 아니라면.”

“…….”

뒤이어 덧붙이는 말에 화수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오해를 푸는 방법 같은 건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또 다른 오해라도 만들지 않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생각이 든 것도 리 샤오가 유일했다. 물론 화수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역시, 붉은 계열의 색도 잘 받는군요.”

거울 앞에 선 화수의 어깨 위로 고급 원단들이 얹어진다. 이미 그럴 줄 확신하고 있었다는 듯, 장 선생의 얼굴에 뿌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상급의 원단이라 감촉도 아주 일품입니다. 어떠십니까?”

“그냥 아무거나-”

“물론, 어두운 색도 잘 어울리지만요.”

연신 색을 바꿔가며 의견을 묻고 있었지만 사실 그런 것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화수의 시선은 거울 너머로 보이는 리 샤오에게만 닿아 있었다. 하지만 이 각도에서는 리 샤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자꾸만 초조해졌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그런 기색을 읽을 수 없었지만. 갈증이 일었다.

“뭐, 아무리 다른 색이 좋다고 해도 결국엔 블랙이죠. 광택이 있는 쪽이 피부가 깨끗해 보이는군요. 그럼 이것으로 할까요?”

“예.”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충 좋다는 말이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어깨에 겹겹이 얹혀 있던 원단들이 내려갔다. 화수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겨우 끝이 나나 싶었는데,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 진짜 본격적인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셔츠는 푸른빛이 도는 흰색이고 양복은 검은색이니, 넥타이는 이 담자색 타이가 어떠십니까? 최고급 실크로 만들어 목에 착 감기는 느낌이 다른 타이와는 완전히 다를 겁니다.”

“예, 뭐.”

“흠, 이렇게 보니 금사가 들어간 푸른색도 괜찮고.”

“그러네요.”

“둘 중 어느 게 더 좋으십니까?”

연신 두 개의 넥타이를 화수의 얼굴 옆으로 대보며 한참 고민을 하던 장 선생이 선택권을 화수에게 넘겼다. 내밀어진 두 넥타이를 보는 화수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장 선생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화수의 눈에는 두 개의 넥타이는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색이 다르긴 했지만, 굳이 그토록 고민하는 이유를 모르겠는 화수였다.

“그럼 이걸로.”

고르라고 하고서는 정작 화수가 금사가 들어간 푸른색을 가리키자-그나마도 그게 더 나아서라기보다는 제가 가진 대부분의 것들이 짙은 색이라 익숙한 것이 이유였지만- 담자색의 타이를 화수의 얼굴 옆에 바싹 붙인다.

“직접 해보시면 생각이 바뀌실 텐데요.”

“아뇨. 괜찮습니다.”

장 선생의 권유에도 화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장 선생도 끈질겼다. 물론 값비싼 물건을 팔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순전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돈이 차고 넘치는 손님은 많아도 화수만큼 자신이 만든 물건을 제대로 소화해내는 손님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지 않더라도 좋으니 이것저것 입혀보고 제가 만든 작품을 감상-물론 상대의 칭찬도 듣고 싶고-하고 싶은데, 정작 상대가 영 비협조적인 데다 시큰둥한 반응만 보이니, 혹 제가 만든 물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싶어 애가 타는 장 선생이었다. 화수는 그런 장 선생의 칭찬과 권유가 비싼 물건을 팔기 위한 목적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장 선생은 손님에게 비싼 물건을 팔고자 이것저것 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손님이 원해도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절대 팔지 않았다. 물론 그 대신 손님에게 가장 어울리는 물건을 건네주기 때문에 누구도 불만을 가지는 이는 없었지만.

“굳이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한번 해보시죠.”

재차 권유-그러면서도 이미 넥타이는 제 얼굴 바로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하는 장 선생에 화수의 얼굴 위로 조금 전과는 또 다른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에게는 별것 아닐 그 일이, 화수에게는 별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넥타이도 맬 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때였다.

“줘봐.”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는 화수의 머리 위로 불쑥, 리 샤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은 화수와 달리 장 선생은 재빨리 들고 있던 담자색 타이를 내밀었다. 어깨 너머로 내뻗어진 손이 말없이 그것을 건네받아 다시 물러났다. 그 바람에 어깨에 살짝 팔이 닿았다. 닿은 곳이 뜨끈했다.

슥.

타이가 목에 걸쳐졌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조금 아래로 숙어졌는지 앞으로 내밀어진 손이 화수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시선이 정면을 향한다. 거울에 제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화수의 눈이 좇고 있는 것은 제 목을 감싸듯 내뻗어진 양손이었다.

완전히 굳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화수와 달리 몸을 완전히 밀착시킨 리샤오는 능숙하게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양쪽을 교차시키고, 돌리고, 매듭을 만들어서 다시 그 안에 밀어 넣고, 그 끝을 잡아 쭉 당기자 거짓말처럼 완벽한 모양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엔 한 손으로는 삼각형의 매듭을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타이 끝을 잡아당겼다. 스윽, 스윽, 천이 스칠 때마다 나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더 컸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이게 더 낫군.”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에 화수의 시선도 거울을 향한다. 물론 고개는 계속 정면을 보고 있었지만 실제 보고 있던 것은 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울을 보고서야 완벽한 모양으로 타이가 매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장 선생이 맞장구를 쳤다. 엄밀히 말하면 장 선생은 둘 다 어울린다고 주장했었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화수는 그럴 정신이 없었고, 리 샤오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돌려진 뒤였기 때문이다.

흘낏, 장 선생의 손에 들린 푸른색 넥타이를 본 리 샤오가 덧붙였다.

“둘 다 가져가지.”

“역시,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을 단숨에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는 결정이었지만, 장 선생에게서는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장 선생은 태연히 나머지 푸른색 넥타이를 들고 나왔던 상자 안에 고이 접어 넣었다.

그사이 리 샤오가 방향을 틀었다. 뒤이어 멍하게 서 있는 화수에게 손을 내뻗었다.

“안심해.”

흠칫, 하고 몸을 굳히는 화수에게 리 샤오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고는 살짝 구부린 손가락을 넥타이 매듭 안에 집어넣고 그것을 그대로 끌어 내렸다. 스윽, 하는 소리와 함께 넥타이가 풀어 헤쳐졌다.

“경무국장이 죽더라도 이 옷은 꼭 입게 해줄 테니까.”

나직이 덧붙이는 말에 그제야 화수도 안심하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타이를 푸는 것뿐이니 안심하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에 대한 대답이었던 모양. 화수가 입을 열었다.

“고맙, 습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사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긍정적인 말보다는 이쪽이 훨씬 위안이 되었다. 뭐, 대체 어떻게 입게 해줄지에 대한 의문은 들었지만, 뭐, 죽어서 묻힐 때라도 입게 해주겠지 싶은 것이 화수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이건, 제가.”

목에 걸린 넥타이를 가져가려는 장 선생에게 화수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박스에 포장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화수는 그것을 넘겨주기 싫었다. 다행히 의아한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장 선생도 더 이상은 강요하지 않았다.

“그럼, 가봉 때 뵙겠습니다.”

차에 오른 화수가 제 목에 걸려 있던 타이를 빼서 손으로 옮겨 쥐었다. 최고급 실크로 만들어 목에 착 감기는 느낌이 남다르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분명 넥타이는 제 손에 쥐어져 있는데도, 아직도 목에 감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을 보면.

목이 뜨끈했다.

화수가 손에 쥔 넥타이를 더 꽉 움켜쥐었다. 제 목에는 아무것도 매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확인시켜주겠다는 듯이.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목에서 퍼진 열기가 이제는 온몸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내렸던 열이 다시 오르고 있었다.

* * *

“그럼 이만.”

만족스러운 대화를 끝으로 통관 책임자를 배웅하기 위해 막 사무실 밖으로 나오던 참이었다.

-!

사무실 밖 문 옆, 작은 의자에 앉아 있던 이가 문소리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예정에 없던 방문객을 확인한 진도현의 미간 위로 깊은 주름이 잡혔다. 물론 앞서가던 이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을 때는 언제 얼굴을 찌푸렸냐는 듯 태연한 웃음을 되돌렸지만.

“조만간 따로 좋은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그럽, 시다.”

평소라면 얼굴에 화색을 띠었을 진도현의 인사말에도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차 과장이 여전히 상대를 힐끗거린다. 뭐 이해는 되었다. 여자라면 치마만 둘러도 눈이 돌아가는 차 과장이 아니라도, 사내라면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연노랑 원피스 위에 상아색 오버코트를 걸친 단아한 차림의 그녀는 바로, 홍매루의 초하였다.

“진 사장 손님인가 봅니다?”

그녀가 누군지 아주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을 물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또 아니라 차 과장이 괜스레 뭉그적대는 것을 보면서도 진도현은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그럼 또 뵙죠. 보시다시피, 손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멀리는 못 나갑니다.”

“……."

말투는 정중했지만 결국 빨리 꺼지라는 말이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그녀의 미모에 반쯤 넋이 나간 상태라 사내가 진도현의 말에 기분 상할 겨를도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탁.

연신 문 옆에 선 초하를 흘끔거리던 사내가 문을 통과하기 무섭게 진도현이 문을 닫았다. 퉁퉁한 몸이 문에 밀리는 느낌까지 났지만 진도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뒤돌아선 진도현이 물었다. 평소 그녀는 약속도 없이 불쑥 사무실까지 찾아올 성격이 아니었다. 아주 곤란한 일이 생긴 것이 아니고서는. 그런 진도현의 추측을 뒷받침하듯 초하가 입을 쉽게 떼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경험상 유곽의 여인에게 곤란한 일이라면 딱 두 가지였다. 돈 아니면 남자. 둘 다일 경우가 제일 많았지만.

“돈 필요해?”

사실 초하 정도면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았다면 유곽으로 흘러들어올 일은 거의 없으니까. 가족이든, 남자든, 남모르는 골칫거리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진도현의 추측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구.”

“그래?”

“네. 아니에요.”

놀란 눈으로 펄쩍 뛰는 반응을 보니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도현이 다시 물었다.

“뭐야. 설마 그럼 정말 남자 문제야?”

“……아뇨.”

부인하긴 했지만 일순, 시간 간격을 두고 나온 대답에 진도현이 알 만하다는 듯 피식 하고 웃었다.

“왜. 어떤 손님새끼가 곤란하게 굴어?”

“그런 게 아니라, 화수 씨가…….”

고개를 내젓는 초하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듣는 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던 진도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화수가 왜.”

일순 흠칫할 정도로 되묻는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늘 여유로운 진도현에게서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초하였다. 하지만 지금 목소리는 아무것도 아님을 뒷말을 덧붙이고서야 알았다.

“화수 씨가, 끌려갔어요.”

“…….”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진도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아직 경무국장은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체 누가.

거기까지 생각한 진도현의 얼굴이 더 찌푸려진다. 일순,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짐작을 뒷받침하듯 초하의 뒷말이 이어진다.

“룽오 부장님이…….”

제가 떠올린 이름과 동일한 이름을 들은 진도현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그게 언제야.”

“……한 시진은 지났을 거예요.”

“대체 그걸 왜 이제사 알려?! 한조는 대체 뭘 하고.”

진도현의 언성이 높아지자 초하가 황급히 변명했다.

“그게, 홍매루 밖으로 이 일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라는, 엄명이 떨어져서요. 감시하는 눈을 피해 몰래 빠져나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죄송해요.”

빌어먹을.

낮게 내뱉는 욕설에 초하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렸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을 알았지만 진도현은 좀처럼 치미는 화를 누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룽오 부장이 입막음을 하고 갔다면 화수를 경무국으로 데려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일이 퍽 곤란하게 되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부탁할 분이 진 사장님밖에 없어서…….”

“…….”

진도현도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 때였다.

Trrrrrrrrrr.

불쑥, 전화벨이 울렸다.

“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진도현이 그대로 시선만 주고 있자, 책상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직원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아주 짧은 대화를 끝으로 끊어진 전화기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직원이 고개만 꺾고 말했다.

“경무국장님이.”

물론 제대로 된 문장도 아니고 겨우 말 한마디만 내뱉었지만 굳이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진도현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잔뜩 구겨졌다. 조금 전이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행운보다는 악운이 더 우위인 모양이었다. 만약 화수가 있었다면 거보라지 않았냐며, 대놓고 진도현을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비웃을 이는 이곳에 없었다.

그게 진도현은 미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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