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화수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방 주인도 아닌 제가 들어오라고 허락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다행히 알아서 문이 열렸다.
드륵, 열린 장지문을 통해 우르르 시종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냥 봐서는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온 것 같지만 누구 하나 쓸데없는 움직임이 없었다. 일사천리로 자신이 맡은 일을 끝낸 시종들이 다시 차례로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모두 문 앞에 선 노인이 눈짓으로 지시한 것들이었다.
“곧 저녁 시간이라 간단히 준비했습니다.”
간단히라. 제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며 화수가 눈매를 일그러트린다. 그것을 본 노인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다, 라는 건가. 부자들의 사고방식이란,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은 따라가기가 힘이 들었다.
홍매루에서 손님상에 내놓는 술상도 이것보다는 가짓수가 적었다. 물론 화려한 걸로 치면 홍매루가 우위겠지만 술안주로 내놓는 것이라 사실 제대로 된 요리는 한두 가지가 고작이니까. 그렇다 보니 입이 짧은 화수로서는 혼자서는 맛을 다 보는 것도 요원해 보이는 상차림을 보고 있으려니 먹기도 전에 벌써 질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화수의 불편한 기색을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알려주시면 앞으로는 선별해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잘못하다가는 이것보다 더 가짓수가 늘어날 기세라 화수는 황급히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 대답도 집사에게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답이 아니었던 모양.
“특별히 좋아하시는 건 없으십니까?”
“…….”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그 질문이 화수에게는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사실 화수에게 음식은 그저 배만 채우는 목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 뭘 더 좋아하고, 싫어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화수가 슬그머니 입을 뗐다.
“뭐든 됩니까?”
“물론이지요. 말씀만 하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의 얼굴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물론 화수가 원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술 한 잔만.”
“술은 안 됩니다.”
“…….”
뭐, 화수도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럼에도 생각나는 것은 그것뿐이라 혹시나 하고 말해봤다. 사실 말을 하고 나니 더 간절해졌다. 더도 말고 딱 한 잔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 이 엉망진창인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 듯했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기분을 노인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알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만.
“배 속에 애기씨를 두신 분이 술이라니요.”
“……죄송합니다.”
주름진 눈매라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매서운 눈빛에 화수가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야 몰라서 그랬다고 치지만, 이제부터는 이리 다치는 일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되구요. 아시겠습니까.”
“…….”
솔직히 조금 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이제야 알겠다. 안 그래도 엉망인 인생이 더 꼬이게 되었다는 거.
생겼다니까 그런가 하는 거지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사실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물론 가장 실감이 나지 않는 점은 자신이 리 샤오를 좋아한다는 거지만.
사실 이게 진짜 말도 안 되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좀 더 즐겁고, 그 사람만 생각하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한 감정이 아닌가? 제가 들은 이야기 속에서는 분명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 사람만 생각하면 미칠 것 같고, 그 사람 얼굴만 보면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고, 그 사람 손만 닿아도 아랫배가 앓아 내렸다. 그의 눈빛, 표정 하나에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그런데 그것이 좋아하는 감정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은가. 아니, 그러면 안 되는 거잖은가. 나도 한 번쯤은 행복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망가진 불량품이라도 그 정도는 하게 해줘도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화수의 질문에 대답해줄 이는 없었다. 대신 질문이 돌아왔다.
“아시겠습니까.”
한 번 더 다그치듯 묻는 노인의 물음에 꾹 닫혀 있던 화수의 입술이 열렸다.
“모르겠어요.”
“…….”
노인의 미간 주름이 짙어졌다. 하지만 화수도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알 수가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 * *
“이게 누구십니까.”
막 빈소로 들어서던 리 샤오의 걸음이 멈췄다. 하필 지금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저벅저벅.
멈춰 선 리 샤오와 달리 서 있던 룽오 부장은 걸음을 내딛었다.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일찍 도착하신 모양입니다?”
룽오 부장은 벌써 빈소를 들렀다가 나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그에게서 희미하게 향 내음이 났다. 구역질나는 속 내음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연락받고 바로 오는 길이라 그리되었네요. 누구처럼 뭘 숨길 필요가 없다 보니.”
“…….”
“좀 놀랐습니다. 리 샤오 부장은 누구보다 이성적인 분이라고 여겼는데, 의외로 화끈한 데가 있으시더군요.”
“굳이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주의라.”
룽오 부장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리 샤오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몰래 화수를 데려가려고 했다는 건 말 그대로 리 샤오와 전면전을 하겠다는 의사와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조심스레 움직이려 했는데 멍청한 부하들 때문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물론 그에 대한 대비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전 그저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 잠시 데려오라고 부하들을 보냈을 뿐인데, 아시잖습니까. 요즘 아랫것들이 머리가 굵어지면 다루기가 쉽지 않다는 거.”
“뭐, 그렇긴 하더군요.”
빤히 보는 저를 보는 시선으로 리 샤오가 동의하는 그 아랫것들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걸 알아차린 룽오 부장이었다. 단숨에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물론 겁 없이 이를 드러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심한 눈빛으로 리 샤오가 룽오 부장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뭡니까?”
그저 마주 보는 것인데도 리 샤오의 키가 워낙 크다 보니 룽오 부장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되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본인에게 직접 묻고 싶은데요.”
치미는 화를 겨우 참아 누르며 룽오 부장이 대꾸했다.
“그건 안 되겠습니다.”
“…….”
경무국장이 살아 있을 때는 그가 일어나면, 이라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불가능해졌으니 아무리 리 샤오라도 한 발 뒤로 물러서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룽오 부장의 희망사항이었던 모양.
“지금 뭐라고-, 혹시 안 된다고 하셨습니까?”
“예. 앞으로는 궁금한 게 있으면 저를 통해서 하시죠.”
설마 이렇게 당당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던 터라 순간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았다. 허를 찔린 표정으로 멍하니 있던 룽오 부장의 눈매가 확 일그러졌다.
“아무리 뒷배가 든든하다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범인을 감싸고도시면 곤란합니다.”
“그럼 범인이라는 증거를 가져오시든가.”
하! 입으로 웃었던 룽오 부장이 이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 증거를 리 샤오 부장이 가져갔잖습니까!”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룽오 부장의 목소리 틈으로 불쑥 끼어든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으니.
“빈소에서 웬 소란이신가.”
수하들을 거느리고 들어서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총독부 내 최고 권력자인 정무총감이었다.
“송구합니다. 총감님.”
정면으로 서 있던 룽오 부장이 한발 빨랐다. 자신이 흥분해서 언성을 높인 것은 잘못이었지만 오히려 잘됐다 싶은 룽오 부장이었다. 아무리 리 샤오라도 정무총감까지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
저벅저벅.
거리를 좁혀오는 정무총감을 향해 리 샤오도 고개를 숙였다. 정무총감의 시선이 리 샤오에게 닿았다가 이내 룽오 부장을 향한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쯤 하지. 고인의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정무국과 제3국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그 역시 모르지 않았던 터라 가볍게 룽오 부장을 타일러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룽오 부장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고인의 가족을 생각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빈소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정무총감의 발이 멈칫했다. 이쪽을 향하는 미간이 살풋 찌푸려져 있었다.
“이건 무슨 소리야.”
“…….”
“지금 그 말은 경무국장을 죽인 범인이 리 샤오 부장과 관련이라도 있다는 소린가?”
“직접, 물어보시지요.”
직접적인 대답 대신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룽오 부장의 반응에 정무총감의 고개가 리 샤오를 향해 움직였다.
“맞아?”
리 샤오를 보는 정무총감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훨씬 험악해져 있었다. 그것을 읽은 룽오 부장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이렇게 됐으니 무슨 변명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역시도 룽오 부장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예.”
변명은커녕, 담담하게 인정해버리는 리 샤오에 이번엔 룽오 부장의 말려 올라갔던 입꼬리가 도로 내려갔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룽오 부장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게다가 험악하던 정무총감의 표정마저 묘하게 누그러지는 것을 발견하자 불안은 더 증폭되었다. 그리고 보통 그런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룽오 부장의 말대로라면 제가 경무국장을 죽인 범인인 듯합니다.”
덧붙이는 리 샤오의 태연한 대답에 룽오 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아닙니다. 전 그런 말은-”
자연스럽게 의심케 하는 것과 대놓고 배후가 리 샤오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룽오 부장이라도 리 샤오의 집안과 아예 척을 질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런 룽오 부장의 꼼수를 리 샤오가 꿰뚫은 것이다.
정말이냐고 묻는 정무총감의 시선에 룽오 부장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리 샤오 부장이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전 그저 리 샤오 부장이 데려간 화수를 돌려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미간을 찌푸린 정무총감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화수? 지금 홍매루의 화수 말하는 거야?”
“예! 그 남창새끼가 바로 범인입니다.”
순간 리 샤오의 눈매가 살풋 찌푸려진다. 하지만 룽오 부장은 그런 리 샤오의 표정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정말이야?”
“그럼요. 감히 총감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룽오 부장.”
흠칫. 리 샤오의 부름에 룽오 부장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고작 이름이 불린 것뿐인데, 순간 제 목에 검이 겨누어진 듯한 서늘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자 새까만 눈동자가 저를 향해 있었다.
“내가 경고한 것 같은데. 괜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려면 증거부터 가져오라고.”
“뭐야.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의심한 거야?”
“그럴 리가요.”
“이건 또 뭐야. 증거가 있다는 말이야?”
“그럼요.”
룽오 부장의 턱이 살짝 위로 들렸다. 리 샤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당황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이건 최후에 꺼내놓으려던 패였지만 지금 그때를 기다리다가는 제가 죽게 생겼다. 이렇게 된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리 샤오를 범인으로 몰았다는 오명을 쓰고 범인까지 잡지 못하면 그땐 정말 제가 지금까지 죽을힘을 다해 쌓아 올린 제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질 지경이었다.
“리 샤오 부장이 녀석을 감싸려고 하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 남창새끼가 범인인 건 확실합니다.”
이렇게 되면 리 샤오는 아니라도 그의 약점인 화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확보해야 했다. 계산을 마친 룽오 부장은 자연스럽게 계획을 수정했다.
“그 남창새끼에게 오랫동안 피임약을 처방해주었다는 의원의 증언을 확보해두었습니다.”
“……피임약이랑 이 사건이랑 무슨 상관이지?”
몸을 파는 곤鯤이 피임약을 먹는 것은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총감에 룽오 부장이 기다렸다는 듯 뒷말을 잇는다.
“그 피임약의 성분 중에 바로 경무국장님을 살해한 비소가 섞여 있으니까요. 게다가 최근 녀석이 그 피임약을 잃어버렸다며 다시 타 간 일이 있었답니다.”
“…….”
총감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그 역시도 화수와 인연이 깊었기 때문에 아니길 바랐으나, 증거가 있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룽오 부장의 입꼬리가 다시금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 입꼬리는 채 올라가기도 전에 도로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룽오 부장.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룽오 부장의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물론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당황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리 샤오의 표정이 너무도 담담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룽오 부장이 그 말을 하길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하지만 이번만큼은 룽오 부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있는데, 제가 뭐 어쩔 건가.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 둘만 있는 것도 아니니 아무리 리 샤오라도 멋대로 굴 수는 없었다. 자신감을 찾은 룽오 부장이 턱을 치켜세웠다.
“원하시면 의원을 당장 이 자리에 데려와 보일 수도 있습니다.”
“…….”
“대신 리 샤오 부장도 그 남창새끼를-, 윽-!”
막 화수를 제게 넘기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불쑥, 내뻗어진 손이 룽오 부장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였다.
퍽, 하고 몸이 딱딱한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적막한 복도를 울렸다. 룽오 부장이 마른 편이긴 하나 그래도 일반적인 성인남성의 몸이었다. 그런데 그런 성인남자의 몸이 손써볼 틈도 없이 마치 종잇장처럼 날아가 벽에 박혔다. 엄청난 힘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이들이 가장 놀란 것은 그런 폭력적인 행동을 한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리 샤오라는 점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곳엔 정무총감도 함께 있었다. 제아무리 리 샤오라지만 제정신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물론 제정신이라면, 이겠지만.
“그 새끼가 남창인 건 맞는데, 네 새끼는 아니잖아.”
지금 상황에서 그걸 따지고 있는 리 샤오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제정신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리 샤오의 모습에 정무총감의 얼굴 위로 번진 것은 노기가 아닌 미소였다. 물론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싶어 짓는 기가 막힌 웃음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미소라는 건 확실했다.
증거를 내놓은 룽오 부장의 입이라도 막으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 호칭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기가 막혔다. 배포가 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대책 없는 녀석인 줄은 몰랐다.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총독조차 리 샤오라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내젓는 이유를 그제야 조금은 알 듯한 총감이었다.
그 역시 비슷한 심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쯤하지. 리 샤오 부장.”
“…….”
“그 정도면 룽오 부장도 알아들었을 테니까. 그렇지, 룽오 부장?”
“…….”
끄덕끄덕. 감히 자신의 질문에 고개만 끄덕이는 건방진 태도에도 총감은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았다. 목이 졸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나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룽오 부장에 그제야 리 샤오도 그의 목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켁, 켁, 숨통이 트인 룽오 부장의 입에서 꼴사나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뻘게졌던 얼굴색이 그나마 조금 옅어졌다.
“부축해드려.”
총감의 고갯짓에 부하들이 달려왔다. 하지만 룽오 부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리 샤오가 바라는 바도 그것일 테니까.
“의원을, 데려올 테니, 대신 리 샤오 부장도 그 남창, 녀석을 넘기십시오.”
고집을 피우는 룽오 부장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정무총감도 의아한 듯 질문을 되돌렸다.
“화수가, 리 샤오 부장에게 있어?”
“예. 제가 확인해볼 것이 있어 잠시 데려오는 길에, 리 샤오 부장께서 데려가버리셨답니다.”
리 샤오가 다른 소리를 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자신의 과오는 쏙 빼놓은 룽오 부장의 설명에도 리 샤오는 반박하거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정말이야?”
“예.”
“대체 왜-”
“제 거니까요.”
“뭐?”
“제 걸 남이 멋대로 가져가는데 그걸 그냥 두고 볼 순 없잖습니까.”
“…….”
“리 샤오 부장도 그 남창, 녀석에게 홀린 게 분명합니다. 사내 홀리는 재주 하나는 타고난 녀석 아닙니까.”
순간 난감한 표정이 번지는 정무총감의 얼굴을 목격한 룽오 부장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뒤늦게 정무총감도 화수의 손님이라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물론 말로는 체스 상대라고 하지만 그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게 뭔가. 제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난잡하게 웃던 녀석을 생각하면 짐작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술을 이죽거렸을 때였다.
흠칫.
순간 룽오 부장은 몸이 짓눌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번엔 손가락 하나 닿지 않았음에도 조금 전 목이 졸렸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박감을 느꼈다. 말 그대로 온몸을 감싼 공기가 그대로 몸을 조여오는 것 같은 기분.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룽오 부장이야말로 의원을 내게 넘겨야겠습니다만.”
룽오 부장이 뭐라 반박하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입술조차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그나마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뿐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진짜 움직이고 있는지 본인이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제가 직접 그 의원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지어냈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으니까요.”
“거짓말이라는 거야?”
그나마 정무총감이 룽오 부장을 대신해 질문을 던졌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정말 그 의원 말대로 피임약을 먹어왔다면 녀석이 제 아이를 밴 걸 어떻게 설명할지, 직접 물어보고 싶군요.”
룽오 부장보다도 정무총감의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이야?”
“예.”
이내 정무총감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비교적 일찍 가정을 이룬 집안의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리 샤오는 아예 그럴 생각 자체가 없어 걱정이라던 총독의 염려를 알고 있던 탓이다. 어미의 출신이 좀 걸리긴 하지만, 뭐 어떤가. 손 귀한 집안에서는 아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그제야 리 샤오가 제 것 운운한 이유도 알았다.
“아니, 그런 기쁜 소식을 왜 이제야 말하나, 이 사람아.”
“죄송합니다.”
핀잔을 하기는 했지만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총독께서도 아시고?”
“아니요. 아직 말씀 못 드렸습니다.”
“아니, 그런 소식이 있으면 어른들께 가장 먼저 알려야지. 얼마나 걱정들이 많으신데. 이리 무심해서 되겠나?”
“그래. 홍 의원한테는 보였고?”
“예.”
“아이 상태는 어떠하다고 하던가?”
“지금은 조금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하긴, 화수가 워낙 말라빠져서.”
“그런 것도 있지만 녀석이 머리를 크게 다쳐 피를 많이 흘리는 바람에.”
“머리를 크게 다치다니? 대체 어쩌다가.”
“정무국으로 연행되지 않으려고 반항을 좀 한 모양입니다.”
“아무리 반항을 했기로 서니,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험하게 사람을 다루었단 말인가. 룽오 부장?”
“……죄송합니다.”
할 말은 많았지만 룽오 부장은 조용히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개는 그 역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혹 배 속의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찌할 뻔했나!”
“이건 다 부하들을 제대로 간수 못 한 제 잘못입니다. 리 샤오 부장께도 사과드리지요.”
말은 사과지만 결국 저와는 상관없는 부하들 탓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꼼수는 크게 효과가 없었다. 심지어 리 샤오에게까지 고개를 숙였음에도 총감의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은 조금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고작 돌팔이 의원의 말에 속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다니, 룽오 부장이 이리 허술한 사람인지 미처 몰랐군.”
“……송구합니다.”
“사과는 됐고, 허면 의원은 어찌할 텐가.”
어디 네 입으로 한번 말해보라는 듯 정무총감의 시선이 룽오 부장을 향해 있었다.
“의원은.”
룽오 부장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제가, 조용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리 샤오 부장이 신경 쓰는 일 없게, 조용히 처리해주게. 좋은 일 앞두고 그런 쓸데없는 일로 자꾸 소란스러워져서야 되겠나. 내가 부탁함세.”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룽오 부장만 믿네.”
격려하듯 룽오 부장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하고 두드린 정무총감이 빈소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고개를 숙인 룽오 부장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
“룽오 부장님.”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렸다. 총감을 따라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리 샤오가 제 앞에 서 있었다. 흠칫, 순간 마주친 눈동자에 어깨가 굳는다. 조금 전 온몸이 짜부라질 듯 하던 경험을 기억하고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었다. 그런 룽오 부장을 가만히 응시하던 새까만 눈동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평소와 비슷한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와 말투였다.
“조심하십시오.”
하지만 이상하게 눈앞의 사내가 낯설었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그리고 이유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내 것에 손대면 그땐 정말 경고 없이 죽여버릴 거니까.”
마치 스위치가 켜진 듯 단숨에 새파랗게 불이 들어오는 눈동자를 보며 그제야 그도 깨달았다. 지금 제 눈앞에 서 있는 흉포한 짐승의 모습이 바로 리 샤오의 진짜 모습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 *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평소라면 문밖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을 집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깜빡하고 귀가를 알리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운전병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진다. 보통 그런 연락은 카이가 맡아서 했기 때문이지만 그것이 변명거리는 되지 않는다.
“됐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직접 알리기 위해 황급히 안전벨트를 풀던 운전병의 등 뒤에서 나직이 들려온 목소리. 언성을 높이거나 한 것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운전병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리 샤오의 목소리는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것이 있었다.
“허면 문이라도-”
“왜. 혼자 문도 못 열까 봐?”
한 박자 늦게 한마디 덧붙여보지만 단박에 날이 선 목소리가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역시나 기분 탓이 아니었다. 무표정한 표정이 평소와 다름없어 바로 눈치채지 못했지만 리 샤오의 기분은 말 그대로 아주 최악이었다.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느껴지는 패기覇氣에 운전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딸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리 샤오가 차 밖으로 걸음을 내딛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아.”
그때까지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 있던 운전병은 탁, 차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참았던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집 안은 적막했다. 하지만 리 샤오의 걸음은 한 번 멈추는 법이 없었다. 불도 켜지지 않은 현관을 통과해 복도를 가로지르는 걸음이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빨라져 있었다. 물론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멈칫.
그렇게 다급한 걸음으로 와놓고 정작 제 방 문 앞에서 멈칫한다. 어떤 순간에도 머뭇거리는 법이 없는 리 샤오가 제 방 문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물론 리 샤오를 머뭇거리게 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리 샤오가 미간을 찌푸린다. 고작 그 녀석 때문에 이리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망설였다는 것을 부정하듯 손에 붙잡힌 장지문을 단숨에 열어젖혔다.
드륵.
하지만 활짝 열린 방 안을 확인한 리 샤오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해졌다.
“씨발.”
분명 그곳에 있어야 할 빌어먹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카이!”
적막하던 집 안이 단숨에 소란스러워졌다.
“집사!”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제 주인의 목소리라는 걸 깨닫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리 샤오가 이리 언성을 높이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도련님.”
리 샤오의 부름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집사였다.
“죄송합니다. 오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복도를 가로지르던 리 샤오의 앞으로 놀란 얼굴로 달려온 집사가 굽은 허리를 납작 숙였다. 하지만 리 샤오가 궁금한 바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디 갔어.”
“무엇을…….”
대답을 하려고 다시 고개를 들었던 집사가 순간 움찔하고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보다도 오래 리 샤오를 보아왔지만 지금처럼 이성을 잃은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사람 하나 죽어나가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흉흉한 기세였다. 한 발 뒤로 물러서고 싶은 본능을 겨우 눌러 참았다.
“어디 갔냐고 묻잖아!”
사실 집사가 머뭇거린 것은 겨우 몇 초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조차 참지 못하고 눈앞의 짐승이 다시 으르렁거렸다. 반사적으로 집사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그 순간 집사의 뒤편에서 불쑥 끼어든 목소리.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일견 태평하게 들리기까지 한 그 목소리는 분명 집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천천히, 리 샤오의 고개가 움직였다. 핏기 없는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람 속을 이렇게 다 뒤집어놓고 정작 저를 보는 눈동자는 말갰다.
“대체, 어딜 갔었던 거지?”
“…….”
곧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화수에 리 샤오가 곧바로 질문 상대를 바꿨다.
“카이.”
“화장실에 계셨습니다.”
하. 리 샤오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방은 그렇게 엉망으로 해놓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폭탄이라도 맞은 듯 엉망이 된 방 안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다는 기분을 처음으로 경험한 리 샤오였다. 진작 없애버렸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해보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
리 샤오의 질문에 그제야 카이도 뭔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제 좀 생각이 난 모양이지?”
이래도 계속 거짓말을 할 거냐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리 샤오에게 난감한 표정을 지은 카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억지로 저녁을 먹으려다가 구역질이 나셔서 뛰쳐나오는 바람에.”
“…….”
“죄송합니다.”
급하게 따라 나오느라 그런 것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엉망이 된 방 안을 보고 리 샤오가 무슨 상상을 했을지 알아차린 카이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리 샤오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하지만 조금 전과 같은 흉흉한 기세는 아니었다. 조금 누그러진 리 샤오의 시선이 화수에게 닿았다.
“먹기 싫으면 말 것이지, 미련하게 억지로 먹긴 왜 먹어.”
“누가-”
리 샤오의 핀잔에 뭐라 한마디 하려고 입을 뗐던 화수가 이내 입술을 도로 닫는다.
“할 말 있으면 해.”
“…….”
억울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화수는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였다. 한번 고집피우면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리 샤오가 카이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이번엔 카이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이 집사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리 샤오는 분명 보았다.
다시금 리 샤오의 시선이 집사에게 닿았다. 리 샤오의 시선에 집사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토할 때 토하더라도 애기씨를 생각해서 뭐든 드셔야 합니다.”
“…….”
“속을 달랠 수 있게 미음을 준비하겠습니다.”
또 뭔가를 먹어야 한다는 말에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집사는 벌써 주방을 향해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도련님 식사는 응접실에 마련해두었습니다.”
멀건 미음 그릇을 가져온 집사가 말했다. 그나마 기름진 음식냄새를 화수가 맡지 않게 배려한 것이었다. 이왕 배려한다면 먹을 것을 들이미는 자체를 멈춰줬으면 싶지만.
“나도 같은 걸로 줘.”
“하지만 미음으로는 배가 안 차실 텐데요.”
집사의 염려에도 리 샤오는 조용히 화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뿐이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듯 등을 보이고 앉은 리 샤오에 집사도 이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스륵, 조용히 장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수저로 휘휘 젓기만 할 뿐 선뜻 입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화수를 힐끗, 본 리 샤오가 말했다.
“억지로 먹을 것 없어.”
“그 말은 저분께 직접 좀 해주시죠.”
화수가 불퉁하게 중얼거리자 리 샤오가 고개를 내젓는다.
“준비하는 걸 말릴 순 없어. 우리 할아버님도 그건 못 하실걸.”
“…….”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미련하게 다 먹지는 않아도 된다는 말이야, 내 말은.”
“…….”
탁. 탁자 위에 준비된 찻잔에 차를 따르고 리 샤오가 그것을 화수의 앞에 놓았다. 그러고는 마시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몫의 찻잔을 들었다. 그런 리 샤오를 가만히 보고 있던 화수가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도 못 넘기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이건 마실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입술만 축였다. 그리고 조금 기다렸다. 다행히 구역질이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이번엔 한 모금을 삼켰다. 쌉싸름한 차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구역질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 홀짝이자 잔이 비었다.
“자.”
빈 잔을 아쉬워하고 있으려니 리 샤오가 차를 가득 채운 잔을 넘겨준다. 리 샤오의 것이었다. 미리 따라둬 알맞게 식은 차를 단숨에 비웠다. 고작 찻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가 배 속으로 들어가니 좀 살 것 같았다.
슥.
이번에 다시 자신의 찻잔이 제 앞에 놓였다. 그러고는 제 앞에 놓인 미음 그릇을 가져간다.
“아.”
화수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리 샤오가 제가 좀 전까지 입에 물고 있던 수저로 미음을 떠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하지만 정작 놀란 화수의 표정을 리 샤오는 전혀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먹기 싫은 것 아니었나?”
“……예. 싫은 것 맞아요. 드셔도 됩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쓰는 그릇에 수저도 담지 않을 듯이 생겨서는 의외로 이런 것은 상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으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멈췄던 리 샤오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저를 쥔 손길이 예상외로 정갈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검을 쥐는 손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손이었다. 홀린 듯 리 샤오가 움직이는 수저를 응시하고 있던 화수가 슬그머니 물었다.
“맛있으십니까?”
멀건 미음이 무슨 맛이 있겠냐 싶지만 제법 빠르게 줄어드는 그릇을 보니 문득 궁금증이 일었던 것.
“궁금하면 먹어보든지.”
슥. 조금 전 찻잔처럼 화수의 앞으로 수저가 내밀어졌다. 설마, 먹으라는 건가. 눈앞에 내밀어진 수저에 잠시 머뭇거렸더니 두 번 권하는 법도 없이 손이 도로 물러간다.
“싫으면 관두고.”
“누가.”
멀어지는 수저에 다급해진 화수가 저도 모르게 리 샤오의 손목을 붙들었다.
“싫다고 했습니까.”
“…….”
저도 모르게 손목을 붙잡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다음 순간이었다. 묘하게 굳은 리 샤오의 표정에 화수가 슬그머니 손목을 놓았다. 하지만 의외로 그대로 물러설 줄 알았던 수저가 도로 앞으로 내밀어졌다.
이번엔 화수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리 샤오의 눈빛에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구역질은 나지 않았지만 화수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화수의 고개가 리 샤오를 향했다.
“아무 맛도, 안 나는데요.”
딱 쌀 몇 알을 물에 풀어놓은 맛,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왠지 억울한 기분마저 드는 화수였다.
“왜 거짓말은 하십니까.”
하지만 따져 묻는 화수에도 리 샤오는 태연했다.
“글쎄, 난 맛있다고 한 적은 없는데.”
“…….”
무슨 소리냐며 따져 물으려던 화수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진다. 생각해보니 궁금하면 먹어보라고 했지, 맛있다고 한 적은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토하진 않았네.”
“……그러네요.”
리 샤오의 말을 듣고서야 그제야 화수도 자각했다. 토하지 않은 것 정도가 아니라 신기하게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아마 제가 뭘 먹었다는 자각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가 생각해도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화수를 향해 리 샤오가 무심한 어투로 되물었다.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마도, 요.”
살짝 자신 없는 대답이었지만 곧바로 수저가 입가로 다가왔다. 이번엔 화수도 거리낌 없이 그것을 받아먹었다. 화수의 얼굴색으로 괜찮다는 걸 확인한 리 샤오가 다시 미음을 떠서 내밀었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자 금방 미음 그릇의 바닥이 보였다. 애초에 가져왔을 때부터 그리 많은 양도 아니었다. 아쉬운 듯 입술을 달싹이는 화수에 리 샤오의 미간이 살풋 구겨졌다.
“더 가져오지.”
“예? 괜찮은데…….”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지만 이미 리 샤오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드륵.
그리고 리 샤오가 막 장지문을 열어젖혔을 때였다. 막 들어서려고 문 앞에 서 있던 집사와 떡하니 마주쳤다.
“어디, 가십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사가 묻는 말에 눈매를 일그러트리고 리 샤오가 한마디 한다.
“늦잖아.”
그제야 리 샤오가 자신이 늦어서 직접 나온 것이라는 것임을 깨달은 집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됐고, 그거나 이리 줘.”
“제가-”
물론 이미 쟁반은 집사의 손에서 리 샤오의 손으로 옮겨간 뒤였다.
“도련님 것은 미음 대신 죽으로 준비해 왔습니다. 아무래도 미음은 끼니로는 적당치 않으니까요.”
뒤돌아 왔던 길을 돌아가는 리 샤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집사가 변명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같은 것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왜 멋대로 바꿨냐는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거기까지는 괜찮았던 모양이다. 별다른 말이 없는 리 샤오에 안심한 집사가 뒤늦게 탁자를 확인했다.
“아, 이건 제가 치우지요.”
가져온 쟁반을 놓을 자리에 미음 그릇이 놓여 있는 것을 본 집사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릇은 비어 있었지만 당연히 리 샤오가 먹어치웠겠거니 했다. 그릇과 수저가 놓인 방향이 리 샤오가 앉은 쪽이었으니까. 집사의 얼굴 위로 걱정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애기씨를 생각해서 억지로라도 드셔야 합니다.”
물론 걱정의 대상이 화수는 아니었지만.
“먹었으니까 잔소리는 그쯤 해둬.”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수를 대신해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던 리 샤오가 한마디 했다.
“정말입니까?”
하지만 집사가 되묻는다. 리 샤오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기보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도 삼키지 못하던 걸 제 눈으로 목격한 탓이 컸다.
“내가 집사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야.”
리 샤오의 핀잔에 그제야 집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고개가 화수를 향해 꺾였다.
“잘하셨습니다.”
“…….”
겨우 밥 한 끼, 그것도 미음 한 그릇 먹은 일로 이리 칭찬을 들으려니 민망했다.
“그러면 미음을 좀 더 가져오겠습니다.”
물론 허락을 구한다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 고하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막 나가려고 돌아서는 집사의 발을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어.”
주인의 명령에 집사의 발이 그대로 멈췄다. 고개를 바로 하자 눈이 마주친 리 샤오가 쐐기를 박듯 덧붙인다.
“관두라고.”
보통 때라면 집사도 그쯤에서 물러났을 터였다. 하지만 몸이 너무 말라 애기씨가 제대로 자랄 수나 있겠냐고 걱정하던 홍 의원의 말을 떠올리자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드실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이거 먹으면 되니까. 미음은 관두라고.”
“……예?”
하지만 리 샤오가 관두라고 한 이유는 집사가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뒤늦게 집사가 되물었지만 이미 리 샤오의 시선은 집사에게서 떨어져나간 뒤였다.
“먹어봐. 미음은 맛이 없다고 투덜거렸으니까, 죽은 그나마 좀 낫겠지.”
“맛없다고 투덜거린 적 없습니다만.”
모함에 억울해진 화수가 급히 리 샤오의 말에 반박해보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태연한 얼굴로 수저를 든 손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을 뿐이다.
그래서 안 먹겠다고? 그렇게 묻는 것이 분명한 그의 눈빛에 화수의 눈썹이 살풋 찌푸려졌다. 하지만 관두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못마땅한 표정이긴 했지만 결국 입을 벌려 죽을 받아먹었다.
“아무 맛도 없는 건 죽도 마찬가지네요.”
곧 죽어도 한마디 덧붙이는 것은 잊지 않는 화수였다. 물론 리 샤오는 대꾸하는 대신 작은 종지에 담긴 동치미 국물을 떠서 내밀었을 뿐이다. 후루룩, 동치미 국물을 받아먹은 화수의 눈이 살짝 찌푸려진다. 조금 전과는 다른 반응에 리 샤오의 표정도 조금 굳었다.
“왜. 토할 것 같아?”
“아뇨.”
“그런데 왜 그런 반응이야.”
사람 놀라게. 미간을 찌푸리는 리 샤오에 화수가 변명하듯 대답했다.
“이건 좀, 맛있어서요.”
“…….”
확 일그러지는 미간에 화수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집사.”
“예. 동치미를 좀 더 가져오지요.”
이름이 불린 것뿐이지만 이미 리 샤오가 내리려는 명령이 뭔지 파악했다. 고개를 숙였던 집사가 천천히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집사어른, 괜찮으십니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린 시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방에서 나오는 집사의 얼굴이 꼭 귀신이라도 본 듯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방 안에 있는 이는 자신의 주인과 낯선 손님뿐인데, 왜 저런 표정이 되신 건지 어린 시종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물론 그것을 알려줄 생각은 결코 없었다.
“신경 쓸 것 없다.”
표정을 갈무리한 집사가 고갯짓을 했다.
“너는 주방에 먼저 가서 동치미를 준비하라고 이르거라.”
“예.”
평소의 집사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시종이 잰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 뒤를 집사가 천천히 뒤따랐다.
대체 누구시냐고, 처음 화수를 데려왔을 때 묻는 제 질문에 좀처럼 그러는 법이 없는 카이가 그저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던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아무래도 이 집에 작은마님이 생긴 모양이구만.
물론 이게 기뻐할 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제가 생각할 일은 그저 애기씨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잘 보살피는 것뿐. 카이보다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집사가 걸음을 내디뎠다.
동치미 말고 새콤한 것이 또 뭐가 있었지, 기억을 더듬으며.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처음으로 크게 울리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의 활기였다.
그것이, 그 역시도 나쁘지 않았다.
* * *
난감하네.
바닥에 준비된 이부자리를 보며 화수가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드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수가 급히 열었던 중간 문을 닫았다. 그리고 뒤돌아서다 그대로 굳었다.
“왜.”
들어서던 리 샤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굳어 있던 화수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다행히 리 샤오도 더 캐물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표정은 갈무리했지만, 흘끔거리는 시선은 멈출 수가 없었다.
씻고 오는 길인지 들어서는 리 샤오에게서 물 냄새가 났다. 게다가 늘 입고 있던 딱 떨어지는 정복 차림이 아닌 편안한 침의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물론 집에서까지 밖에서 입는 군복을 입고 있을 리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그가 정복이 아닌 다른 차림으로 있는 것이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쩐지 눈앞의 사람이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다.
게다가 젖었기 때문인지 그에게서 느껴지는 체향이 훨씬 짙어져 있었다. 태연한 척하고는 있었지만 심장이 얕게 떨렸다.
“문은 왜 닫아둔 거야.”
“아, 잠깐-”
그렇게 긴장해 있는 자신과 달리 태연히 방을 가로지른 리 샤오가 중간 문을 열어젖혔다. 뒤늦게 깨닫고 화수가 돌아섰을 때는 이미 늦었다. 열린 문틈으로 이미 나란히 준비된 이부자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화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물론 등을 지고 선 리 샤오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아마,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제가 한 것도 아닌데 왜 자신이 잘못한 듯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변명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리 샤오의 고개가 화수 쪽으로 꺾였다.
“뭘 오해했다는 거지?”
역시나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에 난감한 듯 눈매를 찌푸린 화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리 샤오 님도 이 방에서 주무실 거라고 말입니다.”
“방 주인이 방에서 자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
화수의 눈매가 더 기름해진다.
“여기가, 리 샤오 님 방이었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
물론 문제는 없었다. 손님방이라고 생각한 건 화수 혼자만의 추측이었으니까.
“제가 다른 방으로 가야겠군요.”
나름 합리적으로 낸 결론이라고 생각했지만 리 샤오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왜?”
“왜냐뇨. 아니면 나란히 한 이불이라도 덮고 자자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어디 머리라도 다치셨습니까.”
“머리는 네가 다쳤지.”
리 샤오의 시선이 화수의 이마에 닿았다. 사실 시선을 받고서야 제 이마통이 터졌다는 걸 자각했다. 그것 말고도 엄청난 일들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그러니까요.”
그런데 왜 님이 머리를 다친 것처럼 그러시냔 말입니다. 화수가 투덜거린다. 하지만 리 샤오는 태연했다.
“싫어도 참아. 애까지 만든 사이에 각방 쓰는 건 별로 좋은 그림이 아닐 테니까.”
리 샤오의 말에 화수의 표정이 단숨에 심각해졌다.
“정말, 머리라도 다치셨습니까.”
“…….”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 아이는-”
“내 새끼가 아니지.”
“…….”
그럼 대체 지금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화수에게 리 샤오가 덧붙였다.
“하지만 다들 내 새낀 줄 알고 있잖아.”
하아. 딱딱하게 굳었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언제까지 오해하게 그냥 두실 겁니까.”
애초에 리 샤오가 말만 하면 풀릴 오해였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글쎄.”
“…….”
글쎄라니. 이런 애매모호한 답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화수의 눈매가 더 일그러진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되묻는 화수를 새까만 눈동자가 응시했다. 화수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시선이 맞부딪혔다.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게.”
그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을 먼저 끝낸 이는 리 샤오였다.
슥, 손이 내뻗어진다. 순간적으로 화수의 몸이 흠칫, 하고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움츠러든 것이 무색하게도 그렇게 내뻗어진 손이 닿은 곳은 화수의 볼이었다. 가만히 감싸 쥔 볼을 문지르던 리 샤오가 툭, 하고 한마디 내뱉는다.
“널 어쩌고 싶은 걸까.”
“…….”
스스로도 모르겠다는 듯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가슴에 와 박혔다.
기가 막히기도 하겠지. 기껏 믿고 선의를 베푼 이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으니. 볼을 감싼 손이 당장이라도 아래로 내려와 목을 부러트려도 할 말이 없었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 화수가 입술을 뗐다.
“그쯤 하셨으면 됐습니다. 이미 한 번 살려주신 것으로 그날의 약속은 지키셨습니다.”
“…….”
사실 약속이랄 것도 없는 말 한마디였다. 그럼에도 자신이 내뱉은 말이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리 샤오가 배신까지 한 저를 끝까지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참 고지식하다 싶으면서도 그게 또 리 샤오답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었다. 겉보기엔 냉정해 보여도 의외로 불쌍하고 안된 이에게는 약한 구석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제가 먼저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하셔도 된다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나름 리 샤오를 위해 한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이 정작 당사자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수 있다는 건 몰랐다.
“알아서 어떻게 할 건데?”
“…….”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무 힘도 없는 주제에. 혼자 다 뒤집어쓰고 죽어버리기라도 하려고?”
차가운 비수가 날아와 심장에 꽂혔다. 하지만 그런 것을 그냥 당하고 있을 화수도 아니었다.
“그것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지지 않고 곧바로 받아치는 화수에 리 샤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노려보는 시선을 화수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맞받아쳤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불꽃이 튀어 올랐지만 누구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먼저 침묵을 깬 이는 이번에도 리 샤오였다.
“고작 네 목숨 따위로 수습할 수 있는 시점은 이미 지났어.”
“…….”
리 샤오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조금 전 화수가 뒤로 물러섰던 거리만큼. 사나운 눈동자가 바로 눈앞으로 바싹 다가와 있었다.
“설사 네가 혼자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한다고 치자. 과연 룽오 부장이 곧이곧대로 믿어줄 것 같나?”
“…….”
“너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생각을 하다니. 생각보다 순진하군.”
그제야 화수도 제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자신 혼자만 뒤집어쓰는 것도 불가능했다. 리 샤오가 기가 막혀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건방진 소리는 그쯤 해둬. 괜히 수습된 거 다시 들쑤셔서 룽오 부장만 좋은 일 만들지 말고.”
“수습, 된 겁니까? 어떻게요?”
그리 쉽게 수습될 일이 아닌데,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리 샤오의 시선이 흘끔, 화수의 배에 닿았다. 설마. 순간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무리 멍청해도 감히 내 씨를 배 속에 둔 녀석을 잡아가겠다고 나설 만큼 멍청하지는 않은 모양이라.”
“…….”
“배 속의 그 녀석에게 감사하도록 해. 녀석 덕분에 목숨 부지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나. 이쯤 되니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미의 말대로 저는 재수 없는 팔자를 타고난 게 분명했다. 본인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사람들까지 함께 망가트리는 재수 없는 팔자는 결국 가장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까지 수렁 안으로 끌어 내리고 말았다.
“물론 룽오 부장이 이대로 포기할 인간은 아니니, 한동안은 지금처럼 여기 이렇게 얌전히 있도록 해.”
“얼마나요?”
그때까지만 해도 입을 꾹 다문 채 멍하니 있던 화수가 리 샤오의 말끄트머리에 불쑥 물었다.
“얼마나, 있어야 하는 겁니까.”
“…….”
한동안, 이라는 말은 화수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였다. 한동안이라니. 그게 대체 며칠이란 말인가. 언제 나가야 할지 몰라 눈치 보고, 불안에 떠는 것은 질색이었다. 대략이라도 정확한 기간을 정해두고 싶었다. 그래야 그때쯤 다시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할 거 아닌가.
하지만 그런 화수의 물음을 리 샤오는 조금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왜.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지?”
“…….”
선뜻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이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이걸 왜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남의 집이 좋아봐야 결국 남의 집이 아닌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으려니 미간을 살풋 찌푸린 리 샤오가 화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손목을 움켜쥔 손의 힘이 엄청났다. 그제야 화수도 리 샤오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적응하는 편이 좋을 거야. 싫어도 여기서 지내야 할 테니까.”
그리고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듯 그대로 열린 방 안으로 화수를 밀어 넣었다.
탁, 하고 장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순간 비틀거리던 몸의 균형을 잡고 고개를 들자 닫힌 문 앞에 리 샤오가 서 있었다. 조금 전 있던 곳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온 것뿐인데도 이상하게 화수는 사방이 막힌 감옥 안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마도 문 앞을 지키고 선 리 샤오 때문이겠지만.
꿀꺽. 마른침이 삼켜졌다. 달라진 것은 뒤편에 펼쳐진 이부자리뿐인데도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혹,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에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
“죄송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신의 집을, 그것도 이리 대단한 집을 감히 내키지 않아하다니. 아무리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분명 예의 없는 짓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기분이 상한 리 샤오의 표정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기분이 풀리시겠습니까.”
화수가 물었다. 사실 화수가 아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지만 지금 리 샤오에게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얌전히 서서 물음으로써 대신했다.
“뭐든 할 수 있는 거지?”
“예.”
침묵이 깨진 것만으로도 화수는 살 듯했다. 대체 뭘 시키려고 그러는가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지금으로써는 솔직히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리 샤오가 손을 내뻗었다.
손목을 붙잡은 손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몸을 제 쪽으로 휙, 하고 당긴다.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곧 입술을 눌러오는 뜨거운 기운에 크게 떠졌던 눈이 도로 꽉 감겼다.
잔뜩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리 샤오가 한 짓은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화수가 놀란 이유는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몸을 섞은 적은 많지만 입맞춤부터 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몸을 섞을 때에도 입맞춤은 중간쯤, 그것도 흥분해서 무의식적으로 해온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뭐든 할 수 있는 거냐고 확인까지 해놓고 한 짓이 입맞춤이라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집중 안 하지.”
어떻게 알았는지 입술을 빨던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흉흉해진 눈동자를 본 화수가 황급히 눈을 감았다. 으르렁거리던 리 샤오가 곧바로 입술을 삼켰다. 반사적으로 다물리는 입술을 혀로 벌리며 들어왔다.
살덩이가 깊이 들어왔다. 밭은 숨을 내쉬는 화수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반사적으로 물러서는 화수의 살덩이를 붙잡아 비볐다. 두 살덩이가 엉켜 붙었다. 으깨듯 비비고, 혀를 휘감았다. 목구멍 안까지 들어왔던 살덩이가 입천장을 비빈다.
으응.
호흡이 엉켰다. 다 삼키지 못한 침이 입안에 고였다. 살덩이가 비벼질 때마다 젖은 소리가 짙어졌다. 마치 아래로 리 샤오를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입에서 나는 소리가 사내를 받아들이는 아랫입에서 나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크기가 다를 뿐 리 샤오에게 쑤셔지는 것은 똑같았다.
아으.
화수가 앓는 소리를 냈다. 물론 신음은 맞닿은 입안으로 사그라들었지만. 각도를 달리해 몇 번이고 입술이 겹쳐졌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빨렸다. 혀가 빨릴 때마다 엉덩이 아래쪽이 묵직해졌다. 마치 처음 입맞춤을 하는 것처럼 호흡이 엉켰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잠깐, 잠깐만.
입으로는 제대로 된 말을 내뱉을 수 없어 화수는 손으로 다급하게 리 샤오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제야 입안을 샅샅이 핥고 있던 입술이 조금 떨어졌다.
오싹.
떨어진 리 샤오와 눈이 마주친 화수가 몸을 떨었다. 그가 한입에 꿀꺽 삼킬 것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어 하는 화수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리 샤오의 손이 그의 뒷덜미를 꽉 붙들었다. 가끔 정말 리 샤오가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 화수였다.
“뭐든 해도 된다고 했지.”
리 샤오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화수의 입은 헐떡이며 부족했던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물론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해도 리 샤오는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바뀌었어. 지금부터 각인을 할 거야.”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까 한동안은 꽤나 긴 기간이 될 거야.”
뭐라 항의하려는 입술을 그대로 리 샤오가 막아 눌렀다. 애초에 화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주춤.
화수가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는 화수를 따라 리 샤오가 입술을 더 바싹 붙여왔다. 화수가 이번엔 고개를 뒤틀었다. 하지만 리 샤오가 한발 빨랐다. 단단한 손이 화수의 턱을 콱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살짝 떨어졌던 입술을 각도를 달리해 겹쳐왔다. 거친 숨이 입안으로 삼켜졌다.
그대로 끌어당길 줄 알았던 리 샤오가 오히려 화수를 힘으로 밀어붙였다. 입술은 맞부딪힌 채 체중을 실어오니 화수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자꾸 뒷걸음질을 친다. 어느새 깔아놓은 두꺼운 이불 위로 두 발이 디뎌졌다. 푹신한 요를 그것도 뒷걸음으로 디디니 안 그래도 겨우 버티고 있던 두 다리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런 사정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리 샤오는 자꾸만 체중을 실었다. 결국 화수는 리 샤오의 옷자락을 붙들 수밖에 없었다. 리 샤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화수는 그런 것을 확인할 여유 따위 없었다.
숨을 못 쉬겠어.
화가 났을 때조차도 입맞춤엔 집요하던 사내가 작정하니 더 집요해졌다. 각도를 달리해 들어온 혀가 더 깊이 들어왔다. 뜨거운 살덩이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가득 채운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이번엔 입안을 마구 헤집는다. 결이 있는 입천장을 긁어 올렸다. 등허리가 오싹거렸다. 혀를 비비고 그리고 목구멍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왔다. 어째서일까. 가득 차는 건 입안인데 왜 자꾸만 심장이 빠듯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숨이 모자란 몸이 마치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축축해졌다.
호흡이 엉켰다. 입안에 삼키지 못한 침이 고인다. 질척대는 소리가 마치 귓가에서 나는 것처럼 생생했다. 리 샤오의 옷자락에 매달려 있던 화수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부서질 만큼 꽉, 그를 붙잡는다. 사실 그건 본능 같은 것이었으나 리 샤오가 그만두길 바란다면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손길에 입맞춤은 더 거칠어졌으므로.
어쩔 줄 몰라 굳어 있는 화수의 혀에 리 샤오가 자신의 혀를 비볐다. 질척하게 문지르고, 비비고, 쭉- 빨아 당긴 혀를 잘근잘근 씹는다. 화수의 눈이 꽉 감겼다. 몸 안을 가득 채우던 물기가 눈가로 새어 나왔다. 눈앞이 뿌옜다. 사실 뿌연 것이 눈앞만은 아니었다. 머릿속도 마치 안개라도 낀 것처럼 멍했다. 단순히 입맞춤 때문만은 아니었다. 리 샤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패기覇氣가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응, 응.
입을 맞댄 채 화수가 목으로 울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아직 화수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몇 번 더 혀를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자 무릎이 벌벌 떨렸다. 도망치려던 것은 아니지만 몸이 자꾸만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몸을 리 샤오가 쫓아온다. 체중을 실어 미는 힘에 결국 몸이 뒤로 넘어갔다.
힉.
말 그대로 몸이 뒤로 쑥 넘어가는 느낌에 화수가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겁을 집어먹은 것이 무색하게도 푹신하게 깔아놓은 요에 몸이 푹, 파묻혔다. 떨어지지 않은 입술은 이불 위에서도 여전히 붙어 있었다.
말 그대로 집요한 입맞춤. 그 이유를 화수는 알고 있었다. 화수의 눈이 가라앉는다.
“생각이 바뀌었어. 지금부터 각인을 할 거야.”
정말로 리 샤오는 각인을 할 생각이었다.
뭔가 또 제가 기분을 상하게 했겠지. 화수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사실 화수에게 사내의 비위를 맞추는 건 쉬운 일이었다. 물론 단 한 사람만 빼고.
이상하게 눈앞의 사내만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모르겠는 건 저 스스로였다. 무시당하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았던 제가 리 샤오에게 무시당하면 진심으로 화가 났다. 심지어 돌아보게 하고 싶어서 일부러 거슬리는 행동을 했다가, 그래놓고 기분 상한 기색이라도 읽으면 그게 또 견딜 수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제가 생각해도 뭐 어쩌라는 건가 싶을 만큼 제멋대로인 마음. 그러니 리 샤오가 저만 보면 질색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각인이라니.
제게는 선택조차 불가능한 일이, 리 샤오에게는 고작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해버릴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그렇게 좆같을 수가 없었다.
다시금 그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 역시 조금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그걸 아는 이가 자신뿐이라는 정도. 그렇다고 좆같은 기분이 나아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나마 자존심은 지켜 다행이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선명해진 시야에 새까만 눈동자가 들어왔다. 그제서야 화수는 집요하던 입맞춤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기가 입안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헐떡이는 화수를 길고 서늘한 눈이 가만히 응시한다.
“이 조그만 머리통으로.”
허공을 부유하던 눈의 초점이 선명해졌다. 시선이 마주쳤다. 언제라도 제 머리통을 꿰뚫을 듯한 서늘한 시선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헐떡이던 화수가 겨우 대답을 내놓았지만 리 샤오의 날카로운 시선은 물러가지 않는다. 뭔가를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역시나. 귀신같은 사내였다. 이쯤 되면 제가 아무리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화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화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저, 헛수고는 그만두시는 게 좋을 텐데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리 샤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굳이 각인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리 샤오는 단박에 화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화수가 의도한 대로.
“싫어하는 상대와 각인이 될 리는 없으니까요.”
“…….”
기분을 좋게 하는 건 몰라도 리 샤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화수의 자신감을 증명하듯 마주한 리 샤오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일어났다. 그런 눈을 보면서도 화수는 태연히 눈꼬리를 접었다. 이미 화수는 가면을 뒤집어쓴 상태였다. 가면만 뒤집어쓰고 있으면 누구에게도 상처받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화수는 몰랐다.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가면이 진짜 상처 입을 것 같을 때 튀어나오는 마지막 보루 같은 거라는 사실을. 그 가면이 부서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화수는 알지 못했다.
“그건 그렇지.”
“…….”
리 샤오가 나직이 되뇌었다. 자신의 말을 인정하듯 되뇌는 그 말에 정작 상처 입은 것은 화수였다. 싫은 사람. 그 단어가 순간 가슴에 와서 박혔다. 하지만 화수는 가만히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도 눈치챌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리 샤오가 제 말을 인정했다는 거였다. 그러니 당연히 이쯤에서 끝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화수 역시 리 샤오에게 대해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리 샤오 역시도 자신에게 그런 면이 있음을 알지 못했으니, 화수가 모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리 샤오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 이미 식은 것이라고 생각한 화수가 슬그머니 깔린 몸을 빼려고 했을 때였다. 마치 짐승이 두 발로 먹잇감을 눌러 잡듯 리 샤오가 화수의 가슴을 꾹, 눌렀다. 그러고는 상체를 숙여 바싹 다가왔다.
“그거 알아?”
“…….”
“의외로 인간의 정신은 약해빠져서, 몸으로 느끼는 쾌락도 사랑이라고 생각해버리거든.”
그제야 화수는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리 샤오의 무표정하던 얼굴은 흥이 식어서가 아니라 미친 듯이 치미는 화를 누르느라 그런 것이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물론 미리 알았다고 해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만. 그게 화수였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비굴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마 화수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멍청하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잘 버텨봐.”
화수의 눈이 공포로 일그러진 모습을 본 리 샤오가 기쁜 듯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난 싫어서 미치겠는 사람들끼리도 몸만 맞으면 각인을 할 수 있는지 한번 확인해봐야겠으니까.”
음산하게 속삭이는 리 샤오의 목소리에 웃음기라고는 한 톨도 찾을 수가 없었다.
콱. 윗입술을 깨물렸다. 아프진 않았지만 분명한 의도가 담긴 행위였다. 하지만 몸을 움츠린 화수와 달리 리 샤오는 애초에 이걸로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는 듯 미련 없이 깨물었던 입술을 이번엔 쭉 빨았다.
윗입술을 빨던 입술이 이번엔 화수의 코끝으로 올라왔다. 버선코처럼 선이 고운 코끝을 살짝살짝 깨물며 콧잔등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번엔 다시 화수의 눈꺼풀. 긴장감으로 굳어 있는 얇은 살갗을 솜털처럼 가볍게 눌러 입을 맞춘다.
“긴장 풀어.”
속삭이는 숨결이 속눈썹으로 느껴졌다. 이어지는 느릿한 입맞춤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오히려 아프게 삽입될 때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화수가 비단 홑겹을 꽉 움켜잡았다. 새하얀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언제까지, 물고 빨고만 하실 겁니까.”
어금니를 꽉 깨물었던 화수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멈칫했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움켜쥔 이불 홑겹은 여전히 놓지 못한 채였다.
“저는 겨우 이런 걸로는 못 느낍니다.”
“…….”
도발을 하면 좋을 것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차라리 아픈 쪽이 나았다. 이런 것은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뒷구멍으로만 느끼는 몸이라서요.”
“…….”
“그러니까-”
하지만 마저 지껄이려는 화수의 입을 리 샤오가 손으로 막았다. 단단한 손이 화수의 얼굴의 반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특별히 힘을 주어 틀어 막지 않아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화수를 내려다보면서 리 샤오가 느릿하게 중얼거린다.
“지금까지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줬으니, 이번엔 내 차례야.”
대체 언제 제가 원하는 대로 했었다는 건지,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훅, 하고 뿜어져 나오는 패기覇氣를 맡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그가 뿜어낸 붕鵬의 패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이것을 맡고서야 알았다. 조금 전까지 뿜어낸 패기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그의 패기로 가득 찬 방 안 공기가 말 그대로 비가 내리기 직전의 공기처럼 눅진거렸다. 그 공기를 맡을 때마다 아랫배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분명 벌어진 입으로 크게 숨을 들이쉬고 있는데도 화수는 헐떡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점점 그가 뿜어내는 패기에 온몸이 잠식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쉽게 갈 수도 있어.”
그런 화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마 정신이 혼미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를 내려다보는 리 샤오의 눈빛이 괴로워 보일 리 없을 테니까.
“나도 힘으로 이러는 건 내키지 않거든.”
달래듯 속삭이는 말투가 달콤했다. 하지만 그 달콤한 목소리만큼이나 달콤한 향도 짙어졌다. 고개를 끄덕이라고. 나에게 굴복하라고. 사냥한 포식자가 협박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그럼 편해질 텐데. 그런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고집이라고 해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에게 굴복하는 순간 버티고 있던 제 모든 것이 그대로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싫어.”
머리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녹아버리면 좋을 텐데. 그럼 그땐 고개를 끄덕여버릴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이성이 남아 있었다.
“쉬운 건, 체질에, 안 맞아서요.”
“…….”
온몸을 벌벌 떨면서도, 숨을 헐떡이면서도 고집을 부리는 화수를 리 샤오가 가만히 응시했다. 패기가 더 짙어진다. 벌벌 떨던 몸이 이번엔 거의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그럼에도 화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고집이 세네, 우리 화수는.”
리 샤오가 피식, 하고 웃었다. 기가 막히긴 했지만 사실 화수가 그리 쉽게 항복하지 않으리라고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 빌어먹을 곤鯤 주제에. 녀석만큼 겁이 없는 이는 붕鵬 중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뭐, 이 정도로 나가떨어지면 재미가 없긴 하지.”
이대로 뇌가 터지지 않을까 싶었을 쯤, 온몸을 짓누르던 패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허억. 허억. 허억.”
화수가 조금 전보다 더 거칠게 헐떡인다. 사실 물속에 잠겨 있을 때보다 물 밖으로 나왔을 때가 훨씬 더 숨이 찬 법이니까. 물 밖으로 끌어내진 물고기처럼 헐떡이는 화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끌어 올렸다. 허벅지가 벌어졌다.
하지만 화수는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물론 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는 못했다는 말이 더 맞았지만. 할 수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봐주는 것은 조금 전까지였음을 화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괴로워 죽을 것 같은 줄 알았는데.”
그곳을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묘하게 찌푸려진 것에 화수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자신의 사타구니를 보는 화수의 시선도 리 샤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잘만 서네.”
그도 그럴게 믿을 수 없게도 제 것이 반쯤 고개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가 막혀하는 리 샤오와는 달리 화수가 놀란 것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한동안 내내 서지 않길래 결국 망가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거짓말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진 사장의 아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기대를 말 그대로 산산이 부서트리는 증거를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기분이 복잡했다.
“왜. 싫어 죽겠는 사내의 손에 선 것이 그리 놀라워?”
하지만 그런 화수의 복잡한 표정을 리 샤오는 다르게 오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쩌지.”
“…….”
“진짜 놀랄 일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나직한 말과 동시에 리 샤오가 화수의 것을 쥐었다. 힉, 하고 숨을 들이켠 화수가 허벅지를 오므렸지만 사실 소용은 없었다. 리 샤오가 한쪽 발목을 화수의 가슴까지 밀었다. 뒤따라가려는 다른 다리는 무릎으로 눌렀다. 그리고 뒤로 빠지는 사타구니를 그대로 붙들었다.
“히-익.”
화수가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콱, 아프게 움켜쥐리라는 생각과 달리 그것을 움켜쥔 손은 다정했다.
“말했을 텐데. 이번엔 내 방식대로라고.”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어떤 말보다도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화수였다.
끙.
이를 악물었지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채였지만 벌게진 기색을 숨기기엔 무리였다. 애초에 목덜미며 벌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까지 벌게진 상태에서 얼굴을 가린다는 게 큰 의미는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화수라도 아래를 애무당하고 있는 상황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것도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완전히 발기한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게다가 사실 리 샤오가 손으로 만져주기 전부터 화수의 것은 완전히 선 채 점성이 있는 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슥슥.
거친 손바닥이 기둥을 쥐고 흔들었다. 퍼드득, 손바닥 안에서 발기한 살덩이가 튀어 올랐다. 그리 세게 쥐지도 않았고 오히려 느릿한 움직임이었지만 사실 그 느릿한 움직임이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가만히 기다렸다가 다시 슥슥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나직이 뇌까린다.
“가고 싶으면 가.”
오싹.
나직하게 내뱉는 목소리가 이렇게 야해도 되는 건가. 말 그대로 사람 뇌를 눅진하게 녹이는 목소리.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화수의 것은 조금 전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자극을 받았다는 증명을 하듯 통통하게 부푼 귀두가 축축하게 젖었다.
빙글.
기둥을 쥔 리 샤오가 손가락을 세워 가운데를 빙글인다. 이미 잔뜩 젖은 입구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그러는 바람에 손톱에 귀두 부분이 살짝 긁혔다.
힉.
신음도 내지 못하고 화수가 그대로 몸을 움츠렸다. 엉덩이가 바싹 올라붙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정은 하지 못했다. 이미 동그랗게 올라붙은 배가 다시 한 번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저릿저릿한 손과 발은 쥐가 날 지경이었다.
“내 손으로는 가기 싫다?”
“…….”
화수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풀었다. 내려다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화수의 가슴이 잘게 들썩였다. 헐떡이는 숨을 겨우 내리누르며 입술을 뗐다.
“원래, 앞만으로는, 잘 못 갑니다.”
“…….”
살짝 찌푸려지는 눈매를 본 화수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뒤를 넣어주셔야, 갈 수 있습니다.”
“…….”
유혹처럼 들렸을까. 내뱉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리 샤오의 표정은 크게 기분이 상한 기색이 없었다. 대신 허벅지를 벌리고 있던 또 다른 손이 좀 더 깊숙한 곳까지 침입했을 뿐.
흠칫.
손가락이 엉덩이골 사이, 주름진 구멍을 더듬는다. 굵은 손가락이 주름에 닿자 입구가 꽉 오므라졌다. 하지만 침입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느긋하게 주변을 빙글인다. 손가락 끝의 동그란 살 부분으로 꽉 다물린 주름을 더듬다가, 손가락을 세워 가운데 작은 홈을 찔렀다. 살짝 느슨해졌던 주름이 다시 한 번 확 조여들었다.
흠칫, 흠칫.
그리 몇 번을 반복하던 손가락을 조여든 구멍이 살짝 느슨해지는 순간 뿌리에 힘을 주어 밀어 넣었다. 버티던 것이 무색하게도 입구는 단숨에 손가락 두 마디를 삼켰다. 물론 삼킨 손가락을 잘라버릴 기세로 꽉꽉 조여댔지만 리 샤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으-응.”
이번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화수의 것을 꽉 움켜쥐었다가 놓으면서 다시 손가락을 더 깊이 집어넣는다. 처음엔 자극에 오므라들지만 결국 다시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한 시간차 공격이었다. 굵은 손가락 하나가 모두 안으로 사라졌다.
쫀득한 내벽이 손가락을 꽉꽉 물어댔지만 리 샤오는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달라붙는 내벽을 떨어트리고 길이 나도록. 화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아랫입처럼.
“아, ……아.”
몇 번 내벽을 떨치듯 빙글거리던 손가락이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 샤오의 물건만큼은 아니지만 아래가 꿰뚫리는 생생한 느낌에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앞뒤가 모두 붙잡힌 아래는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나마 비교적 자유로운 고개를 모로 꺾었다. 드러난 목덜미가 벌겠다.
“…응, ……으응-”
살살 잘게 들락이던 손가락이 점점 그 깊이를 더했다. 마디 하나가, 그다음엔 두 개, 그리고 마지막엔 끝까지 뺐다가 마디 세 개가 한 번에 밀고 들어왔다. 안이 가득 찼다. 굵고 긴 손가락의 모양대로 내벽이 달라붙었다.
쯔윽.
달라붙는 내벽을 떨어트리며 다시 한 번 손가락이 뒤로 빠졌다. 아예 끝까지 빠져나가버리자 조이던 입구가 개폐운동을 하듯 벌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손가락이 푹, 들어왔다.
“힉.”
아프지는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몸 안으로 불쑥 뭔가가 침입해오는 감각에 화수가 숨을 삼키며 엉덩이를 조였다. 물론 별 소용은 없었다. 이미 마디 끝까지 들어온 손가락은 오히려 조이는 내벽에 더 안쪽으로 빨려 들어왔다.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안이 벌어진다. 구부린 손가락이 안을 문지른다. 안쪽에 공간이 생기는 감각이 생생했다. 벌어진 채 허공에 들린 허벅지가 벌벌 경련했다. 화수의 성기 끄트머리에서 하얀 액이 질질 새어 나왔다. 손가락이 다시 뒤로 빠졌다. 아래가 비는 느낌에 화수가 급히 입구를 조였지만 리 샤오는 매정하게 손가락을 잡아 뺐다. 물론 그런 리 샤오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 있었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화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보채지 마.”
보채지 않아도 줄 테니까. 나직이 경고한 리 샤오가 이번엔 화수의 성기 끝에서 줄줄 흘러내린 액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물론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손가락 끝과 뒤 입구를 적시기엔 충분했다. 끈적한 액이 입구의 주름을 적셨다. 붉게 달아오른 입구가 젖어 번들거렸다. 그곳에 손가락 두 개가 닿았다. 입구를 적신 덕에 손가락 두 개는 조금 전 하나를 넣었을 때보다 훨씬 쉽게 침입했다. 아래가 빠듯하게 차는 느낌에 화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슥슥슥.
리 샤오가 다시 화수의 것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 뺐다. 그렇게 뺀 손가락을 다시 끝까지 집어넣는다. 그러면서 화수의 것을 쥔 손의 엄지손가락으로 귀두 끄트머리를 문지르자 안이 확 오그라들었다.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앞과 뒤가 동시에 공략당하니 자극이 엄청났다. 꽉 감은 눈앞으로 물기가 차올랐다.
“으으.”
쯕, 쯕, 쯕, 쫀득한 살덩이가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그것을 잡아 뺄 때마다 쯔윽, 하고 살덩이가 딸려 나갔다. 화수의 허벅지가 벌벌 떨렸다. 손가락이 각도를 달리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락인다. 푹, 푹, 푹, 손가락이 들락일 때마다 안에서 나는 젖은 소리가 점점 짙어졌다. 내벽이 단단하게 길을 내고 있었다. 엉덩이가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아, ……아.”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눈앞이 뿌옜다. 화수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밭은 숨만 쏟아졌다. 슥슥슥, 살갗이 문질러지는 소리가 빨라졌다. 아랫배가 올라붙었다. 엉덩이 안쪽이 묵직했다. 불쑥 눈앞이 쑥 꺼지는 느낌에 화수가 비단 이불을 움켜쥐었다.
토정이었다.
“진하군.”
잔뜩 싸놓은 정액을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짧은 감상을 남겼다.
“꼭 오랜만에 싸는 사람처럼.”
“…….”
미간을 찌푸리려던 순간 덧붙여진 리 샤오의 말에 화수는 그대로 굳었다. 물론 당연히 뭘 알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의외로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사정감으로 헐떡이는 화수에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하기는 일렀다. 이미 쪼그라든 화수의 것을 툭, 하고 내던지며 리 샤오가 덧붙였다.
“뭐, 곧 묽어지겠지만.”
물론 무슨 뜻이냐고 물을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하지만 저절로 눈매가 살짝 일그러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스윽.
그러거나 말거나 무릎으로 선 리 샤오가 자신의 허리끈을 풀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리 샤오의 시선은 화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눈을 떼면 눈앞의 사내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툭. 허리끈을 푼 리 샤오가 침의를 젖혀 벗었다. 옷이 떨어진 곳은 푹신한 이불 위였음에도 그 소리가 꼭 천둥소리 같았다. 방 안이 지나치게 적막한 탓이었다. 소리가 들릴까 침을 삼키는 것조차 신경이 쓰였다. 물론 신경을 쓰는 건 화수뿐이겠지만.
태연히 손을 뻗은 리 샤오가 이번엔 화수의 허리끈을 풀었다. 사실 이미 침의의 앞섶은 다 벌어져 있고 허리에 허리끈만 묶여 있는 꼴이라 큰 의미는 없어 보였지만 어쨌든. 매듭을 지어놓은 허리끈을 풀자 그나마 몸에 걸쳐져 있던 침의가 아예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나신이 드러났다. 아직 사정감이 남은 몸 여기저기가 울긋불긋했다. 리 샤오의 손이 화수의 이마에 닿았다.
길고 유려한 손이 화수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손바닥 아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리 샤오는 손을 물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마를 쓸어 올린 손가락으로 천천히 콧잔등을 쓸어내렸다. 코끝, 윗입술, 아랫입술, 그리고 턱. 마치 솜털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가벼운 손길이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손길이 화수는 이상하게 견디기가 힘들었다. 숨 쉬는 걸 잊은 듯이 자꾸만 숨이 멎었다.
천천히 목을 타고 내려온 손이 화수의 가슴을 쓸어내린다. 부드럽게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이 작은 돌기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존재감이 없던 돌기를 엄지손가락으로 몇 번 빙글이자 돌기가 꼿꼿하게 섰다. 검지를 더해 존재감이 확실해진 젖꼭지를 잡아 비틀었다.
“읏-”
순간 찌릿하고 아랫배를 관통하는 둔통에 화수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둥글게 굴렸다. 목덜미의 솜털이 다 서는 기분이었다.
“이런 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이번엔 아예 고개를 숙이는 리 샤오에 화수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밑도 젖었고.”
“알아.”
변명처럼 덧붙이는 화수를 향해 리 샤오도 입을 열었다.
“넌 이런 거 질색하지.”
“…….”
“하지만 이젠 내 방식에 익숙해지는 편이 좋을 거야.”
그렇게 덧붙인 리 샤오가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듯 화수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억지로 움켜쥐어도 겨우 한 줌도 되지 않는 가슴을 그러쥐고 입을 가져다 댔다.
으읏.
그대로 가슴을 빨렸다. 젖이라도 빨듯 가슴을 쭉쭉 빠는 리 샤오에 화수가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다 가슴을 깨물렸다.
“힉.”
경고의 의미로 문 것이라 자국이 남을 만큼은 아니지만 얇은 피부에 이가 긁히는 감각이 섬뜩해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젖은 살덩이가 바짝 선 젖꼭지를 핥아 올렸다. 지금처럼 얌전히 있으면 조금 전처럼 아플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듯, 다정하게 돌기를 빙글이던 리 샤오가 다시 그것을 쭉, 빨았다.
“으, 아. ……응.”
등줄기를 따라 찌릿한 감각이 내달렸다. 아랫배가 동그랗게 올라붙었다. 허벅지 안쪽이 근질근질했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화수가 요를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으면 리 샤오의 어깨를 밀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쯕, 젖은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화수의 입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리 샤오가 헐떡이는 화수의 발목을 붙잡았다. 붙잡은 다리를 양쪽으로 활짝 벌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대로 삽입하려는 것인 줄 알았던 터라 화수의 반응이 늦었다. 뭣보다 리 샤오가 입으로 제 것을 무는 장면을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컸다.
“뭐 하는- 읏-!”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뜨거운 입이 제 것을 문 뒤였다. 멍한 머리와 달리 몸은 솔직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눈을 감았던 화수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안 돼, 읏, 으, ……읏.”
화수가 두 손으로 리 샤오의 어깨를 밀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거니와 심지어 이렇게 아래를 빨리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가슴을 빨렸을 때 반쯤 서 있던 것이 어느새 완전히 다시 발기한 상태였다.
“그, 만……읏, 안,……읏.”
화수가 헐떡이며 애원했다. 하지만 리 샤오는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반항하지 못하도록 허공에 뜬 발목을 꽉 움켜쥔 리 샤오가 그대로 화수의 것을 삼켰다 뺐다를 반복했다. 붙잡고 있는 발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리 샤오는 아예 오므리려는 다리를 위로 접어 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혀로 화수의 귀두를 비볐다.
“아, 으.”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리 샤오는 더 강하게 빨고, 앞뒤로 고개를 움직였다. 움찔움찔, 붙잡힌 발목이 경련했다.
“그만, 제발, 안 돼. 아. 으. 으.”
화수가 헐떡이면서 애원했다.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눈앞이 다시 한 번 쑥 꺼졌다.
두 번째 토정이었다. 심지어 조금 전에 비하면 거의 몇 번 흔들었을 뿐인데 바로 가버렸다. 물론 이번엔 손이 아닌 입으로 해줬다는 점이 달랐지만.
“이번엔 뒤로 안 쑤셔줘도 쌌네.”
여상한 말투만 봐서는 방금 제 것을 빨고, 입으로 정액을 받아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걱정 마. 이번엔 쑤셔줄 테니까.”
리 샤오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이번엔 화수의 허벅지 사이로 몸을 끼웠다. 화수의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했다. 그런 허벅지를 리 샤오가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흠칫, 하고 떨던 화수가 리 샤오의 손을 붙잡았다.
“이런 건, 싫습니다.”
사정감으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화수가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이런 건-”
“기억에 남겠지.”
“…….”
“네 몸 구석구석에.”
그 말을 듣고서야 화수도 제가 막연히 느끼던 불안감이 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다시는 감히 다른 새끼한테는 다리 벌리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하게.”
“…….”
“내 냄새만 맡아도 구멍이 벌렁벌렁거리는 몸으로 만들어놓을 거거든.
머리가 안 된다면 몸에 새기면 되겠지.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리 샤오의 말에 화수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싫어.”
도리질하던 화수가 몸을 뒤로 물렸다. 물론 어디로 도망치겠다, 라는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진짜 도망을 치겠다고 생각했으면 리 샤오를 앞에 두고 도망치는 일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화수도 어쩔 수 없었다.
도망치고 싶다. 아니, 도망쳐야 한다. 그 생각 말고는 지금 화수의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주춤주춤 엉덩이로 뒷걸음질 치던 화수가 이내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짐승처럼 네발로 기었다.
바로 앞에 장지문이 보였다. 화수가 손을 내뻗었다. 물론 그 문을 열고 나간다고 해도 또 다른 문을, 그리고 수많은 문들을 통과해야 했지만 그래도 화수는 손을 내뻗었다. 손끝에 장지문이 살짝 닿았으나 거기까지였다.
덥석.
발목을 붙잡은 손이 그대로 화수의 몸을 당겼다. 몸에 힘을 주어 버텼지만 속수무책으로 질질 끌려갔다. 버둥거리는 화수의 몸을 꽉 붙잡고 리 샤오가 그의 두 다리를 벌렸다. 엉덩이골에 데일 듯 뜨거운 살덩이가 닿았다.
“시, 싫-”
리 샤오가 반항하는 화수의 머리를 그대로 바닥에 눌렀다. 얼굴이 바닥에 눌러져 하려던 말이 그대로 입안으로 삼켜졌다. 그리고 동시에 숨을 쉴 수도 없어졌다.
“쉬.”
버둥대는 화수의 머리를 더 꾹 누르면서 리 샤오가 말했다.
“화수야.”
지금 제 머리를 누르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한 번만 더 싫다는 말 지껄여봐.”
하지만 그 목소리가 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땐 나도 내가 너를 어떻게 할지 장담 못 하니까.”
물론 그것을 확인해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으, 으.
굵은 귀두가 아래를 벌리며 들어온다. 화수의 벌어진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이 이불에 눌린 탓에 제대로 소리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좁은 안을 벌리고 들어오는 단단한 귀두에 내벽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밀고 들어오는 힘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살덩이가 천천히, 좁은 길을 벌리면서 밀고 들어왔다. 달라붙었던 내벽이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달라붙는 것이 생생했다.
들어오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더 그랬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화수가 바닥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부드러운 천이 손안에서 서걱였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부서졌다. 엉덩이만 들린 자세 때문인지 배 속이 더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쯔윽.
끝까지 들어왔던 성기가 뒤로 빠진다. 느릿한 움직임에 달라붙었던 살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느렸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화수가 움켜쥔 이불을 더 움켜쥐었다. 화수의 엉덩이에 동그란 보조개가 생겼다.
귀두가 보일 때까지 잡아 뺐던 리 샤오가 다시 허리를 밀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엉덩이를 벌리며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안을 파고들었다.
“아으, 으.”
화수가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앞으로 조금 뺐다. 곧바로 묵직한 손이 화수의 등을 콱, 눌렀다. 이미 자리를 잡은 귀두는 쉬지 않고 안을 벌리고 들어왔다.
“읏, 으.”
일부러인 것이 분명한 느린 움직임. 화수의 허벅지가 벌벌 떨렸다. 끝까지 제 성기를 밀어 넣은 리 샤오가 크게 허리를 궁글렸다.
-!
이번엔 소리도 내지 못했다. 진저리를 치면서 이마를 비비고 있으려니 내벽을 떼어내고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이번엔 빠르게 들어올까, 기대한 것과는 달리 들어오는 속도는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느렸다. 숨을 언제 쉬고, 언제 참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들이켜기만 했던 숨을 내쉬는 순간, 뒤로 빠졌던 허리가 푹, 하고 안을 파고들었다.
“히익……!”
뭉툭한 귀두가 이번엔 다른 각도로 내벽을 죽, 긁어 내렸다. 안이 확 오그라들었다. 그 자극에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던 살덩이도 꿈틀거렸다.
“하아.”
바로 등 뒤에서 밭은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멈췄던 허리가 다시 뒤로 빠졌다.
“아응-!”
슥, 나갔다가 다시 꾸욱, 하고 천천히 밀고 들어온다.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매번 다른 각도로, 단단한 끄트머리가 느릿하게 내벽을 긁어 올린다.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뜨거운 불기둥은 태연히 안을 헤집었다.
아, 으. 으.
발가락이 저릿저릿했다. 점점 내벽이 살덩이를 물었다 놓는 강도가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흐물흐물해진 내벽은 젖고 있었다.
리 샤오가 붙잡고 있던 화수의 허리를 놓고 상체를 숙였다. 화수의 머리 양옆을 손으로 짚고 그대로 허리를 밀었다. 이제는 굳이 잡아 벌리지 않아도 힘을 주어 밀면 그대로 제 것을 삼켰다. 고집을 피우는 윗입과는 달리 아랫입은 솔직했다.
새하얀 등줄기에 진땀이 잔뜩 배어났다. 리 샤오가 고개를 숙여 옴폭 파인 등을 혀로 핥아 올렸다.
“흣.”
화수가 얕은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움츠렸다. 도망치듯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몸을 리 샤오가 바싹 쫓았다. 도망치는 먹잇감을 보면 쫓는 것이 맹수의 본능이었다.
“윽.”
콱, 이를 세워 어깨를 물었다. 제 것을 물고 있던 안도 확 조여들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지만 저를 밀어내려는 몸짓 같아 리 샤오는 반쯤 빠진 제 것을 그대로 끝까지 박아 넣었다.
“아읏-!”
화수의 엉덩이가 아래로 푹 꺼졌다. 하지만 리 샤오도 꺼지는 몸을 따라 그대로 허리를 내렸다. 체중을 실어 조금 전 보다 더 깊은 곳을 찔렀다. 심지어 조금 전과 각도도 달랐다.
“아으으…….”
엉덩이를 내린 자세 탓에 안이 좁아졌다. 하지만 체중을 실어 내리자 들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안이 진득했다. 끊는 물속 같았다. 이렇게 야해빠진 몸은 본 적이 없었다.
조금 전 물었던 곳을 혀로 핥아 올렸다. 꽤 사정 따위 봐주지 않고 물었던 탓에 선명하게 잇자국이 남은 살갗을 달래듯 혀로 핥아주었지만 이번 통증을 기억하고 있는 몸은 흠칫, 거리며 긴장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차라리 건방진 소리를 해대는 것보다는 무서워하는 쪽이 나았다.
혀로 핥아주던 리 샤오가 이를 세웠다. 딱딱한 질감에 아래 깔린 몸이 다시금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등허리를 긁어 내리는 리 샤오의 입꼬리가 살풋 올라가 있었다. 물론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스윽.
도드라진 견갑골을 이로 긁는다.
“힉.”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리 샤오의 눈꼬리가 기름해졌다. 긁던 이를 세워 이번엔 조금 세게 물자 몸이 퍼드득, 튀어 올랐다. 아래가 다시 한 번 조여들었다. 리 샤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화수의 아래가 제 것을 한 치의 틈도 없이 쫀득하게 감싸며 매달리는 것이 기분 좋았다.
“아으. 으.”
부들부들 떠는 화수의 손가락 위로 리 샤오가 손을 겹쳤다. 그리고 허리를 뒤로 잡아 뺐다가 한 번에 박아 넣었다.
“히익…….”
퍽. 엉덩이를 두들겨 맞는 것 같은 둔통. 이번에도 천천히 밀고 들어오리라고 예상했다가 단번에 꿰뚫리자 화수의 몸이 마치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다.
“아, 아. 으.”
굵고 긴 기둥이 몇 번이고 안을 꿰뚫는다. 푹, 푹, 거칠게 쑤시다가 다시 천천히, 그랬다가 다시 빠르게 들락인다. 죽죽, 뭉툭한 귀두가 내벽을 마구 긁어 올렸다. 박자가 엉망이었다. 안 그래도 엉망이던 숨이 더 엉켜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깊은 물속에 잠겨 숨을 쉴 수 없는 것마냥. 리 샤오와의 색사는 늘 그랬다. 늘 숨이 찼다. 발아래 있다고 생각했던 물이 잠깐 방심한 사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말 그대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것이 화수는 조금 무서웠다.
물론 그런 주인의 혼란과는 별개로 몸은 어느 때보다도 착실하게 반응하고 있었지만.
“아, 아, 아, 아…….”
굵은 기둥이 길을 벌리고 짓이긴다. 깊은 곳을 마구 긁어 올리고 빠져나간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물론 들락이는 엉덩이 안쪽은 더 젖어 있었다. 마치 물이 차오르기라도 하듯 척척했다.
“흣, 으. ……읏.”
리 샤오가 화수의 다리를 더 벌렸다. 그리고 허리를 쳐올렸다.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던 각도가 아래서 위로 쳐올리는 각도로 바뀌었다. 벌어진 입구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쳐올리는 힘에 몸이 위로 밀렸다. 하지만 겹쳐놓은 리 샤오의 손이 화수가 밀리는 것을 막았다.
“읏, 으, 으!”
푹, 푹, 푹, 굵고 긴 기둥이 안을 마구 쑤셨다.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바르작거리는 화수의 손가락에 리 샤오가 깍지를 꼈다. 화수가 눈을 감았다. 그 다정한 손길이 단순히 애틋한 감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질색하니 다정하게 구는 것뿐이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잘게 떨리는 심장을 어쩌지 못해서 화수는 눈을 감았다.
“힉! 익……! 아. 으.”
얕고, 깊게, 깊고 얕게, 들락이는 박자가 엉켰다. 바닥을 디딘 발가락이 저릿저릿했다. 벌어진 허벅지 안쪽이 벌벌 떨렸다. 바닥을 짚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절로 리 샤오의 손을 꽉 움켜쥔 것이 되었다.
-!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믿을 수 없게도 안쪽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부피를 부풀렸기 때문이다. 더 커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경악할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곧바로 거친 허릿짓이 시작되었으므로.
푹, 푹, 푹,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거친 움직임이었다. 물론 아프진 않았지만 아래가 빠듯하게 차는 감각이 기묘했다. 찌꺽찌꺽, 잔뜩 젖은 입구에서 젖은 소리가 났다. 숨이 엉켰다.
“으, 아. 아.”
퍽, 퍽, 퍽, 퍽, 엉덩이를 맞으면서 동시에 안을 쑤셔지고 있었다. 배가 아픈 건지 엉덩이가 아픈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벌써 두 번이나 간 제 것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는 사실. 스스로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분명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고개를 든 끄트머리가 이불에 쓸리고 있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배꼽 아래가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불량품인 몸뚱이가 이젠 진짜 망가진 모양이다, 라고 생각했을 뿐.
“응, 아-읏…….”
달큰한 향이 진동했다. 그 향에 머리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흔들리고 신음하고 하는 것 말고는.
빠졌던 성기가 한 번에 박혀 들어왔다. 들어오기 무섭게 다시 뒤로 빠졌다. 빠듯하게 달라붙었던 내벽이 뽑혀 나갈 듯 딸려 나갔다.
“힉. 힉.”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본능적으로 아랫도리를 이불에 비볐다. 끄트머리에서 어느새 정액이 찔끔찔끔 새고 있었다. 질척해진 탓에 마찰이 더 커졌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발가락이 저릿저릿했다.
“아-으.”
새빨개진 화수의 등이 꿈틀거렸다. 그것을 감상하며 리 샤오가 화수의 안을 한 번 더 깊이 꿰뚫었다. 화수가 숨찬 짐승처럼 헐떡였다. 그때 리 샤오의 허리가 뒤로 빠졌다. 두려우면서도 기대감으로 몸이 부풀었다. 그런데 당연히 다시 들어오리라고 생각했던 기둥이 그대로 빠져서 들어오질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몰라 굳어 있는데 순간 몸이 휙, 뒤집혔다.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하고서야 리 샤오가 제 몸을 뒤집었다는 걸 깨달았다. 발목을 감싼 손이 불덩이 같았다.
“가고 싶어?”
새빨개진 제 성기가 투명한 액이 줄줄 흘리고 있는 광경을 뻔히 보면서도 리 샤오가 물었다. 일부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화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숨을 헐떡이느라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어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분명 제발 가게 해달라고 빌었을 테니까.
“벌어져 있네.”
붙잡고 있던 발목을 벌리며 살짝 다리를 위로 올리자 조금 전까지 리 샤오의 것을 물고 있던 입구가 드러났다. 잔뜩 벌어졌던 입구가 다 다물리지 못하고 뻐끔거리고 있었다.
“내리지 마.”
양 발목을 붙잡고 있던 두 손 중 오른손을 내려 구멍을 더듬었다. 뻐끔거리던 구멍이 확 조여들었지만 리 샤오가 한발 빨랐다. 가운뎃손가락이 이미 자리를 잡았다. 그 손가락에 내벽이 달라붙었지만 확실히 조이는 것이 달랐다. 더 커다란 것에 익숙해진 몸은 손가락 하나로는 만족을 하지 못했다.
“여기 좋아하지?”
하지만 오물거리면서 빨아대는 내벽을 다 알면서도 리 샤오는 손가락으로 안을 문질렀다. 깊숙이 넣은 손가락을 구부려 화수가 좋아하는 곳을 문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손가락으로 안을 긁어주어도 화수의 것은 부들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기운을 잃고 쪼그라들고 있었다.
“왜. 못 가겠어?”
화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쪼그라들어버린 것과는 별개로 사정 직전에 강제로 멈춰진 몸은 말 그대로 불덩이 같았다. 그야말로 미칠 것 같은 기분.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화수에게 리 샤오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말해.”
“…….”
“구체적으로.”
낮게 깔린 명령에 등줄기가 찌릿했다. 리 샤오의 말대로 인간의 정신은 약해빠진 것이 분명했다. 헐떡이던 화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게 해주세요.”
“…….”
아래가 들끓었다.
“손가락 말고, 리 샤오 님 것으로.”
“…….”
흐린 시야라 리 샤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라는 건 음담패설을 하라는 뜻이었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읏.”
아래 박혀 있던 손가락이 거칠게 뽑혀 나갔다. 달라붙어 있던 내벽이 뽑힐 듯 딸려 나가는 감각에 화수가 아래를 움츠렸다. 하지만 다 빠져나가리라고 생각했던 손가락이 한 마디를 남겨놓고 멈춰졌다. 그리고 아래가 옆으로 당겨졌다.
측, 민망한 소리를 내며 벌어지는 입구에 곧바로 뜨거운 살덩이가 닿았다. 그리고 곧이어 안으로 쑥, 미끄러져 들어왔다.
아으-!
화수의 목이 꺾였다. 입구를 벌리고 있던 손가락을 빼자 화수가 리 샤오의 것을 꽉꽉 물었다. 양손으로 발목을 잡아 올린 리 샤오가 허리를 뒤로 뺐다. 쑥, 하고 기둥이 길게 뽑히고 한 치의 틈도 없이 그것을 물고 있던 내벽이 주르륵, 딸려 나갔다.
참았던 숨을 내쉬기도 전에 다시 푹, 하고 박혀 들어왔다. 자세가 달라져서인지 부피가 조금 전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벌어진 허벅지 안쪽이 벌벌 떨렸다. 리 샤오의 시선은 여전히 제 것을 삼키고 있는 아랫도리에 있었다. 악취미다 싶었지만 화수는 가만히 고개를 꺾었을 뿐이다. 괜히 기분이라도 상해 빼버리면 곤란한 건 자신이었다.
슥슥슥, 이미 길이 나 있던 안은 몇 번 들락인 것만으로도 다시 단단하게 길이 났다. 질척한 마찰음이 눅진한 공기를 갈랐다. 꽉 감은 눈 밑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물론 달아오른 곳이 눈 밑만은 아니었지만.
화수의 온몸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목덜미, 가슴 같은 곳뿐만이 아니라 무릎, 손가락 끝까지 벌겠다.
“빌어먹을.”
낮은 신음과도 같은 뇌까림이 리 샤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가 무릎이 가슴에 닿을 때까지 발목을 밀었다. 반으로 접힌 화수의 몸 위로 리 샤오가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화수의 발바닥이 리 샤오의 가슴에 닿았다. 다리에 힘을 주어 밀면 밀쳐지도록. 물론 힘으로 밀어낸다고 밀쳐질 몸은 아니었지만. 게다가 아래를 꿰뚫린 상태로 힘을 줘봐야 리 샤오에게만 좋은 일이었다.
리 샤오가 화수의 머리 양옆을 짚었다. 그리고 무릎을 떼고 아예 체중을 실었다. 푹, 푹, 푹, 길쭉한 기둥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가슴을 딛고 있는 화수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하지만 요동치던 내벽이 이내 흐물흐물해진다.
흠뻑 젖은 내벽이 기분 좋았다.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 리 샤오가 고개를 좀 더 깊이 숙였다. 그리고 벌어져 있는 입술을 삼켰다. 반사적으로 닫히는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허리를 세게 밀어 올렸다. 다물리던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혀를 더 깊숙이 밀어 넣는다. 도망치는 혀를 붙잡아 제 혀를 비볐다. 야해빠진 주제에 유난히 입맞춤은 서툴렀다. 처음 할 때도 입맞춤은 필요 없다고 했었던 것을 기억해내자 기분이 좋아졌다.
젖은 살덩이를 빨았다. 제 입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을 이로 콱 깨물었다. 가슴을 미는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리 샤오가 허리를 앞으로 밀자 닿은 발바닥이 벌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물고 빨고 비비다 놓아주자마자 내빼는 혀를 따라 다시 화수의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목구멍 안까지 깊이 밀어 넣으면서 허리도 함께 밀었다. 바닥을 움켜쥐고 있던 화수의 손이 리 샤오의 팔에 매달렸다. 아마도 처음엔 밀어내려는 의도였던 것 같지만 위와 아래를 쉼 없이 공략당하다 보니 박자를 놓치고 매달리고 있었다. 손톱이 리 샤오의 팔에 박혀들었지만 리 샤오는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손이 떨어지지 않도록 더 깊고 빠르게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맞닿은 입안으로 신음이 쏟아졌다. 호흡이 엉켰다. 삼키지 못한 침이 입안에 고였다. 자꾸만 멎는 숨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대로 정말 숨이 멎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측.
축축한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화수가 헐떡이며 숨을 들이켰다. 물론 그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는 않았다.
리 샤오가 제 팔에 매달린 화수의 팔을 떼어냈다. 그리고 제 손을 끼워 깍지를 꼈다. 맞잡은 손으로 화수의 몸을 고정시키고 다시 허리를 빠르게 밀었다.
“아, 아, 아, 아, 으…….”
허릿짓이 빨라졌다. 슥슥슥, 바르작거리는 화수의 손을 꽉 붙들고 깊고 강하게 넣었다가 또 느릿하게 넣고, 다시 끝까지 넣기도 하면서, 리 샤오는 화수의 몸을 뚫고 또 뚫었다.
어느새 연결 부위에 하얀 거품이 일었다.
쳐올리는 힘에 밀려 올라갔던 몸은 붙잡힌 손 때문에 다시 아래로 끌려 내려왔다. 반동으로 귀두 끝이 점점 더 깊은 곳을 찌르고 나갔다. 리 샤오의 고환이 엉덩이 사이에 꽉꽉 눌러졌다.
“아, 잠, 잠깐, 으, 아, 아.”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화수가 도리질 쳤다. 하지만 리 샤오는 사정없이 허리를 쳐올렸다.
“왜. 내 거 넣어달라며.”
움켜쥔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퍽, 퍽, 엉덩이를 두들겨 맞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엉덩이 안쪽이 묵직해졌다. 자꾸만 아랫배가 동그랗게 뭉쳤다.
“아으으.”
자지러지는 화수의 귓불을 리 샤오가 쭉 빨았다.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었다. 리 샤오의 숨도 어느새 거칠어져 있었다. 밭은 숨결이 귓가에 맴돌았다. 숨결이 닿는 곳은 분명 귓가인데 이상하게 엉덩이 안쪽이 근질거렸다. 머리가 어떻게 돼버릴 것 같았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을 그 때. 리 샤오가 나직이 속삭였다.
“화수야.”
높낮이 없는 나직한 음성에 온몸이 오싹했다. 한 박자 뒤에야 그가 내뱉은 말이 제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몸을 숙여 귓가에 입술을 바싹 붙이고 있던 리 샤오는 보지 못했다. 귓가에 닿는 숨결이 거칠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리 샤오가 다시 한 번 화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화수야.”
아아. 마치 숨을 내쉬듯 나른하게 내뱉는 그 목소리에 화수는 눈을 감고 말았다. 이래서 싫었던 거다. 리 샤오에게는 마치 숨 쉬는 일만큼이나 쉽디쉬운 일들이 제게는 특별한 일이 되니까. 기분이 상해서, 아니면 단순한 변덕으로 한번 베푸는 친절이 화수에게는 각인처럼 박혀들었다. 그가 왜 이리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지 다 알면서도, 그럼에도 그 속삭임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다정하게 깍지 낀 손에 숨이 막혔다. 화수는 그랬다. 그래서, 싫었다.
“그만, 두세요.”
화수가 고집스럽게 입을 열었다.
불행 중 다행한 일은 리 샤오가 원하는 각인만큼은 해주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였다. 평생에 단 한 번, 단 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은 몰랐다.
기분 좋게 호를 그리고 있던 리 샤오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애초에 리 샤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는 사실도 모르는 화수로서는 내려갔는지도 깨닫지 못했지만.
“아무리 그러셔도 리 샤오 님과는 각인할 수 없습니다.”
기름해지는 눈을 보면서도 화수는 태연히 뒷말을 덧붙였다. 그나마 자신이 세울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어리석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그게 화수의 유일한 방패막이였다. 그 방패막이까지 사라지면, 그땐 정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겨우 버티고 있던 모든 것이 부서져버릴 듯했다. 그게 무서웠다. 겁이라고는 없는 화수가 처음으로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다.
리 샤오가 조금만 냉정했다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화수가 한 말이 하고 싶지 않다, 가 아닌 할 수 없다, 라는 걸. 하지만 이미 리 샤오의 기분은 확 가라앉았고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할 이성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전 기분이 지나치게 좋았던 탓이 컸다.
“그 입은 다물고 있는 게 좋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경고였다. 이쯤에서 그만두라는. 하지만 화수는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는 법을 몰랐다. 아니, 리 샤오에게만큼은 불가능했다.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무래도 리 샤오 님의 방식은 먹히지 않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
리 샤오가 낮게 웃었다. 물론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내가 너무 봐줬지.”
오싹.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이렇게 섬뜩하게 들릴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쉬운 건 체질에 안 맞는다고 했던가?”
“…….”
“직접 겪고 나서도 그런 건방진 소리를 나불댈 수 있는지 두고 보면 되겠네.”
음산하게 중얼거린 리 샤오가 반사적으로 물러서는 화수의 몸을 손으로 눌렀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리 샤오가 뿜어낸 패기覇氣가 단숨에 화수를 휘감았다. 말 그대로 온몸이 리 샤오로 가득 찬 것 같은 기분. 조금 전까지 맡았던 향은 장난이었다는 듯, 엄청난 농도의 향기가 후각을 단숨에 마비시켰다. 마치 독한 최음제를 한 움큼 털어놓은 것처럼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다음은 몸이었다.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이가 배 속을 휘젓는 감각. 말 그대로 아랫배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달아오른 열기로 온몸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힉. 익. 으아.”
그런 몸을 리 샤오가 벌리고 들어왔다. 말 그대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아래로 느끼는 자극이 너무 크면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화수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려 했다. 하지만 사실 몸은 머리의 통제를 벗어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읏으. ……읏.”
푹, 푹, 푹, 굵고 긴 기둥이 안을 파고들 때마다 머리를 꽝꽝 두들겨 맞는 것 같았다. 눈앞이 쑥 꺼졌다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자지러지는 화수의 입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신음소리를 내는 건지 울부짖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화수가 손을 내뻗었다. 자꾸만 땅속 아래로 몸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리 샤오는 화수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하지만 허리를 움직이는 것도, 패기를 내뿜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그저 손만 마주 잡아주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리 샤오도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저 겉으로만 멀쩡해 보일 뿐,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아, 아, 아. 으. 아. 응……!
리 샤오의 허릿짓이 빨라졌다. 몸에서 힘을 빼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대로 되는 것은 쏟아지는 신음 말고는 없었다. 밑이 빠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온몸을 가득 채우는 열기가 더 화수를 미치게 만들었다. 아랫배가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파고드는 살덩이가 괴로우면서도 뒤로 빠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호흡이 엉킨 지는 오래였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바짝 선 화수의 귀두 끝에서 묽은 물 같은 정액이 줄줄 흘러내렸고 감지도 않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쳤다. 말 그대로 몸 안쪽이 모두 녹아 밖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귀가 먹먹했다. 머리가 다 녹아 없어진 것처럼 멍했다. 그러다 시야에 한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
“리, ……리.”
제대로 된 단어를 내뱉지 못해 겨우 이름 중 첫 자만을 되뇌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순간 리 샤오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꽉 밀어 넣었다. 기둥이 배 속 깊은 곳을 가르고 들어왔다. 퍽, 하고 안을 가득 채우는 뜨거운 것. 멍한 머리로도 리 샤오가 사정했음을 깨달았다. 몸이 흠뻑 젖었다.
숨 쉬는 것이 조금 편해졌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눈앞이 쑥, 꺼졌다. 저절로 입이 벌어졌지만 신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웅크리는 몸을 리 샤오가 꽉 움켜쥐면서 다시 한 번 안을 휘저었다. 몸을 꽉 움켜쥔 단단한 손에 안심한 화수가 겨우 붙잡고 있던 정신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