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거 놔!”
멈춰 선 차에서 내리던 룽오 부장의 시선이 길모퉁이를 향한다. 웬 거렁뱅이 하나가 경비병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떡 진 머리, 시커먼 얼굴을 하고 살짝 두들기기만 해도 먼지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거적때기를 걸친 이와는 꽤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자꾸만 코끝에 시큼한 냄새가 맴돌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룽오 부장의 불쾌한 시선을 알아차린 부하직원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물론 그러면서도 뒤에 선 수하들을 향해 빨리 치우라는 뜻의 손짓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이 황급히 소란이 일고 있는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쯧.
못마땅한 듯 혀를 차긴 했지만 오래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던지 룽오 부장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그 걸음은 첫 번째 계단도 채 오르지 못하고 다시 멈춰 섰다.
“이거 놓으라고! 내가 리 샤오 부장을 만나 할 얘기가 있단 말이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잘 닦인 구두가 방향을 틀었다. 낭패다, 라는 표정으로 그의 직속 부하도 그 뒤를 따랐다.
“멈춰.”
룽오 부장의 명령 한마디에 수하들이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바로 반응을 하지 못한 유일한 이는 질질 끌려가던 거렁뱅이뿐. 그도 그럴 게 힘으로 끌려가던 것은 멈췄지만 목을 조이고 있는 두 손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괴로운 얼굴로 버둥거리는 사내를 보고 룽오 부장이 까딱, 고갯짓을 했다.
“놔줘.”
부하의 명령에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거짓말처럼 단숨에 떨어져나갔다. 그 반동으로 사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재밌는 소리를 하던데.”
켁켁, 케엑. 목을 부여잡고 밟혀 죽는 개구리 같은 소리를 내는 사내의 앞으로 룽오 부장이 성큼 다가섰다. 그러고는 그 역시 사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너 같은 놈이 리 샤오 부장을 만나 무슨 할 얘기가 있다는 거야?”
“……하, 할 얘기가 있으니,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더듬거리면서도 건방진 소리를 내뱉는 것을 보니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었다. 그때까지 한 발 물러서 있던 부하의 군화발이 사내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이 새끼가.”
“아이구, 나 죽네.”
발길질 한 번에 비루한 몸이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멍청하면 눈치라도 빨라야 하는 법인데 빌어먹고 살기도 힘들 팔자였다. 츳, 마치 남의 일처럼 혀를 차는 룽오 부장을 대신해 부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어나.”
나직한 명령에 나자빠져 있던 사내가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났다.
“한 번만 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그땐 발길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덧붙이는 충고에 사내가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그렇게 둥글게 말린 어깨는 그의 발이 움직일 때마다 움찔움찔 떨어댔다. 의식하고 한 것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웠다. 직접적인 폭력만큼 효과적인 것은 또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머리가 좋은 녀석에게 해당되는 모양이다.
“루, 룽오 부장, 나 모르겠습니까? 납니다. 홍위.”
슬금슬금 부하의 눈치를 살피던 사내가 룽오 부장의 발목에 매달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꿱.”
구둣발이 명치에 와 박혔다. 물론 룽오 부장의 구두였다.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슴팍을 움켜쥔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이를 불쾌한 표정으로 응시하던 룽오 부장이 이내 미간을 살풋 찌푸린다.
뒤늦게 사내가 내뱉은 이름이 귀에 와 박혔던 것.
“홍위?”
그러고 보니 얼굴이 낯이 익었다. 물론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룽오 부장이 자신을 기억해냈다는 것을 알아차린 홍위가 이내 몸을 바로 했다.
“맞소. 내가 그 홍위요.”
룽오 부장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하지만 홍위는 기침을 쏟아내느라 몸을 구부린 탓에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우리, 우리 아버지를 봐서라도, 리 샤오 부장을 독대하게 해주시오.”
재력가였던 홍위의 아비는 권력자들이라면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돈을 먹여두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백도 돈도 없는 룽오 부장이 그 돈을 가장 많이 받아먹었고. 하지만 홍위는 몰랐다. 홍위의 아비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하마터면 룽오 부장도 거기에 휘말려 목이 날아갈 뻔했다는 것을.
룽오 부장이 물었다.
“왜. 네 아비의 복수라도 하게?”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거렁뱅이가 리 샤오를 만나 뭘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의문이 풀렸다. 홍위의 아비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을 캐내어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이가 다름 아닌 리 샤오 부장이었으니까.
“뒤져.”
룽오 부장이 차갑게 일갈하자 옆에 서 있던 수하들이 빠르게 달려들었다.
“자, 잠깐, 아니-”
당황한 홍위가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한 명이 뒤에서 두 팔을 포박하고, 나머지 한 명이 품을 뒤졌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홍위는 멈추지 않고 몸을 팔딱거렸지만 몸을 수색하는 데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했다.
“부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심각한 표정으로 수색을 멈춘 수하의 손에 들린 것은 바로, 칼. 물론 길이가 손바닥만 하고 날도 잘 서 있지 않은 작은 칼이었지만 흉기임에는 분명했다. 속내를 들킨 홍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되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그것은, 그냥 내가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것뿐이야. 절대 그걸로 리 샤오 부장을 해칠 생각 같은 건 없었어!”
쯧쯧, 룽오 부장이 혀를 찼다. 되도 않는 변명 때문이라기보다는 사실 생선도 다듬지 못할 것 같은 이런 비루한 칼로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온 꼴이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몸뚱이가 고생을 한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집안이 망했다고 해도 그래도 소문난 부잣집이었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거렁뱅이가 되었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저, 정말이에요. 나는 그저, 그러니까, 아! 리 샤오 부장에게 알려줄 정보가 있어서, 그래서 찾아온 겁니다.”
그래도 아예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변명을 하는 말이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죄가 감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눈치가 없다고 봐야겠지만.
“알려줄 정보?”
사실 급조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것이 룽오 부장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게 뭔데?”
“…….”
스릉.
쉽게 입을 열지 않고 머뭇거리는 홍위의 목덜미로 룽오 부장의 검이 겨눠졌다.
“힉-!”
예리하게 날이 서서 번쩍이는 칼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끝이 스치기만 해도 목이 갈라질 것 같았다.
“정무총감의 살인모의 죄는 실행에 옮긴 것만으로도 즉결심판을 할 수 있어.”
그 말인즉 지금 바로 목을 벨 수 있다는 뜻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장이던 이가 어째서 총감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을 물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경고를 뒷받침하듯 룽오 부장의 검 끝이 홍위의 목덜미를 꾹, 눌렀기 때문이다. 가볍게 눌렀을 뿐인데 뜨끔한 열기와 함께 목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덜덜덜, 직접 몸으로 가해진 위협에 홍위의 어깨가 마구 떨렸다.
꼭 멍청이들은 말로 해서는 알아 처먹질 않는단 말이지. 룽오 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여전히 검은 더러운 목에 겨눠진 상태였다.
“그, 그러니까, 제 집이, 진가놈에게 팔렸더라고요.”
진가놈이라면.
“진 사장?”
“예, 진 사장 그놈이요. 그 망할 놈이 저희 아버지 사업이며 집이며, 몽땅 다 훔쳐가버렸습니다요.”
“…….”
쓸데없는 소리를 하던 홍위가 이번엔 룽오 부장의 표정이 나빠지는 것을 확인하고 황급히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란 말입니다. 드나드는 것도 사람들 눈을 피해 도둑괭이처럼 살금살금 들렀다 가고.”
슬슬 지루해지려는 참이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수상한 냄새가 난다 싶어서 제가 몰래 그 집에 들어가봤지 말입니다.”
“들어가봤더니?”
이건 조금 흥미를 끌었다.
“누가 있었어?”
“물론 집 안까지는 들어가지 못해서 정확히는 보지 못했는데요.”
검이 좀 더 목덜미를 깊이 찔러왔다.
“나랑 지금 말장난하자는 거야?”
“그,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홍위에 검이 조금 물러났다. 물론 아주 조금.
“안에 있는 이는 보지 못했지만 의사가 드나드는 건 분명히 봤습니다.”
“…….”
“리 샤오 부장이 자신의 아이를 밴 사내를 찾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구요.”
“…….”
“물론 제대로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그 남창놈과 진가놈이 얼마나 돈독한 사이인지는 룽오 부장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군.”
멍청한 녀석이 제법 머리를 많이 굴렸다.
“제 말이 틀림없다니까요.”
제 추측에 신빙성이 있다는 듯 긍정해주는 롱오 부장의 반응에 홍위도 이제 살았구나 싶어, 신이 났다. 하지만 그것이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녀석을 취조실로 데려가.”
“예.”
명령을 내리는 롱오 부장과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부하를 번갈아 보던 홍위가 뒤늦게 펄쩍 뛰었다.
“예? 아니, 가서 확인만 하면 사실이 밝혀질 거라니까요?”
하지만 이미 명령을 받은 수하들은 홍위를 결박해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당황한 홍위가 반항하면서 외쳤다.
“놔, 놔봐, 룽오 부장님! 룽오 부장! 내 말 좀- 읍읍.”
시끄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룽오 부장을 보고 수하들이 입을 틀어막아 그마저도 이내 잦아들었지만. 드러난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제대로 차에 태워지지도 못했다. 말 그대로 짐짝처럼 짐칸에 실렸다. 문을 닫기 직전 마지막까지 반항하는 홍위의 뒷덜미를 주먹으로 쳤다. 이번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축 늘어졌다.
탁. 짐칸 문이 닫히는 순간과 동시에 달려온 차가 멈춰 섰다. 이내 차 문이 열리고 누군가 재빠른 걸음으로 차에서 내려섰다. 그러고는 룽오 부장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온다.
“룽오 부장님.”
카이였다.
“여. 카이 사무관.”
카이를 발견하고 살짝 구겨졌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미 상황은 모두 종료되었지만, 귀신 같은 사내가 묘하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읽은 모양이었다.
“작은 소란이 일어서 그것 좀 정리했네.”
“그런 일까지 신경을 쓰시게 했군요.”
카이의 날카로운 시선이 경비병을 향했다. 망했다, 하는 표정으로 경비병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다행히 그를 구해준 것은 룽오 부장이었다.
“경무국 일에 큰 일 작은 일이 어딨겠나. 누구든 눈앞에 보이면 해결하는 거지.”
“예, 그렇지요.”
그렇게 동의하면서도 평소와는 달리 과도하게 너그러운 룽오 부장에 카이의 시선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눈에 띄는 이상한 점은 없었다.
“리 샤오 총감님은.”
“집무실에 계십니다. 전 따로 시키신 일이 있어 잠시 나왔다 복귀하는 길입니다.”
“여즉, 행방이 묘연한 건가?”
“…….”
주어는 없었지만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는 대답을 아꼈다. 쓸데없는 관심은 딱 질색이었다.
“큰일이구만.”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이번에도 룽오 부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거기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았다.
“그럼 들어가지.”
그것이 더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카이도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룽오 부장과 오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시나?”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던 모양이다. 앞서서 계단을 올라가던 룽오 부장이 뒤돌아보면서 묻는다.
“아닙니다.”
고개를 내저은 카이가 다시금 걸음을 내딛었다. 이번엔 카이가 바로 옆으로 올 때까지 멈춰 서 있다가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제야 걸음을 내딛는 룽오 부장이었다. 역시나 께름칙해.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번엔 카이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급하게 보고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대장, 보고드릴-”
답지 않게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서던 카이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책상 앞에서 리 샤오의 결제를 기다리고 있던 룽오 부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대장이라니. 여즉 전장을 떠돌아다니던 때 버릇을 못 버린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정말 급할 때 나오는 버릇이라 카이도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룽오 부장.”
내내 아무 말이 없던 리 샤오가 나직이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별다른 말도 없이 그저 조용히 이름을 내뱉었을 뿐인데도 순간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굳은 채 눈만 굴리고 있는 룽오 부장의 앞으로 서류철이 내밀어졌다.
“그만 나가봐.”
명령이 떨어지자, 몸을 압박하던 힘도 사라졌다. 룽오 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라리 대놓고 질책하는 말을 들었다면 오히려 덜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힘으로 찍어 누르다니. 아직 대행이라고는 해도 명색이 경무국장인 저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민 서류철을 보고만 있는 룽오 부장을 향해 리 샤오가 물었다.
“뭐, 더 할 말이라도?”
“…….”
물론 몰라 물은 것은 아니었다. 일부러 그가 가장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그의 자존심을 짓밟은 리 샤오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닙니다.”
룽오 부장이 서류철을 받아 들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만들어낸 얼굴이 꼭 가면을 뒤집어쓴 경극배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럼 물러가보겠습니다.”
물론 그마저도 돌아서는 순간 무너져 내렸지만.
“죄송합니다.”
사라지는 룽오 부장을 확인하고 카이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사실 이번 일은 자신의 실수가 맞았다.
“보고할 사안이 뭐야.”
하지만 리 샤오도 카이가 그런 실수를 할 때는 정말 급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룽오 부장의 자존심을 짓밟으면서까지 빠르게 내보낸 이유도 거기에 있었고.
“있는 곳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제야 카이도 빠르게 리 샤오의 앞으로 다가서며 조금 전 하려던 보고를 빠르게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찾았다도 아니고, 찾은 것 같다. 리 샤오가 질색하는 모호한 문장이었지만 그는 눈매를 살풋 구겼을 뿐,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것을 문제 삼는 시간도 아까운 탓이었다.
“지시하신 대로 의원뿐만 아니라 양의도 수색범위 안에 넣어 집중적으로 탐문수사를 진행했습니다. 헌데 얼마 전부터 병원의 의사가 한밤중에 왕진을 나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분명 그 병원이 따로 왕진을 하거나 하는 곳은 아니라 이상하다 여겼다는군요.”
“병원이 어디야.”
“그 의사로부터 왕진을 다녔던 장소는 알아냈습니다. 조금 겁을 주었더니 바로 실토했다고 하는군요.”
“……상태는.”
“…….”
누구의 상태를 묻는 것인지 되물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이가 곧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확인하지 못한 것도 못한 거지만, 사실 리 샤오가 화수의 안위를 확인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내가 리 샤오에게 조금 특별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 사내가 모두의 뒤통수를 치고 사라지기 전이고, 지금은 사정이 달라지지 않았던가.
분명 그날 리 샤오는 그 사내를 죽여버릴 작정이었다. 만약 폭발이 없었다면, 아니 애초에 그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리 샤오가 뿜어내는 패기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런 리 샤오가 화수의 안위를 묻다니.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뭐, 자신의 손으로 없애기 전에 먼저 죽거나 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는 그런 마음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태평하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어디야.”
“…….”
“그 녀석이 있는 장소가.”
순간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키고 카이가 다시 보고를 이었다.
“그게, 참으로 예상 밖의 장소가 나왔습니다.”
“예상 밖?”
“예. 본래 그 집은 홍유제의 소유였던 집인데.”
“홍유제?”
물론 그 이름의 대상을 몰라 물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지시해 처리한 이의 이름을 리 샤오가 기억 못할 리 없었다. 그저 이 상황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오자 이상해 되물은 것뿐.
“주인이 죽은 뒤로 팔리질 않아 내내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주인 없는 빈집에 숨어 있었으니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던 거다. 리 샤오의 속을 뒤집을 때는 어디가 모자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치 없이 굴더니, 이런 쪽으로는 또 머리가 비상했다. 물론 리 샤오를 감쪽같이 속이고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는 것에서 이미 증명된 사실이지만.
“차 준비해.”
거기까지 보고를 들은 리 샤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보고를 하러 올라오기 전에 그곳을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겉옷을 챙겨 입는 리 샤오를 카이가 만류했다.
“굳이 직접 가지 않으셔도, 정말 그곳에 있는 게 확실해지면 연통이 올 것입니다.”
입구를 폐쇄하고 안을 수색하는 아주 단순한 작업이었다. 허니 특별히 리 샤오가 직접 가야 하는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 샤오는 이미 집무실을 가로질러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대장.”
물론 카이의 부름은 이미 문을 박차고 나간 리 샤오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 * *
공기가 축축했다. 벌써 며칠째 쉬지 않고 내리는 빗줄기 때문이었다. 올해 유난히 비가 잦다 했더니 장마마저 그냥 넘어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덕분에 좋지도 않은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늙은이처럼 뼈마디가 다 쑤셨다. 무엇보다도 부른 배 탓인지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평범하게 잘만 낳고 기르던데, 나만 왜 이리 유난인가 싶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이 꼭 너는 부모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듯해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만큼 기분도 축축 쳐졌다. 그 때였다.
“힉.”
쥐며느리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화수의 등을 누군가 쓸어내렸다.
“뭐야, 놀랐잖아.”
기겁을 했던 화수도 낯익은 얼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사카린 물을 가져다주었던 그녀였다. 어쩔 줄 모르고 눈치만 살피는 얼굴을 보니 화수도 더는 화를 낼 수 없었다. 기척 없이 이리 귀신처럼 다니는 것은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었으니까.
“놀랐다는 거지, 화난 건 아니야.”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녀의 긴장이 조금 누그러졌다. 잠시 움츠리고 있던 그녀가 들고 있던 대야를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에 깨끗한 천이 담겨 있었다. 아. 그제야 화수도 그녀가 자신의 허리를 만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옷을 들추려고 했음을 깨달았다. 아마도 허리에 찜질을 해주려고 했던 모양.
“내가, 할게.”
머쓱해진 화수가 손을 내밀었다. 이런 친절은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펄쩍 뛰며 고개를 내젓는다. 여전히 하얀 김이 나는 물과 손을 번갈아 가리키는 것을 보니 아마도 뜨거워서 안 된다는 말인 듯했다. 뜨거운 건 그녀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능숙하게 김이 나는 물에서 천을 꺼내 그것을 쥐어짰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도 시뻘겋게 변했다. 그것을 보는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자, 잠깐.”
엉겁결에 등을 내준 것은 단순히 어깨를 미는 손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힘이 없는 화수라도 밀쳐내고자 하면 단숨에 밀쳐낼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미는 대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건 천을 쥐고 있는 그녀의 시뻘겋게 달궈진 손 때문이었다.
화수가 버티면 버틸수록 그녀는 그 뜨거운 천을 계속 쥐고 있을 것이 아닌가. 결국 화수는 조금 전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바로 뜨거운 천이 놓일 거라고 예상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처음 느껴진 것은 딱 기분 좋은 온도의 체온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손임을 깨달은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으.”
천천히 척추를 더듬던 손이 어딘가를 꾹꾹 누르자 절로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물론 아파서가 아니라, 시원해서 나오는 신음이었다. 잠시 그렇게 뭉친 곳을 꾹꾹 눌러주던 손이 물러가고 알맞게 식은 천이 등을 덮어왔다. 으으으, 다시 한 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 덮은 따뜻한 천 위로 손가락이 꾹꾹, 뭉친 곳을 눌렀다. 솔직히, 살 것 같았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점점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체온이 낮은 몸이 덥혀지고 땀까지 송글송글 맺혔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사이 식은 천을 거둬간 손이 다시금 허리에 조금 전보다 따뜻해진 천을 덮었다.
하아. 벌어진 입에서 달큰한 숨이 새어 나왔다. 화수가 눈을 감았다. 사실 감은 것이라기보다는 저절로 감겼다는 말이 맞았다. 딱딱하게 뭉친 부위를 손가락이 부드럽게 문지를 때마다 입에서 밭은 숨이 쏟아졌다. 말 그대로 완전히 경계가 풀린 상태. 하지만 내뱉는 숨에 막 수마가 눈꺼풀로 쏟아져 들어오려던 그때였다.
쾅!
예고도 없이 방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 것은.
* * *
“죄송합니다.”
수색을 맡았던 경비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은, 여기 모아둔 저들이 전부입니다.”
“확실한 거야?”
“두 번 세 번, 거듭 확인했습니다. 다른 이는 없었습니다.”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묻는 카이에 경비대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카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이번 역시 잘못 짚은 모양이다.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하고 보고를 올릴 것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하지만 리 샤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 그때까지 카이의 뒤에 서서 아무 말이 없던 리 샤오가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저벅저벅.
리 샤오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흠뻑 젖은 비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잘 닦아놓은 대리석 바닥에 물웅덩이가 생겼지만 거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런 리 샤오의 걸음이 멈춘 것은 경비대장이 모아놓은 시종들 중, 한 중년 여성의 앞이었다.
“어디 있지?”
안 그래도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겁에 질렸다. 확인하는 것도 아닌, 이미 다 알고 묻는 것이었다.
“대답만 하면, 살려주지.”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 말의 의미마저 무미건조한 것은 아니었다. 공포에 질린 여인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둥근 어깨가 벌벌 떨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곧바로 밝혀졌다.
“죄송합니다만,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은 말을 못합니다.”
“…….”
“혀가 다 잘렸더군요.”
카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곳의 본래 주인을 떠올린 탓이었다. 어떤 변태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나 싶었는데, 그의 아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싶기도 했다. 홍위라고 했던가. 그가 저지르고도 멀쩡히 빠져나갔던 수많은 범죄들을 직접 조사한 사람이 바로 카이였다.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의사를 데려와.”
이런 일에는 이미 익숙한 카이조차 잠시 충격에 빠져 있는 사이, 리 샤오는 이미 다음 방도를 생각해낸 모양이었다. 물론 곧바로 방향을 바꿨지만.
“아니, 내가 직접 가지.”
이미 방향을 튼 리 샤오에 그제야 카이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가-”
“카이.”
제 앞을 가로막는 카이의 이름을 리 샤오가 나직이 되뇌었다. 흠칫, 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예.”
“다시는 내 앞을 막아서지 마.”
“죄송합니다.”
“내 손으로 네 목을 베어버리고 싶진 않으니까.”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검집에 가 있던 손이 아래로 떨궈졌다. 만약 리 샤오가 의식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검을 뽑아 들었을 것이다. 고작 제 앞을 가로막았다는 것만으로도 검을 뽑아 들 만큼, 리 샤오는 곤두서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있는 모두를 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거슬리는 것은 모두. 그러면 이 기분이 조금은 가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곳에, 화수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 녀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달큰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상했다. 녀석을 마주하게 되면,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감히 저를 속이고 도망쳐 이곳에 숨어 있던 녀석을 마주하는 것인데, 믿을 수 없게도 가슴이 술렁였다. 그것이 기대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 녀석을 내 손으로 죽여버릴 수 있어 기쁜 것뿐이라고 그리 납득했다.
하지만 녀석이 이곳에 없다는 보고를 듣는 순간 리 샤오는 깨달았다. 자신이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그 빌어먹을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을. 그 빌어먹을 녀석이 살아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는 사실을 리 샤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벅, 저벅.
열린 문을 통과하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동을 하던 그 냄새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쏟아지는 비에 더 이상 녀석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말이 맞았다. 리 샤오가 문을 여는 순간 맡았던 이 냄새는 녀석이 이곳에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이곳에 없다는 증거였다.
1층 거실을 지나 문을 통과해 나온 녀석은 빗속으로 유유히 사라졌으리라. 그것도 리 샤오가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기가 막혔다.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빌어먹을 빗줄기가 더 굵어지고 있었다. 마치 녀석의 흔적을 모두 없애주겠다는 듯. 눈앞에서 녀석을 놓친 그날도 비가 왔었다, 지금처럼. 녀석이 비를 내릴 수 있을 리도 없는데, 이상하게 불안이 온몸을 휘감았다. 사실 그것이 불안이라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가슴이 술렁이는 것이 기분 나쁘다고 생각했을 뿐.
한 번도 녀석을 찾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언제든, 결국, 찾아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녀석이 진짜 사라지기로 마음을 먹은 지금이라면, 녀석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 불쾌한 기분을 어쩌지 못한 리 샤오가 쏟아지는 빗속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며칠 쉬지 않고 내린 비에 본래 잘 정리되어 있었을 도로 위로 더러운 물웅덩이가 잔뜩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을 디뎠다. 진흙이 튀어 올랐지만 내딛는 걸음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그곳을 피해 조금 돌아가는 것조차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잠깐 사이에도 화수는 자신에게서 더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리 샤오가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머리 위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이번만큼은 카이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걷는 리 샤오를 막아설 수 없었다.
* * *
쾅.
반쯤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가 방을 가로지르는 상대를 확인하고 조금 누그러졌다. 진도현이었다.
“일어나, 당장 여기를 나가야 해.”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아도 심각한 상황이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재수 없을 정도로 늘 미소를 띠고 있던 진도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위치가 노출됐어. 여기로 곧 리 샤오 부장, 아니 총감이 보낸 이들이 들이닥칠 거야.”
“…….”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왜. 가슴이 아파?”
“아니.”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문지르고 있었던 모양.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는 진도현에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별거 아니야.”
그리 말하는 화수의 얼굴은 전혀 별거 아닌 듯한 표정이 아니었지만 진도현도 더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는 말이 더 맞았지만.
“옷 갈아입을 시간 없어. 그건 그냥 챙겨 가.”
눈치 빠르게 챙겨 온 옷가지는 그대로 진도현의 손에 넘어갔다. 침의 차림의 화수가 맨발로 바닥을 짚었다. 잠깐 받은 찜질과 마사지가 효과가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서 걷는 진도현을 따라 화수도 계단을 내려갔다.
-!
계단을 내려와 문을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제대로 된 말이라기보다는 작은 소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작은 소리에 화수의 걸음이 멈췄다. 뒤를 돌자마자 보인 것은 다급한 그녀의 표정이었다. 치맛단까지 말아 쥐고 황급히 달려온 그녀가 화수의 발치에 몸을 굽혔다.
아.
화수의 얼굴 위로 번졌던 의문이 제 발치에 놓인 신발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 사실 그녀가 신발을 가져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맨발이었다는 자각도 없었다.
“뭐 해. 얼른 신지 않고.”
진도현의 재촉에 머뭇거리던 화수가 신발에 발을 꿰었다. 퉁퉁 부어 잘 꿰어지지 않는 발을 대충 꿰어 신었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억지로 꿰어 신는 일 같은 건 화수에게 익숙했다.
“화수야.”
어느새 문을 통과한 진도현이 화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얼른.”
반사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문을 나서자 머리 위로 빗방울이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잦아들었던 빗줄기가 다시금 굵어져 있었다. 걸음이 더 빨라졌다. 진도현이 열어놓은 차 안으로 빠르게 몸을 실었다. 그러고 나서야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와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 화수가 닫힌 창문으로 바싹 붙었다. 황급히 김이 서린 유리창을 문지르자 뿌옇던 시야는 선명해졌지만 쏟아지는 비로 바로 코앞의 광경도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올라탄 차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왜. 뭐 놓고 온 거라도 있어?”
화수의 아쉬운 표정을 읽은 진도현이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화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어느새 거대한 대문을 통과한 차가 도로로 들어섰을 때였다.
“숙여.”
짧게 말한 진도현이 화수의 머리를 아래로 구부렸다. 그들이 탄 차 옆으로 군용트럭 두 대가 스쳐 지나갔다. 아슬아슬한 틈을 두고 스쳤지만 다행히 빗줄기에 차 안에 탄 사람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아.”
스친 트럭이 조금 전 자신들이 빠져나온 대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진도현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정말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그리 긴장한 건 진도현뿐이었던 모양.
“끝났으면, 좀 놓지? 배 눌리는데.”
사실 지금 가장 졸아 있어야 할 녀석이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로 투덜대는 것을 듣고 있으려니 기가 막혔다. 물론 그것이 또 녀석답다 싶기도 했지만.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린 진도현이 누르고 있던 동그란 머리통을 놓았다.
“그래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화수가 물었다. 늘 단정하게 잘라 귀 아래를 넘긴 적이 없는 머리가 어느새 어깨까지 길어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결 좋은 새까만 머리칼.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며 진도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가볍게 대꾸했다.
“천조국.”
“……뭐?”
화수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찌푸려진다. 놀랐을 때 녀석의 버릇이었다.
“예정보다 조금 빨라지긴 했지만.”
“…….”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리 샤오 총감께서 무려 총감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너를 찾기 시작했거든. 그리도 공사 구분이 확실하신 분이.”
그런 유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총감의 자리에 앉은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드는 진도현이었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지간히 제 핏줄이 소중한 모양이야.”
하지만 화수의 생각은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그럴 리가.”
“…….”
“그저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는 게 견딜 수 없을 뿐이야. 그것도 나 같은 남창의 몸에서.”
진도현의 눈매가 기름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
“그래서 도망쳤던 거야? 설마 아이를-”
“말하지 마.”
화수가 진도현의 말을 잘랐다.
“듣고 있어.”
덧붙이는 말에 무슨, 이라고 되물으려던 진도현의 시선이 화수의 아랫배를 향했다. 눈매가 더 가늘어졌다.
“그 얘기를 왜 이제 하는 거야.”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야기만이 아니라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저 구걸하는 거지에게 부자가 던져주는 푼돈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어쩌면 저에게 조금은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멍청하게도.
동정.
리 샤오가 제게 베푼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할 때는 굳이 자신의 아이로 키우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사내가 정작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아이를 없애려고 한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답지 않게 불쌍한 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내라는 걸 누구보다 화수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착각하고 말았다.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으니 그런 싸구려 동정에 금방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리라. 그리 마음을 다잡았는데도. 헛된 기대 같은 건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꼴사납게 고백하기 직전 진실을 알게 되어 이리 제대로 한 방 먹이고 도망친 것이 그나마의 위안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더는 하고 싶지 않아.”
딱 잘라 선언하는 화수에 진도현도 더 이상 캐묻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화수는 제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오히려 잘되었다 싶었던 것.
“분부대로 합죠.”
진도현이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났다. 말 그대로 항복이라는 듯 두 손까지 들어 보이며.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 역시 전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일어나 예의를 갖춰. 총감님이시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의 얼굴보다 총감이라는 단어가 먼저 머리에 와 박혔다. 놀란 의사가 벌떡 일어났다. 콰당. 그 바람에 앉아 있던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됐으니, 앉아.”
덕분에 리 샤오의 명령을 듣고도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조금 전 예의를 갖추라 명령했던 사무관이 재빠르게 의자를 똑바로 세웠다.
끼익.
그사이 리 샤오는 맞은편 의자를 빼 앉은 뒤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맞은편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느껴지는 위화감이 엄청났다. 긴장으로 온몸이 바싹 굳었다.
“죄, 죄송합니다.”
옆에 선 이가 옆구리를 쿡, 찌른 뒤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자리에 앉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 사람이 총감이라고?
방금 지옥문을 통과해 나온 야차라고 해도 믿을 듯한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눈앞에 있었던 것.
“그 집엔 누구 지시로 갔던 거지?”
“전, 돈을 받고, 환자를 치료한 것밖에는, 한 것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애초에 반항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는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납작 엎드린 의사를 향해 다시 한 번 나직한 음성이 내려왔다.
“그러니까 그 돈을 누가 줬냐고.”
“…….”
사실 대답을 하지 않겠다고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까, 눈치를 보느라 대답이 늦어진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아.”
벌어진 리 샤오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짙은 피로가 느껴지는 숨이었다. 물론 그 다음 순간, 마주한 눈에서 그런 기색은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시간을 끄는 거라면, 그만두는 편이 좋아. 평소라면 팔이나 다리를 노리겠지만 지금 기분 같아서는 대답이고 뭐고 그냥 죽여버릴 것 같으니까.”
“…….”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마주한 눈동자는 전혀 달랐다. 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눈이리라.
“그건 서로 바라는 일이 아니잖아?”
온몸이 굳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일렁이는 눈이 조금 누그러졌다. 물론 눈동자가 바뀐 것은 아니고 눈이 조금 가늘어졌기 때문에 그리 느낀 것뿐이었지만.
“누구야?”
“저도 그저 급히 부탁을 받고 간 것이라, 이름은 정확히 모르고, 진 사장, 진 사장이라고 했습니다.”
리 샤오의 손이 검집을 향해 가는 것을 본 의사가 다급히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리 샤오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그런 리 샤오의 반응을 그는 오해한 모양이었다. 다급해진 얼굴로 마구 말을 쏟아냈다.
“운전수가 그리 부르는 것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큰 사업을 하는 사람 같았어요. 천조국까지 간다는 것을 보면, 작은 사업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진씨 성을 가진 사업가를 찾으면-”
“천조국?”
하지만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예, 분명 천조국이라고 했습니다. 환자를 데리고 천조국까지 갈 수 있냐고 묻는 것을 제가 분명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쾅!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던 책상이 날아갔다. 아무리 낡은 나무책상이라 해도 그것이 마치 종잇장처럼 날아가는 모습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정신이 팔려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단숨에 눈앞으로 다가온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 전 거대한 책상을 종잇장처럼 날린 두 손에 목이 졸리고 있었다. 멱살을 잡힌 몸이 점점 위로 들렸다. 발끝이 공중에서 버둥거렸다. 점점 숨이 막혔다. 그건 목이 졸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꽉 막힌 목보다 그와 눈을 마주한 게 더 괴로웠다.
“사, 살려-”
“리 샤오 님.”
말 그대로 이대로 죽는구나 싶던 순간, 누군가 리 샤오를 말리고 나섰다. 카이였다.
“지금은 진 사장의 행방부터 찾는 것이 우선일 듯합니다.”
“…….”
무섭도록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취조실 안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상황만 지켜보고 있던 그때.
“켁. 케엑.”
눌린 개구리가 내는 소리가 취조실 안을 가득 채웠다. 리 샤오가 멱살을 쥐고 있던 사내를 던지듯 내려놓았던 것. 하지만 그에게 향한 시선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든 시선은 뒤돌아선 리 샤오에게 있었다. 리 샤오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도성 밖으로 나가는 모든 출입구는 봉쇄하고, 모든 열차의 운행을 중지한다.”
담담한 어투와는 달리 믿을 수 없는 엄청난 내용의 명령에 사무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하지만-”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
출입구의 봉쇄는 몰라도 모든 열차의 운행을 중지하면 그 열차를 이용해 자재를 실어 나르는 부자들, 더 정확히는 그 뒤를 봐주는 권력자들의 항의가 엄청날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카이가 그런 사무관을 향해 나직이 충고했다. 그제야 그 역시 입을 다물었다.
“가서 명령을 하달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뒤이은 카이의 지시에 그곳에 있던 사무관과 병사들이 빠르게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저는 진 사장의 거취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리 샤오의 명령을 전하는 일을 자신이 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맡긴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진 사장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아야,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어디로 빠져나갈지를 예측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자신의 상관은 전혀 다른 생각이었던 모양.
“역으로 간다.”
“역, 이요.”
설마. 의아해하던 카이가 눈매를 살풋 찌푸린다. 벌써 움직였을 거라는 말인가. 일단 몸을 피했으니 상황을 지켜보다가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이리라는 게 카이의 예측이었다. 보통은 그러한 법이니까.
하지만 리 샤오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예상을 벗어나 사람 뒤통수를 치는 데 능한 사내가 아니던가. 게다가 그런 화수를 제일 잘 아는 이가 바로 리 샤오였고.
“차를, 대기시키겠습니다.”
카이가 곧바로 취조실 문을 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빠르게 움직일 거라고 생각한 리 샤오가 그 자리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의아한 눈으로 그런 리 샤오를 보고 있으려니 눈매를 일그러트렸던 리 샤오가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의사의 앞으로 다가섰다. 흠칫, 죽은 듯 누워 있던 사내의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상태는.”
조금 전 거두어가려고 했던 목숨을 마저 가져가려나 싶어 완전히 얼어붙어 있던 것이 무색하게도 리 샤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은 상황에 맞지 않는 질문이었다.
“어땠지?”
그제야 숨을 죽이고 있던 카이도 그것이 화수의 안위를 묻는 것임을 깨달았다. 눈치를 보던 의사도 머뭇거리는 것이 결코 자신의 안위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좋지는, 않았습니다.”
어쩐지 최악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최대한 말을 돌렸지만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 샤오도 아니었다.
“천조국을 간다면, 갈 수 있는 몸 상태야?”
리 샤오의 질문에 카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질문은 리 샤오가 화수를 놓친다는 전제하에 하는 질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묻는 이유를 카이는 알 듯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리 샤오는 화수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무사히 도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리 샤오는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가슴에 뭔가가 퍽, 하고 박혀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분과는 달리 가슴은 멀쩡했다.
“그러니 제 발로 천조국으로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곳까지 자신이 버틸 수 없다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
“각혈까지 했는데, 모를 리가 없지요.”
“…….”
순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던 새하얀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단순히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마주한 리 샤오의 얼굴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마주한 리 샤오의 표정은 분명 조금 전과 다르지 않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이었을 뿐인데. 그러는 사이 리 샤오는 더 이상 물을 것이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저벅저벅.
리 샤오가 어두운 지하 복도를 가로지른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걸음은 위를 향해 가고 있는데, 이상하게 발은 점점 바닥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퍽-!
“리 샤오 님!”
조용히 그 뒤를 따르던 카이가 기겁을 해서 달려왔다. 묘하게 기분 나쁜 그 둔탁한 소리는 다름 아닌 리 샤오가 제 주먹으로 벽을 내리친 소리였던 것.
“별거 아니니까, 소란 떨지 마.”
별것 아니라는 말과 달리 주먹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적어도, 응급처치는 하게 해주십시오.”
얼굴을 일그러트렸던 카이가 빠르게 셔츠를 찢어 그것으로 리 샤오의 주먹을 둘둘 말았다. 찢어진 하얀 셔츠 위로 단숨에 빨간 물이 번졌다.
“움직여보십시오.”
순순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카이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리 샤오가 계단을 올랐다. 이제야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잡으면 돼.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기 전에.
입으로는 오래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아니, 꼭 죽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던 이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리 샤오가 주먹을 쥐었다 놓았다. 통증이, 느껴졌다.
다행이었다.
* * *
“너무 늦는데.”
탁. 조끼 주머니에서 꺼낸 회중시계를 도로 닫으며 진도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차륵, 금으로 된 줄이 청량한 소리를 냈다. 말없이 창밖만 보고 있던 화수도 그제야 고개를 틀어 진도현을 응시했다. 하지만 이미 고개를 꺾은 진도현의 시선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 복도에 서 있던 비서에게 향해 있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진도현에 비서가 열차칸 문을 삐죽 열었다.
“뭐 시키실 일이라도.”
“확인 좀 해보고 와. 왜 이렇게 늦어지는 건지.”
“예.”
그 역시도 이상하다 여기고 있었던 터라 열었던 문을 닫고 곧바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계속되는 연착으로 인해 열차 안은 이미 포화상태. 그나마 개인 칸을 차지한 덕에 진도현네는 이 난리통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을 수 있었지만 이미 개인 칸 복도마저 승객들로 가득 차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열차에 탄 사람의 무게 때문에 달리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괜찮아?”
비서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확인하고 진도현이 화수를 향해 물었다. 보기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평한 얼굴이었지만 핏기 없는 낯빛마저 가릴 수는 없었다.
“괜찮겠어?”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진도현을 향해 화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아니라고 해봐야 믿을 진도현도 아니거니와, 빈말 같은 건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화수는.
“갑갑해.”
슥. 메마른 숨을 내쉬는 화수의 앞으로 내뻗어진 손가락이 끝까지 채운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조금만 참아.”
진도현도 갑갑하다는 말이 단순히 셔츠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출발하면, 그때 풀게 해줄게.”
부른 배를 감추기 위해 칭칭 감아놓은 붕대 때문에 점점 숨 쉬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었지만 화수도 더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열차가 연착되고 있는 건 진도현의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조금만 참자. 화수가 아랫배를 문지르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 녀석.”
흘낏, 화수의 아랫배로 시선을 주었던 진도현이 묻는다.
“아명이, 뭐야?”
큰 의미는 없었다. 그저 문득 궁금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화수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다소 황당한 것이었다.
“그게 뭔데.”
“뭐냐니. 보통 어릴 때 부르는 이름 있잖아.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불렀던.”
“…….”
“뭐야. 이름도 안 지어준 거야?”
“부를 일도 없잖아.”
입을 다물고 있던 화수가 그제야 불퉁하게 한마디 내뱉는다.
“뭐, 네 녀석답네.”
비꼬려는 것은 아니고 순수한 감탄에 가까웠다. 그런 진도현을 향해 화수가 되물었다.
“진 사장은.”
“내가 뭐?”
“진 사장은 아명이 뭐였냐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이내 진도현이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내가 궁금해진 것은 아닐 테고.
“그게 왜 갑자기 궁금해진 건데?”
“어떻게 짓는지 궁금해서.”
예상대로 진짜 이유는 자신이 아니었다. 묘하게 실망스러운 기분을 억누르며 진도현이 대꾸했다.
“뭐, 방법이 따로 있나. 그냥 부르기 편한 이름으로 짓는 거지. 넌 뭐였는데.”
“그딴 거 없었으니까, 묻는 거잖아.”
“…….”
아.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뒤늦게 난감한 표정을 짓는 진도현에 화수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몸을 뒤로 젖혔다.
“알려주기 싫으면 관둬.”
“……진.”
“…….”
“정확히는 진아라고 불렸지만.”
“……여자애 같네.”
불퉁하게 중얼거렸으나 그래도 조금 전보다 확실히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여자아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 워낙 얌전해서.”
“……이 녀석도 얌전한데.”
“여자아이려나.”
“진 사장도 얌전했다며.”
“날 닮은 사내아이거나.”
“그런 무서운 소리는 닥치시죠.”
얘가 왜 당신을 닮느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범한 반응에 진도현의 기분도 조금은 느슨해졌다. 피식, 하고 웃은 진도현이 가볍게 덧붙인다.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면 뭐든 상관없다는 말이야.”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머릿속으로 아이의 이름을 고민하고 있다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때였다.
똑똑.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복도 쪽으로 꺾였다. 조금 전 상황을 확인하러 갔던 비서가 서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진도현이 문을 열었다.
“며칠 동안 내린 비에 철로가 잠긴 모양입니다. 복구가 되는 대로 운행은 재개할 예정인데, 시간은 장담 못 한다는군요.”
“…….”
하필이면. 진도현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어쩐지 내리는 비가 심상치 않더라니, 운이 나빴다. 무의식적으로 꺾은 고개가 창문 밖을 향했다. 물론 창문 밖은 쏟아지는 빗줄기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보고를 한 뒤 잠시 기다리던 비서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기다려보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맞은편에 앉은 화수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검붉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
“생각해봤어? 그 녀석.”
힐끔, 눈짓을 하는 진도현에 그제야 화수도 조금 전 나누던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름이라. 사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곧바로 생각난 이름이 있었지만 화수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물론 대답하기 직전 잠시 머뭇거린 화수를 알고 있었지만 진도현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마실 거라도 사 올까.”
“……아무거나, 시원한 거면.”
비 때문에 기온 자체는 높지 않았지만 습도가 높아서인지 공기가 눅눅했다. 밀폐된 좁은 열차칸 안이라 더했다. 음식은 안 돼도 뭔가 시원한 것이라면 마실 수 있을 듯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른침을 삼키는 화수를 확인하고 진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실 것 좀 사 올 테니까.”
“제가 다녀오지요.”
막아서는 비서를 향해 진도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엔 내가 다녀올 테니까, 젖은 것 좀 말리고 있어.”
우산을 챙기는 것을 잊은 탓에 비서의 옷이며 머리가 흠뻑 젖어 있었다. 잠깐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이 컸다. 진도현만큼은 아니라도 제법 고가의 양복이 흠뻑 젖어 못 쓰게 되었다. 툭툭, 젖은 어깨를 두들긴 진도현이 덧붙였다.
“누구도 접근 못 하게, 잘 지키고 있어.”
그리 당부하면서도 진도현의 시선은 문에 난 작은 창 너머를 향해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린 화수와 눈이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가만히 마주 보던 화수도 덩달아 피식, 하고 웃는다. 예쁘게 접히는 반달 눈. 진도현이 아주 좋아하는 것이었다.
“여기.”
사람으로 가득 찬 것은 역사驛舍도 마찬가지였다. 앉을 자리도 마땅치 않아 아예 짐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들과 표를 구하려고 매표소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사람들로, 역사驛舍 안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하지만 그 발 디딜 데 없는 공간을 용케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뛰어다니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으니.
“예, 사장님, 뭐 드릴까요.”
그때그때 필요한 물건들을 싣고 다니며 파는 움직이는 노점상이었다.
“종이를 두 겹으로 발라 만든 튼튼한 우산도 있고, 우비도 있습니다요.”
재빠르게 들쳐 메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은 소년이 우산과 우비를 꺼내 들었다. 진도현의 어깨가 젖어 있는 것을 확인한 까닭도 있었지만 그것이 소년이 파는 가장 고가의 물건들이기도 했으므로. 진도현의 차림새에서 돈 냄새를 맡은 까닭이었다.
“마실 것이면 돼.”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소년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순간 소년의 얼굴 위로 실망의 기색이 번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상자 안을 뒤적거리던 소년이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뽀얀 콩물이 담긴 병이었다.
“시원해?”
“그럼요. 금방 우물에서 꺼내 온 것을요. 만져보세요.”
소년이 직접 만져보라며 내밀었지만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세 병.”
표정이 환해진 소년이 재빨리 두 병을 더 꺼내 봉투에 담았다. 그러면서도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아, 그리고 시원한 것이라면 더 시원한 얼음보숭이도 있는데, 그건 필요 없으세요?”
“하나 줘봐.”
화수의 지친 표정을 떠올린 진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밝아졌던 소년의 표정이 이내 난감해진다. 이유는 곧바로 밝혀졌다.
“어, 그러니까, 그게, 상자를 동생이 가지고 있거든요. 금방, 금방 가져올게요. 정말 얼마 안 걸려요.”
“아…….”
그런 거면 그냥 두라고, 취소할 새도 없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소년이 황급히 인파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음료값을 지불하지 않았으니 그대로 가버릴 수도 없었다. 난감하게 됐군.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소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진도현이 뭔가 기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것은. 진도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나.
둘.
셋.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완전 군장을 한 병사들이 역사 안 출입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처음엔 하나였던 것이 둘, 셋, 점점 숫자를 늘려가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 진도현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뒤늦게 깨닫는다. 군인들이 막아선 것은 출입구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어느새 승강장 안으로 진입한 군인들이 기차를 에워싸듯 한 줄로 서서 대기 중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앞에 선 역무원에게 물었지만 그 역시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인 표정이었다. 진도현이 이내 걸음을 내디뎠다.
“기차에는 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그 앞을 군인이 막아섰다. 진도현의 눈매가 날카롭게 찌푸려졌다.
“무슨 권한으로, 앞을 막아서는 거지?”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명령대로 할 뿐입니다.”
“그게 무슨-”
“웬 소란이야.”
조금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이가 소란에 다가왔다. 딱딱한 얼굴이 진도현을 보자 조금 누그러진다.
“진 사장, 아닙니까.”
낯익은 얼굴. 진도현과 제법 안면이 있는 사령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사람 하나 찾겠다고 역을 폐쇄하고 기차 운행을 전면 중지하라니. 아무래도 이번 총감께서는 꽤나 성격이 과격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운행이 중지되었던 겁니까.”
“아, 진 사장도 그 탓에 발이 묶였군요. 이거 곤란하게 됐습니다.”
그제야 운행이 곧 재개될 것이라며 사람들을 물리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예 가버리면 곤란하니, 잠시 고장이라고 둘러대고 발을 묶어둔 것이리라. 그 집에서 몸을 피하고 곧바로 이곳을 빠져나가리라는 것을 예측했다는 점도 대단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기가 막혔다. 그 정도로 리 샤오의 심기가 완전히 비틀렸다는 반증이겠지만.
“대체 누굴 찾길래-.”
“글쎄요. 얼굴은 아직 모르고, 사내인데 임신을 한 곤이라고 하더군요. 배가 꽤 불러 바로 식별이 가능할 거라고.”
“이거 참, 난감하게 되었네요.”
“아마 수색은 금방 끝이 날 테니, 조금만 기다리면 운행이 재개될 겁니다.”
“그게,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서 말입니다. 중요한 계약을 하기로 한 약속인데. 늦지 않기 위해 부러 기차로 이동하려고 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네요.”
“저런.”
담담히 말을 하는 진도현보다 그 말을 듣는 사령의 얼굴이 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진도현이 어떤 사업을 하고 어떤 규모의 계약을 따내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바로 차로 출발하면 어찌, 시간을 맞춰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괘종시계를 확인하고 진도현이 말끝을 흐리자 잠시 한쪽 눈매를 찌푸린 채 고민하던 사령이 이내 병사를 향해 손짓을 했다.
“수색 없이 바로 나갈 수 있는 문으로 안내해드릴 겁니다.”
“큰 신세를 졌습니다.”
“신세라니.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거지요.”
그리 손사래를 치면서도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상관없었다. 오히려 이런 족속들이 다루기는 편했다. 고개를 끄덕인 진도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인다.
“제 비서가 열차에 타고 있어서 말입니다. 잠시 들어가 데리고 나와도 되겠습니까.”
“빨리 나오는 게 좋을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사령이 손짓을 하자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던 병사가 옆으로 비켜섰다. 진도현이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본래 타고 있던 승객들만으로도 빡빡하던 열차 안은 수색을 위해 들어온 군인들까지 더해져 복도를 가로지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사장님!”
사람들을 헤치던 진도현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이 걸어가던 방향 반대쪽이었다. 날카로워진 눈으로 뒤를 돌자 사람들 사이로 손을 든 비서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가까워지기 무섭게 속삭이듯 묻자 비서가 눈짓으로 열차 안 간이화장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덧붙였다.
“속이 안 좋다고 하셔서.”
그제야 진도현의 표정도 조금 누그러졌다.
“다행히 군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들어가서, 들키지 않았습니다.”
하아.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퍽 운이 좋은 녀석이었다. 늘 그랬다. 정작 본인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똑똑.
문에 바싹 붙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진도현이 문을 두들겼다.
“나야.”
그러고는 속삭이듯 문 안을 향해 말했다.
“빠져나갈 방법이 생겼어. 그러니까, 이번엔 조금 전보다 더 배를 꽉 졸라매고 나와.”
다행히 이곳엔 화수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고 그저 배가 부른 사내를 찾고 있는 상태이니, 아직까지는 승산이 있었다. 신속하게 내려지긴 했지만 급히 명령이 내려진 만큼 허술한 구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은커녕 어떤 반응도 없었다. 문을 등지고 선 채 주변을 확인하던 진도현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감지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탕탕.
뒤돌아선 진도현이 문을 두들겼다. 조금 전보다 두들기는 강도가 높아져 있었다. 듣지 못할 리가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예감.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몸 상태라던 의사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진도현의 눈이 커졌다. 아냐, 그럴 리가. 불안한 예감을 떨치듯 고개를 흔든 진도현이 다시금 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뒤로 한껏 젖혔을 때였다.
“일동 차렷!”
외침과도 같은 구호가 들려온 것은. 그리고 뒤이은 낮은 음성.
“쉬어.”
저벅저벅.
든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 진도현의 등 뒤로 천둥소리 같은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빌어먹을. 난감한 기색이 역력하던 진도현의 얼굴은 뒤돌아선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뵙습니다, 리 샤오 총감님.”
“여기 숨겨뒀나?”
“무슨 말씀을-”
“이미 진 싸움에 괜한 시간을 끌 만큼 멍청하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군.”
“…….”
방법이 없긴 했다. 이곳에 이렇게 빨리 본인이 나타날 줄은 진도현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므로. 아무리 재주가 좋은 진도현이라도 이제는 방법이 없긴 했다.
“화수야.”
눈빛으로 진도현의 항복을 알아차린 리 샤오가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나직이 이름을 되뇌었다.
“네 발로 나와. 부수고 끄집어내기 전에.”
사실 간이화장실 문 따위야 힘으로 부수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리 샤오의 배려 따위는 알지 못한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잠시 시간을 주었지만 문이 열리는 일도 없었다.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침묵을 지키던 카이가 병사들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문을-”
쾅!!!
허나 문을 부수라는 명령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리 샤오의 손에 문짝은 이미 날아간 뒤였다. 어느 때보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누구도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침묵을 깰 수 있는 이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끝까지, 이러겠단 말이지.”
물론 이번에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대답을 해야 할 이가 있어야 할 화장실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으므로.
어떻게 된 거야.
텅 빈 칸을 보고 기가 막힌 이는 리 샤오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빛으로 묻는 진도현에 비서 역시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제 눈으로 분명 화수가 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걸 봤고 내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의 황당한 기분을 알아차린 진도현이 다시 시선을 꺾었다. 안을 훑던 시야에 삐죽 열린 창문이 들어왔다. 좁은 틈이었으나 사람 하나 정도는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어쩐지, 반항 한 번 없이 순순히 따라온다 싶더니. 그제서야 늘 청개구리 같던 녀석이 답지 않게 반항 한 번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였으리라. 기가 막혔다. 하지만 녀석의 행태를 괘씸해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딨어.”
성큼 다가서는 이의 눈동자가 무시무시했다. 꼭 며칠 굶은 짐승처럼. 이런 눈을 할 수도 있는 사내였나. 제가 아는 리 샤오는 분명 어떤 경우에도 이성을 잃지 않는 차갑고 냉소적인 유형이었는데. 그런 사내가 이런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이 다소 신기할 정도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누굴 말하는 것인지 다 알면서도 진도현은 시치미를 뗐다. 그의 표정만 봐서는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말로 영문을 몰라 묻는 이의 반응이었다. 물론 리 샤오에게 그것이 통할 리는 없었지만.
“진 사장.”
“…….”
“어디로 빼돌렸냐고 물었어.”
“…….”
리 샤오의 패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진도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익히 경험한 적 있던 리 샤오의 패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사실 그가 뿜어내는 패기는 압도적이지만, 적어도 잘 갈무리된 것이었다. 해서 그것을 경험한 상대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하게 할 정도로만 딱 자신의 성격대로 사용하곤 했었다. 헌데 지금 리 샤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패기는 말 그대로 쏟아지는 폭풍우 같았다. 정신을 바로잡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마구 날뛰는 그 기운에 휩쓸리는 순간 그대로 온몸이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
“저, 저희도 모릅니다. 정말이에요.”
쉽게 굴복하지 않는 진도현과는 달리 비서가 그 두려움을 버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역시도 살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리 샤오의 무시무시한 눈동자가 진도현에서 그에게로 옮겨갔으므로.
“힉.”
눈앞에 짐승과 대치한 순간 비서가 숨을 삼켰다.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비웃을 수는 없었다. 아마 그의 입장이었다면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말해.”
나직한 명령에 거짓말처럼 굳었던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부, 분명 속이 좋지 않다고 이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제 눈으로,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
“내내 문 앞도 분명 지키고 있었는데…….”
“카이.”
거기까지 들은 리 샤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카이를 찾았다. 카이 역시 그 부름의 이유를 단숨에 알아차리고 대답했다.
“역사 안을 확인하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열차에 타고 있었다면 아직 이곳을 완전히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 추측한 그 순간, 뭔가를 떠올린 진도현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그리고 그것은 리 샤오의 예민한 눈을 피하지 못했다.
“뭐지?”
“…….”
“뭐냐고.”
착각이리라. 되묻는 목소리에 초조한 기색이 느껴지는 것은. 하지만 뒤늦게 피비린내가 코끝에 닿았다. 흘낏 내린 시선에 그의 손이 붕대로 감겨져 있는 것이 들어왔다. 응급처치만 한 것인지 붕대 역시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진도현은 저도 모르게 조금 전 머릿속에 스쳤던 것을 털어놓고 말았다.
“아마, 벌써 빠져나갔을 겁니다.”
녀석이라면. 게다가 가장 눈에 띄는 배까지 감췄으니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눈매가 일그러졌다. 이런 녀석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제가 뒤통수를 맞고 나니 입안이 썼다.
“반경 1km까지 샅샅이 수색해.”
별다른 설명 없이도 진도현의 찌푸린 얼굴로 상황을 파악한 리 샤오가 더는 확인하지 않고 명령을 바꿨다. 도보로 이동한 것이니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 명령을 내린 리 샤오도 발길을 돌렸다.
“두 사람은 경무국으로 연행해.”
물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고서. 하지만 그런 리 샤오의 명령에 진도현이 반박하고 나섰다.
“체포라니요.”
멈칫. 돌리던 걸음이 멈칫했다.
“대체 무슨 죄목으로 말입니까.”
따지듯 묻는 진도현을 향해 리 샤오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진도현 사장.”
“…….”
물론 그의 이름을 되뇌는 순간 그 얼굴에서 웃음기는 단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함부로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 라는 말 못 들어봤나?”
“그거야 남의 것일 때 말이지요. 녀석이 리 샤오 님 본인 것은 맞습니까?”
“…….”
여기서 진도현이 말한 녀석은 화수를 일컬었다. 아이는 당연히 리 샤오의 아이지만 적어도 화수는 스스로 리 샤오에게서 도망쳤으니까. 그것을 찌른 것이었다. 하지만 리 샤오에게는 그것이 배 속의 아이는 제 것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그 탓에 처음으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던 것.
“그러게.”
잠시 침묵하던 입술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제가 제기한 반박을 인정하는 듯한 대꾸여서 진도현의 입꼬리도 살짝 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왜 그랬지.”
“…….”
“뇌가 녹아버리든 말든 다른 새끼 각인 따위는 깨부수고 내 것으로 박아 넣었어야 했는데.”
“…….”
“그랬다면 감히 내게서 도망칠 생각 같은 건 못했을 텐데. 그럼 이런 곳에서 이딴 건방진 소리를 들어줘야 할 일도 없었을 테고.”
“…….”
말려 올라갔던 진도현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래로 떨궈졌다. 반대로 리 샤오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홀가분해 보였다.
“이번에 붙잡으면 내 것으로 각인해버릴 거니까, 그럼 아무 문제 없겠지?”
“…….”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리 샤오 역시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충고 고맙군.”
툭툭, 어깨를 두들긴 리 샤오가 걸음을 내딛었다. 굳어 있던 진도현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을 때였다. 철컥, 금속성 파열음과 함께 손목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니, 잠시만-”
“불만이 있으시면 정무국에 가서 이의를 제기하십시오.”
진도현의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단순히 수갑이 채워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대체 이미 되어 있는 각인을 왜 다시 한다는 것인가, 뒤늦게 그가 제기하려고 했던 의문은 그대로 카이에 의해 저지되었다. 조용히 앞을 가로막은 카이가 나직이 속삭이듯 덧붙였다.
“물론 하지 않는 쪽을 추천하지만요.”
진심 어린 충고였다.
* * *
“왜 나오십니까.”
문을 열고 나오는 화수를 목격하고 비서의 얼굴 위로 경계의 빛이 서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욱.”
별다른 설명 없이도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틀어막는 화수의 모습에 경계심은 단숨에 사라졌다. 오히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비서를 밀치고 빠른 속도로 복도를 가로지른 것은 화수였다. 뒤따라오는 비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대로 달려간 화수가 간이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우왝.
사실 먹은 것도 없어 노란 위액만이 나올 뿐이었지만 상대를 안심시키는 데는 충분했다. 열린 문을 알아서 비서가 닫아줬다.
탕.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도 화수는 붙잡고 있던 변기를 놓지 않았다. 그러다 이내 퉷, 하고 입안에 고인 침을 뱉고 빠르게 고개만 들어 위쪽을 보았다.
밖으로 달린 작은 창문을 확인한 화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뻑뻑한 손잡이를 잡아 밀자 끼기긱,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재빨리 변기뚜껑을 내렸다. 쾅, 하고 요란한 소리에 맞물려 창문이 끝까지 다 열렸다. 화수가 문 쪽을 확인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화수는 변기뚜껑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창문을 등지고 서서 길게 난 창문 틈으로 머리를 먼저 집어넣고 그대로 상체를 쭉 잡아 뺐다. 중간에 배가 살짝 걸렸지만 다행히 압박붕대를 감아놓은 덕분에 빡빡하긴 해도 빠져나오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창문에 걸터앉은 자세로 이번엔 창문 위쪽을 붙잡았다. 그리고 두 다리도 천천히 잡아 뺐다. 문틀에 두 발을 디딘 자세가 되었을 때 화수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문을 확인했다. 이후 여전히 조용한 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대로 붙잡고 있던 창틀을 놓았다.
타닥.
배를 감싸며 바닥으로 떨어진 화수가 잠시 그대로 숨을 죽였다. 발바닥 아래로 자갈이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다행히 빗소리에 가려 멀리 퍼지지는 못했다.
“착하지. 조금만 참자.”
단단히 조여 맨 배를 문지르면서 화수가 달래듯 속삭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던가. 처음엔 그리 어색하던 것이 이제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혼자가 아니라 조금은 든든한 기분마저 들었다.
“샤샤.”
조금 전 진도현이 이름을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친 이름. 그 이름을 써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하기는 했지만 한번 그 이름을 생각하고 나니 다른 이름은 전혀 떠오르질 않았다. 뭐 어떤가. 나 혼자 부를 건데. 그리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여기만 빠져나가면 이건 금방 풀어줄게.”
그리 덧붙인 화수가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철로에서 막 승강장으로 올라서려고 할 때였다.
멈칫.
화수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승강장에 선 한 아이와 떡하니 눈이 마주쳤던 것. 휘둥그레진 눈으로 굳어 있는 모양새로 보아 아무래도 녀석은 화수가 창문으로 빠져나오는 것부터 목격한 모양이었다. 당황한 아이와 달리 화수는 태연했다.
쉿.
나른하게 웃으면서 세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자 굳어 있던 아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잊지 않는다. 착하네. 칭찬의 의미로 한 번 더 웃어주자 이번엔 아예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물론 그러는 사이 이미 시선을 돌린 화수가 휙, 하고 가볍게 승강장으로 올라왔다.
“저기요.”
멈춰 서 있던 아이가 한 박자 늦게 걸음을 내딛는 화수를 뒤따라왔다. 뒤늦게 화수의 눈에도 아이가 둘러매고 있는, 제 몸보다 큰 상자가 들어왔다. 아마도 거기에 떼 온 물건을 넣고 다니며 파는 일을 하는 아이인 모양이었다.
뭐, 어쩔 수 없나. 작게 한숨을 내쉰 화수가 소매단추를 떼어냈다.
“미안, 내가 지금 가진 돈이 없어서.”
작긴 해도 그래도 보석이니 꽤 값이 나갈 터였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편견을 비웃듯 아이는 펄쩍 뛰듯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의아한 표정을 짓는 화수에게 아이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출입구를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요.”
아. 그제야 아이가 입막음비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화수가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정작 아이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사람들은 모르는 뒷문이 있어요. 따라오세요.”
그리 말하고 아이는 화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빠르게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는 역사 방향이 아닌 승강장 끝으로 빠른 걸음을 내딛었다. 잠시 고민하던 화수가 이내 아이의 뒤를 따랐다. 사실 화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나마 그사이 빗줄기가 조금 잦아들어 다행이었다.
“잠시만요.”
승강장을 내려와 잠시 철길을 따라 걷던 아이가 갑자기 수풀을 헤집었다. 뭐 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쭉- 철사로 꿰어놓은 담장이 드러났다. 정확히는 누군가 잘라놓은 담장이라고 해야겠지만. 물건을 파는 아이들이 역무원 몰래 기차가 있는 승강장을 들락거리기 위해 만들어놓은 출입구였다. 그것을 살짝 들자 사람 하나는 거뜬히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여기로 나가시면 돼요.”
하지만 그 앞에서 화수가 잠시 머뭇거린다.
“어서요.”
그런 화수에 아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 번 더 그를 재촉했다. 그제야 화수도 걸음을 내딛는다. 아이가 잘린 철사에 화수의 값비싼 옷이 망가지지 않도록 잘라놓은 담장을 더 바짝 당겼다. 그리고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당기고 있던 담장을 놓았다. 그 잠깐 사이에 아이의 머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고마워.”
뒤돌아선 화수가 감사인사를 했다. 녀석을 홀리려고 지을 땐 잘만 지어지던 미소가 지금은 오히려 잘 지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의 귀는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면서 민망한 듯 코끝을 문지른다. 그런 아이에게 화수가 조금 전 주려고 했던 단추를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 전당포에 가져가면 제법 값을 쳐줄 거야.”
“아뇨. 괜찮아요.”
아이가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번엔 화수가 한발 빨랐다. 솜씨 좋게 아이의 주머니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미안해서 그래.”
대가없는 친절도 있는 법인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당연히 대가를 원하겠거니 지레짐작해서 아이를 그런 속물로 만들어버렸다. 돈이면 다 된다는 이들을 경멸해놓고,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번엔 화수가 도로 돌려주려는 아이에게서 황급히 물러섰다.
“고마워.”
그리고 덧붙였다. 고마움에 대가를 주는 것이 조금 걸렸지만 그래도 뭐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자신은 이런 방법밖에는 모르니까.
“고맙습니다.”
그런 화수의 기분을 알아차린 걸까. 당황한 표정을 짓던 아이도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를 되돌렸다.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진도현의 돈으로 생색을 낸 것이긴 했지만. 화수가 걸음을 돌렸다.
“아, 저기!”
그런 화수의 발길을 아이가 한 번 더 붙들었다. 돌아보는 화수의 앞에 우산이 내밀어졌다.
“이거 가져가세요.”
“파는 거잖아.”
거절하는 화수에게 아이가 재빨리 덧붙인다.
“저도 감사해서.”
“……그래, 고마워.”
만약 단추값이라고 했다면 아마 안 받았을 테다. 하지만 고마움의 표시라고 했으니 화수도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스윽.
종이우산을 폈다. 진도현이 사다 준 그런 고급 우산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쪽이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을 터였다.
지금쯤 진 사장도 알아차렸겠지. 피식, 화수가 웃음을 흘렸다. 제가 없어진 것을 알고 진도현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사실 천조국에 가고 싶지 않아서 도망친 것은 아니었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지겨워.
이놈이나 저놈이나 제 의견 따위는 무시한 채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이 신물이 났다. 물론 대책은 없었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누가 하라는 대로 얌전히 있는 것은 성격에도 맞질 않았다.
뭐 어떻게 되겠지.
적어도 지금은 숨이 막힐 것 같던 답답한 기분은 사라졌으니까. 그리 생각한 화수가 우산을 든 채 걸음을 내딛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거기.”
불쑥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음성에 화수의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씨발.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쩐지. 평온한 순간이 그리 오래갈 리가 없었다.
저벅저벅.
그러는 사이에도 발소리가 점점 더 거리를 좁혀왔다. 바로 등 뒤에서 걸음이 멈춘 순간 화수가 얼굴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뒤돌아서며 태연히 되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화수의 얼굴을 확인한 군인의 얼굴에서 경계가 단숨에 누그러지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그게, 사람 하나를 찾고 있어, 검문 중입니다.”
“사람이요? 어떤 사람을.”
“그게, 뭐, 그쪽은 가셔도 되겠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묻자, 그런 화수를 위아래로 훑던 군인이 함께 있던 동료와 시선을 주고받고는 이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마도 임산부를 찾으라는 지시만 받은 모양이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더는 묻지 않았지만, 조금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무 다행이라는 듯 빠져나가면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그것까지 계산에 넣은 화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가던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타닥. 타닥.
속도는 조금 전과 다르지 않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조금 전 그 군인들이 달려와 배를 확인하자고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태연히 걸었다. 한 번 뒤를 돌아보는 일도 없었다.
하아.
그렇게 한참을 걸어 큰길가에 다다랐을 때에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때였다.
끼익.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달려온 차가 제 앞에 섰다. 피할 틈도 없었다.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랜만이야, 화수야.”
낯익은 얼굴. 차 안에서 반갑게 손까지 흔들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룽오 부장이었다.
* * *
“……ㄱ새끼, ……데려와……, ……거야.”
드문드문 들려오던 목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차 안인가. 연신 덜컹거리는 바닥에 지금 제가 있는 곳이 차 안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다행히 정신을 잃은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체 어찌 되는 상황이지.
당연히 리 샤오에게 데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단순히 그럴 목적이었다면 저를 기절시켜 뒷좌석에 던져놓는 일은 없었겠지. 리 샤오와 룽오 부장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겉으로 보기엔 욕심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저 사내가 그 누구보다도 권력에 탐욕스러운 인간이라는 것도. 화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래서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목숨이 위험하다고 경고했던 의사도 제가 이리 죽을 줄은 몰랐을 테지. 화수가 피식, 하고 웃었다. 물론 입이 틀어막힌 탓에 제대로 소리 내어 웃을 수도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다행한 일이었다.
끼익.
한참을 달리던 차가 가만히 멈춰 섰다. 고개를 슬쩍 들어봤지만 머리에 검을 천을 뒤집어쓴 탓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쩐지 숨이 막혔다. 그건 차 안 공기가 습한 탓만은 아니었다.
타닥타닥. 누군가 빠른 보폭으로 다가왔다. 시야가 가려진 대신 청각이 예민해져 있었다.
“지시하신 대로, 녀석을 데려왔습니다.”
보고를 받은 룽오 부장이 차 창문을 내렸다.
“데려와.”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살짝만 연 창문 틈으로 그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번엔 여럿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섞인 느릿한, 심지어 마지막에는 질질 끌리고 있는 발소리가 불협화음처럼 거슬리게 귀에 들어왔다.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지?”
“아, 아니요. 아닙니다.”
휙휙, 고개를 내저을 때마다 젖은 머리칼이 볼을 마구 두들겼지만 필사적인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대답은 룽오 부장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네.”
“아, 아니요. 맞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그러려고 했습니다. 그땐,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이제는, 이제는 정신 차렸습니다. 다시는 그런 생각 하지 않겠습니다.”
“…….”
“그러니 살려주세요. 제발, 제가 잘못했어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뭐든, 다 할 테니, 살려만, 제발 살려만 주세요.”
애원하는 목소리가 어눌했다. 그럼에도 사내는 필사적이었다. 그런 사내의 애원이 통한 걸까. 내내 침묵하던 룽오 부장이 그제야 느긋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이야?”
“…….”
“뭐든지 다 하겠다는 그 말, 정말이냐고.”
영문을 몰라 잠시 머뭇거린 것뿐인데도 룽오 부장의 목소리 온도가 확연히 낮아진다. 눈치를 살피던 사내의 어깨가 더 둥글게 말렸다.
“예, 예. 예, 물론이지요. 뭐든지 시켜만 주시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요.”
툭. 뒤에 서서 그를 붙들고 있던 부하가 보다 못해 빨리 대답하라는 신호를 주자 다시금 사내의 입에서 대답이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물론 그리 내뱉는 말들에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내뱉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룽오 부장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뭐, 꼭 나만 좋은 일은 아니고.”
“예예, ……예?”
“그리 하고 싶다던 복수를 하게 되었으니, 네놈에게도 아주 잘된 일 아니겠어?”
“…….”
“꺼내줘.”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을 향해 씽긋, 하고 웃어 보인 룽오 부장이 다시 한 번 손을 까딱였다. 대기하고 있던 부하가 차 뒷문을 열었다. 차에 실어질 때처럼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끌려 나갔다.
“벗겨줘.”
비틀거리며 두 다리로 서기 무섭게 머리에 씌어져 있던 검은 천이 벗겨졌다. 화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 구면이지?”
하지만 그런 시간이 필요 없던 상대는 단숨에 화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 얼굴이 구겨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원한이 가득한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화수도 뒤늦게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사실 당장이라도 저를 죽여버리고 싶어 하는 그 눈빛이 아니었다면 바로 알아보지는 못했을 터였다. 거지꼴인 것도 모자라 얼굴마저 퉁퉁 부어오른 상대의 몰골은 제가 알던 사내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으므로. 말투가 어눌하다 했더니 저런 이유였던 모양이다.
“이 남창새끼!”
“어허, 성미가 왜 이렇게 급해?”
야차같이 변한 홍위가 화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재빠르게 그의 뒷덜미를 붙든 단단한 손이 없었다면 그의 더러운 손은 화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을 터였다.
“물론 지금 죽여도 좋지만, 이왕이면 너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두 사람 모두에게 복수하는 편이 더 좋잖아?”
“…….”
“곧 리 샤오 부장이 올 거야. 그러면 그때 죽여버리는 게 더 기분 좋지 않겠어? 제 눈앞에서 제 새끼가 죽어 나자빠지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을 테니까.”
“…….”
까딱. 룽오 부장의 신호에 그를 붙잡고 있던 부하가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날도 제대로 서지 않은 그 비루한 것은 본래 홍위가 리 샤오를 죽이겠다고 소지하고 있던 칼이었다. 그럼에도 눈앞에 칼이 보이자 홍위가 쥐며느리마냥 몸을 둥글게 말았다.
휙.
그런 홍위를 비웃듯 부하는 태연히 쥐고 있던 칼을 뒤집었다. 뒤늦게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 칼날이 아닌 반대편 손잡이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굳은 채 고개만 돌려 룽오 부장을 본다. 그런 홍위를 향해 룽오 부장이 태연히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네 것이니까.”
그제야 허락의 뜻을 확인한 홍위가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을 잡았다. 비루한 것이지만 손에 무기가 들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이 되었다. 물론 그 칼을 자신을 위협하는 이들에게 휘두를 용기 같은 건 없었다. 지금도, 예전에도 그가 맘껏 폭력을 휘두르던 상대는 그저 반항도 할 수 없는 자신보다 약한 이들이 고작이었으니까.
“그럼 주인공이 오시기 전에 조연들은 그만 빠질까.”
룽오 부장의 그 말을 신호로 홍위를 에워싸고 있던 이들이 빠르게 물러섰다. 홍위를 싣고 왔던 차도 먼저 그곳에서 멀어진다. 그 뒤로 룽오 부장이 탄 차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익.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진하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놀랍게도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룽오 부장이었다. 저벅저벅, 검은 우산을 쓴 룽오 부장이 다가오자 당황한 홍위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물론 그 걸음은 뒤에 있던 다리 난간에 막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멈춰 서야 했지만.
그러는 사이 홍위의 앞으로 바싹 다가선 룽오 부장이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리고 속삭인다.
“……버려.”
그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지만 내리는 비와 우산에 가려 그가 하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뭐야. 화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을 때는 이미, 홍위의 옷자락을 여미고 룽오 부장이 그에게서 한 발 뒤로 물러선 뒤였다.
“살려달라고 해봐.”
화수의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비가 멈췄다. 눈을 마주한 룽오 부장이 씽긋 웃으며 충고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살려달라 애원할 상대가 롱오 부장이나 홍위는 더더욱 아니라는 건, 화수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알아? 제 목숨과 바꿔서라도 구해줄지.”
“…….”
리 샤오가 제 새끼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면 룽오 부장의 저 즐거워하는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매우 궁금했지만 화수는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입이 틀어막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화수라도 지금 당장 죽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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