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14/21)

13.

눈부셔.

감은 눈꺼풀 위로도 느껴지는 환한 빛에 화수가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리고 어깨를 덮고 있는 이불을 끌어 올려 뒤집어쓰다 이내 멈칫했다.

눈이 부시다고?

창고 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뒤늦게 자각했던 것. 번쩍, 화수가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환한 천장이었다. 눈을 떠도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없던 창고와는 확연히 다른 장소였다. 뒤늦게 그 천장이 낯익다는 걸 깨달았다.

“또, 혼자만 드십니까.”

향긋한 술내음이 코끝에 닿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억울하면 배 속의 새끼를 떼고 오든지.”

“…….”

받아치듯 들려온 나직한 음성에 화수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행이었다. 눈을 뜨면 깨는 꿈이 아니라서. 그제야 방에 돌아왔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고개를 틀면 되는 위치에 리 샤오가 앉아 있었다. 물론 리 샤오는 화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정면을 향한 채 백화주가 가득 찬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화수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맘 편하게 리 샤오의 옆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고작 며칠 못 봤을 뿐인데, 이 얼굴이 그렇게 보고 싶었다. 더 오랜 기간 보지 못했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싫어도 여기서 지내도록 해.”

긴 손가락이 잔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털어 넣기 직전에 툭, 하고 말을 내뱉은 리 샤오가 빈 잔을 도로 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정작 화수의 귀에 그 말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손은.”

온 신경은 붕대가 감긴 오른손에 쏠려 있었다. 왠지 잔을 드는 손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어색하다 했더니, 왼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최대한 태연하게 묻기 위해 일부러 속도를 늘어트렸다. 표정도 잘 갈무리했다. 하지만 사실 표정까지 갈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정작 리 샤오는 화수가 아닌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으므로.

“베였어.”

마치 화수의 말을 듣고서야 제게 상처가 있었다는 걸 자각한 사람처럼 가만히 붕대가 감긴 제 손을 응시하던 리 샤오가 툭, 하고 대답했다.

“대체 어쩌다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던 화수가 이내 멈칫했다. 예고도 없이 리 샤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기 때문이다. 눈이 마주쳤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에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으려니 리 샤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유리잔에.”

그 말이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많이 베이셨습니까.”

“다섯 바늘 꿰맸어.”

“…….”

유리잔의 날카로움을 떠올리고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심 좀 하시죠. 손은 다치면 꽤 오래 고생하는데.”

“그러게.”

속상한 마음에 핀잔을 해놓고 또 마음이 쓰인다.

“많이 아프십니까.”

“어. 아파.”

“…….”

순순히 아프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은 예상 못 했던 터라 눈만 껌뻑이고 있으려니 피식, 하고 웃은 리 샤오가 술주전자를 기울인다. 화수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아프신 분이 무슨 술입니까.”

“…….”

내내 한 번도 화수의 질문에 대답을 멈추지 않던 리 샤오가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기분을 상하게 한 건가.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으나 기분이 상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렇게 리 샤오를 흘낏거리던 화수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부스럭.

이불을 젖히고 일어선 것은 그 순간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화수에게 리 샤오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화수의 발길이 향한 곳은 벽이었다. 정확히는 벽에 걸린 화수의 옷을 향해서였지만.

“그날, 드리려고 했던 건데.”

뒤적이던 상의 안주머니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리 샤오에게 다가가 그것을 내밀었다. 화수가 내민 것을 리 샤오는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이상한 거 아니고.”

“…….”

“생일, 선물이에요.”

생일을 망친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설명할 말도 없었다. 곧장 미간을 찌푸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마주한 리 샤오의 표정이 기묘했다. 무표정한 것은 조금 전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미묘하게 종류가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당황한 기색에 가깝달까.

“싫으시면-”

뭐, 황당하기도 하겠지. 뒤늦게 깨달은 화수가 손을 뒤로 물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물러서는 화수의 손목을 단단한 손목이 붙잡지 않았다면.

“줘.”

굳게 닫혔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러면서도 손목을 붙든 손에서는 전혀 힘이 빠지지 않았다. 화수도 함부로 손을 빼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내 리 샤오가 가만히 손가락만 놓았다. 꼭 야생동물에게 먹잇감을 주는 기분이었다.

낚아채듯 가져간 봉투를 리 샤오가 천천히 풀었다. 한 손으로 포장을 푸는 것이 불편해 보였지만 도로 가져오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종이로 둘둘 감아놓은 포장이라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풀 수 있었다.

최고급 실크로 만든 넥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준비했던 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손에 들린 넥타이를 바라보다 리 샤오가 한참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고개가 들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날 주려고.”

“예, 뭐.”

화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화수를 탐색하듯 리 샤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을 화수도 피하지 않았다. 그 말에 거짓은 없었으니까.

“매줘봐.”

그렇게 얼마나 대치했을까. 한참을 말없이 바라만 보다 리 샤오가 들고 있던 넥타이를 불쑥 내밀었다. 곧장 넥타이를 받아 들지 않은 까닭은 단순히 그 말뜻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넥타이 맬 줄 모른다고-”

“가르쳐줬잖아.”

고개를 내젓는 화수에게 리 샤오가 일갈했다.

“기억 안 납니다.”

“다시 가르쳐주지.”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시켜먹어야겠냐고 항의하려던 화수의 눈에 하필 붕대가 감긴 리 샤오의 오른손이 들어왔다.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뭐 어차피 하고 나갈 것도 아니니까. 반쯤 포기한 화수가 리 샤오의 손에 들린 넥타이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뒤이어 긴 타이를 리 샤오의 목에 걸었다.

“한 번 묶어서 매듭을 만들어.”

시키는 대로 매듭을 만들고 다음은요, 하고 고개를 들었던 화수가 멈칫했다. 그제야 자신과 리 샤오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것. 분명 자각하기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한번 자각을 하고 나니 묘하게 긴장이 되었다.

“이쪽으로 한 바퀴 돌리고.”

꿀꺽.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마른침을 삼킨 화수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긴장으로 조금 전에 비해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지만 다행히 서툰 움직임처럼 보였다.

“반대쪽으로도.”

달큰한 숨이 턱 끝을 간질인다. 평소라면 자신보다 더 위에 있어야 할 리 샤오가 저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뭐라고. 이상하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숨을 어떻게 쉬는 거였더라. 천천히 차오르던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한 바퀴 돌려서 이 구멍으로 빼면.”

끝.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으로 구멍으로 넣은 넥타이의 한쪽 끝을 쭉 당겼다.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넥타이를 따라 올라가던 시선이 목 끝에서 멈췄을 때였다.

“그대로 가버리려던 것 아니었나?”

불쑥. 예고도 없이 주어진 질문에 화수가 그대로 굳었다. 눈은 마주한 채였다. 천천히 긴장이 풀어졌다. 마주한 눈동자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심해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납득했고, 그걸 한 번 더 확인하려고 묻는 질문이었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리 샤오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자 화수도 조금은 솔직해질 수 있었다.

“정말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그리 허술하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소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리 샤오의 눈빛이 사나워지는 일은 없었다. 겁이라고는 없는 녀석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리 샤오였으므로.

피식. 바람소리가 일었다. 리 샤오가 손을 내뻗었다. 이번에는 화수도 긴장하지 않고,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긴 손가락이 화수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화수야.”

그리고 그것을 제 쪽으로 끌어 내렸다.

“나를 좋아하도록 해봐. 그게 너한테도 좋을 테니까.”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어쩐지 지친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착각이리라. 설사 착각이 아니라도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슥.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화수를 바싹 당긴 리 샤오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화수도 가만히 입을 열었다. 달큰한 술 향이 입안에 가득 찼다. 술 향기만으로도 취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취했을지도.

투둑. 투둑. 쏟아지던 빗줄기가 어느새 잦아들어 있었다. 유난히 짧아 더 애달픈 여름밤이었다.

* * *

“차를 대기시켜놓았습니다.”

카이의 보고에 리 샤오가 보고 있던 서류철을 덮었다. 카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던 일을 중간에 멈추고 일어서는 리 샤오는 낯설었기 때문이다. 사실 보고를 한 이유도 언제든 나가도 된다는 의미에서 고한 것이었다.

“왜.”

묘한 카이의 시선을 느꼈는지 리 샤오가 물었다.

“아닙니다.”

카이가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퇴근 시간이 빨라진 건 좋은 일이니까. 자신의 대장은 지나칠 정도로 일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다.

의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눈빛이었지만 리 샤오도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이미 결재를 끝낸 서류철은 한쪽으로 밀어놓고 다 끝내지 못한 서류철을 넣어두기 위해 아래쪽 서랍을 열었을 때였다.

“왜 그러십니까.”

멈칫한 채 서랍 안을 보고만 있는 리 샤오에 카이가 되물었다. 그리 물으면서도 이미 리 샤오가 앉은 책상 쪽으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혹 누가 위험한 물건이라도 넣어두기라도 한 것일까. 불안한 기분을 억누르면서 카이가 빠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렇게 바싹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리 샤오가 서랍 안에서 꺼내 든 건 서류봉투였다.

하아.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카이의 걸음이 그제야 조금 느릿해졌다.

“그건.”

뒤늦게 봉투의 정체를 카이도 기억해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봉투를 리 샤오에게 전해준 사람이 바로 카이 본인이었으므로.

룽오 부장의 특별조사실을 도청했던 기록이었다. 당시 룽오 부장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잠시 서랍 안에 넣어두고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서랍을 확인한 리 샤오가 멈칫한 채 굳어 있던 까닭이었다.

사실 내용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화수는 용의선상에서 벗어난 상황이었고 가볍게 확인만 하려던 것이었다. 리 샤오가 기막혀한 부분은 이 기록을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거였다.

일에 결벽증이 있는 리 샤오로서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가장 납득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자신이 무엇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지만.

“제가 확인하고 보고드릴까요.”

대화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들린 숨소리, 작은 소음 하나까지 모두 기록해서 사실 두툼한 분량에 비해 별것 아닌 내용들이 더 많을 터였다. 아무래도 퇴근하려는 길에 그것을 어쩔까 고민하는 중이라 생각한 카이가 그리 고하며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드륵.

앞으로 밀었던 의자를 도로 당기고 리 샤오가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실로 묶어놓은 입구를 열어 한 손으로 쥐기에도 힘든 종이뭉치를 꺼내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허면 절반은 제가-”

애매해진 손을 슬그머니 뒤로 물리면서 카이가 덧붙였다. 하지만 고개를 든 리 샤오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곧바로 입을 다물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상사의 일 스위치가 눌러진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누구도 리 샤오를 말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카이가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차를, 준비해 오지요.”

돌아오는 대답 같은 건 없었다.

휙, 휙, 넘겨지는 종이소리를 대답 삼아 뒷걸음질 치던 카이가 뒤돌아서서 문을 향해 걸었다. 아무래도 자정까지는 퇴근하기 그른 것 같으니 나가는 길에 운전기사에게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가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왜, 그러십니까.”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이가 묻는다. 사실 리 샤오의 표정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정확한 간격으로 종이를 넘기던 손이 멈춘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이가 책상 쪽으로 한 발 가까이 다가서려고 할 때였다.

드륵.

리 샤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이도 걷던 방향을 바꿔 옷걸이에 걸어둔 옷을 꺼내 리 샤오가 두 팔을 꿰기 쉽게 펼쳐 잡았다. 하지만 그렇게 대기하고 있는 카이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리 샤오는 이미 문 쪽으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부장?”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잠깐 나가는 경우에도 책상을 정리하지 않고 나가는 일은 없었다. 제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경우는 더더욱. 겉옷을 그러쥔 카이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서류를 펼쳐놓은 책상과 문을 번갈아보던 카이도 결국 리 샤오가 사라진 쪽으로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 * *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화수를 향해 물었다.

“화장실 좀.”

“아, 예.”

작게 고개를 끄덕인 시종이 앞장을 섰다. 그런 시종을 보는 화수의 눈동자에 순간 못마땅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표정을 갈무리한 화수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사실 이런 감시쯤 화수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멈칫.

복도를 가로지르던 화수가 걸음을 멈췄다. 앞서가던 시종의 걸음이 멈췄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데. 바닥만 보고 걷던 화수의 고개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성큼 다가선 상대가 팔을 낚아채는 것이 더 빨랐다.

“아-”

붙잡힌 팔이 아팠다. 하지만 불만을 토로할 새도 없이 몸의 방향이 뒤바뀌었다. 사정없이 끌어당기는 힘에 무릎이 휘청였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질질 끌려가던 발이 겨우 제대로 된 걸음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앞서가는 등을 향해 화수가 입을 열었다.

“화장실 가는 길이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답지 않게 변명까지 했지만 딱딱하게 굳은 목은 그대로였다. 뭐가 또 기분이 상한 걸까. 빠른 걸음을 쫓아가며 생각해봤지만 짐작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드륵.

그사이 방 문 앞에 도달한 리 샤오가 열어젖힌 문 안으로 화수를 밀어 넣었다. 탁. 등 뒤로 닫히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 하지만 화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틀었다. 그제야 리 샤오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야차 같은 얼굴이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마주한 리 샤오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그럼에도 화수는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리 샤오였다.

“배 속의 그 아이.”

고저 없는 나직한 목소리가 툭, 하고 떨어졌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 심장이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뒤이은 질문.

“누구 아이지?”

-!

달음질치던 심장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 깜빡깜빡. 눈만 깜빡이던 화수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누구긴 누굽니까. 진 사장-”

“거짓말이잖아.”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달리 태연한 목소리였으나 안타깝게도 리 샤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미 답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리 샤오는 간단히 화수의 말을 일축했다.

“진 사장을 만나기 전에 이미 각인되어 있었다며.”

“…….”

입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 가면을 뒤집어쓴 덕에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움츠러드는 눈동자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다.

“그건 알고 있었군.”

알고 있었냐는 질문이 아닌, 이미 결론을 낸 중얼거림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화수도 더 이상 변명하길 포기하고 달싹이던 입술을 닫았다.

“피임약은 사실 그 각인을 깨는 약이었다는데.”

“…….”

찰나긴 했지만 순간 화수의 눈에 번지는 놀란 기색을 리 샤오는 놓치지 않았다. 그건 이미 녹취록에서 확인했지만 그래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왜 거짓말을 했냐는 거야.”

“…….”

“적어도 각인이 깨졌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해도 진 사장의 아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을 텐데.”

“…….”

다른 건 다 예측 가능했으나, 그 부분만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떤 새끼야.”

리 샤오가 나직이 물었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새까만 눈동자로 대답 대신 가만히 자신을 응시한다.

“어떤 새끼냐고 물었어.”

“어릴 적, 풋사랑이었을 뿐입니다.”

다그치는 리 샤오에 더는 버틸 수 없었던 화수가 입을 열었다. 물론 그 대답이 리 샤오의 성에 찰 리가 없었지만.

“이름.”

“모릅니다.”

“…….”

그때는 몰랐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제가 각인된 것도 모를 겁니다.”

“하.”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라는 걸 깨달은 리 샤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심지어 짝사랑이었단 말인가.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그런 기분과는 달리 상황을 파악하는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 각인은 깨졌다는 말이겠군.”

“…….”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다는 듯 화수의 눈매가 찌푸려지는 것을 리 샤오는 놓치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던-물론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지만- 리 샤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 속의 그 아이가 내 아이일 수도-”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하지만 그런 리 샤오의 기대를 화수가 딱 잘랐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만 각인이 가능한 것을요.”

“…….”

만약 곧바로 리 샤오가 반박했다면, 더 이상은 화수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화수라도 리 샤오의 눈을 마주 보면서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리 샤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화수를 응시했을 뿐이다. 마주한 눈동자가 검었다. 눈동자가 검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혼탁한 먹물을 담아놓은 그릇 같았다.

제 거짓말을 알아차린 건가. 목이 바짝 말랐다. 하지만 마른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저 침묵이 내려앉았을 뿐인데 마치 천천히 물속으로 잠기고 있는 것처럼 숨이 찼다. 목까지 차오른 물에 이대로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순간.

“그랬지.”

리 샤오가 입을 열었다.

하아, 하아, 하아.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느라 리 샤오를 살피는 것이 늦었다.

“멍청한 소리를 했군.”

화수가 다시 눈으로 리 샤오를 쫓았을 때 이미 그는 발길을 돌린 뒤였다. 이번에도 단단한 등만 시야에 들어왔다. 탁. 그마저도 곧바로 닫힌 문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대체 무슨 기대를 한 건가.

걸음을 내딛던 리 샤오가 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리 웃는 입술과 달리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각인을 깰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 제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지키려고 했던 사내가 진도현이 아니던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자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미칠 것 같았다.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갈 데 없는 분노가 안에서 마구 들끓었다.

“도련님. 어디 가십니까. 아니, 언제 오셨던-”

현관을 나서려는 리 샤오를 발견하고 집사가 다가왔다. 집에서 밖으로 나가는 방향이라 반사적으로 어디 가시냐고 물었지만 사실 리 샤오가 집에 돌아온지도 몰랐던 터라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번졌다. 하지만 그런 궁금증을 풀어줄 리 샤오는 이미 밖을 향해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요 며칠 평화롭다 싶더니.

늙은이의 괜한 걱정이면 좋겠으나 사실 집사의 예감이 빗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미 빈 현관문을 바라보는 집사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왜 이제 오십니까.”

현관문을 들어서던 홍 의원이 책망에 가까운 인사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왕진을 다녀오던 길에 이른 오후부터 술판이 벌어진 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는 술을 몇 잔 받아 마시느라 지체하긴 했지만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홍 의원이 사람들에게 붙잡혀 이런저런 일로 늦는 경우는 자주 있기도 했고, 그것이 아니라도 부인은 홍 의원이 하는 일에 좀처럼 토를 다는 법이 없었다. 그런 부인에게서 책망하는 말을 들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그것이, 오는 길에 김씨네한테 붙잡혀서.”

“얼른, 들어오세요. 손님이 와 계십니다.”

하지만 변명을 늘어놓는 홍 의원의 팔을 부인이 잡아끌었다. 손에 쥐고 있던 왕진가방도 빼앗듯 가져간다.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집 안으로 들어서던 홍 의원은 뒤늦게 부인이 왜 그렇게 재촉을 했는지 깨달았다.

“오셨, 습니까.”

응접실 소파에 앉은 리 샤오와 그 뒤로 장승처럼 버티고 있는 카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꽤 기다린 시간이 오래된 모양이었다. 부인이 대접했을 찻잔의 차는 다 식어빠진 상태였다. 이번엔 전화기의 선도 잊지 않고 꽂아두었건만. 하지만 그런 불만을 리 샤오에게 토로할 수는 없어 슬쩍 말을 돌렸다.

“연통을 주시면 제가 갔을 텐데요.”

“물어볼 것이 있어서.”

서로에게-특히 홍 의원에게- 그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을 돌려 했지만 리 샤오는 제 할 말만 할 뿐이었다. 리 샤오의 성격을 아는 터라 작게 한숨을 내쉰 홍 의원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손은 괜찮으십니까.”

“이거.”

처음보다는 붕대가 많이 얇아져 있었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전했다. 상처 소독과 붕대를 가는 것 정도는 카이가 할 수 있다고 해서 맡겨두었던 터라 실제 상처를 본 것은 지지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물론 그런 홍 의원의 질문은 가볍게 무시당했지만.

“이게, 뭡니까.”

“약.”

하얀 종이를 몇 번이고 접어놓은 그것은 보통 가루약을 포장할 때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익숙한 모양새에 보는 순간 약이라는 사실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으나 영문을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였다.

부스럭.

앞에 놓인 것을 집어 들어 홍 의원이 조심스럽게 펼쳤다. 코끝으로 확 풍기는 냄새에 그의 눈매가 일그러진다. 이건.

“비소가 아닙니까.”

약하긴 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홍 의원의 얼굴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구겨졌다.

“기어코, 각인을 깨시겠다는 겁니까.”

“…….”

“그럴 몸 상태가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홍 의원의 오해에도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있던 리 샤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엉망이 된 몸 상태가, 이 약 때문일 수도 있나?”

“……그게 무슨.”

“만약 이걸 오랜 기간 꾸준히 복용했다면, 몸이 어떻게 되는 거냐는 말이야.”

“당연히, 망가지지요.”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비소가 아닌가.

말로만 가볍지, 각인을 깬다는 것은 사실 몸이 망가져서 정신이 약해진 순간을 노린다는 뜻이었다. 예전에도 고하긴 했지만 각인이 깨진 이가 어찌 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기록이 없는 것을 보고 아마도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따로 기록이 남지 않았다고 추측할 뿐.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 거지?”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지난번 기억을 떠올린 홍 의원이 먼저 확인을 구했다. 순간적으로 리 샤오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일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것이 꼭 해일이 일기 전 잔잔한 바다를 보는 것만 같았다.

“해봐.”

리 샤오의 허락이 떨어졌지만 홍 의원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단순히 리 샤오의 눈치를 보아서만은 아니었다. 의원으로서 환자의 좋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애기씨의 안녕도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누가 태어나지도 않은 녀석에 대해 물었어?”

“…….”

“녀석의 상태가 어떠냐고.”

“…….”

안 그래도 떨어지지 않던 입술이 아예 딱 붙었다. 홍 의원이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리 샤오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제야 홍 의원이 화수의 상태가 아닌 배 속 아이의 상태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런 불길한 예감은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홍 의원의 고개가 아래로 떨궈졌다.

“무슨 뜻이야.”

“…….”

“무슨 뜻이냐고 묻잖아.”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버텨주기만 바랄 뿐입니다.”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뭐야. 이거. 리 샤오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려 제 심장께를 확인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더 이상하긴 했지만.

“헛소리하지 마.”

“죄송합니다.”

“뭐라도 해.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몸에 좋다는 건 뭐든-”

“임산부에게 함부로 약을 쓸 수는 없습니다.”

“…….”

방법이 없다. 홍 의원은 그런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리 샤오에게는 다른 의미로 들린 모양이었다.

“임산부가 아니라면?”

“……예?”

“아이만 없다면, 뭐라도 해볼 수 있다는 거지.”

리 샤오의 말대로 배 속의 아이만 없다면 뭐라도 해볼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있잖습니까.”

“…….”

이번엔 리 샤오가 대답이 없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 미간을 찌푸리기도 전에 마주한 리 샤오가 입을 열었다.

“아이는 지우면, 없어지는 거잖아.”

홍 의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무서운 말씀은, 하는 게 아닙니다.”

“산 사람보다, 배 속의 아이가 더 중요하다는 건가?”

“아이를 지운다고 몸이 낫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하지만 리 샤오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가능성은 있겠지.”

“고작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귀한 손을 포기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가만히 입을 다무는 리 샤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뭐, 의원은 여기만 있는 게 아니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리 샤오에 홍 의원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리 샤오 님.”

“…….”

“안 됩니다, 리 샤오 님.”

홍 의원이 리 샤오의 앞을 막아섰다. 흉흉한 눈과 마주했지만 홍 의원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제대로 약을 쓰지 않으면, 아이뿐만 아니라 화수 님까지 위험하게 됩니다.”

도성 내 저보다 실력이 좋은 의원은 없었다. 무엇보다 요 몇 달 간 화수의 상태는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저조차도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데 다른 의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화수가 위험하다는 말에 리 샤오의 걸음도 그대로 멈췄다. 물론 흉흉한 눈빛은 조금 전보다 더 심해졌지만.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건가?”

“…….”

난감한 듯 어금니를 꽉 깨물었던 홍 의원이 뒤늦게 떠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 화수 님의 의견도 들어보지요. 본인의 몸이니.”

“…….”

급하게 떠올린 생각 치고는 괜찮다 싶었다.

“화수 님께서도 허락하면 그땐 저도 더는 토 달지 않겠습니다.”

“안 돼.”

하지만 리 샤오는 그런 홍 의원의 제안을 단칼에 잘랐다.

결코 화수가 진도현의 아이를 포기할 리 없었다. 차라리 자신의 아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좀 더 쉬웠겠지. 스스로 생각해놓고 씁쓸해진 리 샤오가 쓰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홍 의원에게 경고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녀석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따끔따끔, 그가 뿜어내는 패기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이번만큼은 홍 의원도 리 샤오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그가 뿜어내는 패기에 숨이 막혀서만은 아니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리 샤오의 표정이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패기를 뿜어내는 것은 바로 리 샤오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 * *

“거기서, 뭐하십니까.”

움찔. 순간 굳었던 화수가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떴는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든 눈이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매서운 기색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집사의 눈초리가 좋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화수가 지금 서성이고 있던 곳이 현관 바로 앞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화수의 옆에 붙여놓은 시종을 확인하고서야 조금은 누그러졌지만 못마땅한 기색은 그대로였다.

“그 고생을 하시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셨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볼을 긁적이며 변명해보지만 집사는 그런 화수의 말을 전혀 믿어주지 않았다.

“여기서 이러고 계시다가 리 샤오 님이 보시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잔소리를 하면서도 집사의 시선은 현관 바깥쪽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느라 화수의 눈이 살짝 커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실 화수가 이곳을 서성이고 있었던 건 집사가 생각한 것처럼 밖을 나가려던 것이 아니었다. 종일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시종 외에도 대문 앞을 경비병이 지키고 서 있다는 걸 뻔히 다 알고 있는데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잖은가.

믿지 않겠지만 화수는 리 샤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종의 사건이 있었던 그날 밤, 밖으로 나가버린 리 샤오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것.

“오늘은 집에 들어오시는 건가요?”

“당연히 들어오시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집사의 반응에 화수의 미간이 좁혀진다.

“허면 요 며칠간 방에 돌아오지 않은 것은.”

“별채 손님방에서 주무셨는데 모르셨……군요.”

화수의 표정을 보고서 그가 전혀 몰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본인 방을 두고 왜.”

그러게 말입니다. 영문을 모르겠는 것은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눈앞의 사내가 그 원인이겠지. 그리 추측만 할 뿐이었다.

“허니, 어서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요 며칠 안 그래도 기분이 아주 저조한 리 샤오가 문 앞에서 어정거리는 화수를 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리 결론을 낸 집사가 화수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잠-”

“어서요.”

그러고는 버티는 화수의 어깨를 앞으로 밀었다.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광이 반질반질 날 만큼 잘 닦아놓은 마룻바닥을 어쩌지 못하고 죽죽, 미끄러졌다. 이내 화수도 포기한 듯 제 발로 걸었다. 집사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기보다는, 이 상태로 리 샤오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기 때문이 컸다.

“간식거리라도 좀 갖다드릴까요.”

터덜터덜 걸어가는 화수의 풀죽은 뒷모습을 보다 못한 집사가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 방에 오지 않은 거구나.

탁, 하고 닫히는 장지문을 등지고 선 화수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리 많은 방을 두고 굳이 리 샤오가 밖에서 지낼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자신이 꼴 보기 싫으면 다른 방으로 가면 되는 것을.

하지만 그 당연한 일을 화수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많은 방을 두고도 리 샤오는 화수를 자신의 방에서 지내게 했었으니까.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그랬던 리 샤오가 이제는 같은 방을 쓰고 싶지도 않을 만큼 자신에게 질렸다는 거니까.

쿵쿵쿵쿵.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구에게 묻는 질문인지도 모를 질문을 되뇐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얼굴이 차갑게 식는 기분에 화수가 얼굴을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문질렀다. 그럼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온몸을 휘감았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방 안을 빙빙 돌았다.

그냥 말했어야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해놓고 화수가 피식, 하고 웃었다. 기가 막혀서.

사실 먼저 밀어낸 쪽은 자신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더는 내게 상관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리 샤오를 밀어냈었다. 어떤 경우에도 아이의 아버지가 리 샤오라는 것을 밝힐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리 샤오가 제게서 물러날 듯하니 아이를 이용해서라도 붙잡고 싶어진 것이다. 기가 막혔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사실은 그것을 다 깨달은 뒤에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간절해졌다. 간사하게도.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어느새 달음질을 하고 있었다. 심장 뛰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불안감은 더 증폭되었다.

이미 늦었으면 어쩌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화수도 더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날의 기억이 겹쳐졌다.

그날도, 가지 않겠다고, 그냥 잊어버릴 거라고, 평생, 떠올릴 좋은 추억을 가졌으니 되었다고, 그리 생각하고 버티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달려갔지만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었던, 그날의 기억.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드륵.

이미 화수는 장지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사실 리 샤오를 만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아무도 없는 이곳에 혼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나를 좋아하도록 해봐. 그게 너한테도 좋을 테니까.”

일단 그날 하지 못한 대답부터. 시작은 그리하면 될 것 같았다. 걷는 걸음이 점점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 * *

“정말, 하실 생각입니까.”

그리 묻는 카이의 시선은 탁자에 놓인 약 꾸러미에 닿아 있었다. 정면을 보고 있던 리 샤오도 카이의 질문에 흘낏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도로 시선을 거뒀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집사에게 가져다줘.”

“하지만-”

“가져다주라는 말 못 알아듣나.”

“…….”

리 샤오가 두 번 말하기를 싫어한다는 걸 카이도 모르지 않았다. 사나운 시선이 쏟아졌다. 하지만 카이도 이번엔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아니, 물러날 수가 없었다.

“좀 더 찾아보면 다른 방법이-”

“시간낭비야.”

“…….”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순 없어.”

녀석을 두고 그런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산모와 아이 둘 다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화수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설사, 지금 당장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몇 년 후의 안녕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다. 허니 아이라도 살리는 쪽이 합리적이라고. 어떤 생명이 더 소중하다,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마 살릴 수 있는 쪽이라도 살리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하지만 지금 리 샤오에게 그런 것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하루라도 어릴 때 떼는 게 맞겠지.”

“…….”

녀석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라는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그런데 합리적이니, 이치니 그런 것이 머릿속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녀석의 아이라면, 설사 다른 씨를 받은 아이라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녀석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녀석이라면.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가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가져다주는 수밖에.”

“제가-”

리 샤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 위에 놓인 약 꾸러미를 집어 들려는 리 샤오를 만류하려던 카이가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곧 빠른 걸음이 문 쪽을 향했다.

“누구냐.”

드륵-! 장지문을 열어젖힌 카이가 낮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이내 눈매가 가늘어진다.

“왜.”

문을 열어젖힌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굳어 있는 카이가 의아했던지 뒤늦게 질문이 돌아왔다. 그제야 카이도 붙잡고 있던 미닫이문을 도로 닫았다.

“잘못 들은 모양입니다.”

분명 인기척을 느꼈는데.

하지만 내다본 바깥은 텅 비어 있었다. 혹 도망친 것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지만 그런 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잘못 들은 것이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카이를 리 샤오는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어지간히 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아닙니다.”

답지 않게 당황하는 카이를 가볍게 무시하며 리 샤오가 약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제가.”

그 앞을 카이가 황급히 가로막았다. 리 샤오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그것을 확인한 카이가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

가타부타 말도 없이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을 향해 카이가 한 번 더 손을 내밀었다.

“주십시오.”

“…….”

결국 약 꾸러미는 카이의 손으로 넘어왔다. 카이의 어깨가 조금 주저앉았다.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이번에도 머뭇거리면 리 샤오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터였다.

빠른 걸음으로 뒤돌아선 카이가 닫았던 문을 열었다. 밖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카이가 텅 빈 복도로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이가 리 샤오였다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텅 빈 복도에 희미하게 남은 달큰한 향을.

리 샤오밖에 맡지 못하는 향이었다.

* * *

“화수 님!”

문 앞을 서성이던 사내가 소리를 죽인 채 소리쳤다.

“대체 어딜 다녀오십니까.”

방금 방으로 들어갔으니 화수가 다시 나오는 데는 조금 시간적 여유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사이 출출한 배를 채울 요량으로 잠깐, 말 그대로 아주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인데 그사이 화수가 사라졌을 줄은 몰랐다.

집사에게 들키기 전에 화장실이며, 화수가 갈 만한 공간을 뒤지고 있던 시종으로서는 태평하게 걸어오고 있는 화수를 보니 일차적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원망스러운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혼자 돌아다니시다가 집사께서 보시기라도 하면 저는-, 왜 그러십니까.”

혹, 귀신처럼 기척을 숨기고 다니는 집사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그맣게 속삭이듯 원망의 말을 쏟아내던 시종이 뒤늦게 눈을 키운다. 어두운 복도를 가로지르는 화수의 낯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본래도 밀가루를 뒤집어쓴 듯 허여멀건 낯색이, 허옇게 질려 생기라고는 한 톨도 없었다.

“속이, 안 좋으십니까?”

수 번의 구역질로 몸속의 것을 모두 게워낸 후의 모습과 비슷했다. 물론 그때도 이리 혼이 빠진 얼굴은 아니었지만 시종으로서는 그것 말고는 추측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풀이 죽긴 했어도 이리 다 죽어가는 얼굴은 아니었으니까.

“물을 가져올까요.”

말없이 가던 걸음을 내딛는 화수의 뒤를 따르며 시종이 물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시종이 걸음에 속도를 내 화수보다 먼저 문고리를 잡았다.

드륵. 제 앞에서 열리는 문을 화수가 통과했다. 그것을 확인한 시종이 이번에도 화수보다 앞서서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를 젖혔다. 핏기 없는 얼굴로 걸어온 화수가 천천히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의원을 부를까요.”

“물.”

“물 가져올까요?”

짧은 단어였지만 처음으로 화수의 목소리를 들은 시종이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등을 지고 모로 누운 화수의 어깨에 이불을 덮어준 시종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기, 조금 전에 제가 자리를 비운 일은 집사님께는…….”

“목말라.”

“아, 예, 예. 얼른 물 가져다드릴게요.”

가타부타 제 말에 대꾸는 없었지만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의미를 알아차린 시종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탁.

조용히 장지문이 닫혔다. 이불을 끌어 올려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눈을 감았다. 사실 감지 않아도 이미 눈앞은 깜깜했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고집스럽게 눈을 감았다.

더럽게 시간도 못 맞추지.

이번만큼은 제대로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늦었다. 아니, 이번엔 너무 일렀다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든 맞추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늘 그랬다. 화수는 늘 운이 나빴다.

대체 왜.

눈을 감은 화수가 질문을 되뇌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니 하루라도 어릴 때 떼는 게 맞겠지.”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랐다. 아니, 적어도 산모와 아이 모두 위험하다며 말리는 카이의 말에 리 샤오가 조금은 망설여주기를 바랐다. 그게 뭐라고. 멋대로 제 아이를 지우려고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와중에도 그를 두둔할 핑계를 찾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사실 어느 정도 짐작 가는 것은 있었다. 이 와중에도 쓸데없이 좋은 머리는 착실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시간낭비야.”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리 샤오는 배 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는 거였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순 없어.”

설사, 아니더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나직이 되뇌는 리 샤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위험의 싹은 애초에 뿌리부터 없애버린다. 누구보다 냉정하고 잔인한 사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그 말이 왜 이렇게 충격적일까. 리 샤오가 자신을 얼마나 경멸해 마지않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것을 어찌 이리도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그것이 지금 화수가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그 때였다.

드륵.

이불 너머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당연히 물을 가지러 간 시종이라 여겼다.

“나중에-”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거야.”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였다.

“뭐라, 목소리라도 내봐.”

“…….”

어쩐지 초조하게 들리는 목소리. 제 귀가 어찌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리 샤오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답도 못 할 정도로 상태가 나쁘다면 의원을 부르는 수밖에.”

“……그냥.”

힘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작은 목소리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던 리 샤오가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이불 너머로도 숨을 죽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리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마저 하라는 듯.

화수가 달싹이던 입술을 다시 움직였다.

“언제나처럼, 속이 뒤집어진 것뿐입니다.”

“…….”

그제야 리 샤오가 도로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제 등으로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확인하게 이불이라도 치워봐.”

평소라면 직접 제 상태를 보고 싶다는 걱정의 의미로 들렸을 말이 지금은 너를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로만 들릴 뿐이다. 이불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화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되셨습니까.”

마주한 화수의 표정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전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렸던 얼굴은, 왜 이리 귀찮게 구느냐는 시큰둥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그나마 파리한 낯색이 화수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을 뿐. 그것도 아니었다면 꾀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의원은 부르지 않아도 되겠군.”

그제야 나직이 중얼거리는 리 샤오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다른 것은.”

“…….”

슥. 리 샤오의 손이 앞으로 다가왔다. 위협적이지 않은 그것을 화수는 피하지 않았다. 대답은 없었지만 바라는 것이 없다는 화수의 눈빛을 읽은 리 샤오가 가만히 화수의 볼을 손등으로 쓸어내린다.

차갑게 식은 볼과 델 듯이 뜨거운 손이 퍽 대조적이었다. 조심스럽게 볼을 타고 내려온 손등으로 더 가늘어진 턱을 한 번 더 스친 뒤에야 리 샤오가 손을 물렸다. 그러더니 툭, 하고 한마디 내뱉는다.

“약해빠진 몸이군.”

“…….”

그제야 화수는 이유를 알았다. 이런 눈빛과 이런 목소리로 사람을 헷갈리게 하니까. 그러니 까맣게 잊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러면 안 되지 않나. 멋대로 내 배 속의 아이를 지울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이리 걱정하는 척을 하면 안 되는 거잖은가.

“왜.”

마주한 리 샤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을 깜빡이자 화수의 눈에 고였던 물기가 툭, 하고 볼을 타고 흘렀다. 참아볼 새도 없었다. 리 샤오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

“의원을-”

“왜 다른 방에서 주무십니까.”

의원을 부르라 소리를 내지르려던 리 샤오의 말을 자르며 화수가 나직이 물었다. 다시금 화수를 응시하는 리 샤오의 표정이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화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리 샤오 님 방이잖습니까.”

“……내가 다른 방에서 지내는 것이 울 만큼, 싫었단 건가.”

“예.”

“…….”

리 샤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찌푸린 눈매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알았어.”

“…….”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울어.”

제발.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애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툭, 툭, 소리도 없이 볼을 덧그리는 눈물을 보고 있으려니 뱃속이 앓아 내리는 것 같았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리 샤오가 손을 뻗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말라빠진 어깨를 당기자 순순히 끌려왔다.

리 샤오의 단단한 어깨에 화수의 턱이 놓였다. 허공을 보는 화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볼을 타고, 턱을 괸 어깨를 흠뻑 적셨다. 눈물샘이 고장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픈 곳도 없는데 이리 눈물이 쏟아질 리가 없었다. 화수가 눈을 감았다. 툭, 다시금 가득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 * *

‘정말, 그거면 되나?’

사내가 물었다.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거듭 확인하는 사내에도 화수는 태연히 손에 쥐고 있던 커다란 왕만두를 입으로 가져갔다.

한입 크게 베어 물자 육즙이 쭉, 하고 뿜어져 나오는 그것은 시장 자판에서 파는 흔한 왕만두였다. 하다못해 어디 들어가 앉을 곳도 없이 길가에 서서 왕만두를 베어 무는 화수를 사내는 퍽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치이지 않도록 슬그머니 화수의 옆으로 위치를 옮겼다.

‘하나 더 사 줄까?’

허겁지겁 제 얼굴만 한 만두 하나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화수를 보고 있던 사내가 물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화수의 고개는 가로저어졌다.

‘정말 더 안 먹어도 되겠어?’

화수를 향해 사내가 거듭 물었다. 그러면서도 화수가 아쉽다는 듯 손가락에 달라붙은 만두피까지 이로 긁어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덕. 순간 고민하긴 했지만 결국 화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긴 해도 늙은이가 옷맵시를 위해 꼼꼼하게 입혀놓은 코르셋이 몸통을 꽉 조이고 있어 더 이상은 무리였다. 사내도 더 이상은 권하지 않았다.

‘그럼 그만 돌아갈까.’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리는 사내에 만두를 먹느라 위로 살짝 들렸던 여우가면을 매만지다 화수가 멈칫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배도 채웠겠다 더 이상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이유 같은 건 없었으니까. 헌데 그리 당연한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론 화수의 얼굴에는 무표정한 여우가면이 씌어 있을 뿐이었지만.

‘잠-’

이미 걸음을 내딛은 사내는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걸음도 빨랐다. 그나마 키가 커서 시장통 인파 속에서도 모습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사람들 머리 위로 삐죽 나온 사내의 머리통만 보고 걷느라 제 발밑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철퍽.

차진 소리에 굳었던 화수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궈졌다. 망했다. 제 왼발을 확인한 화수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필이면 급하게 디딘 곳이 물웅덩이였다. 달구지가 많이 다니는 시장길은 여기저기 움푹 팬 곳이 많았고, 그 웅덩이에는 가게 주인들이 내다 버린 오물이 고여 있기 일쑤였다.

그냥 물이어도 큰일일 판에, 시커먼 오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를 밟았으니. 발목까지 스며 올라오는 축축한 느낌으로 이미 예상하긴 했지만 실제 눈으로 본 광경은 더 처참했다. 잘 닦아놓은 구두도 구두지만 문제는 신발 안에 신은 하얀 레이스 양말이었다. 값비싼 양말이 거무죽죽한 물이 들어 엉망이 된 것을 보니 등줄기가 서늘했다. 변태영감이 유독 집착하는 것이 양말이었다.

‘무슨 일이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그대로 가버린 줄 알았는데. 상황도 잊고 그런 생각만 멍하니 하고 있으려니, 사내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기묘한 반응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내렸던 사내의 눈에도 엉망이 된 신발과 양말이 보였다.

‘꽤나 손이 많이 가는군.’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눈에 제가 어떻게 보일지 알았기 때문이다. 신발이 더러워졌다고 걸음도 걷지 않고 버티고 있는 부잣집 영애로 보였겠지. 사실 영감만 아니었다면 고작 더러운 물에 발 좀 담갔다고 이리 굳어 있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말할 수도, 말할 생각도 없는 화수는 조용히 웅덩이에서 발을 뺐다. 잔뜩 젖은 신발을 대충 흙바닥에 문지른 뒤, 사내가 걸어온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귀찮아 죽겠다는 그런 표정은 더 이상 짓지 말라고. 그런 항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걸음은 몇 보 가지 못하고 멈췄다. 빠른 걸음으로 쫓아온 사내가 화수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잠시 있어.’

‘…….’

‘신을 사 올 테니까.’

필요 없다는 의미로 화수가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기분이 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다른 신발은 소용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화수를 사내는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지.’

그런 화수의 앞을 사내가 한 번 더 가로막았다. 그러더니 찌푸린 얼굴로 사과를 해온다. 그제야 사내의 찌푸린 얼굴이 난처한 표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사내를 물끄러미 보던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사내가 사과할 이유는 없었다. 제 부주의였고, 제 사정이었다. 그럼에도 사과를 받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귀한 사람은 자신이 실수를 했을 때도 사과를 받는구나. 잘못을 하지 않아도 상대의 기분이 상해 보이면 일단 잘못을 빌어야 하는 화수로서는 조금은 기묘한 경험이었다.

‘비슷한 것은 못 찾겠지만, 일단.’

딱 봐도 제법 비싼 값을 주고 만든 것이 분명한 가죽구두였다. 그런 것을 이 시장통에서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반응이 없는 화수를 사내는 그런 이유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대신, 비슷한 것은 다음에 구해주지.’

다음. 다른 것은 다 사라지고 다음이라는 단어만 뇌리에 와 박혔다. 다음이, 있는 건가. 하지만 그것을 되물을 수는 없었다. 말을 할 수 있었더라도 아마 같았을 것이다.

‘3일, 아니, 이틀 뒤에는 꼭 구해 줄 테니까.’

초조한 기색마저 느껴지는 그 말에 화수도 그제야 한발 뒤로 물러섰다. 알았다는 의미였다. 사내의 어깨도 조금 내려앉았다. 그래봐야 자신을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는 듯한 위압감은 여전했지만.

저벅저벅.

얌전히 기다리겠다는 의미를 확인한 사내가 발길을 돌렸다. 조금 전 오던 길에 신발가게가 있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리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적어도 저 찝찝한 신발을 신고 걷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안 그래도 빠른 걸음을 더 빨리했다.

빠른 걸음으로 사내가 사라졌다. 거듭 그것을 확인한 화수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여기.’

화수가 손을 들었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인력거가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치맛자락을 말아 올린 화수가 능숙하게 인력거에 올라탔다.

‘홍매루.’

목적지를 대자 삐걱거리면서 인력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수의 고개가 무의식적으로 꺾였다. 물론 사내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바퀴의 속도가 빨라졌다. 아무리 고개를 꺾어도 더 이상 그 길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화수는 고개를 바로 했다.

덜컹, 덜컹.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인력거가 마구 덜컹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손에 쥔 여우 가면을 결코 놓지 않았다. 그것마저 없으면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이 실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날이 좋은 봄날, 잠깐 조는 틈에 꾼 꿈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화수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손에 쥔 가면은 더 꽉 움켜쥔 채였다.

그랬는데.

북적이는 시장통을 바라보며 화수가 자조적으로 되뇌었다.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건가.

물론 그 질문에 답해줄 이는 없었다. 제 발로 걸어온 이도 모르는데, 누가 그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3일, 아니, 이틀 뒤에는 꼭 구해 줄 테니까.]

그게 뭐라고. 사실 약속이랄 것도 없었다. 게다가 제가 말없이 사라져버렸으니 그 약속은 더더욱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화수는 그 약속을 들었던 장소에 있었다.

왤까.

오늘은 영감에게 호출되는 날이었고, 영감이 준 양말을 멋대로 더럽힌 죄로-열심히 빨아봤지만 새하얀 색으로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평소보다 심하게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겉껍질은 영감이 입혀놓은 옷과 장신구로 완벽해 보였지만 그 안은 엉망이었다. 솔직히 오늘은 두 발로 걸어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지독하게 당했다. 당장이라도 가게로 돌아가 눕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는데, 어째서 저는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걸까. 심지어 그가 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으면서.

하지만 화수는 몰랐다. 사람은 아프고 힘들 때, 본능적으로 제게 가장 따뜻한 곳을 찾게 되어 있다는 걸. 그가 유일하게 저를 사람답게 대해준 이였기 때문이라는 걸. 화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늘 혼자였으니까. 혼자 가만히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드는 방법 말고는 아픈 걸 견디는 방법은 알지 못했으니까.

이상도 하지.

여기로 달려오는 동안에는 전혀 아픈 것도, 힘든 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곳에 더 이상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 그대로 주저앉고 싶어졌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무엇보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터덜터덜.

화수가 뒤돌아섰다. 기운이 다 빠진 두 발을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막 뒤집어쓰고 있던 여우 가면을 벗으려 할 때였다.

‘시종도 없이 혼자 나다니는 건 위험하다고 분명 경고했을 텐데.’

덜컹.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았다. 뒤돌아서지도 못했다. 돌아섰는데 그곳에 아무도 없을까 봐.

저벅저벅.

그런 생각으로 굳어 있는 화수의 등 뒤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라고 할 땐 가버리더니, 지금은 또 여기 와 있고.’

점점 커지던 발소리가 이윽고 화수의 앞에서 멈춰 섰다.

‘완전 제멋대로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얼굴이 이리 반가울 줄은 몰랐다. 물론 그런 화수의 생각을 사내가 알았다면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졌겠지만 다행히 화수는 가면을 쓴 상태였다. 화수에게나, 사내에게나 다행한 일이었다.

‘앉아봐.’

앞서 걷던 사내가 걸음을 멈춘 것은 길 가장자리에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도록 배치해둔 긴 나무의자 앞이었다. 지나다니면서 본 적은 있어도 한가하게 거기에 앉아 쉰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잠시 그것을 보고만 있는 사이, 사내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나무의자 위에 놓았다. 머뭇거리는 화수를 더러워서 앉지 않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이제 됐나?’

그런 의미는 아니었으나 해명할 방법도 없었다. 화수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끙. 새어 나오려는 신음소리를 입안으로 삼키며 허리를 바로 했을 때였다. 툭. 화수의 발치에 놓이는 검은 구두.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신어봐.’

사내의 말에도 화수는 여전히 제 앞에 놓인 구두만 응시할 뿐이다.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골랐는데.’

화수가 가만히 보고만 있자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바뀐 사내에 화수가 천천히 신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전체가 레이스로 되어 있던 그날과 달리 오늘은 발목에만 레이스가 달려 있는 형태의 양말을 신은 발을 사내가 내려놓은 신발에 꿰었다.

꿀꺽. 고작 신발을 신는 것뿐인데, 마른침이 삼켜졌다. 내려다보는 사내의 시선이 머리 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내가 잠시 숨을 죽였을 뿐인데, 갑자기 두 사람의 주위로 보이지 않는 막이 씌워진 듯이 주변이 적막해졌다. 시선을 물리는 방법은 빨리 신발을 신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발을 꿰던 화수가 멈칫, 했다. 그 이유는 사내가 먼저 알아차렸다.

‘작군.’

당황한 화수와 달리 사내가 나직이 내뱉는 목소리는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의 눈에 서린 것은 분명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것을 본 화수가 신발에 발을 욱여넣었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는 것쯤은 화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신고 있는 신발도 모양에만 신경을 쓰고 신는 사람의 착화감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불편한 신발이었다. 그러니 사내가 가져온 신발도 발가락을 구기면 충분히 신을 수 있는 정도였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내가 욱여 신으려는 화수의 발에서 신발을 가져가버렸기 때문이다.

‘맞지도 않는 걸 왜 신어.’

왜 가져가느냐고, 올려다보는 시선에 섞인 항의를 읽은 사내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린다. 하지만 원망의 기색이 누그러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사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뺏어 가려는 게 아니라.’

‘…….’

‘좀 더 큰 걸로 바꿔 오려는 것뿐이야.’

변명하듯 상황을 설명하는 사내에 그제야 원망의 기색이 누그러졌다.

-!

이번엔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가 화수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기 때문이다. 허나 정작 본인은 거기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잠시만.’

놀라지 말라는 듯 나직이 중얼거린 사내가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부유하고 있던 발 옆으로 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제야 화수도 사내가 자신의 발 크기를 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없이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앓아 내리는 기분. 그것이 뭔지 화수는 알 수가 없었다.

‘왜.’

왠지 모를 불안감에 화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벗어놓은 신발을 꿰어 신으며. 그런 화수를 따라 사내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 잠시-’

제 옆을 스치는 화수를 사내가 급히 붙들었다. 하지만 곧 멈칫한다. 화수의 시선이 사내를 따라 움직였다. 가면 속 얼굴이 구겨졌다. 미색의 치마 뒤쪽이 붉은색으로 잔뜩 얼룩져 있는 것을 발견한 탓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평소라면 쉽게 둘러댔을 화수지만 머리가 굳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당황한 화수와 달리 사내는 재빠르게 반응했다.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화수의 어깨에 덮었다. 사내에게는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상의가 화수에게는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와 다행히 시뻘건 핏자국을 감추어주었다.

‘괜찮습니까.’

태연히 움직인 것과는 달리 사내도 당황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말을 높이는 사내가 낯설어 멍하니 보고만 있자 사내의 눈매가 일그러진다.

‘여기.’

손을 들어 보이는 사내를 따라 화수의 시선도 뒤를 향했다. 지나가던 인력거꾼이 반색을 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혼자 갈 수 있겠습니까.’

‘…….’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갈 수는 있지만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금 전만 해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하지만 화수에게서 대답이 없자 사내는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손이 내밀어졌다. 홀린 듯 화수가 그 손을 붙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인력거에 앉아 있었다. 삯을 지불한 사내가 한 발 뒤로 물러섰을 때에야 화수의 눈의 초점이 돌아왔다.

‘이틀 뒤에 여기서.’

마주한 사내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인력거꾼에게 신호를 보냈다. 후한 삯을 받은 인력거꾼이 신이 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거친 움직임에 뒤로 젖혀졌던 몸을 바로 했을 땐 이미 인력거는 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인력거가 꺾이기 직전 화수가 고개를 돌렸다.

-!

이미 가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내가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심장이 마구 뛰었다. 큰길로 접어들었을 때 인력거꾼이 물었다.

‘아가씨, 어디로 모실까요.’

‘홍매루.’

‘홍매루요?’

‘…….’

제가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던지 인력거꾼이 되물었지만 화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다행히 더 이상 질문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은 화수가 눈을 감았다. 몸이 으슬으슬했다. 몸을 웅크리다 어깨에 얹어진 옷을 깨달았다.

아. 사내의 옷을 그대로 입고 왔다는 것을 깨닫고 화수가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던 그 말이 떠올랐다.

이틀 뒤에 여기서.

듣기 좋은 나직한 목소리. 그것을 떠올린 화수가 그제야 어깨를 주저앉혔다. 반쯤 벗었던 옷을 도로 여몄다. 달큰한 냄새가 코끝에 머물렀다. 온몸을 휘감던 한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물론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몸까지는 어쩌지 못했지만.

‘몸은, 괜찮습니까.’

이전과는 달리 확연히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피식. 화수가 웃자 사내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사내 때문에 웃은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사내는 그날 옷에 묻은 핏자국을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 하는 달거리라고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게 당연했다. 평범한 사람의 머릿속에는 아래가 찢겨서 피를 흘리는 일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괜스레 혼자 졸아붙었던 스스로가 기가 막혀 웃은 것이었지만 사내의 험악해진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꼬르르륵.

화수의 배에서 배꼽시계가 울리기 전까지는.

‘정말, 이것이면 돼?’

사내가 물었다. 이번에도 화수는 대답 대신 왕만두를 입에 물었다. 가면을 쓴 채로 먹기에는 왕만두만 한 것이 없었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긴 했지만 사내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이번엔 사내도 자신의 몫으로 산 왕만두를 크게 베어 물었을 뿐. 오늘은 길이 한적했다. 풍등제가 열리는 언덕으로 사람들이 몰렸기 때문이다.

우물우물.

왕만두를 씹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일 터였다. 화수가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해가 다 지지는 않았지만 이르게 날려버린 풍등이 붉은 노을 사이사이로 떠올라 있었다.

까만 밤하늘을 수놓는 밝은 풍등만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붉은 노을 속 오히려 검게 보이는 풍등들도 아름답긴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쓸쓸해 보이는 광경이었지만 그래서 더 어여쁘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우물거리던 입이 딱 멈췄다. 결국 올 것이 왔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실 지금까지 무엇도 묻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화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내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쪽의 질문이었다.

‘혹 집에서 도망쳐 나온 이유가 손목에 난 그 자국과 연관이 있는 건가.’

아……. 황급히 흘러내린 소매를 바로 했지만 이미 늦었다. 노끈에 묶였던 자국은 꽤 오랫동안 자국이 남았다. 그나마 대놓고 맞고 사냐고 묻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잘난 사람들은 그런 말도 이리 고상하게 돌려 할 수 있구나. 상황과 다소 맞지 않는 감탄만 멍하니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거면.’

대답은 없었지만 이제는 그것에 익숙한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도망칠 수 있도록 해주지.’

도망치게 해준다라.

달콤한 제안이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푼돈에 팔려와 온갖 더러운 짓은 다 당했지만 한 번도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갈 곳이 없었으니까.

같은 나이에 들어온 어린 동기들은 매일 어미가 보고 싶다고 울었다. 집으로 보내달라고, 퉁퉁 부운 눈으로 잠이 들곤 했다. 하지만 화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망나니 아비가 돈과 바꿔간 딸아이가 보고 싶어 맨발로 문간을 서성이는 어미도 없었다. 그러니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배를 곯지 않고, 언제 패악을 부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잠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화수는 충분히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망치게 해주겠다니.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해주지.’

사내가 덧붙인 말에, 뛰던 심장이 도로 속도를 멈췄다.

순간적으로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 따뜻하게 안아주던 품에서 확 떠밀린 느낌이었다. 우걱우걱. 마지막 남은 만두를 마구 우겨넣은 화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갈 곳이라고는 차가운 가게 구석방이 전부인데도, 그럼에도 화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추울 것 같았다.

‘왜.’

그런 화수의 팔을 사내가 붙들었다. 마주한 사내의 눈매가 찌푸려져 있었다.

기분이 상하기도 하겠지. 기껏 도와주겠다는 선의를 무시하고 일어나버렸으니. 하지만 화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을 할 수 있었더라도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도 지금 자신의 기분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수가 사내의 팔을 뿌리쳤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단 한 번도 화수에게 힘을 쓰지 않았던 사내가-심지어 함부로 붙들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뿌리치는 화수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힘의 차이가 확연했다. 손을 잡힌 것뿐인데,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왜 화가 난 거지?’

마주한 사내가 다시 물었다.

화가 났다라. 그 말을 듣고서야 화수는 자신이 화가 났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과 함께 도망치자는 말이 아니라, 그저 불쌍한 사람에게 베푸는 동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놓고 스스로가 기가 막혀 웃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두 사람이 무슨 사이라고. 사실 도망치게 도와주겠다는 말도 사내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치의 친절이었다. 그럼에도 화수는 화가 났다. 그가 베푸는 것이 동정이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부잣집 아가씨인 척을 해도 결국 본질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이미 현실로 돌아와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장 대답하라는 건 아니야.’

제안을 무를 거라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화수가 내키지 않은 기색을 보이자 곧바로 사과하며 제안을 물렀던 사내였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번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참아줄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난.’

아마도 사내는 화수가 가족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 정도가 사내가 할 수 있는 예상 범위겠지. 적어도 그 정도의 오해로 끝이 나 다행이었다.

‘생각해봐. 급할 건 없으니까.’

‘…….’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눈동자였다. 그 자신만만한 눈동자가 부러웠다. 태어날 때부터 귀이 자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화수는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였다.

‘아.’

사내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온 것은.

상황도 잊고 화수의 고개가 사내의 시선을 따라 뒤를 향했다. 그사이 뉘엿뉘엿 넘어가던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어둠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풍등을 하늘로 날렸다.

수십, 수백 개의 풍등이 밤하늘을 밝히며 떠오르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화수조차 조금 전 상황을 잊고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깜빡했군.’

축제의 마지막 날, 풍등을 날리는 것은 축제가 끝이 났다는 선언이기도 하지만 한 해의 안녕을 비는 의미도 있었다. 사실 사내는 그런 것을 굳이 챙기는 유형은 아니었다. 하지만 홀린 듯 눈앞의 풍등들을 보고 있는 화수를 보니, 아차 싶었던 것.

‘지금이라도, 사다 줄까?’

허나 사내의 생각과 달리 화수는 풍등을 날려본 적이 없었다.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이리 밤하늘이 환해질 만큼 풍등이 날아오르는 장면도 본 적이 없었다. 배곯을 걱정이 없어진 뒤에도 화수에게 축제는 그저 남의 일이었다. 여우 가면을 뒤집어쓰고 축제에 뒤섞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주 단순한 변덕이었다. 사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반나절, 아니 한 시진도 가지 않았을 일이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질문을 한 사내도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그때처럼 제가 사라져버릴까 봐 그런 것이리라. 사내의 의심을 알아차린 화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아예 풍등이 날아오르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쉬우나마, 하나만 빌어봐.’

그런 화수의 옆으로 사내가 나란히 섰다.

‘이리 많으니, 소원 하나쯤은, 덤으로 들어주시겠지.’

그제야 사내가 빌라는 것이 풍등을 날릴 때 비는 소원임을 깨달았다. 피식. 화수가 가만히 웃었다. 아쉬우나마, 하나만. 보통은 빌고 싶은 것이 여러 개일 테니까. 그리 말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빌고 싶은 바가 하나도 없는 화수로서는 퍽, 난감한 말일 수밖에 없었다.

‘빌었나?’

사내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멍하니 있던 화수가 당황했다.

‘빌 거면 빨리 비는 편이 좋을 거야.’

마주하고 있던 사내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을 때에야 화수는 풍등이 어느새 하늘 높이 올라가 눈에 띄게 작아졌음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안타까웠다. 붙잡을 수도 없이 점점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그래서였을까. 화수가 눈을 감았다. 꽉 감은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소원을 빌었지?’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사내가 물었다. 나란히 선 채라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신기하게도 화수가 딱 눈을 뜬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 사실 사내의 성격상 뭘 빌었는지 물어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터라 사내의 질문에 당황했다. 하지만 사내는 사실 대답을 들을 생각으로 물은 것이 아니었다.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당연한 것을 잊을 만큼 당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제가 빈 소원 때문이었다.

꿈을, 조금만 더 꾸게 해주세요.

계속해서 꿈을 꾸게 해달라거나 꿈에서 깨지 않게 해달라는 것도 아닌, 조금만, 조금만 더 꾸게 해달라는 참으로 소박하고 비루하기까지 한 바람. 그것이 화수가 난생처음으로 빈 소원이었다.

‘신어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화수를 향해 사내가 툭, 하고 한마디 내뱉는다. 그제야 화수는 정작 조금 전 질문과는 상관없이 사내가 자신이 가져온 종이상자를 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엔 구겨 신지 마.’

물론 구기지 말라는 대상은 신발이 아니라 화수의 발가락이었다.

천천히 걸어온 화수가 사내가 가지런히 놓은 신발에 발을 꿰었다. 스륵. 매끄럽게 들어가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맞는 모양이군.’

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사내는 신기할 정도로 화수의 기분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것은 검은 눈동자가 고작인데 말이다. 하지만 화수는 몰랐다. 표정을 감추기는 쉬울지 몰라도 사람의 눈빛은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게다가 여우 가면에 가려 표정을 읽히지 않는다고 방심한 탓에 경계가 완전히 풀어져 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사내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표정을 감추는 데는 탁월한 재능이 있는 화수였으므로.

‘다음번엔 이걸 신고 와.’

그딴 불편한 것은 버리고. 물론 뒤의 말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추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사내의 눈빛은 화수에게는 전혀 닿지 않았다.

다음번.

사내가 한 그 단어만 화수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번이 있는 거구나. 괜스레 느슨한 신발 속에서 발가락을 꼼질거리며 화수가 중얼거렸다.

그제야 사람들이 풍등에 소원을 비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은 화수였다.

허나 덤으로 들어준 것은 아무래도 제대로 빈 소원에 비해 그 효력도 비루한 모양이었다.

‘급할 건 없다고 해놓고, 미안하지만.’

사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난감한 상황에 처했을 때 사내는 이런 표정을 지었다.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어.’

언제. 화수가 눈으로 묻는 물음을 사내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이틀 뒤에.’

아……. 화수의 눈이 흐려졌다. 이틀이라니. 일주일도 아니고. 어쩐지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일주일이었어도, 아니 한 달이었다고 해도 똑같은 기분이었겠지만.

‘이번에 가면, 언제 다시 오게 될지는 기약할 수 없어.’

그럼 언제 돌아오는 거냐는 물음이 차 있는 화수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사내가 툭, 하고 대답을 내뱉었다.

‘만약에.’

말을 꺼내놓고 사내가 잠시 망설인다. 좀처럼 망설이는 법이 없는 사내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삼켜졌다. 다행히 망설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따라오고 싶다면, 데리고 갈게.’

쿵. 분명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임을 알면서도 다시금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쩌고 싶은지는 일단 가서, 생각하고.’

‘…….’

분명 저를 향해 하는 말인데, 이상하게 사내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는 것은 착각이리라. 멈췄던 심장이 이제는 빠르게 뛰었다. 숨이 찼다.

‘이틀 뒤.’

울렁이다 못해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내리누르듯 사내가 짧은 단어를 내뱉었다.

‘이틀 뒤에 이곳을 지나갈 거야.’

집에서 항구로 향하는 길과는 정반대지만. 사내가 선언하듯 말했다.

‘여기 서 있으면, 그럼 내가 데리고 갈게.’

숨이 막혔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말이었으니까. 사내는 다음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화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사내를 따라갈 수 없다는 걸. 그러면 안 된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따라 가고 싶어서, 그래서 화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마주하고 있던 사내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멍청하게 보고만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사내가 손을 내뻗는다.

슥.

천천히 다가온 사내의 손이 화수의 눈가를 훔쳤다. 그제야 화수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돼.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기만 해.’

사내의 다정한 말에 화수가 눈을 감았다. 주륵, 주륵, 소리도 없이 흘러나온 눈물이 볼을 덧그린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에 고였다가 이내 뚝 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니까.’

천천히 내려온 손이 화수의 가면을 들어 올렸다. 순간 가면을 벗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화수가 흠칫 놀라자 사내가 안심하라는 듯 가만히 화수의 어깨를 눌렀다. 그러고는 조금 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면을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울지 마.’

달래듯 속삭인 사내가 화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조심스럽게. 마치 조금만 힘을 주면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 같은 유리조각에 입을 맞추듯. 하지만 화수의 눈물을 멈추게 할 요량이었다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을 허물어트리는 것은 무정한 말이 아니라, 다정한 말이니까. 흠뻑 젖은 속눈썹이 애달프게 떨리고 있었다.

그냥 처음부터 꾸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아프게 깰 꿈이었다면, 아예 꾸지 않는 편이 나았다.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 * *

“오셨습니까.”

멈칫.

장지문을 열고 들어서던 리 샤오가 걸음을 멈췄다.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연신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던 화수가 뒤늦게 묘한 적막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뭐지?”

방 안을 둘러보는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한 화수가 슬그머니 벌려놓은 것들을 제 쪽으로 당겨 모았다. 리 샤오가 방을 어지럽히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을 깨달은 탓이었지만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오히려 접어놓은 것만-그마저도 깔끔하게 접은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어그러트려 결과적으로 방을 더 지저분하게 만드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배냇저고리래요.”

화수가 이미 어그러진 뭉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다 펴도 제 손바닥만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주제에 팔도 있고, 묶는 끈도 두 개나 달려 있었다.

“귀엽죠.”

“…….”

“저 말고요.”

별생각 없이 묻던 화수가 뒤늦게 리 샤오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깨닫고 덧붙였다.

“그렇군.”

귀엽다는 말에 대한 답인지, 자신이 아니라는 말에 대한 답인지 모를 대답을 툭, 하고 내뱉고 리 샤오가 이내 겉옷을 벗었다.

“이걸 아직도 이리 벌여놓고 계셨습니까.”

한 박자 늦게 리 샤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집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집사가 그런 반응을 보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집사가 화수에게 배냇저고리며 손싸개 같은 태어날 아기씨를 위해 주문한 물건들을 가져다준 것은 거진 점심을 먹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보아도 수십 번은 더 봤을 물건들을 아직도 이리 벌여놓고 있으니 잔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리 샤오가 벗어놓은 겉옷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정리하는 중이었어요.”

“정말, 정리하고 계신 것 맞습니까.”

“내가 정리할 테니까, 그쯤 해둬.”

말없이 셔츠 단추를 풀고 있던 리 샤오가 불쑥 한마디 한다. 무심한 표정이긴 했으나 제가 화수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이 듣기 싫다는 뜻이 분명한 말이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

“죄송합니다. 나이가 들면 쓸데없는 말이 자꾸 많아집니다.”

리 샤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집사도 더는 변명하지 않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물론 조금 서운한 것은 사실이라 자신이 하겠다는 말 대신 그대로 리 샤오의 옷만 챙겨 밖으로 나왔다.

“이걸로 손을 싼다니. 좀 징그럽지 않습니까?”

주섬주섬 바닥에 널어놓았던 것들을 대나무 바구니에 대충 집어넣던 화수가 마침 손에 집힌 손싸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솜씨 좋은 이에게 맡겨 꼼꼼하게 만들어진 손싸개는 아무리 봐도 금반지 하나 넣는 주머니 크기에 불과했다. 이걸로 손을 다 싼다니. 상상이 되질 않았다.

“손 좀.”

조그만 손싸개를 귀엽다는 듯 요리조리 돌려보는 화수를 그와 비슷한 기분으로 보고 있던 리 샤오가 순순히 화수가 하라는 대로 손을 내밀었다.

“리 샤오 님은 손가락 하나도 안 들어가겠네요.”

화수의 손도 작은 편은 아니지만 리 샤오의 손에 가져다 대니 더 앙증맞은 크기가 되었다. 리 샤오가 천천히 손을 뒤로 물렸다. 화수도 더는 상관없다는 듯 그것을 바구니에 넣었다. 하지만 물러났던 손이 도로 앞으로 내뻗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줘.”

툭, 툭, 바닥에 놓인 것들을 집어넣는 화수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리 샤오가 결국 못 참겠다는 듯 그의 손에서 바구니를 가져갔다. 그러더니 화수가 대충 집어넣은 것들을 도로 꺼내 차곡차곡 접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화수는 그런 리 샤오를 말리지 않았다.

커다란 손으로 앙증맞은 옷들을 잘도 차곡차곡 접는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고 있었을 뿐이다.

정원 쪽으로 난 창 밖으로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 소리에 사각사각, 천이 내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앉아 있던 화수가 아예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런 화수에 리 샤오도 별다른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평화였다.

“일어날 것 없어.”

리 샤오의 허락에도 화수는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아예 잠이 들었으면 모를까, 나갈 채비를 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계속 누워 있는 쪽이 오히려 더 고역이었다.

“몸이 무거워 그런가, 요 며칠 계속 가라앉네요.”

이상하다는 듯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화수에 소매 단추를 잠그던 손이 멈칫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하나, 둘, 긴 손가락으로 남은 단추를 모두 잠근 리 샤오가 걸려 있는 타이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해드릴까요.”

언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인지 화수가 어느새 리 샤오의 코앞에 서 있었다. 안 그래도 조그만 얼굴이 아주 주먹만 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평소에는 화려한 꽃처럼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던 얼굴이 지금은 단아한 흰 호접란을 보는 것마냥 청초한 분위기를 풍겼다. 꽃은 꽃인 모양이었다.

“싫으시면-”

제 얼굴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시선에 화수가 뒤로 물러서려고 할 때였다. 타이를 쥐고 있던 손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화수가 선물했던 넥타이였다.

스륵.

리 샤오의 손에서 건네받은 넥타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리 샤오에 까치발을 하고서야 넥타이를 목에 걸 수 있었다.

올렸던 뒤꿈치가 도로 내려왔다. 리 샤오의 가슴팍에서 기억을 더듬어 손을 움직였다. 손재주가 없는 것이지,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라 리 샤오가 가르쳐준 대로 매듭을 만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삐뚤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모양을 갖춘 매듭을 화수가 위로 쭉 밀어 올렸다.

아.

넥타이에 정신이 팔려 리 샤오의 시선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마도 내내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을 새까만 눈과 시선이 마주친 화수가 반사적으로 넥타이에서 손을 물렸다. 좀 더 정확히는 리 샤오에게서 물러나려던 거였지만. 아마도 턱을 붙잡는 손이 아니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턱이 들리자 화수가 순순히 눈을 감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어느새 입맞춤에도 익숙해진 화수였다. 눈을 감았지만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검은 그림자가 선명했다. 뜨거운 입술이 화수의 입술을 눌러왔다. 화수의 눈이 더 꽉 감겼다.

벌어지는 입술 틈을 비집고 혀가 쑥-, 들어왔다. 뜨거운 살덩이로 입안이 가득 찼다. 제 입이 작은 건가, 리 샤오의 혀가 큰 건가. 하긴 큰 것이 혀 하나만도 아니고. 리 샤오와 비교하면 화수의 모든 것이 작았다.

아응.

말캉한 혀끝을 세워 입천장을 긁자, 화수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다리에 힘도 풀렸다. 자꾸만 아래로 쳐지는 화수의 허리를 리 샤오가 단단하게 붙들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각도를 바꿔 입을 맞췄다.

츠-윽. 측.

야해빠진 소리가 맞닿은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물론 밖으로 새어 나갈 만큼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화수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얼굴로 열이 쏠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젖은 소리는 짙어졌지만.

츱, 츠-읍, 츱.

아래로 떨궈져 있던 손이 어느새 리 샤오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잘 다려놓은 천이 마구 구겨졌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허리를 감싸 쥔 손이 좀 더 아래로 내려왔다. 엉덩이가 들리고 바싹 붙인 사타구니에 리 샤오의 단단한 물건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맞닿은 리 샤오의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물론 몸이 단 것은 화수도 마찬가지였다.

천 너머로 느껴지는 자극에도 아래가 욱신거렸다. 단단한 것이 사타구니를 비빌 때마다 엉덩이 안쪽이 묵직해졌다.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 아랫배가 동그랗게 올라붙었다.

끙.

저도 모르게 까치발을 하고 매달리던 화수가 목울음을 울었다. 색기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울음이었지만 입맞춤이 단숨에 거칠어졌다. 리 샤오가 화수의 혀를 쭉 빨았다. 딸려 나오는 살덩이를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끙끙.

맞닿은 입안으로 앓는 소리가 연신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리 샤오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혀를 콱 깨물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트는 화수를 꽉 붙들고, 엉덩이골을 더듬었다. 의도가 분명한 노골적인 손길에 주름이 벌렁거렸다. 좀 더 미끄러져 내려온 손가락이 속옷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벌렁이던 주름이 도로 꽉 다물렸다. 하지만 그곳을 손가락 끝으로 달래듯 살살 빙글대자, 금세 흐물흐물해졌다.

아아아.

화수의 꽉 감은 눈이 더 일그러졌다. 쏟아져 나온 신음은 맞닿은 입안으로 삼켜졌다. 다행한 일이었다.

더듬던 손이 갑자기 뒤로 쑥 빠졌다.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입술이 떨어진 사실은 몸이 위로 들리는 감각에 뒤늦게 깨달았다. 그대로 화수를 안아 든 리 샤오가 이불이 깔린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고작 몇 걸음밖에 되지 않는 그 잠깐도 참을 수 없다는 듯 화수의 입술을 다시 파고들었다. 이번엔 아래에서 위로 혀가 들어왔다. 들어온 것은 혀인데도 화수는 아래가 욱신거리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몸이 뒤로 젖혀졌지만 화수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손이 목과 등을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푹신한 이불 위에 안착한 몸 위로 리 샤오가 올라탔다. 그런 리 샤오를 화수는 거부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선택지 같은 건 화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흐트러진 옷 사이로 화수의 새하얀 살결이 드러나자 새까만 눈동자가 더 짙어졌다. 방 안이 단숨에 달큰한 향으로 가득 찼다. 공기마저 눅진눅진해질 만큼 달달한 향기에 머릿속까지 모두 녹아버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흠흠.”

장지문 너머, 난처해하는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온 것은.

“부장.”

카이였다. 거칠게 화수의 옷고름을 풀던 리 샤오의 손이 그제야 멈췄다.

“뭐야.”

그린 듯한 입술 사이로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듣고 있던 화수의 어깨가 움찔할 만큼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이에게는 끼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출발하셔도, 시간이 촉박합니다.”

오늘은 정무총감의 생일날. 바로 직전까지 생일 축하연에 갈 채비를 하고 있던 것도 잊을 만큼 말 그대로 리 샤오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다행히 그 사실을 무시할 만큼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던지 리 샤오도 결국 한발 뒤로 물러났다. 물론 눈빛만큼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으셨습니까.”

장지문 너머로 조금 높아진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질문은 문 밖에 있던 카이에게 하는 것이었으나 사실 리 샤오에게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리 샤오도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여겼는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러면서도 흐트러진 화수의 옷매무새를 다듬는 것은 잊지 않는다. 조금 전 상황을 들키는 것이 곤란하다기보다는-사실 그런 건 상관 없었다- 화수의 속살을 누군가가 보는 자체가 싫었기 때문이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이미 익숙한 듯 집사가 문을 열었다. 들어선 집사의 손에 들린 것을 본 화수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고개를 꺾은 리 샤오의 눈에도 쟁반 위에 놓인 약사발이 들어왔다.

“조금 있다가, 마실게요.”

화수의 말에 집사도 순순히 쟁반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사실 좀처럼 쉽게 물러나지 않는 집사가 순순히 뒤로 물러선 데는 이유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옷이, 어째서 이리 구겨진 겁니까.”

그도 그럴 게 멀쩡하던 리 샤오의 옷이 구겨져 있음을 발견했던 것.

“어찌합니까. 다림질을 다시 할 시간은, ……없는데.”

역시나 문 너머에 서 있는 카이가 고개를 내젓는 것을 확인한 집사의 얼굴이 마구 구겨졌다. 사태의 원흉인 화수가 어깨를 둥글게 마는 모습을 보고 리 샤오가 그 앞을 가로막듯 섰다. 그러고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내젓는다.

“신경 쓸 것 없어.”

“어찌 신경을 안 씁니까. 다른 자리도 아닌 정무총감님의 생일 축하연이 아닙니까.”

“그쯤 해둬.”

“…….”

그제야 집사도 리 샤오의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일단 벗어보세요. 물이라도 뿌려야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물러설 집사도 아니었지만. 그나마 잔소리는 멈춘 터라 리 샤오도 순순히 상의를 벗어주었다.

“5분, 아니 3분만 있다가 나오십시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는 집사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남은 것은 묘한 적막이었다. 그 적막을 깬 쪽은 화수였다.

“일찍 돌아오십니까.”

“…….”

정무총감의 생일 축하연임을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테니, 분명한 의도를 담은 질문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리 샤오의 눈매가 살풋 일그러졌다. 하지만 화수는 태연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요것 봐라, 하는 눈빛을 향해 화수가 예쁘게 웃었다. 리 샤오의 눈매가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그 의미는 조금 전과 다소 달라져 있었지만.

“이것 마시고, 착하게 있으면.”

리 샤오가 탁자 위에 놓인 약사발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내미는 리 샤오에게 화수가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일찍 돌아오실 겁니까.”

“그러지.”

고개를 끄덕이는 리 샤오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화수가 약사발을 순순히 건네받았다. 눈꼬리가 반달로 접혔다. 덕분에 새까만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리 샤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리 샤오 님을 닮아 아기씨의 생명줄이 유난하신 모양입니다. 좀 더 센 약을 지어드릴 테니 이것으로 바꿔 먹이십시오. 아무리 건강한 아기씨라도 이번엔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망설임 없이 가져간 약사발에 입술이 닿았다. 순간적으로 리 샤오의 손이 앞으로 내밀어졌지만 이미 늦었다.

꿀꺽꿀꺽. 약이 넘어가는 소리만 적막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마저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

사발을 모두 비운 화수가 얼굴을 마구 일그러트렸다.

“쓴가.”

“드셔보실래요?”

“…….”

기가 막혀 한 말에 정말로 빈 사발을 가져간다. 남은 것을 먹어보려는가 했는데, 정작 사발은 탁자 위로 대충 내던지고 화수의 턱을 붙잡는다. 그제야 의미를 알아차린 화수가 피식, 웃으면서도 순순히 입술을 벌렸다. 허나.

“대장!”

정작 놀라 끼어든 쪽은 카이였다. 막 입술이 닿으려던 직전, 리 샤오의 입술이 그대로 멈췄다. 하지만 카이의 부름에 반응했다기보다는 그가 멋대로 끼어든 것에 기분이 상한 이유가 컸다.

“그만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카이 역시 쉽게 물러서지는 않는다. 리 샤오가 홍 의원을 만날 때 그 역시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약 꾸러미를 집사에게 건네준 사람도 카이였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그리 말리는 카이의 행동이 크게 의심스러울 것이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3분은, 충분히 넘었습니다.”

“그만 가보세요.”

덧붙이는 말에 어깨를 으쓱인 화수가 상체를 뒤로 물렸다. 리 샤오도 그런 화수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럼, 다녀오세요. 전 좀 누워야겠습니다.”

“…….”

“이상하게 요 며칠 약을 먹으면, 어지러워서요.”

다소 건방지게 보였나 싶어 변명을 덧붙이자 리 샤오는 별다른 말 없이 이불을 끌어 올려주었다.

“얼른 가십시오. 집사어른까지 다시 오겠습니다.”

“…….”

잠이 오는지 큰 눈을 껌뻑이면서도 할 말은 하는 화수의 얼굴을 리 샤오가 가만히 손으로 덮었다. 뜨끈한 손이 눈을 가리자 거짓말처럼 눈이 감겼다.

“약속하지. 다시 눈을 뜨면 돌아와 있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

거듭 확인하는 목소리가 이미 느릿했다. 손은 여전히 눈을 가린 채였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색색, 화수의 입에서 고른 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리 샤오가 몸을 일으켰다. 물론 이번에는 카이도 그런 리 샤오를 재촉하지는 않았다. 지금만큼은 결코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설탕과자를 가져다 줘.”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 리 샤오가 걸음을 내딛으며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시종을 향해 명령했다.

“네-”

크게 대답하려는 시종을 향해 리 샤오의 패기가 쏟아졌다. 입을 틀어막힌 시종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그를 짓누르던 패기가 누그러졌다.

“조금 있다가.”

지금 말고. 나직이 덧붙이는 말에 시종이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리 샤오가 발길을 돌렸다. 그 뒤를 따르는 카이까지 멀어진 뒤에야 시종은 막혔던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물론 장지문 안쪽에서 잠이 든 화수는 전혀 알지 못한 일이었다.

* * *

“카이.”

차에서 내리던 리 샤오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멋대로 끼어들지 마.”

“……죄송합니다.”

방심하고 있던 카이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비소가 든 것을 드시게 둘 순 없었습니다.”

카이도 리 샤오가 문제 삼는 그때가 리 샤오가 화수의 입안에 남은 약을 먹으려던 것을 막아섰을 때를 말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리 샤오는 단순히 정사에 끼어들었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아마도 카이 때문에 그 약에 비소가 섞였다는 사실을 화수가 알아차릴까 봐 그런 것이리라. 카이도 그 정도로 이해했다.

“경고했어.”

“……명심하겠습니다.”

그나마 카이가 끼어든 이유가 자신을 생각해서임을 리 샤오도 알고 있는 터라 이 정도 경고로 끝이 난 것이기도 했다. 허리를 굽혀 잘못을 비는 카이를 리 샤오도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물론 더 이상의 용납은 없다는 것도, 누구보다 카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멈칫.

걸음을 내딛던 리 샤오가 일순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카이도 뒤늦게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뭔가 이상한 것이라도 있는가. 리 샤오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살폈지만 눈에 띄는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리 샤오의 지위가 높아짐과 동시에 적도 많아진 터라 카이는 늘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전쟁터에서 지낼 때보다 요즘이 신경 쓸 일은 더 많았다.

“아무래도.”

느릿한 음성에도 긴장감은 팽팽하게 당겨졌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카이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하지만 그리 잔뜩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리 샤오의 입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말은 바로.

“비가 올 것 같은데.”

이것이었다.

“비, 요.”

허리 굽은 노인이 무릎을 두들기며 중얼거릴 법한 날씨에 관한 이야기. 카이로서는 퍽 맥 빠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카이의 실망을 보상하듯 리 샤오의 뒷말이 이어졌다.

“돌아가야겠어.”

물론 카이는 전혀 원하지 않는 보상이었지만. 기겁한 카이가 뒤돌아서는 리 샤오를 따르며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녀석이, 비를 싫어해.”

“…….”

카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지금 리 샤오가 말하는 녀석이 누구라는 건 굳이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따져 묻고 싶은 것이 없지도 않았다.

“부장이 가신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싫어한다는 말이 사실은 무서워한다는 말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당연했다. 정작 본인인 화수조차도 모를 테니까. 하지만 그런 것을 리 샤오는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리 샤오가 말이 많은 성격이었다고 해도 다르지 않았을 터이다. 그건 리 샤오만이 아는 화수의 비밀이었으므로.

“알겠습니다. 허면 얼굴이라도 비추고 돌아가십시오.”

“…….”

“어른의 생일인데 얼굴도 비추지 않고 돌아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 비도 내리지 않고 있으니.”

명예욕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카이인지라 사람의 예의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카이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결국 리 샤오도 잠시 걸음을 멈췄다. 때마침 세워져 있던 리 샤오의 차 뒤로 또 다른 자동차가 멈춰 섰다.

“리 샤오 부장.”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학무국장 루지경이었다. 리 샤오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늘도 여전히 눈이 다 훤하구만.”

“학무국장께서도 얼굴이 좋으십니다.”

어김없이 나오는 외모 칭찬에 리 샤오도 매끄럽게 인사를 되돌린다.

“나야 좋아봐야 쭈그렁 영감탱이인 것을.”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래도 칭찬이 싫진 않은지 얇은 입술이 잔뜩 말려 올라가 있었다.

“이야기는 들어가셔서 하시지요.”

“아, 서둘러야겠구만.”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끼어들기가 애매해 눈치만 보고 있는 카이를 대신해 다행히 루지경의 수발을 드는 비서가 시계를 가리키며 자신의 상사를 재촉했다. 그제야 루지경도 황급히 걸음을 내딛는다.

하아.

루지경과 함께 계단을 오르는 리 샤오를 확인한 후 카이의 입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리 샤오의 집과 달리 정무총감의 집은 서양식으로 건축된 3층 건물이었다. 집이라기엔 지나치게 커다란 건물이었지만 사실 그게 보통이었다. 리 샤오가 특이한 것일 뿐. 권력자란 보통 자신의 권력을 온 세상에 과시하고 싶어 했다. 누구도 감히 자신의 권력을 넘보지 못하도록.

흘끔.

반짝반짝 빛이 나는 대리석으로 만든 계단을 오르던 카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했다. 별이 한가득이었다. 아무리 봐도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는 이유는 자신의 대장이 얼마나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바로 하자 어느새 리 샤오와 루지경이 현관을 통과하는 것이 보였다. 카이도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올 거라면 부디 최대한 늦게 내리길, 그리 빌며.

물론 그런 카이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집사어른.”

누군가의 부름에 창고 안, 재고를 확인하고 있던 집사의 고개가 무심히 뒤로 꺾였다. 그가 화수의 방 앞을 지키는 시종임을 깨닫자마자 집사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일이야.”

혹 화수의 몸 상태가 또다시 안 좋아진 것인가. 시종의 눈동자에 서린 불안한 기색을 읽어낸 집사가 얼굴을 굳힌 채 물었다.

“그것이…….”

“몸이 안 좋아지신 게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시종에 집사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집사가 조급해지면 조급해질수록 시종의 대답은 더 느릿해진다.

“그런, 건, 아닙니다.”

“허면?”

목을 붙잡아 흔들고 싶은 기분을 겨우 누르면서 집사가 거듭 되물었다. 달싹이던 시종의 입술이 겨우 벌어졌다.

“화수 님이.”

“…….”

어두운 창고 안이라 시종의 낯색이 흙빛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이번엔 집사도 되묻지 못하고 그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안 보이십니다.”

물론 시종의 입술이 열려도 영문을 모르겠는 건 비슷했지만.

“안 보이다니.”

“분명 주무시는 것을 보고, 잠시 설탕과자를 가지러 다녀왔었거든요.”

“…….”

솔직히 잠시, 라고 명칭하기에는 다소 시간이 애매했지만, 그래도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닌 것은 맞으니 시종은 일단 잠시라고 칭하기로 했다. 게다가 그것보다도 먼저 해명할 말이 있었다.

“리 샤오 님이 명하신 일이었습니다.”

일그러지는 집사의 얼굴을 보고 시종이 황급히 덧붙였다. 멋대로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니다, 그런 나름의 변명이었지만 집사의 표정은 더 험악해졌을 뿐이다.

“안 보인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시종의 잘잘못 따위가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집사가 알고 싶은 점은 정확한 상황이었다.

“방에 안 계신다는 게야, 집 안에 안 계신다는 게야.”

“그것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시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

지난번처럼, 잠시 방을 비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험은 사람을 안일하게 만드는 법이라 그때처럼 태연히 돌아올 거라고 여겼다. 게다가 늘 기운 없이 늘어져 있던 화수의 모습이 시종이 경계를 푸는 데 한몫했다. 저런 사람이 가면 어딜 가겠는가. 그리 생각하니 자연스레 겁이 없어지고 느긋해진 것이다.

“화장실에도, 없으시더라구요.”

“…….”

“주방도, 응접실에서도…….”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는 시종에 집사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길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결국 화수가 사라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말이었으므로. 혓바닥이 긴 이유가 다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문제 삼을 시간이 없었다. 집사는 뒤돌아서서 이미 창고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부리는 이들을 향해 명령했다.

“다들 흩어져서 집 안을 샅샅이 뒤져.”

일단 집 안부터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어딘가에서 태평하게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요 며칠 기분이 좋은 리 샤오에게 보고는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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