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10/21)

09.

“저기.”

대청마루에 앉아 볕을 쐬고 있던 화수가 고개를 틀었다. 쭈뼛거리던 얼굴이 화수와 눈이 마주치자 볼이 발갛게 익는다.

왜. 눈으로 묻는 화수에 뒤늦게 시종의 입이 열렸다. 물론 시선은 살짝 빗겨간 채.

“볕에 너무 오래 계시면 일사병으로 쓰러지실 수도 있습니다.”

“…….”

그리 약골은 아닌데. 사고뭉치 취급은 많이 받아봤지만 이런 공주님 취급은 낯선 화수였다. 물론 제가 아니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걱정하는 것이겠지만.

“그래서.”

“…….”

나른한 목소리에 빗겨 있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방으로 돌아가라고?”

“아뇨. 아뇨. 뒤로 좀 오셔서, 그늘에 앉으시면…….”

시종의 머리통이 과격하게 좌우로 움직였다.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보고만 있는 화수에 덧붙이는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고개도 덩달아 아래로 떨궈진다.

“됐지?”

거의 땅에 닿을 듯 떨어졌던 고개가 발딱 들렸다. 어느새 대청마루 끝에 다리를 내리고 앉아 있던 화수가 뒤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우십니까?”

“괜찮아.”

“하지만, 낯색이 창백한데요.”

원래 타고나기를 창백한 낯색을 가지고 태어난 화수지만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리 보일 수도 있었다. 힘없이 비적거리는 움직임도 한몫했다.

“시원한 화채라도 가져올까요.”

“됐어.”

어젯밤 도련님과 있을 때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일을 기억해 물은 것인데 딱 자른 거절이 돌아왔다.

“허면 어제 도련님이 사 오신 콩국은-”

“음식 얘기만 들어도 속 뒤집어질 것 같으니까, 하지 마.”

“죄송, 해요.”

그렇게 말하는 화수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조금 전 낯빛은 하얀 것도 아니라는 듯 급격하게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니 어제는 잘 드시지 않았느냐고 되물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냥 물이나 가져다줘.”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시종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화수가 툭, 하고 한마디 했다.

“네?”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몰라서 되물은 것은 아니었다. 언제 풀죽었냐는 듯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네! 엄청 시원한 우물 물로 떠 올게요!”

외치듯 말한 시종이 후다닥 달려가버린다. 뭐 그렇게까지 엄청 시원한 물은 아니어도 된다고 말하려던 화수의 입술은 도로 닫혔다.

늘 말이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류만 보다가 활기찬 보통 사람을 보니 적응이 되질 않았다. 물론 적응할 생각도 필요성도 느끼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풀죽은 시종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음식들은 분명 어젯밤 자신이 맛있게 먹어치운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지금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일었다. 당사자도 기가 막힌데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멋대로인 제 상태를 이해하는 건 리 샤오밖에 없었다. 이해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쪽에 가까웠지만.

황당해하는 반응을 보니 이제야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깨닫는 화수였다. 이런 일은 이미 몇 번 겪어본 마냥 태연한 태도를 보이던 리 샤오를 떠올리자 기분이 기묘했다.

진짜 몇 번 겪어본 거 아냐?

본래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리 샤오이지만 저보다도 태연하고, 능숙해 보이던 것을 보면 그런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하긴. 신기한 게 그것만이겠냐마는. 어제만 해도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심지어 물만 마셔도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서 골골대고 누워 있는 화수의 앞에 퇴근한 리 샤오가 손에 들린 것을 내려놓았다.

콩국이었다.

콩국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먹지 못할 것 같았는데 통에 담긴 뽀얀 물을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한입 맛만 보고 못 먹겠으면 버리면 된다고, 무심히 말하는 말에 화수가 그럼 한 모금만, 하고 용기를 냈고 입을 대자마자 그대로 통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마셔버렸다. 마지막엔 바닥에 깔린 묵까지 딸딸 긁어 먹었다.

어쩐지 아쉬운 표정을 짓는 화수에게 화채를 먹을 거냐고 물은 이도 리 샤오였다. 노점상에 첫 수박이 나왔길래 사 왔다고. 사탕가루는 뿌리지 않아도 될 만큼 다디달다고. 신기하게도 또 군침이 돌았다.

물론 지금은 생각만 해도 신물이 올라오지만 어쨌든 어제는 그랬다. 한번 맛있게 먹었다고 두 번 권하는 법도 없었다. 마치 그것이면 되었다는 듯 새로운 것을 가져왔다. 꼭 제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이 다 알고 있으니 정말 여러 번 겪어본 일이 아닌가 의심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변명하며 화수는 가만히 문에 머리를 댔다.

확실히 볕이 강했던 모양이었다. 달궈진 이마가 뜨끈했다. 그늘로 옮기라던 충고를 듣길 잘했다 싶었다.

강한 볕 아래에서도 새하얀 꽃송이들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때를 놓친 매화를 피운 줄 알았던 그 꽃나무는 사실 매화나무가 아니었다. 여름 매화라고 불리는 꽃을 피우는 진주매珍珠梅 나무라며 묻지도 않은 정보를 알려주는 시종의 말에 화수도 그제서야 눈앞의 꽃에 제가 아는 매화와 달리 진주 같은 동그란 알맹이들이 달려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것도 모르고 매화가 아직 지지 않았다는 둥, 아는 척을 했으니.

바보 같았겠지.

그때 순간적으로 리 샤오가 왜 그런 묘한 표정을 지었는지를 뒤늦게 알았다. 틀린 것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 하여간 성격이 나빴다.

매화나무가 아니라는 걸 알았음에도 화수는 틈만 나면 이곳을 찾았다. 그나마 이 집에서 가장 편한 장소였다.

“또 여기 계셨습니까.”

화수의 고개가 들렸다. 머리를 문에 댄 채라 저절로 삐딱하게 올려다보게 된 시선에 찌푸린 표정을 한 이가 보였다. 집사였다. 가만히 내려다보던 집사의 눈이 더 살짝 찌푸려진다. 그리고 묻는다.

“열이 나십니까?”

손이 내려왔다. 조금 붉어진 화수의 낯색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확실히 눈썰미가 귀신같았다. 다가오는 손을 슬그머니 피하면서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볕을 쬐었더니.”

“…….”

주름진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진다.

“물주머니를 준비하라고 하지요.”

“뭐, 할 말이 있어서 오신 거 아닙니까?”

발길을 돌리는 집사의 발이 멈췄다. 정중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괜한 걱정은 그만두고 용건이나 말하고 꺼져라, 라는 의미였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집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처음 봤을 때 외모만 보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꽤나 성격이 있는 사내였다.

사내라 그런가. 보통 곤은 순종적이고 수동적인데 눈앞의 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배 속의 애기씨만 아니면 붕이라고 해도 믿을 성격이었다. 처음 왔던 날부터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지 않았던가. 지금은 잠잠하지만 집 안의 모든 식솔들이 다 느낄 정도로 무시무시한 패기를 뿜었던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잊을 수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 패기를 느낀 순간 집사는 거의 반쯤은 체념했었다. 이 정도로 리 샤오가 화가 났다면 상대는 살아남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화수는 살아남았다. 그렇게까지 화가 났으면서 본능적으로 힘을 거둔 쪽도 리 샤오였다. 사실 집사는 리 샤오가 패기를 뿜었다는 쪽보다 그것을 거두었다는 쪽이 더 충격이었다.

“아니십니까?”

빤히 저를 보고만 있는 집사에 화수가 거듭 물었다. 기분이 상할 만도 한데 또 표정에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예의 나른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 하지만 제 실수를 깨달은 집사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잊고 있었던 이곳에 온 용건을 꺼냈다.

“그만 방에 돌아가셔야겠습니다.”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던 화수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진다. 호의를 거절했다고 당장 쫓겨나게 되다니. 조금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정말 괜찮-”

“돌아가셔서 외출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하지만 화수의 생각과 달리 집사가 방으로 돌아가라고 한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멈칫해 있던 화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외출, 이요?”

“네, 곧 차가 도착한다고 하니, 빨리 움직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뭘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아니었던 모양. 지금의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가늠하듯 눈을 굴리고 있으려니 재촉하듯 집사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화수는 그 손을 잡는 대신 제 손으로 바닥을 딛고 일어났다.

주름진 손이 도로 물려졌다. 그 정도는 예상한 일이라 그리 민망하지는 않았다. 쉽게 곁을 주지 않는 괭이처럼 화수는 경계심이 강했다. 화수가 접촉을 허락하는 건 리 샤오뿐이었다.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그랬다. 뭐 이해는 되었다. 경계 심한 괭이도 밥을 주는 이에게는 곁을 내주는 법이니까.

먼저 앞서는 집사의 뒤로 경계심 강한 괭이가 따라붙었다. 그것을 확인하며 집사도 속도를 조절했다. 뒤따르던 화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어딜 가는 건데요?”

외출이라니. 물론 차를 타고 옮겨지겠지만 한동안은 바깥 구경 같은 건 엄두도 못 내겠다고 단념하고 있던 터에 외출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뭔가 기분이 얼떨떨했다.

“글쎄요. 저는 차를 보낼 테니 준비시키라는 명령밖에는 듣질 못해서 말입니다.”

“…….”

“직접 물어보시는 게 빠르실 듯합니다.”

“…….”

대답은 없었지만 뒤따르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하지만 걸음을 내딛던 집사의 걸음이 멈칫했다. 쿵쿵쿵, 마룻바닥이 울리는 소리를 느낀 탓이었다. 순간 긴장한 집사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조금 전 물을 뜨러 갔던 시종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오던 시종도 집사를 발견하고 황급히 걸음을 멈췄다. 덕분에 손에 들린 대접에서 물이 흘러넘쳐 바닥을 적셨다.

“어딜 갔다 오는 게야.”

“물을, 뜨러.”

목까지 찬 숨에 헐떡이면서도 대답을 토해내는 모습이 안쓰러울 만도 하건만 시종을 보는 집사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아니, 오히려 더 험악해졌다.

“내가 주방에서 오는 길인데, 왜 나는 그곳에서 너를 보지 못했을까.”

“우물을, 다녀, 왔습니다.”

시종의 변명에 집사의 미간 주름에 숫자만 더해졌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이분의 주변에서 항시 대기하라 명령했을 텐데.”

“…….”

이번엔 시종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흘낏, 할 말이 없어진 시종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집사의 뒤에 선 화수에게 닿았다. 하지만 화수는 입을 꾹 다문 채 늘 그렇듯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시종이 포기한 듯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요.”

“이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하고, 얼룩지기 전에 바닥부터 닦거라.”

“지, 집사어른.”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말에 시종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지만 집사는 차갑게 돌아섰다.

“내가.”

엎드려 앉은 시종이 옷자락으로 바닥을 닦는 것을 흘낏, 본 화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물론 시종에게는 그 목소리가 닿지 않을 거리만큼 떨어진 뒤였다.

“우물 물로 가져오라 했습니다.”

“…….”

멈칫. 집사의 걸음이 멈칫했다. 말간 눈과 마주했다.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이 열렸다.

“시원한 게 마시고 싶어서.”

“……어쨌든 오래 자리를 비운 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내젓는 집사에 화수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다.

“일단 난 사실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

괜한 편을 들려고 하는 말인가 싶었지만, 순순히 뒤로 물러서는 모양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던 모양. 경계했던 집사의 마음도 조금 누그러졌다. 사실 착한 척을 할 요량이었으면 조금 전 시종의 앞에서 편을 들어줬겠지. 이렇게 뒤늦게 둘만 있을 때 말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일단 찝찝하니 사실은 말하는데 벌을 주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라는 태도에 가까웠다.

“벌을 줄 때 참고하지요.”

집사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물론 정말로 벌을 줄 생각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순순히 물러서기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화수는 가만히 어깨를 으쓱였을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사가 몸을 틀었다. 알면 알수록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내딛는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찰딱찰딱, 뒤로 가만히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렸다. 기분 좋은 소리였지만 그럼에도 버선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타닥.

현관문을 나서 돌바닥을 딛는 걸음이 낯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어가는데 단 한 번도 현관을 넘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건물 안의 공기와 바깥공기가 크게 다를 것도 없는데도 코끝에 닿는 공기가 상쾌했다.

영문을 모르는 외출이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화수의 걸음이 빨라졌다. 평소와 달리 이번에는 화수가 앞서서 걷고 있었다. 반쯤 열린 대문을 좀 더 밀자 묵직한 문이 소리도 없이 밀렸다.

눈앞에 검은 자동차가 보였다. 어두운 차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화수의 눈에는 뒷좌석에 앉은 리 샤오의 모습이 보였다. 그려놓은 듯한 이마와 코, 남자다운 입술, 깎아놓은 듯한 턱 선까지. 사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모습이었다. 심장이 옅게 뛰었다. 얼굴로 열이 몰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힉.

문득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리 샤오와 떡하니 눈이 마주쳤다. 긴 눈매가 살풋 구겨진다. 몰래 훔쳐보고 있다 들킨 화수 역시 얼굴을 찌푸렸다. 찌푸린 얼굴을 본 사람은 화수만은 아니었던 모양.

“제가 모시지요.”

미리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이가 재촉하듯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딸칵. 문이 열리고 리 샤오의 군홧발이 바닥을 디뎠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저벅저벅.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침묵을 뚫고 리 샤오가 걸어왔다. 군홧발에 흙 알갱이가 부서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내 옷이군.”

바싹 졸아붙은 것이 무색하게도 다가온 리 샤오가 화수를 향해 처음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굳어 있던 화수의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진다.

“기억하십니까.”

“…….”

반사적으로 고개가 뒤쪽을 향했지만 집사의 표정은 태연했다.

“준비된 외출복이 없어 급한 대로 도련님께서 10대 때 입었던 옷을 조금 손봤습니다.”

“…….”

전혀 몰랐다. 어린 시절에 입는다면 험하게 입는 것이 보통 아닌가. 물론 새것은 아닌 듯했지만 헤지거나 닳은 곳은커녕 얼룩 하나 없이 새 옷처럼 깨끗한 이 옷을 누가 남이 입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조금은 질리는 기분에 괜스레 옥색 심의深衣의 옷깃을 만지고 있으려니 리 샤오의 손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화수가 구긴 부분을 다시 매만진다. 그러느라 목에 손이 닿았다. 닿았던 곳에서 열기가 일었다. 긴장해서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도 모르겠는 화수와는 달리 리 샤오는 태연히 중얼거린다.

“그럼에도, 좀 큰 것 같은데.”

“워낙 마르셔서.”

리 샤오가 매일 먹을 것을 갖다 바치고는 있지만 사실 먹는 양으로 치면 기껏해야 한 끼 정도밖에 되지 않고, 영양가보다는 먹을 수 있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터라 화수의 몸은 이전보다 더 마른 상태였다.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이던 표정이 집사의 그 말에 살짝 구겨진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화수를 위아래로 훑어 올리는 것으로 표정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른 옷도 다 손봐둬.”

“예.”

괜히 남의 옷을 멋대로 입은 것이 되어 마음이 불편하던 화수와 달리 집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화수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리 샤오의 손이 닿았던 곳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아니면 붉어진 목덜미를 들킬 것 같았다.

“그럴 필요-”

“그럴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정한다고 했을 텐데.”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일갈이 돌아왔다.

“말씀은 차에서 나누시는 게 어떨까요.”

분위기가 더 나빠지기 전에 카이가 끼어들었다. 다행히 리 샤오도 크게 문제 삼을 생각은 아니었던지 방향을 틀었다. 차로 돌아가는 리 샤오를 가만히 보고 있던 화수도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다녀오십시오.”

두 사람을 향해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막 차에 오르려던 화수가 집사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차 안으로 사라졌다. 문을 잡아주고 있던 리 샤오도 그 뒤를 따라 차에 올랐다. 카이마저 차에 오르자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검은 자동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끙.

흙먼지가 이는 곳을 멍하니 보던 집사가 몸을 돌리다 무릎을 짚었다.

“괜찮으십니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시종이 황급히 집사의 몸을 부축했다.

“빨래를 걷으라고 해.”

부축을 받던 집사가 입을 열어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시종에게 집사가 덧붙였다.

“비가 올 모양이다.”

새파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지만 무릎이 시큰거리는 것을 보니 확실했다. 아.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서던 집사의 시선이 문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차는 모습을 감춘 지 오래.

뭐, 차로 이동하는 것이니 괜찮겠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집사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통증이 심상치 않은 것이 아무래도 꽤나 쏟아질 모양이었다.

* * *

“도착했습니다.”

차가 멈춰 선 곳은 예상외로 평범한 곳이었다. 그런 생각을 리 샤오가 알았다면 평범한 곳이 아닌 뭐 이상한 곳에 데려가는 줄 알았냐고 기가 막혀했을 테지만 다행히 화수의 머릿속으로만 되뇌인 것이라 그런 불상사는 없었다.

현관 밖으로 나가는 것도 질색하며 사람까지 붙여놓았던 리 샤오가 웬일로 외출을 시켜주나 했더니.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리 샤오가 직접 이곳을 방문하는 일은 흔치 않음을 화수는 알지 못했지만.

“뭐 해.”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점포를 보고만 있으려니 어느새 리 샤오가 차에서 내려 문을 잡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화수가 황급히 몸을 움직였고, 그런 그를 확인한 리 샤오가 상체를 뒤로 물렸다.

차에서 내리자 익숙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물론 점포의 진열창에 세워진 옷본은 어느새 다른 옷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이전에 왔을 때와는 계절이 달라져 있었다.

“오셨습니까.”

지난번과는 달리 문밖까지 마중을 나와 있던 장 선생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직접 가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방문을 하겠다는 연락에 의아해했던 것은 언제였냐는 듯.

“이제야 뵙네요.”

장 선생의 시선이 화수를 향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봉을 하러 오라는 연통을 준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완성된 옷을 입은 화수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바람에 밤잠까지 줄여가면서 그의 것을 빠르게 작업했던 장 선생이었다. 그래서 평소 한 달은 족히 걸리는 작업을 일주일 만에 해치워버리고 연통을 주었는데, 그런 고생이 무색하게 언제 들르겠다는 답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

장 선생의 묘한 인사말에 화수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번졌다. 화수의 시선이 슬그머니 리 샤오를 향했지만 당연하게도 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선생님.”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킨 것은 카이였다.

“이야기는 들어가서 마저 하시는 게 어떨까요.”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귀한 분들을 이리 세워두고, 죄송합니다. 들어가시지요.”

뒤늦게 손님을 길가에 세워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장 선생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정작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리 샤오는 태연히 걸음을 옮길 뿐이다.

“어? 오늘은 들어가시나요.”

전에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카이가 뒤를 따르는 것을 보고 화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은 저도 볼일이 있거든요.”

“이거.”

뒤늦게 화수가 입고 있던 옷을 확인한 장 선생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어째서 네가 리 샤오 님의 옷을 입고 있냐고 기막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화수가 살짝 굳었다.

“대체 누가 고친 겁니까. 품도 하나도 맞지 않고, 뭣보다 소매가 너무 펑퍼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리 화수가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장 선생이 그런 반응을 보인 까닭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요즘은 이리 넓은 것은 입지 않는단 말입니다.”

“…….”

제게 선택권이 없기는 했지만 사실 선택권이 있을 때조차 그가 말하는 유행 같은 건 한 번도 신경 써본 적이 없는 화수인 터라 어색하게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화수의 시큰둥한 태도에 애가 타는 건 장 선생뿐이었다.

“아까운 몸, 이리 쓰실 거면 차라리 저 주십시오.”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가벼운 농이라는 것을 그곳에서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장 선생.”

적당히 하지. 나직이 덧붙이는 목소리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할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물론 리 샤오가 괜한 시간낭비를 아주 싫어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리 샤오의 반응은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단순히 수다는 그쯤하고 그만 할 일이나 하라는 말이라기엔 급격히 낮아진 방 안 온도를 눈치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제 사과에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분위기에 장 선생의 시선이 도움을 요청하듯 카이를 향했다.

제가 무슨 큰 실수라도. 눈빛으로 묻는 장 선생에 카이가 농담은 그쯤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그제야 장 선생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대신 재단을 마친 옷본을 화수의 몸에 걸쳤다. 그리고 그것을 꼼꼼히 확인해간다. 남는 곳이 없는지, 혹 너무 붙진 않는지, 화수의 몸에 딱 맞게 옷핀으로 고정시켜가면서 상태를 확인했다. 마치 춤이라도 추듯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던 손이 멈춘 것은 화수의 허리를 확인할 때였다.

“이상하네요.”

모두의 시선이 장 선생에게로 향했다. 물론 그렇게 모인 시선은 등지고 선 장 선생이 아닌 화수와 마주치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뭐가.”

정작 질문을 던진 것은 당사자인 화수가 아닌 리 샤오였다. 그사이 줄자까지 꺼내 치수를 잰 장 선생이 조수가 들고 있던 치수표를 확인한다. 그러더니 조금 전보다 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착각한 게 아니라 정말 허리가 좀 늘었네요.”

“…….”

장 선생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혹, 건강에 무슨 문제라도…….”

전체적으로 살이 찐 거면 모르겠는데 심지어 다른 곳은 다 살이 내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배만 급격하게 치수가 늘었으니 몸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었던 것.

“괜찮아.”

하지만 이번에도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는 화수를 대신해 대답한 쪽은 리 샤오였다.

“배 속에 아이가 있는 거니까.”

“…….”

처음엔 무슨 소린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장 선생의 얼굴이 환한 낮색으로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런 거였군요. 어쩐지 이상하다 했습니다.”

“…….”

오히려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 이유는 화수가 남자여서라기보다는 리 샤오가 사내와의 사이에서 씨를 봤다는 것이 더 믿기지 않아서가 컸다.

“축하드립니다.”

물론 그런 속내는 가만히 입안으로 삼키고 축하인사를 건네는 장 선생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축하할 일이 겹쳤네요. 아니, 아무래도 배 속의 아기씨가 복덩이인 모양입니다.”

제 일처럼 기뻐하는 장 선생이 신기한 화수였지만 묻고 싶은 바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축하할 일이, 또 있습니까?”

“아, 모르셨습니까? 이번에 공석이 된 정무국장 자리에 리 샤오 님이 내정되셨다는 소문이 파다한 것을요.”

“소문이야.”

“제가 듣기로는 리 샤오 님이 수락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하던데요. 그래서 올해 생일잔치에 그리 공을 들이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리 샤오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물론 장 선생의 말에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고, 일의 원흉이 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건 우리 집 집사가 멋대로.”

몇 해만에 겨우 도련님 생일상을 차릴 수 있게 되었는데 손님 몇 분만 초대하면 안 되겠냐고, 언제 고꾸라질지 모르는 늙은이가 앞으로 도련님 생일상을 얼마나 더 차릴 수 있겠냐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늙은이 소원이다 생각하고 자신에게 모든 걸 맡겨주면 안 되겠냐고 바닥에 이마를 대고 부탁하는 반백의 노인의 말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을 뿐인데,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리 샤오였다.

“아…….”

어쩐지. 시끄러운 것은 질색하는 리 샤오가 답지 않게 성대한 생일잔치를 준비하고 있다는얘기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물론 덕분에 리 샤오가 국장으로 승진한다는 소문은 더 날개를 다는 결과를 도래했지만.

못마땅한 기색이 점점 짙어지는 리 샤오에 장 선생도 더 이상은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허면, 아예 재단을 다시 해야겠네요.”

앞으로 배가 더 나올 텐데. 최대한 늘인다고 해도 만삭인 임산부에게는 턱도 없었다.

“됐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장 선생에게 리 샤오의 대답이 돌아왔다.

“예? 하지만.”

장 선생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혹, 시간 때문이라면 제가 이걸 최우선으로-”

“이건 손대지 말고 전의 치수대로 만들어둬.”

혹시나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 싫어서인가 싶어 황급히 덧붙여보지만 돌아온 말은 딱 자른 거절뿐. 결국 장 선생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지요.”

생각해보니 어차피 생일잔치에 참석하지 않으면 굳이 임산부가 이런 옷을 입을 일이 없을 것 같기는 했다. 아무리 제 아이를 가진 사람이지만 사내에, 그것도 정식으로 결혼을 한 사이도 아닌데 중요한 사람들이 다 참석하는 자리에 내놓기는 좀 그럴 테니까. 지금까지 꽁꽁 숨겨두고 있었던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혼자만의 결론을 내고 있을 때였다. 그런 장 선생의 추측을 비웃듯 리 샤오가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입을 수 있는 걸 하나 더 만들어. 내 생일 날에 맞춰서 입을 수 있게.”

“…….”

“비용은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까.”

아마도 멍하게 있는 장 선생을 얼마 남지 않은 날짜에 일정을 맞추기가 힘들어서 그런 것으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황급히 장 선생이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최대한 일정을 조절해보겠습니다.”

물론 비용을 더 많이 지불하지 않아도 화수의 옷이라면 최우선으로 작업이 진행되겠지만 굳이 준다는 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비싼 돈을 들이면 그만큼 좋은 물건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

“허면 치수를 다시 재야 하니, 그사이에 리 샤오 님과 카이 님은 완성된 옷을 입어보시지요.”

사실 오늘 방문의 주목적은 화수가 아니라 리 샤오에게 있었다. 한 번의 가봉을 거친 리 샤오의 것은 이미 완성단계였다. 응접 의자에 앉아 있던 리 샤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얌전히 있어.”

물론 그러면서도 경고의 말은 잊지 않았다. 그것을 본 장 선생이 한마디 한다.

“그 잠깐 떨어지는 것도 그리 걱정되십니까.”

“…….”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도망치지 마라, 라는 경고일 뿐인데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리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리 오십시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리 샤오와 카이가 안내하는 조수를 따라 사라졌다. 보통 때와 달리 카이가 왜 함께 들어왔나 했더니 궁금증이 풀렸다. 물론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지만.

“팔 좀.”

장 선생의 부탁에 화수가 황급히 팔을 들어 올렸다. 정작 함께 있을 땐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더니 사라지기 무섭게 뒤만 흘낏거리고 있는 화수를 보고 좋을 때다 싶은 장 선생이었다.

“저기.”

잰 치수를 모두 기입한 종이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을 때였다. 내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인형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던 화수의 입이 처음으로 열린 것이라 장 선생의 관심이 높아졌다.

“말씀하십시오.”

머뭇거리는 화수에게 뭐든 대답해주겠다는 듯 너그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다행히 화수의 입술이 열렸다.

“생일이, 언젠가요?”

“예? 아, 리 샤오 님 생일 말씀이십니까.”

“…….”

대답은 없었지만 당연한 말이었다. 화수가 제 생일을 물어볼 일은 없으니까.

“딱 보름 남았군요.”

“……보름이요.”

“얼마 남지 않았지만,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어떻게든 그날까지는 입으실 수 있게 해드릴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당연히 제 옷이 그 안에 완성될 수 있는지 걱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장 선생의 호언장담에도 화수의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옷 같은 건 사실 상관없었다.

“그럼-”

“궁금한 게 있으면 본인한테 묻지?”

흠칫. 화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문 쪽이 보이는 곳에 서 있던 장 선생은 리 샤오가 오는 걸 알아채고 있었지만 등을 지고 서 있던 화수로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터라 그대로 굳었다. 왜 말해주지 않았냐고 장 선생을 보는 눈에 원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뒤늦게 장 선생이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사실 흉을 보고 있던 것도 아니라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화수 입장은 조금 달랐던 모양.

“불편하신 곳은 없습니까.”

일단 장 선생이 화제를 돌렸다.

“전혀.”

“그럴 줄 알고 있었습니다.”

기쁜 표정으로 저를 스쳐 리 샤오를 향해 걸어가는 장 선생을 따라 화수도 몸을 돌렸다.

-!

그리고 그 순간. 별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던 화수가 숨을 삼켰다. 사실 옷을 입어보러 갔으니 제복이 아닌 정장을 입고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눈으로 보는 건 전혀 달랐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하는 장 선생이 하라는 대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주던 리 샤오가 뒤늦게 화수와 눈을 맞췄다.

순간 그린 듯한 눈매가 살풋 구겨진다. 그러더니 한일자로 닫혀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왜. 이상해?”

멍청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화수를 아마도 오해한 모양이었다.

“이상하다니, 그럴 리가요.”

입술만 달싹이는 화수를 대신해 장 선생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모습을 보고 이상하다고 말하면 정말 눈이 어떻게 된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카이 님?”

“예? ……아, 그렇지요.”

뒤늦게 등장했지만 질문만으로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린 카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리 샤오의 표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리 샤오의 시선은 화수에게 닿아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화수에게 향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가볍게 대답할걸. 시선이 집중된 상황에서 말하려니 더 민망해졌다.

“안 이상합니다.”

결국 장 선생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화수가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가 이상하면 어쩌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입술을 타고 나오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이제 됐겠지. 그렇게 안심한 화수를 비웃듯 리 샤오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상하진 않지만, 별로라는 건가?”

“…….”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입으로 칭찬을 들을 모양이었다. 잘 어울린다. 멋있다. 사실 평소라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해줬을 말인데 화수가 지금 입술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로 눈앞의 리 샤오가 멋있었기 때문이다. 민망한 것도 민망한 것이지만 진심을 내보이는 건 화수가 가장 서툴러하는 일이었다.

진짜 이러시깁니까. 화수가 눈으로 항의했지만 리 샤오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다시 만드는 게 좋겠군.”

“멋있다구요.”

아예 옷을 벗으려는 리 샤오의 움직임에 달싹이던 입술이 열렸다. 망설이거나 생각할 틈 같은 건 없었다.

“너무 멋있어서 놀란 것뿐입니다.”

“…….”

말하라고 사람을 몰아붙여놓고 정작 아무 말도 없이 빤히 보고만 있는 리 샤오에 화수가 얼굴을 확 찌푸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와 흘러내린 옷자락을 도로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니까 벗지 마세요.”

그리고 덧붙였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물론 마주한 리 샤오의 얼굴은 만족한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 보십시오.”

눈치를 보던 장 선생이 끼어들었다.

“그럴 리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그렇지. 제가 만든 옷이 실패할 리가 없었다. 물론 그 최초의 경험을 조금 전에 할 뻔했지만.

“딱히 손볼 곳은 없군요.”

입었을 때 불편한 곳은 없다고 했으니 마지막으로 소매와 바짓단의 길이를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는 종료선언이 떨어졌다.

“그만 갈아입으셔도 됩니다.”

“입고 가지.”

내내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리 샤오가 불쑥 입을 열고 말했다.

“예?”

“왜. 안 되나?”

놀라는 장 선생의 반응에 리 샤오가 되묻는다. 장 선생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옷의 주인이 입고 가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이 옷이 곧 있을 생일날에 맞춰 주문한 옷이라는 것만 빼면.

“허면 타이도 가져오겠습니다.”

사내의 칭찬에도 여전히 표정은 좋지 않아-사실 오히려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걱정했는데 그래도 빈정이 상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 망가트리려고 입고 가겠다고 한 건 아니겠지. 문득 든 생각에 걸음이 잠시 멈칫했지만,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카이에 장 선생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카이 님도 입고 가시겠습니까.”

“아뇨. 전.”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역시 난처한 기색이 돌아왔다. 이후에 중요한 일정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본인에게 묻는 것이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지금의 리 샤오에게 물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곳에서 리 샤오를 가장 편하게 대하는 이는 화수뿐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굴어도 봐주는 이는 화수뿐이라고 하는 것이 맞았다.

“어디 가.”

카이와 장 선생, 두 사람이 응접실에서 사라지고 멀뚱히 서 있던 화수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려 할 때였다. 제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들켰다.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하자 잘못한 것도 없이 괜스레 뜨끔했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화장실 좀.”

“…….”

“그것도 안 됩니까?”

“다녀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수의 멈췄던 발이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발치를 보는 것보다 뒤에 앉은 리 샤오가 더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문을 통과한 뒤에야 화수는 앞을 보고 걸었다. 푹신한 카펫이 깔린 길게 난 복도를 통과해 화수가 막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화장실은 반대편입니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카이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수가 가려던 왼쪽은 출입구가 있는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황하리라고 생각했던 화수는 오히려 카이를 보는 순간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잘됐다.”

거짓으로 만들어낸 기색도 아니었다. 아무리 거짓말을 잘하는 이라도 동공 안쪽부터 밝아지는 기색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법이니까.

덕분에 당황한 쪽은 카이였다.

“저기, 미안한데.”

바싹 제 쪽으로 다가서는 화수에 더 당황했다.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카이에게 고개를 바싹 들이민 화수가 입을 열었다.

“돈 좀 빌려주세요.”

“…….”

“안 떼먹어요.”

멍하게 서 있는 카이를 오해한 모양이었다.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화수에 카이가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으니.”

“…….”

“뒤로 좀.”

그제야 화수도 자신이 과도하게 카이와 밀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한 마음에 그런 것이었지만 화수도 당황한 듯 황급히 뒤로 몸을 물렸다. 물론 그러면서도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정말 빌려줄 거죠?”

“어디에 쓰실 겁니까.”

“…….”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한 입으로 두말한 것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전 그리 다급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화수의 입은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이쯤 되니 카이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말씀 안 하시면 못 빌려드립니다.”

“…….”

좀처럼 열리지 않는 입술에 결국 카이는 마지막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계속 입을 다물고 계시면 저도 리 샤오 님께 보고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선물을.”

역시나 리 샤오의 이름이 가장 효과적이었던 모양. 머뭇거리긴 했지만 결국 열리는 입술을 카이가 뚫어져라 바라본다. 달싹이던 입술이 마저 열렸다. 반쯤은 포기한 듯 이번엔 움직이는 입술에 망설임이 없었다.

“선물을 사려던 것뿐입니다.”

“선물, 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한 카이가 화수의 말을 되뇐다. 하지만 덧붙여진 설명은 더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곧 생일이라기에.”

“…….”

아무런 반응이 없는 카이에 화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뒤늦게 괜한 짓을 했다 싶었던 것.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 묘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카이를 보고 화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돈은 안 빌려줘도 되니까, 보고는 하지 말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빌려드릴게요.”

어깨를 늘어트리고 물러서는 화수를 카이가 급히 붙들었다. 돌아보는 무표정한 얼굴을 향해 한 번 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빌려드리겠습니다.”

“…….”

카이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눈앞에 펼쳐진 복사꽃처럼 환한 미소가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분명 잘 두었던 타이가 갑자기 보이질 않아서.”

응접실로 돌아온 장 선생이 사과했다.

“지루하셨지요.”

입구를 향해 있던 리 샤오의 시선을 금세 간파한 탓이었다. 하지만 변명을 하는 장 선생에도 리 샤오의 시선은 여전히 아치형의 입구에 향해 있었다.

톡, 톡, 응접실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공중에서 멈췄다. 마치 가까스로 유지하던 인내심이 바닥난 것처럼.

덜컹.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리 샤오가 막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말간 얼굴이 슬그머니 입구로 들어섰다. 그저 화수가 응접실로 들어왔을 뿐인데 험악하던 분위기가 가만히 누그러졌다. 정작 뒤늦게 들어온 화수는 조금 전 험악했던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의도치 않게 리 샤오의 걸음이 멈춘 위치가 딱 장 선생이 선 자리 정면이었고, 뒤늦게 들어온 화수의 눈에는 그 모습이 그저 막 장 선생이 타이를 매어주려던 모습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거, 괜찮네요.”

민망해진 화수가 슬그머니 한마디 던졌다. 제 쪽으로 집중되어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탓이었다.

“그렇지요?”

먼저 반응을 한 것은 장 선생이었다. 눈가의 주름이 기분 좋게 접혔다.

“자리가 자리니만큼, 좀 더 진중한 느낌을 주는 남색으로 준비했습니다.”

“……”

하지만 조금 전 같은 일은 없을 듯해 안심한 것도 잠시.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리 샤오가 장 선생의 손에 걸린 타이를 가져가며 툭, 하고 한마디 했다.

“거짓말이 서툴군.”

“예? 거짓말이라니요.”

순간 펄쩍 뛰었던 장 선생이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그 말의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마주한 화수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 리 샤오는 이미 거울 앞으로 가 조금 전 장 선생의 손에서 가져온 타이를 맸다.

뭐라도 해보십시오.

내가 뭘 어쨌는데요.

신호를 주는 장 선생의 눈빛에 화수가 반항의 눈빛을 되돌렸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뒤돌아선 리 샤오에 두 사람 모두 그대로 일시정지.

저벅저벅. 굳어 있는 화수의 앞으로 리 샤오가 다가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몸에 딱 맞게 재단된 양복이 마치 근육처럼 움직였다. 그래서인지 그저 걸어오는 것뿐인 그 움직임이 위협적임과 동시에 아름다웠다. 마치 야생의 맹수가 두려운 것과 동시에 아름다운 것처럼.

“거짓말 아닙니다만.”

반쯤 넋을 놓고 있던 화수가 뒤늦게 바로 앞까지 바싹 다가선 리 샤오를 깨닫고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하여간 귀신같은 사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표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억울하다는 듯 변명하는 화수를 가만히 응시하던 리 샤오가 이내 툭, 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엔 화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명령이 내려왔다.

“그럼 다시 감상을 말해봐.”

“괜찮다고-”

“아니.”

화수가 시키는 대로 조금 전 했던 말을 다시 되뇌었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 샤오에게 제지당했다.

“아까 했던 것처럼.”

“…….”

나직이 리 샤오가 중얼거리며 한 요구에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물론 언제를 말하는지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기분 상하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그런 적 없는데.”

“…….”

표정이 좋지 않기에 기분이 상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리 샤오가 굳이 자신의 기분을 숨길 이유도 없으니 거짓말일 리도 없었다. 난감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던 화수가 결국 입을 열었다.

“멋있습니다.”

사실 제일 잘 어울린다,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가장 그에게 딱인 타이는 이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멋있다는 감상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어떤 옷을 입어도, 어떤 타이를 매도 잘난 것만큼은 분명했으니까.

슥.

하지만 리 샤오의 표정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다가온 손가락이 화수의 턱을 살짝 들었다. 올려다보는 시선을 리 샤오가 내려다본다.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렇게 말고.”

“…….”

“좀 더.”

나직이 중얼거리던 리 샤오가 순간 미간을 찌푸린다. 숨죽인 채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던 화수가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미간을 찌푸리긴 했으나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화가 났다기보다는 당황한 쪽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화수는 입을 열 수 있었다.

“리 샤오 님?”

가만히 리 샤오의 이름을 되뇌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다행히 그 부름에 리 샤오도 반응했다. 물론 화수가 원한 반응은 아니었다. 뒷말이 이어지길 원했지만 리 샤오가 한 행동은 턱을 들어 올렸던 손을 뒤로 물린 것이었다. 이상하게 손가락이 닿았던 곳이 간질간질했다.

“다 된 건가?”

들어 올린 손등으로 그곳을 꾹꾹, 누르고 있으려니 이미 화수에게서 뒤돌아선 리 샤오가 장 선생에게 확인하듯 묻는다. 리 샤오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갑작스레 질문을 받은 장 선생의 당황한 기색은 보였다.

“아, 다 되긴 했습니다만.”

“뭐가 더 남았나?”

어쩐지 날이 선 눈빛에 어깨를 움츠린 장 선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미 했습니다만, 이라고 끝을 애매하게 맺은 뒤라 이제 와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진사가 대기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아. 리 샤오의 눈매가 살풋 찌푸려진다. 마지막 가봉 날, 새 옷을 입고 사진을 찍기로 했던 것을 기억해낸 탓이었다.

“불편하시면 다음으로 미뤄도-”

“됐어. 들어오라고 해.”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고 여긴 장 선생이 먼저 한발 뒤로 물러섰지만 의외로 돌아온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다행히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다시 의자에 앉는 리 샤오를 보고 장 선생이 황급히 조수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이미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진사가 신기한 기계들을 잔뜩 가지고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그 모습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보고 있는 건 화수뿐이었다.

펑.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눈앞이 번쩍였다. 리 샤오가 앉은 의자 주변으로 늘어선 반사판이 그 빛을 반사해서 뿜어냈다. 사실 요란한 소리에 몸을 움츠리고 눈도 감았지만 소리보다 빛이 먼저였던 터라 빛의 잔상은 그대로 남았다. 부신 눈을 연신 깜빡거리고 있으려니 이번엔 사진사가 제 몸만 한 카메라를 들고 위치를 옮겼다. 조금 전엔 옆모습을 찍었고, 지금은 정면을 찍으려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그 사람을 그대로 그려낸다는 물건이구나. 사실 화수도 상점가에 사진관이 생겼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다. 홍매루도 한동안 그 이야기로 떠들썩했었다. 그림 한 장 가격이 보통 사람 한 달 치 삯이라는 이야기부터, 정말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거의 똑같이 그려낸다는 것까지. 물론 직접 듣지는 않고 소리 없이 나다니는 게 특기이다 보니 오다 가다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런데 그 기계를 실제로 눈앞에서 보게 되었으니 신기할 수밖에. 하지만 뭣보다 신기한 것은 이런 요란한 소리와 불빛에도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는 리 샤오였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저도 눈을 똑바로 뜨고 있기가 힘든데 그 한복판에 앉아 태연히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니 신기하다 못해 질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만큼 익숙하다는 뜻이니까. 보통 사람 한 달 치 삯을 내야 겨우 한 장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얼마나 자주 찍어봤으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궁금하면서도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한 화수였다.

“다 됐습니다.”

펑펑, 터지던 불빛이 겨우 잦아든다 싶었더니 끝이 난 모양이었다. 검은 천 아래에서 머리를 뺀 사진사가 끝을 알렸다. 커다란 기계만큼이나 커다란 판을 꺼내는 것을 한 번 더 흘낏거렸지만 이번에도 보이는 것은 온통 새까만 배경뿐.

제대로 안 그려진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차곡차곡 겹쳐놓은 검은 판들을 보고 있을 때였다.

“왜. 찍어보고 싶어?”

그것을 보고 오해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던 리 샤오가 툭, 하고 가볍게 물어왔다. 놀란 화수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아직 치우지 마. 한 명 더 찍을 거야.”

하지만 이미 고개를 돌리고 리 샤오가 뒤편에 놓아둔 반사판을 치우는 사진사를 멈추게 한 후였다. 그것을 목격한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론 그런 화수의 복잡한 마음과는 달리 이미 사진사는 치우려던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였다. 그러고는 리 샤오가 앉았던 의자를 뒤로 빼며 말했다.

“앉으세요.”

“아뇨. 전 됐어요. 됐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일 마저 하세요.”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화수가 손까지 내저으면서 거절했다. 그런 화수의 거절에 사진사의 난처한 시선이 리 샤오를 향한다. 리 샤오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앉힐 수도 없으니 가운데서 입장이 난처해진 것.

“앉아.”

쓸데없는 실랑이하지 말라는 듯 리 샤오가 고갯짓을 했다. 화수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하지만 발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는다. 뒤늦게 리 샤오의 미간도 살풋 찌푸려졌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포기하고 순순히 움직였을 화수가 별것도 아닌 일에 고집을 피우는 모습이 이상했던 것.

“왜.”

조금 떨어져 있던 리 샤오가 다가왔다. 그리고 묻는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아니라?”

슬쩍 사진사 눈치를 보는 화수에 리 샤오가 사진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잠시 나가 있어.”

별다른 질문도 없이 사진사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 됐지?”

이래도 말 안 하면 그땐 정말 가만있지 않겠다는 사나운 눈빛에 화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이미 사진사가 밖으로 나간 뒤인데도 소리는 죽인 채.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하던데요.”

“…….”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뜸이 들였나 했더니. 리 샤오의 얼굴 위로 기가 막히다는 기색이 번졌다.

“그런 걸 알고 있으면서 내가 찍는 건 그냥 뒀단 말이지.”

“…….”

뒤늦게 아차 싶었으나 이미 늦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고 있는 화수의 팔을 리 샤오가 붙들었다.

“나만 죽을 순 없으니.”

그러고는 그대로 밀어 의자에 앉혔다. 뒤늦게 화수가 발딱 일어났지만 어깨를 누르는 힘에 도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 무서운 것 없는 사람처럼 굴더니, 이런 건 또 무서운 모양이네.”

“…….”

마주한 눈이 웃고 있었다. 정말 기뻐서 웃는다기보다는 기가 막혀서 웃는 쪽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웃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맥이 탁 풀렸다. 게다가 하필 이런 복장을 하고 있을 게 뭔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그래도 어느 곳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사내가 완벽한 차림으로 웃고 있으니, 기분이 느슨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정말 그런 거면 난 예전에 죽었을 테니까.”

사실 지금 가장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누그러진 화수를 알아차렸는지 머리를 툭, 하고 누른 리 샤오가 몸을 돌렸다. 문 앞에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진사에게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사진사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리 샤오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사진사의 옆에 섰다. 큰 의미는 없을 테지만 눈앞에 리 샤오가 보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여기, 보세요.”

사진사의 신호에 화수가 정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펑, 하고 바로 옆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 움직이시면 안 되는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사진사가 한 말에 화수가 움츠렸던 목을 조금 뺐다.

“죄송해요.”

순간 저도 모르게 놀라 움츠린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리 샤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터트리지 마.”

“예?”

“조명 터트리지 말라고.”

“하지만 안 터트리면 사진이 나오지 않을 텐데요.”

“…….”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사진사에 리 샤오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그럼 그냥 찍어.”

결국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리 샤오가 간단히 명령했다.

“움츠린다고 뭐라고 하지 말고.”

물론 나직이 중얼거리는 것은 잊지 않고서. 어금니를 악물고 나직이 한 말이라 화수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사진사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조금 전 화수처럼 목을 쑥 집어넣었던 사진사가 황급히 검은 천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여기, 보세요.”

팡.

이번에도 화수의 어깨가 움찔했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검은 판을 꺼내 포개놓는 것을 본 화수가 몸을 일으켰다.

“두 분이서 함께 한 장 찍으시죠.”

마침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돌아온 장 선생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괜찮-”

“그럴까, 그럼.”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던 리 샤오가 의외로 순순히 화수의 옆으로 와서 섰다.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지만 그 역시도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찍고 싶은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저 인형처럼 가만히 서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좀만 왼쪽으로.”

하지만 그런 화수를 향해 사진사가 손짓을 했다. 화수가 발을 조금 옮겼다. 제 몸인데도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태연한 표정을 짓기 위에 제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쓰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어쩔 줄 모르는 화수를 대신해 리 샤오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마도 사진을 찍는 게 무서워서 긴장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여기 보세요.”

사진사의 신호에 화수가 고개를 바로 했다. 하지만 리 샤오의 손은 여전히 화수의 팔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어? 괜찮은 건가? 화수가 고개를 살짝 들어 상대를 봤지만 리 샤오는 태연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을 뿐.

“정면 보세요.”

사진사의 신호에 화수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바로 했다. 그 순간.

펑.

하고 눈앞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화수도 깜짝 놀라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모든 신경은 리 샤오에게 붙잡힌 팔에 있었다. 리 샤오가 의도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도움이 된 것은 분명했다.

* * *

“들를 데가 있으니, 여기서 대기해.”

양장점을 나서던 리 샤오가 카이를 향해 통보했다. 차 문을 열기 위해 한 발 앞서서 걷고 있던 카이가 멈칫했다.

“가시는 데까지 모시겠습니다.”

“필요 없어.”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카이가 한 말을 고작 그뿐. 하지만 그마저도 단칼에 거절당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갈 거니까.”

이렇게까지 나오면 카이도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한 점은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위치서의 볼일이라는 것 정도. 알겠다는 의미로 카이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넌 어디 가.”

“예?”

툭, 하고 내뱉는 목소리에 카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카이의 시야에 리 샤오의 손에 뒷덜미를 붙잡힌 화수가 들어왔다.

“대기하라고 하셔서.”

기가 막히다는 리 샤오의 눈빛에 화수가 말간 눈을 굴리면서 중얼거린다. 리 샤오의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걷기 싫으면 차로 이동하고.”

“……저도, 가는 거였습니까.”

“…….”

이번엔 대꾸도 없었다. 조금 전보다 더 기막히다는 듯한 표정으로 화수를 볼 뿐이다. 당연히 나도 차에서 대기하는 건 줄 알았지. 누가 알았나. 그렇게 불퉁하게 생각하면서도 화수는 슬그머니 사나운 시선을 피했다. 작은 한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오랜만의 외출이니, 걷고 싶을 거 같았는데 아닌 모양이네. 그냥 차로-”

“아뇨. 걸어가요. 저 걷는 거 좋아합니다.”

물론 평소의 화수는 걷는 걸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외출 자체도 용건이 없으면 좀처럼 하지 않는 편이라 감금에 가까운 생활이 그리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시 말해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가만히 화수를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명령했다.

“거짓말 아닙니다.”

혹 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오해했나 싶어 화수가 변명했지만 리 샤오의 눈빛은 조금 전보다 더 험악해진 뒤였다.

“거짓말이라고 한 적 없는데.”

“그럼 왜.”

제가 진짜를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확인해보려고 그런 것 아닌가. 양장점 안에서 그랬던 듯이. 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화수에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 샤오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대로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뭐 하고 계십니까.”

멀뚱히 서서 리 샤오만 보고 있는 화수에게 보다 못한 카이가 한마디 한다. 하지만 화수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이미 저만치 멀어진 리 샤오가 뒤돌아섰다.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분명 걸음은 멈춰진 상태였다. 화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타닥.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떨어지지 않던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화수가 걸음을 내딛는 것을 보면서도 리 샤오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카이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번지는 사이, 화수는 리 샤오가 서 있는 자리에 도착했다. 그제서야 리 샤오가 몸을 돌렸다. 화수도 자연스럽게 그의 옆으로 나란히 서서 걸었다.

카이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더 짙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이 나란히 걷고 있다는 말은 리 샤오가 의도적으로 속도를 화수에게 맞춰 걷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리 샤오가 화수가 제 옆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준 것보다도 그 점이 더 놀라운 카이였다. 물론 그런 카이의 혼란과는 별개로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림처럼 평화로웠지만.

그건 마치 고요한 폭풍전야의 바다를 꼭 닮아 있었다.

“볼일이, 여기 오는 거였습니까?”

오는 내내 가장 궁금한 것이었지만 괜히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닫고 걷는 데만 집중했다. 제가 입을 열어서 좋을 게 없다는 부분은 화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므로.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말을 조심하는 것이겠지만 타고나길 그리 타고난 걸 어쩌겠는가. 그나마 상대가 리 샤오라 입이라도 다무는 노력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런 화수의 노력을 정작 당사자인 리 샤오만 모른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왜. 안 되나?”

역시나 입을 다물기로 한 건 잘한 결정이었다. 화수의 질문에 곧바로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리 샤오를 보면.

“안 될 리가 있겠습니까.”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될 건 없었다. 그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저도 모르게 물은 것뿐. 물론 늘 자신의 예상을 빗나가는 리 샤오였지만.

사실 리 샤오가 가는 곳이라면 당연히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라고 멋대로 오해한 탓이 컸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데 카이가 아닌 자신을 데려올 리 없음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두 사람의, 정확히는 리 샤오의 걸음이 멈춘 곳은 바로 상점가에 새로 생긴 서양식 음료와 술을 판다는 다방茶房이었다. 지나다니면서 슬쩍슬쩍 보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앞에 서서 안을 구경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쩐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 같았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금색과 홍색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외향부터 사람 기를 확 죽이는 데다 드나드는 이들도 겉모습만 화려한 자신과는 달리 대부분 진짜 인텔리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러고 있지?”

열린 문을 붙잡고 있던 리 샤오가 물었다. 안 될 것 없다면서 문 앞에서 화수가 걸음을 머뭇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수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입술이 달싹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리 샤오가 그런 화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하지만 그 순간.

“어서 오십시오.”

가게 안쪽에서 나온 이가 인사를 건넸다. 아마도 손님이 문 앞에서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 겸 나온 듯했다. 달싹이던 입술이 그대로 다물렸다. 가게 안쪽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이 더 몰리기 전에 화수가 황급히 가게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리 샤오 님.”

아. 화수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문을 통과하는 것도 어색한 자신과 달리 리 샤오는 심지어 직원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 만큼 자주 드나든 가게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화수보다 앞에 서 있던 터라 리 샤오는 그의 굳은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창가 자리로 준비할까요.”

“아니.”

리 샤오가 오면 늘 앉는 자리가 있어 물은 것이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조용한 안쪽 자리로 준비해줘.”

“이리로.”

한번 머뭇거림도 없이 직원이 방향을 가리킨다. 그의 손이 가리키는 데로 가게 안쪽, 빈자리를 발견한 화수가 걸음을 옮겼다. 딛는 감촉이 낯설었다. 슬쩍 고개를 내려 확인하자 자주빛의 카펫이 가게 바닥 전체에 깔려 있었다. 푹신한 감촉이 신발을 신고 이불 위를 걷는 것 같아 기분이 기묘했다. 왠지 하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물론 그런 기분을 느끼는 이는 자신뿐인 모양이었지만.

“천천히 보시고 정해지면 부르십시오.”

검은색 장부첩 같은 것이 앞에 놓여졌다. 천천히 보라는 말에 가만히 그것을 펼치자 장부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급 종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쓰인 글씨들이 보였다. 그런 종이가 여러 장 겹쳐져 있었다. 팔락, 팔락, 무표정한 표정으로 종이를 넘기던 화수가 조용히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왜.”

“…….”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던 리 샤오가 고개를 들었다.

“마음에 드는 게 없나?”

“……그냥 알아서 시켜주세요.”

“…….”

탁. 가만히 화수를 보던 리 샤오가 조금 전 그처럼 메뉴판을 닫았다. 작은 파열음인데도 하는 사람에 따라 위압감이 전혀 달랐다. 화수가 어깨를 움찔했다.

“왜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지?”

마주한 눈동자에 기분이 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진다.

“그런 거 아닙니다.”

“…….”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그머니 눈을 내리까는 화수에 리 샤오의 기분은 더 저조해졌다.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부터 내켜하지 않았었지. 괜한 오해인가 싶었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던 모양.

“괜한 짓을 했군.”

“…….”

“일어나지.”

의견을 묻는 것도 아니었다. 말과 동시에 리 샤오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리 샤오 님?”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리 샤오를 부른 것은 오히려 화수가 아니라 물을 가지고 오던 직원이었다.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눈동자에 미간을 확 일그러트리고 화수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푹신한 바닥을 뛰듯이 걸어간다. 속도도 내지 않고 걸은 것 같은데 리 샤오는 벌써 출입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발에 속도를 높였지만 다행히 요란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제야 카펫을 까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은 화수였다.

딸랑.

반쯤 열리던 문이 멈췄다. 리 샤오가 잡은 문손잡이의 윗부분을 새하얀 손이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멈추긴 했지만 힘으로 이기지 못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리 샤오가 다시 손에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읽을 줄 몰라요.”

바로 귓가에 들려온 속삭임에 반쯤 열렸던 문이 도로 닫혔다. 리 샤오의 고개도 어느새 꺾여 있었다. 새하얀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하지만 그럼에도 입술을 다시 연다.

“글, 읽을 줄 모른다고요.”

굳은 표정으로 여전히 반응이 없는 리 샤오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리 샤오가 굳은 것은 그래서가 아니었다. 누군가 글을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사람이면 당연한 건데. 왜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굳어 있던 것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

“정말인데.”

불퉁하게 중얼거린 것과는 달리 화수는 리 샤오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도 화수는 보지 못했다. 사실 글을 모른다는 게 한 번도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먹고살기도 힘든 화수의 인생에 글만큼 사치스러운 것은 없었으니까. 어느 정도 먹고사는 걱정을 덜었을 때도 굳이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그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답지 않게 바로 말을 하지 못했다.

사박.

동그란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발길을 돌렸다. 시선 끝으로 움직이는 발을 보고 화수도 그런 리 샤오의 뒤를 따라 자리로 돌아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되돌아온 두 사람에게 직원이 태연히 물었다. 조금 전 있었던 일이 마치 없었던 양. 누구도 조금 전 일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식사 될까?”

메뉴판은 뒤적이지 않고 리 샤오가 물었다. 처음으로 직원의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식사는 미리 예약하지 않으시면 불가능합니다만.”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직원에게 리 샤오가 그런 대답이 돌아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바로 덧붙였다.

“간단한 거라도 상관없는데.”

“잠시만요.”

그렇게까지 나오니 직원도 마냥 거절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양해를 구한 뒤 주방 안쪽으로 사라졌던 직원이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격적인 메뉴는 불가능하고 스튜 정도면 가능할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가능하면 토마토 샐러드도 함께 부탁할 수 있을까.”

“가능할 듯합니다. 두 분 모두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이쪽만 먹을 거야.”

“허면. 리 샤오 님은 늘 드시던 걸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대화가 끝나고 직원이 사라지자 다시 적막이 흘렀다.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가장 궁금한 부분부터 묻기로 했다.

“늘 드시던 게, 뭔데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던지 화수를 보는 리 샤오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진다. 그래도 대답 못 할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툭, 하고 가볍게 대답이 돌아왔다.

“위스키.”

“…….”

“나중에 사 주지.”

“약속하신 겁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치사하다는 눈빛을 읽은 모양이었다. 나중에 사 준다는 말에 그제야 화수도 눈빛이 누그러진다. 그것도 모자라 멋대로 약속으로 둔갑시켜버린 건방진 태도에도 리 샤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토마토 샐러드와 위스키입니다.”

리 샤오의 앞에는 호박색의 음료가, 화수의 앞에는 음식 접시가 놓였다.

“먹어봐.”

토마토 샐러드.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이기에 뭐 대단한 음식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접시에 놓인 것은 토마토와 풀떼기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조금 특별한 건 토마토의 껍질이 모두 벗겨져 있고 그 위에 분홍빛이 도는 소스가 뿌려져 있다는 점 정도. 묘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고만 있으려니 리 샤오가 가볍게 권했다.

“이건 먹을 수 있을 거야.”

리 샤오의 장담대로 음식만 보면 올라오던 토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가끔 얄미울 정도로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리 샤오였다.

코를 살짝 내려 숨을 들이켜자 상큼한 향이 코끝에 닿았다. 입안에 살짝 침이 고였다. 눈을 반짝이며 손을 움직이려던 화수의 손이 멈칫한다. 집어 먹을 수저나 젓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그저 은색의 칼과 삼지창 같은 모양의 꼬챙이가 다였다.

“이리 줘.”

젓가락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화수를 알아차리고 리 샤오가 손을 뻗어 그릇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삼지창 모양의 꼬챙이로 토마토를 찍고 은색의 칼로 토마토를 먹기 좋은 크기로 슥슥 잘라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칼을 다루는 데 아주 능숙한 리 샤오였다.

“포크로 찍어 먹으면 돼.”

삼지창 같은 물건의 이름이 포크인 모양이었다. 리 샤오가 알려준 단어를 입안으로 되뇌며 제 쪽으로 다시 밀어진 그릇에서 토마토 조각을 집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화수의 눈이 커졌다. 발딱 고개가 들리자 기다리고 있던 리 샤오와 눈이 마주쳤다. 입안에서 녹듯이 사라지는 토마토에 화수가 따지듯 물었다.

“이거, 뭔데 이렇게 맛있어요?”

화수의 반응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이 만족감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런 리 샤오에도 화수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겉으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토마토가 마치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음식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것인지 차갑게 식혀져 입안에 들어올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새콤하고 달콤하고, 게다가 차갑기까지 하니 입안에서 맛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더운 날씨에 걸어오느라 살짝 올라 있던 열이 스르륵,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 가게에서 가장 유명한 메뉴야.”

물론 이 메뉴의 가격이 토마토 백 개는 살 수 있는 가격이라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마저 먹어.”

그럴 거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화수를 향해 그릇을 좀 더 밀어주면서 리 샤오는 위스키 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호박색의 맑고 투명한 액체가 유리잔 안에서 이리저리 춤을 췄다. 하지만 그럼에도 처음으로 그런 리 샤오가 부럽지 않은 화수였다.

화수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스튜입니다.”

바닥까지 닥닥 긁어먹은 접시가 사라지고 스튜가 담긴 그릇이 앞에 놓였다.

“그릇이 뜨거우니 조심하십시오.”

그냥 하는 경고는 아니었던지 그릇에 담긴 스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큼직하게 자른 소고기와 야채가 듬뿍 든 음식은 누가 봐도 먹음직스러웠다. 단 한 사람에게만 빼고.

“관둬.”

냄새를 맡는 순간 살짝 역하다는 생각을 한 화수였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억지로 떨어지지 않는 수저를 집어 들었던 건데.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차린 리 샤오가 화수의 앞에 놓인 그릇을 빼앗듯 가져간다.

“괜찮은데…….”

“이건 치워줘.”

괜찮다고 말해보지만 이미 리 샤오는 손가락을 튕겨 부른 직원에게 그릇을 넘긴 뒤였다. 그리고 그런 리 샤오에 솔직히 살았다 싶은 화수였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남의 영업장에서 못 보일 꼴을 보일 뻔했다.

“못 먹겠으면 빨리 말해.”

아깝게 뭐 하는 거야, 나직이 덧붙이는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짜증스럽기도 하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릇을 핥아 먹을 기세로 음식을 입안으로 쓸어 넣던 녀석이, 손바닥 뒤집듯 갑자기 못 먹겠다고 했으니. 심지어 본인도 그런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고 짜증까지 나는데 리 샤오는 오죽하겠는가. 솔직히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저를 놀리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참고 먹으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민망해진 탓에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자 조금 전보다 리 샤오의 미간이 더 찌푸려진다.

“누가 미련하게 참고 먹으래.”

“…….”

“하마터면 겨우 먹은 것까지 게워낼 뻔했잖아.”

기가 막히다는 듯 핀잔하는 리 샤오에 그제야 화수도 아깝다는 게 손도 대지 않고 돌려보낸 음식이 아니라 조금 전 먹었던 음식을 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기분이 묘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거렸다.

“죄송합니다.”

사나운 눈동자를 향해 화수가 사과했다. 사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나온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리 샤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 구겨진 눈매가 더 일그러졌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던 리 샤오가 막 입술을 열려던 그 때.

“혹 음식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셨습니까.”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꺾였다. 주방장이었다.

“말씀해주시면 다시 만들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멀쩡한 음식이 손도 대지 않고 돌아왔으니 무슨 문제라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여러 가지로 민폐다 싶어 화수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진다. 오히려 태연한 건 리 샤오였다.

“입덧이 심해 그런 것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입덧, 이요.”

주방장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화수에게로 향한다. 눈에 확 띄는 미인이지만 그곳에 앉은 이는 분명 사내였다. 그것도 천족의 사내.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그 시선이 거슬렸는지 리 샤오가 되묻는다. 묻는 목소리에 고저는 없었지만 함부로 눈 돌리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이라도 그가 뿜어내는 패기까지 느끼지 못할 수는 없을 테니까.

사실 사심이 있어 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던 천족의 곤을 눈으로 직접 보자 신기해 그런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리 샤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대답을 들었으면 그만 꺼지라는 말을 최대한 돌려서 말했음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방장의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괜찮으시면.”

“…….”

날카로운 시선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긴 했지만 주방장은 고집스럽게 입을 열었다.

“케이크과 차를 준비해 드리고 싶은데요.”

“…….”

“저희 안사람도 입덧이 심했는데, 이건 제법 먹을 수 있었거든요.”

“……어쩔래.”

물론 그리 묻는 리 샤오의 시선은 주방장에게 있지 않았다. 갑작스레 넘어온 결정권에 화수가 당황했다. 한 박자 늦게 주방장의 시선까지 제 쪽으로 향하자 난감한 기색은 더 짙어졌다.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싫은 건 아닌데.”

“아닌데?”

말끝은 흐리는 화수에 리 샤오가 재촉하듯 되물었다.

“못 먹을까 봐.”

역시나 리 샤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누가 그런 걱정을 하랬나?”

“…….”

“시도할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그걸 물은 것뿐이야. 먹을 수 있냐 없느냐는 어차피 네가 아니라 배 속의 그 녀석이 결정하는 거잖아.”

“…….”

딱딱한 말투 때문에 퉁명스럽게 들리지만 그 안에 담긴 건 분명 다정했다. 심지어 그걸 인식하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게 좋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괴로운 화수였다.

“내키지 않으면-”

“먹어볼래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이 없자 거절이라고 생각했는지 더 묻지도 않고 물리는 리 샤오에 화수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시도 정도는 해볼 수 있었다. 리 샤오의 말대로 결정권은 자신이 아니라 배 속의 녀석에게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가벼운 기분이 되었다.

“부탁하지.”

주방장을 보는 리 샤오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누그러져 있었다. 물론 리 샤오의 맞은편에 앉은 화수는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홍차에는 연유를 넣어드리지요.”

화색이 된 주방장이 덧붙였다. 물론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던지 자신이 할 말만 하고는 뒤돌아서버렸지만.

“그런데.”

체구와 달리 날쌘 움직임으로 사라지는 주방장을 힐끔이던 화수가 슬그머니 물었다.

“케이크가 뭡니까?”

답지 않게 리 샤오의 얼굴 위로 당황스러운 낯색이 번졌다.

“빵 같은 건데.”

난감한 듯 살풋 미간을 찌푸린 리 샤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

“빵이요? 찐빵 같은 겁니까?”

“……그거랑은 좀 다른데.”

“…….”

“크림을 바른 카스텔라를 겹겹이 쌓아서 만든 거야.”

“카스텔라요?”

“……”

게다가 설명을 하면 할수록 화수의 머릿속에 뜨는 건 무한의 물음표뿐. 오히려 더 복잡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 샤오가 눈매를 일그러트린다. 결국 설명하는 것은 포기.

“나오면 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으니. 직접 보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싶어 그리 말했으나 화수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한테 설명해주기 귀찮다, 라는 의미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서양어西洋語 많이 아셔서 좋겠습니다.”

불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화수를 보고서야 뒤늦게 좀 더 제대로 설명해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좋던 분위기는 어그러진 뒤였다. 리 샤오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하지만 화수만큼이나 리 샤오도 그런 분위기를 푸는 데는 젬병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고, 애초에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건 눈앞의 녀석이 유일했다. 그게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케이크와 홍차,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별개로 머리보다 먼저 반응하는 몸을 막을 순 없었지만.

“아…….”

직원의 손에 들렸던 접시가 화수의 앞에 놓였다.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화수의 눈이 커지던 것을 리 샤오는 놓치지 못했다. 늘 시큰둥한 표정의 녀석이 먹고 싶은 것을 앞에 두면, 보통 사람보다는 색이 옅은 동공이 커지고 눈알이 유난히 반질거린다. 그게 처음에는 기가 막히더니, 어느새 그 표정을 보지 못하면 허전한 기분마저 드는 리 샤오였다. 이번에도 반짝거리는 동공을 보자 조금 전에 한 생각 같은 건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거, 딸기예요?”

조금 전 일을 잊은 것은 화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삼각형으로 잘린 케이크 위에 얹어진 새빨간 딸기를 발견한 화수가 나직이 묻는다.

“진짜 딸기는 아니고, 딸기 모양 젤리랍니다.”

하지만 나직이 물은 것이 무색하게 막 찻잔 세트를 가지고 돌아온 직원의 귀에도 질문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흠흠, 민망해진 화수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바싹 앞으로 내밀었던 상체를 뒤로 물렸다.

까딱.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으려니 리 샤오가 직원을 향해 그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찻주전자를 들어 막 잔을 채우려던 손이 멈췄다.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이번에도 직원이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먹을 수 있겠어?”

“예.”

물론 묻지 않아도 화수의 표정으로 대답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리 샤오는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화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리 샤오가 손을 뻗어 찻주전자를 쥐었다.

“제가-”

“그거나 먹어.”

당황한 화수가 제가 하겠다면서 손을 내뻗었지만 핀잔만 들었다. 쪼르륵, 찻잔을 채우는 소리를 들으며 화수가 포크를 들었다. 어떻게 먹는 건지 고민하다 일단 삼각형의 뾰족한 부분을 한입 크기로 잘랐다.

슥. 딱딱해 보이던 겉모습과 달리 조금 힘을 주었을 뿐인데도 단숨에 한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치자색의 보송보송한 속살이 드러났다. 뭐, 찐빵이랑 다를 바도 없네. 사이사이에 하얀 것이 들어 있다는 점 말고는 속살은 찐빵을 잘랐을 때와 비슷해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포크로 찍은 조각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던 화수가 그대로 굳었다.

“왜.”

찻주전자를 내려놓던 리 샤오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되묻는 리 샤오의 말에도 화수는 그대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은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도 실패인 모양이었다.

“뱉어도 돼.”

하지만 리 샤오가 손을 내밀자 멈춰 있던 화수가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더니 리 샤오가 입안의 것을 빼앗아 가기라도 할까 두려운 듯 빠르게 입을 움직여 케이크 조각을 삼켰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 긴장한 표정으로-물론 겉으로 봐서는 무표정에서 조금 더 무표정해진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화수를 지켜보고 있으려니 입안의 것을 모두 삼킨 녀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찐빵이랑은 전혀 다른데요?!”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했더니.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는 화수에 잔뜩 긴장해 있던 사람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 리 샤오의 표정이 사나워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케이크가 찐빵 같다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물론 그런 것을 따져 물을 성격은 아니라 리 샤오가 한 말은 고작 이 정도였지만.

“먹을 만하다는 거지?”

“……예.”

처음 경험해보는 신문물의 충격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왠지 리 샤오가 화가 나 있었다. 사람 마음을 잘 모르는 화수도 그것만큼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좀, 드실래요?”

눈치를 보던 화수가 슬그머니 케이크 그릇을 앞으로 밀었다. 하지만 그릇은 도로 화수 쪽으로 밀려왔다. 잘 정돈된 손가락이 그릇을 놓고 물러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작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잘생긴 입술이 툭, 하고 한마디를 내뱉는다.

“됐으니, 먹어.”

“…….”

말투는 차가워도 결국 이번에도 리 샤오가 한발 뒤로 물러선 것이었다. 그제야 화수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찐빵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 조금 전의 자신을 반성하며, 조금씩 조금씩 새하얀 케이크를 잘라 먹었다. 보들보들한 속살은 입안에 넣기 무섭게 사르르 녹았다. 그러면 입안에는 미끈하지만 달콤한 기름 같은 것이 남았다. 하지만 그것도 조금 뒤에는 모두 녹아 사라졌다. 양놈들은 신기한 것들을 잘도 잔뜩 만들어낸다던 진 사장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여기 이거 하나 더.”

없어지는 것이 아까워 아껴 먹고 있었는데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자마자 리 샤오가 손을 들어 재주문을 했다. 이번엔 예의상으로라도 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빈 그릇은 치워드릴게요.”

새 쇼트케이크를 가져온 직원이 화수의 앞에 놓인 그릇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아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이내 포기한 듯 뒤로 물러선 화수와 달리 리 샤오가 그릇을 집는 직원의 손을 저지했다.

“아직 남았잖아.”

“예? ……아.”

순간 느껴지는 사나운 기색에 움찔한 직원이 뒤늦게 치우려던 그릇에서 빨간 딸기 모양의 젤리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부러 남기신 줄 알고.”

케이크는 다 먹고 굳이 이것만 남겨두었기에 당연히 안 먹는 줄 알았다. 조금 전 진짜 딸기가 아니라는 말에 실망하는 기색을 읽기도 했었고. 하지만 그런 직원의 변명에도 리 샤오의 사나운 기색은 여전했다.

“아껴 먹고 있었던 거야.”

“…….”

리 샤오의 말에 직원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화수를 향한다. 눈이 마주친 화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도 놀라느라 부인할 때를 놓쳐버렸다.

“죄송합니다.”

그제야 직원도 치우려고 집었던 그릇을 놓았다. 물러나는 직원을 흘끔거리고 있으려니 제 앞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포기해버리는 거야.”

“…….”

“아까워서 마지막에 못 먹을 만큼 아껴놓고.”

대체 어떻게 알았지. 묻는 것도 아니고 이미 확신을 한 채로 말하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리 샤오가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하다는 게 순전히 기분 탓만은 아니다 싶은 화수였다. 어떻게 아는 걸까. 그리 오래 자신을 보아왔던 류조차 알지 못하는 것들을.

“보통 없이 자란 녀석들은 생존본능이 강하던데. 태평하군.”

“…….”

자존심 상하는 소리였지만 맞는 말이기도 해서 화수는 반박하지 못했다. 먹을 것을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좋은 것이 있어도 마지막에 먹으려고 아껴두는 습관 때문에 늘 다른 녀석들에게 빼앗기기 일쑤였다.

“아끼지 마. 그러다간 누군가 채 가버릴지도 모르니까.”

“…….”

그리 말하는 리 샤오의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명 음식 얘기를 하는 중인데 왜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삼킬 듯이 저를 보는 맹수의 눈을 가만히 마주하고 있던 화수가 내내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리 샤오 님은, 어떠십니까.”

문득 궁금해졌던 것.

“맛있는 것부터 먹습니까, 아니면 느긋하게 마지막까지 두었다 먹습니까.”

“나는 맛있는 걸 먼저 먹지.”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듯 거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화수도 그러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조금 전 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마음에 걸려 물은 것이었다. 아마도 기분 탓이었던 모양. 하긴 리 샤오가 누군가에게 아끼는 것을 빼앗기는 일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렇게 납득한 화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리 샤오 님은 없이 자라신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하네요.”

“…….”

혼잣말처럼-정말 혼잣말이었다면 리 샤오에게 다 들리게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가볍게 던진 말에 리 샤오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진다.

“한 방 먹었군.”

괘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기엔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 하여간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포기해버리는 것보다 건방지긴 해도 이렇게 받아치는 것이 더 나았다.

“그런 건 타고나는 성격일 뿐입니다.”

포크로 콕, 찍은 딸기 젤리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화수가 느긋하게 덧붙였다. 입안에 쫀득하고 달콤한 맛이 확 퍼졌다. 승리의 맛이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주머니가 두둑한 손님에게 깍듯한 건 어디든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직원이 붙잡고 있는 문을 통과하던 화수의 머릿속에 문득 그것이 떠올랐다.

“어떻게 할래.”

“예?”

당연히 왔던 방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해서 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던 화수와는 달리 리 샤오는 여전히 문 앞에 선 자세 그대로였다. 그러더니 뒤돌아보는 화수를 향해 묻는다.

“좀 돌아가도 괜찮다면-”

“좋아요!”

한 박자 늦게 그 말이 좀 더 돌아다니다 들어가게 해주겠다는 뜻임을 알아차린 화수가 리 샤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내놓았다. 리 샤오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말을 잘라먹은 것이 기분이 상한 모양이라고 생각한 화수가 황급히 깍듯하게 덧붙였다.

“저 돌아가는 거 좋아합니다.”

“…….”

하지만 찌푸린 미간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골이 깊어진 것 같았다.

“알았으니까.”

기분이 상해서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과 달리 리 샤오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대답은 그쯤 해둬.”

영문을 모르겠는 소리였지만 일단 화수는 입을 다물었다. 좀 더 바깥공기를 쐴 수 있는 기회를 발로 차버리고 싶진 않았다. 그런 화수의 노력이 통했는지 리 샤오가 고개를 까딱인다. 방향은 화수가 바라보고 있는 쪽. 그러니까 정확히는 차가 있는 곳과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화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리 샤오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에 곧장 걸음을 내디뎠기 때문에 그는 보지 못했다.

느긋하게 따라붙어 한 발 뒤에서 걷는 리 샤오에게 보이는 건 화수의 뒤통수뿐이었다.

타박타박. 저벅저벅.

두 사람의 발소리가 뒤섞였다. 물론 대화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두 사람 사이에 평범한 대화라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얼굴을 볼 때보다 차라리 이렇게 뒷모습을 보는 쪽이 오히려 평화롭고 좋았다. 이리 빤히 보아도 왜 보는 거냐고, 따지는 눈동자가 돌아오지 않으니까.

머리가 길었네. 늘 단정하게 잘려 있던 머리가 어느새 목덜미를 덮고 있었다. 하지만 자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안에 이를 박아 넣고 싶은 새하얀 목덜미가 있다는 사실을 저만 아는 것이 좋았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에서 물 내음이 났지만 리 샤오는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었다.

다시 오지 않을 한가한 오후의 평화였다.

* * *

투둑.

“카이 님.”

휙, 무료하게 앞만 보고 앉아 있던 운전병이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카이의 이름을 되뇌는 운전병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되묻지는 않았다. 카이 역시도 그 불길한 소리를 들었으므로.

투둑, 투둑.

카이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 잠깐 동안에도 자동차 지붕을 두들겨대는 소리는 그 간격을 촘촘히 메꾸고 있었고, 이내 그 촘촘한 간격마저도 곧 사라졌다. 툭, 툭, 처음에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굵기로 바닥에 동그란 원을 그리던 빗방울이 이제는 말 그대로 양동이째 붓는 것마냥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흙바닥이 단숨에 시커메진다.

“괜찮으실까요.”

앞 유리창을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며 운전병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역시나 쏟아지는 빗줄기를 질리는 표정으로 보고 있던 카이가 어깨를 으쓱인다.

“볼일이 있다고 했으니 잠시 비가 잦아지길 기다려 움직이시겠지.”

어린아이들도 아닌데, 이 비를 맞고 있으시기야 하겠어. 나직이 카이가 중얼거리는 말에 운전병도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문득 이러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그럼 가신 방향으로 천천히 훑어볼까요.”

“아니.”

하지만 카이의 고개는 곧바로 내저어졌다.

“엇갈리기라도 하면 그게 더 낭패야.”

“…….”

“일단은 여기서 대기한다. 곧 그치겠지.”

“예. 알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쉬이 잦아들 것 같은 빗줄기는 아니었지만 운전병은 조용히 쥐었던 핸들을 놓았다.

* * *

쏴아아아아.

뿌옇게 물보라가 일고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아니고 비를 맞고 있으시기야 하겠냐며 고개를 내젓던 카이의 추측을 비웃듯 두 사람은 빗속을 헤매다 겨우 남의 집 담벼락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낡은 처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쏟아지는 비의 양이 엄청난 탓인지 구멍도 나지 않은 처마에서 물방울이 줄줄 샜다. 이러다 진짜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닐까,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화수의 어깨 위로 뭔가가 툭, 하고 얹어졌다. 고개를 틀자 얹혔던 것이 스륵, 미끄러지는 느낌이 났다. 황급히 붙잡고 나서야 그것이 리 샤오의 양복 상의라는 걸 알아차렸다.

“괜찮습니다.”

반사적으로 붙들었던 옷을 화수가 급히 벗었다.

“입고 있어.”

하지만 그런 화수의 손을 리 샤오가 만류한다.

“다 젖긴 했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하지만-”

“싫어도 참아. 고뿔이라도 걸리면 아이에게 좋지 않을 테니까.”

“…….”

끝까지 벗으려고 하는 이유를 싫어서, 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리 샤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이 옷은 곧 있을 생일모임에 입으려고 부러 맞춘 옷이 아닌가. 어떻게든 비를 맞지 않게 해도 모자랄 판에 이리 제 젖은 몸 위에 얹어도 되나, 그런 생각에 그런 것뿐이었다. 정작 옷의 주인은 거기에 대해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듯했지만.

오히려 거절당한 것이 기분 나쁘다는 듯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 샤오에 화수도 결국 가만히 입을 다물고 반쯤 벗었던 옷을 도로 어깨에 걸칠 수밖에 없었다. 따뜻하긴 하네. 솔직한 감상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무슨 비가 이리.”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화수가 질린다는 듯 중얼거린다. 하지만 리 샤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비가 올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화수와 달리 리 샤오는 하늘이 보내는 신호를 보고도 모른 척했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은 비 좀 맞는 것이 아무렇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파리하게 변한 화수의 낯색을 보고서야 저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벽 쪽에 붙어 선 리 샤오와 달리 화수는 처마 앞쪽으로 한 발 앞에 서 있었다. 바닥을 친 물방울이 화수에게 마구 튀고 있는 것을 본 리 샤오가 가만히 손을 내뻗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뒤로 물러서게 해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하지만 상대의 입장은 달랐던 모양이다.

“힉.”

리 샤오의 손이 화수의 팔에 닿는 순간, 화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츠린다. 휘둥그레진 눈을 향해 리 샤오가 설명했다.

“뒤로, 오라고.”

“아.”

그제야 마주한 눈동자의 동공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리 샤오의 눈매는 일그러진다. 놀라 뒤돌아보는 틈에 물러난 화수의 몸이 처마 밖에 걸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 위로 굵은 물방울이 뚝뚝뚝 떨어지는데, 그런데도 화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조금 말랐던 머리가 다시 단숨에 젖었다. 그렇게까지 저와 바싹 붙어 있는 게 내키지 않는 건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리 샤오는 조금 기분이 가라앉았다. 달콤한 꿈을 꾸다 단숨에 현실로 확 끌어 올려진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낮게 뇌까리는 욕설에 화수의 몸이 한 번 더 움츠러들었다. 그런 화수를 향해 리 샤오가 다시 손을 내뻗었다. 싫다고 뿌리쳐도 그냥 끌고 들어오겠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화수는 순순히 리 샤오가 이끄는 대로 끌려왔다. 제가 섰던 자리에 화수를 세우고 이번엔 리 샤오가 처마 끝에 섰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잦아들면 가서 차를 가져올 테니까. 차갑게 되뇌는 리 샤오를 향해 뭔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화수가 이내 입술을 닫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 때문인지 리 샤오에게서 나는 향이 평소보다 훨씬 더 짙어져 있었다. 단숨에 몸이 들끓는 기분. 얼굴이 후끈거린다. 숨이 달았다. 조금 전 먹은 쫀득하고 달큰하던 젤리보다도 더 진득진득한 공기를 들이켜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쉬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숨이 가빴다. 일부러 비를 맞은 게 아니라 비를 맞으니 조금은 살 것 같아서 맞고 있었을 뿐이다. 덕분에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화수의 눈은 리 샤오를 쫓는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고개를 들자 크고 단단한 등이 눈에 들어왔다. 젖은 셔츠가 리 샤오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젖은 천 너머로 근사한 근육들이 드러났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 꿀꺽, 화수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천 안으로 어떤 몸이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륵. 굵고 단단한 목선을 타고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화수의 손도 미끄러지듯 앞으로 내뻗어졌다. 하지만 하필 그 순간.

우르르, 쾅-!!!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공기를 뒤흔들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천둥까지 치는 것을 보니 쉽게 그칠 비는 아닌 모양이었다. 천둥소리에 잠시 숨을 죽였던 하늘이 다시 거세게 비를 붓고 있었다.

“여기 있어.”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살짝 주저앉는 처마를 본 리 샤오가 결단을 내렸다. 이러다 불안한 처마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어쩔 도리가 없다 싶었던 것. 사실 자신은 비를 맞는 것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더한 폭우에 전투도 치렀던 그가 아닌가. 다만 화수를 혼자 두는 게 내키지 않았을 뿐이다.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니 그다음은 쉬웠다. 쏟아지는 빗속으로 발을 내딛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 샤오의 걸음이 순간 멈칫한 것은 바로 뒤에서 옷자락을 당기는 손길 때문이었다. 리 샤오가 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금방 올 테니까.”

사실 화수가 저를 붙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저와 좁은 공간에 함께 있지 않아도 되니까,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란히 서는 것도 내켜하지 않던 녀석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화수가 제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마주한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말간 눈동자만 봐서는 제 손을 붙잡고 있는 게 녀석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 새하얀 손이 제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심지어 붙잡은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미세한 떨림이었지만 리 샤오는 그것을 놓치지 못했다.

리 샤오의 미간 주름이 짙어진다. 도저히 그 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아니, 떨쳐내고 싶지 않았다. 리 샤오가 답지 않게 머뭇거리고 있던 그 순간.

쾅, 콰쾅-!!!

난감해하는 리 샤오를 돕기라도 하듯 다시금 천둥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강도를 더한 굉음에 흠칫, 놀란 화수가 붙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았다. 난감하던 것을 해결되었지만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물러난 화수의 손이 눈에 띄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설마. 리 샤오의 눈매가 다시 가늘어졌다.

“혹시.”

마주한 얼굴이 리 샤오를 향한다. 평소와 다름없는 말간 표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그제야 제대로 들어왔다.

“천둥이 무서워?”

“…….”

대답은 없었지만, 이미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흔들리는 동공이, 꽉 움켜쥐었지만 떨림이 잦아들지 않는 두 손이 대신 대답해주고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

“…….”

나직이 뇌까리자 화수가 민망한 듯 아랫입술을 깨문다. 하지만 리 샤오는 그 말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진심으로 기가 막혔다. 벌벌 떨 정도로 무서우면서, 그리 싫어하는 제 옷자락을 붙잡을 정도로 무서우면서 결국 또 포기하듯 한발 뒤로 물러서버리는 화수가 기가 막혔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싶었다.

“너-”

뭐라고 한마디 해주려고 입을 열었던 리 샤오가 멈칫한다. 순간 하늘이 번쩍였기 때문이다. 물론 영문을 모르는 화수는 리 샤오의 열리다 만 입술을 보고 있었다. 리 샤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속으로 욕설을 되뇌면서도 결국 리 샤오의 손은 앞으로 내뻗어지고 있었다.

쾅, 쾅쾅-!!!

다시 한 번, 이번엔 조금 전보다 더 큰, 말 그대로 하늘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화수에게는 그 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작게 느껴졌다. 리 샤오의 커다란 두 손이 화수의 귀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쩍이는 게 신호야.”

막았던 손을 떼며 리 샤오가 설명했다. 물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지만.

“젠장.”

멍하니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리 샤오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물론 반쯤 떼었던 손도 도로 닫혔다. 커다란 손이 귀를 막자 마치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귀가 먹먹해졌다. 하지만 덕분에 바깥 소리가 멀어졌다. 저 멀리서 다시금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신기한 사내였다. 하늘에서 언제 천둥이 칠지까지도 미리 알아차리다니. 우연인가 싶었지만 그 우연이 몇 번씩이나 반복될 리는 없었다.

맞닿은 살갗이 뜨거웠다. 귀가 뜨거운 것인지 리 샤오의 손이 뜨거운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사실은 맞닿은 곳에서부터 열기가 번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얼굴이,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가까워.

그제야 깨달은 것이지만 리 샤오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코끝에 짙은 향이 확, 풍겨들었다. 조금 전 겨우 가라앉혀놓았던 열기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랫배 쪽이었다. 아랫배가 단단하게 올라붙더니, 열기가 조금 더 아래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엉덩이 안쪽이 근질근질했다. 화수가 저도 모르게 리 샤오의 젖은 옷자락을 붙잡았다. 얇은 천 너머로 순간 근육이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리 샤오는 큰 의미 없이 천둥소리를 막아주려고 그런 것뿐이었다. 애가 달은 쪽은 저 혼자만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화수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좀.

입으로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리 샤오가 질린 표정이라도 지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아랫입술을 깨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수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어떤 눈으로 리 샤오를 올려다보고 있는지.

리 샤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반사적으로 화수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혹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낸 건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화수를 안심시키듯 이번에도 리 샤오가 귀를 살짝 열었다. 그리고 나직이 묻는다.

“입맞춤은 괜찮다고 했지.”

“…….”

하지만 그 질문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뜨거운 입술이 화수를 눌렀다. 거절의 말 같은 건 듣지 않겠다는 듯.

물론 거절할 생각조차 없었던 화수는 그대로 입술을 벌렸다. 그 질문이 입맞춤을 하겠다는 의미였음을 깨달은 건 그쯤이었다. 뜨거운 혀가 들어왔다. 동시에 막은 손 너머로 펑, 하고 세상이 뒤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을 알아채고 귀를 좀 더 강하게 틀어막으며 리 샤오가 깊이 들어왔다.

살덩이가 엉켰다. 저도 열이 많이 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리 샤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뜨거운 기운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얼마나 뜨거운지 화수는 입안이 녹아내리는 것 이 아닐까 조금 겁이 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입안이 다 녹아버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화수가 리 샤오의 옷자락을 더 당겼다. 더 깊이, 더 가득 채워주기를 원했다. 그런 화수의 신호에 입맞춤이 더 격렬해졌다.

각도를 달리해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쉴 새 없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숨이 차 헐떡이면서도 화수는 붙잡은 리 샤오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바싹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몸이 뒤로 밀렸다.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리 샤오가 그대로 바싹 붙어왔다. 등이 젖은 담벼락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입안의 질척거리는 소리가 빗소리보다 컸다. 삼키지 못한 침이 입안에 고였다. 그것을 리 샤오가 샅샅이 빨았다. 마치 입안의 모든 것은 자신의 소유라는 듯. 그게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귀를 막고 있던 손이 목덜미로 내려왔다. 천천히 젖은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뜨거운 손바닥의 감촉이 유난히 자극적이었다. 온몸의 솜털이 다 서는 것 같았다.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손이 화수의 동그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옷 너머로도 움켜쥐는 손의 뜨거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움켜쥔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리 샤오가 몸을 붙여왔다. 맞닿은 앞쪽은 더 뜨거웠다. 하지만 화수의 것은 더 뜨거웠다. 옷이 빗물에 젖어 있어 다행이었다. 아니면 제 것으로 젖은 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테니까. 맞닿은 사타구니가 비벼졌다. 단단하게 앞을 찔러대는 것이 느껴지자 뒤가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화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쏟아지는 것이 폭우라 다행이었다.

아아아. 맞닿은 입안으로 신음이 터졌다. 숨이 찼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화수는 리 샤오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리 샤오가 자신에게 욕정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쾅쾅쾅!!

하지만 그 순간 다시금 천둥이 요란하게 쳤다. 순간적으로 화수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그런 화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 샤오는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뜨거운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하아. 하아. 하아.

입술이 떨어진 것도 입안으로 들이치는 숨을 내쉬면서야 깨달았다. 젖은 입술이 점점 멀어졌다. 안타깝기도 하고 아직 다 해소하지 못한 열기에 화수가 리 샤오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리 샤오는 화수의 손을 떨쳐냈다. 매달리는 건 한 번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라 가능했을 뿐.

두 사람 중 먼저 정신을 차린 이가 리 샤오라는 게 조금은 민망했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열기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화수와 달리 리 샤오는 바닥에 떨어진 제 양복을 주워 들고 있었다. 그것을 멍하게 보고 있으려니 리 샤오가 그것을 화수의 머리에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번쩍이면 귀를 막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이지 몰라 멍하게 있으려니 몸이 휙, 하고 들렸다. 뒤늦게 리 샤오가 자신을 업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두 사람은 쏟아지는 빗속으로 뛰어든 뒤였다.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반사적으로 화수가 제 귀를 막았다. 조금 전 리 샤오가 막아주었을 때보다는 큰 소리가 들렸지만 그래도 확실히 무서운 것은 덜했다.

천둥소리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화수가 리 샤오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다시금 빛이 번쩍였지만 이번엔 그 손을 풀지 않았다. 그저 리 샤오의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었을 뿐이다. 리 샤오의 냄새 때문인가. 연신 울리는 천둥소리에도 이상하게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이상했다. 하지만 그렇게 의아해하면서도 화수는 아이가 어미의 품을 파고들듯 리 샤오의 등에 몸을 묻었다.

두 사람의 위로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 4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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