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15/21)

14.

우엑.

토기를 참지 못한 화수가 황급히 앞으로 몸을 숙였다. 벌어진 입안에서 시커먼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먹은 것이라고는 조금 전 먹은 한약이 다였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비위가 상하는 약냄새에 화수가 한 번 더 헛구역질을 했다. 이번엔 나오는 것도 없었다.

‘개새끼.’

입안에 남은 잔여물들을 침에 섞어 뱉던 화수가 욕설을 내뱉었다. 약사발을 내밀던 다정한 눈빛을 떠올린 탓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았지만, 그 순간 입안으로 삼켰던 말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정말로 자신을 위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착각했을 눈빛이었다. 심지어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화수조차 순간적으로 제가 뭔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생각할 뻔했으니 말 다했지. 그 순간을 떠올리자 다시 한 번 욕설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욕설이 입안으로 삼켜졌다. 순간 뒤에서 느껴진 누군가의 기척 때문이었다.

부스럭.

사람의 기척이라기엔 묘하게 작은 소리였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굳었다. 물론 그것은 잠시였다.

야아옹.

뒤이어 들려온 낯익은 울음소리에 화수의 굳었던 어깨가 누그러졌다. 고개를 틀자 익숙한 솜뭉치가 뒤뚱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화수가 있으니 뭔가를 얻어먹을 수 있겠다 싶어 온 것이 분명했다.

“미안하지만, 아무것도 없어.”

화수가 고양이를 향해 손을 보여주며 변명했다. 허나 빈손임을 확인하고서도 고양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대로 다가와 화수의 다리에 이마를, 몸을, 꼬리를 비비고 지나갔다. 마치, 자신의 냄새를 묻혀 영역표시를 하려는 것처럼. 몇 번이고 제 다리를 사이에 두고 왔다 갔다 하는 털뭉치를 보면서 화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애교 피워봐야 나올 건 없어. 지금 가면 다시는 안 올 거거든.”

갸웃. 마구 몸을 비비다 이제는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기다리던 냥이가 동그란 얼굴을 살짝 기울였다. 사실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도 아니고, 굳이 녀석을 챙겨줘야 할 필요도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인지 화수의 목소리가 더 불퉁했다.

“그러니까 애교는 딴 데 가서 부리고, 밥 얻어먹어.”

휙휙, 그만 가라는 손짓을 오해한 것일까. 앉아 있던 녀석이 냉큼 일어나 다가왔다. 화수의 난감한 표정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다시금 머리며 등이며 꼬리를 다리에 문지르고 지나간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런 녀석을 화수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아예 화수의 발치에 몸을 동그랗게 말아 앉는다.

쓰다듬어달라는 듯. 태평한 것 같아도 한 번도 이리 제 등을 내어준 적이 없었던 녀석이었다. 그럼에도 화수는 선뜻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꼬질꼬질한 털이 거슬려서는 아니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이 털을 손으로 만지고 나면, 결코 녀석을 잊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눈으로 보는 것은 금방 잊는다. 하지만 손바닥에 닿는 감촉, 코끝에 닿는 향기, 귀로 들어오는 목소리 같은 것은, 문신처럼 한번 새겨지면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아는 화수는 함부로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아, 안 돼-”

하지만 그런 다짐은 허무하게도 무너졌다. 녀석이 조금 전 화수가 게워낸 토사물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당황한 화수가 녀석의 몸을 안아 들었다. 물론 고양이라는 동물이 화수가 원한다고 맘대로 안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라, 녀석은 화수의 손에서 연두부처럼 스르륵 빠져나가 조금 전 그 자리로 도로 돌아와 있었다.

킁킁, 놀란 화수의 사정 같은 건 아랑곳없이 냄새를 맡던 녀석이, 퉁퉁한 몸집에 비해 앙증맞은 앞발로 그것을 덮기 시작했다. 볼일을 보고 흙으로 덮어두듯. 피식. 그것을 확인한 화수의 입에서 낮은 바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약 냄새가 고약한 것은 사람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슥슥슥, 그러는 와중에도 찹쌀떡 같은 털뭉치는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다 축축한 흙이 발에 닿았던 모양. 그러자 녀석이 동그란 발을 들어 그것을 혀로 핥았다. 안 돼. 뒤늦게 눈이 휘둥그레진 화수가 손을 내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습관적으로 묻은 것을 핥던 녀석이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거보라는 듯, 얼굴을 찡그린 화수가 몸을 굽혀 녀석의 발을 옷자락으로 닦았다.

“그러게 안 된다고 했잖아.”

몸은 만지게 해줘도 발은 또 싫은지, 곧장 붙잡힌 앞발을 뒤로 빼는 녀석을 화수도 더는 붙들지 않았다. 경고를 하긴 했지만 사실 화수가 먹은 약은 녀석이 먹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는 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약에 포함되었던 비소는 이미 화수가 몰래 빼돌려두었던 것. 녀석이 토사물을 핥는 것을 보고도 화수가 기겁하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비소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아는 터라, 지어 온 약 꾸러미에서 비소만 골라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마.”

슥슥, 발로 긁어온 흙으로 토사물을 덮으면서 화수가 한 번 더 경고했다. 물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으로 보아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듣기 싫은 것은 모르는 척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화수도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긴 화수가 담벼락을 더듬었다. 그러다 이내 미간을 찌푸린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지난번 화수가 빠져나갔던 그 구멍은 이미 한 치의 틈도 없이 단단히 메워져 있었다.

탁탁. 바닥을 짚었던 손바닥을 털며 일어난 화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밖에서 보면 다 같은 높이의 담장이라도 안쪽은 바닥이 평평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낮은 부분이 있게 마련이었다. 담은 밖에서 들어오는 침입자를 막기 위해 만드는 것이지 집 안에서 도망치는 이를 고려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가만히 담을 더듬어가던 화수의 걸음이 멈췄다. 차이가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뼘 정도, 다른 곳보다 높이가 낮은 곳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타닥.

주변을 한 번 더 살핀 화수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훌쩍 뛰어올랐다. 생각보다 날쌘 움직임이었다. 평소의 화수가 워낙에 기력 없이 다녀서 그렇지, 사실 운동신경 자체는 좋은 편이었다. 괭이처럼 가볍게 벽을 타고 오른 화수가 담벼락을 붙들었다.

끙.

하지만 자신의 배가 어떤 상태인지를 잠시 잊고 있었다. 그사이 살까지 내린 탓에 앙상한 두 팔로 무거운 몸을 끌어 올리는 것이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악.

결국 담벼락을 붙잡고 있던 손이 미끄러지면서 도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다 제 무릎에 배가 부딪혔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팠지만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끙끙. 하지만 배를 부여잡은 화수의 입에서는 연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씨발.

짜증이 치밀었다. 제가 제 무릎으로 찍은 것이니 원망할 사람도 없었다. 부른 배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험악했다. 거추장스러운 존재. 도망치는 데도, 자신의 인생에서도, 성가시기만 했다.

왜 굳이 나한테 왔어. 누가 바란다고. 간절히 원하는 이에게서 태어났으면 좋았잖아. 그랬다면 태어나기도 전에 미움받는 일 같은 건 없었을 텐데.

그래서 싫었다.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존재만으로도 미움받는 것이 꼭 저 같아서.

사실 이리 도망치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도 리 샤오가 아이를 없애려고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역시도 차라리 배 속의 아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자신이 견딜 수 없었던 점은 리 샤오가 자신을 속이려 한 것이었다. 감히 제 소중한 아이를 없애려고 해서라거나, 그런 숭고한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차라리 없어져버리면 좋을 텐데.”

아직도 아릿한 배를 끌어안은 화수가 툭, 하고 내뱉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잦아들었다. 마치, 떼를 쓰다가 놀라 울음을 그치는 아이처럼. 그것을 깨닫자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취소할 수도 없었다. 그저 통증이 멎은 것에 안도할 뿐이다.

타닥.

화수가 다시금 바닥을 굴렀다. 이번엔 반동을 위해 조금 전보다 더 깊이 무릎을 굽혔다가 뛰어올랐다. 아슬아슬하게 기와 위쪽을 붙들었다. 바둥거리며 두 다리로 벽을 짚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벽을 타고 올랐다.

하아.

담벼락 위에 두 발을 디뎠을 때에야 화수는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몸을 굽혔던 화수가 천천히 몸의 방향을 틀려고 할 때였다.

“방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담 바깥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수가 그대로 굳었다. 화수가 있는 곳과 크게 떨어지지 않은 위치였다.

“어디?”

“저쪽에서 난 것 같은데.”

저벅저벅.

아마도 화수가 몸을 담장 위에 바싹 붙이고 있어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가까워지면 곧바로 들킬 것이 분명했다. 걸음소리가 커질수록 화수의 심장 뛰는 소리도 커졌다. 그 때였다.

야아옹.

언제 올라와 있었던 건지 담장에 엎드려 있던 고양이가 크게 소리를 내 울었다.

“뭐야, 고양이잖아.”

쭈욱, 태평하게 몸을 늘려 기지개까지 하는 모습을 본 경비병이 피식, 하고 웃었다. 가까워지던 걸음이 도로 물러가는 것을 확인한 화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소리는 죽인 채.

냥, 냐냥.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바깥쪽으로 방향을 튼 화수의 옆으로 어느새 녀석이 가까워져 있었다.

“뚱뚱보 주제에, 잘도 한 번에 뛰어올랐네.”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화수의 손은 녀석의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나름의 고맙다는 인사였다. 한없이 서툰 손길이었지만 녀석은 상관없다는 듯 화수의 손에 마구 몸을 비벼댔다.

“이제 끝.”

선언하듯 손을 물린 화수가 높이를 가늠하듯 아래를 내려다본다. 안쪽도 꽤 높았지만 바깥쪽은 높이가 상당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높이를 확인한 화수가 한 번 망설이지 않고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윽.

이번엔 잊지 않고 배를 감싸 쥐고 뛰어내린 덕분에 무릎에 부딪히는 일은 피했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진 충격까지 모두 어쩌지는 못했다. 고스란히 전해지는 충격을 화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었다. 언제 자신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릴지 알 수 없었으니까.

아랫배를 끌어안은 화수가 조금 전 경비병들이 사라진 방향과 반대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내딛는 걸음이 절뚝이고 있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 * *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달리는 차 안의 적막을 견디다 못한 카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락을 받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무표정한 리 샤오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것이었나.”

“예?”

리 샤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카이가 되물었다. 물론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은 것은 아니었다. 이리 조용한 차 안에서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저 리 샤오가 내뱉은 말만으로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묘하게 거슬리던 것이.

요 며칠 녀석을 볼 때마다, 아니 녀석이 자신을 볼 때마다, 기묘한 이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듯한 리 샤오였다.

답지 않게 녀석은 늘 웃고 있었다.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덕분에 녀석의 눈동자를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 눈치채지 못했을까. 본래 그리 웃는 녀석이 아니었는데. 자신을 볼 때면 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 가끔 기분이 좋으면 입꼬리만 살짝 말아 올렸다가 내리곤 했는데.

녀석이 그리 꽃처럼 웃는 경우는 대부분 속내를 숨길 때였다. 그걸 왜 몰랐을까. 그리 되뇌긴 했지만 사실 그 이유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예뻐서. 그리 꽃같이 웃는 것이 너무나 예뻐서 말 그대로 홀린 탓이었다. 피식. 그것을 자각한 리 샤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앞좌석에 앉아 있던 카이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작은 바람소리였지만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서도 카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웃음소리라니. 너무 열이 받아서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뒤를 흘끔거리는 카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응? 화수야. 물론 그리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웃음기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투둑. 투둑. 투둑.

거짓말처럼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올 것 같다던 리 샤오의 예상이 딱 맞아떨어졌다. 정무총감의 생일연회에 얼굴만 삐죽 비추고 나온 이유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언급할 만큼 카이는 멍청하지 않았다. 특히나 그 대상이 도망친 지금은 더더욱.

“오른쪽으로 꺾어.”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듯한 차 안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막 양쪽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였다. 이미 왼쪽으로 꺾었던 핸들을 운전병이 황급히 오른쪽으로 돌려 꺾었다. 이유를 물을 만큼 멍청이는 없었다. 조금 전보다 리 샤오의 목소리가 더 날이 서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운전병은 시키는 대로, 카이는 아마도 동물 같은 제 상사가 또 뭔가를 감지한 모양이라고 여기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차갑다라. 생소한 기분에 감각이 둔한 손을 말아 쥐었다 놓기를 반복한다. 수적으로 불리한 전투에서조차 이런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리하면 할수록, 수세에 몰리면 몰릴수록 좋았다. 그래야 승리의 열매가 더 달콤하게 느껴질 테니까.

하지만 그건 본인이 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신이 이기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니, 그 순간이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도 얼굴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 리 샤오를 지옥귀라고 부르는 것은 상대 진영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리 샤오가 손끝이 저릿저릿할 만큼 긴장을 하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런 몸으로 도망을 쳐봐야 멀리 가지도 못했을 터였다. 곧바로 수색대까지 풀었으니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초조한 기분이 리 샤오를 휘감았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끼이익-

빠르게 달리던 차가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맞은편에서 오던 차도 리 샤오가 탄 차를 보고 황급히 속도를 늦췄다.

문이 열리고 차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차창으로 바싹 붙어선 병사를 확인한 카이가 창문을 내렸다. 수색대 중 하나였다.

“보고해.”

비가 들이쳤지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보고드립니다. 저희가 다리 쪽부터 샅샅이 훑어 내려왔습니다만, 오는 동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사실 확실히 해두자는 의도였을 뿐, 특별히 그 보고를 의심해서 되물은 것은 아니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 위로 빗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잠깐 사이에도 검은 머리가 푹 젖었다.

“알았어. 가봐.”

“네!”

고개를 까딱이자 군기가 바짝 든 수색대원이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것을 확인한 맞은편 운전병이 일행이 돌아오기도 전에 헤드라이트를 다시 켰다. 상관의 차가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후진을 해두려는 모양이었다. 그만 물러가도 좋다는 의미로 차 창문을 올리려고 할 때였다.

“멈춰.”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리 샤오가 불쑥, 명령을 내뱉었다.

“왜, 그러십니까.”

창문을 올리는 손잡이를 붙잡은 채 그대로 정지하고 카이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고저 없는 음성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리 샤오의 기분마저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은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뿜어지는 패기로 알 수 있었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 묻는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

딸칵.

하지만 대답 대신 들려온 것은 차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를 깨달은 때는 이미 리 샤오가 바닥에 발을 내린 뒤였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단숨에 리 샤오의 검은 머리를 더 짙게 물들인다. 그것을 보고 카이의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확실하다라.”

그도 그럴 것이 리 샤오는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하고 있었을 뿐이므로.

“이렇게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데.”

화수의 냄새. 정확히는 제 암컷의 냄새였다. 가슴이 뛰었다. 마치 그 냄새에 반응하듯. 그것이 리 샤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릉.

리 샤오가 뽑은 검 끝이 병사의 목에 겨눠졌다.

“책임질 수도 없는 확답은 함부로 하지 말라고 안 배웠나?”

사실 리 샤오는 괜한 화풀이나 하는 상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갈무리되지 못한 패기가 마구 새어 나왔다. 갈무리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여유가 없다는 말이 더 맞았다.

“……사, 살려, 살려주…….”

겨눠진 것은 검 끝인데 목이 억눌린 소리가 나는 것은 병사가 엄살을 부리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리 샤오가 이리 뿜어내는 패기를 정면으로 받는 것은 카이에게조차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므로. 숨을 쉬는 것도,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것도 점점 힘들어질 터였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카이가 입을 열었다.

“부장.”

꺼내 든 검은 우산으로 리 샤오의 머리 위를 가리며. 막아선 우산이 묵직할 만큼 빗방울이 굵었다. 새파란 눈이 자신을 향했다.

“이 녀석들에게 그 냄새를 맡으라는 건 무리지요.”

순간적으로 뒷걸음질 치고 싶을 만큼 흉흉한 눈이었지만 카이는 무릎에 힘을 주어 버텼다. 버티자 이번엔 패기가 온몸을 짜부라트릴 듯 움켜쥐었지만 카이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건 부장만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닙니까.”

단순히 곤鯤에게서 나는 사향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카이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리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었다. 이제는 쏟아지는 비로 인해 검은 우산 너머로 제대로 된 시야를 확보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물론 자신의 상사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장애물이 되지 않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

휙.

겨누고 있던 목에서 검을 물리고 리 샤오가 뒤돌아섰다. 저벅저벅, 걸음을 내딛으면 내디딜수록 점점 더 냄새는 짙어졌다. 이런데, 냄새가 나지 않는다니. 이토록 사람을 미치게 하는 냄새가. 기가 막혔다.

“화수야.”

리 샤오가 입을 열었다. 차갑게 식은 기분과는 달리 입에서는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인데도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이쯤에서 나오면 죽이지는 않을게.”

진심이었다. 이 정도에서 멈추면 죽이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게 두 다리를 부러트려 가둬놓는 것 정도로 봐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까 나와.”

쏴아아아아아.

코끝을 마비시킬 것 같던 달큰한 냄새가 쏟아지는 비에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뭐, 예상은 했어.”

녀석은 그런 녀석이니까.

“네가 너무 얌전하더라고. 꼭 도망갈 것처럼.”

그럼에도 외면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리 샤오가 피식, 하고 웃었다. 기분 나쁘게 배꼽 아래에서 들끓던 감정의 원인이 이제는 확실해졌다. 오히려 내내 찝찝하던 것들이 해소가 되니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녀석에게 느끼는 분노와는 별개로.

-!

리 샤오가 패기를 뿜었다. 죽이지는 않겠다는 말은 그냥 해본 경고가 아니었다.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서, 태연히 그런 눈으로 제게 매달렸단 말이지.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차라리 이대로 죽여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애초에 얽히면 안 되는 인연이었다. 그러니 그 악연은 끊어내는 것이 맞았다. 그러면 이 기분 나쁜 불안도 사라질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리 샤오의 패기가 쏟아져 나왔다. 갈무리되지 않고, 말 그대로 생으로 쏟아지는 패기는 같은 붕들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그런 리 샤오를 말릴 수 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카이조차도 그저 눈을 감은 채 그것을 견디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화수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빌어먹을.”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낮은 욕설과 함께 온몸을 짓누르던 리 샤오의 패기가 누그러졌다. 아주 미세한 정도였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콰광-!!! 하는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순간 밤하늘이 환하게 밝아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꺾은 카이의 시야에 검은 연기와 뒤섞인 화마가 눈에 들어왔다. 육안으로만 봐도 엄청난 규모라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방향이 좋지 않았다.

“대장.”

평소에는 꼬박꼬박 부장, 이라는 새로운 직함으로 부르는 카이지만 정말 급할 때는 전장에서 부르던 호칭이 튀어나온다는 걸 리 샤오도 알고 있었다. 그 부름으로 리 샤오도 폭발이 일어난 위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따르릉.

다시 이어진 침묵 속에서 군용 통신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반사적으로 카이의 시선이 리 샤오를 향했다. 하지만 리 샤오의 발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살풋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디십니까.

통신기를 켜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폭발 위치가 어디야.”

난처한 대답을 하는 대신 카이가 상황을 확인했다.

-총감님의 사택으로 확인했습니다. 비상상황으로 전환하고 모든 인력을 그쪽으로 보내는 중입니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리 샤오 부장님은.

“우리도 그쪽으로 가는 중이야.”

-예, 최대한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하라는 상부의 명령입니다.

철컥. 통신기를 내려놓은 카이가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는 리 샤오에게 다가왔다.

“방금 전 총감의 사택이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못 들었을 리는 없지만 한 번 더 보고를 하는 카이에도 리 샤오는 미동이 없었다. 리 샤오의 시선은 어둠을 향해 있었다. 마치 그 어둠 속에 화수가 숨어 있기라도 하듯.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도 몇 번은 더 죽였을 법한 살기가 가득한 눈이었다.

그만큼 화수에게 느끼는 분노가 엄청나다는 뜻이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총감의 습격 소식을 듣고도 이러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늘 아슬아슬하지만 결국은 위험을 피해 간다. 퍽, 운이 좋은 사내였다, 화수는.

하지만 그런 태평한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카이가 다시금 리 샤오를 불렀다.

“부장.”

리 샤오도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사택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리 샤오는 걸음을, 아니 눈을 돌릴 수조차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게 이런 것임을 리 샤오는 처음 깨달았다.

“부장, 당장 가보셔야 합니다.”

한 발 더 다가선 카이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당연했다. 저 정도 폭발이면 총감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데다 하필 오늘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대부분 고위급 인사들이었다. 피해 정도에 따라서 비상시국이 될 수 있는 심각한 상황. 그럼에도 리 샤오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그런 배불뚝이 녀석을 놓칠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다시는 녀석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녀석을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해놓고서.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부장-”

휙.

결국 리 샤오가 발길을 돌렸다. 그런 리 샤오의 뒤를 따르며 카이가 덧붙인다.

“이미 이곳을 빠져나갔을 겁니다. 있었다면 버티지 못하고 이미 나왔을 테니까요.”

카이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더는 지체하면 안 된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에 발길을 돌렸을 뿐이다.

“수색은 계속하도록.”

차에 오르기 전 뒤쪽에 서 있던 병사를 향해 이르는 것을 잊지 않은 카이였다. 물론 리 샤오에게 들리도록 한 말이었지만 이미 그는 문을 닫고 차에 오른 뒤였다.

“출발해.”

앞좌석에 오른 카이가 명령하기 무섭게 차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난리가 난 바깥 상황과는 달리 차 안은 숨 막힐 듯 조용했다.

“조금 전.”

뒤를 흘끔거리던 카이가 자신을 짓누르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폭발을 감지하셨던 겁니까.”

“…….”

턱을 괴고 바깥을 보고 있던 리 샤오의 고개가 살짝 앞을 향했다.

“그래서 패기를 누그러트렸던 게 아니셨습니까.”

“…….”

말 그대로 사람 하나는 간단히 죽여버릴 듯 패기를 뿜어내던 리 샤오가 순간적으로 패기를 누그러트렸던 순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굉음이 들려오기 직전이었다. 천재지변을 미리 알아차리는 야생동물처럼 뭔가를 알아차린 것이리라, 그런 추측을 하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리 샤오도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까. 카이가 추측한 것처럼 폭발 때문에 멈춘 것은 아니었다. 둘 사이에 시간 차이가 거의 없어 다른 사람은 그리 착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리 샤오는 본인의 의지로 멈춘 것이었다.

왜 그랬지.

리 샤오가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자문했다. 물론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불길이 계속 번지는 것은 막아줄 테니, 다행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어째서 이리도 마음이 불안한 것일까. 하지만 사실 리 샤오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비를 싫어하는 녀석 때문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나는데 녀석이 어디서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그게 또 눈에 밟힌다.

빌어먹을 일이군.

자조하면서 리 샤오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여전히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 * *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으시고요.”

건물 앞에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을 발견하고 카이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몇날 며칠을 사고 수습으로 정신이 없는 리 샤오의 옷가지를 가지고 온 이는 다름 아닌 집사였다.

“기다리고만 있으려니 속이 타서 말입니다.”

집사의 손에 들린 옷 보따리를 건네받던 카이의 손이 멈칫한다. 늘 나서는 법이 없는 집사가 손수 이것을 들고 찾아온 이유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화수 님 소식은 모르십니까.”

“예.”

고개를 끄덕이는 카이의 대답에 집사의 굽은 어깨가 더 둥글게 말린다.

“몸도 안 좋은 분이 대체 어디를 가신 건지.”

주름진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물론 화수의 건강보다는 그 배 속에 있는 아이의 건강이 걱정되는 것이겠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서 찾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필이면 때마침 일어난 총감 습격 사건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부족하지 않게 사람을 풀고 있었다. 그럼에도 녀석을 보았다는 사람은커녕 머리카락 하나 찾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허나 그건 화수가 몸을 잘 숨기고 있어서지, 찾는 사람의 숫자가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물론 카이 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혹 화수 님이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게 되면 막을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안 좋은, 생각이요.”

묘하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에 카이가 그 말을 되물었다. 그러자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더 주름이 많아졌다. 이내 소매춤에 넣어둔 뭔가를 꺼내놓는다.

“어제 방청소를 하다가 발견한 것인데.”

카이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들린 것에 꽂혔다.

“이것은.”

“…….”

평생 험한 일을 한 것이 확연히 느껴지는 뭉툭한 손가락 끝에는 종이를 접어 만든 세모 모양의 종이봉투가 놓여 있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그 형태는 보통 의원에서 소량의 약을 조제해서 넣어주는 봉투와 닮아 있었다.

부스럭. 눈매를 일그러트린 카이가 그것을 가져가 빠르게 펼쳤다.

“비소가 맞지요?”

“…….”

집사도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확인하는 의미에 불과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더 일그러진 카이의 눈매로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첩 아래 바닥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것을 보면 리 샤오 님이 넣어두셨을 리는 없으니.”

“…….”

“혹, 나쁜 생각이라도 하시는 게 아닐까, 늙은이는 걱정입니다.”

“…….”

“이리 갑자기 도망치신 것도 그렇고, 아이를 낳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신 게 아닐까 싶어서요.”

“…….”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묻는 집사의 말에 카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집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사실 나쁜 생각을 한 쪽은 리 샤오고,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화수가 도망친 듯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나마 다행한 것은 화수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확실한 것은 화수를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어딜 갔던 거지?”

묻는 리 샤오의 목소리에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고하지 않고 자리를 비운 것은 카이의 잘못이었으나, 평소의 리 샤오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카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집사어른께서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오셔서.”

그제야 리 샤오의 눈에도 카이의 손에 들린 작은 보따리가 들어왔다. 카이가 그것을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시선을 내렸던 리 샤오의 고개가 다시 들렸다. 리 샤오의 얼굴이 꺼칠했다. 정무총감을 습격한 범인의 정체를 파악하느라 벌써 며칠째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탓만은 아니었다. 한 달 내내 교착상태인 전투에서도 이리 피곤한 기색을 본 적이 없는 카이였다. 물론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말해.”

보고할 것이 있다는 카이의 말에 안광이 흉흉해지는 이유와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집사어른께서 이것을 방에서 찾으셨다고 합니다.”

슥. 책상 위로 놓이는 작은 종이봉투. 그것을 본 리 샤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코끝으로 비릿한 약냄새를 맡은 탓이었다.

“경첩 아래 깊숙이 숨겨놓은 것을 발견하셨다고.”

“…….”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

“아마 리 샤오 님을 닮아 애기씨의 생명줄이 유난하신 모양입니다. 좀 더 센 약을 지어 드릴 테니 이것으로 바꿔 먹이십시오. 아무리 건강한 애기씨라도 이번엔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하. 리 샤오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에 반해 안광이 흉흉한 눈매에서는 웃음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제야 왜 홍 의원이 지은 아이를 내리는 약이 전혀 효과가 없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몸이 무거워 그런가, 요 며칠 계속 가라앉네요.”

그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였단 말이지. 혹여라도 리 샤오가 의심하는 일이 없게 치밀하게 연기를 해둔 것이리라.

언제부터였을까.

리 샤오가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약을 지어 왔던 날? 아니면, 창고에서 꺼내주었던 날?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생일날, 정말은 도망치려 했고 그 뒤로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면? 더듬는 기억 속에서 화수는 늘 자신을 향해 예쁘게 웃고 있었다.

“씨발.”

기억을 더듬던 리 샤오의 눈에 약봉투가 들어왔다. 모든 것이 다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리 샤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와르르.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이 마구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할 수만 있다면 눈앞에 거슬리는 것들을 모두 다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런 녀석임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어째서 그렇게까지 녀석을 완전히 믿고 있었을까. 자신의 어리석음에 기가 막혔다.

“괜찮으십니까.”

집무실 안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밖을 지키고 서 있던 병사가 문 쪽으로 바싹 다가섰다. 총감의 습격 이후로 건물 밖뿐만 아니라 내부의 경계도 삼엄해진 상태였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카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물건을, 조금 떨어트린 것뿐이야. 신경 쓸 것 없어.”

소리나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방 안의 모습만 봐도 물건이 조금 떨어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경비병도 그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리 샤오에게는 아무 일도 없다는 것만 확인하면 되었으므로. 말없이 뒤로 발을 물리는 경비병을 확인하고 카이가 문을 도로 닫아걸었다.

그리고 문 앞까지 날아와 있는 서류를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기차역뿐만 아니라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목이란 길목은 모두 봉쇄한 상태이니 조금만 기다려보시죠. 곧 소식이 올 것입니다.”

“…….”

사실 금방 찾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화수는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목격자조차 없었다. 배가 부른 사내를 보았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나마 발 빠르게 역이나 길을 모두 봉쇄해 도성을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터였다. 사실 시간은 이쪽 편이었다. 어디에 숨어 있든 어쨌든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할 테고 그러면 눈에 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느긋하게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이유는 바로 눈앞의 사내, 리 샤오 때문이었다. 이리도 여유가 없는 리 샤오는 카이도 본 적이 없었다.

벌컥.

답답하다는 듯 열어젖힌 창문으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덕분에 바닥은 더 엉망이 되었지만 거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이는 없었다. 이리 지저분한 상태를 더 견딜 수 없어 하는 쪽은 리 샤오였다. 그런 리 샤오가 이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화가 난 상태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진 사장 쪽에도 사람을 붙여놓았습니다.”

“…….”

카이가 보고를 덧붙였다. 사실 카이는 리 샤오가 가장 먼저 진 사장을 찾아가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런 카이의 추측과 달리 리 샤오는 오히려 그곳에 화수는 없을 거라고, 차갑게 일갈했다. 가장 소중한 존재를 위험에 빠트리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그런 리 샤오의 추측대로 화수는 진 사장을 찾지 않았다. 심지어 진 사장은 화수가 없어진 그날 아침, 토목사업 건으로 지방으로 출장을 간 상태였다. 엊그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카이가 사람을 붙여둔 참이었다.

“끊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

하얀 담배를 입에 무는 리 샤오를 보고 카이가 되물었다. 사실 끊었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화수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끊은 것인 줄 알았다.

“됐어.”

딸칵.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는 카이의 손을 리 샤오가 거절했다. 본인이 직접 붙이려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입에 물고만 있는 담배를 가만히 응시하던 카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안 피우십니까.”

“피우려고 했는데.”

“…….”

“어쩐지 안 내키네.”

입에 물렸던 담배가 리 샤오의 긴 손가락에 걸렸다. 끊은 것은 아니었다. 배 속의 아이 때문에 조심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술처럼 제가 피우는 모습을 보면 녀석도 피우고 싶어 할 것 같아 녀석 앞에서는 꺼내 들지 않다 보니 밖에서도 입에 무는 일이 줄었다.

지금도 답답한 기분에 습관처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는 것이 이상하게 내키지 않았다.

“혼자만 피우니, 맛있으십니까.”

어디선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기도 하고.

미친놈.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 이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라이터는 꺼내지 않는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서 쉬시지요.”

아직 범인이 잡힌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윤곽은 잡힌 상태. 전시상황도 아니고 굳이 리 샤오가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5분 대기조를 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급한 일은 해결이 되었지 않습니까.”

“…….”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것이 거절의 의미임을 카이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끈질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

“잠깐이라도 방에서 편하게 눈을 붙이시는 게-”

“카이.”

이름을 부르는 낮은 음성에 카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높은 언성보다 이리 낮게 깔린 음성이 더 사람을 움츠러들게 한다는 걸 카이도 리 샤오를 통해 깨달았다.

“시끄러워.”

“죄송합니다.”

그만 입을 다물라는 말이라고 생각한 카이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머리가 시끄러워서.”

“…….”

“그래서 못 자겠어.”

쏴아아아.

이는 바람에, 3층 건물 높이만큼 거대한 나무의 잎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그 소리가 꼭, 비가 내리는 소리 같았다. 여름철 예고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 그래서 온몸을 흠뻑 적시는. 딱 그 소리였다.

* * *

-!

정신이 든 것은 한순간이었다. 눈도 채 뜨지 못하면서도 가장 먼저 손을 더듬어 확인한 것은 자신의 배였다.

하아.

무겁고 짐스러운 배를 더듬어 확인한 후에야 화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왜 자신에게 왔냐고 원망한 것이 무색하게도 화수는 그제야 안도감을 느꼈다.

여기가 어디지.

사실 제일 먼저 들었어야 할 궁금증이었다. 화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눈을 살풋 찌푸린다.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를 확인한 탓이었다. 천정까지 이어지는 네 개의 기둥에는 천이 연결되어 늘어져 있었는데, 그 천이 하늘하늘한 소재인 것도 모자라 무려 분홍빛이었기 때문이다.

완전, 변태 취향이구만.

물론 여성의 방이라 이리 꾸며놓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과했다.

얼굴을 찌푸린 채 방 안을 둘러보던 화수가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딛었다. 고급 카펫이 푹신했다. 침대 아래쪽에도 자신이 신고 왔던 신발은 보이질 않았다. 포기는 빨랐다. 맨발로 문을 향해 걸어간 화수가 붙잡은 문고리를 막 돌리려고 할 때였다.

철컥.

문고리가 저절로 돌아가더니 이내 고리가 열리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양옆으로 열리는 문틈으로 모습을 나타낸 이와 눈이 마주쳤다. 태연한 화수와 달리 상대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아마도 화수가 문 앞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리라. 물론 화수도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다.

“누구야, 너.”

눈앞의 사내는 처음 본 사람이었다. 경계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손짓으로 화수를 뒷걸음질 치게 한 뒤 다시 그를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뭐야.”

“…….”

힘으로 미는 것은 아니었지만-사실 그래서 좀 더 순순히 밀린 것이기도 했다- 그가 미는 대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던 화수가 사내를 향해 항의했다.

“잠깐, 무슨 말이라도-”

그러다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혹시, 말을 못해?”

끄덕. 온화한 표정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화수는 어느새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사내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못마땅한 듯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지만 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여기 있으라고?”

두 손을 들어 앞뒤로 가볍게 흔드는 동작의 뜻을 화수가 금방 알아차린다. 반벙어리 녀석을 오랫동안 보아온 덕분이었다. 화수의 물음에 사내가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까.”

어깨를 으쓱인 화수가 덧붙였다.

“다시 올 때는 말을 할 수 있는 녀석을 데려와.”

풀썩. 빠른 걸음으로 물러서는 사내를 확인하고 화수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푹신한 침대가 충격을 모두 흡수했다. 철그럭.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이어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났다.

“이 집엔 다 벙어리들뿐이야?”

침대 취향을 보고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벙어리만 시종으로 부리는 주인이라니. 물론 화수가 모든 시종들을 만난 것은 아니니-방에서 나갈 수 없었으므로- 모두라고 하기에는 다소 일반화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제가 본 시종 셋은 모두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것만으로도 일단 주인이 변태라는 건 확실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변태 주인이라도 얼굴을 좀 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며칠째 화수가 본 것은 밥을 가져다주는 시종과 화수의 몸상태를 확인하는 시종, 그리고 처음 문을 열고 들어왔던 시종, 이렇게 세 명이 고작이었으므로. 활동반경도 지금 이 작은 방이 고작이었다.

리 샤오의 집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집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게 했어도 사실 궁궐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더 큰 집이 아니었던가. 집 안만 돌아다녀도 숨이 찰 때도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있을 때는 갑갑하다는 생각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이 손바닥만 한 방에 갇혀 있기 전까지는.

뭐 사실 리 샤오의 집에 비해 손바닥만 하다는 거지, 객관적으로 보면 이 방도 꽤나 크고 넓긴 했다. 필요한 것은 다 있고, 심지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잊지 않고 챙겨와 도로 가져가야 하긴 했지만. 바깥에서 문이 잠겨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이리 갑갑하게 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 무엇보다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동안 과분한 대접을 받긴 했지만. 평생을 무시당하며 살았고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은 고작 몇 달인데, 그럼에도 이것이 이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이래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모양이었다.

“관둬.”

난감한 표정으로 눈치만 살피고 있는 시종에 화수가 결국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건 안 먹을 거니까 가지고 가.”

그러면서도 제 앞에 놓인 약사발을 들어 시종의 손에 들린 쟁반에 올려놓는 것도 잊지 않고서. 눈이 휘둥그레진 시종이 약사발을 도로 내밀었지만 화수는 단호했다.

“약은 안 먹어.”

보아온 며칠 동안 시큰둥하긴 해도 결국 하라는 것을 다 하던 화수가 이리 단호하게 거절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시종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손짓으로 배가 부른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배 속의 아이에게 좋은 약이라는 뜻을 전했지만 화수는 아예 발길을 돌렸다.

푹푹, 발이 빠질 것 같은 카펫을 맨발로 밟던 화수가 멈춘 곳은 창문 앞이었다. 본래는 활짝 열리는 것이었을 아치형의 창문은 기껏해야 사람 손 하나가 겨우 드나들 정도의 틈만 열렸지만 요즘 화수가 기운만 있으면 가서 앉아 있는 장소였다.

더워.

사실 리 샤오의 집은 전통가옥이라 한 번도 더운 것을 느낀 적이 없었다. 땀을 흘릴 만큼 격렬히 움직이는 일도 없고 밤이면 늘 시원한 바람이 들어 여름이 아직 멀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

사실 틈새로도 바람은 들지 않았다. 꽁꽁 닫힌 문 탓에 바람은 늘 바깥에서만 머물렀다. 틈새로 화수가 손을 내밀었다. 처음엔 기겁하던 시종도 이제는 익숙한 일이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달려와 저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냥 두라는, 가장 오래된 시종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새하얀 손이 창밖으로 내밀어졌다. 사실 그리 차이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내리쬐는 볕을 받아 내밀어놓은 손이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수는 이상하게 내민 왼손이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도 모르게 창에 바싹 붙었다. 그것을 본 시종이 들고 있던 쟁반을 내던지며 달려왔다. 이성적으로는 그 틈새로 사람이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상하게 순간적으로 화수가 그 틈새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붙잡은 새하얀 손이 손끝에서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 생각은 더더욱 신빙성을 더했다. 하지만 그런 시종의 생각과 달리 화수가 창문으로 바짝 붙은 것은 전혀 다른 이유였다.

“씨발.”

잡아당기는 시종의 손을 뿌리치며 화수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처음엔 제가 잘못 본 것인 줄 알았다. 사실 지금도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진도현!”

막 멈춰 선 자동차에서 내리는 이는 분명 진도현이었기 때문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던 진도현이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건물의 가장자리 가장 높은 창문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을 확인한 진도현의 얼굴 위로 표정이란 것이 생긴다.

“여어.”

진도현이 손을 들어 화답했다. 열렬한 환영인사에 기분이 좋아진 듯 눈꼬리가 접혀 있었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화수가 아니었다면 오랜만의 재회에 기뻐하는 평범한 장면이었을 터였다.

“이렇게 열렬한 환영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이런 사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상큼한 미소로 들어서는 진도현의 얼굴을 보니 화를 낼 기분도 나질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을 화수도 아니었지만.

“또 어떤 변태한테 재수 없이 걸렸나 싶었더니.”

“변태라니. 듣는 변태 섭섭하게.”

“…….”

유들유들하게 받아치던 진도현도 뒤늦게 화수의 눈동자에서 지친 기색을 알아차렸다.

“뭐야. 정말 졸았던 거야?”

전혀 예상 밖이라는 듯 놀라서 묻는 진도현의 반응에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이 인간이 진짜.

“생판 모르는 곳에서 눈을 떴는데, 드나드는 시종들은 하나같이 말 못 하는 벙어리들뿐이지, 사람을 이런 방구석에 가둬놓고선 정작 주인이란 작자는 몇 날 며칠 코빼기도 안 보이지. 이 상황에서 태평하게 지낼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한 거야?”

“방구석이라니. 이 정도면 지내기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가둬둔 건 맞다는 얘기네.”

“그럴 리가.”

진도현이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주의해서 잘 보살피라고 했을 뿐인데,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야.”

“…….”

진도현의 그 말을 믿을 만큼 화수는 순진하지 않았다. 굳이 그것을 따져 물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고.

“어째 갈수록 취향이 기괴해지는 것 같네. 덕분에 말이 새어 나갈 일은 확실히 제거되긴 했겠지만.”

“아.”

화수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내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내가 서 있었다. 그런 화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꺾었던 진도현도 그제야 화수가 비꼬듯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뭐, 그렇게 되나?”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린 진도현이 고개를 바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전 주인 취향이지만, 제법 괜찮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니까.”

“…….”

전 주인? 화수의 눈이 기름해진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물은 것은 아니지만 마치 화수의 표정만으로도 그가 가진 의문을 알아차린 듯 진도현이 대꾸했다.

“이 집, 홍위의 집이거든. 정확히는 그 새끼 아비의 집이라고 하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홍위?”

“기억 안 나?”

기억 안 날 리가 있나. 그저 지금 등장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라 반사적으로 되뇌었을 뿐.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는 이름에 화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야. 정말로 진 사장 작품이었던 거네.”

질문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허나 정작 진도현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완전히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다.

“나 아닌데?”

“뭐?”

“이 집안 망하게 만든 사람은 내가 아니라고. 잘못 짚었어.”

화수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 집, 그 새끼 집이라며.”

“망해서 헐값에 나온 집을 샀을 뿐이야.”

“…….”

사실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 정의로운 성격도 아니고 화수가 오해하게 두는 것이 제게는 더 유리할 테니까. 그럼에도 진도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그 사내의 덕을 보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물론 그 일을 한 이가 누구인지까지 밝힐 생각은 없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진도현은 사실 정정당당한 성격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기회주의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덤으로 이 집에서 일하던 시종들까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새로 뽑는 게 귀찮기도 하고, 누가 말도 못 하는 벙어리들을 시종으로 들이겠어.”

“……하지만 이 집 주인은.”

설마. 되물으려던 화수가 일순 말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뭔가가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보통 멀쩡한 집안에서는 흠이 있는 시종을 들이지 않는데, 홍위의 집안에서 벙어리를 시종으로 들였다는 게 어쩐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변태 같은 인간들이라 말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고 해도 처음부터 흠이 있는 이를 들였다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쪽이 좀 더 신빙성이 높아 보였던 것.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화수는 차마 묻지 못했다.

그게 정말일 것 같아서. 하지만 이번에도 화수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진도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맞아. 처음부터 벙어리는 아니었다더라고.”

“…….”

아. 화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멀쩡한 시종을 데려와서 혀를 잘라버린 거지.”

“……미친 새끼.”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런 주인 밑에 있었으니 내 말을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너그럽게 이해해주라고.”

“저들이 오해하리란 걸 알면서 일부러 그냥 둔 것은 아니고?”

“그럴 리가.”

“…….”

“이거 섭섭한데?”

여전히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는 화수에 진도현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화수도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나한테도 그랬잖아.”

“…….”

무슨 소리냐는 질문은 돌아오지 않았다. 진도현도 화수의 질문이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말해주지 않았어?”

“…….”

“이미 각인이 되어 있는 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

“…….”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리 묻고 있는 것은 변명이라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도현은 변명 대신 화수의 아랫배로 시선을 내렸을 뿐이다. 한 달여 전 보았을 때보다 확연히 부푼 배를 응시하는 진도현의 시선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가 두 팔로 배를 감싸 안았다. 위협을 감지한 어미의 본능이었다.

물론 그런 자신의 행동이 진도현의 기분을 더 어그러트릴 거라는 부분까지는 예상치 못했다. 아니, 설사 예상했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이제 화수에게 진도현은 신뢰할 수 있는 사내가 아니었으므로.

“기대했었어.”

“…….”

“혹 내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

하지만 경계하는 화수의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헛된 기대였음을. 그때까지 평온하던 진도현의 눈빛이 단숨에 사나워졌다.

“누구 아이지?”

“상관없잖아.”

난감한 질문에, 화수가 시선을 피하며 무의식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단단한 손이 화수의 팔을 붙들지 않았다면.

“놔.”

화수가 진도현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진도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아파.”

뿌리치려 하면 할수록 움켜쥐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리 샤오 부장?”

“아프다고.”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통증에 화수가 반항을 멈췄지만 손의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했다. 점점 감각이 없어지는 손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때였다.

“뭐야.”

두 사람 사이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내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던 사내였다. 진도현의 흉흉한 시선이 사내에게 고스란히 향했지만 사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더니 손으로 화수의 배를 가리키며 고개를 내젓는다.

임산부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듯했다. 다행히 그런 의도가 잘 전달되었는지 사내를 노려보던 진도현도 결국 화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 잠깐 사이에도 벌건 손자국이 남았다.

삐걱.

아릿한 손목을 문지르면서 화수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진도현도 이번엔 그런 화수를 저지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뻗어 화수의 턱을 붙들었다. 흠칫, 하고 떨긴 했지만 화수는 가만히 진도현이 하는 대로 턱을 들었다. 똑똑한 녀석. 진도현이 쓰게 웃었다. 새까만 눈과 눈이 마주쳤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내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미 각인이 되어 있다잖아.”

마음 같은 건 주는 법이 없는 녀석이, 마음은커녕 곁도 좀처럼 내주지 않는 녀석이, 대체 누구와 각인을 했단 말인가.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깟 각인 같은 건 금방 깰 수 있을 줄 알았어. 어차피 각인한 줄도 모르는 걸 보니 별것 아닌 풋사랑일 테니까.”

“…….”

“각인이 되면 그때 말해줄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리 오래 버틸 줄 알았나. 독한 녀석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독할 줄은 몰랐지.”

“…….”

턱을 붙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턱을 훑어 올라온 손가락이 화수의 아랫입술을 더듬는다. 사내 치고는 지나치게 붉은 입술이 손끝에 닿았다. 입술을 더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잔인한 말과는 대조적으로.

“그냥 강제로라도 취할 걸 그랬어.”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랬다면 두 번이나 눈앞에서 놓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짜증이 일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사람을 물건 취급하지 마.”

“…….”

화수가 진도현의 손을 쳐냈다. 이번엔 진도현도 순순히 손을 물렸다. 화수의 눈에 어린 지친 기색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일단 좀 쉬는 게 좋겠어. 안색이 안 좋아.”

“…….”

그리 말하는 사내의 눈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왜 제 주변엔 이런 미친놈들밖에 없는 걸까.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던 화수가 침대 안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갔다. 화수가 침대에 눕기 무섭게 진도현이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이후의 일은 차차 이야기하고.”

“…….”

대답 대신 화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불이 턱 밑까지 여며졌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래서 화수는 진도현이 좋았다. 제가 아는 가장 다정한 사내였으니까. 만약 각인이란 걸 하게 된다면, 이 사람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졌다. 다정한 손길도, 다정한 눈빛도, 다 거짓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필이면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것을 닮은 모양이었다. 빌어먹게도. 절대 어미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면서, 아무나 덥석덥석 믿는 것까지 꼭 제 어미를 빼닮았다.

씨발.

욕이 늘었다. 아이를 가졌을 땐 좋은 말과 좋은 생각만 해야 한다던 집사어른의 잔소리가 떠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몸을 동그랗게 만 화수가 자신의 배를 감싸 쥐었다. 마치 귀를 막아 듣지 못하게 하듯.

배를 감싼 건 제 쪽인데 이상하게 자신이 안긴 것처럼 잠이 몰려왔다. 이 집 주인의 정체를 알지 못해 내내 하고 있던 긴장이 이제야 풀렸기 때문이다. 사실 진도현도 믿을 수 없는 사내이긴 하지만 적어도 약속을 어기는 사내는 아니었다. 이후의 일은 차차 이야기하자고 했으니, 화수가 자는 동안 엄한 짓을 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적어도 그런 믿음은 있었다. 설사, 아니라도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겨우 붙들고 있던 긴장의 끈이 툭, 하고 끊겼다.

모든 것이 암전이었다.

* * *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마.”

삐걱. 침대에 걸터앉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뒤돌아 누운 화수는 미동도 없었다. 삐쩍 마른 어깨가 눈에 거슬렸다.

“그만 일어나, 억지로 먹이기 전에.”

“…….”

“계속 버티면 입으로 먹여달라는 말인 줄 알겠어.”

“…….”

“셋, 둘-”

“약은 안 먹어.”

불퉁한 대답이지만 입이 열렸으니 절반은 성공이었다.

“밥도 안 먹고 약도 안 먹겠다면, 이대로 굶어 죽겠다는 거야?”

“밥은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거든?”

“그러니까 약이라도 먹어야 할 것 아니야. 피죽도 못 얻어먹은 새끼마냥 삐쩍 말라가지고.”

“…….”

“대체 그 집에선 임산부한테 밥도 안 먹이고 뭘 한 거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정작 먹는 것은 여기보다 그 집에서 더 잘 챙겨 먹었다. 이상하게 리 샤오가 사다 준 것들은 삼킬 수가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약은 안 먹어.”

일어나 앉은 화수가 한 번 더 선언하듯 내뱉자 그제야 진도현도 뭔가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왜. 독이라도 탔을까 봐?”

“…….”

“그래서 밥도 안 먹는 거야?”

“못 먹는 거거든?”

먹을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도 화수가 가장 먹고 싶었다. 못 먹는 것도 억울해 죽겠지만, 투정 부린다고 오해받는 게 더 억울했다.

“꼴이 이래가지고 이틀 꼬박 달려야 하는 기차를 탈 수 있겠어?”

엄지와 검지로 말아 쥐어도 그 안에 들어오는 앙상한 손목을 들여다보면서 진도현이 중얼거렸다.

“기차를 왜 타.”

진도현의 손에서 손목을 빼며 무심히 대꾸하던 화수가 이내 멈칫했다. 화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이 마주친 진도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천조국으로 갈 거야, 화수야.”

“…….”

가자도 아니고, 이미 결정된 사항의 통보였다. 하지만 화도 나지 않았다. 자신의 일인데도 이상하게 모든 것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화수였다.

“지낼 곳은 이미 다 준비해뒀어. 아이를 낳아 키우기에도 그곳이 좋을 거야.”

“진 사장 아이가 아니-”

“상관없어. 난 너만 있으면 되니까. 너 닮은 아이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

왜 이렇게 남의 아이를 키우겠다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다. 물론 한 사람은 정작 자신의 아이라는 걸 알자마자 죽여버리겠다고 했지만.

“이곳에 있다간 언젠가 리 샤오 부장에게 들켜서 아이를 빼앗길 수도 있어. 너도 그게 싫어서 도망쳐 나온 거잖아.”

화수가 리 샤오에게서 도망친 이유를, 그렇게 오해한 모양이었다. 굳이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제 아이를 죽이려 한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쪽이 더 납득하기 쉬웠으니까.

게다가 진실이 어떻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중요한 점은 자신이 리 샤오에게서 도망쳤고, 다시는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뿐이었다.

진도현이 달래듯 말했다.

“그러니까 네 몸 상태만 좋아지면 돼.”

“……그래도 약은 안 먹어.”

이번에 역시 고집불통의 불퉁한 대답이 돌아왔으나, 진도현도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약은 먹지 않겠다고 했지만 천조국에 가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화수식 허락의 말임을 누구보다도 진도현이 잘 알고 있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진도현에게서 쟁반을 가져갔다.

“먹을 것을 좀 챙겨와.”

물러서는 시종을 향해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 먹고 싶은 거 없어?”

“……복숭아.”

당연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순순히 돌아온 대답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진도현이었다. 덕분에 반응이 조금 늦었다.

“복숭아?”

“…….”

이번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진도현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진 것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복숭아라면, 이미 철이 지났을 텐데.”

먹고 싶다고 한 것이 하필이면, 한여름에 복숭아라니.

“됐어. 그냥 생각나서 한번 말해본 거야.”

난감한 마음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화수가 곧바로 말을 물렸다. 괜찮다고, 그냥 한번 말해봤다고 했지만 화수의 입에서 그냥 한번 나오는 것은 없었다. 진도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화수야.”

고양이마냥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자고 있던 화수가 누군가의 부름에 번쩍 눈을 떴다. 잔뜩 기대한 얼굴로 눈을 뜬 화수의 눈동자에 이내 실망감이 어린다. 물론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대신 마주한 이가 그것을 선명하게 알아차렸다.

“왜. 나라서 실망했어?”

“……그런 적 없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화수를 진도현도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 급한 것은 따로 있었다. 슥. 진도현이 등 뒤로 숨겨놓았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

잠기운이 남아 있던 눈이 단숨에 번쩍 떠졌다. 그냥 한번 말해보기는. 진도현이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구했어?”

“이 빚은 나중에 두고두고 받아낼 거니까.”

진도현이 유난히 생색을 내도 화수는 불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진도현의 손에 들린 것은 분명, 복숭아였기 때문이다. 이미 철이 지나 구하기 힘들다고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진도현의 손에 들린 것은 씨알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어디 한 군데 멍든 곳 없이 뽀얀 속살을 자랑하는 녀석에게서 달큰한 냄새가 풍겼다.

“먹어봐.”

챙겨 온 과도로 복숭아를 먹기 좋게 잘라 진도현이 그 조각을 앞으로 내밀었다. 건네받은 화수가 망설임 없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씹기도 전에 달큰한 과육이 입안에 확 퍼졌다.

“왜.”

진도현이 물었다. 아주 찰나였지만, 화수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맛이 이상해?”

혹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은 곯은 것인가. 눈매를 일그러트리고 진도현이 묻자 화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맛있어.”

“…….”

“못 믿겠으면 진 사장도 먹어보든지.”

“…….”

얇게 저민 과육을 제 입으로 가져간 뒤에야 진도현도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맛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걱정한 것과 달리 부드럽고 달콤한 복숭아의 맛, 그대로였다. 제가 잘못 본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진도현이 물었다.

“더 먹을 거야?”

“어.”

고개를 끄덕이는 화수에 진도현이 한입 크기-조금 전 진도현이 먹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크기였다-로 자른 복숭아를 내밀었다. 이번에도 그것을 입안으로 넣은 화수가 열심히 과육을 씹었다.

역시나.

조금 전 느꼈던 이질감은 착각이 아니었다. 물론 복숭아는 맛있었다. 달큰하고, 부드럽게 씹히는 과육의 느낌은 아주 좋았다. 그럼에도 자신이 생각했던 맛이 아닌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지. 분명 제가 아는 복숭아 맛이고, 심지어 맛도 좋은데, 그럼에도 기묘하게 뭔가가 부족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걸까.

하지만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화수 본인도 알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가 알 리가 없었다. 우걱우걱. 물론 그런 복잡한 머릿속과 달리 입안으로 들어온 과육을 씹는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입덧 없이 먹는 음식이었다.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입덧이 잦아든 모양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 * *

“리 샤오 부장.”

병실을 나서는 리 샤오의 앞으로 룽오 부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 습격으로 중상을 입은 정무총감은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그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룽오 부장 역시 오른쪽 어깨를 다친 탓에 오른팔을 부목으로 고정시켜놓아 걸쳐진 제복 소매가 힘없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수사는 어찌 되어가고 있습니까.”

가볍게 목례를 한 리 샤오가 그를 스치려 했지만 룽오 부장은 그대로 지나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범인을 체포했다고 들은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주동자 무리에 대한 소식이 없어서 말이지요.”

“취조 중이니, 곧 밝혀지겠지요.”

쥐새끼마냥 도망 다니던 범인을 붙잡은 게 사흘 전이니, 룽오 부장의 말처럼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혹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제 정무국 내 취조실이면 길면 하루, 짧으면 한나절이면 본인 잠자리 사정까지 나불대게 만들 수 있거든요.”

“말씀 고맙습니다.”

대놓고 너보다 내가 더 낫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리 샤오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지금의 대화를 길게 하고 싶지 않은 탓이었으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룽오 부장이 다시금 걸음을 내딛으려는 리 샤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순 리 샤오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물론 룽오 부장도 그 정도는 예상했던 터라 모르는 척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정말로 범인을 제 쪽으로 넘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일이 아니라도 다른 일로 바쁘신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

“누굴 찾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

“일처리 하나는 깔끔한 리 샤오 부장이 이번 일은 어찌 이리 지지부진한가 의아했는데, 본시 집안이 평안해야 바깥일도 잘 풀리는 법이지요. 다 이해합니다.”

“룽오 부장이 제 일에 그리 관심이 많으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총독부 내의 일은 정무국장인 제가 온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정무총감님의 일이기도 하니까요.”

“염려하시는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만, 이번 일은 누구도 신뢰하지 않고 수사 중이라서 말입니다. 물론 그것이 정무국장이라 하더라도 예외일 순 없지요.”

내내 빙글거리던 룽오 부장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참으로 속을 알기 쉬운 사내였다.

“그 말은 나도 의심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말씀드렸듯이 누구도 신뢰하지 않고 수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허면 리 샤오 부장 역시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보장하지요?”

“…….”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자면, 그날 그 자리에 없었던 리 샤오 부장 쪽이 더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만약 깨어나지 못하실 경우 정무총감 자리에 가장 유력한 후보자이시기도-”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룽오 부장님.”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던 카이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고 말았다. 돌려 말하고 있지만 사건의 배후로 리 샤오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금 보니 처음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리 샤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한결같다고 해야 할지. 물론 그만큼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초조한 상태라는 말이겠지만.

“카이.”

하지만 그런 카이를 저지한 것은 리 샤오였다. 조금 전과 다름없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감정이라는 것이 떠오른 순간은 조금 전 룽오 부장의 입에서 화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뿐이었다.

“누가 멋대로 끼어들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아무리 룽오 부장이 리 샤오에게 무례했다 하더라도 상관들의 대화에 하급자가 건방지게 끼어들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카이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룽오 부장이 완전히 선을 넘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룽오 부장.”

“예, 리 샤오 부장.”

당연히 카이를 대신해 사과를 해오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마주한 리 샤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전혀 예상과 다른 내용이었다.

“룽오 부장 말대로 내가 가장 유력한 후보자라면, 내가 그 자리에 올랐을 때 누굴 가장 먼저 정리할 것 같습니까?”

“…….”

뒤이은 리 샤오의 질문에 눈이 휘둥그레진 쪽은 카이였다. 무려 자신의 상관이 순순히 룽오 부장의 말을 긍정한 것도 모자라 그 지위를 이용해 상대를 협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아는 리 샤오는 누구보다도 지나치게 권력욕이 없는 사내였다. 편하게 앉아 지시를 하는 것보다 직접 적의 목을 베는 쪽이 더 적성에 맞았다. 남들은 그리 앉고 싶어 안달을 내는 제3국장의 자리도 언제든지 가볍게 버릴 수 있으면서 아무리 룽오 부장의 도발이 있었다고는 해도 정무총감의 자리에 생각이 있다는 어감의 말을 내뱉다니. 빈말이라곤 하는 법이 없는 리 샤오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라 카이에게는 그 어떤 사람보다 그 말의 무게가 더 묵직하게 다가왔던 것.

물론 리 샤오는 그런 카이의 대혼란과는 상관없다는 듯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하, 하. 도움이 되고 싶었던 호의를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것이 조금 섭섭해서 한 말을 가지고 뭘 그리 정색을 하고 그러십니까.”

당연히 이번에도 말도 안 되는 추측이라고 부인해올 줄 알았던 리 샤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당황한 쪽은 룽오 부장이었다. 하지만 웃으며 넘기려는 룽오 부장을 이번엔 리 샤오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대놓고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를 두 번이나 봐줄 만큼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불만이라니요.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낭패다 싶어진 룽오 부장이 몸을 납작 엎드렸다. 본디 권력의 개는, 약한 이에게는 짖고 강한 이에게는 짖기는커녕 납작 엎드려 눈치를 살살 보는 법이다. 그러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배를 발랑 까뒤집고 복종을 하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습성이었다.

“허면, 이만 나는 정무총감님을 뵈러.”

가보겠다고 말하면서 정작 룽오 부장의 발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지만 리 샤오는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내내 앞을 막고 있던 룽오 부장이 핼쑥해진 얼굴로 벽으로 붙자 그저 태연히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런 리 샤오의 뒤로 카이가 따라붙었다.

“뭐가.”

“괜한 오해라도 사면-”

“상관없어.”

“…….”

그 자리에 멈춰 선 카이와 달리 리 샤오는은 성큼성큼 앞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카이가 황급히 간격을 줄였다.

병원 밖으로 나온 카이가 차 문을 열었다. 리 샤오가 빠르게 뒷좌석에 오르기 무섭게 문이 도로 닫혔다. 카이 역시 앞좌석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차가 천천히 나아간다. 백미러로 뒤를 살피던 카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

과연 지금 이 상황에서 이것을 고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사실 카이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백미러로 리 샤오와 눈이 마주쳤다.

말해. 조금 머뭇거리는 카이를 알아차렸는지 단숨에 차가워진 눈빛으로 명령했다.

“당시에 여우 가면을 썼던 이를 태웠다는 인력거꾼을 찾은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입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에 마른침을 삼킨 카이가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술자리에서 그런 손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는 이의 진술을 확보했습니다만, 그 인력거꾼의 거취가 확실치 않아 사람을 풀어 알아보는 중입니다. 몇 년 전 지방으로 내려갔다는 소식만 남은 상태라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

팽팽하게 조이던 시선이 물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창밖으로 향한 리 샤오의 옆모습을 확인하고 카이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화수 님에 대한 소식은 아직, 보고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집으로 갈까요.”

카이가 나직이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총독부로 가. 내가 직접 심문한다.”

카이의 별다른 지시가 없었지만 차는 부드럽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금 전 왔던 길이었다.

* * *

“잠깐.”

움직이던 차가 속도를 늦췄다. 건물을 둘러친 거대한 담벼락 아래 거슬리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멈추지.”

차가 정확히 벽에 달라붙어 있는 거렁뱅이 앞에서 멈춰 섰다. 끼익, 끼익, 차 창문이 아래로 내려갔다. 열린 창문으로, 바닥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던 거렁뱅이가 벌떡 일어나 달라붙었다.

“사장님, 부디 자비를 베푸세요.”

차 안으로 시큼한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훅 풍겨 들어왔다. 손등으로 코를 틀어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던 진도현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어이, 물러서지 못해?!”

운전사가 기겁해서 외쳤지만 거렁뱅이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대로 차가 가버릴까, 앙상한 손으로 창문을 붙들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었던지 운전사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일주일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사장님, 사장님, 닷 냥만, 아니 한 푼이라도 좋습니다.”

물론 그러는 사이에도 거렁뱅이는 연신 진도현을 향해 구걸을 하고 있었다.

“이 거지새끼가, 어디서!”

황급히 달려온 운전사가 거무죽죽한 옷가지를 붙잡았다. 그리고 차에서 떨어트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쉽지 않았다. 마른 몸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매달린 손가락은 유리창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사장님, 사장님!”

앙상한 뼈만 남은 손가락이 유리창에 걸려 있는 모습은 어쩐지 기괴한 느낌마저 주었다. 옷가지를 당기던 운전사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른 손을 뻗어 유리창에 붙은 손가락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버둥거리는 몸을 꽉 누른 채 손가락을 꺾자, 앙상한 나뭇가지가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하나 남은 검지마저 떼어내려는 순간.

“놔줘.”

진도현의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몸싸움을 하느라 운전사에게는 그 명령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퍽-!

마지막 손가락마저 차창에서 떼어낸 운전사가 거렁뱅이를 벽 쪽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을 본 진도현이 차 문을 열어젖혔다.

바스락. 잘 닦인 구두 아래서 자갈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 조금 전 광인 같은 힘으로 버티던 것이 거짓말처럼 그대로 힘없이 나가떨어진 거렁뱅이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구석에 고꾸라진 채였다.

저벅저벅. 진도현이 고꾸라진 거렁뱅이의 앞으로 걸어갔다. 마지막 남은 기력을 다 썼는지 그는 눈꺼풀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반쯤 감긴 눈으로 비싼 가죽 신발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사내를 위해 진도현이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커다란 그림자가 사내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커다란 덩치로는 쪼그려 앉아도 상대에게 주는 위압감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움츠러든 사내를 향해 진도현이 반갑다는 듯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이야, 홍위.”

늘어져 있던 눈꺼풀이 번쩍 들렸다. 조금 전 차를 향해 달려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흉흉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홍위.

산발이 된 쑥대머리, 언제 씻은 것인지 모르겠는 시커먼 얼굴, 한여름에도 쉰내가 풀풀 나는 거적때기를 덮어쓰고 있는 비루한 행색에서는 도저히 예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그 눈빛만큼은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기 전, 아비의 권세만 믿고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던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던데, 천하의 홍위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어 그래.”

쯧쯧, 혀를 차고 있었지만 눈은 재밌어 죽겠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진도현을 홍위가 죽일 듯이 노려본다.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녀석이었다. 능력으로나 외모로나 어느 것 하나 상대가 되지 않는 이의 괜한 시기였지만 그마저도 진도현은 신경도 쓰지 않고 가볍게 넘기곤 했다. 그런 태도가 홍위의 자존심을 더더욱 상하게 했지만.

“닷 냥이면 되겠어?”

“…….”

차마 되었다는 말은 할 수 없어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으려니 진도현이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를 세었다.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던 홍위가 이내 흠칫하고 놀랐다. 빳빳한 지폐 몇 장이 제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흉흉하던 눈이 돈을 보자 본능적으로 반지르르해지는 것을 진도현은 놓치지 않았다.

피식. 받고 싶어 죽겠으면서 그럼에도 선뜻 받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는 홍위를 보고 있으려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마도 이리 큰돈을 주는 데는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는 모양이었다. 멍청하긴 해도 눈치가 아예 없는 녀석은 아니었던 것을 떠올렸다.

“허기도 좀 채우고, 욕간도 좀 들러. 꼴이 이게 뭔가, 천하의 홍위가.”

머뭇거리는 사내의 옷-이것을 옷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안으로 지폐를 집어 넣어준 진도현이 톡톡, 사내의 가슴께를 두들기며 덧붙였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 때였다.

“우리 집!”

발길을 돌리는 진도현의 등 뒤로 홍위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려온 것은.

“우리 집, 누구한테 넘어갔어?”

“…….”

“분명 내내 비어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밤에 불이 켜져 있던데.”

“그게 왜 궁금한데?”

“…….”

돌아보는 진도현의 눈빛이 조금 전과 달리 확연히 온도가 낮아져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기는 했지만 머리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인 홍위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내 집이니까-, 윽!”

하지만 그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몸이 위로 휙, 들렸다. 뒤늦게 진도현의 손에 멱살이 잡혔다는 걸 알아차렸으나, 그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후두둑, 대충 넣어두었던 지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내 돈!”

그것을 향해 손을 내뻗었지만 종이지폐는 손끝에도 닿지 않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진도현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별로 힘을 들여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닌 듯한데 그 손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디가 네 집이야.”

“놔, 놔줘…….”

심지어 지폐 한 장은 바람에 나풀거리며 저만치 굴러가고 있었다. 홍위의 눈에 다급한 기색이 서렸다. 잘못했다는 듯-사실 뭘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손을 모아 비는 홍위에 눈을 마주치고 진도현이 경고했다.

“다시는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마.”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것, 좀-. 윽…….”

휙. 쇠붙이처럼 단단하게 목을 조이던 손이 거짓말처럼 물러갔다. 그 손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던 몸을 붙잡고 있던 것이 사라지자 그대로 젖혀져 벽과 부딪혔다. 마른 어깨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지만 홍위의 관심사는 오직 바닥에 떨어진 돈이었다. 허둥지둥 바닥에 떨어진 지폐를 줍기 시작했다.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는 않았지만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홍위 스스로 거절했을 것이다. 제 돈이었다.

하아. 저만치 굴러갔던 마지막 지폐를 집어 들었을 때에야 홍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앙상한 손가락이 지폐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네가 살고 있는 거지?”

물론 손에 쥔 지폐를 빼앗기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확보한 뒤에.

“쓸데없는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 못 들어봤나 봐?”

“…….”

부인도 긍정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홍위의 안광이 다시금 흉흉해졌다.

“네놈이었어.”

“…….”

“우리 아버지 사업이 모두 넘어갔다더니, 그게 다 네놈 수작이었던 거지?!”

그러거나 말거나 시큰둥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꼼꼼히 손을 닦은 진도현이 툭, 하고 그것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러고는 무심한 얼굴로 되묻는다.

“왜. 복수라도 하려고?”

“…….”

복수.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복수를 하는 건 좋은데, 번지수를 잘못 짚었어.”

“…….”

“날 그 정도로 과대평가해주는 건 고맙지만, 아쉽게도 내게 그 정도의 권력은 없어서 말이지.”

“그, 그럼?”

“…….”

“대체 누가. 누가 그런 짓을-”

“리 샤오 부장.”

“……뭐?”

“네 아버지 정도 되는 사람을 날려버리려면 총독부 제3부장인 리 샤오 부장 정도는 돼야 가능하지 않겠어?”

“리 샤오, 부장이, 왜.”

더듬거리며 묻는 홍위에 진도현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꾸했다.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

“잘 생각해봐. 혹 오다 가다 심기를 거스른 일이 있는지.”

“…….”

거기까지 말하고 진도현은 걸음을 옮겼다.

탁.

진도현이 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도 홍위는 멍청한 표정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선 채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굳이 화수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녀석에게 알려준 것은 솔직히 반쯤은 변덕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이곳에서 녀석이 서성거리는 것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제 집이라니.

높은 담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2층 건물을 보며 진도현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턱 선이 날카로워졌다. 아무리 닦아도 녀석을 붙들었던 손에서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퍽 기분 나쁜 냄새였다.

* * *

투둑.

예고도 없는 손님.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들긴다. 올 여름은 유난히 비가 잦았다. 창문틀에 앉아 있던 화수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투둑, 툭, 툭.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의 간격이 점점 좁혀진다. 흐릿한 초점으로 유리창 밖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으려니 빗방울은 어느새 빗줄기가 되어 쏟아졌다. 덕분에 더위는 조금 가실 모양이었다. 이제는 거의 퍼붓고 있는 빗줄기를 가만히 응시하던 화수가 손을 내뻗었다. 유난히 새하얀 손이 단숨에 젖어들었다.

시원해. 감상을 속으로 되뇌며 화수가 살짝 내밀었던 손을 좀 더 밖으로 내밀려고 할 때였다.

벌컥.

기척도 없이 문이 열렸다.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화수는 굳이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지 않았다. 이 집에서 화수가 있는 이 방에 이렇게 들어설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뭐 하는 거야.”

화수의 어깨를 당기며 창문을 닫는 이에게서 익숙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비 들이치잖아.”

탁. 묵직한 소리를 내며 창문이 닫혔다. 막을 씌운 것처럼 빗소리가 멀어졌다.

“아. 미안.”

진도현을 따라 들어왔던 시종이 바닥에 엎드려 카펫을 닦는 모습을 보고서야 뒤늦게 들이친 비가 바닥까지 젖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사과하는 화수에 진도현의 미간에 찌푸려진다.

“누가 바닥 젖은 것 때문에 그래?”

“…….”

“네가 젖었잖아.”

“……아.”

“아?”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진도현에 화수가 저도 모르게 젖은 손을 문질렀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비가 들이쳐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또 그것을 일일이 설명하기가 귀찮았다.

“쓰러졌다는 녀석이 왜 여기 이러고 있어.”

“그냥 조금 핑 돌았을 뿐이야.”

진도현이 약속도 미루고 급히 달려온 이유였다. 정작 본인은 괜한 호들갑이라며 투덜거렸지만 아마도 자신이 어떤 낯색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리라.

“일어나.”

어차피 잔소리를 해봐야 들을 녀석이 아니라 진도현도 더는 잔소리를 늘어놓지는 않았다. 대신 녀석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손이 차네.”

“……그런가.”

이 더운 날씨에. 아무리 비를 맞았다고 해도 그 잠깐 사이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진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이번에도 정작 본인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건물 안은 맘대로 다녀도 된다고 했잖아.”

이제 밖에서 방 문을 잠가두는 일은 없었지만 화수의 일상은 방 안에 가둬졌던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좁게 열리는 창문가에 앉아 몇 시진이고 바깥을 내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뒤뜰에 있는 온실이라도 가보든지.”

“됐어.”

혹 바깥바람이 쐬고 싶은 것인가 싶어 최대한 절충안을 내보지만, 이번에도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사실 평소에도 볼일 없이는 제 방을 벗어나는 법이 없는 녀석이었다. 제 방에서 정원으로 난 장지문을 열어놓고 술잔을 홀짝이는 것 말고는 크게 바라는 바도 없는 녀석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진도현도 별다른 수가 없었지만. 낮게 한숨을 내쉰 진도현이 그런 화수를 달래듯 말했다.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누구 눈에 띄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상관없어.”

말투는 시큰둥했지만, 진심이었다. 기분이 상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 집에서 시간만 나면 안채며 별채, 정원까지 돌아다녔던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지. 화수에게는 지금이 보통이었다.

궁금했다. 그 사내가 어린 시절을 지냈다는 장소가.

그도 그럴 것이 어디든 그의 흔적이 잔뜩이었다. 그가 밟았을 바닥, 열었을 장지문, 오래된 나무 기둥에 표시된 자국들까지. 분명 유년 시절의 것이었을 텐데 마지막 자국이 화수의 키보다 위였다.

그런 기억들을 더듬던 화수가 이내 미간을 찌푸린다. 이 와중에 또 그 인간 생각을 하고 있다 싶어서. 이제는 생각조차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안아줘?”

“…….”

그런 화수를 오해했는지, 진도현이 물어왔다. 대답 대신 미간을 더 찌푸린 화수가 걸음을 내딛었다. 맨발에 닿는 푹신한 바닥이 이상하게도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았다. 하지만 꼭 그것이 넓던 운신의 폭이 점점 좁아진 이유는 아니었다.

“화수야!”

이번엔 핑 도는 징후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발아래가 쑥 꺼지는 감각. 시야가 깜깜해짐과 동시에, 진도현이 자신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스위치가 꺼진 듯이 모든 것이 암흑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 * *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걸음이 멈춘 리 샤오에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부장.”

“…….”

이번엔 그래도 반응이 있었다. 물론 대답 대신 고개만 옆으로 튼 것이 고작이었지만. 카이의 고개도 리 샤오의 고개가 향한 쪽으로 꺾였다.

아. 그제야 카이는 리 샤오의 걸음이 멈춘 이유를 깨달았다. 복도에 난 창 밖으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소나기일 겁니다.”

“…….”

리 샤오의 눈치를 살피면서 카이가 조심스럽게 추측을 내놓았다. 그런 카이의 말에 리 샤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쏟아지는 빗줄기를 말없이 응시했을 뿐이다.

“대체 어디 있는 걸까요.”

툭,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고 만 것은 단순히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리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가능한지. 이쯤 되니 조금은 신기한 기분마저 드는 카이였다. 수색하는 인원을 두 배로 늘리고 현상금까지 걸었지만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사람이 숨어들 만한 곳은 이 잡듯이 샅샅이 조사를 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닮은 이를 보았다는 제보도 없었다.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

답답한 마음에 꺼낸 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꽁꽁 숨는 것이 가능한가 싶어서. 다른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그리 눈에 띄는 외모의 사람이 말이다. 하지만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습니다.”

“…….”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쏟아지는 비를 응시할 뿐, 리 샤오는 미동도 없었다.

룽오 부장이 리 샤오의 범인을 취조하는 능력을 문제 삼은 것이 무색하게도,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날 습격을 공모한 이들을 아주 말단부터 최상위 설계자까지 모두 잡아들였고, 지금은 작성한 보고서를 올리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사실 예정된 일이었다. 리 샤오가 마음을 먹으면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일은 없었다. 오직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우습지.”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열린 것은 빗줄기가 조금 잦아들었을 때였다. 느슨해졌던 어깨가 다시 긴장으로 바싹 조여들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당황한 카이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지만 사실 그 말은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자리에 연연하는 인간을 늘 경멸해왔었는데.”

“…….”

혼잣말에 가까운 소리였음을 깨달은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지금은 조금 후회해.”

“…….”

“내가 제일 윗대가리였다면, 애초에 녀석을 놓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

“그래서 말인데.”

“…….”

“그 자리, 내가 앉아야겠어.”

“……정말이십니까.”

그 자리가 무슨 자리를 의미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카이가 되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 조금 전 정무총감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정무총감이 사망한 것도 아니고 무려 의식이 돌아온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 앉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리 샤오는 그런 카이의 반응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왜. 안 될 것 같나?”

“그럴 리가요.”

놀란 카이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상관이 얼마나 그동안 권력에 관심이 없었는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안 될 것 같냐니. 애초에 총독이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리 샤오를 이곳으로 보낸 이유가 무엇이었는데. 원하기만 하면 그 자리는 리 샤오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워낙에 권력욕이 없어 집안어른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런 리 샤오를 단숨에 가장 높은 곳에 앉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다니. 어떤 의미로는 참으로 대단한 사내였다. 화수는.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카이가 고개를 숙였다. 엄밀히 말하면 카이 역시도 전장이 더 체질에 맞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군에서는 상관의 명령이 모든 것을 우선하는 법이었다.

* * *

“정신이 들어?”

눈을 뜬 화수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었다.

“아이는?”

의식하고 했다기보다는 반쯤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정신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순간에도 화수는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 만약 진도현이 화수의 몸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머리를 바닥에 짓찧었을 터였다.

“멀쩡해.”

못마땅한 표정이긴 했지만 불안으로 흔들리는 새까만 눈동자에 진도현이 순순히 대답을 내놓았다. 눈에 띄게 안심하는 얼굴에 진도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이라면 질색하는 줄 알았는데.”

“질색이야.”

의외라는 듯 되묻는 진도현에 화수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꾸했다. 그래놓고 조금 민망한지 볼을 긁적이며 변명을 덧붙인다.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니까.”

“왜?”

“…….”

“리 샤오 부장의 아이라서?”

“…….”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있으니 거짓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답 대신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던 화수의 눈에 자신의 팔에 꽂힌 링거 줄이 들어왔다.

“뭐야. 이거.”

경계하는 눈빛을 읽고 진도현이 황급히 화수의 팔을 붙들었다. 화수의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그냥 두면 바늘째 뜯어내버릴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잖아. 한약은 절대 안 먹는다니까.”

“…….”

“영양실조래, 너.”

“…….”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배 속의 아이는 착실하게 덩치를 키우고 있는데 정작 입으로 넘어가는 것은 없으니. 그나마 있던 몸속 영양소도 모두 아이에게 빼앗기는 중이었다.

“그나마 이게 밥을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니까, 이건 다 맞아야 해.”

“…….”

“왜. 이것도 메스꺼워?”

“……그렇진, 않네.”

진도현의 질문에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뒤늦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덕분에 이것도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적어도 독을 타지는 않았겠지. 투명한 병에 담긴 액체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지간히 까탈스러운 녀석인가 보네, 어미를 닮아서.”

“내가 아니라 리 샤오 부장을 닮은 거야.”

“…….”

억울한 마음에 반박해놓고 뒤늦게 아차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보는 진도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

“너 그 인간, 싫어했잖아.”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잠깐.”

대답 없이도 혼잣말처럼 연신 질문을 던지던 진도현이 일순 하던 말을 멈추고 눈매를 찌푸린다. 뭔가를 알아차린 듯한 눈동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눈치가 유난히 빠른 사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씨발. 속으로 되뇐 화수가 고개를 꺾었다. 하지만 진도현은 화수의 턱을 붙잡아 제 쪽으로 다시 돌렸다.

“설마.”

“놔.”

그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사실 제대로 힘이 들어갔다고 해도 진도현을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겠지만.

“처음부터 아는 사이였던 거야?”

“……아니야.”

“그거 알아, 화수야?”

“…….”

“리 샤오 부장만 관련되면 유난히 네 거짓말이 티가 난다는 거.”

“…….”

“처음 각인했던 새끼가 그 새끼인 거지?”

“…….”

발가벗겨진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물론 진도현의 앞에서 발가벗겨졌던 경험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런데 정작 진도현은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리 샤오 부장은 너를 전혀 모르던데.”

“……어차피 이제 상관없잖아.”

“리 샤오 부장에게 직접 물어볼까?”

“진 사장.”

그냥 하는 위협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그러라고, 배짱을 부릴 수가 없었다. 세상 사람이 다 알게 되더라도, 리 샤오에게만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매달리는 화수에 진도현이 그럼 말해보라는 듯 팔짱을 꼈다.

“내 얼굴을 모르니까.”

어깨를 늘어트린 화수가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툭, 하고 대답을 내뱉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가면을 쓰고 있었거든.”

“……리 샤오 부장이 그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그런 게 아니라.”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대충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그냥 고개를 끄덕였을 터였다. 그리 오해하는 쪽이 더 편하긴 하니까. 그럼에도 화수는 변명을 하고 있었다.

“축제날 자판에서 산 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을 뿐이야.”

“…….”

눈이 빗겨나 있었지만 저를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진도현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거기서 멈춘 화수의 말 뒤를 진도현이 덧붙였다.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그래서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던 거고.”

“…….”

“아니, 이건 모르게 하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래서 싫었다. 진도현은 분명 알아차릴 테니까. 자신보다도, 더 제 속을 잘 꿰뚫어보는 사내였다.

“짜증나는데.”

“…….”

“심지어 두 번 다, 같은 사내에게 빼앗긴 거란 말이지.”

“…….”

이번만큼은 화수도 사람을 물건 취급하지 말라는 말로 받아칠 수 없었다. 자신의 배를 향한 진도현의 시선이 지나치게 흉흉했기 때문이다.

“왜.”

하지만 눈치를 살피는 화수의 표정을 읽은 진도현이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내가 아이를 죽여버리기라도 할까 봐?”

“…….”

화수는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면 그걸 몰라서 묻냐고 되물었을 터였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신상에 좋겠다는 누구의 충고를 떠올린 덕이었다.

“말했잖아. 누구의 씨든, 너만 있으면 상관없다고.”

“…….”

“너도 비밀은 비밀로 간직하고 싶을 테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충고의 효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협박이야?”

“그럴 리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태연히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화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슥. 손을 내뻗은 진도현이 화수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 손길을 화수는 피하지 않았다. 진도현이 잘했다는 듯 씨익, 하고 웃었다.

“착하네.”

하지만 화수는 알고 있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속은 시커먼 인간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점이 좋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적어도 앞에서는 아닌 척하고 뒤에서 사람 뒤통수를 치는 부류는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진도현이 필요하다면 이용당해줄 용의도 있었다. 그 정도까지는 좋아했다. 리 샤오만큼은 아니라도. 하지만 그런 것을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말한다고 믿을 것 같지도 않고,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당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했다.

“잘래.”

피곤했다.

모든 것들이 버겁게 느껴졌다. 밥 대신이라는 말이 맞는지 식사를 하고 난 뒤처럼,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

눕는 화수의 위로 이불을 덮어준 진도현이 그것이 들리지 않도록 잘 여미었다. 유리병의 하얀 액체가 반이나 남아 있었다. 눈을 감기 무섭게 고른 숨을 내쉬는 화수를 가만히 보다 진도현이 의자를 가져와 머리맡에 앉았다.

“몸이 완전히 망가졌어요. 이 상태로 몇날 며칠을 이동해야 하는 긴 여행은 절대 무립니다.”

화수의 몸을 살핀 양의는 전에 없이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대로라면 태어날 아이의 안위조차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산모의 안위는 말할 것도 없지요.”

“지금으로써는 이곳에서 최대한 안정을 취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이 약은 급한 불을 끄는 것 정도이지, 이것으로 연명하기는 힘들 겁니다.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양의의 충고들이 뒤죽박죽되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화수가 죽는다. 혼란한 머릿속을 겨우 정리해서 나온 결론은 한 가지였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이었다. 지금도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녀석은 조금 마르긴 했어도 멀쩡해 보였으니까.

이곳에 머문다. 사실상 진도현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한 가지뿐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엔 한 가지 전제가 붙었다. 리 샤오에게 화수를 빼앗길 수도 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진도현은 마음을 바꿨다.

세 번째까지, 녀석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제 품에서 숨을 거두게 하고 싶었다.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리 결론 낸 진도현이 아이처럼 조용히 잠든 화수를 보며 씽긋 웃었다.

물론 이 선택을 평생 후회하게 될 줄은 진도현도 알지 못했다.

톡.

앉은 채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방에 누가 들어오는 기척은커녕 제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눈을 뜨자 그제야 불안해하던 시종의 표정이 안심한다. 졸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사내였다, 화수는.

“왜.”

여름인데도 자다 일어나 그런지 어깨가 선득했다. 차가워진 어깨를 문지르면서 묻는 화수의 앞에 커다란 사발이 내밀어졌다.

“이게 뭔데?”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화수도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라기보다는 습관적으로 물은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사발에 담긴 내용물에 있었다.

“물?”

무색무취의 투명한 액체. 아무리 봐도 그냥 물이었다. 되묻는 화수의 앞으로 사발이 조금 더 내밀어졌다. 그녀에게 화수가 되물었다.

“마시라고?”

그제야 시종이 고개를 끄덕인다. 엉겁결에 사발을 건네받았지만 경계를 풀지 않은 화수가 물그릇에 손가락을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손가락에 묻은 양만으로도 입안 가득 단내가 났다. 그리고 그 맛의 정체를 화수는 단숨에 알아차렸다.

“사카린?”

끄덕끄덕.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시종의 고개를 보는 화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경계의 의미라기보다는 이걸 왜 마시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 컸다. 하지만 이번엔 묻기도 전에 시종이 먼저 한 손으로 배를 둥글게 만드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하더니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암호에 가까운 동작이었지만 이번에도 화수는 그 동작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이건, 안 토할 거라는 소리야?”

끄덕끄덕끄덕. 자신도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입덧이 심했다. 물만 마셔도 토하던 그때 친정어머니가 알려준 방법이었다.

한동안은 이것으로 연명하다, 나중에는 여기에 삶은 국수를 말아 먹기도 했었다. 맛이나 영양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음식이었지만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입덧의 고통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모두 설명할 방도가 없으니 그 물을 들이미는 수밖에 없었다. 거절하는 것인가 싶었는데 화수가 머뭇거리다 이내 그 사발을 받아 들었다. 그렇게 받아 든 그릇을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숨죽인 채 지켜본다.

주륵.

사발을 살짝 기울이자 사카린을 탄 물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달았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토기가 일지 않았다. 멈춘 채 조금 상황을 지켜보던 화수가 이내 그릇을 다시 기울이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물을 마시고 나서야 제가 갈증이 났었다는 걸 깨달았다.

탁.

텅 빈 그릇을 화수가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급하게 먹느라 턱 아래로 흘렸던 물기를 소매로 훔치면서 화수가 인사를 했다.

“고마워.”

그녀는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이미 화수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단것을 먹어 그런가, 이것도 음식이라고 몸에 피가 조금 도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침대로 향하던 걸음을 문 쪽으로 튼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온실이 있다고 했다. 전 주인이 병적으로 집착하던 곳이라 주인이 없어진 지금도 관리를 소홀히 하는 법이 없다고 혀를 내두르던 진도현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다는 말은 흘려들을 수 없었다. 백년은 족히 넘었을 듯한 홍매루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커다란 나무라는 말에 화수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지만 기력이 조금 회복되니 그것부터 생각이 났다.

게다가 언제 갑자기 이곳을 떠나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문 쪽으로 향하는 화수를 시종은 저지하지 않았다. 눈에서 떼지는 않되, 자유롭게 다니게 두라는 진도현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끼익.

화수가 문을 열었다. 맨발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복도 역시 값비싼 자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으니까. 보는 사람은 좋지만 이곳을 쓸고 닦아야 하는 이들은 죽어나겠구나 싶었다. 푹신한 바닥을 딛고 몇 걸음 내딛던 화수가 얼굴을 찌푸리며 난간을 붙잡았다.

잦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속이 울렁거렸다. 화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화수의 상황을 알아차린 시종이 잠시만 기다리라는 듯 두 손을 내밀어 보였다. 하지만 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살짝 눌러지는가 싶던 토기가 울컥, 하고 쏟아져 나왔다.

“미안.”

“…….”

짙어져버린 자색의 카펫을 확인하고 화수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사과했다. 하지만 마주한 그녀의 눈은 귀신이라도 본 듯 휘둥그레져 있었다. 값비싼 카펫 위에 토를 했으니 기겁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추측과 달리 그녀가 놀란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라?”

손등으로 젖은 턱을 훔치던 화수가 멈칫했다. 먹은 것이라고는 조금 전 사카린을 탄 물이 고작이었는데, 턱을 훔친 손등이 붉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시뻘건 그것이 피라는 사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배 속 깊은 곳에서 토기가 올라왔다.

웩.

다행히 이번엔 바닥에 쏟는 것은 피했다. 두 손으로 쏟아지는 것을 황급히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시종은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기겁한 얼굴이었다. 정작 제 손안의 붉은 핏덩이를 본 화수의 표정이 더 무표정했다.

“씨발, 뭐야, 이건.”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카펫 위로 짙은 자색 얼룩이 점점 더 크기를 늘리고 있었다.

“최대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 못 들었습니까.”

한 일이라고는 고작 문밖을 나선 것밖에 없었지만,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죽습니까?”

“…….”

화수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순간 당황한 듯 모든 움직임을 멈췄던 의사가 이내 링거 줄을 열었다. 툭, 툭, 유리병에서 투명한 줄로 하얀 액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의사가 고개를 내렸다.

“계속 이리 몸을 막 쓰면 그리되겠죠.”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아니라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피를 토한다는 건 사실 예삿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막상 그것을 확인을 하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죽는구나. 다시금 되뇌는데도 이상하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꼭 남의 일 같았다.

사실 사는 데 큰 미련 같은 건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악착같이 살아남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게 살아왔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화수의 고개가 제 부른 배를 향했다.

“아이는 건강해요, 지나칠 정도로.”

그 시선을 아이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으로 오인했는지 의사의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아무리 아이가 건강해도 산모가,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아마도 죽으면, 이라는 말을 하려다 건강하지 않으면, 으로 바꾼 것이리라. 그런 배려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화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허니 여행은 그만두는 게 좋습니다. 이미 말했던 것이지만, 절대 몸이 못 견딥니다.”

집 안을 돌아다닌 것만으로도 피를 토했는데, 몇 날 며칠을 기차를 타고 이동해 마지막엔 배까지 타는 긴 여행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진 사장도 다 알고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대답이 없는 화수가 조금 이상했던지 의사가 되물었다. 하지만 이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화수는 씽긋 웃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눈가의 눈물점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시선을 슬쩍 돌리는 의사의 귓불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을 보는 화수의 표정은 그와 반대로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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