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래서.’
옴폭 들어간 등줄기를 손끝으로 타고 내려오던 진도현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각인은 언제쯤 할 생각이야?’
허리를 지나면서는 손을 뒤집어 둔덕으로 미끄러뜨리듯 내려왔다. 살집이 있는 엉덩이를 손등으로 가볍게 쓸자 화수가 간지러운지 몸을 뒤척인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가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진도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끄러진 손가락이 엉덩이골을 파고들었다.
‘하지 마.’
분명한 의도를 담고 있는 손길에 그제야 엎드려 있던 화수가 상체만 뒤로 비틀어 경고했다. 미간을 찌푸린 화수와 달리 그와 마주한 진도현의 입꼬리는 위로 말려 올라가 있었다.
‘대답.’
화수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평소엔 늘 너그럽던 사내가 가끔 집요해질 때가 있었다. 그게 아무래도 지금인 모양이고. 작게 한숨을 내쉰 화수가 입을 열었다.
‘안 해.’
뭐, 굳이 말 안 하고 버틸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대답이 진도현에게는 다른 의미로 들린 모양이었다.
‘그리 고집을 피운다 이거지?’
‘각인 같은 거 할 생각 없다고.’
‘…….’
황급히 덧붙이는 화수에 그제야 안 한다는 말이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는 걸 진도현도 알아차렸다. 계속 그렇게 고집을 피워보라고, 할 때조차 빙글거리고 있던 진도현이 얼굴을 굳혔다. 물론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기 위해 도로 상체를 돌려버린 화수는 보지 못했지만.
‘왜?’
툭, 툭, 재를 턴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을 때였다.
‘왜 각인을 안 해?’
‘……왜긴.’
진도현의 손에서 힘이 빠진 틈을 타 화수가 슬쩍 몸을 아예 뒤집었다. 뒤통수를 응시하고 있던 진도현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화수도 진도현의 기분이 조금 전과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화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쭉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훅, 하고 내뿜으며 덧붙였다.
‘필요 없으니까.’
‘…….’
‘혹 임신할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피임약은 확실히 먹고 있으니까.’
묘하게 진도현의 굳은 표정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뿌연 연기를 뚫고 나온 손이 화수의 입에 물린 담배를 가져갔다.
‘무슨 피임약?’
그렇게 가져간 담배를 진도현이 깊이 빨았다. 홀쭉해진 볼에 음영이 졌다. 사내다운 강한 턱 선이 도드라졌다.
‘누가 처방해준 것이냐고.’
채근하는 진도현에 슬그머니 제 턱 선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화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몰라.’
‘…….’
진도현의 눈매가 못마땅한 듯 가늘어졌지만 화수도 어쩔 수 없었다.
‘한조가 다른 어른들 것 지어 오면서 내 것도 지어다 줬어. 너무 어린 아이에게는 피임약을 지어 주지 않으니까.’
대답하기 싫어서 얼버무린 것이 아니라 정말 몰라서 그리 대답했다.
‘얼마나 어렸을 때부터 먹었길래.’
‘글쎄, 열 살? 계집이 아니라 달거리 같은 걸 하지 않으니까, 손님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먹었지.’
‘…….’
그 말인즉, 화수는 열 살쯤부터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유곽에서 계집아이도 아닌 사내아이를 부러 돈을 주고 사 오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여물지 않은 어린아이들을 선호하는 사내들에게 던져주기에는 사내아이가 계집아이보다 잘 망가지지 않고 뒤끝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는 진도현이지만 웃기게도 그 대상이 화수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왜.’
눈치 빠른 화수가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갑자기 내가 불쌍해졌어?’
‘조금?’
진도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가끔은 그것이 잔인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 그래서 화수는 진도현이 편했다. 적어도 사탕발림으로 저를 이용해먹을 사내는 아니었으므로. 눈꼬리를 접은 화수가 가볍게 덧붙인다.
‘동정할 거면 돈으로 줘.’
‘그럴까?’
화수의 입술에 담배를 물려주며 진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도현은 완전한 진심이었지만 화수는 농담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대꾸 없이 피식, 거리는 입술로 하얀 연기가 새어 나왔다.
‘내일 데리러 올게.’
‘……’
무슨. 가늘게 뜬 눈으로 영문을 묻는 화수에게 진도현이 대꾸했다.
‘이젠 다 큰 어른이니까, 피임약을 지어 주지 않는 일은 없겠지.’
‘…….’
암호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진도현이 새하얀 손가락에서 담배를 빼앗아 가 머리맡에 놓인 재떨이에 눌러 껐다. 뒤늦게 진도현의 그 말이 의원에게 데려가주겠다는 말임을 알아차린 화수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웃음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맞닿은 사타구니가 델 듯이 뜨거웠다. 진도현의 말대로 다 큰 어른인 화수는 두 다리를 벌려 진도현의 엉덩이를 제 쪽으로 더 바싹 당겼다. 물론 다 크지 않았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 * *
아.
화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뒤늦게 자신의 두 발이 맨발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다시 돌아가 현관에 있는 신발을 가지고 돌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도에 진 사장이 표시해놓은 위치는 현관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어쩔 수 없지.
빠르게 포기한 화수가 맨발로 대청마루를 내려섰다. 작은 돌들이 발바닥에 박혀들었다. 윽. 새어 나오는 신음을 눌러 참으며 고집스럽게 걸음을 내딛었다. 최대한 닿는 부위를 줄이기 위해 발가락을 세워 걷다 보니 본의 아니게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정반대편에 몰려 있어 굳이 발소리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말이다.
“힉.”
순간적으로 물컹한 것이 종아리에 닿는 느낌에 화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어두운 데다 자꾸만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기분 때문에 뒤쪽만 신경 쓰다 발밑을 잘 살피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꽤나 큰 소리였지만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숨도 죽인 채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기라도 할까 귀만 쫑긋 세우고 있던 화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 종아리에 닿았던 존재가 생각난 것은 그때였다.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떨궜던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야아-옹.
제 딴엔 아는 얼굴을 봐서 반갑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려 우는 노란 태비 고양이를 보고 있으려니 기가 막히고, 억울한 기분마저 드는 화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녀석에게 따져 물을 순 없어-묻는다고 해서 알아들을 리도 없고- 그저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아.
빠르게 뛰는 심장께를 문지르며 화수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뒤쪽을 한 번 더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앞으로 향하던 화수의 발걸음은 몇 걸음 나가지 못하고 도로 멈춰 섰다. 화수의 발이 멈추자 따라오던 녀석이 쪼르르 달려와 그의 종아리에 다시 한 번 몸을 비볐다. 애교가 많지도 않은 녀석이 이리 자꾸만 엉겨 붙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줄 게 아무것도 없어.”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런 것이 말 못 하는 동물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갸웃.
살짝 고개를 기울였던 고양이가 다시 한 번 화수의 종아리에 이마를 비비고 꼬리를 스쳤다. 이야기를 들어줬으니 얼른 먹을 것이나 내놔라, 인간. 그런 뜻이었다. 화수의 얼굴 위로 난처한 기색이 번진다.
“봐.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잖아.”
아예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여주자 그제야 화수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낼 것이 없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내내 발치를 빙빙 돌던 고양이가 화수의 앞에 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마치, 아무것도 없으면 가서 가져오면 되잖아,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지금은 안 돼. 조금 있다가 가져다줄게. 꽁치보다 더 맛있는 걸로.”
대체 왜 녀석에게 이런 사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화수는 매정하게 녀석을 제치고 갈 수가 없었다. 녀석의 부른 배가, 푸석한 털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 약속할게.”
사정하는 화수를 물끄러미 보던 녀석이 미련 없이 일어나 휙, 가버린다. 화수의 말을 알아들었다기보다는 눈앞의 사람에게서 뭔가를 얻어내기는 글렀음을 깨달은 것 같았지만 어쨌든 화수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사박사박.
이후 화수는 잰걸음으로 담벼락을 향해 걸었다. 또 방해꾼이 나타나 제 앞을 가로막기 전에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담벼락에 바싹 붙어 아래쪽을 살폈다. 쪼그리고 앉자 배가 눌려 숨 쉬는 것이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담을 따라 더듬자 작은 판자가 덧대어진 곳이 눈에 들어왔다. 낑낑거리며 판자를 치우자 커다란 구멍이 드러났다. 원래는 물이 빠지는 용도였을 물구멍이 사람 하나 정도는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로 커져 있었다.
이 집 개구멍은 또 어떻게 알았대.
기가 막혔지만 기발한 방법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문으로 빠져나가는 방법은 사람들 눈에 띌 가능성이 높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화수가 이내 구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무릎으로 기어 담을 통과하다 이내 그대로 멈췄다. 씨발. 화수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리고 그 때였다. 설상가상 담 너머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 것은.
“화수야?”
숨을 죽인 채 납작 엎드려 있던 화수가 그제야 몸을 조금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밖에서 들려온 소리는 분명 자신이 아는 이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나와도 돼.”
제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여전히 화수가 움직이지 않자 의아했던지 진도현이 재촉하듯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움직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미간을 좁혔던 진도현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나 진 사장이야.”
“알아.”
“아는데 왜 그러고 있어.”
“……ㄲ어.”
“뭐?”
“꼈다고!”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 진도현에 화수가 속삭이듯 외치자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침묵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 화수가 눈매를 찌푸린다. 그러니까 조금 전 열심히 기던 화수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부른 배가 벽에 끼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짜증 섞인 화수의 목소리에 진도현이 구멍 안으로 손을 내뻗었다. 그 손을 마주 잡자 강한 힘이 화수를 잡아당겼다.
지직, 하고 등에서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화수는 오히려 배를 더 바싹 위쪽으로 붙였다. 물론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무의식이었다.
“괜찮아?”
밖으로 완전히 몸이 빠져나온 뒤에 배를 먼저 만져본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도.”
배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화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도현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등이 찢어졌잖아.”
“아.”
화수가 뒤늦게 미간을 찌푸린다. 진도현의 지적을 들은 뒤에야 등에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좀 긁힌 것뿐이야.”
힐끗 제 등을 확인한 뒤 화수가 호들갑 떨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으나 진도현의 구겨진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진도현의 시선은 화수의 부른 배에 박혀 있었다. 등만 유독 심하게 긁혔다 했더니, 진도현도 그 이유를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진도현이 입고 있던 양복 상의를 벗었다.
“됐어.”
“일단 입어. 치료는 가서 하게.”
뒤늦게 그 이유를 알아차린 화수가 고개를 내저으며 거절했지만 이미 양복 상의는 그의 어깨 위에 걸쳐진 뒤였다. 화수도 더는 실랑이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허비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물어볼 게 있어.”
화수가 급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진도현은 화수의 말을 무시한 채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일단 차에 타. 이야기는 나중에.”
팔을 붙잡혀 진도현이 이끄는 대로 몇 걸음 따라가던 화수가 이내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앞만 보고 걸음을 내딛던 진도현이 고개를 틀었다. 눈이 마주치자 화수가 진도현을 향해 말했다.
“난 지금 도망치려고 나온 게 아니야.”
“…….”
진도현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번진다. 도망치려고 나온 게 아니라니. 리 샤오에게 억지로 잡혀 있는 것이라고 여겨, 당연히 제가 도망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진도현으로서는 지금 화수의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화수는 태연했다.
“진 사장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나왔어. 그냥 그것만 대답해주면 돼.”
그 이상 그 이하의 목적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여기서 만난 의원 말이 곤으로 태어난 천족의 사내는 피임약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하잖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서.”
“…….”
“나 분명 제대로 된 의원에게 진료를 받았잖아. 진 사장이 직접 데려가줘서, 피임약도 받았고.”
“…….”
“그 의사가 돌팔이였던 거지?”
“…….”
“진 사장은, 몰랐던 거지?”
대답이 없는 것으로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화수는 고집스럽게 되물었다. 내내 눈매를 일그러트린 채 입을 다물고 있던 진도현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타. 가서 다 얘기해줄 테니까.”
“그냥 여기서 얘기해.”
“여기서 하기엔 긴 얘기야.”
“…….”
“화수야.”
“…….”
“이러고 있다가 리 샤오 부장 눈에라도 띄면 어떻게 될 것 같아.”
“…….”
“좋아. 멀리는 가지 않을게. 일단 여기만 벗어나. 얘기 끝나면 여기로 얌전히 모셔다 놓을 테니까.”
“…….”
항복이라는 듯 두 손까지 들어 보이는 진도현에 내내 버티던 화수도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진도현의 말대로 여기서 이러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도망치다 걸린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여기만 벗어나는 거야.”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인 진도현이 손으로 차 쪽을 가리켰다. 불을 끈 채 대기하고 있던 검은 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였다.
잔치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리 샤오가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 전에만 돌아오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한 화수가 차가 있는 쪽으로 무거운 걸음을 내딛었다.
탁.
화수가 탄 쪽 문을 닫은 진도현이 차체를 돌아 반대쪽으로 올라탔다.
“출발해.”
진도현이 차에 오르자 바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짝 어지러운 기분에 화수가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색색, 가쁜 숨을 내쉬는 화수를 응시하던 진도현이 불쑥 물었다.
“낯색이 왜 그 모양이야.”
내내 묻고 싶었던 물음이었다.
“몸은 왜 이렇게 말랐고.”
재력이라면 차고 넘치는 집에서 밥도 제대로 안 먹였는지 본래도 살집이 없던 팔다리가 아예 바짝 말라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늘어져 있던 화수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궁금하면 진 사장도 애를 가져보든가.”
“…….”
피식. 상황도 잊고 진도현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할 말은 하는 성격은 하나도 안 죽어 기가 막히면서도 안심이 되기도 했던 것.
끼익.
천천히 속도가 붙던 차가 갑자기 멈춰 선 것은 그 순간이었다. 급정거를 한 탓에 두 사람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진도현이 균형을 잡으면서 급히 화수의 가슴께를 손으로 눌렀다. 기운 없이 늘어져 있던 탓에 만약 진도현의 손이 아니었다면 화수는 그대로 앞좌석까지 고꾸라졌을 터였다.
“괜찮아?”
“……아마도.”
순간적으로 굳었던 화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수의 대답을 확인한 뒤에야 진도현이 고개를 꺾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기사를 향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차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인영人影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달리는 차 앞을 가로막았단 말인가. 기가 막혀하며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씨발.”
미간을 찌푸린 화수가 욕설을 내뱉었다. 차에 바짝 선 탓에 얼굴을 확인하는 데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던 진도현과 달리 화수는 단숨에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가슴께에서 발끝으로 단숨에 떨어져 내렸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는 것은커녕 눈을 깜빡이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한계까지 당겨진 공기가 그대로 몸을 찢어버릴 듯했다. 숨 쉬는 것조차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저벅저벅.
그러는 사이, 차 뒷좌석으로 걸어온 상대가 화수가 앉은 쪽 차 문을 열어젖혔다. 눈이 마주친 리 샤오가 나직이 물었다.
“네 발로 나올래, 내가 직접 끌어내릴까.”
물론 화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제가.”
입을 벌리는 순간,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전속력으로 뜀박질을 한 직후의 사람처럼 입을 벌리자 쏟아져 들어오는 숨에 온몸이 들썩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화수는 고집스럽게 입을 열었다. 적어도 리 샤오에게 끌려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내리지요.”
헐떡이고 싶은 기분을 겨우 누르며 화수가 몸을 틀었다.
문 밖으로 발을 내딛자 그제야 버티고 있던 리 샤오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겨우 한 발짝 정도의 간격이 생겼을 뿐인데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살 듯했다. 물론 조금 전에 비해 그나마 살 것 같아졌다는 뜻이지 멀쩡한 상태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런 상태라는 걸 증명하듯 차에서 내리던 화수가 순간 휘청였다.
“화수야!”
그 모습을 본 진도현이 급히 화수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그 앞을 리 샤오가 가로막았다. 그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확인이 불가능했다. 미간을 찌푸린 진도현이 제 쪽 차 문을 열어젖혔다.
“화수야.”
튀어나오듯 차 밖으로 나온 진도현의 어깨가 조금 주저앉았다. 다행히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처럼 보였던 화수는 차체를 짚어 균형을 잡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화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 샤오에게는 그런 화수의 낯색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굳은 얼굴의 리 샤오가 차에서 화수를 떼어냈다. 거친 손길에 다시금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화수를 본 진도현이 항의의 뜻으로 리 샤오의 이름을 불렀다.
“리 샤오 님!”
진도현이 제 이름을 불러도 리 샤오의 시선은 화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진도현이 다시 한 번 입을 열려는 순간 굳게 닫혔던 리 샤오의 입술이 열렸다.
“카이.”
물론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화수를 응시한 채였다.
“예, 부장.”
그 이름이 불리기 전까지는 함께 있는 줄도 몰랐던 카이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데리고 들어가.”
“……리 샤오 님은 같이 안 가십니까.”
“…….”
답지 않게 카이가 리 샤오의 명령에 머뭇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물론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 침묵이 주제넘게 상관하지 마라, 라는 의미라는 걸 알아차린 카이가 곧바로 잘못을 빌었다. 물론 그 사과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번엔 화수가 먼저 움직였다. 그 옆을 카이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제 어깨를 짚으셔도 됩니다.”
카이가 덧붙였지만 화수는 고집스럽게 제 힘으로만 걸었다. 진도현이 앞서가는 화수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 사이를 리 샤오가 가로막았다. 마치, 눈으로 보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진 사장.”
리 샤오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저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단 말이지. 눈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리 샤오와 눈이 마주친 적이 처음이라는 걸. 그제야 좀처럼 겁먹는 일이 없는 화수가 이상하게 굴었던 이유를 조금은 알 듯했다.
“감히, 내가 있는 집에서 내 것을 훔쳐가려고 했단 말이지.”
“…….”
그의 입에서 나온 고저 없는 목소리가 퍽 이질적이었다. 저런 눈을 하고 저리 차분한 음성을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진도현은 타고난 장사치였다. 제아무리 어려운 거래 상대라도 진도현이 마음만 먹으면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 진도현이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도 혀가 잘리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는 건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아는 바였으므로.
“오늘은 내가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은 상황인 걸 감사히 여겨.”
“…….”
나직이 덧붙인 리 샤오가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이제는 마주한 눈빛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진도현은 여전히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태연한 척 버티던 얼굴과 달리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니, 화수 님이 어째서 이쪽에서 나타나십니까.”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집사가 들어오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의아함은 그런 화수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카이를 발견하고 더 짙어졌다.
“리 샤오 님과 함께 나가셨던 겁니까.”
“…….”
카이가 동행한 것을 보고 리 샤오도 함께 움직인 모양이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한 집사가 되물었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카이 역시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였을 뿐, 꾹 닫힌 입술은 여전했다. 다행히 집사의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헌데, 신도 없이 맨발로 나가셨습니까?”
“…….”
그리 말하는 집사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화수의 발치였다. 집사를 따라 카이의 시선도 아래로 향했다. 기가 막혀하는 두 사람의 시선에 민망해진 화수가 한쪽 발로 다른 쪽 발을 덮었다. 물론 그런다고 시커메진 발이 감춰지지는 않았지만.
축축한 정원의 흙을 밟고 다닌 탓에 발바닥뿐만 아니라 발가락, 발톱까지 흙투성이였다. 그 발로 다른 발을 비빌 때마다 마른 흙이 후드득 떨어졌다.
“가만히! 가만히 계십시오.”
그것을 목격한 집사가 기겁한 얼굴로 소리쳤다.
딱. 고개를 돌린 집사가 물수건을 가져오라는 신호를 보내자 옆에 서 있던 시종이 후다닥, 달려간다.
“그 발로는 절대 못 들어오십니다.”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집사가 손가락을 흔들며 경고했다. 다른 때도 아니고 귀한 손님들이 잔뜩 와 있는데 이런 더러운 발로 마룻바닥을 밟고 다니게 둘 순 없었다. 물론 평소라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때였다.
“집사.”
불쑥, 귀에 콱 박혀 들어오는 리 샤오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빠르게 뒤를 돌아보는 카이와 달리 화수는 고개도 움직이지 못하고 정면만 응시했다.
“아무리 리 샤오 님이라도-”
“창고 열쇠.”
“글쎄, 창고도 안…… 예?”
당연히 화수의 편을 들어 그냥 들여보내라는 명령을 하리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리 샤오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집사에게 리 샤오가 다시 물었다.
“없어?”
“없을 리가요.”
“그럼 내놔.”
발끈해서 곧장 대답하는 집사에게 리 샤오가 손을 내밀었다. 집사가 천천히 허리춤에 걸어놓은 열쇠꾸러미를 풀었다.
“창고 열쇠는 뭐 하시려고요.”
“…….”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건네주는 열쇠꾸러미를 낚아챈 리 샤오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걸음을 내딛는 리 샤오의 손에는 화수의 팔이 붙들려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아놓은 마룻바닥에 고스란히 발자국이 남았다. 그것을 보는 집사의 얼굴 주름이 깊어지긴 했지만 입은 꾹 닫혀 있었다. 그제야 집사도 상황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뒤따르는 카이를 향해 눈으로 물었지만 제 작은 주인만큼이나 카이도 말이 없는 사내였다. 흘낏, 앞서가는 리 샤오를 보며 입을 꾹 다무는 카이에 집사도 조용히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끼이익-!
별로 힘도 들이지 않은 것 같은데 집 대문만큼이나 묵직한 창고 문이 단숨에 열렸다. 마치 종잇장처럼 젖혀지는 두꺼운 나무 문을 보고 있으려니 다시금 리 샤오가 몸을 쓰는 데 능한 사내라는 게 자각됐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만 보면 지략을 쓰는 쪽에 더 능할 것 같지만 리 샤오는 몸을 쓰는 쪽에 더 익숙했다.
“리 샤오 님?”
그렇게 창고 문을 연 리 샤오가 질질 끌고 온 화수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반항은 하지 않았다. 힘으로 당해낼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으므로 괜한 짓은 하지 않는 편이 현명했다. 오히려 그런 리 샤오를 말리고 든 것은 본인이 아닌 집사였다.
“대체 지금 뭐 하시는-”
끼이익-!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집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창고 문이 도로 닫혔다.
철그렁.
문을 닫은 것뿐만 아니라 큰 자물쇠도 채웠다.
“절대 열어주지 마.”
커다란 열쇠꾸러미를 건네준 뒤 리 샤오는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잠긴 창고 문과 리 샤오, 그 둘을 번갈아 보던 집사가 뒤늦게 리 샤오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잰걸음으로 뒤따르는 집사가 평범하게 걷는 리 샤오보다 느렸다.
“이게 대체, 무슨 영문입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말로 하세요. 아이를 가진 이를 창고에 가두다니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여름이라고는 하나 온기 하나 없는 창고에서 지내는 것은 임산부가 아니라도 힘겨운 일이었다. 집사가 멀어지려는 간격을 힘겹게 유지하면서 어떻게든 리 샤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썼으나 소용은 없었다.
“아예 없어지는 것보다는 나을 거 아니야.”
“그게 무슨-”
뇌까리는 리 샤오의 말에 힘겹게 내딛어지던 걸음이 멈췄다. 집사의 얼굴 주름이 더 짙어졌다.
“설마.”
이미 저만치 멀어진 리 샤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도 아니었다.
방에 죽은 듯이 누워 있어야 할 화수가 난데없이 현관을 열고 들어왔던 것, 흙투성이가 된 두 발과 옷가지. 그것들만 조합해도 결론은 한 가지였다.
요 며칠 유난히 사이가 좋다 했더니.
리 샤오의 기분이 저리 엉망인 이유도 그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터였다. 믿고 있던 도끼에 찍히는 발등이 더 아픈 법이니까. 주름진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얗게 질렸던 화수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하지만 방법은 없었다. 그저, 지금은 리 샤오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빨리 풀리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끼익.
가만히 팔을 내뻗은 화수가 손에 닿는 문을 힘껏 밀었다. 리 샤오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여닫았는데 저는 온 힘을 다 짜내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뭐, 그럴 줄 예상 못 한 것도 아니라 화수는 미련 없이 문에서 떨어졌다.
사방이 막힌 깜깜한 창고였지만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바로 앞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새 발치까지, 손을 뻗는 정도까지, 그리고 창고의 벽까지 천천히 보이는 시야의 범위가 늘어났다.
이 정도면 양호하네.
주변을 둘러보던 화수가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창고라고는 하지만 쌀포대며, 갖가지 물건들이 잘 정돈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물건들을 대충 처박아 놓고 한 번도 정리한 적이 없어 한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홍매루의 창고와는 차원이 달랐다. 아마도 제대로 관리되고 보살펴지는 공간과 누구 하나 돌보는 이 없는 공간의 차이리라.
휘휘, 내뻗은 두 팔을 휘저으면서 천천히 걸음을 내디딘다. 더듬던 손에 겹겹이 잘 쌓아놓은 쌀포대가 닿았다. 벽을 더듬듯 하며 쌀포대를 따라 천천히 몸을 낮춘 화수가 쌀포대를 등받이 삼아 자리에 주저앉았다.
툭.
머리를 젖히자 뒤통수가 푹신한 포대에 닿았다. 짚으로 만든 포대는 솜이불만큼은 아니라도 몸을 맡기기에 나쁘지 않았다. 조금 너그럽게 봐준다면 안락한 기분마저 들었다.
피식.
그런 생각을 하던 화수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안락하다는 생각을 하다니. 여기에 자신을 가둔 리 샤오가 들으면 기막혀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화수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만약 그대로 방으로 돌아가 리 샤오와 같은 공간에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아찔했다.
하필 그때 딱 나왔을 게 뭐람.
조금만 일찍 나오거나, 아니면 조금만 늦게 나왔어도 그렇게 떡하니 조우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여간 운도 없지. 사실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운이 좋았던 적이 손에 꼽았다. 그 꼽는 손에 당연히 리 샤오가 걸려 있었다.
현행범으로 딱 맞닥뜨렸으니,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물론 변명할 기회가 있었다고 해도 아마 화수는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가끔은 진실이 더 현실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도망이라도 칠걸.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만약 리 샤오가 들었다면 조금 전 보았던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았을 테지만 어차피 이곳엔 리 샤오가 없었다. 아무리 기가 막힌 생각들을 잔뜩 해도 이곳엔 저 혼자였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피곤해.
화수가 눈을 감았다.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기력마저 닥닥 긁어 써버린 기분이었다. 실제, 그렇기도 했고. 속이 울렁거리고, 그 와중에 또 배도 고팠다.
좀 봐주라.
입덧이라는 것은 고약해서 배 속에 음식물이 들어오면 다 게워내버리면서도 또 끼니때가 되면 배가 고팠다.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맹렬하게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고, 속이 쓰린데, 그럼에도 배가 고팠다.
“하려면 한 가지만 하던가.”
기가 막히다는 듯 속삭이는 화수의 시선이 아랫배를 향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배 속의 존재에게 말을 거는 거였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수는 식욕이 유난히 없는 편이었으니까. 못 먹고 자란 주제에 늘 먹을 것에 시큰둥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도 맛좋은 술 몇 잔과 잘 구운 화전 몇 점이 다였다. 제가 아니니 맹렬한 식탐의 주인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녀석은 제가 아니라 리 샤오를 닮은 모양이었다.
“화전 먹고 싶다.”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을 더듬다 보니 갑자기 화전이 먹고 싶어졌다. 얇게 빚은 찹쌀가루를 기름에 지진 뒤, 진달래꽃을 붙여서 다시 지져내는 것을 화수는 즐겨 먹었다. 이미 진달래꽃은 진 지 오래니까, 배꽃이나 매화꽃을 붙여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기름에 지저 반지르르해진 하얀 떡살을 떠올리는 순간, 배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마치 나도 그것이 먹고 싶다고 반응이라도 하듯. 화수가 미간을 찌푸린다.
“어차피 먹어도 게워낼 거잖아.”
퉁명스럽게 핀잔을 하면서도 아랫배를 문지르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처음에는 말을 거는 것도 어색했는데 어느새 점점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있었다. 물론 화수도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깜깜한 어둠 속이라 말을 거는 것이 조금은 더 편했는지도 모른다.
등을 대고 앉아 있던 화수가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이제는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자꾸만 몸이 가라앉는다. 구걸하는 거지도 아니고 맨 땅바닥에 머리를 대고 눕는 모습을 아마 집사가 보았다면 기겁을 했겠지만 역시나 이곳엔 자신뿐이었다.
제법 괜찮잖아. 그렇게 되뇌는 화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바닥에 모로 누운 화수가-이제는 부른 배 때문에 똑바로 누우면 숨이 찼다- 무릎을 당겨 안았다. 안락한 기분이 드는 자세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감았다기보다는 저절로 덮였다는 말이 더 맞았다.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서야 자신의 기력이 다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나직이 입술을 열었다. 제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기력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목소리였다.
“나가게 되면, 먹게 해줄게.”
물론 나가게 되면, 말이지만. 잊지 않고 조건을 덧붙인 화수가 그제야 겨우 버티고 있던 정신을 내려놓았다. 이대로 몇 날 며칠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좋을 텐데. 그냥 이대로 잠들어 있다가 리 샤오의 화가 조금 누그러지면 그때 깨어나고 싶었다. 물론 그런 운 좋은 일이 자신에게 있을 리 없었지만.
색색, 고른 숨소리가 시커먼 어둠 속으로 내려앉았다.
* * *
“아, 리 샤오 님.”
복도를 가로지르던 리 샤오를 발견하고 시종이 다행이라는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러고는 잰걸음으로 다가서며 고한다.
“시키신 대로 이것을 방으로 가져갔는데 화수 님이 안 계셔서요.”
천천히 리 샤오의 시선이 아래로 떨궈졌다. 시종이 들고 있던 쟁반에 얌전히 놓인 것은 바로 딸기 쇼트 케이크였다. 보통의 것과는 달리 딸기 젤리가 두 개나 올려진 케이크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낮게 내뱉었다.
“버려.”
“예? 하지만-”
사실 주인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시종이 보아온 리 샤오는 자신의 기분에 거스른다고 부리는 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주인이 아니었던 터라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귀한 것을 버리라는 말을 귀로는 들었지만 머리로 납득할 수 없었다.
퍽.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때는 벽에 부딪힌 요란한 소리를 들은 뒤였다. 손님을 맞기 위해 티끌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를 해놓은 복도가 여기저기로 튄 크림과 으깨진 빵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반사적으로 벽 쪽으로 시선을 돌린 시종의 등 뒤에서 다시 한 번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리라고.”
“…….”
그제야 시종도 깨달았다. 지금 리 샤오의 무표정한 얼굴은 평소 것과는 차원이 다른 상태임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게 있는 사이 리 샤오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내딛었다.
“리 샤오 님!”
그사이 뒤따라온 집사가 기겁해서 소리쳤지만 그것은 엉망이 된 거실 상태 때문은 아니었다. 리 샤오가 딛는 곳에 유리그릇이 산산조각 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집사의 다급한 부름에도 리 샤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리 샤오의 앞을 막아서지 않기 위해 시종이 황급히 벽 쪽으로 바싹 붙었다.
하아.
숨을 죽인 채 맹수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던 시종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도 끝에서 방향을 꺾은 리 샤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도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체, 이게 다 무엇이냐.”
데굴데굴 굴러간 딸기 젤리가 집사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는 집사의 주름이 짙어져 있었다.
“저는 그저 리 샤오 님이 한 조각 잘라서 가져오라고 하셔서, 생일잔치에 쓸 것인 줄은 몰랐습니다.”
멋대로 생일잔치에 쓸 케이크를 가져왔다고 혼을 내는 것이라 여긴 시종이 황급히 변명했다. 하지만 그런 시종의 오해와는 달리 애초에 이 케이크는 집사가 생일잔치를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작은 눈매가 더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런 집사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시종의 어깨는 더 움츠러들었다. 눈치만 보고 있는 시종을 향해 집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뭘 하고 있느냐, 빨리 가서 닦을 걸레를 가져오지 않고. 마룻바닥에 얼룩이라도 지면 그땐 정말 혼쭐이 날 줄 알아.”
“지금, 얼른, 가져오지요.”
그제야 붙박인 듯 굳어 있던 시종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를 굽혀 젤리를 줍는 집사의 표정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후다닥, 잰걸음으로 사라지는 시종의 등 뒤로 덧붙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마른 걸레로 가져오너라.”
“그대로 손님들 계신 방에 들어가실 것은 아니시지요.”
제 앞을 가로막는 카이를 사납게 노려보던 리 샤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엉망인 발이 그제야 보였다. 리 샤오의 험악한 기세가 그나마 조금 누그러진 것을 확인한 카이가 재빨리 리 샤오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내놔.”
카이의 손에서 양말을 빼앗듯 가져간 리 샤오가 응접실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크림이 잔뜩 묻은 양말을 벗고 새 양말로 갈아 신는다.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카이가 뒤늦게 다가와 엉망이 된 양말을 거두었다. 슬쩍 확인한 양말에 핏자국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카이의 어깨가 조금 주저앉았다.
“자리를 비운 시간이 꽤 되었습니다.”
시계를 확인하고 카이가 한마디 덧붙인다. 양말을 갈아 신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리 샤오를 재촉하는 말이었다. 눈매가 찌푸려지긴 했지만 리 샤오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기어 나갔는지 확인해.”
“이미 지시해두었습니다.”
잠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싶었더니 그것을 지시하러 갔던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눈치가 빠른 녀석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빨랐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리 샤오는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리 샤오가 문 앞에 섰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얼른 들어가야 한다고 재촉한 주제에 그리 묻는 것이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카이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되돌아온 답은 전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
“뭐가.”
태연한 표정으로 되묻는 리 샤오에 오히려 카이가 당황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고개를 내저은 카이가 문고리를 잡았다. 장지문 너머로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리 샤오가 제복 옷자락을 당겼다. 주름 하나 없는 제복이 다시금 각이 잡혔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 감히 멋대로 도망치려고 한 행태가 기가 막혔지만 다시 붙잡아 왔으니 더 이상 문제될 것도 없었다. 별것도 아닌 녀석 하나 때문에 제 일정이 어그러지는 것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얇은 막으로 한 겹 씌어져 있던 소리가 막을 찢고 터져 나왔다. 대신 방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 리 샤오의 얼굴에 얇은 가면이 씌어졌다. 입가에 미소까지 번진 리 샤오를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 리 샤오를 불안한 눈빛으로 보는 것은 카이뿐이었다. 물론 그런 카이조차 겉으로는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았지만.
* * *
막 총감에게 받은 술잔을 비우던 리 샤오가 뭔가를 발견하고 잔을 내려놓는다. 빼꼼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밀어 넣고 안을 살피는 시종의 머리통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리 샤오가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하얀 종이상자를 들어 보였다.
‘늦어서 죄송하다고, 가게 주인장이 꼭 말씀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시종이 전하는 말은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상자 안을 확인한 리 샤오의 입꼬리가 슬쩍 느슨해졌다. 특별히 부탁한 대로 딸기 젤리가 두 개씩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상자를 닫아 다시 시종에서 건넸다. 이것을 본 녀석의 표정이 어떨지 퍽 궁금했다.
‘한 조각 잘라서 내 방에 가져다줘.’
‘예? 이걸 잘라서요?’
‘먹어보고 더 먹을 수 있다고 하면 더 가져다주고.’
시종은 아직 잔치에 쓰지도 않은 것을 멋대로 잘라도 되냐는 질문이었지만 리 샤오는 조금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는 시종에 표정을 굳힌 리 샤오가 되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물론 그것이 진짜 무슨 문제가 있으면 말해라, 라는 의미가 아님을 시종도 모르지 않았다. 감히 주인의 명령에 멍하니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시종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잘라서 화수 님께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가져왔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상자를 안아 든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리 샤오가 몸을 돌렸다. 그대로 방 안으로 향하려던 걸음이 멈칫한 것은 그때였다. 젤리 두 개가 놓여 있는 것을 본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만 보고 돌아오면 딱 화장실을 다녀오는 시간에 맞출 수 있을 터였다. 걸음을 내딛는 리 샤오의 입꼬리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올라가 있었다. 물론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부장.’
막 방 문을 열고 나오는 리 샤오를 보고 카이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화수를 보러 와 있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자 기분이 복잡해졌다. 그나마 화수의 몸상태가 좋지 않아 그런 것이리라고 애써 위안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정면으로 걸어오는 리 샤오의 표정을 본 순간 카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그러십니까. 화수 님께 무슨 일이라도-’
화수의 몸상태가 더 심각해진 건가. 확인하듯 묻는 카이의 시선이 방 문 쪽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리 샤오의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방에 없어.’
‘……화장실에 가신 것이겠지요.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멈칫했던 카이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굴렸다. 입덧 때문에 하루에도 열댓 번은 화장실로 달려가는 화수인지라 크게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굳은 표정의 리 샤오가 걸어가고 있는 쪽은 화장실로 향하는 방향도 아니었다.
‘리 샤오 님.’
반대 방향과 리 샤오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을 번갈아보던 카이가 결국 리 샤오가 걸어가고 있는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현관 쪽이었다.
‘혹 조금 전 나가는 이가 있었나?’
오가는 손님들 수발을 위해 문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카이가 물었다.
‘아니요. 나가시는 손님은 없으셨는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시종이 착실히 대꾸했다.
‘손님 외에 집안사람은?’
‘지금 두 분 말고는…….’
거보시라는 듯 카이가 리 샤오를 향해 시선을 주었지만 그는 이미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걸음에 망설임도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카이가 그런 리 샤오의 뒤를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이쯤 되면 리 샤오를 말릴 수 없다는 걸 카이도 알고 있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손님들을 위해 활짝 열어놓은 대문까지 통과한 리 샤오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방에서 뭐라도 보신 겁니까.’
뭔가 의심할 만한 것이라도 보았나 싶어 물었지만 리 샤오에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전혀. 내가 나가기 전과 다름없었어.’
‘…….’
그런데 왜.
입으로 소리 내어 묻진 않았지만 카이의 눈빛이 그리 묻고 있었다. 리 샤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흐트러진 이불은 누가 봐도 잠시 화장실을 다니러 간 모양새였고, 새로 맞춘 새 정장도 고스란히 벽에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리 샤오는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화수라면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분만 내키면 언제든, 처음 왔을 때처럼 훌쩍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녀석이었다, 화수는.
잠시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텅 빈 방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현관을, 대문을 통과하면서도 리 샤오는 자신의 본능이 틀리기를 바랐다. 그런데 괜한 생각일 거라고, 다시 돌아가면 태평하게 이불에 누워 시종이 가져다준 케이크를 먹고 있는 녀석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내딛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끝에 닿는 향이 분명 집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냄새가 나잖아.’
‘냄새, 요.’
상징적인 의미인 건가. 의미를 가늠하기 위해 눈매를 가늘게 뜨는 카이와 달리 리 샤오는 맹수가 냄새를 맡듯 코를 킁킁거렸다. 그것을 보고서야 카이도 그 말이 말 그대로의 의미였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곧 의아한 기색이 번진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냄새, 말입니까.’
카이에게는 전혀 리 샤오가 말하는 냄새가 맡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곤鯤의 사향을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은 가까이에 있을 때나 맡을 수 있지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위치에 있는 곤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
오히려 그런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는 리 샤오에 카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리 샤오 님만 맡으실 수 있는 향인 모양입니다.’
실제로 있는 냄새라면 말입니다. 물론 뒷말은 입 밖으로 낼 수 없어 속으로만 되뇌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의 리 샤오는 믿을 수 없게도 지극히 감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감정적이라니. 자신이 생각한 것이지만 자신의 대장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바로 눈앞에서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순간에도 단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냉정하게 상황을 타개해나가던 대장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 말 말고는 지금의 리 샤오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카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리 샤오가 유일하게 한 사람만 관련되면 이성을 잃는다는 걸. 물론 그 유일한 사람이 누군지는 굳이 이름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
그렇게 대치하고 있던 리 샤오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리 샤오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찰나였지만 스치는 순간 마주친 리 샤오의 눈빛이 새파랗게 변하는 것을 카이도 놓치지 못했다. 대체 뭐 때문에. 머리보다 몸의 반응이 빨랐다. 고개가 반사적으로 꺾였다. 그 시야에 빛이 확 덮쳐들어왔다. 그것이 자동차 헤드라이트임을 자각한 것은 한 박자 뒤였다. 그와 동시에 카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장!’
좀처럼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카이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달려오는 자동차 앞을 막아서는 리 샤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고작이었던 그 짧은 순간에 리 샤오는 이미 자동차 앞에 서 있었다. 아마 애초에 그것을 자각하기 전부터 움직였으리라.
끼이익-!
다행히 차가 멈춰 섰다. 멈춰 선 차와 리 샤오와의 간격이 한 뼘도 채 되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하니 더 등줄기가 서늘했다. 차를 운전하고 있던 운전기사 역시 반쯤 혼이 나간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가장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당사자인 리 샤오뿐이었다.
저벅저벅.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세운 리 샤오가 천천히 차 뒤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영문을 모르겠는 상황은 제쳐두고 홀린 듯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이번엔 아예 뒷좌석 문을 열어젖혔다. 차 안에 타고 있던 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던 리 샤오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아.
그제야 물음표만 잔뜩 떠 있던 카이의 머릿속이 한순간에 해결되었다.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지만 차에서 제 발로 내리고 있는 이는 분명 화수였다. 대체 어떻게 달리는 차에 화수가 있는 걸 알아차렸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감정적이긴 해도 미치광이가 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불행 중 다행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 다행이다, 조용히 그런 생각을 하는 카이였다.
* * *
“리 샤오 부장, 잔이 비셨습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룽오 부장의 말에 그제야 리 샤오도 자신의 술잔이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앞에 놓인 술병을 집으려던 리 샤오가 멈칫한다. 모르는 새 제 앞에 놓인 술병마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한잔 드리지요.”
그것을 본 룽오 부장이 냉큼 자신의 앞에 놓인 술병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일순 방 안이 조용해졌다. 룽오 부장이 리 샤오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룽오 부장이 리 샤오에게 말을 걸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는 것도. 그래서 룽오 부장의 술을 리 샤오가 거절하느냐 아니냐를 두고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대놓고 시선을 주고 있지 않아도 묘하게 조용해진 방 안 분위기로 상황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순적이게도 리 샤오는 지금의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리 샤오가 술병을 들고 있는 룽오 부장의 앞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룽오 부장이 반색하며 황급히 술잔을 채운다. 호박색 투명한 액체가 술잔에 가득 찼다.
“생일 축하합니다.”
룽오 부장이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로 축하인사까지 건넸다. 물론 리 샤오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으로 물러난 뒤였다. 룽오 부장의 얼굴 위로 초조한 기색이 번졌다. 어떻게 튼 물꼬인데 이대로 끝내버릴 수는 없었다.
“애기씨는.”
나름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분위기를 느슨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룽오 부장이 슬그머니 화제를 꺼냈다. 리 샤오가 아이 이야기엔-정확히는 입덧에 좋은 음식이야기지만- 반응이 좋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한 덕분이었다. 평소라면 괜찮은 시도였겠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물론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룽오 부장이 리 샤오의 시선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건강하십니까.”
“…….”
“입덧이 심해 음식을 통 먹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요.”
뒤편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카이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정작 리 샤오는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무총감도 걱정스럽다는 듯 한마디 거들었다.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배 속의 아이에게 좋지 않은 것 아닌가?”
“그렇지요. 그래서 제가 오늘 입덧을 가라앉히는 데 좋은 약재를-”
그 때였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리 샤오의 손에 들린 잔이 부서져 내렸다.
“리 샤오 님!”
시뻘건 선혈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본 카이가 재빨리 옆에 놓인 영견으로 손을 둘둘 감았다. 단숨에 새하얀 영견을 핏빛으로 물들이고도 모자라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물론 그 모든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리 샤오의 눈빛은 태연했다. 눈살 한 번 찌푸리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룽오 부장이 흠칫, 하고 어깨를 떨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리 샤오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간 뒤였다. 사실 눈이 마주친 것도 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리 샤오의 맞은편에 룽오 부장이 앉아 있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의 리 샤오에게 다른 사람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유리컵이, 불량이었던 모양입니다. 다른 분들께 가지 않고 제게 와서 다행입니다만 흉한 꼴을 보게 해드린 것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지금 사과할 때인가. 됐으니 빨리 의원에게 보이고 치료부터 받아야지.”
정무총감의 말에 리 샤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가는 길을 따라 핏자국이 났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제대로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집사가 잘못을 빌었지만 카이는 분명 보았다. 화수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얼굴은 무표정하던 리 샤오가 잔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는 것을. 겨우 손에 힘을 준다고 해서 유리컵이 산산조각 난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 싶지만 리 샤오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지적할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영견이 더 필요합니다.”
그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말하는 방향으로 대신했다. 집사가 황급히 옆에 선 시종의 손에서 영견을 빼앗듯 집어 들었다.
“여기, 여기 있습니다.”
건네주는 영견을 이미 피에 잔뜩 전 영견 위로 덮었다. 새 영견 역시 빠른 속도로 젖어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카이가 압박하듯 손을 꽉 쥐었다. 지혈을 위한 것이긴 했지만 반사적으로 리 샤오를 향해 물었다.
“아프지 않으십니까.”
“괜찮아.”
리 샤오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냥 하는 빈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전혀 아픔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 * *
추워.
잠결에 몸을 웅크리던 화수가 실눈을 떴다. 왜 이렇게 추운가 했더니. 그제야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창고 바닥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바깥은 이제 여름이었지만 빛이 들지 않는 창고 안은 서늘했다. 게다가 화수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다. 이리 말라빠졌으니 추위를 타는 게 당연하지 않냐며 겨울이면 먹을 것을 잔뜩 제 앞에 내려놓던 진도현이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 답은 못 들었네.
리 샤오의 등장으로 정신이 쏙 빠져서 다른 것은 모두 까맣게 잊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상태의 리 샤오를 마주하고 제대로 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이는 몇 안 될 터였다.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잠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창이 없는 창고 안에서는 전혀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눈을 붙이고 일어났더니 더더욱 시간감각이 없었다. 그나마 맹렬이 느껴지는 허기가 생각보다는 시간이 꽤 흘렀음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거지가 따로 없네.
이런 부잣집에서 굶어 죽는 것만큼 웃긴 일도 없겠다며 피식거리고 있을 때였다.
철그럭.
분명 묵직한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였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의 기척에 화수가 그대로 굳었다.
끼이익.
묵직한 문이 천천히 열리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물론 그리 환한 빛은 아니었지만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화수에게는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는 정도였다. 하지만 화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꺼풀을 연신 깜빡이면서도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를 확인하려고 애썼다. 시야보다 청각이 먼저였다.
“아니, 이리 흙바닥에.”
귀를 뚫고 들어온 낯익은 목소리. 기대하고 있던 눈동자에 실망의 기색이 번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집사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에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평소의 시큰둥한 눈동자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나마 경악하는 집사를 위해 화수가 슬그머니 바닥에서 일어나 앉았다. 마음에 들지 않은 기색은 역력했지만 일단 집사는 급한 것부터 해결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여 가져오너라.”
역광으로 시커멓게만 보이는 집사의 뒤에서 또 다른 시종 하나가 생겨났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시종이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그릇은 도로 가져가야 하니 얼른 드십시오.”
덮어놓은 보자기를 치우자 흰 죽과 동치미를 담은 그릇이 드러났다. 보자마자 죽 그릇을 집어 들고 화수가 허겁지겁 죽을 입안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던 집사가 조용히 물었다.
“혹 먹고 싶은 것은 없으십니까?”
스윽, 동치미 그릇을 앞으로 내미는 것도 잊지 않고서. 화수의 수저가 동치미 그릇으로 옮겨갔다.
“말씀하시면 다음번엔 그것으로 챙겨오도록 하지요.”
“허면.”
서걱, 서걱, 열심히 씹던 동치미 무를 꿀떡 넘긴 화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뭐든 말해보라는 듯 집사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마냥 굶길 수는 없어 리 샤오 몰래 음식을 가져온 참이었다. 워낙에 리 샤오의 기세가 흉흉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몰래 가져온 것이지 다른 때였다면 쫓겨날 각오를 하고서라도 고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집사의 각오를 알기나 하는지, 망설이던 화수의 입에서 나온 부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고양이 밥 좀 챙겨주실 수 있을까요.”
“……고양이, 밥이요.”
“예, 이왕이면 꽁치로.”
“…….”
대체 무슨 대단한 부탁을 하려고 머뭇거리나 했더니. 자신을 여기서 꺼내달라는 부탁을 들었어도 이리 황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약속을, 해서요.”
집사의 기가 막혀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슬그머니 변명을 덧붙였다. 물론 그 변명을 들은 집사의 표정이 더 기묘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 가져다 드릴까요.”
바닥까지 닥닥 긁어 먹고서도 미련이 남아 수저로 바닥을 긁고 있는 화수를 향해 집사가 물었다.
“아니요.”
하지만 아쉬워하는 표정과는 달리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그냥 한번 해보는 거절은 아니라는 듯 아예 수저마저 내려놓았다.
“허기가 좀 찼나 봐요.”
사실 배고픈 걸로만 따지면 한 그릇, 아니 두세 그릇은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제 살 만해진 모양이었다. 슬슬 음식 냄새가 거북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배 속에 있는 녀석이 보내는 신호였다.
“허면.”
역시나 화수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차린 집사가 황급히 처음 음식을 덮어왔던 보자기로 빈 그릇을 덮고 시종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별다른 지시 없이도 시종은 재빨리 가져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을 들고 밖으로 사라졌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뭐.”
“혹 배가 아프다거나, 하는 일도 없으시구요.”
“……예.”
고개를 내젓는 화수의 대답에도 집사의 물음이 조금 집요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화수가 덧붙였다.
“이래 봬도, 건강한 편입니다.”
겨우 하루 이틀 창고에서 지낸다고 골골거리는 약골은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는 의미였으나 집사의 표정은 썩 좋아지지 않았다. 사실 진짜 아픈 곳이 있을까 봐 걱정해서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엄살이라도 부려보라는 신호였으나 화수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집사가 포기한 듯 몸을 일으켰다.
“저도 그럼 이만 물러가지요.”
끙. 삐걱거리는 몸을 천천히 일으킨 집사가 막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저기.”
걸음을 내딛던 집사가 고개만 꺾었다. 마저 말씀하시라는 눈빛을 마주하고도 머뭇거리다 화수가 겨우 입을 열었다.
“생일잔치는, 큰 문제 없이 치루셨습니까.”
이번에는 무슨 황당한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싶었던 것이 무색하게, 다행히 예상 가능한 범주의 것이었다. 다른 의미로 기가 막힌 것과는 별개로.
“아시는 분이,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책망하는 말투가 되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하필이면, 다른 날을 다 두고 가장 기분 좋아야 할 생일날, 일을 저지른 화수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잔뜩 죄책감에 싸여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화수를 보고 있으려니,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안 그래도 허옇게 핏기라고는 없는 얼굴이 더 파리해져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낯색을 보고 있으려니 더더욱.
“잔치는 별 문제 없었습니다.”
결국 집사가 입을 열었다. 안심하라는 의도였으나 그 말에 담긴 숨은 뜻을 화수는 놓치지 못했다.
“잔치는, 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라 집사도 결국 어깨를 주저앉히며 설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있는 유리잔이, 하필이면 리 샤오 님에게 주어져서요.”
“다치셨습니까?”
처음으로 눈동자에 감정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물론 그것을 보고서야 지금까지 화수의 눈동자에 전혀 감정 같은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집사였다.
“……손을 좀.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
하지만 안심하라는 뜻으로 덧붙인 말에도 화수의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의원에게 보이셨습니까?”
“지금 화수 님이 남 걱정할 땝니까.”
“그건……, 그렇군요.”
어련히 아랫사람들이 잘 챙겼을까. 뒤늦게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는 걸 깨달은 화수가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게다가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정작 제일 속을 뒤집어놓은 제가 이제 와서 리 샤오를 걱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안 좋으신 것이니,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
“기회를 봐서 여기서는 나가게 해달라 고해볼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상관없어요.”
“……예?”
“여기도 지내기 나쁘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
“오히려 방보다는 이곳이, 마음 편합니다.”
집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냥 한번 해보는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물론 화수가 그리 말한 이유는 리 샤오의 기분이 나아지지도 않았는데 괜히 집사의 부탁으로 방으로 돌아가게 되면 잔뜩 화가 난 그와 단둘이 있게 될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런 점을 집사가 알 리가 없었다.
하아. 참으로 답답한 사내라며 낮은 한숨을 내쉬고 집사는 도로 몸을 바로 했다. 뒤늦게 너무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는 걸 깨닫고 빠른 속도로 문을 통과해 막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리 샤오가 떡하니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늙은이 심장마비로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따지고 싶은 것을 애써 누르면서 집사가 물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절대 열어주지 말라고 했을 텐데.”
고저 없는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흘렀다. 하지만 집사도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밥은 먹여야 할 것 아닙니까. 하다못해 거지도 밥은 먹여서 내쫓는 법입니다.”
“…….”
사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리한 것이었다. 곧바로 달려 들어와 밥상을 엎지는 않았으니 이대로 굶어 죽일 생각까지는 아니리라, 그리 생각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리 샤오와 마주한 채 의견을 피력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처음에는 자신 있게 내뱉던 목소리가 분명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마주한 눈빛이 말 그대로 흉흉했다. 좀처럼 제게는 그런 눈빛을 보내는 법이 없는 리 샤오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이리 흉흉한 기세를 억누르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기분이 많이 상했다는 반증이었다.
붕대를 감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화수에게는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몇 바늘이나 꿰매야 할 정도로 상처가 꽤 깊었다. 하지만 그 상처를 치료할 때보다 지금 눈앞의 리 샤오가 더 불안해 보였다.
“하물며 귀한 씨를 배 속에 두고 있는 이를 이리 함부로 대하는 법은 없습니다.”
“…….”
그럼에도 집사 역시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배 속의 아이의 건강도 건강이지만, 화수의 몸이 그리 건강한 상태라 아니라는 걸 홍 의원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 화수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이 리 샤오에게도 썩 좋은 일이 아닐 듯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점점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워진 집사가 겨우 입을 열었다.
“도련님.”
“…….”
이번엔 리 샤오를 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순간.
휙. 다행히 온몸을 짓누르던 힘이 갑자기 사라졌다. 깊은 숨을 몰아쉰 뒤에야 집사도 리 샤오가 자신을 내버려두고 뒤돌아섰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고.
긴장이 풀리자마자 무릎이 풀렸다. 상체를 구부리며 무릎을 짚는 집사와 리 샤오를 번갈아보던 카이가 가보라는 듯 손을 내젓는 집사의 신호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들으신 겐가.”
마지막 화수의 말은 듣지 않았길 바랐지만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집사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밥은 먹여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으니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한 일이라 여겨야 할 터였다.
“계속, 저리 두실 생각이십니까.”
입을 꾹 다물고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카이가 처음 입을 열었다. 사실 험악한 기세이긴 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다는 건 분명 긍정적인 징조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름 날씨라지만 맨바닥에 저리 두는 것은 위험합니다.”
위험한 것이 화수뿐만은 아닐 테고. 하지만 그런 카이의 설득에도 리 샤오의 표정은 여전히 험악한 그 상태 그대로였다.
“본인은 지금이, 방보다 맨바닥이 더 낫다잖아.”
“…….”
그제야 조금 전 함께 들은 화수의 말을 기억해내고 카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두 사람이 창고 앞에 도착한 것은 집사가 막 시종을 데리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던 그 순간이었다. 당장 멋대로 밥을 챙겨 들어간 집사에게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리 샤오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예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이 살짝 흔들린 것은 화수가 집사에게 부탁 하나만 하자고 할 때였다. 사실 카이 역시 그 물음에 긴장했었다. 혹 진 사장에 관련된 부탁이라도 하게 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테니까. 자신이라도 소리를 내어 리 샤오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안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이어 들려온 화수의 부탁은 참으로 하찮았다. 물론 그래서 안도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 와중에 고양이 밥을 챙겨주라는 부탁이라니.
태평하다 못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은 부탁이었다. 본래도 카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리 샤오가 화수라는 사내를 어쩌지 못하는 것도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되었다. 정상적인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사내였다. 아마도 그것이 멀쩡한 사내들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매력이겠지.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소문의 사내가 이런 사내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예쁜 얼굴과 몸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척척 뜯어내는 요물 같은 사내이리라 생각했었는데, 실상 제가 본 화수는 전혀 달랐다. 가끔은 일부러 그러나 싶을 정도로 오히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것에 더 능숙한 사내였다.
오죽하면 집사가 아픈 척이라도 해보라고 신호를 줬을까. 물론 그 신호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해버렸지만.
누구를 상대하든 겁이 없었다. 아니, 사실 겁이 없다기보다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제 목숨을 걸고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타면서도 전혀 겁을 먹지 않으니 상대는 더 미칠 수밖에.
물론 화수가 어떤 생각으로 살든 카이는 상관없었다. 그에게 미치고 있는 상대가 자신의 상사만 아니라면.
“아마, 본심이 아니셨을 겁니다.”
“…….”
카이가 할 수 없는 화수를 대신해 변명을 해주었다. 물론 변명하는 스스로도 이 변명이 소용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사실 화수를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상관없어.”
리 샤오가 낮게 내뱉었다. 원래 그런 녀석이라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약아빠진 주제에, 정작 약한 척은 하지 않는다. 약한 척해야 할 때조차 약한 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약한 녀석은 잡아먹힌다, 라는 법칙을 알고 있는 야생동물처럼.
그것이 리 샤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자신이었다. 어차피 배 속의 씨가 제 씨도 아니고, 무려 바로 코앞에서 뒤통수를 치고 도망치려고 했던 때를 생각하면 말 그대로 녀석을 통째로 삼켜 씹어 먹어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반쯤은 그대로 녀석이 창고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점점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흙바닥을 걸어 시커메진 두 발이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안 그래도 말라빠진 몸이 더 앙상해질 것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아 서성이다 발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창고 앞에 서 있는 것도. 이리 미칠 듯한 저와 달리 태평하기 짝이 없는 화수를 보는 것도.
빌어먹을.
리 샤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불안한 시선을 보내는 카이를 향해 짧게 내뱉었다.
“한잔 해야겠어.”
술이라도 마시고 잠들지 않으면 이대로 돌아가 녀석을 데리고 나올 것만 같았다. 선물받은 술을 놓아둔 장식장 문을 열어젖힐 때였다. 그런 리 샤오의 앞을 카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제가, 준비하지요.”
“…….”
의아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상처 때문에 술은 안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리 샤오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조용히 물러섰다. 돌아서서 응접실 의자에 앉는 리 샤오를 확인하고 카이가 말했다.
“잔을 가져오겠습니다.”
물론 그리 말하는 카이의 손에는 유리잔이 쥐어져 있었다.
* * *
화수는 비가 싫었다. 어둠도 싫고, 빌어먹을 천둥은 더 싫었다.
비가 오는 날은 어미가 일을 쉬는 날이었다. 화수를 낳다가 얻은 허리병이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통증이 심해지면 덩달아 패악질도 심해졌다. 그럴 때면 화수는 최대한 어미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부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곤 했다. 어미가 나오는 기척이 느껴지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게.
떨어져 나간 부엌문 안으로 비가 들이쳤다. 그럴 때마다 안 그래도 차가운 발이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리 들이치는 빗방울보다 더 싫은 것은 천둥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화수는 제 몸을 더 둥글게 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화수는 비가 싫었다. 어미를 싫어할 수 없어 비를, 천둥을 싫어하기로 한 것이었다.
희미하게 비 냄새가 났다.
본능적으로 화수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발치로 비가 들이칠 것을 대비해. 어미가 나오는 소리를 들어도 지금은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아니 눈을 뜰 기운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귀가 먹먹해 천둥소리는 잘 들리지 않을 듯하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 * *
“오늘은 이쯤 하십시오.”
집사가 장식장 앞을 막아섰다. 정확히는 장식장 문을 열려는 리 샤오의 앞이었지만.
“벌써 두 병이나 비우셨습니다.”
비단 오늘 밤만의 일은 아니었다. 요 며칠 리 샤오는 하룻밤에만 몇 병씩 술병을 비웠다. 사실 리 샤오는 술을 즐기긴 해도 취할 때까지 마시는 법이 없었다. 원체 술이 세고, 오랜 시간 언제 기습공격이 들어올지 모르는 전장에서 지내 술을 자제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한번 몸에 밴 습관에서 쉽게 벗어나기란 힘들었다. 그런데 그런 리 샤오가 만취해 곯아떨어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덕분에 독하고 값비싼 술들로 가득 차 있던 장식장이 텅텅 비어가고 있었다.
“잠이 안 와.”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는 각오로 앞을 막아섰던 집사는 리 샤오가 나직이 내뱉는 말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마주한 리 샤오의 낯색이 꺼칠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요 며칠 술을 잔뜩 마시고도 눈을 붙이는 것은 겨우 몇 시진밖에 안 된다는 걸 집사도 알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결국 집사도 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집사에게 리 샤오는 어렸을 때부터 돌봐왔던 작은 도련님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뒤돌아선 집사가 술병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장식장에 진열된 병 중에 가장 작은 크기의 것이었다.
“안주도 드시고요.”
물론 그리 말하면서도 그 말을 리 샤오가 들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늙은 집사의 바람이었을 뿐.
쪼르륵.
투명한 유리잔에 맑은 호박색 액체가 가득 찼다.
“역시나.”
막 과일접시를 리 샤오의 앞으로 바짝 당겨 밀던 집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린다. 병을 내려놓던 리 샤오의 시선이 집사를 향했다. 민망한 듯 눈매를 주저앉힌 집사가 무릎을 툭툭, 두들기면서 덧붙였다.
“오늘 하루 종일 무릎이 쑤신다 싶더니, 결국 비님이 오시네요.”
투둑투둑.
그새 굵어진 빗방울이 기와를 두들기는 소리가 리 샤오의 귀에도 박혀들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군요.”
아무래도 비가 들이칠 기세였다. 황급히 정원 쪽으로 난 장지문을 향해 걸어간 집사가 문을 닫기 전 밖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올 벼농사는 걱정 없겠네요.”
탁. 장지문을 닫아걸고 다시 뒤돌아섰을 때였다. 집사의 얼굴 위로 의아한 기색이 번졌다.
“리 샤오 님?”
잘그락. 집사의 부름에 대신 대답이라도 하듯 빈 잔의 얼음이 녹아내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리 샤오는 그곳에 없었다.
빌어먹을.
리 샤오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홀린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이었다. 웃는 얼굴로 제 뒤통수를 친 녀석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어야 하는데, 그것이 맞는 것인데, 그럼에도 리 샤오는 요 며칠 계속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처음엔 분해서라고 생각했다. 겨우 그딴 녀석에게 속은 것이 분해서.
하지만 점점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없는 방에 들어가는 것이 싫었다. 평생을 혼자 지내던 날 중 녀석이 있었던 날은 고작해야 한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꼭 남의 방에 들어앉은 것처럼 낯설었다. 늘 간이 잠자리를 만들던 막사에서도 느끼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화수를 계속 창고에 둔 이유는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였다. 녀석이 먼저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아니, 적어도 창고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할 때까지는 리 샤오가 먼저 움직이는 일은 없을 예정이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천둥을 무서워하는 녀석이니까. 제발 내보내달라고 문을 두들기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불안감으로 달려온 것이 무색하게도 창고 안은 조용했다. 오히려 나무로 된 창고를 두들기는 빗소리가 더 컸다.
내가 어리석었군.
쥐 죽은 듯 조용한 창고를 노려보던 리 샤오가 피식, 하고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렇게 몇 걸음 걷던 걸음을 멈추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설마 무서운 척했던 행동도 다 연기였던 건가.
녀석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 생각에 미치자 리 샤오의 표정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리 샤오가 발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철그럭.
자물쇠를 열어 내던지듯 바닥으로 떨구고 리 샤오가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이익. 오래된 문첩이 물기를 머금어 평소보다 훨씬 더 기괴한 소리를 냈다. 시커먼 어둠이 천천히 물러섰다. 하지만 시야가 밝아지는 그 짧은 시간조차 기다릴 수 없었던 리 샤오는 어둠 속으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어둠 속을 더듬는 리 샤오의 눈동자 위로 불안한 기색이 번진다. 긴 사각형 형태의 창고는 쌀포대며 각종 곡식들을 벽 쪽으로 차곡차곡 쌓아놓았기 때문에 사실상 화수가 있을 곳은 가운데 텅 빈 공간뿐이었다. 그런데 화수가 그곳에 없었다.
무릎을 굽힌 리 샤오가 텅 빈 바닥을 손으로 더듬었다. 다행히 누군가 있었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먼지가 쌓여 있는 다른 곳과는 달리 유난히 깨끗한 곳을 발견했던 것.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당연한 일도 확인해야 할 만큼 리 샤오가 당황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리 샤오가 몸을 일으켰다. 문을 뚫고 나간 것이 아니라면 화수는 분명 창고 안에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던 리 샤오가 멈칫했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쌀포대 사이로 딱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는 곳이 보였기 때문이다.
설마.
눈매를 일그러트린 리 샤오가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더욱 확신은 줄었다. 직접 몸으로 확인한 공간은 예상보다 훨씬 더 좁았기 때문이다. 성인 여성도 들어가기 힘든 이 좁은 공간으로 굳이 화수가 숨어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단 한 가지 이유를 제외하고는.
리 샤오의 발끝이 쌀포대에 걸렸다. 걸음을 멈춘 리 샤오가 그 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나마의 빛도 그곳까지는 들어오지 않아 시야가 돌아오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뭔가가 들어왔다. 화수였다.
“대체, 뭐 하는-”
핀잔을 하던 리 샤오가 이내 말을 멈췄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틈새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여겼던 화수의 몸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화수야.”
왠지 모를 불안한 기분에 리 샤오가 저도 모르게 화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감긴 눈은 미동이 없었다.
“화수야.”
그 짧은 순간도 기다릴 수 없었던 리 샤오가 이번엔 손을 내뻗었다. 물론 손이 닿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때 쌀포대에 기대져 있던 몸이 스륵, 뒤로 넘어갔다.
“화수야!”
쿵, 하고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았다. 하지만 리 샤오가 필사적으로 내뻗은 손은 화수에게는 닿지 않았다.
“리 샤오 님?!”
창고 쪽으로 향하는 리 샤오를 보았다는 시종의 제보를 받아 황급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참이었다. 마주 오는 리 샤오를 발견하고 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걸어오는 리 샤오가 화수를 안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 무슨 험한 일이라도 생기는 게 아닐까 싶어 황급히 달려오던 입장으로서는 맥이 빠지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다행한 일이었다.
“의원 불러.”
거칠게 내뱉고 리 샤오가 그대로 집사를 스쳤다. 오히려 뒤쳐진 집사가 황급히 그런 리 샤오를 따르며 되물었다.
“예? 무슨-”
집사의 시선이 화수를 향했다. 그제야 축 늘어진 화수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애기씨께 무슨 일이라도-”
“의원 부르라고!”
“예, 예. 홍 의원, 홍 의원께 연통을 넣겠습니다.”
답지 않게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리 샤오에 집사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급히 걸음을 멈춘 집사가 응접실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사이 리 샤오는 응접실 긴 의자에 화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있었다.
“방으로, 안 가시고요.”
그것을 본 집사가 수화기를 든 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막 의자 밑으로 떨어지는 팔을 다시 조심스럽게 올려놓던 리 샤오가 툭, 하고 대답을 내뱉었다.
“내 방은 싫다잖아.”
“…….”
정신을 잃은 화수와 대체 언제 그런 얘기를 하신 건가. 의아해하던 집사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여기도 지내기 나쁘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오히려 방보다는 이곳이, 마음 편합니다.”
역시 다 들으셨구나. 난감한 마음에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을 때였다.
“전화.”
“예?”
“전화 안 하냐고.”
“아, 예. 예. 전화해야지요.”
그제야 수화기 너머로 애타게 자신을 찾는 교환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사가 황급히 수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집사가 통화를 하는 것을 확인한 리 샤오가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더 덮을 것을 가져와.”
겉옷을 화수의 몸 위에 덮어주면서도 시종에게 다른 덮을 것들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
“많이.”
“예.”
멍하니 서 있던 시종이 그제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전화를 꺼놓은 모양입니다.”
난감한 기색으로 집사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홍 의원은 서양에서 들여온 물건인 전화기를 불길해했다. 까만 줄에 불과한 전선으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다. 분명 기계 안에 귀신 같은 것이 들어앉아 말을 전해주는 방식일 텐데 계속 켜놓게 되면 그 귀신이 밖으로 나와 집 안을 돌아다니지 않겠냐며 전화선을 빼놓는 일이 많았다.
“사람을 보내야겠습니다.”
탁, 손가락을 튕기는 집사의 신호에 시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집사가 지시를 내리기 직전 리 샤오가 끼어들었다.
“내가 가지.”
“예?”
이미 몸을 일으키는 리 샤오를 집사가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운전도 할 수 있으니. 그게 제일 빠르겠지.”
“…….”
심지어 운전사를 부르지도 않고 직접 운전을 해서 다녀오겠다는 말이었다. 운전사를 부르는 시간도 아깝다는 의미였다.
“허나 리 샤오 님이 직접 가시면.”
대놓고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슬그머니 앞을 가로막는 집사에 리 샤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말을 꺼내놓고 정작 뒷말은 입안으로 삼키는 집사를 리 샤오가 재촉했다.
“직접 가면?”
“…….”
하지만 집사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연통도 없이 직접 찾아온 리 샤오를 보면-심지어 지금의 심각한 표정을 한 리 샤오를 마주하게 되면- 홍 의원이 기겁을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집사는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집사의 눈에 의자에 누운 화수가 들어온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화수 님이 깨어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리 샤오 님은 여기 계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급한 대로 둘러댄 말이 생각보다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험악하던 기색은 확실히 누그러져 있었다.
“뜀박질이 빠른 아이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집사가 시종을 향해 신호를 주었을 때였다. 누군가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카이였다.
“제가 다녀오지요.”
별채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던 카이였다. 그 역시도 요 며칠 계속해서 리 샤오의 옆을 지키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옆을 지킬 테니, 오늘은 돌아가서 푹 쉬라며 집사가 억지로 등 떠밀어 보냈던 것이 한참 전인데 소란에 깬 모양이었다. 물론 겉보기에는 전혀 자다가 일어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지만.
“최대한 빨리 데려와.”
“예.”
그제야 불안해 보이던 리 샤오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뭐 리 샤오보다는 나을 테니까. 제복차림을 한 카이의 방문에 기겁할 홍 의원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전화기만 꺼놓지 않았어도 이럴 일은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다음부터는 전화기를 꺼놓는 일이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집사가 시종이 가져온 이불을 건네받아 화수의 위로 덮었다.
“아무래도 고뿔이 단단히 드신 모양입니다.”
이불을 몇 겹이나 덮고서도 화수는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또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줘.”
물수건으로 막 화수의 이마에 난 땀을 닦아주려던 참이었다. 집사를 향해 리 샤오가 손을 내밀었다.
“이런 일은 제가-”
“…….”
이제는 말도 없이 빤히 보는 시선에 결국 집사도 순순히 수건을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수건을 건네받은 리 샤오가 조심스럽게 화수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열이 오른 얼굴에 차가운 것이 닿자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찡그린 이마의 주름이 조금 누그러진 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천천히, 손에 쥔 물수건으로 화수의 얼굴을 닦아나갔다.
마치 조금만 힘을 주어도 깨지는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애틋하기까지 한 그 손길을 집사도 숨을 죽인 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멈칫.
리 샤오의 손이 멈췄다. 그 이유는 집사도 알고 있었다. 갑자기 화수의 눈이 번쩍 뜨였기 때문이다. 뒤돌아선 탓에 리 샤오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잔뜩 긴장한 어깨로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긴장한 리 샤오라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는 당사자는 정작 아무런 감흥도 없는 멍한 눈만 껌뻑이고 있었지만.
“여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화수가 입을 열었다.
“응접실이야.”
그 말에 화수가 안도한 듯 몸을 늘어트렸다. 껌뻑껌뻑, 천정의 화려한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던 화수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어두운 거 싫습니다.”
툭, 하고 내뱉은 진심. 그제야 집사도 화수가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진심을 입 밖으로 내뱉을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리 샤오는 화수가 그런 상태임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천둥도요.”
이 녀석은 무섭다는 말을, 싫다고 하는구나. 그제야 조금은 알 것 같은 리 샤오였다.
“알겠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리 샤오가 화수의 귀를 막았다. 그제야 화수가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 무섭게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리 샤오는 손을 떼어놓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집사도 그만 놓으셔도 되지 않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다.
쏴아아아아.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는 빗소리만 공간을 가득 채웠다. 밤새 쏟아질 기세였다.
* * *
맥을 짚는 홍 의원의 표정이 어두웠다. 상태가 좋지 않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연히 그러리라 생각하는 것과 심각한 표정의 홍 의원을 마주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게다가 몇 번이고 자리를 바꿔가며 맥을 짚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불안감은 배로 늘었다. 그 말은 여러 곳에서 찾아야 할 만큼 맥이 약하다거나, 혹은 아예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왜 그러는가.”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을 견디다 못한 집사가 결국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혹 애기씨 맥이, 안 잡히는-”
“애기씨는 건강하십니다.”
애가 달아 숨이 넘어갈 지경이던 집사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의문이 머리를 스친다. 애기씨한테 아무 문제도 없다면 어째서 이리 오랫동안, 그것도 몇 번이나 자리를 바꿔가면서 진맥을 한 것인가. 다행히 이번 의문은 쉽게 풀렸다.
“어미의 기력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아이보다 못하니 문제지요.”
“…….”
찾지 못하던 맥이 아이의 것이 아니라 화수의 것인 모양이었다.
“제가 누누이 당부 드렸지 않습니까. 리 샤오 님의 패기는 총칼과 다를 바가 없다고, 헌데 이리 함부로-”
“오늘은 그런 것은 아니고.”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는 홍 의원에게 집사가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 것이 아니면 갑자기 이리 상태가 나빠진 연유가 뭡니까.”
“그것이.”
“…….”
“며칠 창고에서 지내시다 보니.”
“……창고요?”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단어였다.
“제가 아는 그 창고가 맞습니까?”
“……아마도.”
사실 사람이 지낼 만한 멀쩡한 장소를 창고라고 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니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멍청한 질문을 되뇔 수밖에 없었던 건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정신이십니까?”
“그럴 만한 사정이 좀 있었네.”
홍 의원은 리 샤오의 손에 난 상처가 이 일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어도 그렇지요. 아이를 가진 임산부를 창고에 두다니요. 그것도 잠깐도 아니고 며칠씩이나.”
“…….”
내 말이 그 말일세. 맞장구를 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집사는 난감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불쑥, 낮은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모든 사태의 원인인 리 샤오였다.
“뭐가 어떻다는 건데.”
홍 의원의 고개가 조금 위를 향했다. 리 샤오와 눈이 마주쳤다.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홍 의원을 보는 리 샤오의 눈동자에는 날이 서 있었다. 초조한 기색마저 느껴지는 눈동자를 확인한 뒤 홍 의원은 낮은 한숨을 내쉬면서 어깨를 주저앉혔다.
“처음 올 때부터 몸 상태가 엉망이었습니다. 머리 부상은 그나마 치료할 수나 있지, 속이 이리 상한 것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지요. 헌데 그나마도 이제는 아예 맥이 잡히질 않아요. 솔직히 이대로라면 애기씨를 제대로 낳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애기씨는 건강하다고 하지 않았나.”
한발 물러서 있던 집사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하지만 홍 의원은 태연했다.
“태를 가지고 있는 어미가 죽으면 애기씨가 건강한 것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
집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집사의 반응에 홍 의원이 혀를 쯧쯧 찼다.
“그게 무슨 말이야.”
“…….”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순간 온몸이 움츠러들 만큼 날이 선 목소리가 귀에 박혀 들어왔다. 마치 오래된 기계를 움직이는 것처럼 천천히 꺾는 고개가 뻑뻑했다. 그럼에도 고개를 틀 수밖에 없었다. 조종을 받는 기계처럼 홍 의원의 고개가 리 샤오를 향했다.
“죽는다니.”
마주한 눈이 새파랗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감히 누가 죽는다는 거야.”
“……물론.”
겨우 만들어낸 목소리가 다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홍 의원은 고집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패기에 눌려 짜부라지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테니까.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요.”
피부의 겉면이 따끔따끔했다. 사실 화수의 목숨을 가장 위협하는 건 리 샤오였다. 억울했지만 그럼에도 지금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천천히, 몸을 조이던 힘이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홍 의원이 덧붙였다.
“그러려면 적어도, 창고 같은 곳에서 지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
다행히 이번에는 리 샤오도 홍 의원의 말에 토씨를 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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