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대체 이것이 무슨 일이랍니까.”
이상하게 불안하다 싶더니. 사이좋게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본 집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런 집사의 궁금증을 풀어줄 여유가 리 샤오에게는 없었다. 잠시 멈춰 선 그 잠깐 사이에도 그에게서 떨어진 물방울들로 잘 닦아둔 마룻바닥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목욕물.”
가타부타 설명은 생략한 채 용건만 간단히 뇌까리는 리 샤오에게는 익숙한 집사였다.
“데운 물을 더 넣으라고 하겠습니다.”
이미 주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목욕물 준비는 끝낸 지 오래였지만, 물의 온도는 여름 날씨에 맞게 미지근하게 맞춰놓았다. 그러나 흠뻑 젖어 체온이 떨어진 몸을 데우려면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리고 집사는 더 묻는 대신 이미 앞서서 걸음을 내디뎠다.
물론 손가락을 까딱여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바닥을 닦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슥슥슥. 재빨리 바닥에 엎드려 가장 큰 물웅덩이를 닦아낸 시종이 바닥에 난 물방울을 따라 걸레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콰콰쾅-!!!
“어이쿠.”
꼭 하늘이 쪼개질 것만 같은 요란한 소리에 몸을 둥글게 말았던 시종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천정을 살핀다. 물론 그런다고 쪼개진 하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밤새, 쏟아질 모양이네.”
기와지붕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엄청났다. 다소 질린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 시종이 이내 쥐고 있던 걸레로 복도를 따라 떨어져 있는 물기를 다시 훔쳐내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보다 집사어른의 불호령이 좀 더 무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 * *
“괜찮으십니까?”
저를 향한 집사의 물음에 화수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번진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화수의 눈빛에 집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낯색이 상기된 듯하여.”
평소 워낙 핏기 없는 허여멀건 얼굴이라 오히려 지금이 보기에는 더 좋아 보였지만 어쨌든.
“열이라도 오르시는 거 아닙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집사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안 되겠습니다. 사람을 보내 홍 의원을 불러들이도록 하지요.”
“둬.”
화수의 만류에도 좀처럼 물러서는 법이 없던 집사가 리 샤오의 말 한마디에 그대로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그런 집사의 편애에 투덜거릴 기회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순간 불쑥 내뻗어진 커다란 손이 화수의 이마에 닿았기 때문이다.
“열은 없으니, 호들갑 떨지 마.”
나직이 덧붙이는 그 말에 그제야 화수도 그 손이 제 체온을 재려고 이마를 짚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깨달았을 땐 이미 손이 미련 없이 이마에서 떨어져 나간 뒤였지만.
“조심해서 나쁜 건 없지요.”
집사는 리 샤오의 핀잔에 한마디 덧붙이긴 했으나 그래도 더 이상 홍 의원을 부르러 사람을 보내겠다고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다. 대신 화수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으로 방향을 튼 모양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시는 게 좋겠습니다.”
“…….”
“뭐 해.”
손이 닿았던 이마 부위가 유난히 후끈거려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리 샤오의 질책이 떨어졌다. 언성을 올리거나 하는 질책은 아니었지만 고저 없는 그 낮은 목소리가 오히려 화수는 더 어려웠다. 변명도 하지 못하고 우물거리고 있으려니 그 틈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리 샤오의 손이 내뻗어졌다. 움찔하는 화수를 스치고 간 손이 도달한 곳은 우습게도 그 등 뒤에 위치한 문이었다.
드르륵.
“들어가.”
묵직한 나무 문을 연 리 샤오가 화수에게 고갯짓을 한다. 굳어 있던 화수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태연히 걷는 게 어떤 거였더라. 걷는 방법을 잊은 것 같았다. 주인과 달리 몸은 다행히 기억을 잊지 않아 정신을 차렸을 땐 문을 통과해 착실하게 안으로 들어온 뒤였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함께 안 들어가십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뒤에서 들려온 집사의 물음에 화수가 급히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막 문을 닫으려던 리 샤오와 눈이 마주쳤다. 양은 줄었지만 그의 젖은 머리칼에서는 분명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맞은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젖은 걸로만 치면 오히려 상태는 리 샤오가 더 심각했다. 그럼에도 리 샤오는 비를 맞은 이가 화수뿐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먼저 씻고 나와.”
툭, 내뱉는 말에 화수의 입술이 벌어졌다.
하지만 곧 다물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하고 싶은 수많은 말들은 그대로 입안으로 사그라졌다. 그사이 반쯤 열렸던 문은 굳게 닫혔다. 적막이 찾아왔지만 이상하게 가슴은 소란스러웠다. 마치 달군 돌덩어리를 삼킨 듯 목 언저리가 뜨끈했다.
돌아서지도, 그렇다고 닫힌 문을 열지도 못하고 그렇게 서 있을 때였다.
“밖에 있을 테니까.”
-!
굳게 닫힌 문을 뚫고 들어오는 나직한 목소리.
가버리지 않는구나.
그제야 가슴속 소란이 조금 잦아들었다. 물론 말 그대로 조금일 뿐 완전히는 아니라 굳게 닫힌 문만 응시하고 있으려니 곧바로 조금 전보다 확연히 온도가 떨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그렇게 서서 버티지 말고 탕에 들어가.”
“…….”
어떻게 알았지. 분명 문은 굳게 닫혔는데 꼭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명령하는 리 샤오에 화수의 눈이 조금 커진다. 물론 조금만 생각하면 안쪽에서 어떤 기척도 나지 않으니 쉽게 추측했음을 알 수 있었지만 화수도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웠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머리가 돌아가기도 전에 다시 한 번 날카로운 명령이 문을 넘어왔다.
“억지로 집어 넣어줄까.”
피식.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화수의 입에서 소리 없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뭐가 또 기분이 상하신 건가. 우리 대장님은.
순간적으로 그렇게 하게 둘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리 샤오의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던 물방울이 떠오른 탓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화수가 천천히 옷고름을 풀었다. 스슥. 젖은 옷감이 마찰하는 소리는 썩 듣기에 좋지 않았지만 화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투둑. 어깨를 감싼 옷을 젖히자 비를 잔뜩 머금어 본래의 무게보다 배는 무거워진 천이 바닥으로 떨궈졌다. 마른 어깨로 한기가 몰려들었다. 젖은 천이라도 옷은 옷이었던 모양.
찰딱찰딱. 맨발로 젖은 바닥을 딛는 소리의 간격이 점점 빨라졌다. 둥근 탕 안의 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지만 급한 마음에 물 온도를 확인하는 것을 잊었다.
“윽.”
집어넣었던 발을 황급히 빼면서 소리를 죽였으나 이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신음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사실 그리 큰 소리도 아니었다. 숨소리보다 조금 더 컸을 그 신음소리가 화수의 귀에 들리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왜-”
다급하게 뛰어 들어오던 리 샤오가 목욕통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는 화수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물이.”
덩달아 뺀 발끝을 세운 채 굳어 있던 화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뜨거워서.”
무표정하던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잔뜩 찌푸려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다 큰 어른이 뜨거운 물 때문에 이러고 있으니 기가 막히겠지만 그리 큰 소리를 내지도 않은 듯한데 그걸 또 귀신같이 듣고 들어온 이는 리 샤오가 아닌가.
조금은 억울해진 화수였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그것을 따지고 들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다행히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대신 누구보다 발 빠르게 움직인 한 사람이 있었으니.
“식은 물을 더 넣어드리겠습니다.”
집사의 목소리가 이리도 반가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물론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내가 하지.”
문 쪽으로 다가오는 집사를 향해 리 샤오가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다가오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서라, 라는 경고였으나 충성심이 강한 집사의 발은 이미 한 발 내디뎌진 뒤였다.
“그런 일은 제가-”
“내가.”
멈칫. 이번엔 집사의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본능이었다.
“한다고.”
나직이 뒷말을 읊조리는 리 샤오에 집사도 분명한 경고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제 주인이 이리도 경계하는 연유를 알 수 없었을 뿐.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지만 욕실 문이 닫힐 때까지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설마.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것이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제게 화수의 벗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이를 드러내는 리 샤오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리 샤오가 그런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다는 건 평생 모셔온 집사의 상식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탁.
나무 문을 닫은 리 샤오가 망설임 없이 욕실을 가로질렀다. 화수가 말릴 틈도 없었다. 커다란 동이에서 물을 길어 욕탕 안으로 쏟아부었다. 새하얀 김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뿌연 시야 너머로 탕 속에 손을 집어넣어 온도를 확인하는 리 샤오의 모습이 보였다. 비에 젖은 와이셔츠가 그의 몸에 완전히 달라붙어 피부처럼 근육의 움직임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홀린 듯 우아한 근육의 움직임을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하필 그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 순간 뿌연 수증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뭐 해.”
“…….”
당황한 화수를 향해 찌푸린 눈매로 물어왔다. 아무리 화수라도 당신을 훔쳐보고 있었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우물거리고 있으려니 더 찌푸린 눈매로 고갯짓을 한다.
“이제 안 뜨거우니까.”
아. 그제야 뭐 하고 있냐는 말이 질문이 아닌 안 들어가고 뭐 하고 있냐는 질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찰랑.
걸터앉아 있던 화수가 천천히 발끝을 밀어 넣었다. 조금 전 뜨거웠던 온도를 기억하고 있는 몸이 살짝 굳었지만 이내 딱 기분 좋은 온도에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천천히 탕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발목, 종아리, 무릎, 허벅지, 엉덩이의 반쯤 오는 높이까지 뜨끈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직 뜨거워?”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그사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 손으로 직접 확인하긴 했지만 두꺼운 제 살결과는 다르니까. 답지 않게 당황한 리 샤오의 물음에 화수가 대답 대신 욕조 안으로 완전히 몸을 담갔다. 마른 어깨 위로 뜨거운 물이 찰랑거렸다. 울긋불긋, 꽃이 피듯 달아오르는 살갗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리 샤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어 마른 어깨를 움켜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금니를 사려 문 탓에 리 샤오의 턱 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제 손이 닿았을 때 화수가 지었던 그 표정을 다시금 보고 싶지는 않았다. 주먹을 움켜쥔 리 샤오가 뒤돌아섰다. 하지만 그런 각오에도 불구하고 리 샤오는 얼마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 섰다.
“아-앗.”
외마디 비명과 함께 들려온 첨벙거리는 물소리에 리 샤오의 고개가 도로 꺾였다.
사실 목욕통 안에서 미끄러져봐야 겨우 물 조금 먹는 것이 고작이겠지만 그럼에도 리 샤오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경험을 했다. 조금 전 욕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때처럼.
“화수-”
되돌아온 리 샤오가 다급히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그 순간 새까만 머리통이 불쑥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 불안하면 그냥 함께 씻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
그리 말하는 화수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제야 저를 골탕 먹이려고 한 것임을 리 샤오도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리 샤오의 표정은 찌푸려지지도 험악해지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화수의 웃는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웃음을 머금고 있던 눈이 이내 천천히 가라앉는다.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화수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
화수 역시도 그제야 제 장난이 조금 심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임산부임을 잠시 잊었다. 뭐라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리 샤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화수의 고개도 따라 올라왔다. 하지만 곧 화수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대로 박차고 나가버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리 샤오는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고 있었다. 반쯤 얼빠진 목소리로 묻는 화수의 물음에 막 젖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바지버클을 풀던 리 샤오가 무심히 대꾸했다.
“함께 씻는 게 낫겠다며.”
이래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은 하는 게 아닌데. 물론 뒤늦게 후회해봐야 이미 소용없는 일이지만.
“잠시.”
바지버클을 푸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선을 거둔 화수가 응시하고 있던 곳은 잔잔히 파문이 이는 수면이었다. 잔잔하던 수면 위로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옆으로 크고 단단한 몸이 스쳐 지나갔다. 살짝 닿은 어깨가 뜨끈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이 뜨거운 물속이라 다행이었다.
쏴아아아-
화수를 스쳐 지나간 리 샤오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앉자 통 속에 있던 물이 흘러넘쳤다. 요란한 물소리에 참았던 숨을 끼워 넣었다. 물론 숨은 금방 다시 가빠졌다.
“사내 둘이 들어오긴 좁군.”
사실 나무로 만든 욕탕은 사내 둘이 들어오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그저 리 샤오의 몸이 평균 남자의 기준을 훨씬 벗어난 게 문제일 뿐.
“허면 저는 이쯤이면 된 듯하니-”
“앉아.”
까딱이는 고갯짓에 반쯤 일으켰던 엉덩이가 도로 주저앉았다.
“함께 들어오자고 거짓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
안 그래도 할 말 없던 입이 더 꽉 다물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리 샤오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두 사람 중 누구도 아니었다.
타닥타닥타닥.
소강상태를 보이던 비가 다시 굵어지고 있었다. 퍽, 퍽, 기와를 때리는 빗소리가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화수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때였다. 잔잔하던 물 위로 파문이 일었다. 반사적으로 화수의 시선이 아래로 끌려 내려왔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제 앞으로 내뻗어진 커다란 손.
찰랑.
잠시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보고만 있으려니 한 번 더 잔잔한 물 위로 파문이 일었다. 고개가 조금 더 들리고 검은 눈과 마주쳤다.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심연처럼 새까만 눈동자. 시간이 조금 전보다 훨씬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물기에 젖어 더 짙어진 검은 머리칼, 보기 좋게 볕에 그을린 피부가 물기를 머금어 건강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그런 화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굵은 눈썹이 살풋 찌푸려진다. 한일자로 닫혀 있던 리 샤오의 입술이 벌어졌다.
“이리 와.”
명령하는 목소리에 묘하게 초조한 기색이 섞인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마도 제 착각이리라. 망설이던 화수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이유는 순간 번쩍이는 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싫으면 관두라는 듯 뒤로 물러서는 손을 보자 화수는 저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필 화수가 일어서는 그 순간 빛이 번쩍였다.
-!
리 샤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손을 내뻗어 굳어 있는 화수의 팔을 붙잡았다. 물에 젖은 근육이 도드라졌다.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느꼈지만 화수는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에 힘을 빼고 이끌리는 방향으로 몸을 맡겼다.
촤아아.
탕 안의 물이 밖으로 넘쳐 쏟아졌다. 하지만 그 소리는 화수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미 커다란 손이 화수의 귀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쾅콰쾅-!!!
기다렸다는 듯 천둥이 내려쳤다. 화수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꽉 움켜쥐고 있던 리 샤오의 팔뚝에 손톱이 박혔다. 하지만 화수의 귀를 막는 손은 전혀 미동도 없었다.
파르르.
내리깔린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젖은 속눈썹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입술로 훔치고 싶었지만 리 샤오는 그저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다. 스윽. 내리깔렸던 속눈썹이 들리고 새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눈동자. 제가 어떤 눈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나 하고 이리 사람을 응시하는 걸까.
-!
사람을 미치게 하는 새까만 눈동자에 난감한 기색이 번진다. 반사적으로 그 시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던 리 샤오 역시 미간을 찌푸린다. 제 팔뚝에 난 손톱자국을 발견한 탓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랫입술을 깨문 화수가 순순히 사과를 해온다.
하지만 이런 건 리 샤오에게 상처 축에도 들지 않는다. 사실 화수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정작 본인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미미한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런 것에 사과라니. 왠지 기분이 상했다.
“관둬.”
미간을 찌푸린 리 샤오가 손을 물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새하얀 손이 리 샤오의 손을 감싸 쥐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도자기로 빚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얗고 매끄러운 손. 제 손 반만 한 작은 손이 리 샤오의 손을 붙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린아이 손을 비트는 것만큼이나 쉽게 뿌리칠 수 있을 법한 그 손을 리 샤오는 뿌리치지 못했다.
손을 붙잡은 화수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도 사실 리 샤오는 화수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물론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한 가지밖에 없었지만 그리 단순한 일도 예상치 못할 만큼 리 샤오도 당황한 상태라는 말이었다.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
할짝. 새빨간 혀가 살짝 피멍이 맺힌 반달 모양의 상처를 핥았다. 혀에 닿은 근육이 꿈틀거린다.
“뭐 하는 거지?”
“소독 중입니다만.”
“…….”
하, 이거 봐라. 기막혀하는 리 샤오의 시선을 고스란히 맞받아치며 화수가 되물었다.
“그만둘까요.”
“…….”
리 샤오의 미간이 조금 전보다 더 짙게 구겨졌다. 그렇게 묻는 화수의 표정은 결코 그만두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리 샤오의 입술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고 있었다.
스윽.
가지런한 이가 피부를 긁어 올렸다. 물에 젖은 매끄러운 피부 위로 새하얀 이가 미끄러지자 근육이 팽팽해졌다. 온몸의 신경이 다 곤두서는 기분이었지만 화수가 하는 대로 두고 보고 있는 리 샤오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붉은 입술 사이로 더 새빨간 살덩이가 삐죽 튀어나왔다. 그리고 조금 전 이로 긁었던 곳을 할짝인다. 깨물었다 핥았다 완전히 제멋대로인 새끼 괭이를 가만히 응시하던 리 샤오가 반대편 손을 내뻗었다.
“그만둬.”
턱을 붙든 리 샤오가 뇌까린다. 말간 눈과 마주쳤다. 리 샤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기분이 뒤섞인 숨이었다. 그 한숨에 새끼 괭이가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조급해졌다.
“이 이상 오면.”
그래서였을까. 답지 않게 덧붙이는 변명이 빨라졌다.
“그만두는 것 따윈 없어. 네가 싫다고 해도 끝까지 갈 거야.”
움츠러들었던 눈이 천천히 누그러진다. 경계를 하고 있던 눈이 천천히 반달로 접혔다.
“중간에 그만두면 저야말로 곤란합니다만.”
되받아치는 화수의 말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기가 막혔다. 하지만 가장 기가 막힌 것은 그런 녀석의 반응에 안도한 자신이었다.
리 샤오의 복잡한 생각을 알기나 하는지 화수가 굳어 있던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볐다. 갸르릉, 소리가 날 것 같은 몸짓이었다.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닌 몸짓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심장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인가. 고작 제게 얼굴을 기대올 뿐인데 그것이 이리 기쁠 일인가. 하지만 아무리 속으로 되물어도 그 질문에 대답을 해줄 이는 없었다.
-!
다행히 다시 한 번 주변이 번쩍였다. 리 샤오의 두 손이 화수의 귀를 덮었다. 그리고 화수 역시 리 샤오가 그리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 눈만 내리감았다.
콰쾅쾅-!
감겨 있던 화수의 눈이 떠진 것은 천정을 꿰뚫을 듯 쏟아지는 천둥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델 듯이 뜨거운 것이 제 입술을 눌러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떴던 화수가 이내 눈을 도로 감았다. 꽉 다문 입술을 더 뜨거운 것이 갈랐다. 그대로 밀고 들어온 살덩이가 입안을 휘젓는다. 제 입안이 작은 건지 리 샤오의 혀가 큰 건지 모르겠지만 살덩이로 입안이 가득 찼다.
아득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젖혔던 모양이다. 그런 화수의 움직임을 리 샤오는 제게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오해했는지 귀를 막고 있던 손이 좀 더 강하게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젖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손안에 딱 맞게 들어오는 동그란 머리통을 움직이지 못하게 쥐고 리 샤오가 더 깊이 들어왔다.
살덩이가 엉켰다. 파고든 손이 거칠게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각도를 달리해 몇 번이고 입을 겹쳐온다. 숨이 가빴다. 하지만 화수는 몸에서 힘을 뺐다. 예민해져 있는 맹수를 자극해서 좋을 일이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헐떡이는 숨이 입안으로 사그라졌다. 젖은 살들이 질척이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점점 숨이 모자랐다. 가슴이 뻐근했다. 이러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리 샤오가 입술을 뗐다. 물론 완전히는 아니고 딱 화수가 숨을 들이쉴 수 있는 공간만큼만. 물론 손으로 움켜쥔 머리칼은 전혀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깨물.
헐떡이느라 살짝 들린 윗입술을 리 샤오가 깨물었다. 반사적으로 굳는 몸을 달래듯 이번엔 혀를 내밀어 핥아 올린다.
츠윽.
젖은 살덩이가 들척이는 감각.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것은 아래가 열리는 감각과 닮아 있었다. 몸이 굳어 있어 다행이었다. 아니면 무릎이 꺾여 자리에 주저앉았을 테니까.
젖은 혀가 입술 안쪽 살을 훑어 올렸다. 입술 모양대로 가장 여린 살을 더듬는다. 닿은 이가 간질간질했다. 사실 간질간질한 것은 이뿐만은 아니었다. 자꾸만 벌어진 틈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 애를 태우듯 간질이기만 하던 입술을 리 샤오가 콱, 하고 깨물었다.
“아-”
몸이 휘청였다. 그런 화수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꽉 붙들었다. 화수도 저를 붙드는 단단한 몸에 다급히 매달렸다. 달궈진 물이 들썩였다. 다시 한 번 목욕통 밖으로 물이 쏟아졌다. 몸이 밀착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건 조금 뒤였다. 올려다보는 시선에 조금 전보다 더 검어진 눈동자가 보였다. 다행이었다. 혼자만 몸이 달아 있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으니까. 위협적으로 아랫배를 찔러대는 성기가 다행스럽기는 처음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들썩이는 몸을 끌어안고 있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둔덕을 훑어 내리는 손길에 배꼽 아래 단전이 찌르르 울렸다. 쉬. 움츠러든 엉덩이를 달래듯 둥글리던 손이 가만히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힉.”
느슨해졌던 다리 사이를 오므렸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긴 손가락은 이미 주름진 곳을 살짝 벌리고 들어온 뒤였다. 뜨거운 탕 속에서 데워진 탓인지 별다른 저항도 없이 손가락 마디 끝을 한 번에 삼켰다.
윗입술을 들쳐 올리던 혀처럼 손가락이 오므라진 주름을 넓혔다. 벌어진 틈새로 뜨거운 물이 딸려 들어왔다. 주름이 꽉 조여들었다. 리 샤오는 엉덩이 사이에 손가락을 꽂은 채 다른 한 손으로 화수의 허리를 바싹 당겼다. 그러고는 가랑이 사이로 무릎을 집어넣는다.
“읏-”
단단한 허벅지가 화수의 것을 뭉갤 듯 눌러왔다. 반사적으로 허벅지를 조였지만 이미 자리 잡은 리 샤오의 허벅지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다리 사이가 벌어지자 손가락을 물고 있던 입구도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입구가 꽉 오므라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리 샤오도 그런 반항을 용납하지 않았다.
“벌려.”
다리를 벌리라는 건지 입구를 벌리라는 건지 알 수 없어-아마도 둘 다였겠지만- 머뭇거리는 사이 손가락은 좀 더 깊은 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아-. 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밭은 숨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미 자리 잡은 손가락은 거리낄 것 없이 안을 헤집었다. 마디 끝까지 밀어 넣은 손가락이 안에서 크게 원을 그리자 화수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물론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리 샤오가 화수의 몸을 붙들었다. 허리를 당겨 좀 더 제 쪽으로 바싹 안았다.
사타구니에 끼워져 있던 단단한 허벅지가 화수의 것을 짓눌렸다. 예민해져 있던 성기가 미끄러지듯 문질러질 때마다 허벅지가 벌벌 떨렸다. 그사이 하나였던 손가락은 두 개로 늘어 있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도 없었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이 더 맞았다. 앞뒤가 모두 붙들린 터라 속수무책이었다. 무릎에 자꾸 힘이 빠졌다. 어느새 기울어진 이마가 리 샤오의 가슴께에 닿았다.
“아, 아, 아-”
뒤늦게 깨닫고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 순간 끝까지 빠졌던 손가락이 거칠게 안을 쑤시기 시작했다. 굵은 손가락 두 개가 들락이는 곳에서 질척질척한 소리가 났다. 입구가 어쩔 줄 모르고 벌렁거렸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들락이는 손가락을 물고 빨았다. 뒤로 빠지는 손가락에 달라붙어 나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제 의지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화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화수의 젖은 머리칼이 리 샤오의 가슴에 달라붙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더 거칠어졌다.
“응, 응. 으-응.”
앙다문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맞닿은 가슴께로 밭은 숨이 쏟아졌다. 손가락이 휘저으면 휘젓는 대로 안이 흐물거렸다. 측, 젖은 소리를 내며 집요하게 구멍을 벌리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하아.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잠, 흣-.”
물러선 줄 알았던 커다란 손이 이번엔 화수의 사타구니로 옮겨져 바짝 선 성기를 움켜쥐었다.
“읏, 으, 아. 응, 응…….”
이미 이전의 자극으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성기를 꽉꽉 쥐었다 놓았다. 그럴 때마다 화수의 입에서는 달뜬 신음이 터졌다. 손가락 끝 동그란 부분으로 옴폭한 곳을 둥글린다.
아으으.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리 샤오는 사정 봐주지 않고 이번엔 손톱을 세웠다. 주저앉는 몸을 손쉽게 붙들고 몇 번이고 입구를 문지르고 긁어 내렸다. 배꼽 아래 부분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잠, 잠깐, 가, 갈 것-”
다급해진 화수가 헐떡이면서 단어를 겨우 만들어냈다. 하지만 정작 리 샤오는 태평한 반응이었다.
“가도 돼.”
리 샤오의 허락에도 화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젓는다.
“싫, 습니다.”
“…….”
그제야 리 샤오의 손이 멈췄다. 기분이 상한 것이 분명한 눈동자에 화수의 뒷말이 빨라졌다.
“저만 가는 건, 싫습니다.”
피식. 예상 밖의 대답에 리 샤오가 웃었다. 물론 그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만.
“누가 혼자만 가게 해준다고 했지?”
리 샤오의 질문에 화수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진다. 다행히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던지 리 샤오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내가 그리 신사적으로 보이는지 몰랐는데.”
기가 막혀하는 리 샤오에 화수에게서 변명이 튀어나왔다.
“저는 그저.”
“그저?”
“…….”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머뭇거리는 화수의 모습에 리 샤오의 눈매가 다시 사나워진다. 사실 이쯤 되면 그냥 넘어가긴 힘들었다.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거짓말은 통하지도 않을 테고 괜한 일로 힘 빼지 말자 싶어 화수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배불뚝이 몸을 보고 식었나 싶었지요.”
“…….”
리 샤오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그제서야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부푼 배를 보던 리 샤오가 나직이 감상을 내뱉는다.
“그렇군.”
묘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무거웠다.
“아무래도 힘들겠어.”
“…….”
화수가 저도 모르게 부른 배를 감추듯 감싸 쥐었다. 그런다고 감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태연한 척하려고 했으나 표정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단순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직접 말로 듣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숨을 고른 뒤, 되물었다.
“그만두실 겁니까.”
“그래.”
어찌할 바를 모르고 화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느라 제게로 내뻗어지는 리 샤오의 팔을 보지 못했다. 물론 보았다고 해도 피할 수 없었겠지만.
“앞으로는.”
영문을 모르겠는 말과 동시에 몸이 휙, 하고 뒤집히더니 그대로 뒤로 당겨졌다. 욕탕 속 물이 크게 요동쳤다. 몸이 뒤로 쑥, 꺼지는 감각에도 화수는 그저 눈을 질끈 감았을 뿐이다.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모순적이게도 화수는 리 샤오를 믿고 있었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무의식적인 믿음이었지만, 어쨌든 그 믿음을 증명하듯 화수의 몸은 안전하게 리 샤오의 무릎 위에 안착해 있었다.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이리하면 덜 힘들겠지.”
“…….”
감겼던 화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제야 힘들겠다던 그 말이 마주 보고는 힘들겠다는 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목덜미에 닿는 숨결이 조금 전보다 더 뜨거워진다. 뼈가 도드라진 목덜미가 긴장으로 수축했다.
“신사적으로 구는 건 여기까지.”
그 말을 증명하듯 델 듯이 뜨거운 것이 엉덩이골 사이를 마구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 흉포한 것이 두렵기는커녕 안도감을 주리라고는 화수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또 리 샤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안도하고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화수의 머리통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리 샤오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다리 벌려.”
고저 없는 그 음성에 오싹- 하고 온몸의 솜털이 일제히 섰다. 그러느라 잠시 머뭇거렸는데 리 샤오는 그 잠깐의 시간도 용납하지 않았다.
“힉.”
올라타고 있던 허벅지가 양옆으로 벌어졌다. 자연히 화수의 무릎도 활짝 벌어진다. 벌어진 사타구니를 리 샤오가 붙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쯤 서 있던 것은 그사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측, 츠윽, 측-
하지만 리 샤오가 쥐고 가볍게 몇 번 문지르자 금세 경도가 높아진다. 물속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아, 아- 아.”
안 그래도 뜨거운 물속에서 더 뜨거운 것에 문질러지자 평소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단단한 다리에 막혀 무릎을 오므릴 수도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화수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쏟아졌다. 물속에서 퉁퉁 불은 발가락이 어쩔 줄 모르고 꼼지락거렸다.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자꾸만 앞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리 샤오가 단단히 붙들었다. 이제는 부푼 배를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슥슥슥, 문지르는 손도가 빨라졌다. 이제는 제 것이 더 뜨거워서 물이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랫도리가 찌릿거렸다. 배꼽 아래로 불덩이가 모였다. 벌어져 드러나 있던 엉덩이 사이 주름이 벌렁거렸다. 감은 눈 안으로 물기가 차올랐다.
이제 갈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성기를 문지르던 손이 딱 멈췄다.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을 내뻗어 제 것을 잡으려고 했지만 리 샤오에게 붙들렸다.
“왜-”
원망 어린 불만을 쏟아내려는 찰나, 이번에도 리 샤오가 한발 빨랐다.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신사답게 구는 건 끝났다고 했을 텐데.”
살짝 떨어지긴 했지만 말을 내뱉을 때마다 숨결이 목덜미로 쏟아졌다. 온몸의 솜털이 다 일어섰다. 화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런 화수를 따라가 리 샤오가 콱, 하고 목덜미를 물었다. 맨살에 이를 박아 넣는 감각이 생생했다.
“악.”
날카로운 통증에 화수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졌다. 그러자 이번엔 질척한 살덩이가 이를 박아 넣었던 곳을 진득하게 핥아 올린다. 화수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복수하시는 겁니까.”
“…….”
피식. 예상치 못했다는 듯 잠시 반응이 없던 리 샤오가 이내 바람소리를 냈다.
“글쎄.”
뒷덜미가 오싹오싹했다.
“되갚아줄 거였으면 고작 이 정도로 안 끝났어.”
“…….”
슥, 아랫니가 긴장한 목덜미를 긁어 올린다.
“받은 건 배로 되갚아주는 성격이라.”
사타구니 안으로 들어와 있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완전히 힘을 뺀 손가락 끝이 연약한 살갗을 더듬어 내려갈 때마다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아.
올라붙은 음낭 아래 미끈한 부분을 동그란 손가락 끝으로 빙글인다. 그 바로 아래에 있는 입구가 벌렁였다. 하지만 손가락은 그 아래로 내려갈 생각이 없다는 듯 회음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긁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살갗은 약간의 자극에도 자지러지듯 꿈틀거렸다. 허벅지 안쪽이 벌벌 떨린다. 끙끙, 애를 태우는 손길에 화수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응.
귀 아래를 훑어 올리는 숨결이 달큰했다. 귀 뒤 옴폭한 부위를 뾰족해진 혀가 문지른다. 온몸에 개미가 기어오르고 있는 것처럼 근질거렸다. 아랫배가 뭉치듯이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아아-
감질맛 나게 내려왔다가 올라가던 손가락이 반쯤 벌어져 있던 주름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오므라들었던 주름이 다시 벌어졌다. 삽입을 기대하는 내벽이 흐물거리는 것이 생생했다. 주름을 따라 더듬어 내려온 손가락이 옴폭한 가운데를 꾹 눌렀다. 달궈진 고무공처럼 저항도 없이 아래가 손가락을 삼켰다. 힘을 주지 않아도 내벽이 오물거리면서 손가락을 더 안으로 빨아들였다. 손가락 하나가 뿌리까지 단숨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알았으니까, 조르지 마.”
그럼에도 모자라다는 듯 쭉쭉 빨아들이는 아래에 리 샤오가 화수의 귓불을 쪽, 하고 빨았다. 손가락이 달라붙는 내벽을 떼어내듯 둥글게 안을 휘저었다. 아래가 벌어지는 아찔한 기분에 화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츠윽.
숨을 삼킬 틈도 없이 구부러진 손가락 끝이 안을 벌렸다. 그 벌어진 입구로 손가락과는 확연히 다른 질감의 것이 닿았다. 본능적으로 주름이 꽉 다물렸다. 하지만 이미 자리 잡은 손가락을 어찌할 순 없었다. 반쯤 벌어진 옴폭한 부위에 단단한 끄트머리가 자리를 잡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온몸이 긴장했다.
“악-”
하지만 정작 통증이 느껴진 것은 아래가 아닌 위였다. 귀 뒤를 훑던 입술이 귓불을 콱- 깨물었던 것. 그리고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린 아래로 리 샤오의 성기가 밀고 들어왔다. 이번엔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꾸욱.
이미 자리를 잡은 끄트머리가 빠듯한 안을 벌리며 들어왔다. 천천히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 애초에 지는 싸움인 데다 입구를 벌리고 있는 손가락 때문에 아래를 조일 수도 없었다. 화수의 체중까지 실리니 순식간이었다. 그 큰 성기가 저항 없이 자리를 잡았다. 벌어진 입으로도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이는 화수를 느긋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면서 리 샤오가 말했다.
“복수는 이런 게 복수지.”
그 시선은 그제야 조금 허기를 채운 맹수가 느긋하게 사냥감을 감상하는 것을 닮아 있었다.
하아.
안이 빠듯했다. 아래가 가득 찬 것뿐인데 이상하게 숨이 가빴다. 벌어진 입에서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겨우 새어 나왔다. 가늘게 뜬 눈앞이 뿌옜다.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크기였다. 올라탄 자세 때문에 체중까지 실려 평소보다 부피가 더 커진 것 같았다. 사실 거기서 더 커질 수도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지만 바로 제 몸 안에 그 증거가 떡하니 있었다.
“읏-!”
뒤통수만 봐도 딴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걸까. 벌을 주듯 리 샤오가 허리를 튕겨 올렸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들어차 있던 안이 들썩였다. 달라붙어 있던 내벽이 거칠게 떨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화수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이미 리 샤오의 손에 붙들려 있던 몸은 오히려 뒤로 당겨져 단단한 배에 바싹 붙여졌다.
“흣…….”
벌어진 허벅지 아래로 들어온 손이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츠윽, 하고 달라붙어 있던 입구가 벌어졌다. 크고 긴 성기가 들썩이며 밖으로 나갔다가 쿡, 박혀 들어온다. 뜨거운 물과 더 뜨거운 살덩이가 한꺼번에 안을 빠듯하게 채우고 들어왔다. 주욱- 내벽을 긁어 올린 단단한 귀두가 조금 전보다 더 깊은 곳을 쳐올렸다.
“아아…….”
퍽, 퍽, 퍽, 달군 쇠몽둥이로 배 속을 두들겨 맞는 감각. 벌어진 입에서 신음이 쏟아졌다.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도리질하는 화수를 리 샤오는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바르작거리는 몸을 꽉 붙들고 리 샤오는 허리를 쳐올렸다. 물속을 부유하던 발끝이, 꽉 오므라들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좁아지는 길을 억지로 찢어발기듯 벌리고 자리를 채웠다. 저항하던 안이 흐물거리며 길을 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 읏!”
몸의 모든 신경이 바짝 섰다. 부푼 배가 경련하듯 단단해졌다 풀어졌다를 반복했다. 동그란 배를 붙잡고 있는 커다란 손을 그제야 인식했지만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그저 리 샤오가 하는 대로 받아들이고 흔들릴 뿐 화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수가 눈을 감았다. 감은 눈꼬리에서 물기가 새어 나왔다.
“아, 아…….”
연신 들락이는 아래에서 찌꺽찌꺽거리는 젖은 소리가 났다. 오물거리면서 달라붙던 내벽들은 이제 길이 나 리 샤오의 성기 모양대로 뚫린 통로가 된 지 오래였다. 아래가 뜨거웠다. 들락이는 마찰 때문인지 딸려 들어오는 물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밑이 녹아버릴 듯하다는 건 확실했다.
“아응.”
리 샤오가 붙잡고 있던 허벅지를 놓았다. 벌어져 있던 입구가 좁아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제게 달라붙으려는 듯한 그 조임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게다가 입구가 아무리 조여들어도 들락이는 데는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자, 잠, 으- 아…….”
하지만 그럼에도 리 샤오는 약간의 선의를 베풀기로 했다.
미끄러트린 손으로 사타구니를 쥐고 흔들자 꽉꽉 잘라버릴 듯 조여대던 입구가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곳이 단단해진 것과는 별개로.
“응……!”
가볍게 허리를 들썩이자 손안의 것이 부들거리며 튀어 올랐다. 귀엽게도. 그리 생각해놓고 이내 미간을 찌푸린다. 사내의 것을 보고 귀엽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사내의 것을 자발적으로 쥐고 흔들고 싶어질 줄도 결코 예상치 못했지만.
“익-.”
도망치듯 엉덩이가 앞으로 빠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쥐고 있던 귀두를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앞으로 빠지던 엉덩이가 더 깊이 리 샤오의 것을 삼켰다. 안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물고 있던 리 샤오의 성기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밀어내는 아랫입을 벌주는 방법을 리 샤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손안의 것을 꽉꽉 움켜쥐었다가,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아, 아, 아……!”
벌어진 입에서 헐떡이는 숨소리가 쏟아졌다. 앓는 소리를 내면서 화수가 손으로 리 샤오의 손등을 긁었다. 손톱이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자국이 남았지만 리 샤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안의 것이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마냥 퍼드득거렸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안은 끓는 물처럼 들끓었다. 야해빠진 몸이었다.
“아으으……!”
크게 허리를 궁굴리자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앞으로 숙여진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긴장으로 조여진 목선이 좀 더 예리해져 있었다. 투명한 피부 너머로 핏줄이 다 보였다. 보지 않아도 목덜미며 그 아래 가슴까지 발갛게 물들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스윽, 목덜미를 이로 긁었다. 사실 이로 콱 깨물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은 것이었다. 사내 치고는 연약한 피부는 조금만 힘을 줘도 자국이 남았다. 조금 전 이를 세운 곳에 피멍이 맺혀 있었다.
물론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은 그 정도의 약한 자극에도 퍼드득, 튀어 올랐다. 아래가 다시 한 번 꽉 다물렸다.
“그래가지고 잘리겠어?”
말 그대로 잘라버릴 기세로 제 것을 조이는 화수에도 리 샤오는 느긋해 보였다. 살짝 올라간 입매가 오히려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화수는 볼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좀 더 힘을 내.”
놀리듯-물론 그리 말하는 목소리에 웃음기라고는 한 톨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응원해놓고, 정작 먼저 움직인 쪽은 리 샤오였다.
“히-익……!”
달라붙은 내벽을 떨쳐내듯 쑥 잡아 뺀 허리를 다시 깊이 박아 넣었다. 손안에 그러쥔 살덩이가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손가락 끝으로 누르고 있던 곳이 물과는 확연히 다른 질감으로 미끌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리 샤오가 물었다.
“쌀 것 같아?”
“…….”
하지만 안 그래도 터질 듯이 잔뜩 부푼 것을 쥐어짜듯 꽉꽉 움켜쥐고 있으니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리 샤오는 대답을 듣기 전엔 허락해주지 않겠다는 듯 손가락 끝으로 옴폭한 구멍을 막아 누르고 있었다.
아아…….
쏟아내지 못한 열기가 배 아래쪽에서 들끓었다. 말 그대로 배 속이 절절 끓는 것 같았다. 물속을 부유하고 있던 발가락이 저릿저릿했다. 눈앞이 흐릿했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제발. 어떻게 좀.
화수가 애원했다. 물론 제대로 소리 내어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그 순간 리 샤오가 입구를 막고 있던 손가락을 떼어내면서 속삭였다.
“싸도 좋아.”
리 샤오의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내내 절절 끓기만 하던 화수의 것이 그제서야 하얀 액을 쏟아냈다.
눈앞이 확 꺼지고,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벌어진 허벅지 안쪽이 움찔거리며 잘게 경련했다. 아직 남은 사정감으로 궁굴리고 있는 몸을 리 샤오가 억지로 잡아 일으켰다. 감고 있던 눈을 겨우 떴지만 눈앞은 여전히 흐릿했다.
뭘 하려고.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움직이는 것보다 리 샤오의 행동이 더 빨랐다.
허벅지 안으로 들어온 두 팔이 그의 무릎 위에 얹혀져 있던 두 다리를 접어 올렸다. 그러고는 공중에 쪼그려 앉는 자세가 된 몸을 뒤척인다. 꽉 물고 있던 입구를 억지로 벌리듯 몇 번 들척이더니 곧바로 박혀 있던 기둥을 쑥 잡아 뺐다.
“아, 잠, 잠깐, 아으…….”
순간 아래가 그대로 잡아 뽑히는 기분에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듯 리 샤오는 곧바로 허리를 쳐올렸다. 아래를 오므릴 틈도 없이 굵고 긴 기둥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깊은 곳까지 찌르고 들어왔다.
-!
이번엔 벌어진 입에서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왜.”
움찔움찔 온몸을 경련하는 화수의 허벅지를 더 잡아 벌리고는 리 샤오가 화수의 귓불을 쭉 빨았다.
“간 직후에 쑤셔지는 거 좋아하잖아.”
꽉 감은 화수의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생리적인 눈물이었다. 검고 긴 속눈썹이 젖은 채 파르르 떨렸다. 벌어진 입술에서는 헐떡이는 숨만 새어 나왔다. 물론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리 샤오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것을 잘라낼 듯 꽉꽉 조이던 내벽이 어느새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으, 아, 아.”
더 이상 거리낄 필요가 없다는 듯 리 샤오가 안아 든 화수를 들었다 놓는 것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푹, 푹, 푹, 길쭉한 기둥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흠뻑 젖은 내벽을 단단한 귀두가 죽죽 긁어 올리는 감각이 생생했다.
“하아.”
기분 좋은 듯 내뱉는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달큰한 숨에 아래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녹아내렸는지도 몰랐다. 밑이 빠질 것 같은 기분에 아무리 아래를 조여봐도 별 소용은 없었으니까.
철퍽, 철퍽, 안이 쑤셔질 때마다 두들겨지는 엉덩이에서 찰진 소리가 났다. 아랫배까지는 물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퍽, 퍽, 퍽, 단단한 기둥이 평소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그때마다 허공에 들린 두 다리가 힘없이 흔들렸다.
“응, 으, 응-”
감각 없는 아래가 빠듯하게 차는 기분이 기묘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숨이 엉켰다. 부푼 아랫배가 동그랗게 뭉쳐졌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배가 조여드는 기분에 자꾸만 몸에 힘이 들어갔다.
힘들어.
몸에서 힘을 빼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마치 처음 몸을 여는 사람처럼 모든 것이 서툴렀다. 리 샤오와 관련되면 그랬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힘을 빼는 방법은커녕 숨 쉬는 방법 같은 아주 간단한 일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말 그대로 백치가 돼버린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힘든가?”
고저 없이 나직이 내뱉는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온 건.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럴 리 없다는 걸 다 알면서도, 그럼에도 가끔은 리 샤오가 제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질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굳어 있는 화수의 귓가에 달큰한 숨결이 느껴졌다. 바싹 다가온 입술이 다시 물었다.
“그만둘까?”
등줄기가 오싹오싹했다. 반쯤 눈을 뜬 화수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화수의 벌어진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헐떡이는 숨소리뿐이었다. 그건 단순히 제대로 된 단어를 내뱉을 수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화수의 본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역시, 멍청하진 않단 말이지.”
마치 숨을 쉬듯 나른히 내뱉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물론 기쁜 쪽보다는 아쉬운 쪽에 더 가까운 웃음이었지만.
“착하게 군 상을 주지.”
무슨, 하고 속으로 되묻기도 전에 리 샤오가 뿜어낸 패기가 단숨에 화수를 휘감았다.
그러나 본래는 달큰한 향이었을 그것은, 한꺼번에 엄청난 양으로 쏟아부어지자 오히려 향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공기처럼 주변을 둘러싸고 저를 옳아맸다. 무서울 정도로 농후해진 그것이 폐부 깊숙이 들어와 화수의 안을 꽉꽉 채웠다. 이전 무시무시했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 몸이 긴장으로 잔뜩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비교적 잘 갈무리된 패기라는 걸.
물론 지난번보다 낫다는 말이지 견디기 쉽다는 말은 아니었다. 리 샤오가 마음먹고 내뿜는 패기는 보통 사람이 쉽게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전혀 갈무리되지 않은 패기를 경험해봤으니 그때보다는 덜하구나, 하고 깨달을 뿐.
“아으읏-”
다시금 리 샤오가 몸을 벌리고 들어왔다. 조금 전과 똑같은 것이 들어오는데도 느끼는 기분은 전혀 달랐다. 말 그대로 아래가 다 녹아내리고 있는 기분. 조금 전이 아래를 벌리고 들어와 길을 만드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다 녹아버린 아래를 더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가 마구 휘젓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미 녹아 있는 것이 다시 한 번 더 녹아내리는 감각.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싶지만 지금 화수가 느끼는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힉. 익……, 아으, 으-!”
푹, 푹, 굵고 긴 기둥이 안을 마구 쑤셨다. 미끄덩거리며 안을 꽉 끼울 때마다 화수가 진저리를 쳤지만 소용은 없었다. 웅크리는 몸을 단단히 붙들고 리 샤오는 몇 번이고 안을 쑤시고 또 쑤셨다.
눈앞이 까맣고 하얗게 변했다. 쑥, 하고 앞이 꺼지는 것 같은 기분에 화수는 겨우 버티고 있던 눈을 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생리적인 눈물이었다. 물에 젖은 나비날개처럼 속눈썹이 파르르파르르, 애처롭게 떨렸다. 하지만 리 샤오의 허릿짓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칠고 빨라졌다.
“아, 아, 으-, 아, 읏-!”
진저리치는 화수의 몸을 붙들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허리를 쳐올렸다. 화수가 자지러졌다. 호흡이 엉켰다. 사실 호흡이 멋대로 엉킨 지는 오래였다. 숨은 어떻게 쉬는 거였더라. 천치가 된 것마냥 머릿속이 새하얬다. 그나마 다행한 점은 화수가 해야 할 일들이 많지 않다는 거였다.
“힉. 익.”
퍽, 하고 굵고 긴 성기가 뿌리 끝까지 한 번에 들어와 박혔다. 배 속을 두들겨 맞는 기분에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아래를 벌리고 들어오는 살덩이가 괴로우면서도 아래가 비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더 들어올 수도 없게 들어와 박고 있는데도 더 깊은 곳까지 삼키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오물오물거리며 물고 있는 기둥을 쭉쭉 빨았다.
“아으으.”
어느새 바짝 서 있던 화수의 것에서 조금 전보다는 묽은 정액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발기한 귀두 끝이 움찔움찔거렸다. 머리가 멍했다. 아무래도 뇌가 모두 녹아버린 것 같았다. 이제는 감지 않아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굵은 물방울은 볼을 따라 흘러 턱 끝에 고였다가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마다 수면 위에 파문이 일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이는 없었다. 눈물을 떨구고 있는 화수조차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수가 할 수 있는 일은 리 샤오가 하는 대로 흔들리고 신음하는 것뿐이었다.
아랫배가 뜨거웠다. 아니, 뜨겁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열기가 아래에 들끓었다. 배 아래쪽으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리 샤오가 들락일 때마다 아랫배가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분명 제 것임에도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감각. 무서웠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순간 화수의 입술을 타고 나온 단어는.
“리.”
리 샤오의 이름이었다. 사실 의식하고 내뱉은 것도 아니었다.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이 무의식중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내뱉고 나니 그 뒤는 걷잡을 수 없었다.
“리-”
“…….”
헐떡이는 숨 사이로 겨우 내뱉는 이름. 제대로 된 이름도 아니고 이름 중 첫 자를 되뇌는 것이 고작이었다.
“샤오.”
“…….”
하지만 화수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달싹였고, 몇 번이고 달싹이던 입술에서 겨우 제대로 된 이름이 튀어나왔다.
“리 샤오.”
“씨발.”
그리고 그 순간, 내내 침묵하고 있던 리 샤오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영문도 모르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험악한 기운에 화수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이번에도 리 샤오가 한발 더 빨랐다.
퍽.
옹송그린 허벅지를 벌리며 리 샤오가 허리를 깊이 밀어 넣었다. 순간 배를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감각에 반사적으로 몸을 궁글린 화수가 무릎을 조였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오므라지는 무릎을 리 샤오가 억지로 벌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허리를 콱, 쑤셔 넣었다.
-!
이번엔 신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오그라든 발가락이 움찔움찔거렸다. 뭉치듯 아랫배가 동그랗게 올라붙었다. 내벽이 요동치면서 물고 있던 리 샤오의 것을 더 꽉꽉 물었다. 달라붙는 내벽을 떨치듯 뿌리 끝까지 잡아 뺀 성기를 다시 한 번 집어넣었다.
“아으으.”
“흣.”
쏟아져 나온 뜨거운 정액이 안을 흠뻑 적셨다. 사실 더 젖을 수도 없을 만큼 흠뻑 젖어 있는 곳이었지만 그곳이 그득 차오르는 느낌은 생생했다.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그런 화수의 몸을 꽉 붙든 리 샤오가 한 번 더 안을 휘저었다. 뒤늦게 벌어지는 아래를 꽉 조였지만 소용은 없었다. 꾸직꾸직, 리 샤오가 안을 들척일 때마다 가득 차 있던 정액이 줄줄 새는 것이 느껴졌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화수가 눈을 꽉 감았다. 꽉 감은 눈앞으로 빛이 번쩍였다. 제게만 보이는 줄 알았던 그 빛이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빛임을 깨달은 것은 커다란 손이 제 귀를 덮어왔을 때였다.
아아.
분명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앞이 아득했다. 그래서 화수는 감은 눈을 더 질끈 감았다. 이건 반칙이었다.
콰쾅쾅-!!!
아득한 저 멀리에서 하늘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그 소리가 제 가슴에서 난 듯하다는 기분이 드는 화수였지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화수를 벌주기라도 하듯 리 샤오가 한 번 더 허리를 쳐올렸다. 아래가 휘저어지는 순간 눈앞이 쑥- 꺼졌다.
두 번째 사정이었다.
“아……, 아!”
방 안에 단내가 진동을 했다. 향을 맞는 코뿐만 아니라 온몸이 단내에 절여진 듯했다. 제 몸을 꽉 쥐어짜면 설탕물이 뚝뚝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몸 안의 액이란 액은 다 쥐어짜내져 더 이상 나올 것이라고는 없는 상태였지만.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리고 여섯 번째쯤에서 숫자를 세길 멈췄다. 더 이상 숫자를 세는 건 무의미해 보였으므로. 집요한 데가 있는 사내였다, 리 샤오는.
“거긴.”
연신 흠칫거리던 화수가 헐떡이는 숨 사이로 겨우 제대로 된 말을 내뱉었다.
“빨아도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바짝 선 젖꼭지를 물고 있던 입술이 멈췄다.
“장담할 수 있나?”
“…….”
느긋하게 묻는 리 샤오에 눈매를 살풋 찌푸린 쪽은 화수였다. 왠지 모를 불안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수 역시 물러서는 법을 몰랐다.
“제가 사내라는 점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잊었을 리가 없었다. 눈이 먼 것이 아니라면 리 샤오의 아랫배에 나올 것도 없는 주제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바짝 서 있는 물건을 보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그것을 증명하듯 리 샤오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새끼까지 밴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물론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이 조금 달랐지만. 굳이 그 시선을 따라가지 않아도 자신이 어떤 꼴인지 어떤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화수였다. 화수의 눈가의 주름이 더 짙어진다.
“새끼를 뱄으니 젖도 나오겠지.”
하지만 리 샤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화수의 반응을 재밌어하는 눈빛이었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농 같나?”
“…….”
리 샤오는 농담을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특히 화수에게는.
제가 말해놓고 정작 되묻는 질문에는 선뜻 입을 떼지 못하는 화수를 물끄러미 보던 리 샤오가 천천히 손을 내뻗는다. 단단한 손가락이 퉁퉁 부어 오른 젖꼭지에 닿았다.
흠칫. 그새 잔뜩 발려 있던 침이 말라붙었는지 닿는 살갗이 예민했다. 별다른 자극도 아니고 그저 손가락이 닿은 것뿐인데도 아랫배가 찌릿거렸다. 바짝 긴장한 몸을 달래듯 손가락 끝이 젖꼭지를 얇은 주름 모양대로 더듬는다. 그리고 바짝 선 돌기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린다. 감질맛이 났다. 엉덩이 안쪽이 묵직해지고 있었다.
침을 삼키는 것도 잊을 만큼 모든 신경이 젖꼭지에 쏠려 있었다. 손가락 끝이 세워졌다. 짧은 손톱이 돌기를 살살 긁었다. 하아. 벌어진 입술로 밭은 숨이 흩어졌다. 긴장으로 등 근육이 올라붙었다. 목이 뻐근했다. 숨을 참는 턱 선이 예리해졌다.
“읏.”
순간 부드럽게 긁던 손가락에 힘을 더하자, 화수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가슴을 크게 들썩였으나 여전히 숨이 가빴다. 그만두라는 말을 하고 싶음과 동시에 더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공존했다.
“빨아도.”
이번엔 엄지와 검지가 젖꼭지를 잡았다. 고저 없는 느긋한 목소리가 등줄기를 긁어 내리는 것 같았다. 등줄기가 오싹오싹했다. 헐떡이고 싶은 기분을 겨우 내리눌렀다. 그런 화수의 기분을 알기나 하는지 리 샤오가 몸을 기울였다. 좀 더 바싹 다가선 입술이 귓가에 속삭인다.
“아무것도 안 나온다고 했던가?”
“……흣.”
눈앞이 아찔했다. 돌기를 비틀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늘게 뜬 눈 안으로 리 샤오의 얼굴이 박혀 들어왔다. 하지만 그 표정을 제대로 확인하는 것보다 미는 힘에 의해 화수의 상체가 뒤로 넘어가는 것이 더 빨랐다. 푹신한 이불에 등이 닿기도 전에 리 샤오가 화수의 위로 올라탔다. 두 다리가 벌어졌다. 다시금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지금부터 확인해보면 되겠지.”
또다시 누르면 안 되는 버튼을 눌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읏, 아……. 흣!”
화수의 상체가 들썩였다. 그런 몸을 손으로 지그시 누른 리 샤오가 다시금 젖꼭지를 빨았다. 퉁퉁 불은 젖꼭지를 빨릴 때마다 배꼽 아래가 찌릿거렸다. 바짝 선 발끝이 부드러운 천을 긁어 올렸다. 참았던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이 뻐근했다.
“응……!”
빨리고 있는 반대쪽 가슴을 커다란 손이 꽉 움켜쥐었다. 살집이 없는 가슴을 억지로 그러쥐고 바짝 선 돌기를 손톱으로 긁었다. 그러면서도 빨고 있던 곳을 문지르는 것도 멈추진 않았다. 혀끝으로 돌기를 더듬었다. 간질간질한 기분과 동시에 엉덩이 아래쪽이 묵직해졌다. 발끝이 더 오그라들었다. 리 샤오가 이를 세웠다.
“힉, 익-”
살집째 콱 깨물었다가 놓아주고 콱 깨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물어뜯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몸이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깨물거리던 이가 가슴을 긁어 내렸다.
“읏-!”
딱딱한 것이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살갗을 긁어 내리는 느낌이 생생했다. 허리가 벌벌 떨렸다. 오므라져 있던 아래가 벌렁거린다. 그럴 때마다 안에 있던 정액이 줄줄 새어 나왔다. 엉덩이 아래가 축축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런 주제에 사내란 말이지.”
피식, 웃음기가 섞인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벌린 다리 사이로 시선이 느껴졌다.
“아래를 이리 흥건하게 적시고서.”
“힉-”
흥건하게 싸놓은 건 댁이지 않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말과 동시에 주름을 헤집고 들어온 손가락 때문에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반사적으로 아래를 조였으나 소용은 없었다. 별다른 저항 없이 손가락 하나가 그대로 들어왔다. 더 무서운 점은 전혀 이물감이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손가락을 문 입구에서 액이 줄줄 샜다. 마디 끝까지 들어온 손가락이 아래를 들썩였다.
“빨아준 건 가슴인데 왜 여기서 나올까.”
“으, 아, 아…….”
찌꺽찌꺽, 그럴 때마다 아래에서 젖은 소리가 났다. 마치 아직도 물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온몸이 젖어 있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시, 사내라 그런가?”
대놓고 빈정거리는 말보다 이리 고저 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더 사람을 견딜 수 없게 한다는 걸 리 샤오를 보고 깨달았다.
“흣.”
휘젓던 손가락이 쑥 빠졌다. 아래로 들어온 두 손이 화수의 허벅지를 들어 올렸다. 배에 압박감이 느껴졌지만 완전히 접힌 것은 아니라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저항할 틈도 없이-있었다 하더라도 불가능했겠지만- 리 샤오가 허리를 붙여왔다.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미 여러 번 사정했을 리 샤오의 성기가 처음과 마찬가지로, 아니 기분상으로는 처음보다 더 맹렬한 기세로 바짝 서 있었던 것. 엉덩이골을 문지르는 살덩이에서 열기가 훅, 끼쳤다.
기력도 좋으십니다.
기가 막히다는 듯 속으로 되뇌는 화수의 얼굴이 핼쑥했다. 물론 이제는 나올 것도 없을 지경으로 탈탈 털린 주제에 리 샤오의 냄새만 맡아도 아래를 발딱 세우는 제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기력 좋은 것이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리 집요할 정도로 밀어붙이는 모습은 낯설었다. 지난번 일은 제게 원인 제공의 책임이 있으니 논외로 하고.
그럼에도 화수는 리 샤오를 거부하지 않았다. 제가 거부한다고 해서 리 샤오가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착하게 미리 포기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가슴을 빨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낫겠다 싶었을 뿐. 결과적으로는 그런 화수의 계산이 리 샤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과 맞아떨어져서 다행이었다.
슥슥 엉덩이골을 비비던 끄트머리가 폭, 하고 주름의 중심에 맞춰 들어왔다. 그제야 화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긴장으로 온몸의 근육이 조여들었다.
리 샤오의 것은 크기도 크기지만 귀두가 유독 크고 딱딱했다. 그래서 입구를 열고 들어올 때 특히 버거웠다. 물론 전체적인 크기를 생각하면 다 들어왔을 때의 압박감과 비할 순 없지만 어쨌든 체감상으로는 그랬다.
이미 여러 번, 오늘만 해도 수번은 되는 삽입에 다시금 긴장하는 이유였다.
꾸욱.
오므라든 아래를 딱딱한 귀두가 압박하듯 눌러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잠깐의 저항도 없이 그대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물론 미끄러지듯 쉽게 들어오는 것과 별개로 빠듯하게 안을 채우는 압박감은 엄청났다. 꾸직꾸직, 안에 차 있던 정액이 주름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이불을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이 새하얗게 핏기를 잃었다.
“흐읏…….”
멈췄던 숨이 신음에 섞여 쏟아졌다. 숨을 내쉴 때까지는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숨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헐떡였다. 엉덩이, 허리, 가슴께까지 찬 물이 어느새 목까지 차올랐다. 일렁이는 물결이 바로 코끝에서 찰랑이는 기분이었다.
다 말리지 못한 머리칼이 이불에 마구 비벼졌다. 값비싼 이불이 엉망이 되고 있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 같은 건 없었다. 리 샤오의 상체가 아래로 숙여졌기 때문이다.
“잠깐-, 읏…….”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화수가 황급히 손을 내뻗었지만 간단히 리 샤오의 손에 붙들렸다. 붙잡힌 두 손이 맥없이 양옆으로 벌어지고 리 샤오의 얼굴이 할딱이는 가슴으로 와 닿았다.
흠칫.
화수의 몸이 움찔거렸다. 다행히 리 샤오의 입술이 닿은 곳은 바짝 선 젖꼭지가 아니라 목덜미였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흠칫.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덜미를 더듬어 내려온 입술이 쇄골에서 방향을 바꿨다. 뼈가 도드라진 쇄골을 따라 옆으로 움직이던 혀가 천천히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우유를 머금은 듯 매끈한 살을 미끄러져 내려오던 입술이 확연히 다른 질감의 살갗에서 멈춰 섰다. 분홍빛이 도는 젖꽃판을 혀로 빙글였다. 오밀조밀한 작은 주름들이 팽팽해지고 가운데 젖꼭지가 바짝 섰다.
“이건.”
붙잡힌 두 팔이 손안에서 바르작거렸다. 콱 밟아 누르듯 꼼짝도 못하게 할 수 있지만 리 샤오는 손에 힘을 조금 풀어 공간을 주었다. 그 안에서는 맘껏 바르작거려도 되었다. 벗어나려고 하지만 않으면.
“이건, 싫습니다.”
외로 꺾인 목덜미가 할딱였다. 꼭지뿐만 아니라 젖꽃판까지 모두 한입에 넣어 쭉쭉 빨아 당기던 리 샤오가 입술을 뗐다.
“글쎄. 아래 입은 아니라고 하는데.”
“…….”
감상을 내놓듯 가볍게 툭 내뱉어진 리 샤오의 말에 화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 말에 동의라도 하듯 요동치던 아래가 이제는 숫제 리 샤오의 것을 쭉쭉 빨아 당기고 있었다.
“왜. 여기로 느끼는 게 부끄러워?”
“……읏.”
손가락이 반대쪽 젖꼭지를 꼬집었다. 조금 전과 별다를 것도 없는데 아래가 조금 전보다 더 흥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화수가 흐린 눈을 일그러트렸다.
“눈치는 빠른 주제에 학습효과는 영 꽝이군.”
“…….”
리 샤오의 상체가 천천히 들린다. 하지만 이리 아무렇지 않아 보이다가도 언제 어떻게 난폭해질지 모르는 사내라 화수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리 샤오를 주시했다. 잘생긴 눈매가 일그러졌다. 몸의 긴장이 짙어졌다. 흠칫. 천천히 올라온 입술이 귓가에 머물렀다.
“네가 싫다고 말한 걸 들어준 적이 없는데 왜 매번 멍청한 소리를 하지?”
“…….”
눈도 굴리지 못하고 굳어 있는 화수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반응이었지만 사실 리 샤오는 그리 기분이 언짢은 상태는 아니었다. 굳이 좋다 아니다로 구분 짓자면 좋다, 쪽이었다. 화수는 제 손아귀에 있고, 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한 번씩 사람 속을 뒤집긴 하지만, 그래도 제 손안에 있었다.
“내게 통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그래서 조금은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싫은 것은 말하지 마.”
“…….”
“좋아하는 걸 말하는 게 훨씬 잘 통하니까.”
예상치 못했다는 듯, 하지만 여전히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는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었다. 피식.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못 믿겠으면-”
“리 샤오 님이 좋습니다.”
관두라는 말은 그대로 입안으로 사그라들었다. 순간 허를 찔린 듯 굳어 있는 리 샤오를 향해 화수가 한 번 더 입술을 열었다.
“리 샤오 님이 좋으니 뒤로만 가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이래도 학습효과가 꽝입니까, 라고 말하듯 올려다보는 화수에 굳어 있던 리 샤오의 표정이 험악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더는.”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더는 못 합니다.”
퉁퉁 부어 벌겋게 달아오른 눈 밑이 색스러웠다. 화수의 발가락을 빨던 리 샤오가 피식, 하고 웃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반쯤 끼워져 있던 성기가 부피를 늘리는 것이 느껴졌다. 화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래봐야 벌게진 열꽃이 조금 가신 것뿐이지만.
“리 샤오 님!”
항의를 깡그리 무시하고 다시 밀고 들어오는 리 샤오에 화수가 황급히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허공에 들린 두 다리의 발목을 붙잡히니 속수무책이었다. 비틀리는 바람에 조금 빠졌던 것까지 한꺼번에 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으아.”
사실 이제는 벌어지는 느낌도 없었다. 그저 기억하고 있는 감각에 진저리를 칠 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정액이 줄줄 새어 나왔다. 조금 전 삽입으로 일었던 거품이 아직 다 사그라들지도 않고 주름 주변에 부글거리고 있었다.
“아아…….”
붙잡은 발목을 활짝 벌린 리 샤오가 허리를 뒤척였다. 어찌해볼 틈도 없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정액이 뒤섞이는 것이 느껴졌다. 압박감이나 통증 같은 제대로 된 감각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화수의 것은 착실히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미친 것 같았다. 다리는커녕 리 샤오를 삼키고 있는 구멍도 조일 수 없는 상태인데 또 발기는 된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리 샤오에게서 전혀 힘든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는 거였다.
“내 것으로 가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읏, 으. 으.”
그래서 이미 몇 번이나 갔지 않습니까! 그리 항의하려고 했던 말은 그저 한 음절 외마디 신음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슥슥슥, 연신 허리를 넣었다 빼면서도 리 샤오가 느긋하게 중얼거린다.
“넣으면 넣을수록 부푸는 것 같은데.”
뭐가. 눈앞이 쑥쑥 꺼지는 감각에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감고 있던 화수가 힘겹게 눈을 떴다. 당연히 제 물건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시야에 들어온 리 샤오가 보고 있는 것은 제 가슴께였다. 화수가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무서운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이를 악물고 반박했지만 사실 제가 보기에도 발긋발긋한 가슴께가 묘하게 부풀어 있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곧 머리를 내젓는다. 연신 깨물고 빨아댄 탓이지 절대 그런 이유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확신이 없어지는 화수였지만 다행히 리 샤오의 관심은 그쯤에서 거두어졌다. 좀 더 급한 곳이 있었다.
슥슥슥슥, 허릿짓이 빨라졌다. 몸이 위로 밀려 올라갔다. 쳐올리는 힘을 못 이기고 벌어져 있던 무릎이 자꾸만 꺾였다. 안 되겠다 싶었던지 구부린 무릎을 리 샤오가 세웠다. 대신 발바닥을 제 가슴에 붙이고 각도를 바꿔 찔렀다.
말 그대로 의자에 앉은 자세로 삽입되고 있었다. 각도가 달라지니 더 깊은 곳까지 찔러졌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온몸이 쥐가 나듯 저릿저릿했다. 배가 절절 끓었다.
“아, 아.”
참을 수 없는 기분에 머리를 이불에 비비던 화수가 손을 내뻗었다. 사실 리 샤오를 밀어내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힘으로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의식을 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온몸을 돌아다니는 이 미칠 듯한 기분을 어찌할 바를 몰라 반사적으로 손을 내뻗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숨에 붙들렸다. 사실 어린애 손목을 꺾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리 샤오가 붙든 손을 꺾어 깍지를 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상대의 손을 붙잡아주는 그런 다정한 행동은 아니었다.
퍽, 퍽, 깍지 낀 손을 손잡이 삼아 몸을 고정시킨 리 샤오가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쑤껑쑤껑, 긴 성기가 미끄러져 들어갔다. 반동으로 튕겨나가는 몸을 잡아당겨 더 깊이 밀어 넣었다.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오히려 욕탕에 있을 때보다 더 머리가 젖어 있었다. 사실 젖은 것은 머리뿐만은 아니었지만. 흠뻑 젖은 온몸이 번들거렸다. 새하얀 피부가 물기를 머금어 더 먹음직스러웠다. 천천히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은 목선, 매끄러운 가슴, 바짝 서서 도드라진 젖꼭지, 그리고 그 아래 확연히 불러 있는 동그란 배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이지.
리 샤오가 누구에게 던지는 질문인지 모를 질문을 되뇌었다. 배 속에 있는 녀석이 제 새끼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전혀 기분이 상하질 않았다. 심지어 처음 욕탕에서 화수가 제 부른 배를 보고 식었을까 걱정했다는 말을 듣기 전엔 자각하지도 못했다. 그저, 녀석을 안고 싶어 그런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기가 막히게도. 녀석을 안을 생각에만 몰두해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도.
동그랗게 뭉쳐진 배를 보고 있는데도 식기는커녕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미친 걸까.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하는지 리 샤오는 알지 못했다. 눈매가 기름해졌다.
주륵. 땀에 쩐 가는 손가락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는 손가락을 꽉 붙잡았지만 이미 새하얀 손가락은 다물린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리 샤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느긋하던 표정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슴에 대고 있던 두 다리를 붙잡아 옆으로 눕혔다.
“익-”
박혀 있던 기둥이 비틀리며 방향을 바꿨다. 한 손으로는 옆으로 누운 자세가 된 화수의 어깨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화수의 배를 감싸 쥐었다. 진저리를 치는 화수를 붙들고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조금 전보다 훨씬 거친 삽입이었지만 화수의 몸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다물린 허벅지를 타고 거품이 이는 정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도망치지 마.”
손이 미끄러진 것이 화수의 탓이 아님을 알면서도 리 샤오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잠깐 맛본 허기가 리 샤오를 더 갈증나게 했다.
어쩌면.
“아, 아, 아-”
녀석의 아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녀석만 제 옆에 잡아둘 수 있다면 누구의 아이든 옆에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흔들리는 화수의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몸을 좀 더 제 쪽으로 바싹 당겨 안았다.
아래가 찰박이는 소리, 헐떡이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던 중에 핏, 하고 화수의 것이 이젠 거의 투명에 가까운 액을 뿜어냈다. 양도 이미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는데 쥐어짜낸 탓인지 한두 방울이 다였다. 안이 꽉 조여들었다. 반사적인 반응일 뿐이지만 제게 매달리는 것이 좋았다.
“자, 잠깐-”
화수가 저항했으나 눈도 뜨지 못하고 웅얼거리는 소리라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물론 굳이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리 없는 리 샤오였지만. 그럼에도 리 샤오는 거칠게 달라붙는 내벽을 잡아 뺐다.
“힉.”
속수무책으로 뽑히는 아래에 무릎이 벌벌 떨렸다. 동그랗게 올라붙는 배를 다정하게 감싸 쥐며 허리를 퍽, 하고 쳐올렸다.
“익.”
“흣.”
안이 제 모양에 맞춰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다물어졌다. 리 샤오의 입에서 달큰한 숨이 쏟아졌다. 배를 감싸 쥔 리 샤오의 손 위로 화수의 손이 겹쳐졌다.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리 샤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부디 화수를 많이 닮아야 할 터였다.
* * *
시원해.
반쯤 부유하고 있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래봐야 시원하다는 기본적인 감각을 느끼는 정도에서 그쳤을 뿐, 그 시원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까지는 머리에 미치지 않았다. 겨우 제 머리에 닿는 손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의 몸에 열이 끓고 있다는 것까지.
볼에 귀찮게 달라붙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떼어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류?
익숙한 이름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내젓는다. 류는 제 허락 없이는 제 몸에 손을 대는 이가 아니었다. 그러면, 진 사장인가? 역시나 고개를 내저었다. 진 사장이라면 이리 조심스러운 손길일 리가 없었다. 그럼 대체 누구지. 대체 누가 날 이리 금방이라도 깨질 유리조각상처럼 다루고 있는 것인가. 일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장 그럴 가능성이 낮은 이의 얼굴이. 아랫배가 앓아 내렸다.
사실 당장 눈을 뜨고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었지만 좀처럼 눈이 떠지지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도 된 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꽉 감긴 속눈썹이 연신 파르르 떨렸다. 그런 화수의 눈꺼풀 위로 조금 전보다는 식어버린 손이 덮어왔다.
“……돼.”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눈을 뜨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알아들었다.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늘한 손이 기분 좋았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도 했고. 겨우 붙잡고 있던 정신을 놓았다.
색색, 화수의 입에서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 뒤에도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은 물러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 * *
“다행히.”
맥을 짚었던 새하얀 손을 이불 속으로 넣고 홍 의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무시는 중이시네요.”
낯색이 많이 지쳐 보이긴 해도 지금 화수는 잠을 자고 있었다. 물론 다행한 일이었다. 또다시 동도 트기 전, 꼭두새벽부터 호출을 당해 달려온 입장에서는 다소 맥 빠지는 일이었을 뿐.
“내가 그렇다고 했잖아.”
느긋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의 주인 쪽으로 홍 의원의 고개가 꺾였다. 리 샤오는 내내 빙글거리던 찻잔을 막 입으로 가져가던 참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이번엔 불안해하는 기색도 없는 리 샤오에 홍 의원의 눈매가 찌푸려진다.
“제가 지난번에도 분명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각인은 그리 힘으로 깨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
사실 홍 의원이 생각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지만 리 샤오는 굳이 변명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고.
“그래서 방법을 찾아오겠다 약조했던 것 같은데.”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리 샤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 식어버린 차가 썼지만 리 샤오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리 샤오의 시선이 홍 의원을 향했다. 난감해하고 있던 홍 의원이 무감정한 눈과 마주치자 눈매를 일그러트린다.
“알아냈군.”
그 묘한 표정의 의미를 리 샤오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탁-.
흠칫. 다기상에 빈 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홍 의원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래놓고 보고는 하지 않았단 말이지.”
“그, 그것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변명은커녕 제대로 된 단어도 꺼내놓지 못하는 홍 의원에게 낮게 깔린 명령이 내려졌다.
“말해.”
짧고 간단한 명령이었지만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머뭇거리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방법은 알았습니다만 지금은 쓸모없는 것이라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쓸모 있고 없고를 누가 판단하라고 했지?”
“…….”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 부분을 몰라 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못한 쪽에 가까웠다. 평소의 리 샤오라면 분명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리했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리 샤오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눈앞의 곤鯤에 한한 한 리 샤오는 이성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적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홍 의원.”
평소라면 홍 의원의 입이 알아서 열리기를 기다렸을 리 샤오가 재촉을 하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한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홍 의원은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렸다. 어찌해야 하나. 주름진 눈매가 더 가늘어졌다.
“말씀드리지요.”
사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염려되는 마음과 별개로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얼마 없었으니까.
“새겨진 각인을 깨려면 곤의 육체와 정신을 인위적으로 약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죽지 않을 정도로 미량의 독을 복용시켜 각인을 깼다는 사례는 있습니다만.”
“……있습니다만?”
잠시 머뭇거리는 틈도 용납하지 않고 곧바로 재촉이 이어졌다. 낮은 한숨을 내쉰 홍 의원이 멈췄던 뒷말을 잇는다.
“그 뒤에 곤이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각인은 깨졌다는 거고.”
“…….”
홍 의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길한 예감은 늘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대답이 없었지만 리 샤오도 더 이상 홍 의원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조급해진 쪽은 홍 의원이었다.
“지금 배 속에 애기씨가 있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그저 조용히 빈 찻잔의 가장자리를 궁글리고 있을 뿐이다. 공기가 무거웠다. 함부로 침묵을 깰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찰나,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리 샤오도, 홍 의원도 아닌 화수였다.
으응.
뒤척이는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홍 의원은 이미 뒤돌아선 뒤라 볼 수 없었지만 찻잔 위를 궁글리던 손이 딱 멈췄다. 숨을 죽인 침묵이 흘렀다. 다행히 잠결에 한 번 뒤척인 것에 불과했던지 이후에 들려온 것은 고른 숨소리뿐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물러가도 좋아.”
“리 샤오 님.”
“물러가도 좋다고 했어.”
“…….”
가도 좋다는 허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물러나라는 명령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지금의 리 샤오의 명령을 거부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저를 물리는 리 샤오의 시선이 누운 사내를 살피고 있다는 점 정도.
탁.
홍 의원이 왕진가방을 챙겨 닫았다.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오래된 가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닫히는 소리가 조금 요란했다. 사실 의식하지 않으면 그리 거슬리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소리에 홍 의원이 어깨를 움츠린 이유는 일순 리 샤오의 눈매가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왕진가방을 드는 움직임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적어도 지금은 안 됩니다.”
문을 열고 나서기 직전 결국 홍 의원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설마 임신까지 한 이에게 독 먹이려고 들진 않겠지, 하면서도 그 임신한 사람의 뇌를 깨부수려고 했던 일을 떠올려보면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순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난 리 샤오가 문 앞에서 어물거리고 있는 홍 의원의 등을 밖으로 밀었다.
탁.
어어 하는 사이에 문밖으로 내밀린 홍 의원이 뒤돌아섰을 땐 장지문은 이미 굳게 닫힌 뒤였다. 할 말은 많았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홍 의원이 가방을 고쳐 쥐고 뒤돌아섰다.
“되었다. 입구까지는 내가 드마.”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가방을 받아 들려고 황급히 다가왔으나 홍 의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가방을 바꿀 때가 된 모양이라고 중얼거리며.
* * *
“다녀오셨습니까.”
막 현관을 통과해 복도로 들어서던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멈칫. 그 표정에 맞은편에서 오던 화수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겁을 먹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제가 리 샤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자각을 한 탓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얼굴을 보는 순간 얼굴을 찌푸릴 리가 없으니까.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모르겠다는 것과는 별개로.
대체 뭐지. 뭐가 또 이리 기분을 상하게 했나 싶어 열심히 머리를 회전시키고 있는 사이, 그리 멈춰 있는 화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리 샤오가 이내 걸음을 내딛었다. 성큼성큼 거리를 좁히는 리 샤오에 일순 뒷걸음질 치고 싶은 본능을 화수는 가까스로 내리눌렀다. 이제는 어느 정도 경험치가 쌓인 결과였다. 학습효과가 꽝이라는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그렇게 반쯤은 굳어 있는 화수의 코앞으로 리 샤오가 다가섰다.
“이리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다니다간 집사의 잔소리 폭격을 맞게 될 텐데.”
내뻗은 손이 화수가 어깨에 대충 둘러놓은 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화수의 덜 말린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빛바랜 나무 바닥을 짙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물론 화수가 걸어온 복도의 나무 바닥도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빼앗겼던 수건이 도로 화수의 머리를 뒤덮었기 때문이다. 슥슥, 거칠지만 아프지는 않을 강도로 머리를 문지른다. 아마 리 샤오에게는 최대한 힘을 뺀 움직임일 텐데도 머리가 얼얼했다. 하지만 멍한 머리로도 알 수 있었다. 리 샤오가 미간을 찌푸렸던 이유를.
“제가 언제 잔소리를 했다고 그러십니까.”
리 샤오의 뒤에 서 있던 집사가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리다 이내 어깨를 으쓱인다. 동시에 손가락을 까딱여 시종에게 바닥을 닦으라는 신호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래된 집은 관리를 잘해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나마 잔소리를 하니 이리 유지가 되는 것이지, 그냥 두었으면 흉가가 다 되었을 겁니다. 억울해한 것이 무색하게도 잔소리 폭격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이 집에서 한 사람뿐이었다.
“대체 뭐가 급해서 이리 머리도 말리지 않고 나온 거지?”
집사의 잔소리는 피했지만 이번엔 리 샤오의 질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집사 쪽이 더 나았다. 물론 이미 늦은 일이지만.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화수의 턱을 리 샤오가 붙들었다. 힘을 주어 올려 시선을 맞추게 한 뒤 다시금 대답을 재촉했다.
“응?”
“…….”
다정한 말투였지만 마주한 눈빛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물론 화수의 입이 다물린 채 열리지 않은 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리 샤오 님께서 돌아오셨다고 해서 급히 나오시느라 그런 겁니다.”
제 입으로 이런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보다 못한 시종이 슬쩍 끼어들어 대답해주지 않았다면 절대 리 샤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제게로 닿는 시선을 모를 리 없었다. 빌어먹을. 어금니를 꽉 깨물자 턱 선이 예리해졌다.
“원래 머리는 잘 안 말리고 나옵니다.”
이건 정말이었다. 애초에 그리 꼼꼼한 성격도 아니고 그 탓에 매번 한조 영감에게 폭풍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크게 신경 쓴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왜 이리 변명처럼 들리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졸지에 리 샤오가 돌아왔다고 버선발로 튀어나온 사람이 돼버렸다. 뭐, 아주 약간은 평소보다 속도가 빨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머릿속으로 늘어놓고 있는 화수의 손에서 리 샤오가 수건을 도로 가져갔다. 그사이 제가 마구 문질러 흐트러트린 머리칼이 엉망이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이제 떨어지는 물방울은 없다는 것 정도.
“새 수건이 필요하겠는데.”
고저 없는 나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후다닥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젖은 수건을 가져가고 새 수건을 건네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뽀송뽀송한 수건이 다시금 머리에 씌어졌다.
“다음부터는 그럴 필요 없어.”
“…….”
“꼭 문 앞까지 나와 있지 않아도 단팥죽은 어디 안 가니까.”
까딱, 고갯짓을 하는 리 샤오를 따라간 시야에 집사의 손에 들린 찬합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 그제야 긴장해 있던 화수의 어깨가 조금 주저앉았다. 사실 긴장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맥이 탁 풀리는 기분에 화수가 머리 위로 덮어진 수건으로 볼을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다행이네요.”
진심이었다. 괜한 오해를 받지 않고, 맛있는 단팥죽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럼에도 어째서 이리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 먹었으면 이리 와.”
절반쯤 먹은 단팥죽 그릇을 수저로 휘적거리고 있는 화수를 향해 리 샤오가 일렀다. 기껏 사다 줬는데 겨우 이만큼만 먹고 내려놓는 것이 마음에 걸려 밍그적거리고 있던 참인데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왜, 그러십니까.”
그래도 냉큼 수저를 내려놓고 가기는 그래서 슬그머니 상만 옆으로 치웠다. 물론 상체는 이미 반쯤 리 샤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잘그락.
화수의 질문에도 리 샤오는 서랍장을 열어 뭔가를 꺼내느라 대꾸가 없었다. 대체 뭘 하는 건가 궁금해진 화수가 무릎으로 슬금슬금 걸었다. 하지만 워낙 커다란 등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 찾으시는-, 윽.”
어느새 바싹 뒤로 다가선 화수가 다시 되묻는 그 순간 하필 리 샤오도 뒤적이던 움직임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기척을 느끼긴 했지만 이리 바짝 붙어 있을 줄 몰랐던 탓에 화수의 몸과 부딪혔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뛰어난 반사신경 덕분에 튕겨져 나가는 화수를 붙잡을 수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괜찮아?!”
리 샤오가 황급히 되물었지만 오히려 돌아온 것은 태평하기 짝이 없는 대꾸였다.
“뭐 찾으신 거냐고요.”
제 몸에 부딪혀 튕겨나갈 뻔한 것보다 궁금한 것이 더 먼저인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또 아프지 않은 건 아닌지 부딪힌 어깨를 연신 문지르고는 있었다. 또 멍이 들겠군. 조금만 깨물어도 금세 피멍이 드는 약해빠진 몸을 알고 있는 터라 리 샤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런 리 샤오의 표정을 화수는 오해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뭐가.”
“멋대로 뒤에 바짝 붙어 서 있어서 화나신 것 아닙니까.”
“…….”
하지만 화수의 사과를 들은 리 샤오의 표정은 더 험악해졌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화수가 제 뒤에 바짝 서 있었다는 걸 전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경계를 풀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 집 제 방이라고 해도, 상대가 한쪽 손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약해빠진 녀석이라고는 해도 타인과 있는데 이리도 경계를 하지 않았다니. 기가 막혔다.
“리 샤오 님이, 오라고 하셔서…….”
그런 리 샤오의 눈치를 보던 화수가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는다. 차라리 화를 내면 맞받아치기라도 하겠는데 이리 험악한 기색만 뿜어내고 있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좋던 분위기가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물론 이전의 분위기가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분위기에 비하면 아주아주 좋았다는 건 확실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잇몸 안쪽만 잘근잘근 씹고 있을 때였다.
“오라고 했지, 이리 바짝 서 있으라고 한 적은 없는데.”
나직한 음성에 그제야 겨우 숨통이 트였다. 눈치채지 못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화수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사과드렸잖습니까.”
“알아.”
“사과로는 안 된다는 겁니까?”
“……누가 그렇대?”
“그럼.”
“…….”
“이 손 좀 놔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제야 리 샤오도 자신이 조금 전 튕겨져 나간 화수의 팔을 여전히 붙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움켜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제 좀 놔주시죠? 마주한 눈이 다시 한 번 요청하고 있었다. 리 샤오가 손에서 힘을 뺐다. 당연히 이제는 풀려날 거라고 생각한 화수가 팔을 뺐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여전히 제 팔을 붙들고 있는 리 샤오의 손이 아니었다면.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조금 전에 비하면 많이 느슨해졌지만 리 샤오는 화수의 팔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꽉 붙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조금 전에 비하면 험악하던 기운이 다소 누그러들었다는 거였다.
“그건 안 되겠는데.”
느긋한 중얼거림에 화수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조금 전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뭐 하자는 겁니까. 황당해하는 눈빛에 리 샤오가 태연히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뭔가를 들어 보였다. 화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그걸로 제 손톱을 다 갈아버릴 생각이신 겁니까?”
피식. 화수의 중얼거림에 리 샤오가 재밌다는 듯 낮은 웃음을 흘렸다. 별 웃기는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하지만 솔직히 화수는 반쯤은 진심으로 물은 것이었다. 어쩐지 그것 말고는 다른 용도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줄톱.
그도 그럴 것이 리 샤오의 손에 들린 것은 손톱을 가는 데 쓰는 작은 줄톱이었다. 게다가 정작 그런 화수의 물음에 돌아온 리샤오의 대답은 무려 긍정이었다.
“그럴 생각인데.”
“…….”
농담이라기엔 너무나 진지한 얼굴이라 설마 농담이시죠, 라고 되묻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맨손으로도 타인의 뇌를 녹여버릴 수 있는 사람에게 붙들려 있을 때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 정도는 화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조금 전 묘하게 날이 서 있던 기색이 사라졌다는 점 정도랄까. 그마저도 언제 바뀔지 모르니 완전히 안심하긴 일렀다.
“무슨 문제라도?”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일견 태평하게 들리기까지 한 리 샤오의 질문에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러자 기가 막히다는 화수의 질문에 오히려 리 샤오는 들고 있던 작은 줄톱을 들어 보이면서 되묻는다.
“그럼 내가 이걸 뭐 하러 꺼냈다고 생각하는데?”
“그거야, 당연히…….”
그걸 몰라서 묻느냐고, 대답을 쏟아내려던 화수가 멈칫했다. 이것을 찾으려고 서랍을 뒤적인 시점이 언제였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분위기가 나빠지기 전부터 리 샤오의 손에는 이것이 들려 있었다. 애초에 모든 일은 줄톱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연히?”
말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리 샤오가 뒷말을 재촉했다. 물론 화수가 모든 상황을 파악했음을 알아차린 것이 분명한 느긋한 표정으로. 그냥 넘어가줄 생각은 없다는 말이었다. 결국 어깨를 주저앉힌 화수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손톱을 깎으려고 꺼내셨겠네요.”
“…….”
제 입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보니 더 민망했다. 돌아오는 대답마저 없으니 더더욱.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화수가 손을 뒤로 물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조금 전 놓아줄 생각이 없다던 말이 농이 아니라는 듯 리 샤오가 도망치는 화수의 손을 붙들었다.
“알았으면.”
발톱을 숨기고 있는 냥이처럼 손가락을 말고 있는 손등을 콱 누르며 리 샤오가 명령했다.
“이제 그만 내놔, 손가락.”
마치 내놓으라는 명령에 따르듯 웅크리고 있던 손가락이 펴졌다. 물론 자의는 아니었다.
슥, 스윽, 슥슥.
손가락 끝에서 줄톱이 연신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손을 내주긴 했지만-물론 자의는 아니었으나-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하고 있던 화수도 점점 느슨해졌고, 자신도 모르는 새 이런 감상까지 내어놓고 말았다.
“제법, 이시네요.”
그도 그럴 것이 커다란 사내의 손놀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놀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감상이 어떻게 들으면 비꼬듯이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고맙군.”
다행히 이번엔 리 샤오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화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리 샤오를 확인하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입은 조심해서 놀리도록 하자, 조용히 반성하면서 점점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제 손톱을 감상했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손톱이 꽤 길어 있었다. 그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류가 손톱 손질을 해주었기 때문에 전혀 몰랐다. 화수는 사실 손으로 하는 일은 젬병이었다. 제가 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한 이유도 그런 연유였다. 물론 화수가 그러겠다고 한다고 리 샤오가 넘겨줬을지는 차치하고.
그사이 손질은 네 번째 손가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깔끔해진 중지와 약지의 차이가 확연했다. 이리 길 때까지 어찌 몰랐지. 무심한 성격이긴 해도 지저분한 편은 아니었는데 어지간히 정신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사각거리며 움직이는 줄톱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화수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작은 속삭임과 같은 탄성이었지만 움직이던 손이 조금 느려졌다. 그리고 천천히 리 샤오의 시선이 위로 들렸다.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진 것을 본 리 샤오가 살짝 표정을 굳힌다.
“아팠나?”
“아니요, 아닙니다.”
아마도 일그러진 눈매를 오해한 모양이었다. 확인하듯 묻는 리 샤오에 화수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굳은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동시에 의문이 뒤따른다.
“그럼 뭐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묻는 표정이 험악했다. 화수가 이번엔 머뭇거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혹, 그거.”
그리 말하는 화수의 시선은 리 샤오의 팔뚝을 향해 있었다. 리 샤오의 시선도 화수를 따라 움직였다. 소매가 넓은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리 샤오는 팔뚝이 반쯤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붉은 자국들. 큰 상처는 아니지만 의문이긴 했었다. 오히려 큰 상처였다면 덜 신경 쓰였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마치 새끼 고양이에게 잔뜩 긁힌 듯한 상처였다. 리 샤오와 새끼 고양이라니. 상상 속에서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더 거슬렸더랬다.
그런데, 지금 보니 새끼 고양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양이나 자신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건 비슷했지만.
“제가 한 것입니까.”
“…….”
질문에 대답은 없었지만 제 시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확인한 리 샤오의 눈매가 슬쩍 찌푸려졌다. 물론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태연한 얼굴로 돌아갔으나 화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신경 쓸 것 없어.”
“…….”
그제야 리 샤오가 갑자기 줄톱을 꺼내 든 연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리 샤오는 멈췄던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리 샤오를 복잡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화수가 다시 물었다.
“약은 바르셨습니까.”
피식.
웃음에 인색한 사내가 오늘따라 웃음에 너그럽다. 물론 반쯤은 비웃음이 섞이긴 했어도 웃은 건 웃은 거니까.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나아.”
“발라드릴까요.”
“…….”
“농담입니다.”
솔직히 반쯤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웃을 때조차 멈추지 않았던 손이 멈춘 것을 보고 곧바로 내뱉은 말을 수습했다. 다행히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각, 사각.
멈췄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해서 놀리는 것은 불가능한 듯하니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낫겠다고 다짐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아쉽군.”
그 틈으로 불쑥 들려온 고저 없이 나직한 목소리. 순간 제가 환청이라도 들은 것인가 싶어 멍하니 리 샤오를 보고 있으려니 내리깔렸던 속눈썹이 위로 들렸다.
“왜.”
태연한 눈으로 묻는 리 샤오에 화수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며.
“아닙니다. 제가 헛것을 들은 모양입니다.”
“내가 헛소리를 했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건가?”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혹 리 샤오 님이.”
“아쉽다고 한 걸 묻는 거라면 맞아.”
“진심이십니까?”
“난 누구처럼 농 같은 건 하지 않아서.”
“…….”
저도 진심이었습니다만?! 뒤늦게 억울해진 화수지만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변명하는 대신 화수는 다른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더럽지 않습니까?”
“하겠다고 한 쪽은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아뇨, 제가 더럽다는 게 아니라.”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리 샤오에 대해 몇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이라면 리 샤오는 아주 깔끔한 성격의 사내라는 거였다. 좋게 말해 깔끔이지만, 사실 결벽에 가까웠다.
“아니라?”
그런데 뒷말을 재촉하듯 되묻는 리 샤오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리 샤오 님이.”
“내가 뭐?”
“…….”
오히려 거부하는 쪽은 화수이고, 그것이 기분 상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억울한 기분이 드는 화수였지만 더 이상 변명하는 것은 관두기로 했다. 제 입술은 말을 하는 것보다는 다른 쪽으로 사용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할짝.
곧장 상체를 기울인 화수가 리 샤오의 팔에 난 자국을 핥았다. 거칠거칠한 딱지가 혀끝으로 느껴졌다. 혀끝을 세워 살살 딱지 모양대로 긁어 올리자 팔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아프십니까.”
“…….”
슬쩍 입술을 떼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관두라는 말도 없었으니까. 멋대로 결론을 낸 화수가 혀를 할짝였다.
많이도 내놨네. 눈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혀로 더듬으니 붉은 딱지는 앉지 않았지만 얇게 껍질만 일어난 부분도 많았다. 할짝이는 혀를 따라 근육이 긴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고작 위협도 되지 못하는 살덩이일 뿐인데 그것이 닿을 때마다 핏줄이 도드라지고 살갗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묘하게 기분 좋았다. 리 샤오가 관계를 할 때 제 몸을 물고 빠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은 화수였다.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거긴 상처가 없는 곳인데.”
나직이 내뱉는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 샤오는 화수를 저지하거나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화수가 입술로 거침없이 손목을 지나 손등 위로 도드라진 핏줄을 더듬었다. 혀로 핏줄을 누르자 팔딱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태연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맥은 조금 전보다 빨라져 있었다.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튀어나온 뼈를 따라 내려오자 자신의 것과는 다르게 잘 손질된 손톱이 느껴졌다. 윗입술로 손톱 끝을 문지르던 화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굵은 손가락인 중지를 삼켰다.
쭉쭉 빨았다가, 혀끝으로 손가락 아래쪽을 핥아 올린다. 무표정하던 리 샤오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확인한 화수가 손가락을 문 채 말했다.
“다른 곳을 빨아드릴 수도 있는데요.”
“그쪽이야말로 더더욱 상관없는 곳 아니던가.”
이번에도 거절의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 밑의 점이 도드라졌다.
“그거야 확인해보면 알겠지요.”
나른하게 웃으며 화수가 손을 내뻗었다. 리 샤오도 앞섶을 노리는 손을 저지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눈만 마주쳐도 화르륵 불길이 이는 신혼부부처럼 순식간에 몸이 달았다. 리 샤오의 것을 붙잡기도 전에 벌써부터 아래가 벌렁거렸다. 하지만 막 화수의 손이 리 샤오의 것을 붙잡기 직전.
“흠흠.”
장지문을 넘어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화수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으려니 이번에는 좀 더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 샤오 님.”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리 샤오였다.
“뭐지?”
“화수 님 약을 가져왔습니다.”
“나중에.”
“식사 후에 바로 드셔야 합니다.”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집사의 반응에 그제야 리 샤오도 눈치를 챘다. 조금 전 상황에 집사가 끼어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였음을.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집사가 다시금 되물었다. 물론 눈매를 일그러뜨리고 있는 리 샤오는 장지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들어, 오세요.”
리 샤오는 입을 꾹 다문 채 문만 노려보고 있는 상태라 눈치를 보던 화수가 대신 대꾸했다. 그러자 그 대답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익숙한 한약 냄새가 훅 끼쳤다. 이번엔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유일하게 밝은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서던 집사도 조금 멈칫했다.
“손톱을 깎아주고 계셨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보았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집사에게 리 샤오의 핀잔이 돌아왔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
“이건 정말 몰랐습니다만.”
집사가 문 앞에 선 것은 그리 얼마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조용히 물러났겠지만 아직 화수의 몸이 덜 회복된 상태였다. 겉보기엔 멀쩡해도 속은 다 곯아 있으니 되도록 무리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홍 의원의 조언이 있기도 했고 뭣보다 오늘은 불러들일 홍 의원이 먼 곳에 있는 환자를 보러 의원을 비운 상태라 더더욱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눈치 없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깬 이유가 다 있었다. 물론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리 샤오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뎌야 했지만 노인에게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집사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챙겼어야 했는데.”
사실 리 샤오는 워낙 시중을 드는 이가 직접 몸에 손을 대는 자체를 싫어하는 편인 데다 본인이 알아서 잘 관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수의 몸을 관리하는 일까지 잊고 있었던 것. 아무리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앞으로는 결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물론 리 샤오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
“예? 그것이 무슨.”
“앞으로도 내가 한다는 얘기야.”
사실 집사가 되물은 것은 리 샤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련님.”
“무슨 더 할 말이라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손톱은 그렇다 치더라도 발톱도 깎아야 하는데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 거지?”
“…….”
손은 그렇다 치고-물론 그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더러운 것은 질색하는 리 샤오가 남의 발톱을 깎는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무슨 문제냐는 반응이었다. 사실 그것이 가장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럼, 문제없지요.”
집사가 한발 뒤로 물러섰다. 이상하긴 해도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쪽에 있었다.
“발은, 됐습니다.”
“…….”
못마땅해하던 리 샤오의 시선이 이번엔 화수에게로 향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험악해져 있는 시선에 화수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하필 그 시선이 돌아간 곳에 집사가 있었다.
“직접 하시긴 힘드실 텐데요.”
“…….”
“배가 점점 나오실 것 아닙니까.”
할 줄 모르지 않냐는 핀잔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방향의 이야기였다. 그제야 화수도 다시 한 번 자신이 임산부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점점 몸이 변해가고, 변해갈 예정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일단 약부터 드세요.”
화수의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납득했음을 알아차린 집사가 냉큼 약사발을 내밀었다. 복잡하던 표정이 확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점점 더 약이 써지는 거 같은데요.”
“원래 좋은 약은 쓴 법입니다.”
머리가 띵해질 만큼 쓰디쓴 약을 들이켠 화수가 불만을 토로했으나 집사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러고는 약사발을 다시 화수에게 내밀었다. 바닥에 남은 약을 확인한 뒤였다.
“다 드셔야 합니다.”
“겨우 한입이잖아요.”
“겨우 한입이니 드시면 되겠네요.”
“…….”
화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집사를 당해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릇을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잘하셨습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마지막 남은 약을 입안으로 탈탈 털어 넣고 그릇까지 뒤집어 보이자 집사가 태연히 눈매를 접었다. 그러고는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그릇을 가져간다. 뭔가 싸우겠다는 기세로 대응하던 화수로서는 맥이 탁 풀리는 반응이었다. 게다가 사실 집사가 이리 기를 쓰고 약을 먹이려고 하는 것도 저에게 좋은 일이지 집사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리 생각하니 조금은 미안해졌다. 물론 다음번 약을 먹을 땐 지금의 기억을 모두 잊겠지만.
“다치셨습니까?”
이번엔 리 샤오인 모양이었다. 가늘어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었다.
“별것 아니야.”
제 팔뚝을 보고 있는 시선에 리 샤오가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집사는 이미 별것이라고 마음을 굳힌 뒤였다.
“연고를 가져오지요.”
“약이라면 이미 발랐어.”
그런 집사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리 샤오의 대답이었다.
“……정말이십니까?”
사실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리 샤오가 거짓말을 할 성격은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못 믿겠으면 발라준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묻는 집사에 리 샤오가 화수에게로 대답을 넘겼다.
“그러셨습니까?”
“예, 뭐, 예.”
무슨 짓이냐고, 눈으로 항의하던 화수도 집사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완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누구에게 하는 변명인지 모를 변명을 하며.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긴 했지만 다행히 더 이상은 집사도 캐묻지는 않았다.
“잘하셨습니다.”
집사에게는 저나 리 샤오나 칭찬하고 돌보는 존재라는 게 조금은 신기했다.
“그럼.”
단팥죽이 든 상까지 챙겨 든 집사가 장지문을 열었다.
“오늘은 손톱, 발톱만 깎으십시오. 다른 건 안 됩니다.”
물론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직후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불쑥 발목을 붙잡으려는 손길을 피해 화수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뭐 하긴.”
펄쩍 뛰면서 항의하는 화수의 반응에도 리 샤오는 태연했다.
“손톱, 발톱만 깎으라잖아.”
“…….”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 말이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닐 텐데요. 하지만 화수가 지적한 건 조금 다른 부분이었다.
“언제부터 그리 집사 말을 잘 들으셨다고요?”
“이제부터 그래볼까 싶어서.”
“…….”
이번에는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눈매만 찌푸리는 사이 리 샤오의 손이 다시 한 번 화수의 발목을 낚아챘다. 물론 이번에도 화수가 더 빨랐다. 재빨리 뒷걸음질로 거리를 넓힌 그가 따져 물었다.
“그리 말을 잘 들으실 생각이면, 손톱이 먼저 아닙니까?”
바로 앞에서 놓친 것이 아쉽다는 듯 빈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가 놓던 리 샤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했는데요?”
“굳이, 발은 싫다고 하기에.”
“…….”
역시나 성격이 나빴다.
“싫다고 한 적 없습니다.”
찌푸려지는 눈매를 확인한 화수가 황급히 덧붙였다.
“되었다고 했지요.”
물론 눈매는 여전히 찌푸려진 채였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말입니다만.”
“뭐, 좋아.”
기가 막혀하는 시선을 향해 화수가 뻔뻔스럽게 받아치자 리 샤오도 한발 뒤로 물러섰다.
“굳이 발은 되었다고 버티는 이유가 조금 궁금해져서.”
물론 리 샤오 자신의 방식으로 한발 뒤로 물러선 것에 불과했지만.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화수가 우물거렸다.
“그래? 그럼 이제 도망칠 이유도 없겠군.”
말과 동시에 리 샤오가 손을 내뻗었다. 이번에도 화수가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이번엔 리 샤오가 좀 더 빨랐다. 불쑥 들어온 손이 침의 아래 숨어 있던 발목을 붙들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 잠깐-”
당황한 화수가 발에 힘을 주어 버텼다. 하지만 안간힘을 주고 버틴 것이 무색하게도 손쉽게 미끄러졌다. 정작 리 샤오는 크게 힘을 준 것 같지도 않다는 않아 더 자존심이 상했다. 순순히 끌려 나가던 발이 발버둥을 쳤다. 일순 방심하고 있던 리 샤오의 손을 뿌리치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발을 빼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힘조절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붙잡혀 있던 손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당기는 힘에 화수의 몸은 그대로 뒤로 튕겨나갔다.
“힉.”
딱딱한 바닥에 등이 부딪힐 것을 예상하고 급히 몸을 둥글게 말았다. 하지만 생각했던 통증은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몸이 공중에 떠 있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기에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이런 데도 연유가 없다?”
기가 막히다는 눈동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멈춘 듯 공중에 떠 있을 수 있었던 건 바로 리 샤오가 제 옷자락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반응 속도였다.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 리 샤오가 붙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았기 때문이다. 화수의 눈이 커졌지만 이미 몸은 뒤로 쑥 꺼지고 있었다. 이번엔 눈을 감을 새도 없었다. 너무 놀라서라기보다는, 바닥과 떨어져 있던 거리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풀썩.
눈을 감기도 전에 몸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게다가 그마저도 푹신하게 제 몸을 감싸는 이불 덕분에 둔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리 샤오를 피해 뒷걸음질 치는 사이 어느새 이불까지 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대체 왜?
저는 뒤를 돌아보지 못해 보지 못했다지만 정면에서 다 보고 있던 리 샤오는 어째서 혼비백산한 사람처럼 저를 붙잡은 것인가. 그래놓고 또 던져버릴-물론 던질 수도 없는 높이였지만- 건 뭐람. 늘 속을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이유는 몰라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리 샤오가 뒤로 조금 물러섰다.
“질색할 만큼 싫다는 건 알겠군.”
이상했다. 그냥 제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을 뿐인데, 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균형을 잃은 몸이 뒤로 넘어가는 순간보다도 더 겁이 났다.
“나중에 집사에게 해달라고 해.”
탁. 리 샤오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던 줄톱을 집어 탁자 위에 놓았다. 기분이 상했을까. 하지만 보이는 것은 리 샤오의 뒷모습뿐이었다. 그대로 나가버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였을까. 뒤돌아선 리 샤오의 등을 향해 화수의 달싹이던 입술이 불쑥 열렸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
리 샤오가 뒤돌아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등을 돌리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난감해하는 화수의 기색을 읽었는지 리 샤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변명할 필요 없어. 기분 상한 거 아니니까.”
하지만 화수의 난감한 기색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물론 리 샤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기분 상하지-”
“발이. 못생겼습니다.”
“…….”
불쑥, 내뱉어진 화수의 말에 리 샤오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앞뒤 다 잘라먹은 말이었지만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보여주기 싫었던 겁니다.”
“…….”
“더 설명이 필요합니까?”
화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설명이 더 필요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기가 막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을 휘젓고 다니던 기분 나쁜 무언가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 고작 이게 뭐라고. 녀석의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아무래도 좋아졌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눈에 거슬리는 것들은 모두 쓸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휙휙, 널뛰듯 기분이 돌변하는 것은 자신과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싫은 게 아니라.”
제가 이 사내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걸.
“부끄러워한다고 해야 맞는 것 같은데.”
“…….”
화수의 눈매가 찌푸려진다.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사람 속을 바짝바짝 말리더니, 굳이 그걸 또 콕 집어 정정하고 있다.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때보다는 나았다. 아니, 솔직히 숨통이 트였다. 제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게 뭐라고. 사실 화수는 한 번도 자신의 발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진 사장이 답지 않게 못생긴 발이라고 놀려댔을 때도 다른 데가 다 예쁘니 한 군데 정도는 못난 구석이 있어야 한다고 오히려 받아쳤던 화수였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이 사람에게는 그게 안 되는 걸까. 어째서 이 사람에게는 흉한 발이 부끄러워졌을까. 끝도 없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게 좋으면, 그리 생각하시든지요.”
새하얀 낯색과는 달리 귓불이 벌겠다. 낯색을 숨기는 데는 능숙해도 그것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지.”
그게 이리도 기분 좋을 일인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입가가 느슨해지는 것을 어쩌진 못했다.
발이 못생겼다니. 그걸 또 요령도 없이 불퉁하게 내뱉던 그 표정을 떠올리자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재밌으십니까?”
화수의 눈에는 그 느슨해진 입꼬리가 저를 비웃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글쎄. 그리 재밌진 않지만, 궁금하긴 하네.”
“…….”
뭐가 궁금하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리 샤오는 화수의 발목을 붙든 뒤였다.
“대체 얼마나 못생겼기에 보여주기도 부끄럽다는 건지.”
“…….”
움츠러든 발목을 그러쥐고 들어 올렸다. 이번엔 화수도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발을 내주었다. 대신 자신의 고개를 외로 꼬았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지 않으면 적에게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여기고 머리만 집어넣는 어리석은 꿩처럼. 하지만 그걸 보는 게 또 썩 나쁘진 않았다.
“아직도 더 볼 것이 남으셨습니까.”
애초에 꼼꼼히 들여다볼 만한 것도 아니고, 이미 확인을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발을 놔주지 않는 리 샤오에 결국 화수가 불만을 토로했다.
“구경 다 했으면 그만 놔주시지요. 이리 있다가 또 집사어른에게 한 소리 듣는 건 사양입니다.”
“이리.”
하지만 리 샤오는 그런 화수의 항의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무심히 감상을 내뱉었다.
“조그만 발로 잘도 걸어 다녔군.”
“…….”
전혀 예상치 못한 감상에 화수의 눈매가 찌푸려진다. 내내 긴장해 있던 것이 무색해지는 평가가 아닐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화수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제가 작은 게 아니라 리 샤오 님이 큰 겁니다만?”
“내 손바닥만 하잖아.”
“손도 크시지 않습니까.”
“네가 작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저도 평균은 됩니다만?!”
마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디 가서 빠지는 체격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던 화수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소리였다.
“차라리 못생겼다는 말을 하십시오. 괜한 것까지 시비 걸지 마시구요.”
차라리 못생겼다는 말을 듣는 편이 덜 억울할 것 같았다. 그건 사실이기라도 하니까. 따져 묻는 화수에 일순 리 샤오가 눈매를 좁혔다. 기분이 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황한 표정에 가까웠다. 마치 그 말을 듣고서야 처음 제 발을 들여다보려던 이유를 떠올린 것처럼.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니, 당연히 자신의 착각이겠지만.
“딱히 못생긴 건 모르겠는데.”
“……위로는 됐습니다.”
뒤늦게 수습을 하려는 모양이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조금 전 들었던 작다는 말이 더 효과적이었다. 적어도 그 말을 들으면 차라리 못생겼다는 말을 듣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화수의 생각과는 달리 리 샤오는 전혀 위로를 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발은 다 이렇게 생기지 않았나?”
그저 조금 전처럼 솔직한 감상을 내놓은 것뿐이다. 물론 그것이 화수의 기분을 더 상하게 만들어 문제였지만.
“보세요. 제 엄지발톱. 우그러져서 흉하잖습니까. 네 발가락도 짧고 굵고-”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조목조목 짚어가며 제 발의 못남을 자랑하던 화수가 이내 눈매를 찌푸린다. 뒤늦게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유독 리 샤오 앞에서는 멍청한 짓을 많이 하게 된다.
“그렇군.”
발목을 쥐고 있던 손이 천천히 발가락 쪽으로 움직였다. 화수의 말을 듣고서야 리 샤오는 화수의 엄지발톱이 묘하게 우그러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걸 왜 못 봤지. 스스로도 뭔가에 쓰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믿기지가 않아 손가락으로 발톱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화수가 그만두라는 듯 발가락을 오므렸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여전히 발톱을 더듬는다. 살갗에 느껴지는 오돌토돌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우그러들었을 뿐이잖아.”
이건 진심이었다. 그냥 발톱이 우그러들었을 뿐, 전혀 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화수는 보여주기 싫다고 했지만 이미 그의 발은 몇 번이고 보았다. 화수는 반쯤 정신이 나가 기억을 못 할지는 몰라도 심지어 그 흉하다는 발을 입안에 넣고 빨기도 했다. 그러니 새삼 흉하다는 생각이 들 리가 없었다.
“그게-”
그게 흉하다는 겁니다만. 받아치려던 화수가 이내 말을 멈췄다. 아무리 봐도 그리 말하는 리 샤오에게서 저를 놀리거나, 위로를 하려는 기색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사실을 되뇌는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머뭇거리던 화수가 입술을 열었다.
“보기에 흉하지 않습니까?”
“글쎄. 난 처음부터 이 모양만 봐서.”
그리고 그 말이 이리도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것임을 화수도 처음 알았다. 그 어떤 입에 발린 말보다도 마음을 뒤흔들었다. 스르륵. 웅크려들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십니까.”
“조금 전에 그렇다고-”
“이제부터 집사어른 말을 잘 들어보시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
리 샤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제야 화수가 묻는 그 생각이 제가 한 생각과 다소 다른 것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리 샤오에 화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생각에 변함이 없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내뱉는 입과는 달리 화수의 또 다른 발이 리 샤오의 사타구니를 지그시 눌러왔다. 발바닥으로 두툼한 살덩이를 비비자 천 너머로도 모양이 확연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는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이런 뜻인지는 몰랐는데.”
하지만 나직이 내뱉는 목소리가 조금 전과 달리 확연히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화수가 리 샤오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가 가만히 끌려왔다. 작은 승리가 짜릿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달큰한 내음이 훅, 끼쳤다. 더 이상 힘을 주어 당기지 않아도 커다란 몸이 제게 바싹 붙었다. 뜨거운 입술이 제 입술을 눌러왔다. 화수가 눈을 감았다. 방 안 가득 달큰한 내음이 차오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