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12/21)

11.

“일어나셨습니까.”

문 밖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화수가 번쩍 눈을 떴다. 멍한 머리로 이곳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걸 자각했을 때쯤 문이 열리고 집사가 들어섰다. 낯설면서도 낯익은 얼굴을 보는 순간 현실로 확 끌어 올려졌다.

“좀 더 자게 두고 싶었습니다만, 더는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몸을 일으키던 화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의원이라면 필요 없는데요.”

매번 관계를 할 때마다 의원이 필요할 만큼 약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지난밤은 그래도 집사를 의식해 많이 자제하기도 했고.

“의원이 아닙니다만. 혹 몸이 불편한 데라도-”

“아뇨. 아닙니다.”

하지만 예상외로 기다리고 있다는 이는 의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자신의 말에 의원을 부를 기세로 몸을 일으키는 집사를 화수가 황급히 말렸다.

“나른한 것 말고는 몸은 전혀 문제없습니다.”

“기력이 없는 것이 제일 문제입니다만.”

“…….”

“일단은 기다리는 이들이 있으니 나가시지요.”

살았다. 밖을 의식한 집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키는 화수를 부축했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하기는 일렀다.

“약은 그 후에 드시도록 하죠.”

태연히 덧붙이는 집사의 말에 화수의 표정이 잔뜩 구겨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신데.”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장 선생이었다. 막 입으로 가져가던 찻잔을 내려놓은 장 선생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자다 일어나 그런 것뿐입니다.”

화수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제게로 향하는 집사의 시선은 애써 외면하며.

“하긴 애기씨를 가지면 늘 피곤하고 잠이 많아지는 법이라더군요.”

등 뒤에 닿는 시선이 더 따가워지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 화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뒤편에 서 있던 집사가 끼어들었다. 겉으로는 장 선생을 생각해서 하는 질문처럼 들리지만 네 말대로 일부러 깨워서 왔으니 빨리 할 일부터 끝내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겨 있는 말이기도 했다. 까칠하게 굴긴 해도 다른 누구보다도 화수가 우선순위에 있는 집사였다.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장 선생이 뒤편에 서 있던 직원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리 시간을 오래 빼앗지 않을 겁니다. 입어보시고 불편한 부분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장 선생의 말에 직원이 들고 있던 옷을 가지고 다가왔다. 얼마 전 가게에서 봤던 직원이 아니었다. 아마 새로 뽑은 직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말이 맞았다. 그저 빨리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 눕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물론 집사에게는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런 기색을 보이는 순간 제 앞에 약사발이 놓일 것이 분명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먹게 된다고 해도 최대한 미루고 싶은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본능이었다.

* * *

“주무시고 계셔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현관을 들어서던 리 샤오가 무언가를 찾듯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물론 그 시선이 찾는 존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집사가 황급히 화수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사실 리 샤오도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늘 있던 것이 없으니 이질적으로 느껴졌고 그게 뭔지 조금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집사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없는 것이 녀석의 얼굴임을 깨달았다. 녀석이 있던 그림보다 없던 그림이 몇 십 배는 더 익숙할 텐데 고작 얼마나 되었다고 없는 것이 이상한 기분이 들다니.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리 샤오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진 것은 조금 다른 이유였다.

“설마 여직 자는 건 아니겠지?”

설마 밥도 안 먹이고 계속 잠만 재운 거냐는 책망이 내포된 질문에 집사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리 샤오가 벗은 겉옷을 받아 들며 변명을 덧붙였다.

“장 선생과 상대하느라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막 내딛으려던 걸음을 멈춘 리 샤오가 고개만 틀었다.

“장 선생?”

“예. 오후에 가봉 때문에 잠시 들렀더군요.”

살짝 날카로워졌던 리 샤오의 시선이 그제야 누그러졌다. 화수가 입을 옷을 주문해놓았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기 때문이다.

“장 선생 말로는 생신날에 입을 옷이라 대충 만들 수도 없다고 투덜거리던데.”

“…….”

“혹, 그 자리에 화수 님도 동석시키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인데.”

아.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표정관리에 능숙한 집사도 순간적으로 눈매가 찌푸려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나마 자글자글한 주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리 샤오의 날카로운 눈을 피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무슨 문제라도?”

느슨하던 눈매가 팽팽히 당겨지는 것을 본 노인이 급히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아이도, 화수도 달가워하지 않던 리 샤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 의아했지만 집사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배 속의 아이에게는 둘 사이가 나쁜 것보다는 좋은 쪽이 덜 위험할 테니까. 게다가 괜스레 리 샤오의 기분을 거슬러 안 그래도 달가워하지 않던 생일잔치를 취소할 빌미가 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저 부끄러울 뿐이지요.”

“뭐가 부끄럽다는 거지?”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리 샤오에 집사가 빠르게 뒷말을 이었다.

“정작 리 샤오 님은 생일날 헌옷을 입게 되셨으니 제가 집사로서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

사납던 리 샤오의 표정이 천천히 누그러진다.

“도련님 것은 원단에서부터 부자재까지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이라 시간에 맞추긴 힘들듯 하다는군요.”

“내가 무슨 옷을 입든 누가 상관한다고.”

“작은도련님 말고는 다 상관합니다.”

“…….”

일부러는 아니라고 해도, 기껏 제 생일에 맞춰 정성껏 준비한 옷을 망가트렸다는 자각은 있었던 터라 리 샤오도 불만을 토로하는 집사를 참아주기로 했다. 물론 그 시간이 그리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건 잔소리를 늘어놓는 집사조차 잘 알고 있었지만.

“제가 주인어른과 마님 얼굴을 어찌 뵈올지-”

“일절만 해.”

말을 자르고 들어온 나직한 음성에 집사가 곧바로 끝없이 이어지려던 잔소리를 멈췄다. 대신 내내 묻고 싶었던 질문을 물었다.

“그러게 대체 생일에 맞춰 지은 옷을 왜 입고 오신 겁니까?”

질책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의문이었을 뿐.

그날 비가 올 줄 몰랐다고 해도, 굳이 생일날 입을 옷을 의상실에서 입고 나올 하등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다른 공식 일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실 옷만 확인하고 바로 집으로 오는 일정이었다. 설마 새 옷을 맞춰 너무 좋아서 입고 오지는 않았을 테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대신 리 샤오의 미간이 확 일그러진다. 마치,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 샤오의 기분을 어그러트린 사실만은 확실했다.

“죄송합니다. 감히 책망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집사는 자신의 질문에 기분이 상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 샤오가 기분이 상한 것은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그날의 일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화수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멋있다고요.”

“너무 멋있어서 놀란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벗지 마세요.”

그랬었지. 고작 멋있다는 녀석의 말 한마디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손바닥 뒤집듯 좋아졌고, 벗지 말라는 말에 그대로 옷도 벗지 않고 나왔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리 샤오는 난감해졌다. 언제 이렇게까지. 리 샤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완전히 휘둘리고 있었군.”

“……예?”

나직한 중얼거림에 주름에 묻혀 있던 눈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형태를 만들었다가 이내 다시 한일자가 되었다. 일견 초조해 보이기까지 한 리 샤오의 기색에 집사가 그를 불렀다.

“리 샤오 님?”

하지만 이번에도 집사의 부름은 리 샤오에게 닿지 않았다. 리 샤오의 험악한 시선은 복도 끝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그 너머에 누가 있는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제가 또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내내 눈치만 살피던 화수가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따지듯 묻는 화수에게 리 샤오의 시선이 향한다.

“무슨 헛소리지?”

하지만 정작 리 샤오는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냐는 반응. 리 샤오가 들어올 때부터 괜스레 눈치만 보고 있던 입장으로서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솔직히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리 샤오를 향해 화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어투였다.

“기분이 안 좋으시잖습니까.”

“…….”

“아닙니까?”

처음엔 분명 확신이 있었다. 허나 묘한 시선으로 저를 빤히 응시하는 리 샤오에 확신이 무너졌다. 리 샤오는 그저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화수를 내려다보던 리 샤오는 고개를 내저었다.

“신경 쓸 것 없어.”

신경 쓸 것 없다고 했지,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 차이를 화수는 놓치지 못했다.

“네 탓은 아니니까.”

눈치를 살피듯 가만히 저를 응시하고 있는 화수에 리 샤오가 나직한 어조로 덧붙였다. 빈말은 아니었다. 이건 화수 탓이라기보다는 리 샤오 자신의 문제였으니까.

그런 리 샤오를 향해 화수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입니까?”

슥.

대답 대신 리 샤오가 주름이 잡힌 화수의 미간을 문지른다. 화수도 그런 리 샤오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왜.”

가만히 문지르는 손가락 끝으로 화수의 긴장이 전해졌다.

“찔리는 거라도 있나?”

미간의 주름이 짙어졌다. 화수의 입술이 벌어진 것은 반 박자 뒤였다.

“그럴 리가-”

“리 샤오 님.”

하필 문 밖에서 기척이 들린 것도 그 순간이었다. 화수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문 쪽을 향했다.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알겠어.”

집사의 알림에 이마에 닿아 있던 리 샤오의 손이 떨어졌다. 그리고 화수가 그것을 자각했을 땐 이미 리 샤오는 뒤돌아서서 문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변명할 틈을 놓쳤다는 걸 깨달은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물론 이미 뒤돌아선 리 샤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문질.

왠지 허전해진 기분에 화수가 제 미간을 문질렀다. 조금 전 리 샤오의 손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느껴지는 기분은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화수는 미간을 문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같이, 가시게요.”

뒤따라 나오는 화수에 막 문을 닫으려고 문고리를 잡았던 집사가 물었다.

“예. 안 되나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는 집사에 눈치를 살피던 화수가 되물었다. 물론 돌아온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물론 안 될 것은 없습니다만.”

당연히 안 될 이유는 없었다. 그저 화수가 식사를 할 때 리 샤오가 옆을 지키는 경우는 있어도 리 샤오가 식사를 할 때 화수가 동석하는 일은 없었던 터라 살짝 의아했을 뿐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사실 두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한 원인은 화수에게 있었다. 겨우 쌀 냄새가 고작인 죽도 비려서 게워낸 화수가 아니던가. 갑자기 비위가 좋아진 것은 아닐 테고. 하지만 조심스럽게 되묻는 집사의 질문에 대답을 한 쪽은 화수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

나직한 목소리에 집사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이미 저만치 가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던 리 샤오가 복도 끄트머리에 서서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리 샤오의 물음은 두 사람을 향해 있었지만 사실 화수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결코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집사를 향한 질문이라고 해야 맞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리 샤오의 눈빛에서 분명한 책망의 기색을 읽은 집사가 황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집사가 사라지자 리 샤오와 화수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곧바로 뒤돌아서버리는 리 샤오에 화수의 걸음도 반사적으로 내딛어졌다.

“괜찮을 거예요.”

집사를 스치며 화수가 조금 전 하지 못했던 대답을 내놓았다.

“아마도.”

물론 스스로도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집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화수를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하필 오늘 리 샤오의 저녁상에 올라온 반찬 중 하나가 생선구이였기 때문이다. 조금 전 그 얘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리 샤오가 끼어드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이건 가져가.”

리 샤오가 생선 그릇을 집어 들었다. 집사의 얼굴에 안타까운 기색이 번진다. 리 샤오가 좋아하는 꽁치구이였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석쇠구이가 잘되었다 싶더니. 맛도 못 보고 버려지게 될 줄이야. 하지만 안타까워하는 집사와는 달리 정작 리 샤오는 전혀 미련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굼뜬 시종의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직접 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정작 그런 리 샤오를 막아선 것은 화수였다.

“맛이라도 보시지요. 엄청 잘 구워진 것 같은데.”

일순 움직임을 멈추고 리 샤오가 태평한 화수의 말에 눈썹을 구겼다. 그런 리 샤오의 반응을 살피던 화수가 확인하듯 물었다.

“혹, 생선, 싫어하십니까?”

“…….”

편식하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눈빛에 리 샤오의 표정이 더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화수 님이야말로 싫지 않으십니까?”

“굳이 찾아 먹진 않지만 싫어하는 건 아닌데요.”

의아해하며 묻는 집사의 질문에 저는 편식은 안 한다며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험악해지는 리 샤오의 표정을 읽은 집사가 황급히 다음 질문을 덧붙였다.

“냄새, 괜찮으신 거냐는 말입니다.”

“……아.”

그제야 화수도 질문의 진짜 의미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러게요.”

마치 그제서야 생선이 비린 음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 뒤늦게 생선을 보고 화수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하지만 곧 찌푸려졌던 미간이 가만히 펴졌다. 아무리 보아도, 아니,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저 노릇노릇, 바삭하게 잘 구워진 생선구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왜, 괜찮죠?”

물론 그 질문에 답을 해줄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대신 리 샤오가 들고 있던 생선 그릇을 도로 상 위에 올려놓았을 뿐이다. 집사의 얼굴 위로 기쁜 기색이 확 번졌다.

“리샤오 님은.”

맞은편에 앉아 리 샤오가 식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화수가 불쑥 입을 열었다. 막 리 샤오의 젓가락이 꽁치구이 살을 솜씨 좋게 발라내고 있을 때였다.

“젓가락질을 참 잘하십니다.”

“…….”

잘 움직이던 젓가락이 일순 멈추는 것을 보고 집사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물론 좋은 의미로 한 칭찬이긴 하지만 리 샤오가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다고 기뻐할 이도 아니고, 애초에 젓가락질을 잘한다는 칭찬 같은 건 어린아이에게나 하는 칭찬이 아닌가. 흘끔, 집사의 시선이 리 샤오의 얼굴을 살핀다.

하지만 예상외로 리 샤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있었지만 험악한 기색은 없었다. 그건 확실했다.

“매일 기분이 상해 있어야겠군.”

멈춰 있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는 얇은 젓가락 끝으로 그보다 더 얇은 꽁치의 잔가시들을 발라내는 중이었다. 사실 생선뼈를 발라내는 일 같은 건 식사 시중을 드는 시종이 해야 했지만 리 샤오는 유독 자신의 물건에 남이 손을 대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시종이 해놓은 것들이 그의 성에 차지 않기도 했고. 완벽에 가까운 솜씨로 발라지는 생선을 보고 있으려니 집사 역시도 화수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화수처럼 대놓고 칭찬할 만큼 간이 크지는 않았지만.

탁.

드디어 마지막 가시가 종지 위에 올려졌다. 리 샤오가 고개를 들었다. 화수와 눈이 마주쳤다. 리 샤오가 피식, 하고 웃으며 덧붙였다.

“입에 발린 소리까지 하며 애쓰는 걸 보니.”

“꼭 입에 발린 소리만은 아닙니다.”

속내를 들킨 것이 뜨끔했는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면서도 변명하는 것은 잊지 않는 화수였다.

“젓가락질을 잘하시는 건 사실이니까요.”

“…….”

그제야 집사도 화수가 내내 이상하게 굴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안 하던 칭찬을 늘어놓고, 저는 먹지도 않을 식사자리에 굳이 와서 앉아 있었던 이유가 그러니까… 리 샤오의 기분을 풀어주려던 것이었던 모양이다. 참으로 요령 없는 사내다 싶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내가 여인처럼 다른 사내의 기분을 풀어주는 방법을 어찌 알겠나 싶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물론 화수가 사내를 상대하는 데는 재주가 비상한 사내라는 걸 집사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오해였지만.

“다들 이 정도는 하지 않나.”

그래도 그런 화수의 노력이 아예 먹히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손에 들린 젓가락을 딱딱, 부딪히며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는 리 샤오의 표정이 확실히 조금 전보다는 느슨해져 있었다.

“리 샤오 님의 젓가락질이 유난히 깔끔하긴 하시죠.”

그것을 확인한 집사도 슬그머니 화수의 의견을 거들었다.

“누가 가르쳐드렸는데, 당연한 일이지요.”

물론 그 안에 자신의 기여도가 있었음을 자랑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집사께서 가르쳐주신 겁니까?”

“어린 시절은 이곳에서 지내셨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화수 님도 젓가락질이 서투시던데.”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화수를 가만히 응시하던 집사가 슬쩍 그동안 지적하고 싶던 점을 꺼냈다.

“제가 조금만 손보면 화수 님도 리 샤오 님처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사가 말하는 조금만이 전혀 조금만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 손으로 하는 건 잼병이라.”

“처음부터 그리 약한 소리를 하시면 될 것도 안 됩니다.”

우는 소리를 하면서 슬금슬금 물러섰지만 집사는 쉽게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 물론 그런 집사를 단숨에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 있었으니.

“집사.”

나직한 음성에 눈을 반짝이며 밀어붙이던 집사가 곧바로 내밀었던 상체를 뒤로 물렸다.

“적당히 하지.”

“죄송합니다.”

리 샤오의 말 한마디에 곧바로 꼬리를 내리는 집사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다소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지만 그런 불만을 토로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조용히 쥐 죽은 듯 입을 다물고 있던 화수가 다시 입을 연 건 막 리 샤오가 발라놓은 꽁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려던 순간이었다.

“맛있으십니까?”

“…….”

화수의 질문에 바로 입술 앞에서 젓가락이 멈췄다.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맛을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 샤오는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젓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맛있어.”

제 앞으로 내밀어진 젓가락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화수에 리 샤오가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직접 맛을 보지는 않았지만 집사가 준비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화수 님 것은 따로-”

나서던 집사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리 샤오가 눈으로 보내는 경고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괭이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처럼, 리 샤오는 숨을 죽였다.

“먹어보고 뱉어도 되니까.”

괜히 먹었다가 토하면 어쩌지. 화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리 샤오가 머뭇거리는 그를 달랬다. 그제야 화수도 입술을 벌렸다. 바삭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멈칫거리던 입이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로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기가 막혔다.

물도 비려서 마시지 못하고 게워내던 몸이 생선을 먹고도 멀쩡하다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무려 맛까지 있었다.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자 허기가 몰려왔다.

입덧이라는 것은 참으로 고약한 녀석이었다. 직접 겪기 전에는 단순히 비위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 게워내는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입덧은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파도에 흔들리는 배를 타고 있는 듯이 속이 울렁거렸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괴로움을 알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 속은 텅텅 비었는데 물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나왔다. 물론 화장실로 달려가 게워내봐야 나오는 것은 위액뿐이었지만.

속이 쓰리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나중에는 차라리 뭔가 집어넣은 뒤에 게워내는 쪽이 덜 괴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뭔가를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어졌으니까. 화수가 정말 억울한 점은 실제 배를 탈 때도 하지 않던 배멀미를 지상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 작금의 상황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이도 바로 화수였다. 하지만 이해가 되고 안 되는 문제보다 밀려오는 허기가 더 급했다. 아예 리 샤오의 밥그릇을 제 앞으로 가져온 화수가 수저로 듬뿍 뜬 밥을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심지어 입안의 밥을 다 삼키지도 않았는데 다음 수저가 입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화수의 행동을 저지하는 이는 없었다. 저러다 체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 집사도 나서서 화수를 말릴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라 치면 리 샤오의 사나운 시선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머리 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알 리 없는 화수가 입안에 있던 것이 사라지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수저를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갓 지은 하얀 쌀밥과 리 샤오가 재빠르게 올려놓은 꽁치구이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채 식지 않은 밥 때문에 입천장이 다 데었지만 씹는 시간도 아까운 판에 뜨겁다고 뱉어낼 수는 없었다. 고집스럽게 입안의 것을 삼킨 화수가 다음 수저를 욱여넣었다. 이번엔 그나마 후후, 불어 넣었지만 그마저도 한두 번이 고작이라 뜨거운 정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솔직히 이제는 맛 같은 것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입에 먹을 것을 잔뜩 물고 있는데도 배가 고팠다. 할 수만 있다면 씹지도 않고 삼키고 싶었다.

“물, 물 여기 있습니다.”

그러다 결국 욱여넣던 밥에 목이 막혔다. 가슴을 탕탕 치는 화수를 보고 집사가 황급히 물 사발을 내밀었다. 그럴 줄 알고 조금 전부터 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이었다.

“밥 더 가져와.”

몇 번 뜨지도 않았는데 밥 한 공기가 텅 비었다. 리 샤오의 나직한 명령에 시종이 후다닥 밥그릇을 가져왔다.

“꽁치가, 잘 구워졌네요. 비리지도 않고.”

뒤늦게 민망해진 화수가 괜스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빈 그릇을 가져가고 대신 새 밥그릇을 놓아주던 리 샤오와 슬쩍 눈이 마주쳤던 것.

“다행이군.”

내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던 리 샤오가 감상을 내뱉었다.

“리 샤오 님은, 안 드십니까.”

밥 한 공기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뒤에야 리 샤오의 밥이 전혀 줄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수저가 쌀밥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먹으면 먹을수록 더 배가 고픈 기분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질문에 대답이 아니었다.

“꽁치도.”

리 샤오가 들어 보이는 그릇을 보고 화수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깔끔하게 발라놓았던 꽁치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기억엔 없지만 그 꽁치가 모두 누구 입으로 들어갔는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화수 님 것은 제가 발라 드릴 테니, 이제 그만 리 샤오 님도 식사를 하시지요.”

대신 안 그래도 전혀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리 샤오가 신경 쓰였던 집사가 화수의 질문을 핑계 삼아 그에게 권했다. 예상외로 꽁치로 향하던 젓가락이 순순히 멈췄다.

“그래?”

“……예.”

사실 권한 집사조차 리 샤오가 순순히 그러마, 하리라고 예상치 못했던 터라 대답이 살짝 늦었다. 하지만 대답하는 집사의 표정이 밝았다.

“화수 님 시중은 제가 들 터이니 리 샤오 님도 그만-”

“잔가시 하나도 없이 바를 자신이 있다는 말이겠지?”

“…….”

반색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집사가 리 샤오가 덧붙인 질문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생선 중에서도 유난히 잔가시가 많은 것이 꽁치가 아니던가. 사실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정도의 잔가시는 씹어 먹어도 되었지만 그런 것이 통할 리가 없었다. 어쩐지 순순히 자신의 말을 받아들인다 했다. 노인의 눈가의 주름이 깊어졌다.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자 리 샤오의 젓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수저 위로 잘 발라진 꽁치가 얹어졌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과 꽁치를 막 입안으로 욱여넣었을 때였다.

“아무래도 애기씨가 리 샤오 님 입맛을 빼다 박은 모양입니다.”

쿨럭.

예상치 못한 집사의 말에 넘어가던 밥알이 목에 딱 걸렸다. 다행히 입안의 것을 뿜어내는 불상사는 없었다. 대신 쏟아지는 기침을 참느라 다시 한 번 가슴을 두들기는 화수에 질책하는 시선이 집사를 향했다. 하지만 이번엔 집사도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리 샤오 님도 생선 좋아하시잖습니까.”

“……리 샤오 님이요?”

입안의 것을 빠르게 삼킨 화수가 되물었다. 육고기를 더 좋아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예. 특히, 석쇠로 구운 꽁치를 좋아하시지요. 어렸을 때도 이것만 있으면 밥 두세 그릇은 뚝딱이셨으니까요.”

“…….”

그렇구나. 화수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싫어하진 않는다고 말했지만 찾아 먹는 음식도 아니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눈앞에 있어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음식으로 배만 채우면 되는 화수에게 귀찮고 힘들게 가시를 발라야 하는 생선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누가 발라준 적도 없지만 발라주는 것을 받아먹을 성격도 아니라, 그나마 생선살을 발라 부친 명태전 정도가 화수에게는 최선이었다.

갑자기 저는 좋아하지도 않는 꽁치가 왜 그렇게 먹음직스럽게 보였나 했더니, 그런 연유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닮은 것은 입맛뿐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집사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린다.

“마님도 도련님을 가지셨을 때 입덧이 유난히 심해 꽤 고생을 하셨었지요.”

“…….”

워낙 오래전 일이라 잊고 있었다. 저도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 집사가 화수의 아랫배를 응시했다.

“굳이 닮지 않아도 될 것까지 애기씨가 닮으신 모양입니다.”

“그렇군.”

하지만 그런 집사의 말에 대꾸를 한 건 화수가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애매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던 화수가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리 샤오의 시선은 화수를 비껴 내려와 불룩한 아랫배를 향해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고 있으려니 리 샤오가 툭, 하고 짧은 감상을 내놓았다.

“나를 닮았군.”

그건 아마도 집사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는 말일 터였다. 뭔가를 알고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걸 다 알면서도, 그럼에도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다행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화수를 대신해 집사가 물었다.

“좋으십니까.”

“…….”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안에 서린 기색은 분명 기쁨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리 샤오는 집사의 말을 듣고서야 이 감정이 기쁨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군.”

저 배 속에 있는 것이 제 새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저와 닮은 점이 있다는 말이 기뻤다. 빌어먹게도.

“핏줄이라는 게 다 그런 것이지요.”

기묘한 대답이었지만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부정해도 핏줄이 당기는 것은 천륜이었다. 흐뭇하게 웃던 집사가 화수에게 물었다.

“밥 더 드릴까요.”

“예, 뭐.”

그사이 눈치를 보면서도 밥 한 그릇을 다 비운 화수가 슬그머니 빈 그릇을 내밀었다.

“헌데.”

“…….”

“뭐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내내 궁금했으나 틈이 나지 않아 묻지 못한 것이었다.

“제게, 말입니까?”

화수의 시선이 제게 닿아 있는 것을 본 집사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당연히 리 샤오에게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

“리 샤오 님 어머니께서는 입덧이 언제 끝나셨나요.”

저를 향한 리 샤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보일 것을 다 알면서도 그럼에도 화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마님께서는.”

집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 화수의 얼굴에 기대감이 번졌다.

“거의 산달까지도 고생을 하셨지요.”

“…….”

하지만 집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화수의 기대를 한순간에 뭉개버렸다. 눈에 띄게 실망하는 화수에 집사가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것까지 닮기야 하시겠습니까.”

“…….”

물론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 * *

멈칫.

문을 열고 들어서던 리 샤오가 기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자리에 누워 있어야 할 화수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편해 보이는 화수의 자세에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하필 그 순간 졸고 있던 화수가 기척을 느꼈는지 불쑥 눈을 떴다. 덕분에 찌푸린 표정을 짓고 있는 리 샤오와 눈이 마주쳤다.

“잘 거면.”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동공을 확인하니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물론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새까만 눈동자가 더 움츠러드는 것을 보고 리 샤오가 급히 뒷말을 잇는다. 천하의 리 샤오를 조급하게 만드는 건 화수가 유일했다.

“누워서 자지, 앉아서 뭐 하는 거야.”

“아.”

그제야 화수의 긴장도 누그러진다.

“집사어른께서 바로 눕지 말라고 하셔서요.”

식욕이 돌아온 것은 좋은 일이나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은 터라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라며 집사의 신신당부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막상 누워보니 숨쉬기가 힘들기도 했고.

“그리 존다면 앉아 있는 게 무슨 소용이지?”

“…….”

안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던 잠이었다. 그런데 배까지 부르니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지 않은가.

“앞으로 가봐.”

민망해진 기분에 슬쩍 시선을 피하고 있으려니 바로 머리 위에서 리 샤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리 샤오가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다. 하지만 화수가 고개를 들어 되묻기도 전에 리 샤오는 이미 그의 등 뒤로 들어왔다.

뭘 하려는지 영문을 모르면서도 리 샤오가 끼어들 공간을 만들기 위해 화수가 황급히 앞으로 엉덩이를 밀었다.

털썩.

리 샤오가 화수의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단단한 등보다 먼저 느껴진 것은 젖은 물냄새였다. 제가 쓴 것과 똑같은 비누를 썼을 텐데, 풍기는 향이 전혀 달랐다. 훨씬 달큰하고, 짙었다. 얼굴을 묻고 킁킁거리고 싶어지는 향이었다.

“아무 짓도 안 하니까.”

뻣뻣하게 굳은 화수를 향해 리 샤오가 말했다. 안심하라는 의미였겠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지금의 자세가 아주 색스러운 자세라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다.

“힘 빼고 기대.”

단단한 손이 굳은 화수의 어깨를 당겼다. 일순 몸이 뒤로 넘어가는 기분에 등근육이 바싹 긴장했다. 하지만 단단한 벽이 화수의 몸을 받쳤다. 확실히 기댈 것이 있으니 그냥 앉아 있는 것보다 훨씬 숨쉬기가 편했다. 물론 리 샤오의 손이 화수의 어깨를 훑어 올리기 전까지.

“근육이 많이 뭉쳤군.”

“괜찮- 흣-”

긴장으로 올라붙은 어깨를 리 샤오가 부드럽게 문질렀다. 괜찮다며 거절하려던 화수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솔직히 시원하긴 시원했다. 몸에 힘이 조금씩 빠졌다.

“아픈가?”

“아, 뇨.”

입에서 새어 나오는 앓는 소리를 아파서 내는 소리라고 생각했는지 둥글게 원을 그리던 엄지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뒤늦게 화수가 고개를 내젓자 그제야 손가락이 다시 움직인다.

“아프면 말해. 힘조절을 잘 못하니까.”

같은 사내의 몸인데도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부드럽고 연약해서 조금만 잘못하면 산산조각이 나버릴까 봐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리 약한 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리 샤오는 이상하게 겁이 났다.

“안 아픕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확연히 나른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긴장으로 굳혔던 몸도 어느새 힘을 빼고 늘어뜨려 리 샤오에게 기대고 있었다. 이상한 녀석이었다.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있다가 갑자기 예고도 없이 불쑥 경계를 풀어버린다. 물론 그러다 다시 가시를 세우는 것도 예고 없이 불쑥이긴 했지만.

뭉친 어깨가 풀어지는 것을 확인한 리 샤오가 팔 쪽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맨살에 손이 닿았지만 화수는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조금 전과 다름없이 온몸을 리 샤오에게 내맡기고 있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는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기분 좋게 먹은 직후의 기분. 화수의 고른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런 기분이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기묘했지만 분명 그런 기분이었다.

“아직 자면 안 돼.”

“안 잡, 니다.”

하지만 대꾸하는 목소리에 잠기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팔을 따라 내려오던 리 샤오의 손이 화수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몸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이유는 리 샤오도 알고 있었다.

“쉬.”

괜찮다는 듯 화수를 달랜 리 샤오가 손을 옷 안으로 집어넣었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던 화수의 배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빵빵하게 부른 배가 긴장했다가 이완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피죽도 제대로 못 먹던 녀석이 밥 한 공기를 다 비우는 것을 보았을 때 리 샤오는 먹지 않고도 배가 부른 기분을 느꼈다. 그런 기분이 있을 수 있음을 처음 깨달았다. 녀석의 입에 뭔가 넣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하지만 그런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지 리 샤오는 알 수가 없었다.

“장 선생이.”

불쑥 튀어나온 이름에 화수의 배가 동그랗게 뭉쳐졌다.

“다녀갔다며.”

다행히 배가 뭉쳐졌다가 풀어지는 것은 조금 전에도 반복되는 일이었으므로 리 샤오의 관심을 끌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꽤나 귀찮게 굴었겠군.”

다행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아니었다면 분명 이상한 표정을 들켰을 테니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아 있었지만 잠기운에 그런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럴 리가. 내가 장 선생을 아는데.”

“저는 정말 괜찮았습니다. 다만.”

“다만?”

머뭇거리는 화수에 리 샤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되묻는 목소리에서는 표시가 나지 않았지만 화수가 급히 뒷말을 이었다.

“리 샤오 님 옷은 제 날짜에 맞추기 힘들 것 같다더군요.”

“……뭐, 별거라고.”

리 샤오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화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뭐가.”

“저 때문에 옷이 망가졌으니까요.”

“…….”

혹 그날 제가 그 옷을 입고 나온 이유를 알아차렸나 싶어 순간적으로 굳은 것이 무색하게도 화수가 잘못을 구한 부분은 전혀 다른 이유였다.

“생일잔치에 입으려고 특별히 주문한 옷이라고 들었습니다.”

절규하던 장 선생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어차피 그 옷이 아니라도 입을 옷은 차고 넘쳐. 신경 쓸 것 없어.”

“……그렇습니까.”

“그렇다니까.”

“…….”

묘하게 날이 선 리 샤오에 화수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또 그 미묘한 머뭇거림을 리 샤오는 놓치지 않는다.

“더 할 말이 있나?”

“없습니다.”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연신 고개를 내젓던 화수에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결국 화수가 항복하듯 입을 열었다.

“생일을 망가트린 보답을 해드릴까 했을 뿐입니다.”

“…….”

“물론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원하신다면, 이라고 덧붙였지만 화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허면, 연통을 드리지요.’

가봉이 끝난 옷은 곱게 접혀 종이상자에 안착했다. 상자 뚜껑을 닫는 것까지 확인한 장 선생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어도 잔칫날 전까지는 완성시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를 준비했으니, 마시고 가시지요.’

애초에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집사가 차를 권했으나 장 선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이후에도 일정이 있어서-’

‘저기, 선생님.’

거절하는 장 선생을 말리고 나선 것은 집사가 아니었다. 그때까지, 존재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불쑥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쏠리자 직원의 난처한 기색이 더 짙어졌다. 하지만 더 머뭇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더듬거리며 뒷말을 잇는다.

‘제가 소피가 마려워서.’

장 선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객의 집에 와서 이 무슨 예의 없는 짓이란 말인가. 하지만 당황한 장 선생과 달리 집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직원을 향해 화장실 위치를 알려주었다.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가서 왼쪽으로 쭉, 가면 바깥에 화장실이 있을 게야.’

응접실 바로 오른편에 있는 손님용 화장실이 아니라 굳이 먼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알려준 이유를 화수는 모르지 않았다. 홍매루에서도 일하는 이들은 손님용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다. 손님들이 불쾌해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아마 자신도 배 속에 아이가 없었다면 지금 저 직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신세였을 것이다. 집사에게 악의는 없었겠지만 새삼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실례가 많습니다. 부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이라.’

‘잘되었지 않습니까. 덕분에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생겼으니.’

표정이 좋지 않은 장 선생을 집사가 달래었다. 뒤이어 재빠르게 다반茶盤을 내려놓는 집사의 움직임에 얼굴을 구기고 있던 장 선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도로 자리에 앉았다.

‘요번에 본가에서 보내온 것인데 아주 맛이 좋습니다.’

쪼르륵.

붙잡은 다관을 기울여 숙우를 채우고, 살짝 식힌 차를 잔에 나눠 담는다. 잔 받침째로 찻잔이 건네진다. 순간 잔을 건네받으려던 장 선생이 멈칫했다.

‘전 됐습니다.’

제게로 향한 시선을 알아차린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쓴 것은 약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치 쓴 약을 먹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는 화수에 그제야 장 선생도 찻잔을 건네받았다.

‘먹는 건 잘 먹고 계십니까. 지난번보다 어째 살이 더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시선은 여전히 화수에게 머물러 있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걱정입니다. 영 음식을 못 넘기시니.’

다관을 내려놓는 집사의 시선도 화수를 향했다.

‘애기씨가 까탈스러우신 모양입니다.’

‘먹는 것이 시원찮으니 애기씨도 걱정이고.’

점점 불편해지는 주제에 화수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그만 들어가보겠습니다. 기력이 없어서 힘드네요.’

부러 배를 더 내밀며 끙끙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그런 화수를 저지하는 이는 없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신 그 뒤를 따르려는 집사에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방 정도는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설마 집 안에서 길을 잃을까 봐요.’

‘…….’

물론 길을 잃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화수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이며 아치형의 패방을 통과했다. 뒤따라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화수의 말에 안심했다기보다는 아마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있겠는가, 생각했으리라.

응접실을 나온 화수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난처한 대화를 피하려고 나온 것이긴 하나 사실 빨리 방에 가서 눕고 싶었다. 먹는 자체가 시원찮아 기력이 없어 잠만 오는 것인지, 단순히 임신을 해서 잠이 많아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돌아서면 잠이 왔다. 벌써 반쯤 감긴 눈으로 걸음만 내딛고 있을 때였다.

‘힉-’

순간 벽에서 나온 손이 화수의 팔을 잡아당겼다. 화수가 기겁해서 숨을 삼켰다.

‘쉿.’

하지만 그런 화수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다른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은 사내가 뒤를 살핀다. 다행히 소리가 응접실 안쪽까지 닿지 않았는지 사람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리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놔줄게요.’

끄덕끄덕. 사내의 말에 화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사내가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물렸다. 사내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지만 사실 화수는 소리칠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 기겁한 것은 순간적으로 놀라서였고, 상대가 누군지 확인했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화장실은 반대쪽인데.’

숨어 있던 침입자는 다름 아닌 조금 전 응접실에서 소피가 급하다고 나갔던 직원이었다. 물론 작금의 상황을 볼 때 다른 게 급했던 모양이지만.

‘진 사장이 전하라더군요.’

사내가 품에 넣어두었던 종이쪽지를 꺼냈다. 하지만 화수는 그것을 건네받는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되물었다.

‘무슨 수작이야.’

‘무슨, 수작이라뇨.’

‘진 사장은 내가 글 못 읽는 거 뻔히 아는데, 서편을 보냈다고?’

‘…….’

화수가 이리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되물은 사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그렇지. 확신은 짙어졌다. 하지만 화수가 사내를 더 추궁하려던 찰나.

타닥타닥.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그 소리를 들은 건 화수만은 아니었던지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그저 전하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입니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사내가 억지로 화수의 손에 쪽지를 쥐여 주었다. 도로 되돌려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화수 님?’

뒤에서 들려온 저를 부르는 소리에 화수는 주먹을 꽉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불러도 반응이 없는 화수가 이상했던지 시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화수가 뒤돌아섰다.

‘별일 아니야.’

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얼굴과 마주하자 시종의 걸음이 멈췄다.

‘이 사람이 화장실을 못 찾길래 알려주고 있었어.’

‘아, 화장실은 반대쪽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그제야 의심을 완전히 거둔 시종이 사내가 서 있는 곳과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고맙습니다, 고개를 숙인 사내가 걸음을 내딛었다. 사내가 마주 서 있던 화수를 스쳤다. 그 순간 사내가 입술을 달싹였다. 말하는 스스로에게도 잘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였으나 화수의 귀에는 정확히 박혀들었다.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랐지만 사내는 분명히 말했다.

잔칫날 밤이라고.

꽈악, 움켜쥔 손안의 종이가 칼날처럼 서늘했다.

* * *

“딴생각을 하고 있군.”

나직한 음성에 화수가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열린 동공 안으로 가장 먼저 쏟아져 들어온 것은 저를 가만히 응시하는 새까만 눈동자였다. 그다음은 찌푸려진 눈매. 잘생긴 눈썹은 찌푸려진 것조차 그림이 되었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태평하게 하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것 말고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다는 게 화수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꽤나 자존심 상하는걸.”

언성을 높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말이 이리도 무시무시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화수는 지금의 경험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진짜 무시무시한 말은 따로 있었다.

“좀 더 분발해야겠군.”

“아뇨. 지금도 충분, 읏-!”

다물려 있던 입술이 다급하게 열렸다. 충분하다는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아니, 솔직히 과했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항의의 말은 제대로 된 문장으로 채 만들어지지도 못하고 그대로 입안으로 삼켜졌다. 벌어져 있던 허벅지가 더 활짝 열렸다. 덕분에 반쯤 일으켜져 있던 몸이 다시 뒤로 넘어갔다.

말도 안 돼.

차마 고개를 내리지도 못하고 정면으로 보이는 천장만 올려다보던 화수가 고개를 내젓는다. 하지만 사타구니가 축축하고 뜨끈한 것에 파묻히는 감각은 선명했다.

“으, 으.”

화수의 것을 삼킨 리 샤오가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그 끄트머리를 더듬는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리 샤오를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허벅지 안쪽을 벌리고 있던 두 손이 오므라드는 허벅지를 더 벌렸다.

화수의 것을 그 모양대로 더듬어가던 혀끝이 귀두의 옴폭한 부분을 찾아 들어왔다. 마치 그 안으로 파고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살덩이를 쑤셔 넣었다. 당연히 혀가 들어올 수 있는 구멍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 안 돼-”

꾹꾹 눌렀다가 살살 달래듯 문지르고, 뾰족하게 세운 끝으로 들척이는 살덩이의 움직임이 또 다른 살덩이를 떠올리게 했다. 사실 비교하기에는 너무나 다른 크기와 경도의 것이었지만 들어오려고 하는 구멍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커다란 것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했던 것.

“그만, 읏, 으, 그, 힉-!”

구멍 끝에 살덩이가 들를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짙어졌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화수가 허리를 뒤틀었다. 하지만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특히나, 앞섶을 상대에게 빨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리 샤오가 붙잡고 있던 허벅지를 눌러 고정시켰다. 그리고 빨고 있던 화수의 것을 콱 물었다.

“악.”

순간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화수가 비명을 내질렀다.

“왜.”

하지만 리 샤오는 태연했다.

“아픈 게 더 취향이라고 하지 않았나?”

할짝. 혀끝으로 자신의 것을 희롱하며 덧붙이는 말에 화수가 헐떡이고 싶은 기분을 누르면서 받아쳤다.

“그렇다고 아예 아랫도리가 없어지는 건 사양입니다만.”

“……그래?”

“예!”

당연한 것 아닙니까? 기가 막히다는 화수의 대답에 리 샤오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아래를 바짝 세우고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던 화수도 뒤늦게 미간을 찌푸린다. 이미 쪼그라들어 있어야 할 제 것이 조금 전보다 더 왕성한 기세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주인보다는 아랫도리가 더 똑똑한 것 같으니.”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는 화수와 달리 기분이 풀린 리 샤오는 어깨를 으쓱이고 못 다한 말을 덧붙였다.

“상을 주지.”

말과 동시에 허리를 구부린 리 샤오가 바짝 선 화수의 것을 입안에 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 좋게 빳빳하게 서 있던 살덩이가 일순 움츠러들었다. 주인보다 똑똑하다는 리 샤오의 칭찬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

사실 정말로 물어뜯을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저 살짝 겁만 주려고 했을 뿐인데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살갗은 약간의 자극도 통증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하지만 언제고 수틀리면 물어뜯을 수도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그 점을 몸으로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이는 화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런 리 샤오의 배려를 화수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읏. 아. 으……. 으.”

리 샤오가 삼킨 것을 쭉쭉 빨았다. 확실히 몸으로 배운 것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는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조금 전처럼 도망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착하게 군 상으로 리 샤오가 좀 더 속도를 냈다.

쭉쭉 빨았다가, 혀로 아래를 긁어 올린다. 퍼드득, 튀는 살덩이를 꽉 물었다가 느슨하게 풀었다가, 다시금 조였다. 동그랗게 올라붙는 아랫배처럼 화수의 것도 바싹 섰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런 움직임에 맞춰 고개를 앞뒤로 움직였다.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리 샤오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리 샤오의 침에 잔뜩 전 살덩이가 밖으로 나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자, 잠깐, 아! 아, 아, 자-, 응……!”

당황한 화수가 리 샤오의 어깨를 밀었다. 하지만 손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사실 지금 몸에 힘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빨리고 있는 아랫도리가 유일했다.

질척질척, 아래가 빨리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활짝 벌어진 허벅지 안쪽이 경련했다. 세워진 발가락이 곱았다.

아아.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화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두 손뿐이었으므로. 쭉쭉, 아래를 빠는 힘이 강해졌다. 눈앞이 아찔했다. 이미 어두운 눈이 더 깊은 곳으로 쑥쑥, 꺼져 들어갔다.

“아, 응, 응, 응!”

리 샤오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던 화수가 어느새 허리를 들썩이고 있었다. 더 빨아달라고, 더 깊이, 더 세게 빨아달라고 조르는 움직임에 리 샤오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애교를 부리거나 조르는 것은 딱 질색인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제 입으로 사내의 것을 빨게 되리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 그것을 귀엽다고 여기게 될 줄이야. 처음 입에 넣을 때도 녀석의 당황한 표정을 보겠다는 생각만 했지 전혀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그건 상황을 자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눈앞의 녀석만 관련되면 늘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리 샤오의 입 안에서 조여지고 풀어지길 반복하던 화수의 것은 빳빳한 경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정이 다가왔다는 의미였다. 화수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으로 리 샤오의 어깨를 밀었다. 녀석은 늘 견딜 수 없는 순간엔 얼굴을 가리곤 했다. 자신의 얼굴만 가리면 완벽하게 숨었다고 착각하는 멍청한 꿩 새끼처럼. 물론 그런 멍청한 점이 좋았다.

리 샤오가 어깨를 미는 손을 뜯어냈다. 그리고 깍지를 꼈다. 밀어내던 손이 순순히 끌려와 제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랫배가 동그랗게 올라붙은 채 풀어지지 않았다.

“그만, 빼야-”

화수가 헐떡이며 애원했다.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는 손을 리 샤오가 더 바싹 당겼다. 허벅지를 잡지 않아도 이제는 오므라들지 않았다.

“아, 으…….”

다리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힘없이 벌어지려는 것을 막는 짓만으로도 힘겨웠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눈앞이 쑥 꺼졌다.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벌어진 입에서는 신음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끝도 없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에 화수가 붙잡고 있던 리 샤오의 손을 꽉 붙들었다. 사실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아. 하아.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순간이 거짓말처럼 끝이 났다. 눈꺼풀이 천 근 같았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눈을 뜨지는 못했을 것이다. 눈을 뜨고 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쯔윽.

하지만 눈을 뜨지 않아도 현실로 끌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과 정액에 전 살덩이가 밖으로 나오는 소리였다. 델 듯이 뜨겁던 입안에서 나오자 단숨에 아랫도리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화수를 더 서늘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아무리 기다려도 리 샤오의 입안에 쏟아낸 제 것을 뱉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

설마.

불길한 예감에 겨우 눈을 뜬 화수가 이내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리고 물었다.

“삼키셨습니까?”

“…….”

“그걸, 왜, 제정신이십니까?!”

가만히 자신을 감상하듯 내려다보고 있던 리 샤오가 대답 대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순간 다시 또 제 것을 물려는 것인가 싶어 움츠러든 것이 무색하게도 리 샤오의 입술이 향한 곳은 화수의 입술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렸지만 쓸데없는 반항은 하지 않았다.

순순히 입술을 벌리던 화수의 입안으로 뭔가가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혀가 안을 휘저었다. 질척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물론 그것을 보는 리 샤오의 눈꼬리는 반대로 호를 그렸지만.

목적을 달성하고도 몇 번이고 입안을 휘저은 뒤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내가.”

허리를 세운 리 샤오가 혀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번 사정한 아랫도리가 설 듯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정신이 들었다.

“제정신인 것 같아?”

“…….”

물론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누가 봐도 지금의 리 샤오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그리 대답할 수는 없으니 대답하는 대신 화수는 눈을 감았다. 순간 놀라 반응한 것이지 사정감이 남아 있는 몸을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조금 전보다 더 큰 탈력감이 몰려왔다. 사정 한 번 한 것뿐인데 온몸에 진이란 진은 다 빠진 기분이었다. 차라리 뒤쪽으로 몇 번을 가는 쪽이 덜 힘들 것 같았다.

“벌써 늘어지면 곤란한데.”

축 늘어진 화수의 몸을 뒤집으며 리 샤오가 중얼거렸다.

“아직 본격적인 건 시작도 안 했는데.”

엉덩이골 사이를 문지르는 뜨거운 것에 화수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굳이 비교하자면 뒤로 가는 쪽이 차라리 덜 힘들다는 말이지 아예 힘들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다.

“잠깐, 잠깐만 쉬게-”

“쉬고 있어. 일단 이번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버둥거리는 화수를 꾹 누르며 리 샤오가 속삭였다. 오싹, 등줄기가 올라붙었다.

사실 리 샤오는 잠자리에 담백한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정사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쪽이었다. 부드러운 여인의 몸을 안고, 그 안에 쌓인 것을 쏟아내는 행위는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말 그대로 쌓인 욕정을 푸는 것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는 없었다. 그래서 그 상대에게 집착한 적이 없었고, 더 이상은 싫다며 도리질 치는 이의 다리를 억지로 잡아 벌리고 제 욕구만을 푼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 건 리 샤오의 방식이 아니었다.

눈앞의 사내를 취하기 전까지는.

“이제 더는-”

순간 정신이 들었는지 미약하게 저항하는 몸을 리 샤오가 제 쪽으로 바싹 당겼다. 반쯤 빠졌던 기둥이 뿌리 끝까지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갔다. 다행히 저항하는 윗입과 달리 아랫입은 순순했다.

“아으…….”

꾸직 꾸직, 잔뜩 싸놓은 정액이 꽉 찬 살덩이 틈새로 삐져나왔다. 삐져나온 정액이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 아래로 줄줄 흘러내렸다.

엎드린 자세로 엉덩이만 바싹 들린 터라 새어 나온 점액질의 액체가 회음부를 지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가락으로 그것을 긁어 올려 입구와 사타구니 사이에 치덕하게 발랐다.

“읏-, 으-”

부푼 회음부를 꾹꾹 누르자 바로 위 성기를 물고 있던 입구가 꽉꽉 조여들었다. 조금 전까지 거품이 부글거리던 곳이 통통하게 부어 있었다. 회음부를 누르던 손가락이 좀 더 입구 쪽으로 바싹 붙었다. 측, 꽉 물린 틈새가 누르는 힘에 살짝 들렸다. 그 틈으로 잔뜩 차 있던 정액이 줄줄 새어 나온다. 줄줄 새어 나오는 정액을 뚫고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입구가 찢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이마로 버티고 있던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으아, 아.”

그런 화수의 목덜미를 리 샤오가 내리눌렀다. 긴장으로 등줄기의 근육이 바싹 올라붙었다. 등 가운데 옴폭 파인 골이 선명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손가락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비단이불을 움켜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그것을 보는 리 샤오의 눈매가 기름해진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결국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던 손가락을 도로 뺐다. 기다렸다는 듯 입구가 오물거리며 틈을 없앴다.

슥.

뒷덜미를 누르고 있던 손까지 내려 양손을 이불을 꽉 움켜쥔 손 위에 포갰다. 깍지를 끼듯 포개 그 손을 이불에서 잡아뗐다. 그대로 당기자 화수의 상체가 허공에 들렸다. 날갯죽지의 뼈가 도드라지는 것을 보며 리 샤오가 허리를 뺐다가 다시 밀었다.

퍽, 리 샤오의 사타구니가 볼기를 치듯 화수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놀랐는지 확 안이 조여들었다. 하지만 이미 정액에 전 살덩이를 붙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성기가 뒤로 빠졌다. 거의 끝까지 빠진 성기를 미처 오므라들지 않은 구멍에 도로 집어넣었다.

“히익-”

화수의 상체가 활처럼 휘었다. 벌어진 허벅지가 벌벌 떨렸다. 뽀얀 피부가 울긋불긋했다. 제가 새겨놓은 잇자국이 더 선명해졌다. 리 샤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허리를 뒤로 뺐다가 조금 전과 다른 각도로 밀어 넣었다.

“힉. 익-”

퍽, 하고 쳐올리는 힘에 몸이 딸려 올라갔지만 리 샤오는 능숙하게 붙잡고 있던 팔을 아래로 당겼다. 반동으로 삽입이 더 깊어졌다. 갓 물에서 건져낸 생선처럼 파드득거리는 몸을 꽉 붙들고 다시 한 번 허리를 쳐올렸다.

-!

벌어진 입에서 이번엔 신음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바싹 올라붙은 등줄기에 물기가 어렸다. 조금 말랐던 뒷머리가 다시 젖고 있었다.

“힉, 으, 아, 앗, 아…….”

허릿짓이 빨라졌다. 푹푹, 꽂아 넣을 때마다 매번 다른 각도로 질러 넣었다.

“읏……, 아-”

뽑아내듯 기둥을 뺄 때마다 정액이 딸려 나왔다. 기둥을 물고 있는 입구에 거품이 일었다. 그럴 때마다 뻑뻑하던 안이 점점 느슨해지고 있었다.

“아으, 으으…….”

슥, 하고 빠졌다가 퍽, 하고 질러 넣는다.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리 샤오는 집요했다. 쳐올리는 힘에 엉덩이가 위로 밀리면 붙잡은 팔을 잡아 내리고, 다시 위로 딸려 올라가면 끌고 내려와 다시 질러 넣었다. 휘저어지는 안이 벌벌 떨렸다. 결국 버티던 엉덩이가 아래로 꺼졌다. 그마저도 두 팔을 붙잡힌 채라 완전히 엎어지지도 못했다.

“도망치지 마.”

반쯤 빠졌던 성기를 콱 박아 넣으며 리 샤오가 나직이 명령했다.

“아, 아…….”

화수도 버티고 싶었다. 하지만 푹, 푹, 성기를 꽂아 넣는 허리에 자꾸만 엉덩이가 아래로 내려앉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리 샤오의 험악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움츠러든 화수가 헐떡이는 숨 사이로 겨우 단어를 만들어냈다.

“다, 다리에, 힘이.”

“…….”

다행히 무거운 침묵 끝에 츳,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화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리 샤오가 놓은 손이 화수의 배 아래쪽으로 들어왔다. 축 늘어진 상체와는 별개로 엉덩이만 바싹 들렸다. 벌어진 허벅지 안쪽으로 제 두 다리를 끼워 단단히 고정시킨다. 그리고 빠졌던 귀두 끝을 구멍에 맞춰 넣었다.

“아-응…….”

당연하게도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각도로 기둥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주욱, 말 그대로 쇠꼬치에 아래가 꿰이는 감각. 그대로 배를 뚫고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수가 아래를 조였다.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아래는 아무리 조여도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 아, 으으-, 응…….”

푹, 푹, 푹, 리 샤오는 마음껏 안을 헤집었다. 허리를 붙들고 있는 힘 때문에 아무리 강하게 쳐올려도 몸이 밀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밀려야 하는 상체가 고정된 덕분에 삽입이 더 깊었다. 화수가 바닥에 대고 있던 이마를 이불에 문질렀다. 리 샤오로 가득 찬 아래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읏……, 아, 읏…….”

세운 손가락이 바닥을 긁었다. 부드러운 이불이 손가락 아래서 연신 미끄러졌다. 달궈진 쇠몽둥이가 안을 벌리고 내장을 가득 채운다. 그것에 달라붙은 내장이 다 녹아내렸는지 감각이 없었다. 어쩔 줄 모르고 벌어진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벌을 주듯 위에서 아래로, 찍어 내리던 것이 방향을 바꿨다. 아래서 위로, 엉덩이를 밀어 올리며 들어왔다.

“아으으, 으으.”

바닥을 딛고 있던 발가락이 어쩔 줄 모르고 오그라들었다. 다행히 다리에 힘을 주지 않아도 엉덩이가 주저앉는 일은 없었다. 단단하게 붙든 손에 고정되어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아-, 응-”

이상한 사실은 그럼 아래쪽으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야 하는데 안쪽 감각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거였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쑤셔지는 곳은 아래쪽인데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아응, ……읏.”

리 샤오가 허리를 크게 궁글렸다. 달라붙어 있는 내벽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생생했다. 기둥이 뒤로 빠졌다. 입구가 오물대며 기둥을 쭉쭉, 빨아 당겼다.

“조르지 마.”

리 샤오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화수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리 샤오가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벌게진 귓불을 입안에 넣었다. 혀로 굴리다가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었다. 순간 움츠러들었던 아래가 다시 물고 있던 리 샤오의 것을 쭉쭉 빨았다. 목덜미까지 붉은 기운이 번졌다. 리 샤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매력적인 미소였다. 안타깝게도 이마를 이불에 박고 있던 화수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조르지 않아도 박아줄 테니까.”

쭉, 귓불을 빨아올린 리 샤오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물론 그와 동시에 박아 넣는 아랫도리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으아-”

짓이겨진 엉덩이가 부풀어 올랐다. 쑤욱, 기둥을 뽑자 아래가 뽑힐 듯 딸려 나갔다. 제자리로 되돌아오기도 전에 푹, 하고 기둥이 박혀 들어왔다. 배 속이 뜨거운 살덩이로 가득 찼다. 엉덩이가 묵직했다.

“읏, 으, 으!”

척, 처억, 엉덩이에 사타구니가 닿을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숨이 엉켰다. 깊게 들어왔다가 얕게 들어오고, 얕게 들쑤시다 이내 배를 꿰뚫듯 들어온다. 박자를 예상할 수 없어 화수는 속수무책으로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푹, 쑤시고 들어오는 끄트머리에 눈앞이 쑥 꺼졌다. 발가락이 곱았다.

“아, 안, 응-!”

헐떡이던 화수가 급히 손을 뒤로 뻗었다. 리 샤오를 밀어내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자극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에 불과했다. 그 손을 리 샤오가 붙들었다. 조금 전처럼 붙잡은 팔을 당겨 상체를 일으켜 세우지는 않았지만 대신 몸을 고정시키는 용도로 결박되었다. 왼쪽으로는 손목을 오른쪽으로는 허리를 붙들린 채 다시 한 번 삽입당했다.

“아, 아, ……읏, 으-”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힘을 빼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들락이는 엉덩이 안쪽이 근질거렸다. 이미 마구 쑤셔지고 있는데도, 간지러움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제발.

내벽이 요동쳤다.

어떻게 좀.

분출되지 못한 열기가 배 아래쪽에서 들끓었다. 아랫배뿐만이 아니라 밑이 절절 끓었다.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그리고 발가락까지. 아래가 저릿저릿했다.

“리.”

헐떡이던 숨에 리 샤오의 이름이 섞였다. 물론 의식하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것 말고는 제대로 된 단어를 내뱉을 수 없었을 뿐.

“리.”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한 정신도 아니었다. 그저, 매달릴 곳이 눈앞의 사내밖에 없었다. 그것뿐이었다.

눈앞이 쑥, 꺼졌다. 사실 실제로 꺼진 건 허리 아래쪽이었다. 일순 멈췄던 허릿짓이 갑자기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칠고 빨라졌다.

“아, 아, 으-, 아…….”

화수가 자지러졌다. 웅크리는 몸을 단단히 붙들고 리 샤오는 몇 번이고 안을 쑤셨다. 숨 쉴 틈이 없었다. 조금 전에도 숨이 차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비하면 아주 느릿하게 움직인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호흡이 엉켰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아주 간단한 동작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숨이 차올랐다. 점점 깊은 물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천천히 차오르는 물에 헐떡이는 것처럼 숨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눈앞이 쑥- 꺼졌다.

“흣.”

리 샤오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졌다. 안이 확 조여들었다. 내벽이 제 모양에 맞춰 한 치의 틈도 없이 다물렸다. 쫙 올라붙은 엉덩이에 생긴 옴폭한 보조개를 감상하고 있던 리 샤오가 눈매를 가늘게 떴다.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던 것.

“싫-”

움찔움찔, 아직도 경련하고 있는 허벅지 안쪽으로 리 샤오가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반사적으로 화수가 무릎을 오므렸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이미 리 샤오의 손엔 화수의 것이 쥐어져 있었다.

화수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것을 쥔 리 샤오가 엄지손가락으로 입구를 문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수가 생각처럼 먼저 간 벌을 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싼 줄 알았는데.”

무슨.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에 화수도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제 것이 들어왔다. 화수의 눈이 기름해졌다. 그제야 리 샤오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알아차린 것과 납득하는 것에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 제가 느낀 건 분명 사정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 샤오의 손에 들린 제 것은 젖어 있지 않았다. 물론 이전에 사정했던 정액이 잔뜩 말라붙어 있었지만 조금 전 사정은 이제까지의 것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건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제 것만 응시하고 있는 화수와 달리 리 샤오는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대체 뭐냐고, 화수가 되묻기도 전에 리 샤오의 뒷말이 이어졌다.

“너무 느끼면 싸지 않고도 갈 수 있다던데.”

“…….”

느긋하게 중얼거린 그 말이 제대로 머릿속에 입력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힘들다고 징징대더니, 실은 그 정도로 좋았단 말이지.”

“그런 것이-, 하읏-!”

이번에는 화수도 한 번에 알아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리 샤오가 기다리지 않았다. 제 것을 꽉 물고 있는 안에서 허리를 잡아 뺐다. 내벽이 다 딸려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의외로 기둥은 미끄러지듯 쉽게 빠져나갔다.

“보상을 누가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리 샤오가 곧바로 엉덩이를 벌리며 허리를 밀었다. 조여들던 안이 힘을 줘 쑤시자 단숨에 벌어지면서 그의 것을 끝까지 삼켰다.

“아으으.”

사정감이 남아 있는 몸이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옹송그렸다. 그런 몸을 꽉 누르며 리 샤오가 다시 한 번 삽입한 기둥을 잡아 뺐다. 그리고 다물어지지 않은 입구를 푹, 쑤셨다. 삽입이 깊고 거칠었다. 사정이 다다랐다는 의미였다. 조금은 안도했다. 물론 느긋하게 안도하고 있을 여유 같은 건 없었지만.

“아, 아, 아, 아-”

엉덩이만 들린 채 몇 번이고 아래를 꿰뚫렸다. 그때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유일하게 바닥과 떨어진 아랫배가 동그랗게 뭉쳤다 풀어졌다를 반복했다. 이마로 버티고 있던 화수의 입술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손안에 움켜쥔 이불이 마구 구겨졌다. 아래가 홧홧했다. 앓는 소리와 질척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퍽.

끄트머리까지 잡아 뺀 것을, 입구가 다물리기 전에 뿌리 끝까지 한 번에 박아 넣었다. 바짝 수축한 허리에 옴폭한 홈이 생겼다. 자꾸만 밑으로 꺼지는 허리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아랫배를 끌어 올렸다. 옴찔옴찔 경련하는 안을 휘저었다. 퍼드득, 튀어 오르는 몸을 꽉 붙들었다. 그리고 잡아 뺀 성기를 깊숙이 질러 넣었다.

“하아.”

진저리를 치는 화수를 리 샤오가 꽉 눌렀다. 안이 흠뻑 젖었다. 내벽과 성기의 틈새로 새어 나가는 정액이 느껴졌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눌린 개구리처럼 바닥에 납작 붙어 있던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을 수 없게도 안에 들어차 있던 리 샤오의 것이 부피를 늘렸기 때문이다. 이전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다시 부피를 늘렸는데도 새어 나오는 정액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아래쪽에 아무 감각도 없는데 그것만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설마. 뒤늦게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만두십시오.”

화수가 헐떡이고 싶은 기분을 겨우 누르며 말했다.

“이미 제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걸 까먹으신 건 아니겠지요.”

“알아.”

“…….”

그걸 알면서도 대체 왜 노팅을 하고 있는 거냐는 물음은 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며, 말을 뇌까리는 리 샤오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묘하게 날카로운 기색이 뭔가 또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찔리는 것이 있는 입장에서는 지금의 상황이 퍽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였다.

“익-”

눈치만 살피고 있던 화수의 몸이 휙, 뒤집어졌다. 저를 내려다보는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하고서야 리 샤오가 제 몸을 뒤집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연결되어 있던 리 샤오의 것은 전혀 빠지지 않고 안에 박힌 채였다.

“그러니 다행이지.”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뭐가, 말입니까. 이번엔 화수가 되묻기도 전에 뒷말이 이어졌다.

“아무리 노팅을 해도 임신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노팅 자체가 임신을 시키려고 하는 겁니다만, 이라는 반박은 그대로 입안으로 삼켜졌다. 발목을 감싼 손이 불덩이 같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커먼 눈동자만큼이나.

* * *

“발라 드릴까요.”

젓가락만 들고 한참을 눈앞에 펼쳐진 밥상을 보고만 있는 화수를 보다 못한 시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생선이요.”

그제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생선에서 시종에게로 화수의 시선이 옮겨왔다.

“먹고 싶으셔서 계속 보고 계신 거 아니세요?”

“……그렇긴 한데.”

느릿하지만 긍정의 뜻을 담은 대답이 돌아오자 시종의 눈이 반짝인다.

“저 생선가시 엄청 잘 발라요.”

“그래?”

“예.”

고개를 끄덕이는 시종의 상체가 어느새 상 쪽으로 바싹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고민하던 화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됐어.”

거절이었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시종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번졌다.

“드시고 싶으시다면서요.”

아쉬운 마음에 한 번 더 권해보지만 이미 화수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간 뒤였다.

“나 물.”

“잠시만요. 얼른 가서 물 가져올게요.”

어깨를 늘어트리긴 했으나 몸을 일으키는 시종의 움직임엔 머뭇거림이 없었다. 후다닥, 멀어지는 발소리를 확인한 화수가 슬그머니 젓가락을 생선으로 가져갔다. 뒤적뒤적, 서툰 젓가락질로 생선살을 발라보지만 발라지지도 않을뿐더러 그마저도 젓가락이 닿을 때마다 잘게 부서져 집어지지 않았다.

관둬, 관둬. 미간을 확 찌푸린 화수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없던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야아옹.

젓가락을 내려놓고 상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려고 할 때였다. 문득 들려온 울음소리에 화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무릎으로 걸어 대청마루 난간에 바싹 붙었다. 집사가 바쁜 틈을 타 정원이 있는 대청마루에 밥상을 차린 참이었다.

야아-옹.

역시나.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대청마루 아래에 앞발을 다소곳이 모으고 앉은 노란 줄무늬 고양이가 화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크게 벌리고 울었다. 그런 고양이를 향해 화수가 물었다.

“왜. 뭐.”

사람에게도 친화력이 없는 성격이 동물에게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배고픈가.”

야-아-옹.

머리를 긁적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화수의 말에 고양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길게 울었다. 낯선 사람을 봐도 도망치지도 않고 저리 뻔뻔하게 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인 모양이었다.

“맡겨뒀냐.”

하지만 그 순간 투덜거리던 화수의 눈에 유독 불러 있는 배가 들어왔다.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야-아옹.

주변을 살피던 화수가 재촉하는 울음소리에 조금 전 자신이 뒤적거리던 생선을 꼬리째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떨궈줬다. 기다렸다는 듯 고양이가 달려들었다.

“맛있냐?”

물론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순식간에 해체되고 사라지는 생선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였다.

“뭐 하는 거지.”

흠칫, 화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틀자 무표정한 얼굴의 리 샤오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 서늘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리 샤오라는 건 알아차렸다.

“냥이 밥 주는 중입니다만.”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던 화수가 이내 불퉁하게 대꾸한다. 괜히 쫀 것이 뒤늦게 억울해졌던 것. 낮게 가라앉은 리 샤오의 목소리는 잘못한 것이 없어도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보면 모르십니까. 일견 당당하기까지 한 화수의 태도에 리 샤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리 동물을 좋아하는 줄은 미처 몰랐군.”

“다들 바쁜 듯해, 제일 한가한 제가 준 것뿐입니다.”

“그래?”

“예!”

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 거냐고, 고개를 내젓는 화수에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람도 잘 먹지 못하는 것을 도둑괭이에게 통째로 넘겨주기에 꽤나 좋아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

이번엔 화수의 눈매가 찌푸려진다.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 리 샤오는 그런 화수를 지그시 응시했다. 묘한 침묵이 흐르고, 입술을 꾹 다물고 대치하던 화수가 이내 눈매를 더 구겼다. 그러고는 묻는다.

“이 집에서 키우는 냥이가 아닙니까?”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뻔뻔스러운 녀석 좀 보게.

휙, 화수의 고개가 대청마루 너머로 향했다. 어느 새 꽁치 한 마리를 다 먹어치운 녀석은 천연덕스럽게 뒷다리를 핥다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만 삐죽 들었다. 눈이 마주친 화수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제게 해를 가할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다시 뒷다리를 혀로 슥슥, 핥는 데 열중했다.

하.

기가 막혔지만 사실 멋대로 오해한 쪽은 화수 본인이었다. 그럼에도 사기를 당한 기분은 떨칠 수 없었다. 태연히 털을 고르고 있는 녀석을 미간을 찌푸린 채 응시하던 화수가 슬그머니 고개를 틀었다. 곧바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리 샤오와 눈이 마주쳤다.

“전 또 키우는 고양인 줄 알았죠.”

민망한 마음에 변명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려보지만 쉽게 넘어갈 리 샤오도 아니었다.

“홍매루는 손님 먹을 음식으로 먹이를 주는 모양이지?”

끙. 화수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별것도 아닌 일로 유난히 따지고 든다 싶었던 것. 아마도 저도 얻어먹는 주제에 멋대로 베푼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그리 생각하니 말이 좋게 나갈 리 없었다.

“어차피 제가 먹을 거였잖습니까.”

“…….”

“그걸 누굴 주든 제 마음이지요.”

“…….”

하지만 그런 기분도 받아치는 상대가 있어야 이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뾰족하게 굴던 화수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리 샤오에 슬그머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리 샤오의 시선을 받아치는 얼굴에서는 눈치를 살피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번엔 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 중 리 샤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 말이 제가 한 말에 대한 대답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누굴 주든, 땅바닥에 버리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팔짱을 낀 채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에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제가 말할 때는 저 정도로 싸가지 없게 말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리 샤오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퍽, 재수 없게도 말했다 싶었다.

“버린 적은 없습니다만.”

“…….”

피식. 불퉁하게 반박하자 리 샤오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반쯤은 기가 막혀서 웃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조금 전과는 공기 자체가 확연히 달라졌다. 괜스레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그제야 조금 속도를 늦췄다.

“먹기 싫어서 떠넘긴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

그럼? 눈으로 묻는 리 샤오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던 화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새끼를 뱄길래.”

“…….”

“맛있는 걸 먹게 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눈매를 가늘게 뜬 리 샤오가 화수의 뒤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런 리 샤오의 시선을 따라 화수의 시선도 움직인다. 녀석의 부른 배를 확인한 리 샤오가 도로 화수에게 시선을 주었다. 피할 틈도 없이 눈이 마주친 리 샤오가 한마디 툭, 하고 내뱉는다.

“동변상련인가?”

“…….”

하지만 그런 리 샤오의 빙글거리는 말에도 화수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리 샤오의 말대로, 녀석이 꼭 저 같았다. 이 집에서 키우는 녀석도 아니라는 말을 들으니 더더욱.

하지만 리 샤오가 한 말의 주어는 화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본인이 아니었다.

“나도 그것과 비슷한 기분이었거든.”

“……무슨.”

“맛있는 걸 먹게 해주고 싶었다고.”

“…….”

그제야 답지 않게 집요하게 따지고 든 이유를 알아차렸다. 단순히 제 것도 아닌 것을 멋대로 나눠준 화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화수의 입에 들어가야 할 것을 다른 녀석이 빼앗아 먹는 모습이 싫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걸 제 손으로, 한 번 망설임도 없이 홀랑 던져주는 광경을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 기가 막힐 수밖에.

“그러니까.”

“…….”

내내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화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먹어야 할 것을 딴 녀석이 먹어서 기분이 상하셨다는 말을 하고 있으신 겁니까?”

“맞아.”

사실 물으면서도 당연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는 반박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되돌아온 것은 태연한 긍정의 대답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문제는, 없지요.”

당황한 화수가 더듬거리면서도 일단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화수를 보며 리 샤오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사실 리 샤오는 지금까지 한 번도 뭔가가 아깝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평생을 부족함이 없이 살아왔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이라기에는 권력을 가지고도 늘 결핍에 허덕이는 이들이 차고 넘쳤다. 그런데 금은보화나, 값을 매길 수 없는 희귀한 물건도 아니고-심지어 그런 것에도 애착은 없었다- 고작 꽁치 한 마리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솔직히 리 샤오 본인도 몰랐다. 그러니 화수의 반응은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 때였다.

“화수 님, 물 가져-, 헉, 리 샤오 님, 오셨습니까.”

물을 가지러 갔다 돌아온 시종이 리 샤오를 발견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바람에 꽉 쥐고 있던 물 쟁반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힉.”

하지만 다행히 미끄러지기 전에 내뻗어진 손이 물그릇을 낚아챘다. 물 그릇은 리 샤오의 손에서 화수에게로 옮겨갔다.

“고맙, 습니다.”

열심히 물을 떠 온 것에 대한 감사인사가 리 샤오에게 향했지만 시종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제 할 일을 리 샤오가 대신하게 한 것이 불안하다는 듯 시중은 일을 찾아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런 시종의 눈에 차려놓은 밥상 위의 빈 그릇이 들어왔다.

“어? 생선 다 드셨네요.”

하필 그 빈 그릇이 생선이 놓여 있던 그릇이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아, 뭐…….”

지금 가장 피하고 싶은 주제가 다시 거론되는 것이 불편했던 화수가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그런 미묘한 분위기를 시종이 읽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밥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더 가져다 드릴까요?”

“…….”

“가져와.”

눈치를 보고 있는 화수 대신 리 샤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리 샤오의 신호에 시종이 신속하게 빈 그릇을 집어 들었다.

“사실 제가 발라 드린달 때 됐다고 거절하시기에 안 드실 줄 알았거든요.”

“…….”

예상치 못한 폭로-물론 시종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에 순간 화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이 리 샤오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를 바라보지만 그런 운 좋은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제 이마로 쏟아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왜 거절했지?”

빈 그릇을 든 시종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리 샤오가 툭, 하고 질문을 내뱉었다.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리 샤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냥, 제가, 발라 먹으려고요.”

화수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지만 오히려 그 대답에 리 샤오의 표정이 더 기묘해졌다.

“젓가락질 젬병이잖아.”

“…….”

“그런 주제에 생선을 발라 먹으려고 했다고?”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고 되묻는 눈빛에 미간을 찌푸린 화수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 발라주는 건, 내키지가 않아서요.”

결벽이 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말 그대로 내키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난감한 기색으로 대답하는 화수에 리 샤오가 다시 눈매를 좁힌다.

“혹시, 내가 발라 주는 것도 사실은 싫었던 건가?”

이래서 말하기 싫었던 건데. 화수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더 짙어졌다.

“불쾌할 수 있다는 걸 생각 못 했군. 그런 싫은 일은 말을 해도-”

“아닙니다.”

아마도 싫어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했던 일 때문에 화수가 말하지 못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잠시 그냥 이대로 오해하게 둘까, 생각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아니라지 않습니까.”

“…….”

“싫은 것을 참고 견딜 만큼 제가 그리 성격이 좋아 보이십니까.”

몇 번의 부인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리 샤오가 그 말에는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 때였다.

“리 샤오 님.”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소리와 함께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선 접시를 든 시종이 뒤따르고 있는 것을 보니 그가 돌아가서 집사에게 리 샤오의 귀가를 알린 모양이었다.

“대체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전혀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요.”

“바쁜 거 같기에.”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큰 행사라 챙길 것이 많다 보니.”

당황한 집사와 달리 리 샤오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반응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쓸 것 없어.”

오히려 시큰둥하기까지 한 반응에 집사가 기가 막히다는 듯 반박했다.

“신경 쓸 것 없다니요. 오늘 가장 신경 써야 할 분이 리 샤오 님이 아닙니까.”

“그랬나?”

“그럼요. 오늘 행사 자체가 리 샤오 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까.”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이 바로 리 샤오가 태어난 생일날이었던 것. 물론 거기에 크게 의미를 두는 것은 정작 리 샤오 본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여긴 내가 맡을 테니.”

이번에도 리 샤오가 시종의 손에 들린 생선 접시를 빼앗듯이 건네받았다.

“그만들 물러가도 좋아. 너도.”

그러더니 집사뿐만 아니라 화수의 수발을 들던 시종까지 물러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 하지만 도련님-”

“챙길 것이 많다며.”

“물론, 그거야 그렇지만.”

“그러니 그만들 가봐. 이 집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은, 두 번째로 한가한 사람이 알아서 할 테니.”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미 몇 주 전부터 준비를 해왔지만 당일에 해치워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그 일을 해결하는 데 가장 쓸모없는 화수를 두 번째로 쓸모없는 리 샤오가 맡아주는 것만큼 효율적인 일도 없었으니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

물론 그렇다고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어 괜스레 한 번 더 묻는 집사에 리 샤오는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을 내딛었다. 탁. 접시를 상 위에 올려놓는 것을 지켜보던 집사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며 덧붙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알겠으니까.”

결국 리 샤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 음성으로 리 샤오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아차린 집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시종을 향해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후다닥 물러서는 시종을 따라 집사도 걸음을 내딛었다.

“젓가락.”

두 사람의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화수의 맞은편에 앉은 리 샤오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뒤늦게 리 샤오가 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화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쉽게 물러설 리 샤오도 아니었다.

“왜. 내가 아니면 싫다던 것 아니었나?”

“그런 말은 안 했습니다만.”

“그럼 그게 무슨 뜻이지?”

“…….”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지는 화수와 달리 리 샤오는 느긋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리 샤오를 노려보던 화수가 탁, 하고 젓가락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피식, 바람이 이는 소리가 났다. 모로 고개를 꼬고 있는 화수의 목덜미가 벌겠다. 리 샤오의 손이 천천히 앞에 놓인 젓가락을 쥐었다.

기분이 좋았다. 조금 전 기분이 가라앉았던 것이 거짓말처럼. 고작 다른 사람은 내키지 않는다는 그 말 한마디에 자꾸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치게 아름다운 미소였다. 정작 그리 리 샤오의 기분을 좋게 만든 화수는 아쉽게도 고개를 튼 채 부채질을 하느라 그 미소를 놓치고 말았지만.

* * *

“리 샤오 님.”

장지문 너머에서 리 샤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름만 불린 것이나 무엇을 재촉하는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이미 세 번째 부름이었다.

“그만 가보세요.”

결국 듣다 못한 화수가 그 재촉을 거들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잘도 말하는군.”

씹어 삼키듯 되뇌는 리 샤오에 화수가 어깨를 으쓱인다.

“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그 말에는 리 샤오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 말대로 화수의 입덧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요 며칠 상태가 좋아 잠시 잊고 있었다. 낮에 먹은 밥을 모두 게워내고도 한참을 화장실에서 나오질 못하다가 겨우 방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리 샤오 님.”

낯익은 목소리가 추가되었다.

“정무총감께서 곧 도착하신다 합니다.”

비교적 평소와 다름없는 속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말에 담긴 조급한 기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무총감이라는 말에는 리 샤오도 더는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다. 화수를 지그시 응시하던 리 샤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제복 상의를 꺼내 팔에 꿰었다.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린 제복은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그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옷을 본 적이 있는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작 리 샤오 본인은 전혀 아쉬운 기색이 없어 보였지만.

“리 샤오 님.”

내내 얼른 가보라고 등을 떠밀던 화수가 불쑥, 리 샤오의 이름을 불렀다. 막 문고리를 붙들었던 리 샤오가 고개를 틀었다.

“왜, 뭐 필요한 거라도-”

“생신, 축하드려요.”

“…….”

리 샤오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런 말을 들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괜한 짓을 했나. 멋쩍어진 화수가 이불을 끌어 올렸다. 다행히 머리를 다 덮기 직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군.”

안타깝게도 뒤집어쓴 이불 탓에 리 샤오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괜스레 달아오르는 볼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드륵,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닫히는 문틈으로 들어오던 소란스러운 소리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적막이 찾아왔다.

하지만 화수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숨을 죽이고, 바깥 소리에 집중했다. 살짝 흥분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소란이 가까워지지는 않음을 확인한 후에야 화수는 베갯잇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사각, 손끝에 종이가 닿았다. 손끝에 닿은 그것을 꺼내 펼쳤다.

대체, 이건 어떻게 알아낸 거래.

작은 종이 위에 깨알같이 그려놓은 그림은 분명 리 샤오의 집 구조였다. 심지어 이곳에서 몇 달이나 지낸 저도 다 알지 못하는 이 집의 모든 공간이 그 안에 모두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유독 눈에 띄는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 별다른 설명은 없지만 그곳이 밖으로 나가는 통로일 거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사내를 의심한 것이 무색하게도 진 사장이 보낸 쪽지가 분명했다.

화수가 펼친 쪽지를 도로 접었다. 접힌 모서리가 너덜너덜했다. 주먹을 꽉 쥔 화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순간적으로 눈앞이 핑 돌았다. 하필이면. 내내 상태가 좋다가, 심지어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입덧이 다시 심해지기 시작한 것은 화수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마치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라도 하듯이.

하지만 화수는 고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냥 다 관두고 이부자리에 도로 눕고 싶었다. 허나 그럼에도 화수는 고집스럽게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진도현에게 물을 것이 있었다.

아.

걸음을 내딛던 화수가 멈칫했다. 시선이 벽 한쪽에 걸린 자신의 양복에 닿아 있었다. 기껏 시간을 맞춰 완성했지만 무용지물이 된 옷이었다. 차라리 이럴 줄 알았다면 제 것이 아닌 리 샤오의 것을 완성하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후회해보지만 사실 별 소용 없는 일이었다.

부스럭.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화수가 종이봉투를 꺼냈다. 둘둘 말아놓은 포장종이를 펼치자 광택이 남다른 넥타이가 드러났다. 지난번 가게에 가봉을 하러 갔을 때 무려 카이에게 돈까지 빌려서 준비한 생일선물인데 주는 것을 잊었다. 어차피 오늘은 양복이 아니라 제복을 입었으니 늦게 주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화수가 다시 포장종이를 덮었다. 그리고 원래 있던 안주머니 안쪽에 얌전히 집어넣은 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확인만 하고 돌아올 거니까. 선물은 다녀와서 주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화수가 조금은 가벼운 걸음을 내딛었다.

스륵. 장지문을 연 뒤 가만히 숨을 죽였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화수는 발을 내딛었다. 소리 없이 문이 닫혔다. 적막이 찾아왔다.

달조차 뜨지 않은 그믐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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