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화수야!’
막 대문을 넘어서던 화수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칫한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이 마치 제 발목을 붙잡은 것처럼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말도 없이 어딜 다녀오는 게야.’
그렇게 물러서지도, 그렇다고 앞으로 내딛지도 못하고 서 있으려니 헐레벌떡 뛰어오는 집사영감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화수는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를 내는 목소리와 달리 그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정한 한조와 달리 집사영감은 이 일이 맞지 않는 사내였다. 그러기엔 너무 정이 많았다. 차고 넘쳐서 그 정이 저 같은 녀석에까지 순서가 올 만큼 마음이 여린 노친네였다.
어쩐지 오늘 운이 너무 좋더라니.
‘왜. 손님이라도 왔어?’
하지만 담담히 묻는 화수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묻는 화수에 집사영감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일그러졌다.
‘그게…….’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 없어 말끝을 흐리는 집사영감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뒤를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화수의 시선도 현관을 향했다.
낯익은 얼굴을 한 이가 그곳에 서 있었다. 룽오 부장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잠복해 있었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와 화수의 뒤를 막아섰다.
하지만 모든 게 불필요한 일이었다. 화수는 전혀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화수, 너를 지금부터 경무국장의 살해용의자로 체포한다.’
살해용의자라고 하는 것을 보니 결국, 경무국장은 깨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살해 용의자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에도 화수는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사실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제 그 순간이 올지 몰라 불안해하던 때보다는 오히려 지금이 마음은 편했다.
‘옷 좀 갈아입고 가도 될까요.’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인 화수가 조용히 물었다. 적어도 추한 꼴로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태연한 태도가 룽오 부장의 화를 치밀게 만든다는 건 몰랐다. 물론 알았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다름없이 행동했을 테지만.
퍽.
순간적으로 눈앞이 번쩍했다. 뒤이어 오른쪽 눈앞으로 뭔가가 주룩, 하고 흘러내렸다.
‘화수야!’
비명소리를 닮은 외침에 화수도 그게 피라는 걸 알았다. 현관문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였지만, 누군가에게 저지당했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룩, 주룩, 흘러내리는 피를 화수가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물 같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아프지 않다기보다는 뭔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끌고 가.’
룽오 부장의 명령에 병사들이 화수의 양팔을 포박하듯 움켜쥐었다. 그 바람에 넥타이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피가 줄줄 흐를 때조차도 그 피가 묻을까 봐 반대편 손으로 옮겨 쥐었던 것이었다.
아.
스륵, 하고 손끝에서 흘러내리는 느낌에 화수가 황급히 손을 꽉 쥐었지만 이미 늦었다. 다급히 아래로 내린 시야에 바닥을 나뒹구는 넥타이가 보였다. 조금 전 머리가 터졌을 때도 찌푸려지지 않았던 화수의 얼굴이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자, 잠깐.’
화수가 중얼거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바로 옆에 선 사람이 못 들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몸은 그대로 앞으로 끌려갔다. 두 발에 힘을 주어 버텼다. 하지만 화수의 힘으로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에 의해 질질 끌려가던 화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 뒤따르던 병사들의 발에 밟혀 엉망이 되어버린 넥타이를 확인하고서야 화수도 조용히 반항을 멈췄다.
자신에게 마지막 행운 같은 게, 용납될 리 없었다.
* * *
“그럼 연락 주십시오.”
진도현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예상대로 화수는 경무국에 없었다. 경무국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행방이 묘연했다.
일단 알아봐주겠다고는 했지만 굳이 그를 왜 찾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모든 이들이 경무국장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솔직히 대부분은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의 죽음을 책임질 희생양은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남창인 화수는 아주 좋은 장기말이었다. 그가 정말로 범인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최대한 빨리 사건을 종결하고, 공석을 채울 생각들밖에는 없었다.
아마 평소였다면 진도현도 그들과 비슷한 행보를 걸었을 것이다. 설사 제가 시킨 일이었다고 해도.
“씨발.”
거기까지 생각한 진도현이 낮은 욕설을 내뱉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초하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진다.
역시 곤란한 부탁이었을까. 아무리 진도현이라도 이런 일에 휘말리는 건 위험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초하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지금 진도현을 가장 짜증스럽게 하는 사실은 오히려 제가 경무국장의 암살을 계획했다면 이따위로 허술하게 계획하지 않았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럼 이렇게 화수가 범인으로 지목되는 일도, 행방불명이 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것이 가장 억울한 진도현이었다. 물론 애초에 화수를 이용해 그런 일을 계획하지도 않았겠지만.
하필이면, 룽오 부장일 게 뭐람.
솔직히 다른 이라면 돈이든 뭐든 원하는 것을 잔뜩 쥐여 주고 설득해볼 만도 한데. 여자도, 돈도, 심지어 남의 힘으로 자리를 얻기도 싫어하는 룽오 부장은 여러 가지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내였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탐내던 녀석이 그나마 화수인데,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할 테니까.”
“……네.”
진도현의 말에 초하가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자신은 괜찮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단순히 제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차로-”
“괜찮아요. 올 때 타고 온 인력거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차로 태워다주겠다는 진도현의 제안을 초하가 거절했다.
“그래, 그럼.”
그러자 진도현도 더는 권하지 않는다. 일어선 초하가 막 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고마워.”
“네?”
불쑥 들려온 말에 초하가 뒤돌아섰다.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고, 진도현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탓이 컸다. 잘못 듣지 않았다는 듯 멍하게 선 초하에게 뒷말이 들려왔다.
“알리러 와줘서.”
“……아니요. 딱히 인사 들을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눈만 깜빡이던 초하가 뒤늦게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처음 진도현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하자는 의견을 낸 사람은 여설이었다. 자신이 한조와 사람들에게 대충 둘러댈 테니, 가서 도움을 요청해보라고. 그나마 자신보다는 초하가 부탁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며. 사실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과연 진 사장이 도와주겠다고 할까 싶었는데, 괜한 기우였다.
물론 초하도 진 사장이 화수를 귀여워하고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제가 아는 진 사장이라면 태연히 웃으면서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사내였다. 그런데 무려 고맙다는 인사까지 들을 줄이야.
여설 역시 진도현의 속내를 모두 꿰뚫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지금 상황에서 가장 힘 있고 믿을 만한 이가 진도현밖에 없어서, 일단 되든 안 되든 뭐든 해봐야 하지 않냐는 생각에 그런 제안을 한 것이지만. 어쨌든 여설의 제안이 통했다.
“화수도 고마워할 거야.”
“……아닐 거 같은데요.”
회의적으로 중얼거리는 초하에 진도현이 피식, 하고 웃었다.
“하긴, 녀석 성격이 좀 더럽지.”
“아니, 그게 아니라.”
이해한다는 듯 덧붙이는 진도현에 초하가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정작 끌려갈 땐 그냥 구경만 했는걸요. 피가 철철 나고 있는데도…….”
“…….”
진도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보라는 듯 초하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러니까 전 고맙단 인사들을 자격 없어요.”
* * *
“내려.”
진도현이 운전석 문을 열어젖혔다. 앉아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자 이번엔 아예 진도현이 그를 차 밖으로 끌어 내렸다. 그리고 그 운전석에 자신이 올라탔다. 가장 가까이에서 진도현을 봐온 운전기사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심각한 표정으로.
“사장님.”
그대로 출발하려는 차 앞을 뒤따라 나온 직원이 막아섰다.
“비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시잖아요.”
“비키라고 했어.”
말이 통하지 않는 진도현에 직원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제가 아는 진도현은 이렇게 아무 대책 없이 움직이는 사내가 아니었다. 늘 한 발 뒤에 물러서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그러고 나서 움직이는 사내였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상황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발부터 담근다? 그것도 고작 몸을 파는 남창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힘겹게 일궈놓은 사업을 위태롭게 만들면서까지? 누군가 진도현이 그런 짓을 하려고 한다고 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바로 제 눈으로 그런 모습을 목격하고 있었으니까. 직원도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를 보는 흉흉한 눈빛에 움찔했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약을 지어주던 약방 의원이 어제부터 안 보입니다. 사장님, 이거 진짜 괜히 불똥이라도 튀면-”
“다치기 싫으면 물러나는 게 좋을 거야.”
직원으로서는 나름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려는 의도였겠지만 사실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험악해진 진도현이 비키라는 경고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사납게 우는 엔진 소리에 직원의 얼굴 위로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더 이상 진도현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차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흙먼지가 일었다.
전속력으로 차가 달리고 있었다.
* * *
“어디로 가는 겁니까?”
화수가 물었다. 지금 차가 가고 있는 방향이 경무국 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머리 위로 헝겊 주머니를 뒤집어쓰고서도 화수는 그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화수도 더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듣는다고 나아지는 것도 없었으니까. 조금 전 질문은 저도 모르게 물은 것이었다. 사실 그것보다는 다른 일이 더 곤란했다.
주륵, 아직 멎지 않은 피가 자꾸만 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을 닦을 수도 없었다. 화수의 두 팔은 포박당한 상태. 화수가 다시 물었다.
“이것 좀 풀어주시면 안 됩니까?”
“닥치고 얌전히 있어.”
그나마 이번엔 대답이라도 돌아왔다.
“아니면 머리의 이거라도 벗겨주시면. 자꾸만 눈으로 피가 흘러들어가서요.”
“…….”
아예 무시하기로 한 것인가 싶었던 예상과는 달리 갑자기 시야가 밝아졌다. 뒤늦게 머리에 씌어 있던 헝겊 주머니가 벗겨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리둥절해하는 화수에게 옆에 앉아 있던 병사가 사납게 중얼거린다.
“이젠 입 닥치고 있어.”
그래도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화수가 불쌍하긴 했던 모양. 해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정말 해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탓에 잠시 눈만 깜빡이던 화수가 뒤늦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고맙-”
쾅-!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충격에 몸을 웅크렸던 화수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앞창 유리가 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타고 있던 차가 다른 차와 충돌했다는 걸.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른 차가 와서 박았다.
누군가 외쳤다.
“대체, 어떤 새끼야!”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정신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 * *
따르릉.
달리는 차 안, 군용 통신기가 울렸다. 경무국장인가. 일순 드는 생각에 재빨리 통신기를 집어 들었지만 카이의 예상은 빗나갔다.
-지금 룽오 부장이 용의자를 연행 중입니다.
무전을 건 이는 홍매루를 감시하고 있던 부하였다.
홍매루에 사람을 붙이라는 리 샤오의 지시를 들을 때만 해도 카이는 화수가 도망칠 것을 감시하라는 의미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던 모양.
-어떻게 할까요.
막을까요, 덧붙이는 부하의 물음에 침묵하던 카이가 짧게 대꾸했다.
“일단 둬.”
룽오 부장이 나섰다면 그의 부하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끊긴 무전기를 내려놓으며 카이가 흘끔 뒤를 살핀다. 리 샤오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뒷좌석 시트에 몸을 깊이 묻은 채였다.
“차를 돌릴까요.”
카이가 물었다. 차는 집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하지만 리 샤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경무국장이 살아 있으니 일단 두고 보겠다는 뜻인가. 카이의 추측과 달리 리 샤오가 고개를 내저은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룽오 부장 특별 집무실로 가.”
“예?”
카이가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물론 그곳이 어딘지 몰라서 되물은 것은 아니었고.
“경무국이, 아니라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카이에 리 샤오의 뒷말이 이어졌다.
“아직 경무국장 숨이 넘어갔다는 연락이 없으니, 이건 경무국이 아니라 룽오 부장 독단적으로 움직인 것이겠지.”
“…….”
하지만 여전히 눈만 깜빡이고 있는 카이에 리 샤오가 되물었다.
“왜. 내 추측이 틀린 것 같아?”
“아닙니다.”
카이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진심이었다. 그저 룽오 부장이 멋대로 움직일 것을 예상한 데다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서까지 훤히 꿰고 있는 모습이 조금 소름이 끼쳤을 뿐.
“좀 더 밟아.”
고개를 내저은 카이가 운전병을 향해 속도를 내라는 신호를 보냈다. 방향을 바꿀 일도 없었다. 룽오 부장의 특별 집무실은 리 샤오의 집 방향과 같았다. 설마 이것까지 예상하지는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이내 고개를 내젓는다. 아무리 리 샤오라도 거기까진 무리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는 카이였다.
“잠깐.”
카이의 지시에 달리던 차가 멈춰 섰다. 왼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한 카이의 고개는 정면에서 살짝 오른쪽으로 꺾여 있었다. 운전병의 시선도 그를 따라 움직인다. 운전병의 눈에도 막 좁은 골목에서 삐죽, 머리를 들이민 자동차가 우회전을 하는 것이 보였다.
카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나 리 샤오의 추측이 모두 맞아떨어졌다. 단 한 가지만 빼고.
“그런데 룽오 부장은 안 보이네요.”
아마도 룽오 부장은 따로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이가 운전병을 향해 나직이 일렀다.
“지나가면 멀찍이 따라붙어.”
일단은 조용히 미행하기로 했다. 지금 저 차를 털어봐야, 본인은 경무국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발뺌하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특별 사무실에서 룽오 부장과 합류했을 때 덮치기로 한 것. 다시는 룽오 부장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지 못하게 하려면 밟을 때 제대로 밟아줘야 했다.
그렇게 계산을 끝낸 카이가 이제 곧 그 차가 자신들의 앞으로 지나갈 것을 예상하고 고개를 살짝 숙였을 때였다.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저 차 막아.”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리 샤오가 갑자기 운전석 옆 공간으로 상체를 내밀며 명령했다. 예? 라고 되물을 틈도 없이 또 다른 명령이 내려왔다.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엔 좀 더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담고 있었다.
“액셀 밟아.”
그러면서 리 샤오는 손을 내뻗어 자동차 핸들을 붙잡았다. 그리고 본능과 명령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운전병을 향해 소리쳤다.
“밟으라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몸에 밴 운전병이 본능적으로 액셀을 콱, 밟았다. 반사적으로 핸들이 왼쪽으로 꺾였지만 이미 그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리 샤오는 자신의 손에 핸들을 단단하게 고정한 상태였다.
검은 자동차가 바로 앞에 있었다.
쾅-!!!
부딪힌다,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가 뒤로 젖혀졌다. 소리는 그 뒤였다.
으.
벌어진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부딪히기 직전,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려 충격에 대비했던 카이지만 충격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났다. 하지만 곧 눈이 휘둥그레진다. 제 옆으로 반쯤 몸을 내밀고 있던 리 샤오가 훨씬 충격에 무방비한 상태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대장!”
상관의 직위가 부장으로 바뀌었고 스스로도 이젠 그 호칭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급할 땐 저도 모르게 대장이라는 호칭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다급한 상황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급히 리 샤오의 안위를 확인하며 고개를 돌렸으나 리 샤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꺾어 뒷좌석까지 확인해봤지만 역시나, 그곳에서도 리 샤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
황급히 고개를 바로 한 카이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혹시나 싶어 정면을 확인한 시야에 리 샤오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안위를 걱정한 카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미 차 밖으로 튀어나간 리 샤오는 충돌한 다른 차 뒷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자신의 상관이 외모와 다르게 괴물 같은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잠시 잊었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병사 하나가 끄집어내졌다. 눈앞에서 건장한 성인남자 병사가 마치 종잇장처럼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것을 보면서도 오히려 그 광경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카이였다. 늘 보아왔던 광경이기도 했고, 사실 리 샤오의 안위 외에는 타인의 안위 같은 건 크게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딸칵.
뒤늦게 벨트를 푼 카이가 차에서 내려 충돌한 차 쪽으로-정확히는 리 샤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누워 있는 게 좋을 거야.”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병사에게 충고하는 것도 잊지 않고서. 어쭙잖은 반항을 했다간 이번에 바닥을 나뒹구는 건 온전한 몸뚱이가 아닐 터였다. 물론 상대가 그 충고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알 바 아니었다. 어쨌든 충고를 했으니 제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막 차 앞으로 바싹 다가섰던 카이의 미간이 구겨졌다.
뒤늦게 차 안을 확인한 카이의 눈에 화수의 얼굴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차 안에 화수가 타고 있다는 건 카이도 알고 있었다. 다만 머리가 터져서 이렇게 피를 철철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
사실 카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화수-로 추측되는 이-는 머리에 검은 천이 씌어져 있었다. 그러니 그것을 벗은 건 차가 자신들의 앞으로 지나가기 직전의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 찰나와도 같은 순간-심지어 어두워 제대로 얼굴을 확인하는 것도 어려웠을 텐데- 리 샤오는 화수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리 샤오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굴었던 까닭이 이것이었다. 눈앞의 사내가 리 샤오를 미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놓고 정작 찌푸린 얼굴로 보고만 있는 리 샤오를 대신해 카이가 대신 물었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으니.
“아, 네.”
화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굳긴 했지만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퍽 담이 큰 사내라는 건 이미 꽤 여러 번 목격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다른 때도 아니고 살인죄로 끌려갈 때조차 이렇게 태연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웬만큼 담이 센 사내라도 경무국이라고 하면 벌벌 떨기 마련인데-심한 경우 오줌까지 지리는 경우도 있었다- 대체 이 태연한 반응은 뭐란 말인가. 신기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한 모습에 카이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을 때였다.
“내려.”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리 샤오가 불쑥, 명령했다. 뒤늦게 제가 쓸데없이 오래 화수의 앞을 막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카이가 황급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정작 화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말간 눈이 리 샤오를 응시했다. 화수의 입술이 달싹였다. 뭐 하는 거냐고, 화를 낼 줄 알았던 리 샤오가 의외로 담담한 어투로 툭, 하고 내뱉었다.
“뭔데.”
그제야 말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아이처럼 달싹이던 입술에서 겨우 단어가 튀어나왔다.
“넥타이가.”
이번에도 말을 해놓고 도로 입을 다물어버릴까 봐 초조해진 리 샤오가 재촉하듯 화수의 말을 되뇐다.
“넥타이가 뭐.”
“못 쓰게 돼버렸어요.”
“…….”
리 샤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나,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카이 역시 뒤늦게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그나마 이 새끼들 다 죽여달라는 부탁은 아니라 다행이긴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그런 소리를 듣는 게 지금보다는 덜 황당할 듯했다.
“비싼 건데. 죄송해요.”
“…….”
하지만 화수의 표정은 진지했다. 지금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 저는 피를 철철 흘리고 있으면서.
기가 막혔다. 기가 막히다 못해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이렇게까지 기분이 가라앉는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금-”
지금 이 상황에서 넥타이가 문제냐고, 한마디 하려던 리 샤오가 일순 말을 멈췄다. 따져 물으려던 리 샤오의 눈에 무릎 위에 놓인 화수의 두 손이 들어왔던 것. 게다가 피로 엉망이 된 손가락 끝이 미세하고 떨리고 있는 모습까지. 리 샤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스릉. 짓이기듯 욕설을 내뱉은 리 샤오가 검을 빼 들었다.
그것을 본 카이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안 그래도 리 샤오가 범인을 밝혀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용의자를 데려가려던 룽오 부장의 부하들을 죽이는 건 룽오 부장이 더 날뛸 수 있는 빌미를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리 샤오를 말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난장판이 된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를 생각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선 순간.
휙.
하고 검이 휘둘러졌다. 하지만 휘두른 검에 잘려나간 것은 다행히도 사람의 목이 아닌 화수의 손목에 감겨 있던 밧줄이었다.
이상하다. 분명 사람 한둘 죽어나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살기를 느꼈는데. 의아하긴 했지만 그것을 확인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리 샤오의 시선을 따라 화수의 손목을 확인한 카이의 눈매가 찌푸려진다.
사내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새하얀 피부는 보는 것만큼이나 연약한지 밧줄에 묶였던 부분에 그새 피멍과 생채기가 잔뜩 나 있었다. 물론 본인은 머리 상처만큼이나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지만.
다만 그런 화수도 리 샤오의 시선은 따가웠던지 슬그머니 손으로 손목을 감쌌다. 하지만 사실 별 소용은 없었다. 덮은 손 역시 피투성이로, 보기 흉측한 것은 비슷했다. 게다가 움켜쥔 손이 경련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리 샤오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왜 이래. 진짜. 아랫입술을 꽉 깨문 화수가 두 손을 움켜쥔다. 사실 그런다고 떨림이 멈출 리 없었지만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리 와.”
아무래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리 샤오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리는 것을 보면. 하지만 리 샤오가 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광경은 착각이 아니었다. 어쩐지 손의 떨림이 조금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민 손에 매달리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화수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곤란해지시잖아요.”
물론 리 샤오를 걱정해서만은 아니었다. 남을 배려해서라기보다는 저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곤란해지는 게 싫었다. 그게 설사 리 샤오라 하더라도.
하지만 그런 화수의 거절을 리 샤오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개소리는 거기까지.”
그러고는 더 이상 대화는 없다는 듯 그대로 차 안으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단단한 팔로 허리를 감싸 쥐고, 다른 팔은 다리 아래로 넣어 몸을 안아 들었다. 휙, 하고 몸이 들리더니 순식간에 차 밖으로 나와 있었다.
“제가-”
한 발 물러서 있던 카이가 급히 다가섰다. 하지만 리 샤오의 흉흉한 눈빛에 조용히 옆으로 물러섰다. 대신 리 샤오보다 빠르게 달려가 차 문을 열었다.
“내려주세요. 제 발로 걸어가겠습니다.”
안겨 가는 것이 민망해진 화수가 항복선언을 했지만, 이번에도 일축당했다.
“그냥 있어. 너 내려놓으면 여기 있는 새끼들 다 죽여버릴 것 같으니까.”
“…….”
그 말에 화수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리 샤오가 하는 말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러는 사이에 이미 카이가 열어놓은 차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같은 차라도 주인을 닮는 건가. 똑같이 충돌해놓고 뿌연 연기까지 뿜어내며 퍼져버린 룽오 부장의 차와 달리 리 샤오의 차는 멀쩡히 잘만 달렸다. 점점 멀어지는 하얀 연기를 창문으로 흘끔대면서 화수가 덧붙였다.
“룽오 부장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피식. 화수의 머리 상처를 손수건으로 눌러 지열해주던 리 샤오가 실소를 흘렸다.
“개소리는 거기까지, 라고 했을 텐데.”
“…….”
물론 나직이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에 웃음기라고는 한 톨도 찾을 수 없었지만. 화수가 얌전히 입을 다물자 그나마 리 샤오도 조금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잊었어?”
가볍게 덧붙이는 물음에 화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뭘, 말입니까?”
“오늘 맞춘 옷은 반드시 입게 해준다고, 약속했잖아.”
“…….”
“잊은 모양이지.”
“아닙니다.”
멍하게 있는 화수의 반응을 그렇게 오해한 모양이었다. 화수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잊은 건 아니었다. 그저, 그 약속을, 고작 지나가듯 한 말이 제 목숨을 구해줄 이유가 될 줄은 몰랐을 뿐.
의문도 풀렸다.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야 리 샤오가 이렇게 자신을 구해줄 이유가 없잖은가.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어쭙잖은 동정 같은 건 딱 질색이었다. 차라리 그런 이유라면, 아니 오히려 그런 이유라서 다행이다 싶은 화수였다.
“병원으로 갈까요.”
일단 차를 몰고 있던 운전병이 행선지를 물었다. 화수의 머리를 치료해야 하니 당연히 병원으로 가야겠지만, 일단 확인차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집으로 가.”
물론 그 말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건방지게 리 샤오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화수조차 그 말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첫째는 어디로 가든 상관없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 말이 얼마나 엄청난 말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쨌든 누구도 말을 하는 이가 없었기에, 차 안은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물론 그 침묵 속에서도 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집을 향해서.
* * *
“뭐라?!”
룽우 부장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잔뜩 일그러졌다.
“그걸 그냥 데려가게 뒀단 말이야?”
사실 데려가게 둔 것이 아니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그를 변명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퍽.
황급히 허리를 굽히는 부하의 배로 발길질이 꽂혔다. 배를 맞고 몇 발 뒤로 물러섰던 부하가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제자리로 돌아오기 무섭게 곧장 다시 내질러진 발길질에 이번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움직이지 마. 한 발 물러서 있던 다른 부하들이 그를 부축하려고 다가왔지만 황급히 눈빛으로 명령했다. 어쭙잖은 도움은 괜히 룽오 부장의 심기만 더 돋울 뿐이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부하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죽여주십시오.”
철컹.
그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룽오 부장이 곧바로 검을 빼 들었다.
“소원이라면.”
날이 선 칼날이 목에 바싹 다가섰다. 이대로 살짝만 그어도 피가 뿜어져 나올 만큼 검의 날은 예리하게 서 있었다. 아무리 태연한 척하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았다. 진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몸은 더 벌벌벌 떨렸다. 룽오 부장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목에서 뜨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피를 본 탓일까. 안 그래도 흉흉하던 룽오 부장의 눈이 시뻘갰다. 주륵, 하고 목덜미를 타고 액체가 흘러내리는 감각에 부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였다.
벌컥.
“누구야!”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달려 들어왔다.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간 탓에 검이 닿아 있던 목덜미에서 스륵, 하고 살이 벌어지는 느낌이 났지만 덕분에 검이 아예 거둬졌다. 주륵, 하고 피를 쏟으며 벌어진 상처를 황급히 손으로 눌렀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정작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황급히 뒤돌아섰다.
뛰어 들어온 부하가 다급하게 외쳤다.
“룽오 부장님! 경무국장님이!”
“…….”
그가 내뱉은 것은 겨우 경무국장이라는 호칭 하나였지만 그의 비통한 표정으로 경무국장의 죽음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반대로 룽오 부장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평소라면 저렇게 대놓고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을 룽오 부장에게 그만큼 지금 소식은 극적이었다. 룽오 부장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사내가 목의 상처를 꽉 누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여기서 개죽음당할 운명은 아닌 모양이었다.
* * *
“왜.”
눈앞의 광경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곧바로 질책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
“안아서 내려줘?”
“아뇨. 제가 걸을 수 있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화수가 황급히 차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번에도 제 의견은 묵살되고 안겨서 들어가게 될까 봐 잔뜩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정작 말을 꺼낸 리 샤오는 이미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뒤늦게 그 말이 그냥 가볍게 한 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농담조차 살벌하게 하는 사내였다.
“들어가시죠.”
머뭇거리고 있는 화수에게 카이가 앞장서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런 카이의 재촉에도 화수는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화수에 카이는 이미 익숙한 듯 태연히 대꾸했다.
“네. 리 샤오 님의 집입니다.”
물론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화수의 미간은 절로 찌푸려졌다. 집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전통 가옥이 눈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차로 한참을 달려와서야 겨우 담벼락의 끝에 도달했으니 어림잡아도 홍매루의 세 배는 족히 넘을 크기였다. 그제야 그의 집안이 현실로 와 닿았다. 반쯤 질린 눈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담벼락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이내 리 샤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을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고개를 돌리자, 언제 다시 돌아온 것인지 리 샤오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새까만 눈동자로 말했다.
“아님, 안겨서 들어가고 싶다는 건가?”
조금 전과 다름없는 어조였지만 이번엔 결코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화수가 급히 걸음을 내디뎠다. 뒤로 바싹 따라붙는 걸음이 느껴졌다.
거대한 대문을 지나자 자연 정원이 펼쳐졌다. 아마도 집이 들어서기 전부터 그곳에 자리 잡았던 것이 분명한 오래된 고목과 석조 조형물들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 광경에 다시 발이 멈추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이번엔 험악한 경고 대신 가볍게 등을 미는 손길이 느껴졌다. 화수가 황급히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다녀오셨습니까.”
안채로 들어서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이 지긋한 노인이 고개를 숙여왔다.
“홍 의원에게 연락해.”
“좀 전에 시종을 보냈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피투성이로 나타난 저를 보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다 했더니, 이미 확인을 끝낸 뒤였던 모양이다. 노인이 색이 바랜 눈동자로 화수를 향해 말했다.
“손님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됐어.”
하지만 곧바로 들려온 리 샤오의 저지에 앞장을 서려던 노인의 걸음이 멈칫했다. 주름진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번졌다. 그의 시선이 리 샤오의 뒤에 선 카이에게 닿았다. 하지만 카이라고 답을 알 리가 없었다. 유일하게 답을 아는 리 샤오는 이미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카이에게서 시선을 뗀 노인이 황급히 리 샤오의 뒤로 바싹 따라붙었다.
방까지 내줄 손님은 아니라는 건가. 걸음을 내디디며 그가 내린 결론과 달리 리 샤오의 걸음이 멈춘 것은 바로 자신의 방 앞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노인은 리 샤오가 자신의 방에 손님을 들이리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주인은 타인을 자신의 방에 들이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하는 시종들조차 들락이는 것을 질색해 리 샤오의 방 청소는 특별히 노인이 직접 맡아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냥 손님도 아니고 이렇게 피투성이에 엉망진창이 된 사내를 방에 들일 리가 없다고 여겼다.
“들어가.”
하지만 그런 노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 방 문을 열고 리 샤오가 화수를 향해 명령했다. 심지어 화수가 살짝 머뭇거리는 것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어깨를 밀어 방 안으로 집어넣는다.
“왜.”
좀처럼 놀라는 일이 없는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리 샤오의 물음에 언제 그랬냐는 듯 곧장 본래의 표정으로 얼굴을 갈무리한다.
“깨끗한 물과 가제수건을 준비하겠습니다.”
화수의 상처도 상처지만, 리 샤오의 손이 엉망이 된 것을 확인한 탓이었다. 남의 피가 묻었는데도 전혀 기분이 상하지도, 아니,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했지만 이번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노인이 뒤로 물러섰다. 문이 닫혔다. 문밖에 선 노인과 카이의 눈이 마주쳤다.
“대체, 누구십니까?”
“…….”
목소리를 죽이고 노인이 물었지만 이번에도 카이는 난감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사실 카이도 그 질문에 적당한 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딱.
노인이 마침 지나가던 시종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젊은 시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가서 홍 의원이 어디까지 왔는지 보고 오너라.”
“예.”
“한시가 급하니, 최대한 빨리 오시라 했다는 말도 전하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종이 걸음을 옮겼다. 현관으로 달려 나가는 발소리가 요란했지만 노인은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손 씻을 물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카이를 향해 말을 덧붙인 노인이 현관과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어차피 그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주인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라는 것만은 확실했으니까.
“다행히 상처가 깊이 않아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홍 의원이 시뻘게진 가제수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머리가 본시 조금만 찢어져도 피가 많이 나는 곳이라.”
리 샤오의 시선이 피를 잔뜩 머금은 가제수건을 향해 있는 것을 본 홍 의원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리 샤오의 표정은 굳은 채였지만 그래도 홍 의원의 변명이 납득되긴 했는지 천천히 시선이 물러났다. 겨우 시선만 물러간 것뿐인데도 졸리던 목이 편안해진 느낌이 드는 홍 의원이었다.
그 때였다.
“리 샤오 님.”
반쯤 열린 장지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카이였다.
“전화, 받아보셔야겠는데요.”
카이의 곤란한 표정으로 전화를 건 상대가 그의 선에서 해결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힐끗, 리 샤오의 시선이 화수에게로 향했다. 등을 지고 앉아 있는 화수는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대신 맞은편에 있던 홍 의원이 그 시선과 조우했다. 홍 의원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잘 보살피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표정은 여전했지만 리 샤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 하고 장지문이 닫히고, 복도를 걸어가는 발소리가 점점 잦아들다 아예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방 안엔 화수와 자신만이 남았지만 생전 처음 본 낯선 사내가 평생을 보아온 리 샤오보다 훨씬 더 편하게 느껴지는 홍위제였다.
“아프면 말씀하십시오.”
더 이상 피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상처가 아무는 데 효과가 탁월한 연고를 듬뿍 바르고 반창고를 붙였다. 팔목의 쓸린 자국도 꼼꼼히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여기 보십시오.”
뒤이어 홍 의원이 검지를 세웠다. 그것을 얼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좌우로 움직여 동공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혹시, 어지럽거나 속이 매스껍거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아뇨.”
“머리가 멍하다거나?”
이번 역시 곧바로 고개를 내젓는 화수를 확인하고 홍 의원이 들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진단을 내렸다.
“며칠 더 두고 보아야겠지만 지금으로써는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태아도 무사하고 말입니다.”
“…….”
“그나저나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겁니까? 상처보다 오히려 그쪽이 더 심각해 보이는데. 이렇게 마르면-”
“저기, 잠시만, 잠시만요.”
습관처럼 홍 의원이 막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던 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멍한 표정으로 홍 의원을 응시하고만 있던 화수가 갑자기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고.”
“그러니까 식사를 제대로-”
“아니. 그 전에, 말씀하신 거요.”
사실 제대로 된 문장을 내뱉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뒤늦게 머리를 맞은 충격이 오는 모양이었다. 머리가 멍했다.
그제야 홍 의원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홍 의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임신한 거, 모르고 있었습니까?”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사실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또 상대가 사내인 것을 감안하면 전혀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특히 눈앞의 사내는 자신의 몸의 안위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네요. 앞으로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다음번에도 운이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이건 단순히 겁을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수에게 그런 충고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지만, 전 계속해서 피임약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임신이라니 말이 안 되죠.”
“…….”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홍 의원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대놓고 자신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화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임약을 처방받았다면 의원을 만났을 텐데, 아무 말도 안 해주던가요?”
“…….”
이번 역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도 아니었다. 만약 들은 것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이 펼쳐졌을 리 없으니까. 낮은 한숨을 내쉰 홍 의원이 입을 열었다.
“애초에 천족인 당신에게 피임약을 처방할 이유가 없습니다. 곤鯤으로 태어난 천족의 사내는 평생 오직 단 한 사람과만 각인이 가능하고, 아이 역시도 그 각인된 이와의 사이에서만 낳을 수 있으니까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화수를 향해 홍 의원이 뭐 이해는 한다는 듯 덧붙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긴 하지요. 천족도 흔치 않은 데다 곤鯤인 사내는 더 희귀하니까요.”
하지만 화수가 얼굴을 찌푸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각인 같은 거, 하지 않았어요. 누구와도.”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 화수에 홍 의원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번졌다.
“그건 좀 이상하군요. 각인 없이 임신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홍 의원이 다시 물었다.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각인됐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없어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평생 단 한 사람이라는 건, 말 그대로 단순한 각인을 한 이가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을 준 이라는 의미일 테니까.”
“…….”
처음으로 화수의 반박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홍 의원이 재차 물었다.
“마음을 준 사람, 정말 없습니까?”
“…….”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장지문이 열렸다. 드륵, 하고 열리는 문소리에 반사적으로 화수의 고개가 꺾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의 얼굴을 확인한 찰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리 샤오였다.
“무슨 일이지?”
문을 열고 들어서던 리 샤오가 살풋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방 안에 흐르는 묘한 정적을 느꼈기 때문이다. 화수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리 샤오의 시선은 홍 의원을 향해 있었다.
“무슨 일이야.”
거짓을 고했다가는 말 그대로 갈가리 찢겨 나갈 것 같은 사나운 시선이었다. 한 발 뒤로 물러선 홍 의원이 황급히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화수의 눈이 커졌다. 반대로 리 샤오의 눈매는 가늘어진다. 하지만 홍 의원의 고개는 여전히 아래를 향해 있었다.
“그런 게-”
“정식으로 혼인한 정인에게서 본 애기씨라면 더 좋았겠습니다만 손 귀한 집안에 그런 것이 대수겠습니까.”
“…….”
“호, 홍 의원, 지금, 애기씨라고 하셨습니까?”
침묵하고 있는 리 샤오의 뒤편에서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평소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가 홍 의원의 어깨를 짤짤 흔들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애기씨라니. 다른 이도 아닌 리 샤오의 애기씨라니. 혹여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냐는 대답이 돌아올까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이내 홍 의원에게서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네, 애기씨가 오신 모양입니다. 집안 어른들께서 좋아하시겠습니다.”
“암요. 아무렴요. 누구보다도 총독께서-”
“호들갑 떨지 마, 집사.”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리 샤오가 툭, 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평소보다 조금 낮아진 목소리. 뒤늦게 리 샤오의 기분을 눈치챈 노인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주름진 얼굴 위로 연신 물음표가 떠올랐다.
손님방도 아닌 무려 자신의 방에 들인 것을 보면 리 샤오가 저 사내를 특별하게 생각하고있음은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이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아무리 봐도 리 샤오는 홍 의원의 소식에 기분이 상해 있었다.
“나가 있어.”
리 샤오가 홍 의원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홍 의원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화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자신에게는 리 샤오의 명령을 거역할 힘이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다.
“아직 애기씨가 불안한 상태이니, 되도록-”
탁.
하지만 홍 의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집사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물론 목소리는 한껏 죽인 채였다.
“애기씨가 불안하다니, 대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리 샤오 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일단 그리 말해둔 것일 뿐 애기씨는 아주 건강하십니다.”
오히려 걱정해야 할 것은 어미 쪽이었다. 맥이 유난히 안 잡힌다 했더니, 피임을 하는 약을 오래 복용한 탓이었던 모양이다. 양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피임을 목적으로 하는 약은 비상砒霜을 섞어 몸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런 와중에도 유산되지 않고 저리 건강하게 살아남은 것을 보면 리 샤오의 씨가 분명했다.
물론 집사영감에게는 그 말은 전하지 않았다. 집사영감에게 중요한 것은 애기씨의 안위이지, 화수의 안위는 아니니까.
“잘하셨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집사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장지문 쪽을 보는 시선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홍 의원 역시 표정이 밝지 않았다. 조금 전 리 샤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혹, 험악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요.”
“설마, 그러기야 하시겠나.”
하지만 고개를 내젓는 집사의 표정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하긴, 천한 몸에서 보는 아이가 마냥 내키지 않으시긴 하겠지요.”
“아무래도, 결벽증 같은 것이 있으셔서.”
워낙 손이 귀한 집안이라 누구를 통해서 보든, 일단 집안에서야 후손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길 터였지만 사실 리 샤오가 저리 나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천족인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하필 사내일 게 뭔가. 안타까워하는 홍 의원의 말에 집사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집사는 리 샤오가 화수 같은 사내를 안았다는 사실이 더 믿기지 않았다. 물론 믿을 수밖에 없는 명백한 증거가 저 방 안에 있긴 하지만.
“여기는 제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집사께서는 가서 먹을 것을 좀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출출하신가.”
“제가 아니라.”
힐끗, 장지문을 가리키는 시선에 그제야 집사도 먹을 것을 준비해야 할 대상을 알아차렸다.
“저리 말라서 애기씨가 제대로 자라기나 하겠습니까. 집사영감께서 특별히 신경을 좀 쓰셔야겠습니다.”
“여부가 있겠나. 그럼 다녀올 테니, 잘 지켜보고 있게.”
“예.”
머리를 맞대고 속닥이고 있던 두 노인 중 집사영감이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핏기라고는 없던 새하얀 백설기 같은 얼굴을 떠올리자 집사의 걸음이 빨라졌다.
* * *
‘얌전히 걸어야지. 그새 끈이 삐뚤어졌잖느냐.’
오래된 고목의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른 손이 가슴께로 다가왔다. 그리고 직접 모양을 잡아 묶어두었던 허리끈의 나비 모양이 살짝 삐뚤어져 있는 것을 바로잡았다.
사실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인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니 움직일 때마다 흐트러지거나, 구겨지는 일이 지극히 당연하지만, 노인의 머릿속에는 그 당연한 전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그래야지. 이제야 다시 완벽해졌구나.’
손을 뒤로 물린 노인이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물론 각별히 주의하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고서.
‘다음번 올 때도 이리 입고 오너라. 네 몸값보다도 더 비싼 옷이니 구기거나 더럽히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고.’
몸을 돌린 노인이 인력거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삯은 여기 있네.’
노인의 손에 들린 것은 고작 동전 한 닢이었다. 물론 적은 돈은 아니지만 이리 으리으리한 집의 주인이 부른 것이니 제법 큰돈을 만질 기회가 생겼다고 좋아했던 터라 그 돈을 보는 순간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도성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인력거꾼만 몰랐을 뿐이다. 노인이 돈을 아끼지 않는 때는 오직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만이라는 걸.
이리 값비싼 옷을 사 주는 것도 화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노인은 자신의 취향으로 완벽하게 꾸며놓은 화수를 엉망진창으로 범하는 것을 좋아했다. 올 때 입었던 옷과 돌아갈 때 입는 옷이 다른 이유였다. 아마 제 몸값보다도 더 비싸다는 이 옷도 다음번엔 오늘 입었던 옷과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뭘, 그리 꾸물거리고 있어. 어서 출발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는 인력거꾼을 향해 노인의 핀잔이 떨어졌다. 기분 좋게 웃고 있던 표정이 그새 싸늘해져 있었다.
‘가, 갑니다요.’
어쨌든 부자 손님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일이 없다는 걸 모르지 않는 인력거꾼이 허둥지둥 인력거 손잡이를 잡았다.
자그락자그락. 나무 바퀴 아래서 자갈들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서 있던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그때까지 그림 같은 미소만 짓고 있던 화수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낮게 뇌까렸다.
‘씨발, 변태새끼.’
끽.
순간 인력거가 멈춰 섰다. 뒤이어 놀란 듯 뒤를 돌아보는 인력거꾼을 향해 화수가 태연히 눈을 접어 웃었다. 말 그대로 꽃 같은 미소에 인력거꾼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하지만 곧 조금 전 자신을 멈춰 서게 한 이유를 떠올리고 얼굴을 굳힌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인의 취향대로 완벽하게 꾸며진 화수의 모습은 누가 봐도 미모의 아가씨인데 반해, 조금 전 욕설을 되뇌던 목소리는 아직 앳되긴 해도 사내의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쁜 외모의 알맹이가 사실은 남자였음을 알아차린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여장을 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무리 꾸며놓았다고는 해도 소름 끼칠 정도로 그 모습에 위화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 더 컸다.
‘안 가세요?’
하지만 사내는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순간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듯한 시선에도 화수는 태연히 되물었다. 뭐,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었다. 게다가 사실 이런 모습을 보고 발정하는 쪽이 비정상인 거지, 정상인이라면 이런 반응이 당연했다.
‘가, 갑니다.’
태연히 묻는 화수에 그제야 사내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화수는 시선을 돌린 뒤였다. 머리를 긁적이던 사내가 천천히 인력거를 끌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화수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어쩐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아 정말 인형이라도 앉혀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사내였다.
‘아부지!!!’
빠르게 달리던 인력거가 다시 속도를 줄인 것은 막, 혼잡한 상점가를 지날 때였다. 빽, 고함 소리와 함께 머리통을 빡빡 깎은 아이가 인력거를 향해 달려왔다.
‘아부지 일하는 중이니께, 방해 말고 가서 놀아.’
사내가 참새 떼라도 쫓듯 손을 휘휘 내저었지만 사실 아이는 단순히 아버지를 발견하고 반가워서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아부지, 큰일 났어라.’
뒤늦게 아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사내가 되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어무니가, 어무니가아.’
내내 아버지를 찾아 헤매던 아이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낸다. 덕분에 제대로 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만삭인 아내를 떠올리자 그 역시도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손님을 내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아들을 향해 일렀다.
‘내 손님만 모셔다드리고 바로 뒤따라갈 테니, 일단 너는 집에 가 있어라.’
‘싫어요. 싫어요, 아부지도 같이 가요.’
아이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좀처럼 아버지의 말에 거역하는 법이 없는 큰아들이 아이처럼 울며 매달리니 사내도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였다.
‘가보세요. 전 여기 잠깐 들렀다 갈 데가 있어서.’
언제 내렸는지, 화수가 바닥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거. 인력거 삯이요.’
‘……예?’
사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진다. 분명 제가 노인에게 삯을 받는 것을 봤을 텐데, 또다시 삯을 내겠다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사실 아내를 의원에게 데려가보기라도 하려면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뻔뻔하게 두 번 돈을 받을 만큼 얼굴이 두껍지도 못했다.
‘아버지 드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화수가 그런 사내 대신 아이의 손에 돈을 쥐여 주었다. 하지만 놀란 토끼눈이 된 아이의 눈은 화수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세상에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구나, 싶었던 것.
화수가 뒤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넋을 놓고 보고 있던 아이가 뒤늦게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아낙을 보고 제 어미를 떠올렸다.
‘아부지. 이거.’
황급히 뒤돌아선 아이가 손에 든 것을 사내에게 내밀었다. 돈도 받았으니 얼른 어머니에게 가자, 라는 의미였지만 아들의 손에 들린 것을 본 사내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화수가 아들의 손에 쥐여 준 것은 조금 전 노인이 준 돈의 몇 배는 되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저기-!’
사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조금 전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던 무례를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상점가 혼잡한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려 화수의 모습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좁은 길 양쪽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좌판이며 화려한 거리 장식들을 보고서 깨달았다. 지금이 춘분절 축제 기간이라는 걸.
‘엄마, 나 이거 사 줘.’
여러 가지 물건을 파는 좌판 앞에서 아이가 엄마를 조르고 있었다. 그녀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젖자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결국 아이의 손에는 원숭이 가면이 들렸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표정으로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화수의 옆을 스쳤다.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화수가 좌판 앞에 섰다.
‘이거 하나 주세요.’
이걸 왜 샀지.
손에 들린 여우 가면을 내려다보며 화수가 자문했다. 심지어 그게 제게 남은 마지막 동전이었는데. 그걸 이렇게 아무 쓸모도 없는 가면을 사는 데 써버리다니.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화수는 몰랐다. 사람에게는 무언가가 그냥 갖고 싶은 때도 있다는 걸. 지금은 물론이고 어릴 때조차 한 번도 떼를 써보거나 어리광을 부려본 적이 없는 화수는 그런 평범한 욕망에 무지했다.
가만히 가면을 내려다보던 화수가 그것을 얼굴에 썼다. 기분이 이상했다. 고작 싸구려 가면을 뒤집어쓴 것뿐인데,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가면을 좋아하는 거구나. 그제야 고작 장난감에 집착하는 아이들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가게로 향하던 걸음이 옆으로 꺾였다. 도망친다거나,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만 더 이 기분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화수가 잠시 잊은 부분이 있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인다는 것과 차림만 보면 자신이 여자로 보인다는 것.
사실 누가 봐도 돈깨나 있어 보이는 부잣집 아가씨가 호위도 없이 혼자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질 나쁜 무리의 표적이 되겠다고 작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멍청한 행동이었다고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어허, 사람을 쳤으면 사과부터 해야지. 그냥 내빼면 쓰나?’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주 걸어오던 그를 피하려고 옆으로 비켜서다 살짝 부딪힌 것뿐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럴 요량으로 접근했던 게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화수의 찌푸린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상대방에게 무표정한 여우 가면만 보인다는 정도였다.
타닥.
앞을 막아선 사내를 피해 화수가 황급히 뒤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일행으로 보이는 사내 둘이 이미 화수의 바로 등 뒤에 바싹 다가서 있었다. 일이 점점 난처해지고 있었다. 화수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물론 그런 것을 알지 못하는 사내들은 낄낄대며 대화를 이어갔다.
‘보아하니 귀한 댁 아가씨 같은데 이리 혼자 다니시면 위험하지요.’
‘암요.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 곳인데요.’
‘그러지 말고 이리 오세요. 저희가 댁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멋대로 결정한 것도 모자라 누군가의 손이 화수의 팔을 붙잡았다. 축축하고 역겨운 냄새가 났다.
‘놔.’
화수가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사내의 악력을 이길 수 없었다.
‘에이, 사람 호의를 이렇게 무시하면 안 되지.’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붙잡힌 팔은 점점 아파왔다. 제법 아프게 움켜쥐어 꽤 고통이 컸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런 화수에 사내의 표정이 오히려 찌푸려진다.
‘그런데 이딴 건 왜 뒤집어쓰고 있는 거야?’
뒤늦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내에 낄낄대던 동료 중 하나도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의문을 더한다.
‘좀 전에 목소리도 좀 이상하지 않았어?’
‘…….’
듣고 보니 수상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제야 미간을 살풋 찌푸린 사내가 화수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탁.
손을 쳐낸 소리가 제법 컸다. 화수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사실 화수는 애초에 제가 남자인 것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조금 전 인력거꾼에게도 그랬고, 그런 것을 부끄러워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물론 이상한 변태 취급을 받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에는 익숙했으니까.
그럼에도 화수가 사내의 손을 쳐낸 건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가면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물론 어차피 힘으로 당해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다지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화수 역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손을 쳐낸 뒤였다.
‘씨발, 뭐야.’
웃음기가 번져 있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아까부터 사람을 무시하고 말이야.’
웃음 아래 숨겨져 있던 표정이 드러났다. 다시 손을 내뻗는 사내의 모습은 말 그대로 딱 악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손을 피해 고개를 비튼 것은 본능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내뻗은 손이 눈앞에 있는 머리칼을 닥치는 대로 움켜쥐었다.
‘윽.’
말 그대로 머리채를 잡힌 화수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하지만 사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머리칼을 붙잡은 손을 뒤로 확 젖혔다. 화수의 목이 뒤로 꺾였다. 그렇게 머리를 고정시킨 사내가 이번엔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다시 내뻗었다. 손을 피해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냥 둘 사내가 아니었다.
‘으윽-’
움켜쥔 머리칼을 뽑아버릴 듯 더 거칠게 당기자 벌어진 화수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괴로운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반대로 사내의 얼굴에는 화색이 번졌다. 만면에 미소를 진 채 드디어 붙잡은 가면을 막 위로 끌어 올리려던 그 때였다.
‘그 손 놔.’
기척도 없이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사내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씨발, 넌 누구, 힉-’
하지만 그 순간 제 목덜미를 겨누고 있는 날이 예리하게 선 검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검이 움직이는 것은커녕 뽑는 것도 보지 못했다.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굳어 있으려니 새까만 눈동자가 살풋 찌푸려진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놔, 놨습니다. 놨어요!’
그때까지 굳어 있던 사내가 붙잡고 있던 머리칼과 가면을 황급히 놓았다. 그러고는 두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보여주며 외쳤다. 그제야 목덜미에 닿아 있던 검이 스륵 앞으로 빠졌다. 하지만 검 끝은 여전히 사내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사내를 꼼짝도 못 하게 하고 있는 건 검이 아니었다. 마주한 눈동자만으로도 사내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일 수가 없었다.
‘꺼져.’
그의 허락과도 같은 명령에 그제야 사내는 몸을 움켜쥐고 있던 어떤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발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필사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지금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마지막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벌벌 떨리는 두 발로 뒷걸음질 치던 사내는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을 때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흘낏. 어쩔 줄 모르고 눈치만 보고 있던 두 사람도 그의 시선에 비슬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이내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무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이내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화수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남자의 얼굴을 본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까닭이었다. 검을 다루던 모습에 당연히 우락부락한 군인의 모습을 예상했었다. 검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은 대부분 남자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남자는 우락부락이라거나, 군인이라는 단어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남자답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남자다운 얼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화수는 눈앞의 남자를 보고서 깨달았다.
그 때였다. 그 그림 같은 눈매가 찌푸려진 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사람을 대놓고 쳐다본 것이 기분을 상하게 했나 싶어 순간 움츠러들었는데, 다행히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남자가 기가 막히다는 듯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델 시종도 없이 혼자 나다니고 있는 거지?’
‘…….’
깜빡깜빡. 화수의 눈이 깜빡였다.
‘뭐, 괜한 반항으로 가출이라도 한 거겠지.’
‘…….’
‘이제 세상 무서운 줄 알았을 테니, 얼른 집으로 돌아가.’
‘…….’
그러다 화수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다. 그제야 눈앞의 사내가 자신을 부잣집 아가씨로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맘대로 해. 나도 더는 상관 안 할 테니까.’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화수를 오해한 모양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남자가 뒤돌아섰다. 그리고 왔던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뒤에서 옷자락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면.
남자가 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미간을 찌푸린다. 화수가 제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겨진 옷자락을 보고 표정을 험악하게 할 뿐, 남자는 화수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대신 낮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
화수가 입을 달싹였다. 입을 열어 자신은 당신이 오해하는 것처럼 부잣집 아가씨도 아니고, 가출한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어쨌든 도와준 건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목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를 내면 그 역시 자신이 사내라는 걸 알아차릴 테고, 그러면 그 역시 저를 벌레 보듯 볼 테니까.
어째서였을까.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닌데. 이제 그런 시선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화수는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목 언저리에 뭔가가 꽉 눌린 듯 아파와 어떤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하아. 머리 위에서 낮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화수의 어깨가 움찔, 하고 떨렸다. 그 때였다.
‘집이 어디야.’
당연히 제 손을 뿌리치고 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사내가 질문을 던졌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고 있으려니 이번엔 또 다른 질문이 내려왔다.
‘이름은.’
하지만 이번에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의외로 남자는 인내심이 길었다.
‘말을 못해?’
이번에는 화수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화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내저으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난감한 듯 찌푸려졌다. 그것을 본 화수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꼬르르르륵.
배 속에서 울린 우렁찬 소리가 아니었다면.
당황한 화수가 제 배를 움켜쥐었다. 그런다고 우는 배를 어찌할 방법은 없었지만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피식. 머리 위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화수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일단, 배부터 채워야겠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 있었지만 저를 보는 눈동자는 다정했다. 그래서 화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토록 다정한 눈빛은 평생 처음 받아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화수는 몰랐다. 이 순간을, 이 순간의 선택을 평생 후회하게 될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 * *
탁.
장지문이 닫혔다. 크지도 않은 그 소리에 화수의 어깨가 흠칫, 하고 떨렸다. 방 안이 지나치게 적막한 탓이었다. 제 심장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 다행히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리 샤오였다.
“설명해봐.”
“…….”
하지만 화수의 입은 굳게 닫힌 채 움직이지 않는다. 일부러 리 샤오의 화를 돋우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뿐. 스스로도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설명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려놓은 듯한 잘생긴 눈매가 찌푸려진다.
“나불대지 말아야 할 땐 잘도 나불대면서, 정작 이럴 땐 또 입을 꾹 다물고 있지.”
차라리 언성을 높이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나직한 목소리가 이토록 무섭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하지만 멋대로 각인이 돼버린 것도 모자라 멋대로 아이까지 가졌다는 설명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평생 단 한 사람이라니. 이건 말 그대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여인도 아니고, 저 같은 사내가 사실은 저를 좋아했다는 고백을 받아봐야 기분만 더러울 게 뻔한데. 그런 것을 다 알면서도 뻔뻔하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기란 아무리 화수라도 어려웠다.
저벅저벅.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리 샤오가 발을 내디딘다. 본래도 그리 멀지 않던 거리가 손만 내뻗어도 닿을 거리까지 좁혀졌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감히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한일자로 매끈하게 빠진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애를 뱄고.”
“…….”
스윽. 기름한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배 속의 그게 내 애다?”
“…….”
의외로 제 배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고요했다. 하지만 화수는 들은 적이 있었다. 폭풍우가 오기 직전의 바다는 호수처럼 고요해진다고. 그리고 그 고요가 짙으면 짙을수록 더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들이칠 징후라고 했다.
“전.”
화수의 입술이 떨어졌다. 단숨에 끌어 올려진 시선이 다시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마주한 눈동자가 새파랗게 일렁인다. 무슨 변명이든 지껄여보라는 듯 사나운 눈빛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화수는 변명을 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리 샤오 님의 아이라고 한 적 없습니다만.”
“…….”
리 샤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본 화수가 쓰게 웃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지만 정말 제가 의원에게 아이 아버지가 본인이라고 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작게 한숨을 내쉰 화수가 뒷말을 이었다.
“끼어들 틈을 놓쳐 정정하지 못했던 것뿐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샤오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진실을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평생 화수가 해온 일이었으니까. 그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리 샤오의 표정은 안심한 사람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뭔가 또 심기를 거슬렀을까. 오히려 조금 전에 비해 묘하게 날이 서 있는 눈동자에 화수가 난감한 듯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그 때였다. 리 샤오가 한쪽 무릎을 굽혀 화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럼.”
순간 바로 코앞까지 와 있는 리 샤오의 얼굴에 흠칫, 놀란 화수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그런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 내뻗어진 손이 화수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감싸듯 목덜미를 쥔 것 말고는 위협적인 움직임이 없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화수의 목 같은 건 언제든지 간단히 부러트릴 수도 있는 리 샤오였다. 화수가 딱딱하게 굳자, 잘했다는 듯 리 샤오가 그의 뒷덜미를 가볍게 쓸어 올렸다. 그러면서 조금 전 하다 멈춘 뒷말을 이었다.
“애 아빠는 누군데.”
“…….”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아이만 아니면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든 리 샤오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궁금해 할 사람도 아니라 고개를 갸웃거리다 화수가 되물었다.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화수 역시도 정말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지만 그 질문이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다는 건 몰랐다. 리 샤오의 눈매가 기름해졌다. 심사가 뒤틀렸다는 신호였다. 사실 심사는 이미 조금 전부터 뒤틀려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네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
툭, 하고 내뱉는 그 말에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들킨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각인도 한 주제에, 약은 왜 먹은 거지?”
“…….”
당연한 일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각인도 한 적 없는 이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을 테니까. 제가 망가진 불량품이라는 전제를 배제하면 이쪽을 의심하는 게 분명 정상적인 전개였다.
리 샤오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대답은 없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화수의 반응으로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둘이서 날 가지고 놀았군.”
“…….”
한 문장으로 결론을 낸 후 눈동자가 새파랗게 일렁인다. 순간적으로 화수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그뿐이었다. 그대로 입술이 움직임을 멈췄다. 어차피 화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러니 똑같이 경멸당할 거라면 차라리 이쪽이 더 나았다.
“재밌었나?”
“진 사장은 이 일과 상관없습니다.”
“하.”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겨우 떨어졌다 했더니, 그마저도 진 사장을 두둔하기 위해서였다. 리 샤오의 입에서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화수를 보는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다. 적어도 무슨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다. 진 사장이 시킨 일이었다고만 했어도 개소리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까지 진 사장을 감싸고 나서다니. 이렇게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럼에도 기가 막힌 바는 손안에 쥐고 있는 이 목을 부러트릴 수 없다는 거였다. 검을 꺼내 들 필요도 없었다. 말 그대로 손에 힘만 조금 주면 부러트릴 수 있는 가느다란 목덜미였다. 그런데 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운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주한 눈동자에 의아한 기색이 번진다. 뒤늦게 리 샤오의 눈이 기름해졌다. 화수 역시도 제가 목을 부러트릴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탓이다. 리 샤오의 얼굴이 확 일그러진다. 그걸 알면서도 얌전히 목을 내주고 있었단 말인가. 기가 막혔다.
게다가 화수가 그렇게 제 목을 내놓은 이유가 뭔지 알 것 같다는 사실이 리 샤오의 기분을 더 가라앉혔다. 그렇게까지 진 사장이 소중하단 말이지. 배 속의 아이조차 상관없을 정도로.
다행이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이 녀석뿐이어서. 이곳에 진도현이 있었다면 사지를 찢어 죽여버렸을 터였다.
“입 다물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달싹이는 입술을 향해 리 샤오가 나직이 경고했다. 한 번만 더 저 입에서 진도현의 이름이 나오면 그땐 자신도 무슨 짓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의 리 샤오였다면 어디 한번 해보라고,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만큼 한계라는 의미였다.
치미는 화를 참아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일도 없거니와, 애초에 화를 참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리 샤오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상대의 목은 잘려나갔어야 했다. 이렇게까지 리 샤오를 한계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도, 그럼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도 화수가 유일했다. 정작 본인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때였다.
“리 샤오 님.”
문밖에서 리 샤오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리 샤오의 날카로운 시선이 장지문 너머로 내리꽂혔다.
“뭐야!”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 리 샤오의 답지 않은 날카로운 반응에 장지문 너머에 서 있던 그림자가 순간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카이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병원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
“방금 전 경무국장의 숨이 끊어졌다는군요.”
“…….”
자신의 보고에도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움직이는 기척도 없었다- 잠시 대기하던 카이가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장.”
“…….”
사실 다른 때라면 리 샤오가 굳이 경무국장의 사망소식에 빠르게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리 샤오가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데다 심지어 주요 용의자를 중간에서 빼돌린 상황. 그런 상황에서 장례식장에 늦게 얼굴을 비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물론 저들끼리 수군거리기는 해도, 리 샤오가 있는 곳에서 대놓고 불만을 토로할 간 큰 인간은 없을 테지만.
아무튼 그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텐데, 심지어 제가 재촉하기 전에 이미 나섰을 리 샤오가 이렇게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에 당황스러운 카이였다.
“대장.”
결국 한 번 더 재촉하듯 입을 열었을 때였다. 다행히 장지문 너머에 검은 그림자가 짙어지더니 이내 드륵, 하고 장지문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리 샤오를 마주하는 순간 카이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본능 같은 거였다.
곧 카이의 눈이 방 안을 살핀다. 설마, 싶었지만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느껴지는 살기에 혹시나 싶었던 것. 하지만 그런 카이의 행동에 안 그래도 흉흉하던 눈빛에 더 살기가 짙어진다.
“왜.”
“아닙니다.”
탁, 하고 곧바로 닫히는 문틈으로 살아 있는 화수의 모습을 확인한 카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리 샤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지만 더 이상 거기에 대해 문제 삼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걸음을 내딛는 리 샤오를 따라 역시 발을 내딛으려던 카이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넌 여기 있어.”
“예?”
“저 녀석, 이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도록 책임지고 지켜봐.”
“……알겠습니다.”
되묻고 싶은 질문이 많았지만 이번에도 카이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사실 어떤 간 큰 인간이 리 샤오의 집 안까지 들어와 화수를 데려갈까 싶었으나 막다른 곳에 몰린 쥐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 리 샤오의 명령을 들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니 뒤늦게 납득이 되기도 했다.
“현관까지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납득한 쪽은 카이뿐이었다.
“내 말 뭐로 들었지?”
곧장 마주한 흉흉한 눈빛에 카이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잠시 잦아들었을 뿐, 리 샤오의 기분은 여전히 최악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혼자 보내도 괜찮을까. 물론 괜찮을까 걱정하는 이의 안위는 리 샤오의 안위가 아니었지만.
힐끔, 그나마 카이의 뒤편 장지문에 시선이 닿는 순간 흉흉하던 눈빛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이내 리 샤오가 휙, 하고 뒤돌아섰다. 뒤늦게 제 손에 들린 리 샤오의 겉옷을 발견했지만 다시 한 번 그의 기분을 거스를 수는 없어 카이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제가 가지요.”
불쑥, 카이의 손에 들린 겉옷을 가져간 이는 집사였다. 카이에게 다가왔을 때처럼 기척을 숨긴 집사가 리 샤오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다행히 리 샤오의 기분은 거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동안 리 샤오의 겉옷을 들고 있던 집사가 이내 그것을 가져가 팔에 꿰는 그를 향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저분의 방은 사람이 많이 드나들지 않는 조용한 별채로 준비시키는 것이 좋겠지요.”
사실 그건 질문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것이었다. 집안 살림은 대부분 노인이 도맡아 하고 있었고, 그 결정에 리 샤오가 불만을 가지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노인이 워낙 알아서 잘하기 때문도 있지만 애초에 리 샤오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리 샤오가 처음으로 노인의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왜?”
덕분에 당황한 것은 노인이었다.
“아, 별채는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래도 자신의 아이를 가진 사람인데, 안채가 아닌 별채에 두겠다고 한 것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뒤늦게 깨달은 노인이 황급히 말을 정정하려고 했을 때였다.
“그럼 안채로-”
“왜 방을 준비하냐고.”
리 샤오의 의문은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예? 왜 방을 준비하느냐니요. 허면 아이를 가진 분을 돌려보내기라도 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방을 준비하지 않으면 돌려보낸다는 선택지밖에는 없어 혼란에 빠진 노인에게 리 샤오는 태연히 다른 선택지를 쥐여 주었다.
“저 방에 둬.”
“예, ……예?”
다행히 돌려보낸다는 말이 아니라 안도한 것도 잠시. 리 샤오가 한 말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방이라면.”
“내 방에 두라고.”
혹 이 집에 제가 모르는 다른 공간이 있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지만 역시나 그럴 리가 없었다. 리 샤오보다 이 집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낸 이가 그였다.
“도련님, 방이요.”
사실 제 귀로 듣고서도 좀처럼 믿을 수가 없는 노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방에 시종이 드나드는 것도 질색하는 분이,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낼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 넓은 집 안에 차고 넘치는 것이 방이었다. 하다못해 옆방에서 지내게 할 수도 있는데 무려, 자신의 방을 함께 쓰겠다니, 좀처럼 놀라는 일이 없는 노인도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늘따라 놀랄 일이 잔뜩이었지만 오히려 애기씨가 갑자기 생긴 것보다도 지금 리 샤오의 태도가 더 놀라운 그였다.
“왜 그래?”
답지 않게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몇 번을 되묻는 노인의 질문에 결국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왜 한 번에 못 알아듣고 자꾸 같은 소리를 하게 만드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나이가 먹다 보니, 요즘 귀가 잘 안 들릴 때가 있습니다요.”
그제야 리 샤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언제부터? 그런 적 없었잖아.”
조금 전부터요, 라고 할 수는 없어 집사는 조용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히 리 샤오의 기분은 풀린 모양이었다.
“그런 건 홍 의원에게 봐달라고 해.”
“아닙니다. 원래 나이가 들면 여기저기가 삐걱거리는 법이지요. 죄송합니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알아서 해.”
고개를 내젓는 노인에 리 샤오도 더 이상은 강요하지 않았다.
“다녀오십시오.”
곧장 현관문을 나서는 리 샤오를 향해 노인이 굽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바닥을 딛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의 허리는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 3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