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9/21)

08.

“애기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맥만 짚고 있는 홍 의원을 보다 못한 집사가 슬그머니 침묵을 깼다.

“애기씨는 괜찮으신가?”

그도 그럴 것이 차라리 문제가 생겼으면 생겼다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사람이 덜 불안할 텐데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몇 분을 맥만 짚고 있으니 애가 달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조용히 기다린 이유도 혹 진맥에 방해가 될까 겨우 참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평소라면 애저녁에 끝났을 진맥이 유난히 길어지니 결국 바짝 마르는 기분에 입을 열고 말았다.

“홍 의원.”

하지만 그런 집사의 타들어가는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홍 의원의 굳게 닫힌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나마 한참을 쥐고 있던 손목을 내려 이불 속으로 도로 집어넣는 것을 보니 그나마 진맥은 끝이 난 모양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하시게. 혹 애기씨가 잘못되기라도-”

“애기씨는 무탈하십니다.”

아이구, 하늘님, 감사합니다. 고대하던 홍 의원의 대답에 집사가 앓는 소리를 내며 하늘님을 찾았다. 그런 집사의 뒤편에서 불쑥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런데 왜 깨어나질 못하는 거야.”

“…….”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순간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날이 선 목소리였다. 홍 의원의 고개가 좀 더 위로 들렸다. 문 앞에 서 있는 리 샤오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롭지만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였다. 불안이라니. 참으로 리 샤오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그 말 말고는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탈하다며.”

“애기씨는 그러하지요.”

누구를 닮아 그리 생명력이 강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리 샤오 님의 패기覇氣를 그리 정면으로 받고 멀쩡할 리가 있습니까.”

“…….”

자다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달려온 참이었다. 차를 타고 오면서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들었을 때는 이미 최악의 상황을 예견했었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사실 아무리 배 속 아기가 아무리 생명력이 강해도 정작 아이를 밴 어미가 죽어버리면 방도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셨습니까. 같은 붕鵬이라도 리 샤오 님의 패기는 견디기가 힘들다는 거 알고 계시잖습니까.”

“…….”

“헌데 약해빠진 곤에게, 그것도 애기씨까지 밴 이에게 그리 험한 짓을 하시다니요.”

죽일 작정이셨습니까.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리는 홍 의원에 리 샤오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정확히 죽는다, 라는 부분에서 눈에 띄게 표정이 딱딱해졌다는 걸 홍 의원은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죽일 작정은 아니었구나. 그제야 홍 의원도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사실 방 문을 넘어 집안사람들까지 모두 느낄 만큼 엄청난 패기를 뿜어냈음에도 이리 멀쩡한 것을 보면 결국 리 샤오가 봐줬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그럴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그저, 각인을 깨버리려고 했을 뿐이야.”

태연히 내뱉는 그 말에 홍 의원의 얼굴 위로 경악의 빛이 번진다.

“대체 무슨.”

“…….”

“아무리 싫으셔도 그렇지요. 힘으로 각인을 깨다니요. 그런 짓을 했다가는 몸이 버티질 못합니다.”

오히려 정신은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몸이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기절해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보통의 곤과 달리 천족의 사내는 평생에 단 한 번밖에 각인을 하지 못한다고.”

“……뭐라고?”

순간 리 샤오의 표정이 확 가라앉았다. 그제야 홍 의원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눈을 깜빡이던 홍 의원이 살풋 눈매를 일그러트린다.

“아무 말도 못 들으셨습니까.”

“…….”

물론 질문에 대답은 없었지만 점점 날카로워지는 리 샤오의 표정으로 화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홍 의원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화를 내시니 말도 못 꺼낸 게지요.”

“…….”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홍 의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일이 이리된 것이 내키지 않으시겠지만 이분보다 더 당황스러우시겠습니까. 이분 역시도 아무것도 모른 모양이던데요.”

“…….”

“알았으면 그 독한 피임약을 그리 오랫동안 먹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점점 딱딱해지는 리 샤오의 표정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해한 홍 의원이 급히 화수를 대신해 변명을 해주었다.

“피임약을 처방해준 의원이 몰랐다는 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지만 제대로 보지도 않고 약만 처방해주는 경우도 많으니, 뭐, 그리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요.”

“…….”

“실수든 뭐든, 중요한 건 이미 이분의 태 속에 애기씨가 생겼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방도가 있을 거야.”

“예, 물론 방법이야 많지요. 일단 애기씨가 태어날 때까지만 옆에 두셨다가 그 이후에-”

“사람의 마음인데, 어찌 일생에 한 번뿐일 수가 있어. 안 그래?”

“예, ……예?”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홍 의원이 뒤늦게 멈칫했다. 그제야 리 샤오가 말한 방도가 각인을 깰 방법을 말한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 홍 의원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리 샤오 님. 죄송합니다만 평생의 단 한 번이라는 의미는 평생에 단 한 명밖에 마음에 품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말에는 그러니 싫더라도 조금은 가엽게 봐주면 안 되겠냐, 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홍 의원은 그 말이 리 샤오의 기분을 더 가라앉게 만든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방법을 찾아와.”

리 샤오가 나직이 내뱉었다. 그리고 홍 의원이 고개를 내젓기 전 리 샤오가 뒷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그 빌어먹을 각인, 뇌가 녹아버리는 한이 있어도 깨부숴버릴 테니까.”

진심이었다. 단 한 톨의 거짓도 없었다.

“알아보지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홍 의원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소인이 지키고 있을 터이니, 도련님은 잠시 눈이라도 붙이십시오.”

리 샤오의 고개가 들린다. 자신을 응시하는 새까만 눈동자에 집사가 곧바로 덧붙였다.

“바로 옆방에 자리를 펴두었습니다.”

“됐어.”

하지만 기운이 돌아온 듯하던 새까만 눈동자가 도로 열기를 잃었다. 고개를 내젓는 리 샤오의 모습에 집사의 얼굴에 안타까운 기색이 번졌다. 물론 리 샤오의 시선은 이미 집사에게서 떨어져 나간 뒤였다.

슥.

가만히 응시하는 시야의 끝에는 당연하게도 화수가 있었다. 가만히 화수를 응시하던 리 샤오가 갑자기 손을 내뻗었다. 그렇게 내뻗어진 손가락이 멈춘 곳은 바로 화수의 코끝이었다. 숨을 쉬는지 확인해보는 것이었는데 그 이유도 알 듯했다.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가만히 누운 사내에게는 어쩐지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곧 일어나실 겁니다.”

집사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사실 화수를 보는 리 샤오의 표정은 크게 걱정한다기보다는 그냥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방관자의 표정에 더 가까웠다. 으레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감흥 없는 눈동자로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리 샤오가 이상하게 자꾸만 눈에 밟혔다. 꼭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것마냥 그냥 둘 수가 없어 집사는 입을 열어 안심하시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홍 의원도 큰 문제는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나마 내가 걱정 같은 걸 왜 하냐는 핀잔은 없었지만 집사의 위로를 반박하는 말이 되돌아왔다.

“그럼 일어났어야지.”

“…….”

그건 그랬다. 홍 의원이 다녀가고 수많은 집안 식솔들이 쉴 새 없이 복도를 서성이는 동안에도 화수는 한 번 뒤척이는 일도 없었다.

“원래, 애기씨를 가지면 잠이 많아지는 법입니다.”

“……그래?”

“예.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충분히 자고 나면 눈을 뜨실 겁니다.”

긍정적인 대꾸에 집사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한 얼굴은 동일했지만 확실히 조금 전보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사.”

그리고 그건 느낌만이 아니었던지 이번엔 리 샤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전보다는 가벼워진 말투에 집사가 냉큼 고개를 숙였다.

“예.”

“가서 술상 좀 봐와.”

“술상이요.”

예상치 못한 명령에 그 말을 되뇌고 있으려니 리 샤오가 나직이 덧붙인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알겠습니다.”

그제야 집사도 납득한 듯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방 안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역시나 집사를 물리는 방법은 뭔가를 시키는 것이 가장 빨랐다.

리 샤오가 가만히 숨을 죽였다. 그리고 집중하자 작은 숨소리가 고요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숨을 참고 있는데도 조금 전보다 훨씬 숨쉬기가 쉬워진 느낌이었다.

리 샤오가 화수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평생의 단 한 번이라는 의미는 평생에 단 한 명밖에 마음에 품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억을 떠올렸던 리 샤오가 빠르게 머리를 털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패기를 뿜어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감정조절이 이렇게 힘든 일이라는 걸 리 샤오는 처음 깨달았다. 머리와 몸뚱이가 따로 노는 기분. 가히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건 이 녀석뿐이라는 사실을. 물론 미치게 치미는 화를 누르게 만드는 것도 동일한 인물이었다.

분명 녀석의 뇌를 망가트리는 한이 있어도 각인은 깨버릴 생각이었다. 진심으로 저를 밀어내는 녀석 때문에 정말 꼭지가 돌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위험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사실 반쯤은 차라리 망가트려버리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럼 적어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일은 다시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결국 먼저 물러선 것은 자신이었다. 녀석은 그만두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매달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겁이 나서 힘을 물리고 말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말 그대로 겁이 났다.

정신이 망가진 녀석의 머릿속에 남는 게 단 한 사람뿐일까 봐. 저를 보고도 전혀 기억하지 못할까 봐. 저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볼까 봐. 그래서 리 샤오는 패기를 거두고 말았다.

가지고 싶다.

리 샤오는 자신이 눈앞의 사내에게 맹렬히 느끼는 감정이 독점욕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것도 그냥 몸뚱이만이 아니라 온전한 상태의 녀석을.

빌어먹게도 자신은 저를 머리끝까지 화가 나게 만드는 이 녀석 자체를 갖고 싶은 거였다. 제가 아닌 다른 사내를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갈 녀석을.

“진짜 좆같구만.”

리 샤오가 나직이 내뱉었다. 하지만 그렇게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리 샤오의 시선은 인형처럼 누워 있는 화수에게서 단 한 번도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쪼르륵.

집사가 리 샤오의 잔에 술을 따랐다. 달큰한 술 냄새가 단숨에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리 샤오가 잔을 들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말 그대로 독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싸했다. 몸 안이 타들어가는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집사를 잠시 물리기 위해 한 임기응변이 의외로 쓸모가 있었다.

“안주도 조금 드시면서 드십시오.”

독한 술을 연거푸 세 번 입안으로 털어 넣는 리 샤오에 집사가 술병을 조금 뒤로 물리며 말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접시를 리 샤오 쪽으로 밀었다. 접시 위에는 꿀에 절인 견과를 밀전병으로 돌돌 만 안주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잔을 쥔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좋다 싫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잔만 빙글거리는 리 샤오에 먼저 항복을 선언한 쪽은 집사였다.

낮은 한숨을 내쉬면서 들고 있던 작은 호리병을 기울였다.

쪼르륵.

한 번 더 맑은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리고 그 때였다.

“저도, 한 잔만.”

병을 기울이고 있던 집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꺾었다. 화수가 말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다. 제 입으로 곧 일어나실 것이라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정작 이리 멀쩡히 눈을 뜰 줄은 몰랐던 터라 조금 넋이 나가 일어나 앉은 그를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어, 흘러넘쳐요.”

한 박자 늦게 화수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다시 고개가 돌아왔다.

“아, 죄송합니다!”

그제야 집사도 자신이 술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잔을 넘친 술은 리 샤오의 손을 흠뻑 적시고 그것도 모자라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황급히 집사가 긴 소매로 리 샤오의 젖은 손을 닦았다.

“진작, 술상을 볼 걸 그랬네.”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마 이 습관도 다른 이 때문에 생겼겠지만 어쨌든 화수를 벌떡 일으켜 세웠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리 샤오가 넘친 술잔을 앞으로 내밀자 화수가 엉금엉금 기어왔다.

“뭐 하시는 겁니까. 술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집사가 리 샤오를 저지했다.

“그렇다는데?”

자신은 잘못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리 샤오에 화수의 어깨가 주저앉았다. 혹시나 했는데, 헛된 꿈이었던 모양. 엉금엉금 기어오던 걸음도 멈췄다.

“집사.”

“예.”

“가서 마실 것 좀 챙겨 오지?”

“아, 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집사가 황급히 방을 가로질렀다.

“술은 절대 안 됩니다.”

물론 문을 닫기 전 한 번 더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고서.

죽진 않았네.

눈을 뜬 순간 떠오른 감상은 그것이었다. 이번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리 샤오의 경고는 괜한 것이 아니었다. 힘으로 지배당한다는 느낌이 그토록 무시무시한 것인 줄 몰랐다. 온몸이 말 그대로 녹아버리는 기분. 가만히 쥐어보는 손이 저릿저릿했다.

“제가.”

복잡한 기분을 애써 감추며 화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오래 기절해 있었습니까?”

잔을 기울이던 리 샤오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라 화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화수가 본 것은 그저 리 샤오가 태연히 자신의 잔을 비우고 내려놓은 뒤 대답을 툭, 하고 내뱉는 모습뿐이었다.

“별로.”

“…….”

꽤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화수의 눈매가 이내 일그러진다. 굳이 다른 곳 다 놔두고 누워 있는 사람 옆에서 술상을 벌리고 있을 건 뭐란 말인가. 하여간 성격이 나빴다. 물론 방 주인이 제 방에서 뭘 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 할 말은 없었지만.

“몸은.”

불퉁하게 앉아 있으려니 리 샤오의 질문이 돌아왔다. 크게 관심 있는 표정은 아니었고 예의상 묻는다는 것에 가까웠다.

“괜찮, 습니다.”

온몸이 저릿저릿했지만 어쨌든 어디가 부러지거나 한 것은 아니니까. 멀쩡하게 일어나 앉을 수도 있었다.

“생각보다, 튼튼한 몸이군.”

쪼르륵.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우며 리 샤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향긋한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맛있으십니까?”

혼자만 드시니, 라는 말은 생략되어 있었지만 화수의 불퉁한 표정으로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리 샤오의 시선이 잠시 화수에게 닿았다. 혹 조금 전 일로 이제는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저를 보는 화수의 표정은 건방지던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게 또 딱 녀석답다 싶어 화도 나지 않는 리 샤오였다.

“마시고 싶으면 이리 와.”

“……예?”

의외로 순순한 리 샤오의 대답에 당황한 쪽은 화수였다.

“조금 전엔 안 된다고.”

“그러니까, 빨리 오는 게 좋을걸.”

힐끗, 문 쪽에 닿았다 떨어지는 시선에 화수도 집사가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화수가 황급히 이불을 젖혔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무릎으로 걸어 리 샤오를 향해 다가갔다. 술이 가득 채워진 잔이 화수의 앞에 놓였다.

“정말 주시는 겁니까.”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화수에 리 샤오가 어깨를 으쓱인다.

“한 잔 정도야 괜찮겠지.”

“…….”

지금까지 겪은 일에 비하면 술 한 잔 정도야. 나직이 중얼거리는 리 샤오의 말에 화수 역시 전적으로 동의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

잔을 들던 손이 멈칫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각인은 언제 한 거지?”

“…….”

쿵.

순간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 하지만 화수는 애써 태연을 가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왜 갑자기 궁금해지셨습니까.”

뭐지.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혹, 뭔가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화수가 마주한 눈동자를 살폈다. 하지만 새까만 눈동자는 좀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속처럼 수면이 고요했다. 고요한 수면 위로 살짝 파동이 이는 듯했으나, 이내 다시 고요해졌다. 마치 소용돌이치는 바다 위에 막을 씌운 것처럼 이질적인 고요함이었다. 태연한 척 표정을 감추고 있었지만 화수의 다문 입안은 바싹바싹 말라가는 중이었다.

다행히 리 샤오의 입이 다시 열렸다.

“홍 의원 말로는 3개월쯤 되었다는데.”

“…….”

설마. 온몸의 피가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만큼은 화수도 태연을 가장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순간 리 샤오가 정말은 그 아이가 내 아이인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면 아마 화수도 더는 발뺌하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리 샤오의 질문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다. 사실 리 샤오의 머릿속에 화수가 좋아하는 이는 진도현이라고 아예 박혀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자신이 그 각인의 상대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럼 나와 할 때도 이미 각인이 된 상태였던 거지?”

“…….”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에 화수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굳었다. 물론 그것을 리 샤오는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고. 대답은 없었지만 리 샤오는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각인을 한 상대 외에 다른 이와 잠자리를 하는 건 천족에게 아주 괴로운 일이라고 하던데. 사실은 그날 순진한 척 연기한 것이 아니었던 거지?”

“…….”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 후로 진 사장과 할 때조차 서지 않았던 거구나. 단순히 몸이 좋지 않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에서였던 모양이다.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또 다른 오해가 겹겹이 쌓인다. 그렇다고 그것을 풀 수도 없었다. 점점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하지만 그곳을 빠져나올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덕분에 질문에 대답이 늦었다.

하지만 이미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미간을 찌푸린 화수의 반응으로 리 샤오는 제 추측이 맞았다는 걸 확인했다. 사실 정말 몰라서 물은 것도 아니었다. 알면서도, 그럼에도 확인하고 싶었다. 어리석지만 늘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 인간이었다.

가만히 화수를 응시하던 리 샤오가 손을 내뻗었다. 순간적으로 화수가 몸을 움츠렸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어쨌든 리 샤오의 기분은 상할 수 있는 일이라 화수가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리 샤오는 크게 기분이 상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다가오던 손이 중간에서 멈췄다. 마치, 화수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 아니었던지 화수가 피할 수 있음에도 가만히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멈춰 있던 손이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손이 화수의 볼에 닿았다. 온기라고는 찾을 수 없는 차가운 볼을 뜨거운 손바닥이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별 뜻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화수의 가슴 한구석이 엷게 뛰었다. 그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손에 얼굴을 기울이고 싶은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앞으로는.”

굳게 닫혀 있던 리 샤오의 입술이 열렸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조금 전과 같은 일은 없을 거야.”

“…….”

평생에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체질이라는 건 다른 이와 잠자리를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이라고 했다. 보통은 정신적으로만 거부감을 느끼지만 화수 같은 경우에는 몸으로도 거부감을 느꼈을 거라고. 만약 돈 때문에 몸을 섞어야 했다면? 이라는 리 샤오의 물음에 홍 의원은 아마 엄청난 고통이었을 거라고 얼굴을 찡그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원치 않는 건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고 맹세하지.”

“…….”

“대신.”

조금 전과 다르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순간적으로 온도가 달라지는 것을 화수는 느낄 수 있었다. 굳어 있는 화수에게 리 샤오가 뒷말을 덧붙였다.

“이곳에만 있어.”

“…….”

“벗어나려고 하지 마.”

“…….”

“그것만, 하지 마.”

향기만 맡았을 뿐인데, 술에 취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리 샤오의 말이 애원하는 것처럼 들릴 리가 없을 테니까.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화수에 리 샤오가 대답을 종용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초조한 기색마저 느껴지는 리 샤오에 화수가 결국 입을 열어 물었다.

“제게 선택권이 있습니까.”

“없어.”

“그런데 무슨 말을 하라는 겁니까.”

“글쎄.”

“…….”

“알겠다 아니면 생각해보겠다?”

“둘 다 같은 말 아닙니까.”

“전혀 다른 말이지. 하나는 동의고 하나는 동의가 아니니까.”

“동의가 아니면 싫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투덜거리는 화수에 순간 리 샤오의 표정이 확 가라앉았다.

“싫다는 말은 안 돼.”

다른 건 다 돼도, 라고 조금 더 낮고 날 선 목소리가 덧붙였다. 화수도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만큼은 까불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대치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리 샤오 쪽이었다.

“대답.”

“생각해보겠습니다.”

리 샤오의 표정이 다시금 사나워졌다. 하지만 화수 역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2차로 재개된 적막을 깨트린 이는 이번엔 리 샤오도 화수도 아니었다.

“대체 뭐 하시는 짓입니까?”

막 문을 열고 들어서던 집사였다.

“제가 술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떡하니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뭐라고 변명할 수 있겠는가.

“배 속에 애기씨도 애기씨지만 그리 오래 정신을 못 차리고 계시다 겨우 깨어나셔서는 술이라니요.”

“냄새만 맡으라고 준 거야.”

어깨를 움츠리는 화수에 리 샤오가 대신 변명을 해주었지만 집사의 사나운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는다.

“도련님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화가 나셔도 그렇지요. 짐승도 새끼를 밴 어미는 내치지 않고 거두는 것이 부처님의 자비인데, 하물며 제 아이를 가진 분께 그런 험한 일을 하시다니요. 애기씨가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제가 마님 얼굴을 어찌 뵈었겠습니까.”

“…….”

사실 일이 나고 계속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화수가 깨어나지 않아 불안해하고 있는 리 샤오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어 꾹 참고 있었던 차에 결국 터지고 말았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테니까, 잔소리는 그쯤 하고 가져온 것이나 내려놔.”

어느 정도 제 잘못을 인정하는 터라 잠시 집사의 잔소리를 들어주고 리 샤오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냥 두면 사돈의 팔촌까지 나올 판이었다.

“참말이시지요?”

쌓였던 것을 어느 정도 털어냈는지 집사도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물론 그렇게 물으면서도 집사의 시선은 리 샤오가 아닌 화수를 향해 있었다.

“네, 죄송합니다.”

화수도 얌전히 사과했다. 물론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잔소리가 더 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 컸다.

탁.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집사가 그제야 들고 온 사기그릇을 화수의 앞에 내려놓았다.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뭔가요?”

굳이 묻지 않아도 코끝에 닿는 한약재 냄새로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단 물은 이유는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겠다는 의도였으나 그런 것이 집사에게 통할 리 없었다.

“몸에 좋은 것이니 쭉 들이켜십시오.”

“……전 이런 거 먹지 않아도 충분히 건강한데요.”

“글쎄요. 정말로 건강한 분은 맥이 잘 안 잡히거나, 픽픽 쓰러지는 일이 없겠지요.”

“…….”

화수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리 샤오를 향했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다.

“어서요.”

재촉하는 집사에 결국 화수도 약그릇을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먹고 토해도 몰라요.”

“홍 의원이 특별히 입덧을 잠재우는 약재도 넣었다고 하니 걱정하지 말고 일단 드셔보세요.”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덧붙이는 집사의 말에 결국 화수도 가만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체념한 듯 그릇을 입으로 가져왔다. 으,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렸던 화수가 전투적으로 약을 마시기 시작했다. 오래 끌어봐야 괴롭기만 할 뿐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하셨습니다.”

내려놓은 그릇이 빈 그릇임을 확인한 뒤에야 칭찬이 내려왔다.

“제가 뭐라 했습니까. 일단 드셔보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기는 해도 토할 기미는 아니라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린 집사가 뽐내듯 턱을 치켜세웠다. 얄밉긴 했지만 반박할 말이 없어 얼굴만 일그러트리고 있으려니 집사가 탁,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소리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두 내가거라.”

집사의 지시에 화수의 약그릇뿐만 아니라 리 샤오의 술상까지 모두 밖으로 사라졌다. 리 샤오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지만 집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찔리는 구석이 있는 터라 리 샤오도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는다.

“두 분 다 이제 그만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말은 제안이었지만 이미 방 안 등불을 하나만 남기고 모두 꺼버린 집사가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열린 장지문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부디, 평온한 밤 되십시오.”

뼈가 있는 인사말과 함께 장지문이 닫혔다. 방 안엔 다시 적막이 흘렀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리 샤오가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조금 전부터 찌푸린 얼굴이 풀리지 않는 것을 보고 있던 그가 덧붙였다.

“토할 것 같으면 말해.”

“토할 것 같은 건 아닌데.”

괜히 집사의 기세에 말을 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러지는 않았던 모양.

“아닌데?”

“약이 좀, 써서.”

솔직히 다 큰 어른이 약이 쓰다고 투덜거리는 건 좀 꼴사나운 일이라 머뭇거렸는데, 대답을 듣기 전엔 물러서지 않을 기세라 결국 털어놓고 말았다. 입덧에 효과가 있다던 집사의 말대로 토기는 잠재웠지만 대신 엄청 썼다. 아무래도 쓴맛으로 입덧을 잠재우는 모양이었다.

“써? 얼마나 쓰길래.”

약이 그럼 쓰지 달겠냐고 핀잔이나 안 들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리 샤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수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

순간 화수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는 태연히 화수의 입안을 휘저을 따름이었다. 혀를 빨고, 입천장을 핥았다. 집요하게 입안을 샅샅이 핥아내던 혀가 떨어져나간 것은 시작할 때만큼이나 갑작스러웠다. 리 샤오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반사적으로 화수의 몸도 조금 굳었다.

“쓰긴 쓰네.”

“…….”

투덜거리는 리 샤오에 그제야 화수도 그것이 한약의 맛을 의미함을 깨달았다.

“혹시, 입맞춤도 괴로운 건가?”

반쯤 굳어 있는 화수를 리 샤오가 오해한 모양이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 샤오에 정신이 든 화수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이번만큼은 그런 오해를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리 샤오는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화수가 급히 리 샤오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일어선 리 샤오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왔다. 평소라면 그 시선에 조용히 옷자락을 놓았겠지만 화수는 손을 물리지 않았다. 뿌리칠 때까지는 놓지 않겠다는 각오였는데 의외로 리 샤오는 그 손을 내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시선을 화수에게로 옮겨왔을 뿐.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새까만 눈동자를 향해 화수가 덧붙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가 가만히 화수를 응시한다.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하듯. 꼭 경계하는 짐승을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전혀 괴롭지 않았어요. 오히려-”

“…….”

초조하게 변명을 늘어놓던 입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튀어나왔다. 아차, 싶어 말을 멈췄지만 이미 늦었다.

“말해.”

“…….”

조금 누그러졌던 리 샤오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져 있었다. 이쯤 되면 더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 결국 화수가 툭, 하고 조금 전 입안으로 삼켰던 말을 내뱉었다.

“좋았단 말입니다.”

“…….”

“술맛도 좀 나고.”

험악하던 표정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민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숨통이 트였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화수의 머리 위에서 나직한 음성이 내려왔다.

“술맛이 좋았다는 건가?”

화수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관두십시오.”

투덜거리며 붙잡고 있던 옷자락까지 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놓은 옷자락은 오히려 제가 쥐었을 때보다 더 아래로 끌려 내려왔다. 그리고 바로 코 앞까지 바싹 다가온 새까만 눈동자에 화수도 그제야 리 샤오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는 걸 깨달았다.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본 순간 눈앞의 사내가 농담이라는 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음이 떠올랐다.

손이 내뻗어졌다. 불퉁한 표정이었지만 그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바싹 다가오는 숨결에 화수가 이번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곧바로 뜨거운 입술이 화수의 입술을 눌러왔다. 화수가 입술을 살짝 열자 그 안으로 뜨거운 입술만큼이나 뜨거운 살덩이가 쑥 들어왔다. 입안이 살덩이로 가득 찼다. 화수가 놓았던 옷자락을 다시 움켜쥐었다. 리 샤오의 입꼬리가 다시 한 번 더 말려 올라갔다.

춥, 츄읍.

집요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조금 전과는 온도 자체가 달랐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젖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각도를 달리해 몇 번이고 입술을 겹쳤다. 안을 채우고, 문지르고, 휘젓는다. 타액이 고이고 질척한 소리가 났다. 입안이 흐물흐물해졌다. 얽히는 타액이 달았다.

들락이는 것은 분명 윗입인데 이상하게 허리 아래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뒤로 물러서는 화수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꽉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각도를 달리해 다시 입술을 겹친다.

맞닿은 입안으로 숨이 쏟아졌다. 온몸을 녹진녹진하게 만드는 달큰한 숨결. 화수의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뒤로 물리던 몸을 리 샤오에게 바싹 붙였다. 어떤 의도를 담았다기보다는 본능이었다. 어느새 무릎으로 선 화수를 리 샤오가 아예 안아 제 쪽으로 끌어 올렸다. 앉은 리 샤오의 무릎 위로 화수의 몸이 얹혀졌다. 사타구니가 맞닿았다. 뜨겁고 단단한 것이 아랫배를 찔렀다. 하지만 화수의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수가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앞에 비볐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몸이 뒤로 밀쳐졌다.

“여기까지.”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리 샤오에 그제야 화수는 그가 자신을 밀쳐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잔뜩 아래를 세우고 있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 목소리였다. 헐떡이는 숨을 고르느라 멍하게 있는 사이 리 샤오가 뒤로 물러섰다.

“술맛이 좋은 건 여기까지일 테니까.”

화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술맛 같은 건 처음부터 느낀 적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헐떡이는 숨을 고르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 * *

끼익.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문이 열렸다. 처음엔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이치던 빛이 점점 커졌다. 칠흑같이 어둡던 공간에 빛이 쏟아진다. 의자에 묶인 채 고개를 떨구고 있던 이의 머리 위로도. 피와 땀으로 엉킨 머리칼이 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이 났다.

저벅. 저벅.

사람의 기척에 죽은 것처럼 축 처져 있던 사내가 눈을 번쩍 떴다. 다소 기괴한 장면이었지만 지금 사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눈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몸을 갑자기 움직이려니 반응 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밝아진 시야에 눈이 부셔 들리던 고개가 도로 기울어졌다. 대신 다 갈라지고 터진 입술이 달싹여진다.

“다, 다 말하겠습니다.”

물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쉬어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날카로운 물건으로 바닥을 긁는 것 같은 불쾌한 음성이었지만 상대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사실 그 정도는 피투성이가 된 사내의 꼴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사내가 앉은 의자 주변은 그에게서 흘러나온 것이 분명한 검붉은 핏덩이들로 흥건했다.

“그러니, 제발, 무, 물 좀.”

사내가 애원했다. 배를 채운 지가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허기보다 더 절실한 것이 목마름이었다. 그나마 특별조사실로 끌려온 처음엔 물은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어느 순간부터 이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몸에 가해지는 고통보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더 견디기 힘들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도 없었다. 게다가 더 두려운 건 지금 이 사람이 나가버리면 또 얼마를 더 이 암흑 속에 남겨질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제발, 제발요.”

그래서 사내는 어린아이처럼 눈앞의 이에게 매달렸다. 다 갈라진 목소리라 그 절박함이 제대로 묻어나지는 않았지만 핏발이 다 선 눈동자가 대신 절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을 등지고 선 터라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과 그마저도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것 말고는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쪼르륵.

조용한 침묵 너머로 물이 따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였지만 사내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맹렬한 갈증이 느껴졌다.

탁.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온 이가 물컵을 사내가 앉은 의자 옆 책상에 놓았다. 사내의 눈이 물컵을 핥았다. 눈의 핏발이 더 선명해졌다.

“다, 다 말하겠습니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서도 상대는 사내의 입을 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사내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네, 그 곤이 각인이 된 건 맞습니다. 하지만 피임약을 처방한 것 역시 거짓이 아닙니다.”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핀잔보다 그것이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정말입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하지만 돌아서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애초에, 처음 제게 왔을 때부터 녀석은 이미 각인이 된 상태였어요. 하지만 진 사장, 진 사장이 입을 다물라고 했습니다.”

제 입으로 진 사장의 이름을 내뱉는 것이 께름칙했지만-물론 의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진 사장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내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일단 저 물을 마실 수만 있다면 사내는 눈앞에 자리한 이의 발바닥이라도 핥을 수 있었다.

스윽.

뒷말을 재촉하듯 물컵이 사내 쪽으로 더 바싹 다가왔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사내가 다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웠다. 망설임도 없이 이제는 묻지도 않은 것을 제 입으로 술술 나불댔다.

“진 사장은 각인을 깨고 싶어 했지만, 평생에 단 한 번, 단 한 사람과만 각인을 할 수 있는 천인의 각인을 깨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비소를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이 안 되면 몸이라도 약하게 만들어서 그 틈을 타 새로 각인을 해볼 수는 있을 거라고 했더니, 피임약을 처방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비소의 양이 보통의 피임약보다 더 많이 들어가 있었던 겁니다.”

“…….”

“못 믿겠다면 진 사장, 진도현을 불러주십시오. 삼자대면을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물을…….”

마지막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사실 엉엉 울고 싶었지만 그만한 수분이 몸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온몸이 바삭바삭 마른 나뭇잎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채찍을 휘두르는 일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물컵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을 뿐이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 때였다.

-!

컵의 입구를 빙글거리고 있던 손이 드디어 물컵을 들었다.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냈다. 천천히 움직이는 물컵을 따라 사내의 고개도 움직였다. 느긋한 움직임이긴 했지만 그리 느린 속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내는 마치 그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물컵이 드디어 사내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입이 벌어졌다. 숨이 헐떡였다. 하지만 입가로 기울어지는 듯하던 컵이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졌다.

쨍그랑.

유리컵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사내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기분에 상황도 잊고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나직이 들려온 목소리.

“내가 입 다물라고 한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면서.”

“…….”

절대 이곳에서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였다.

“왜 다른 건 잊었어?”

“…….”

그제야 밝은 빛에 적응한 눈으로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핏발이 선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여느 때와 같은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분명 진 사장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라고 한 건 말 그대로 영원히, 입을 다물라는 말이거든.”

물론 음산하게 덧붙이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사, 살려- 읍!

벌벌 떨던 사내가 겨우 입술을 열었지만 곧바로 내뻗어진 손에 입이 틀어막혔다. 묶인 나무의자가 덜컹거리고, 사내의 입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조용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사내의 몸이 축 늘어졌지만 누구도 이상하다고 여기는 이는 없었다. 이미 폐쇄된 조사실 안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오히려 물을 따랐던 주전자 주둥이가 조금 전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 있는 쪽이 이상하다 여겨질 일이었다. 물론 그 역시도 곧 까맣게 잊혀져버렸지만.

* * *

부스럭.

그 때였다. 잠든 줄 알았던 화수가 조용히 몸을 일으킨 것은. 하지만 이불에서 나는 소리가 생각보다 컸는지 이불을 젖히던 그 자세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잠시 숨을 죽인 채 눈치를 살피다 옆자리에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깨닫고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불을 반쯤 젖히고 이부자리에서 살그머니 빠져나온 후, 발소리를 죽여 문을 열었다. 살짝 열린 틈으로 가는 몸을 밀어 넣었다. 문을 통과한 화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어 뒤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걸었다. 오래된 마룻바닥을 소리 없이 걷는 데는 도가 튼 화수였다.

슥.

문을 나선 화수가 막 복도를 가로지르던 그 순간 거짓말처럼 리 샤오가 몸을 일으켰다.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빛은 험악했다. 빠르게 문을 통과하는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사실 화수만큼이나 기척을 숨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리 샤오였다.

끼익, 끼익.

게다가 이미 방을 나선 화수는 방심한 탓인지 조금 전보다는 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리 샤오가 그 소리를 따라 기척을 죽인 채 화수의 뒤를 쫓는다. 분명 발소리는 현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리 샤오의 표정이 더 굳었다. 설마 했던 것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 입안이 바싹 말랐다. 고작 몇 걸음 걸은 것뿐인데도 숨이 찼다. 아니, 이건 목이 졸리는 기분에 가까웠다. 헐떡이고 싶었다.

그게 초조한 기분이라는 걸 리 샤오는 알지 못했다.

저벅저벅.

리 샤오가 속도를 높였다. 발소리가 나기 시작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된 이상 몰래 쫓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현관과 가까워질수록 리 샤오의 걸음이 조금 느릿해졌다. 녀석이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다는 걸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놓고 조금 기가 막혀 웃었다. 물론 그럼에도 내딛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멈칫.

그리고 그렇게 고집스럽게 움직이던 리 샤오의 걸음이 멈춘 것은 현관이 보이는 위치에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현관은 집사가 문단속을 해둔 그 상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급하게 빠져나갔다면 문이 조금이라도 열려 있어야 했다. 리 샤오의 미간이 살풋 구겨졌다.

나가려고 한 것도 아니면 대체 어딜 간 거야.

뒤늦게 떠오르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상 밖의 장소에서 들려왔다.

부스럭부스럭, 기묘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곳은 현관에서 조금 떨어진 주방 쪽이었다. 홀린 듯 리 샤오의 걸음이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움직였다. 물론 조금 전 험악하던 기세는 분명 누그러진 상태였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화수가 투덜거린다. 힘겹게 연 찬장 안은 이번에도 그릇만 잔뜩이었기 때문이다. 실망으로 화수의 어깨가 주저앉았다. 그 때였다.

“뭐가.”

불쑥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힉-!”

누가 들어오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던 탓에 기겁한 화수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 샤오의 목소리를 들어 더 놀란 것도 있었다. 그 탓에 높은 곳에 있는 찬장을 열려고 작은 나무상자 위에 올라서 있던 다리가 균형을 잃고 크게 휘청였다.

“으, 아.”

몸이 뒤로 쑥 꺼지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던 화수지만 이내 단단하게 허리를 감싸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떴다. 곧바로 기가 막혀 죽겠다는 눈과 마주쳤다.

“대체.”

“…….”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이를 악문 채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깎아놓은 듯한 리 샤오의 턱 선이 평소보다 배는 예리해져 있었다. 목에 핏줄까지 선명했다.

“그게.”

하지만 화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화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리 샤오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험악해진 눈동자로 그가 으르렁거렸다.

“왜. 여기로 도망이라도 치려 했나?”

“그게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되물으려던 화수의 눈에 찬장 옆으로 난 작은 창이 들어왔다.

“제가 괭이도 아니고 이 작은 창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환기를 목적으로 내놓은 창은 아무리 봐도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리 샤오의 의심은 여전히 거두어지지 않았다.

“나갈 수만 있었으면 나갔고?”

“…….”

아무래도 신용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뭐 제 탓이겠지만. 속으로 한숨을 내쉰 화수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의심을 하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저는 도망치려고 한 게 아닙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적어도 오늘은.

화수의 표정으로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리 샤오가 따지듯 되물었다.

“그럼 쥐새끼처럼 빠져나와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눈으로 재촉하는 리 샤오에 화수가 어깨를 조금 늘어트리며 대꾸했다.

“복숭아를 찾고 있었을 뿐입니다.”

“…….”

온갖 변명거리를 다 예상했던 리 샤오였지만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명이었다. 덕분에 당황한-물론 겉으로는 그저 기분이 상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리 샤오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진다.

“복숭아를, 왜?”

“복숭아를 왜 찾겠습니까. 먹고 싶으니까 찾지요.”

“…….”

험악하던 표정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뭐, 기가 막히기도 하겠지. 저도 사실 기가 막힌데, 리 샤오는 오죽하겠는가. 이쯤 되니 될 대로 되라 싶은 화수였다. 리 샤오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게 처음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부끄러워하는 건 애초에 성미에 맞지도 않았다.

“저녁상에 복숭아가 나왔었거든요. 그땐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자려고 누워 있으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잖아요. 게다가 그렇게 한번 생각나니까, 잠이 안 와서.”

“…….”

아무리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고 해도 민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 주절주절 변명이 길어진다. 차라리 무슨 핀잔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보고만 있는 눈동자에 더더욱 변명이 길어진다.

“그러니까 도망치려던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

“…….”

“그래서.”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리 샤오의 입술이 드디어 다시 열렸다.

“찾았나, 그 복숭아?”

“……아니요.”

뭐 그렇게 귀한 거라고 꼭꼭 숨겨두었는지 아래쪽부터 높은 찬장까지 다 뒤졌는데 복숭아는커녕 그 흔한 누룽지 한 조각도 찾질 못했다. 불퉁해지는 화수를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보던 리 샤오가 천천히 허리에 감았던 손을 뺐다. 대신 화수를 향해 손을 내뻗는다.

머뭇거리긴 했지만 결국 화수는 그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올라서 있던 상자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별것도 아닌 행동에 가슴이 잘게 뛰었다. 정작 신사처럼 군 본인은 큰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화수가 바닥으로 내려선 것을 확인한 리 샤오가 그의 뒤쪽으로 손을 내뻗었다. 한 박자 늦게 화수도 리 샤오를 따라 몸을 틀었다. 이미 리 샤오는 작은 옹기 뚜껑을 열고 있었다.

“벌레가 꼬일 수 있는 과일을 그냥 찬창에 넣어둘 리 없잖아.”

“……아.”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냐는 핀잔이 돌아왔지만 사실 화수는 그런 기본적인 것들은 전혀 몰랐다. 그저 술과 안주 몇 점 정도면 충분하기에 화수가 애초에 뭔가가 먹고 싶어서 주방을 찾아드는 일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한밤중에 홍매루의 주방은 늘 사람으로 북적거려 굳이 화수가 직접 뭔가를 찾을 필요 같은 건 없었다.

그럼에도 화수는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화수의 모든 관심은 이미 리 샤오의 손에 들린 복숭아에 쏠려 있었으므로.

달큰한 냄새가 코끝에 닿자 입안에 침이 고였다. 배 속에 아이가 들어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가 어린애가 된 듯했다. 이상하게 그동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참을 수 있었던 욕망들이 점점 참기가 힘들었다. 사실 이쪽이 정상이었지만 화수에게는 정상적이라는 말이 가장 낯설었다.

“다음엔 그냥 깨워.”

건네주는 복숭아를 받아 들려는데 리 샤오의 경고가 내려왔다. 화수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또 뭐가 불만이냐는 눈빛에 화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집사님은 좀 불편해서.”

주인의 평안과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집사가 들으면 자존심 상할 소리였지만 그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하는 것만 봐서는 어디서든 뻔뻔하게 잘 지낼 것 같아도 사실 홍매루에서도 제 방 외에는 나다니는 법이 없는 화수였다. 난감한 듯 중얼거리는 화수의 말에 리 샤오가 들고 있던 복숭아를 그의 손에 쥐여 주며 툭, 하고 내뱉는다.

“누가 집사 깨우래?”

화수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번진다. 물론 손에 들린 복숭아는 소중히 감싸 쥐는 것을 잊지 않고서.

“그럼 누굴-, 엑.”

고개를 갸웃거리던 화수가 뒤늦게 리 샤오 본인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기괴한 소리는 의도하고 낸 것은 아니었지만 리 샤오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뭐지. 그 반응은.”

“……죄송합니다.”

화수가 사과했다. 굳은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더는 문제 삼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사과는 됐고, 대답.”

“예. 다음엔 꼭, 깨워드리지요.”

불손한 대답이었으나 리 샤오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리 샤오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진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뭐 하는 짓이지?”

화수의 손목을 움켜쥔 리 샤오가 음산하게 중얼거린다. 하지만 화수는 그런 리 샤오가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반응.

“복숭아 먹는데요.”

“…….”

막 입으로 베어 물려던 차에 리 샤오의 손에 붙들려 먹는다는 말이 조금 맞지 않긴 했지만. 대답했으니 이제 됐죠, 하고 다시 복숭아를 베어 물려고 했으나 화수의 손목을 붙든 단단한 손이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엔 아예 화수의 손에 들린 복숭아를 빼앗았다.

“껍질은 벗겨내고 먹어야지. 씻은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그제야 리 샤오가 정색한 이유를 알았다. 의외로 이런 데에는 또 깔끔을 떠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 것도 털어먹는 화수로서는 씻지 않은 과일을 껍질째 먹는 정도야 별일도 아니었다. 물론 화수도 깎아 먹는 게 더 좋긴 했다. 그럼에도 그냥 껍질째 먹으려고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깎을 줄 모르는데요.”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화수에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민망한 마음에 시선을 피하고 화수가 다시 덧붙였다.

“껍질째 먹어도 안 죽습니다.”

좀 입안이 간지럽긴 하겠지만. 덧붙이는 화수에 리 샤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번엔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진다.

“줬다가 뺏는 게 어딨습니까.”

치사하게. 리 샤오의 등 뒤로 화수의 볼멘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스럭 찬장을 뒤적이던 리 샤오가 뒤돌아섰다. 그의 손에 들린 과도를 보고서야 그제야 화수의 불퉁한 표정이 수그러들었다. 큰 검만 쥐고 있는 걸 봐서 그런지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칼이었다. 물론 그런 화수의 감상과는 별개로 칼을 놀리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슥슥, 칼끝으로 복숭아의 겉면을 둥글게 굴린다. 그리고 다음은 반대 반향으로. 그리고 그 사이로 한 번 더. 그렇게 거침없이 움직이던 과도가 뒤로 물러났다.

뭘 어쩌려고 그러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칼집을 낸 껍질을 리 샤오가 손으로 벗겨냈다. 슥, 손길 한 번에 잘 익은 뽀얀 과육이 드러났다. 신기한 것을 본 듯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런 놀림이 몇 번 반복되자 복숭아는 완전히 속살만 남았다.

그것을 리 샤오가 칼로 조그맣게 잘랐다. 그리고 그 조각을 화수 앞으로 내밀었다.

“꼭 깨워.”

경고하듯 덧붙이는 말에 화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는 듯 곧바로 입안으로 달큰한 복숭아 살이 밀려 들어왔다. 우물우물, 화수의 입이 빠르게 움직였다. 딱 알맞게 잘 익은 과일은 몇 번 씹지 않아도 입안에서 사라졌다. 물론 상관은 없었다. 입안이 비기도 전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복숭아 조각이 입안으로 들어왔으므로.

달큰한 복숭아 향으로 주방이 가득 찼다.

* * *

슥.

마지막 단추를 잠근 리 샤오가 소매를 당겼다. 주름 하나 없는 제복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리 샤오의 몸에 착 감겨들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확인한 리 샤오가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딛던 걸음이 문 바로 앞에서 다시 멈췄다.

저벅저벅.

머뭇거린 것과 달리 한번 되돌린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빠르게 내딛은 걸음이 반대편, 닫아놓은 장지문 앞에서 멈췄다. 움푹 파인 손잡이를 잡아 양쪽으로 젖힌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열린 문틈으로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부자리가 보였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침 일찍 정리를 하러 온 시종을 돌려보낸 이가 리 샤오였다. 정리되지 않은 이불이 볼록하게 올라와 있는 곳을 응시하던 리 샤오가 문을 통과했다.

리 샤오의 걸음으로 두 걸음 정도 내딛자 이불 위로 삐죽 튀어나온 머리통이 보였다. 답답하지도 않은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이불을 잡아 살짝 젖히자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죽은 듯이 잠든 이의 얼굴이 보였다. 감긴 속눈썹은 미동도 없었다.

아무리 제가 기척을 숨겼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깊이 잠이 들 수가 있나. 문득 든 생각에 리 샤오의 왼쪽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이내 그의 손이 화수의 코밑으로 움직였다. 가늘긴 했지만 숨결이 느껴졌다. 리 샤오의 어깨가 살짝 주저앉았다. 안심한 그의 손이 뒤로 물러났을 때였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리 샤오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미 늦었다. 얇은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말간 눈동자가 드러났을 땐 리 샤오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난감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바로 앞에 드러난 얼굴을 보고도 화수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잠이 그득한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다 가만히 물었을 뿐이다.

“가십니까.”

그렇게 가만히 물어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풀이 죽어 있었다. 자다 일어난 탓에 기운이 없어서였을 테지만 리 샤오는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올 거야.”

“…….”

그제야 알겠다는 듯 화수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더 할 말도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 보았던 풀이 죽은 눈동자를 보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기분도 처음 겪어보는 리 샤오였다. 리 샤오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필요한 건 집사에게-”

“…….”

하지만 곧 말을 하던 리 샤오의 입술이 멈칫한다. 집사는 불편하다던 화수의 말을 기억한 탓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

감겼던 눈이 도로 뜨였다.

“돌아올 때 사다 줄 테니까.”

“……꿀떡.”

내내 꾹 닫혀 있던 화수의 입이 다시 열렸다. 하지만 이번엔 리 샤오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번진다.

“꿀떡?”

“…….”

대략 이름으로 추측한 리 샤오가 말했다.

“꿀에 찍어 먹는 떡을 말하는 거면 집사에게 준비하라고-”

“시장에 팝니다.”

하지만 집사에게 준비시키겠다는 말은 불쑥 끼어든 화수의 말에 잘렸다. 공손히 사다 달라고 사정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건방진 태도라니. 하지만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린 리 샤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예상외로 순순한 것이었다.

“……사 오지.”

시장에 판다는 말을 하던 화수의 눈동자에 번진 기대감을 읽었기 때문이다.

“약속, 하셨습니다.”

이번엔 망설임 없이 무릎을 펴는 리 샤오를 향해 화수가 거듭 당부하듯 중얼거렸다. 아직 잠기운이 덕지덕지 붙은 눈은 반쯤 감긴 채였다. 그렇게까지 먹고 싶었던 건가. 피식, 하고 웃은 리 샤오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알았으니, 안심하고 다시 자도 된다는 듯. 물론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화수가 스르륵,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이번엔 목 아래까지만 올린 이불을 꼼꼼하게 여며주고 리 샤오가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화수의 숨소리는 고르게 변해 있었다. 방을 나서는 리 샤오의 걸음이 가벼웠다. 이번에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리 샤오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번졌다. 평소라면 입구에 나와 시중을 들었을 집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 하지만 내딛는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걸음이 멈춘 것은 집사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는 집사의 목소리가 주방문을 넘어 들려오고 있었다. 리 샤오의 걸음이 꺾였다. 주방과 가까워질수록 목소리는 선명해졌다.

“정녕 아무도 한 사람이 없단 말이지.”

음성은 낮아졌지만 노기는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뚜렷해졌다. 집사가 매서운 눈으로 나란히 선 시종들을 훑었다. 하지만 다들 쭈뼛대며 눈치만 볼 뿐 누구도 자신이 했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할 수 없지.”

집사가 체념한 듯 시선을 물렸다. 시종들의 어깨가 눈에 띄게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안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들 돌아가서 짐을 싸거라.”

“…….”

“그리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 당장.”

“집사어른!”

눈이 휘둥그레진 시종들이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집사에게 매달렸다.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방에 돌아간 이후로 밖에는 나온 적도 없습니다.”

엄격하긴 해도, 툭하면 배를 곯리고 이유 없는 매질까지 하는 다른 부잣집에 비하면, 삯까지 챙겨주는 이곳은 꿈의 직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이 집에서 일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런 곳에서 도둑질이라니.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이는 없었다.

“아, 맞아. 어젯밤 자네 한밤중에 나갔다 왔잖아.”

“무슨-! 아, 아닙니다요. 뒷간을 다녀왔을 뿐, 이곳 주방에는 정말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서로에게 의심의 칼날이 겨누어졌다. 하지만 이미 집사는 마음을 정한 뒤였다.

“이젠 도둑놈이 누군지는 상관없다. 도둑놈을 이 집에 둘 순 없으니, 모두 쫓아내는 수밖에.”

“집사어른!”

이쯤 되면 집사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뭣들하고 있어. 당장 가서 짐을 싸라니까.”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집사.”

불쑥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집사의 고개가 급히 틀어졌다. 이미 목소리만으로 상대가 누군지는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더불어 범인을 추궁하는 데 정신이 팔려 주인이 나가는 시간을 놓쳤다는 것도. 집사의 주름진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다른 것보다도 주인의 시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이 집사의 자존심을 다치게 했다.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아닙니다.”

“…….”

집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말도 없이 대답을 종용하는 리 샤오에 결국 집사도 어깨를 살짝 주저앉히며 입을 열었다.

“정말 별일 아닙니다. 지난밤 쥐새끼 한 마리가 주방에 숨어들어서 음식을 훔쳐 먹은 일이 생겨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

리 샤오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진다. 집사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별것도 아닌 일에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집사로서 실격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실 지금 가장 부끄러운 일은 제가 뽑은 시종들 중에 도둑이 숨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제법 타고났다고 자신했던 집사였다. 그런데 도둑이라니.

“혹 없어진 거라는 게.”

“독 안에 둔 복숭아가 감쪽같이 없어졌습니다.”

리 샤오의 눈매가 더 찌푸려졌다. 고작 그런 일로 이런 소란을 피운 거냐고 묻는 듯했다. 뭐 사실 그리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리 샤오에게 복숭아 두 알은 그리 대단한 물건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고작, 과일 몇 알이 집 안의 귀한 물건으로 옮겨 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시작이 어려울 뿐이다. 어차피 일할 시종은 차고 넘쳤다. 리 샤오가 만류한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제 불찰이기도 하니, 이 문제는 제가 조용히 해결하겠습니다.”

“글쎄.”

애매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리 샤오에 집사의 얼굴이 살풋 찌푸려진다. 하지만 그런 집사의 각오와는 달리 사실 리 샤오는 그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이건 아무래도 내 잘못인 거 같은데.”

“아닙니다. 이게 왜 도련님 잘못입니까.”

집사가 펄쩍 뛰었다. 하지만 중의적 의미라고 생각한 대답이 말 그대로의 의미를 지녔다는 걸 집사는 몰랐다.

“집사가 말한 쥐새끼가 나인 것 같아서 말이지.”

“아닙니다. 그건 제 불찰-, ……예?”

황급히 고개를 내젓던 집사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번졌다.

“그게, 무슨.”

잠시 머리가 사고를 멈췄다. 다행히 그런 집사를 위해 리 샤오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저 독 안에 든 복숭아라면 내가 꺼내 먹었거든.”

“…….”

일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멍하던 표정이 당황한 표정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이십니까? 혹, 녀석들을 감싸주려고 그러시는 거면-”

“내가 그리 성격이 좋아 보이나 봐?”

“…….”

물론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워낙 기가 막힌 상황을 맞닥뜨리니 제대로 된 사고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고개를 내저을 수도 없는 터라 집사는 조용히 말을 돌렸다.

“아랫것들을 시키지 않으시구요.”

“고작 복숭아 하나에 뭘.”

그 고작 복숭아 하나에 여기 있던 시종들 목숨이 모두 잘릴 뻔했지만 그런 것을 따져 물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이제 해결된 거지? 쥐새끼는 잡혔으니.”

“죄송합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감히 주인을 쥐새끼라고 칭하게 된 집사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물론 리 샤오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오히려 지난밤 찬장을 뒤지던 진짜 쥐새끼를 떠올린 리 샤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발길을 돌린 탓에 그 미소를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 조금 아까운 미소였다.

“아.”

주방을 나와 현관으로 향하던 리 샤오가 불쑥 뒤를 돌아섰다. 바싹 따라붙었던 집사의 걸음도 황급히 멈췄다.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와서 물어보도록 해.”

“예?”

집사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하지만 놀라는 집사의 표정에 리 샤오가 오히려 되묻는다.

“왜?”

그도 그럴 것이 다음번에도 또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말이었으니까. 늘 손끝으로 사람을 부려온 리 샤오였다. 그런 리 샤오가 한 번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스스로 주방을 찾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게 뭐가 이상한지도 자각하고 못하고 있었다. 그게 집사를 놀라게 만든 진짜 이유였다. 하지만 결국 집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 순간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음번엔 꼭 도련님께 먼저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집사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굳이 들쑤실 필요는 없었다. 집사에게는 애기씨가 무사히 태어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했다.

* * *

“이 건은 그리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인을 마친 서류철을 카이가 집어 들었다.

“아.”

그러고는 몸을 돌리던 걸음을 멈췄다. 도로 돌아선 카이가 뒤이어 두툼한 종이봉투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집어 들던 리 샤오가 그것에 시선을 둔다.

“룽오 부장의 특별조사실을 도청했던 기록입니다.”

“…….”

덧붙여진 설명에 리 샤오의 걸음이 도로 책상으로 옮겨왔다. 사람을 붙여 룽오 부장의 특별조사실을 도청 중이었다. 그곳에서 있었던 모든 대화는 이 종이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을 터였다. 대화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들린 소리는 숨소리까지 모두 기록하게 시켜두었기 때문에 책상 위에 놓인 봉투는 눈으로 보기에도 꽤나 두툼했다.

슬쩍 시간을 확인한 리 샤오가 결국 손을 내뻗었다. 봉투를 집어 올려 봉해진 실을 풀었다. 봉투가 열리고 그 너머로 새하얀 종이뭉치가 드러났다. 그리고 막 그것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리 샤오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카이가 천천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이 리 샤오가 꺼냈던 종이뭉치를 도로 봉투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카이가 문을 열었다.

“룽오 부장님.”

룽오 부장이 리 샤오를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카이는 문을 붙잡은 채 그대로 굳었다. 그런 카이를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던 룽오 부장이 입을 열었다.

“리 샤오 부장 계신가?”

“죄송합니다. 들어오십시오.”

그제야 뒤늦게 제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카이가 황급히 옆으로 물러선다. 그런 카이를 보는 룽오 부장에게서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거기에 대해 별다른 시비는 걸지 않았다. 카이를 스친 룽오 부장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저벅저벅.

그리고 방을 가로지른 룽오 부장이 멈춘 곳은 리 샤오의 책상 앞이었다.

혹 저희가 도청한 사실이 들킨 것일까. 물론 철저하게 비밀로 움직였기 때문에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하필이면 이 순간 룽오 부장이 들이닥친 것이 우연 치고는 너무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불안한 기분을 애써 누르면서 카이는 문을 닫고 그의 뒤를 따라 방을 가로질렀다.

룽오 부장의 어깨 너머로 책상이 보였다. 두툼한 봉투가 여전히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룽오 부장이 손만 뻗으면 곧바로 손에 닿을 위치였다. 그것을 눈앞에 두고도 리 샤오는 태연했다. 그 얼굴 표정만 봐서는 눈앞의 서류가 제가 넘긴 그 서류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카이.”

자꾸만 흘끔거리는 시선을 리 샤오가 거둬 올리게 했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카이가 아차 싶어 고개를 푹 숙였다. 리 샤오의 차가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손님이 오셨는데, 차라도 내와.”

“예.”

“괜찮습니다. 그리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

황급히 움직이던 걸음이 그 자리에 멈췄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카이는 조금 떨어진 그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말씀하시죠.”

리 샤오도 두 번 권하는 일이 없었다. 애초에 카이를 뒤로 물리려고 한 명령이었으니 상관없었다.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창틀에 몸을 기댔다. 오히려 책상에는 룽오 부장이 더 가까웠다. 하지만 룽오 부장의 시선은 리 샤오를 좇을 뿐,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날은, 결례가 많았습니다.”

“…….”

대답은 없었다. 그날이 언제를 말하는 거냐는 질문도. 대신 계속하라는 듯,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만이 있을 뿐이다.

“그땐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리 샤오의 눈동자가 이리 새까맸던가. 목이 졸리는 기분에 룽오 부장이 목칼라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당겼다. 사실 목이 졸릴 리가 없었다. 유난히 목이 가는 룽오 부장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리 샤오 부장의 앞에만 서면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날부터였다.

“내게 거짓증언을 한 그 의원은 왜 거짓말을 했냐고 추궁을 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니 더는 리 샤오 부장이 신경 쓸 일은 없을 겁니다.”

“…….”

이 와중에도 저는 의원의 거짓증언에 속아 그런 것일 뿐 본인은 잘못이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만약 그 말대로 의원이 화수에게 약을 처방한 것이 거짓이었다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를 캐냈어야 하는 법이거늘, 룽오 부장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화수와 리 샤오를 엮을 용도로 사용할 생각만 했지, 사실 일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룽오 부장도 멍청이가 아니었다. 승산 없는 싸움에 제 자리를 걸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무엇보다 룽오 부장은 눈앞의 사내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국장도 바뀌었는데, 또다시 정무국과 제3국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서로 모양새가 나쁘지 않습니까.”

“아, 정무국장 대행으로 올라가신 것 축하드립니다.”

“말 그대로 대행인 것을요.”

손사래를 치면서도 리 샤오의 축하에 룽오 부장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피식, 하고 웃은 리 샤오가 기대고 있던 몸을 세웠다.

“뭐, 알겠습니다.”

“사과, 받아주는 겁니까?”

“사과하고 말 게 뭐가 있습니까. 룽오 국장은 할 일을 하려고 했을 뿐인 것을요.”

“그, 그렇지요. 결코 사적인 감정은 없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룽오 부장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가 있었다. 리 샤오의 입에서 나온 국장이라는 호칭을 듣는 순간부터였다. 하지만 밝아진 룽오 부장의 표정과 달리 리 샤오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룽오 부장뿐이었다.

“머리는 괜찮습니까?”

“아, 그 정도는 뭐, 별것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은 무의식적으로 뒤통수로 올라갔다. 등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뒤통수는 아직도 손대면 욱신거릴 정도로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그럼에도 룽오 부장은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이번에도 리 샤오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카이만 불안한 시선으로 리 샤오의 눈치를 살필 뿐이다.

“그럼,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룽오 부장이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걸음은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멈춰졌다.

“아.”

뒤에서 들려온 낮은 음성 때문이었다. 룽오 부장이 몸을 틀었다.

“대행이라면, 국장의 수발을 들던 비서도 그대로 두었습니까?”

“비서, 요.”

룽오 부장은 리 샤오가 한 말을 태연히 되뇌었지만, 순간 아주 찰나와도 같은 틈이 생긴 것을 리 샤오는 알아차렸다.

“비서라면 건강상의 문제로 그만두었습니다만, 무슨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화수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건 그 찻잔을 내놓은 비서가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

“바쁘시면, 제가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굳게 닫혔던 룽오 부장의 입이 곧바로 열렸다.

“제가 알아보도록 하지요.”

“그러시겠습니까.”

“예. 제가 하던 것이니, 마무리도 제가 하는 게 맞으니까요.”

“그럼, 뭐.”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 리 샤오에 룽오 부장은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틀었다. 혹 리 샤오의 생각이 바뀌기라도 할까, 허겁지겁 카이가 열어둔 문을 통과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카이의 등 뒤에서 리 샤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

“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뭘 알아보라는 것인지를 물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헌데.”

정작 궁금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혹 처음부터 룽오 부장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채고, 일이 이렇게 될 것까지 계산했는가 싶어 물으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아니.”

하지만 의외로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갑자기 너무 순순히 물러서는 것이 이상해서 찔러봤을 뿐인데, 걸려들었네.”

오히려 집요하게 달라붙지 않아 의심을 샀다는 말이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상황이 해결되면 안도하는 것이 보통이건만 그 와중에도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잠시 제 상사의 동물적인 감각을 잊고 있었다.

사과를 받아주겠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어쩐지 너무 너그럽다 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소름이 끼쳤다.

그런 카이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리 샤오가 서랍을 열었다.

“안 보십니까?”

카이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내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봉투가 서랍 안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책상 서랍을 닫은 리 샤오가 태연히 대답했다.

“지금은.”

흘낏, 시선을 주는 리 샤오를 따라 카이의 시선도 움직였다. 창밖으로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 * *

“오른쪽으로 꺾어.”

툭, 하고 들려온 명령에 반사적으로 운전병의 핸들이 꺾였다. 그 후에 흘낏, 뒤편으로 시선을 준 카이가 묻는다.

“상점가에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갈림길의 오른쪽 길은 상점가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집과는 정반대의 방향이기도 했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 아니었나. 거울을 통해 뒤를 살피는 카이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번진다.

“혹시.”

불쑥 입을 연 리 샤오에 카이가 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행히 리 샤오는 그런 카이의 표정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예의 무심한 어투로 뒷말을 이었다.

“꿀떡이라고 알아?”

“……꿀떡, 이요.”

“…….”

순간 제가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꿀떡이라는 단어가 리 샤오의 입에서 흘러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하면 이상하지도 않고 평범하기까지 한 단어였지만, 그 평범한 단어가 리 샤오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이유라는 게 컸다.

“모르면 됐어.”

머뭇거리는 반응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카이가 곧바로 사과했다. 어찌 보면 그렇게 오해하고 넘어가는 쪽이 나았다. 실제 그게 뭘 말하는지 모르기도 했고. 꿀에 찍어 먹는 떡을 말하는 건가. 리 샤오의 처음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추측을 하고 있으려니 의외로 해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시장 노점에서 파는 사탕砂糖 가루를 잔뜩 뿌린 떡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운전을 하고 있던 운전병이었다. 리 샤오의 시선이 운전석 쪽으로 향했다.

“죄, 죄송합니다.”

리 샤오의 눈빛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물며 카이도 종종 등줄기가 서늘한데 운전병은 오죽하겠는가. 잘못한 것도 없이 잔뜩 졸아붙어 있는 운전병을 위해 카이가 입을 열었다.

“꿀이 아니라?”

“예.”

그제야 겨우 살았다는 듯 쑥 들어갔던 운전병의 목이 조금 밖으로 나왔다.

“꿀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달콤한 맛을 내기 때문에 그걸 꿀떡이라고 부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거울 속으로 눈이 마주친 리 샤오에게 카이가 다시 물었다.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그런 것 같네.”

“…….”

그렇다도 아니고 그런 것 같다, 라. 답지 않은 모호한 답변이었지만 카이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사이 차는 시장 초입부에 다다라 있었다.

“가서, 사 올까요.”

차를 멈춘 운전병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물론 시선은 리 샤오가 아닌 카이를 향해 있었다.

“그러는 게-”

“됐어.”

차라리 아는 사람이 가서 사 오는 게 낫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는데 곧바로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카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쩐지 기분이 상한 것 같은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기분 탓만은 아닌지 마주한 리 샤오의 눈빛이 사나웠다. 영문을 몰라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으려니 리 샤오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뭔지 물어봤지, 사 오라고 한 적은 없는데.”

아.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카이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죄송합니다.”

딸칵.

하지만 카이의 사과가 채 끝나기도 전에 차 뒷문이 열렸다. 카이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아, 제가-”

그제야 제가 차 문도 열지 않고 앉아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 오늘따라 실수가 잦았다. 눈동자에 난감한 기색이 번진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았던 탓이었지만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이미 차에서 내린 리 샤오를 보고 카이가 황급히 그를 따라 내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창문 너머로 들린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따라올 것 없어.”

문을 열던 카이의 손이 멈칫했다. 그 말이 제안이 아니라 명령임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한 부분은 그리 말하는 리 샤오의 표정이 그리 험악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나직이 덧붙인 리 샤오가 몸을 돌렸다. 적어도 기분이 상해서 오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 * *

“더럽게, 크네.”

화수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제가 사는 홍매루도 충분히 크고 넓은 곳이었지만 거긴 손님을 받는 유곽인 데다 그곳에 적籍을 둔 이만도 수십 명이었다. 그런데 고작 리 샤오 혼자 사는 이 집이 그 수십 명이 사는 홍매루보다도 더 크고 넓게 느껴지다니. 적막한 탓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지만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에 결국 화수는 이 집의 끝을 확인해보는 것을 포기했다.

찰딱찰딱.

서늘한 마룻바닥에 맨살이 닿는 기분이 좋았다. 똑같이 오래된 건물인데도 잘 관리된 바에서는 삐걱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겉만 화려할 뿐 손님이 드나들지 않는 곳은 낡고 허름한 홍매루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자신과 리 샤오처럼. 기분이 가라앉았다. 물론 표정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어?

느릿한 걸음을 내딛던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살짝 열린 장지문 틈으로 밖의 풍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홀린 듯 발이 방향을 틀었다.

드르륵.

살짝 열린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정원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장지문을 잡고 잠시 머뭇거리던 화수가 대청마루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마루 끝에 다리를 내려앉았다. 익숙한 향이 코끝에 닿았다.

매화꽃 향기였다.

살랑살랑.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어쩐지 달큰한 향이 섞여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 대신 입술을 벌렸다.

“뭐야, 류?”

아직 잠기운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 하지만 기분 좋게 호를 그리고 있던 화수의 입술이 아래로 끌어 내려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깨어났으면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군.”

번쩍.

그리 무겁던 눈꺼풀이 단숨에 들렸다.

“초여름이라도 밤엔 기온이 낮으니까.”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의 화수에게 태연히 중얼거리는 이는 다름 아닌 리 샤오였다. 그제야 화수는 이곳이 홍매루가 아니라는 걸 기억해냈다.

“언제, 오셨습니까.”

“…….”

화수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스르륵, 그 바람에 몸을 덮고 있던 것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뒤늦게 그것이 리 샤오의 코트임을 깨달았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대청마루에 누워 있던 몸이 완전히 체온을 잃었을 터였다. 화수의 물음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새까만 눈동자로 그저 가만히 화수를 응시할 뿐이다.

“도망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말이 없는 리 샤오를 향해 화수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순순했다.

“알아.”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이리 태평하게 누워 잠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서늘한 기운에 움츠러든 화수의 어깨 위로 리 샤오가 코트를 덮어주었다. 이곳에서 화수를 찾았을 때의 기가 막힌 기분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리 샤오를 그리 만드는 건 화수가 유일했다.

“매화가, 아직 안 졌더라구요.”

이미 여름으로 들어선 시기에, 매화라니. 늦되어도 너무 늦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둠 속에서 만개한 여름 매화는 아름다웠다. 마치 새하얀 눈처럼 새하얀 꽃송이들이 빛을 내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렇군.”

주인도 모르는 장소를 용케도 찾아냈다 싶었다. 여기 오기 전까지 이곳에 꽃나무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물론 화수의 생각처럼 매화나무는 아니었지만. 하지만 화수가 착각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진주매珍珠梅 나무는 여름 매화라고 불릴 만큼 매화나무와 똑 닮은 꽃을 피워냈으니까.

하지만 리 샤오는 화수의 착각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꽃나무를 보다 나직이 중얼거렸을 뿐이다.

“꽃구경은, 이것으로 대신하면 되겠군.”

-!

그 순간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냥 지나가듯 툭, 던진 말이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리 샤오의 고개가 화수를 향했다. 하지만 화수의 표정은 갈무리된 뒤였다. 그런 것에는 도가 튼 화수였다.

“기억 못 하면 됐어.”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말간 눈동자를 물끄러미 보던 리 샤오가 늘 그렇듯 말을 물렀다. 이번엔 화수도 오해를 풀지 않았다. 대신 꽃나무로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꽃구경에 술이 빠지면 섭섭하지요.”

“술은 안 됩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쑥 문 너머에서 들려온 단호한 목소리.

이크. 화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피식, 바람소리가 났다. 화수의 표정이 불퉁해진다. 집사도 와 있으면 와 있다고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닙니까. 눈으로 항의하는 화수를 가만히 보던 리 샤오가 뭔가를 떠올린 듯 뒤로 몸을 틀었다.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툭. 대청마루에 내려놓은 뭉치. 그것에서 달큰한 냄새가 훅, 풍겼다. 조금 전 잠결에 맡았던 그 달큰한 냄새가 이것에서 났던 모양.

“뭡니까?”

“…….”

대답은 없었지만 대신 매듭을 푸는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겹겹이 싸놓은 대나무 잎까지 다 펼치자 검은 사탕砂糖물에 잔뜩 절여진 찰떡이 모습을 드러냈다.

“웬, 떡입니까.”

“…….”

이걸 왜.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묻는 화수에 리 샤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곧 길쭉한 눈매가 찌푸려진다. 답지 않게 순순히 대답을 한다 싶었더니. 아마도 잠결이라 그랬던 모양이었다. 괜한 헛수고를 했다고 생각하며 리 샤오가 손을 내뻗었다.

“먹기 싫으면-”

“누가, 먹기 싫다고 했습니까?”

하지만 도로 가져가려는 손을 본 화수가 급히 그것을 제 쪽으로 당겼다. 리 샤오의 손은 허공에서 멈췄지만 화수의 눈에 드리워진 경계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가 막혔으나 먼저 항복선언을 한 쪽은 리 샤오였다.

“안 뺏어가.”

가만히 리 샤오의 손이 뒤로 물러났을 때에야 화수의 경계가 조금 누그러졌다. 달큰한 냄새가 더 짙어졌다. 시선을 내리자 찰기가 자르르한 떡이 눈에 들어왔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이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시장통, 허름한 노점에서나 파는 것을. 이걸 알고 있다는 사실도 신기하지만, 뭣보다 이걸 리 샤오가 사 들고 왔다는 자체가 더 신기한 화수였다.

“그러게.”

“…….”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서 어쩐지 허탈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화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과자를 손에 쥔 아이처럼 화수의 눈이 반짝였다. 내뻗은 손으로 먹기 좋게 잘라놓은 떡 조각을 집어 들었다. 리 샤오의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별다른 핀잔은 없었다.

뚝뚝, 떨어지는 사탕물이 조금 잦아들었을 때 하얀 가래떡을 입안에 쏙 집어넣었다. 식긴 했지만 대신 쫄깃한 식감은 더 깊어졌다. 차진 소리가 입안에서 났다.

“어때.”

구역질이 나지 않나, 묻는 것이었으나 화수는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하나 드릴까요.”

쑥, 손으로 집은 가래떡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아…….”

거절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시선에 화수가 슬그머니 손을 물렸다, 뒤늦게 제 입에 들어갔던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하지만 물러서는 손목을 리 샤오가 붙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그것을 입에 물었다.

무시무시한 맹수에게 먹이를 주는 기분이 이럴까.

순간 손가락째 삼켜지지 않을까 바싹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의외로 섬세한 움직임으로 떡만 살짝 물어 가져간다. 손가락 끝에 살짝 뜨끈한 살덩이가 닿았다 떨어지는 감각이 선연했다.

“왜.”

멍하게 굳어 있는 화수에 리 샤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먹으면 안 되는 거였나?”

“아뇨. 아닙니다.”

화수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 뒤로 물린 손가락을 혀로 훔친다.

할짝. 흘러내린 사탕물을 닦으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조금 전 리 샤오의 혀가 닿았던 곳이기도 했다. 혀끝이 미치게 달았다.

“달군.”

제가 한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리 샤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간단히 사실만을 내놓은 감상이었지만 살풋 미간을 찌푸린 것을 보니 확실히 리 샤오의 취향은 아닌 모양이었다. 화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원래 그 맛으로 먹는 겁니다.”

저도 단것은 질색이면서, 괜한 잘난 척을 해보는 화수였다.

하지만 그중에 절반쯤은 진심이기도 했다. 달큰한 것은 질색인데도 이건 좋았다. 아이를 가지면 입맛이 변하는 모양이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주제에 어미의 몸을 멋대로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아비를 똑 닮은 모양이었다.

아, 그래서 찰떡같이 알아차리고 사 온 건가. 어떻게 알고 사 왔는지 신기하다 했는데 조금 납득이 된 화수였다.

그 때였다.

“너무 많이 먹지 마십시오.”

저녁 또 못 드시려구요. 군것질만 하는 어린아이를 혼내듯 잔소리를 하며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둬.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건데.”

슬그머니 들었던 찰떡을 놓는 손을 보고 리 샤오가 집사를 향해 한마디 했다. 오늘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다행히 이건 잘 먹어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괜한 초를 치는 집사에 리 샤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온갖 좋은 음식을 다 놔두고 하필 이런 걸로 배를 채우시니 그러지요.”

“…….”

“죄송합니다.”

급히 변명했지만 리 샤오의 표정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집사의 입에서 잘못을 비는 말이 흘러나왔다.

“드십시오.”

“…….”

입은 꾹 다물고도 제가 원하는 대로 사람을 부리는 건 둘이 똑 닮았다. 입도 손도 움직이지 않는 화수에게 집사가 애원하듯 덧붙였다.

“부탁입니다.”

그러면서 흘낏, 리 샤오를 시선으로 가리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화수가 먹지 않으면 본인이 리 샤오에게 아주 곤란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슥.

그제야 물러났던 손이 다시 찰떡을 집었다. 뒤늦게 맨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집사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이번에도 저 손을 멈추면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에 잔소리를 입안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대신 조금 전 하려다 못 한 말을 다시 이었다.

“마실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다기상을 든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마실 것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던 화수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이쯤 되니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좀처럼 포기를 모르는 녀석답다 싶어서 피식, 하고 입꼬리를 올리는 순간 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시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인다. 아마도 건방지게 주인과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탓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고개를 숙인 시종의 볼이 발그레 붉어져 있었다. 자꾸만 힐끔거리는 시선이 리 샤오를 향한다.

다기상을 내려놓은 시종이 다기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나는 내가 알아서 따라 먹을게요.”

불쑥, 찻잔 위로 새하얀 손이 덮였다. 다행히 시종이 재빠르게 손을 물려 그런 불상사는 없었지만 하마터면 손 위로 뜨거운 차가 쏟아질 뻔했다.

“내가 하지.”

사실 시종의 잘못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화수의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리 샤오의 목소리는 굳어 있었다. 어쩔 줄 모르고 굳어 있는 시종에게 집사가 물러나도 된다는 듯 고갯짓을 했다. 시종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곧 다기를 놓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골 부려도 술은 안 돼.”

나직이 한숨을 내쉰 리 샤오가 불퉁하게 앉아 있는 화수를 향해 말했다.

“누가 뭐랬습니까.”

억울하다는 기색이 번졌지만 리 샤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마주 보던 화수가 됐다는 듯 어깨를 주저앉혔다. 그러고는.

탁탁.

따라보라는 듯 다기상을 두드린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리 샤오도 별다른 말 없이 다기를 쥐었다.

쪼르륵.

흑빛에 가까운 붉은 찻물이 잔에 따라졌다. 잔에 그려져 있던 작은 물고기들이 선명해졌다. 찻잔이 마치 물고기들이 물속을 노니는 작은 연못 같았다.

작은 연못을 들어 홀짝였다.

쌉싸름한 맛이 입안에 가득 차올랐다. 살짝 올라가는 화수의 눈썹을 본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보이찹니다.”

“…….”

“몸을 따뜻하게 해줄 겁니다.”

무려 30년짜리 보이차라, 웬만한 보약보다 더 몸에 좋지요. 덧붙이는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제 나이보다 더 오래된 차라니. 가격이 얼마나 비쌀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물론 이곳에서 그걸 신경 쓰는 이는 저밖에 없겠지만.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슥.

화수의 앞으로 꿀떡이 바싹 다가왔다. 먹기 싫으면 그건 관두고 이것을 먹으라고.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화수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손이 움직였다.

흐응.

역시 가격을 알 수 없는 고급 차보다는 이쪽이 더 저와 맞았다. 손에 묻은 사탕물을 쭉 빨면서 화수는 가볍게 결론 내렸다.

* * *

“오셨습니까.”

현관을 들어서는 리 샤오에게 집사가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리 샤오의 시선은 그 너머 삐죽 고개를 내민 새하얀 얼굴에 닿아 있었다.

“그거, 뭡니까?”

인사도 없이 그의 손에 들린 꾸러미를 묻는 건방진 태도에도 리 샤오는 크게 기분이 상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들고 있던 꾸러미를 화수를 향해 내밀며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찐빵.”

탁, 낚아채듯 가져간 화수의 손이 빠르게 꾸러미를 풀었다. 바로 앞에서 사기라도 한 듯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꾸러미를 풀자 새하얀 찐빵이 눈에 들어왔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화수가 허겁지겁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도 씻지 않으시고.”

집사의 잔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화수는 꺼내 든 찐빵을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있었다.

“앗, 뜨, 뜨.”

겉보다 속에 든 단팥이 더 뜨거웠던 모양. 발까지 동동 구르는 화수에 리 샤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뱉어.”

황급히 손을 내밀자 화수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마치 먹을 것을 빼앗기기라도 한 듯 경계하는 시선에 리 샤오가 기가 막히다는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렸지만 화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벌리고 뜨거운 기운을 뿜어내다 입안에 있던 것을 냉큼 삼켰다.

“안 뺏어 먹으니까.”

조금 전 경험을 했으면서도 다시 찐빵을 덥석 물려는 화수에 리 샤오가 그 손을 붙들었다. 나직이 말하고 있었지만 이를 꽉 문 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치를 살피는 화수에 리 샤오가 손에 들린 찐빵을 가져가 반으로 쪼갰다. 그리고 식은 것을 확인한 후 화수의 입에 집어넣었다. 입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것이 사라지기 무섭게 다시 조각낸 찐빵 조각이 입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어떻게 매번 이렇게 먹고 싶은 걸, 아니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던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오지.

아기 새처럼 찐빵을 받아먹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화수는 몰랐다. 그 비밀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밀 중 가장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비밀이 되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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