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끼이익.
통행이 차단된 다리 끝에서 검은 자동차가 멈춰 섰다.
“일단 상황을-”
확인하고 오겠다는 말을 채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리 샤오는 차에서 내린 뒤였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라 미간을 살풋 찌푸린 카이도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급하게 펴 든 우산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묵직하게 내리꽂혔다.
“총감님.”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룽오 부장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다소 건방진 태도였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에 대해 문제를 삼을 이는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리 샤오의 시선은 다리 중앙에만 꽂혀 있었다.
“총감님과만 이야기하겠답니다.”
제 앞을 가로막는 이가 룽오 부장임을 알아차린 것도 지금이었다. 새파랗게 일어나는 눈동자에 룽오 부장이 반사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거리를 조금 늘렸을 뿐 앞을 가로막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무장해제를 한 상태로, 말입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카이가 반박했지만 이미 리 샤오는 차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룽오 부장을 향해 상황보고를 명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고해.”
“홍위라고, 얼마 전 녀석의 아비가 부정한 방법으로 공사를 따냈던 사실이 밝혀져 처벌을 받았지요.”
툭, 툭, 보고를 듣는 중에도 품에 있던 총을 하나씩 꺼내 바닥으로 떨궜다.
“아무래도 그 일로 앙심을 품고 이런 일을 저지른 모양입니다.”
짧은 보고였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외투까지 벗어 던진 리 샤오가 그대로 걸음을 내딛었다.
“안 됩니다.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
그런 리 샤오의 뒤를 카이가 따라붙으며 말려보지만 사실 별 소용은 없었다. 마치 벽을 향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리 샤오 님!”
“우산.”
그러던 리 샤오가 불쑥 뒤돌아선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예?”
“우산 달라고.”
명령에 반사적으로 내민 우산을 낚아채듯 가져간 리 샤오가 다리로 들어섰다. 황급히 뒤따르려는 카이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총감님과만 이야기하겠다고 한 것 잊었습니까.”
“룽오 부장!”
“들고 있는 칼 하나가 고작입니다. 총감께서 칼 정도도 어찌 못 할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괜히 놈을 자극해서 인질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
화수의 안위를 언급하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카이도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그것을 확인한 룽오 부장이 느긋하게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은 적당히 맞춰주는 편이 낫습니다.”
“…….”
카이의 시선이 리 샤오의 뒤를 쫓았다. 굳이 챙겨간 우산은 쓰지도 않고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저럴 거면 우산을 왜 가져갔는가, 하는 의문이 풀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거, 거기서!”
비무장 상태로, 심지어 겉옷까지 다 벗어 던진 상태임에도 홍위는 리 샤오에 대한 경계를 풀지 못했다. 본인은 무기에, 심지어 인질까지 있는데도 전혀 안심이 되질 않는 모양이었다.
“아, 아무것도, 무기는,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리 샤오의 손에 들린 우산을 위협적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리 샤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비가 많이 와.”
“……뭐?”
“그러니까 쓰라고.”
툭, 순간 제 발치로 떨어지는 우산을 피해 한 발 뒤로 물러섰던 홍위가 뒤늦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이딴 거, 필요 없어!”
쏟아지는 비에 눈을 제대로 뜨기도 쉽지 않았지만 홍위는 그것을 발로 찼다. 바닥을 찰 때마다 물보라가 일었으나 정작 우산은 그리 멀리 날아가지도 못했다. 그것이 홍위의 성질을 더 돋웠다.
“이게 지금 장난으로 보여?!”
얼굴이 벌게진 홍위가 화수의 목에 칼을 더 바싹 댔다.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얼굴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칼이 목에 겨눠졌는데도 크게 흔들리는 법이 없는 표정까지도. 두 사람의 얼굴만 봐서는 칼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 화수이고 붙잡힌 쪽이 홍위 같았다. 덜덜 떠는 손에 들린 칼끝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
다 낡아빠진 칼인 줄 알았는데 날은 예리하게 갈아두었던 모양이었다. 화수의 목덜미에 붉은 실자국이 생기는 것을 확인한 순간 리 샤오는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복수는 나한테 하고 싶은 것 아니었나?”
사실 이 정도의 상대는 패기를 써서 제압하면 되었다. 리 샤오에게는 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리 샤오가 패기를 쓰지 못한 이유는 혹여라도 사내가 손을 휘두르거나 비틀다가 그 칼끝이 화수에게 향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조금 칼에 베이는 것 정도는 생명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지만 그조차도 견딜 수가 없었다. 의식적으로 한 행동도 아니었다.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몸이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네 아버질 잡아넣은 건 나야. 찌르고 싶다면, 찌르게 해주지. 맘대로 해.”
무슨 꿍꿍인가, 의심을 하면서도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순 없었던 모양.
“……무, 무릎 꿇어.”
잠시 고민하던 홍위가 명령했다. 하지만 정작 그리 말하면서 그 역시도 리 샤오가 무릎을 꿇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당연했다. 리 샤오조차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상관없었다. 녀석을 구해낼 수만 있다면. 한 번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으려는 순간 그때까지만 해도 초연하던 화수의 얼굴 위로 표정이란 것이 떠올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겁니까! 물론 그 항의는 리 샤오를 향해 있었다.
“읍, 읍-!”
반항 한 번 없던 화수가 몸을 뒤틀자 당황한 쪽은 홍위였다. 급히 손을 뒤로 물렸지만 칼날이 화수의 어깨를 스치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아니야.”
불에 타들어가는 듯한 뜨끈한 통증이 일었다. 주륵, 내리는 비와는 다른 점도의 액체가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목을 묶어놓은 끈이 점점 더 선명한 선홍색을 띠었다.
“내, 내가 그런 거 아니야.”
뚝뚝, 바닥으로 번지는 붉은 기를 본 리 샤오의 표정이 야차같이 변했다. 억눌러놓았던 패기가 그의 등 너머에서 일렁였다. 반발자국이지만 화수가 홍위에게서 떨어져나간 것 때문이기도 했다.
“네가 멋대로, 나, 난 아무 잘못 없어.”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 홍위가 주춤주춤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반사적으로 뭔가를 찾아 품을 더듬었다.
-!
반쯤 정신이 나간 홍위보다 먼저 그것을 발견한 이는 화수였다. 그제야 조금 전 룽오 부장이 홍위의 옷을 여며주었던 까닭을 알아차렸다. 삐죽, 안쪽 주머니에 꽂혀 있는 것은 분명 총이었다.
안 돼.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한 발 물러났던 화수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가 막 총을 쥐었을 때였다.
“나, 놔.”
묶인 손으로 대책도 없이.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총이 누굴 겨눌지 생각했을 땐 이미 두 다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놓으라고!”
뿌리치기 위해, 총을 쥔 손을 빼내기 위해 칼을 쥐고 있던 다른 손이 화수를 향해 내리꽂혔다. 이상했다. 분명 똑같은 시간일 텐데, 이상하게 눈앞의 움직임이 아주 천천히 보였다. 푹, 칼이 화수의 손목에 꽂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화수야!”
그가 달려오고 있었다. 리 샤오와 눈이 마주쳤다.
안 돼.
오지 마.
화수가 눈으로 외쳤다. 동시에 내내 제 쪽으로 당기던 힘의 방향을 틀어, 이번엔 아예 반대로 확 밀었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몸을 더 힘을 주어 밀자, 빗물에 그의 발이 뒤로 쑥, 미끄러졌다.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난간 너머로 사내의 몸이 맥없이 넘어갔다. 핏줄 선 눈동자에 서린 공포가 고스란히 보였다.
끝났다.
하지만 그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 순간, 불쑥 내뻗은 마른 장작같은 손이 화수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씨발. 두 발이 딛고 있던 바닥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낀 화수가 낮은 욕설을 내뱉었다.
풍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일었다.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화수야?”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쿵, 하고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현실감은 느껴지지 않는데, 이상하게 몸은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기분. 난간을 향하는 걸음이 제 것 같지 않았다. 깜빡이는 눈꺼풀 위로 비가 무겁게 쏟아졌다. 시야가 흐릿했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몇 걸음 채 되지 않는 그 거리가 천 리 같았다.
탁. 돌난간에 손을 짚고 아래를 확인했다. 수일 내린 장맛비로 다리 교각 바로 아래까지 불어난 시커먼 흙탕물이 거센 물살을 일으키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화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군데군데 소용돌이까지 이는 것을 보면서도 리 샤오는 그대로 난간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리 난간을 뛰어넘으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리 샤오를 붙들었다.
“대장!”
몸이 뒤로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리 샤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힘으로 매달린 그를 뿌리치고 다시 팔에 힘을 주었다. 팔 근육이 확 조여들었다.
“안 됩니다!”
다시금 몸이 뒤로 당겨졌다. 카이 역시도 필사적이었으므로, 이번엔 떼어내는 것이 조금 전처럼 쉽지 않았다. 그 버티는 틈에 카이가 뒤따라온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뭐 해! 붙잡지 않고!”
카이의 고함소리에 머뭇거리고 있던 병사들도 그제야 리 샤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리 합류한 장정들 역시 리 샤오의 움직임 한 번에 우수수 나가떨어졌다.
“놓치지 마!”
카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총감께서 물에 뛰어드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문책을 받고 싶지 않다면 죽을 각오로 매달려.”
반협박성 경고에 병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뿌리치는 리 샤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리 샤오라도 수적인 열세는 어쩔 수가 없었다. 팔과 다리에 매달리는 팔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뿌리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점점 속도가 느려지고,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탓에 리 샤오의 몸은 점점 아래로 기울었다. 그런 몸 위로 병사들이 체중을 실어 눌렀다.
“놔.”
수십 명의 병사들에게 깔린 상태에서도 리 샤오는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일단 물에 뛰어드는 것은 막아야겠다 싶어 달려들었지만 뒤늦게 정무총감을 이리 깔아뭉개도 되는 것인가 걱정이 되어 살짝 힘을 빼려는 병사를 향해 카이가 경고했다.
“사정 봐주지 마. 적당히 사정 봐주면서 해도 될 상대가 아니야.”
사실 지금도 리 샤오가 패기를 개방하지 않아 이리 막을 수 있는 것이지, 아니었다면 이 인원만으로 물속으로 뛰어드는 리 샤오를 막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혹여 물에 빠진 화수에게까지 그 화가 미칠까 봐 참는 것이리라. 하지만 사실 화수는 이미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 이곳에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그런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지금 리 샤오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놓으라고!”
산처럼 쌓인 병사들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이쯤 되었으면 자신들은 나서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던 병사들마저 놀라 달려들었다.
“카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니 카이도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책임을 질 각오는 이미 한 상태였다. 카이의 시선이 교각 아래를 향했다. 시커먼 흙탕물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불어나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그러는 와중에도 무심한 비는 더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었다.
* * *
“하류까지 샅샅이 수색 중입니다만,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하류도 유속이 빨라 시신이 떠오르려면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알겠다.”
힐끗, 뒷좌석을 확인한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에 팔을 괸 채 상체를 굽히고 있는 탓에 리 샤오의 표정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계속해서 상황은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사무관이 물러나 쏟아지는 빗속으로 사라졌다.
시야가 어두웠다. 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색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마냥 쏟아지고 있는 비처럼. 사실 물에 떠내려간 시신을 찾으려면 비가 그치고 물 수위가 낮아진 다음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물론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 알면서, 그럼에도 이 무의미한 수색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나마 이 무의미한 수색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리 샤오가 저리 가만히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본능만 남아 있는 짐승같이 날뛰던 리 샤오가 다시 이성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분한 목소리로 남아 있는 모든 병력을 투입시키라고 수사를 지시한 것도 리 샤오였다. 제가 아는 대장은 극한 상황일수록 더 침착해지는 사내였다. 하지만 그리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음에도 카이는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폭풍이 휘몰아치기 직전, 모든 것이 숨을 죽이듯 고요해지는 그 잠깐의 평화 같아서.
뚝뚝뚝, 적막한 침묵을 채우는 건 그의 머리에서,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내는 소리뿐이었다.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인 건 카이뿐만은 아니었던 모양. 운전석에 앉아 있던 운전병이 손가락으로 목 칼라를 당기는 것이 보였다. 카이도 마찬가지였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마른침을 삼키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공기가 무거웠다. 숨 막히는 침묵을 견디다 못한 카이가 입을 열었다.
“가서, 수건을, 가져와.”
태연한 척했지만 실은 입안이 바싹 말라, 띄엄띄엄 단어를 내뱉는 것도 겨우 했다. 그의 지시에 운전병이 살았다는 기색으로 거의 튀어 나가듯 운전석을 박차고 나갔다. 수건을 가지러 가면서 정작 본인은 내리는 비를 막을 우산도 쓰지 않고 달려간다. 그 뒷모습을 보며 카이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 때였다.
“카이.”
차에 올라탄 뒤로 내내 침묵하고 있던 리 샤오가 입을 연 것은.
“예.”
소리를 내지 않고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혹 아니었던 건가. 카이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이유는 아니었던 모양.
“녀석이, 떨어지기 직전에.”
“…….”
물론 완전히 안심할 수도 없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쳤거든.”
“…….”
“그 새끼가 휘두르는 칼에 찔렸는데, 그런데 그 순간조차, 녀석은 내가 다가오는 걸 거부했어.”
“…….”
아. 그제야 리 샤오의 반응이 늦었던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제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새끼보다, 내가 더 싫었던 걸까?”
“…….”
그리 묻는 리 샤오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나한테 붙잡히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는 걸 선택할 만큼?”
“…….”
사실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결론은 나 있었으니까. 리 샤오가 툭, 하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
“지금 한 얘기는 잊어버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내내 침묵하던 카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화수 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성격은 아니시니까요.”
“…….”
상대의 성질을 돋워서 죽임을 당하면 당했지, 절대 제 발로 순순히 자살을 하거나 할 성격은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렇다고 위안을 얻은 표정은 더더욱 아니었다. 사실 당연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고 해서 화수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무표정으로 앉아 있던 리 샤오가 가만히 몸을 뒤로 젖혔다.
그딴 게 무슨 상관인가.
모든 것이 다 부질없어진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말라빠진, 그 새하얀 얼굴이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렸다. 씨발. 짜증스러운 기분에 눈을 감자 이번엔 마지막 순간, 진심으로 자신을 밀어내던 그 새까만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미칠 것 같았다.
“시체라도 찾아서 데려와.”
녀석은 제 것이었다. 죽었다 하더라도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거부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아무리 녀석이 거부해도 이번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설사, 신이라 하더라도.
그리 생각하니 날뛰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물론 아주 티끌만큼의 차이였지만, 그럼에도 숨은 쉴 수 있었다. 리 샤오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아직은, 할 일이 남아있었다.
* * *
“여깁니다!”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던 비가 잦아진 건 그로부터 이틀이 꼬박 지난 뒤의 일이었다. 흙탕물은 여전했지만 유속이 느려진 덕분에 하류에 시체 한 구가 떠올랐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카이가 나섰지만 리 샤오의 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앞을 가로막은 카이를 제치고 리 샤오는 이미 저만치 가버린 뒤였다. 그런 리 샤오를 뒤따르는 카이의 걸음도 빨라졌다. 직접 달려온 리 샤오를 본 병사가 당황해서 경례하는 것도 잊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덮어놓은 멍석을 들췄을 뿐이다.
윽.
뒤따르던 카이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비해 오랜 시간 물속에 있었던 데다 습한 날씨에 잔뜩 부패한 시신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흉측했지만 무엇보다도 냄새가 지독했다. 죽은 시신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많이 보았던 카이조차 얼굴을 찌푸릴 만큼 상태가 최악이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고개를 돌리지도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가만히 시신을 확인한 뒤 들췄던 멍석을 다시 덮었다.
화수가 아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리 샤오는 멈췄던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내내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시체라도 찾아오라, 그리 말했으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것을.
시신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손끝에 그제야 조금 피가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만약 저기 누워 있는 것이 녀석이었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피가 식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생각하지 마. 아무것도.
날뛰려는 감정들을 억지로 눌렀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외면하기로 했다. 리 샤오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그 역시도 어쩔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기분이었으므로.
“어떻게 할까요.”
“소지품만 확인하고 가족에게 연락해.”
이미 저만치 가버린 리 샤오를 눈으로 좇으며 카이가 병사가 묻는 질문에 답했다. 하지만 병사의 난감한 표정은 여전했다.
“형제자매는 없고, 얼마 전 아버지도 사망해 연고가 없는 모양입니다.”
“식솔들은.”
“…….”
가만히 고개를 내젓는 반응에 뒤늦게 이 사내가 부리던 이들을 얼마나 악랄하게 괴롭혔는지가 떠올랐다. 홍위라는 사내의 집안 조사를 지시하고 보고한 것이 카이였다. 그래도 인간인데 시신을 수습해줄 사람 하나 없는 삶이라니. 어지간하다 싶어 절로 혀가 차졌다.
“뭐, 알아서 처리해.”
“예.”
무연고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화장되어 이름도 없는 곳에 비석도 없이 뿌려지리라. 불쌍하기도 하지만 사실 천만다행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은 화수 때문에 리 샤오가 다른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시신이 멀쩡하게 묻히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테니까. 물론 그것이 과연 리 샤오에게도 다행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리 샤오가 그렇게라도 분노를 풀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카이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다른 시신은.”
이미 리 샤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내내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물론 돌아온 것은.
“전혀, 흔적조차 없습니다.”
“…….”
라는 대답.
“옷가지나 하다못해 신고 있던 신발이라도 나올 법한데, 그런 것 하나 없으니. 신기할 지경입니다.”
“혹,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멀쩡한 상태로 떨어진 이도 저 지경인데 손이 묶인 상태로는, 거의 가망이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카이 역시 물으면서도 가능성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말대로 손까지 묶여 있었으니, 더더욱. 하지만 그것을 다 알면서도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는 상대가 화수이기 때문이었다. 그라면 죽여도 죽지 않고 태연히 살아 돌아올 것 같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아무리 운이 좋은 사내라도 이번만큼은 운으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카이가 쓰게 웃으며 멍석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시커먼 손을 발로 툭, 차 넣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 * *
“결재 서류들입니다.”
책상 한켠에 차곡차곡 쌓이던 서류철이 어느새 바닥에도 그만큼의 높이로 쌓여 있었다.
“이쪽은 정말 급한 서류들이라.”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이 무색하게도 리 샤오는 별다른 말 없이 서류철을 펼쳐 이름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예산안부터 국책사업들까지, 이제 정무총감이 된 리 샤오의 결재를 기다리는 사안들이 차고 넘쳤다.
슥슥슥.
날카로운 펜촉이 종이 위를 유영하듯 움직였다. 사각사각, 결 좋은 종이에 펜이 긁히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화수가 사라진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아니,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했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리 샤오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처음 화수를 따라 물속으로 뛰어들려고 날뛰었던 것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차분했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아무리 마음에 든 상대라 해도, 사실 죽어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사람의 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본래도 없는 말이 평소보다 더 없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카이는 리 샤오에게 그 사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 커다란 나무가 죽을 땐 속부터 썩어들어간다는 걸 미처 몰랐다.
“이것.”
리 샤오가 이름을 적어 넣은 서류철들을 한쪽으로 옮겨놓던 카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툭. 책상 위에 놓인 것은 권총이었다. 선물은 아닐 테고.
“뭐지?”
다소 뜬금없이 등장한 총을 응시하며 리 샤오가 물었다.
“홍위라는 사내가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
“조심스럽게 추측해보건대.”
“…….”
“혹, 화수 님이 이 총을 본 것이 아니었을까요.”
“…….”
“그래서, 리 샤오 님께서 다가오시는 걸 거부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위로가 되길 바랐다.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어쩌면 리 샤오가 위험에 빠지는 걸 막으려고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는, 그런 나름의 위로였다. 하지만 그런 카이의 추측을 듣는 리 샤오의 표정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갈 뿐, 전혀 기분이 나아지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괜한 소리를 했구나, 뒤늦게 깨달은 카이가 황급히 말을 뒤로 물렸지만 소용은 없었다. 리 샤오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한 번 더 고개 숙여 사과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누구 총인지 알아봐.”
내내 닫혀 있던 입술이 열린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덕분에 그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고 말았다.
“예?”
그래놓고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리 샤오는 그런 카이의 반응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 망해 거렁뱅이가 된 주제에, 어디서 이런 총을 구했는지 궁금하군.”
“…….”
이번엔 심지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커졌던 눈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미 리 샤오는 다음 서류철을 집어 펼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을 홍위라는 사내에게 주고, 모든 것을 꾸민 이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리도 번번이 코앞에서 놓치던 녀석을, 그런 거렁뱅이 새끼가 우연히 붙잡았다는 것이 어쩐지 이상하잖아.”
“……짐작되는 인물이 있으신 겁니까.”
“그 녀석들을 발견한 이가, 왜 하필 룽오 부장이었을까.”
“…….”
하도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다.
“들고 있는 칼 하나가 고작입니다. 총감께서 칼 정도도 어찌 못 할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괜히 놈을 자극해서 인질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지금은 적당히 맞춰주는 편이 낫습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카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하지만 정작, 리 샤오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처음, 거슬릴 때부터 없애버렸어야 했는데.”
“…….”
“너무 하찮아서 그냥 두었더니, 역시나 주제도 모르고.”
“…….”
“뭐 해?”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리던 리 샤오가 책상 위에 놓인 권총을 집어 내밀었다.
“안 가져가?”
“예.”
황급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권총을 건네받은 뒤에도 카이는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왔던 리 샤오의 모습 중에서 가장 차분하고 담담한데도, 이상하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상한 말이지만 제가 아는 리 샤오가 아닌 것 같았다.
슥슥, 이름을 적어 넣던 리 샤오가 고개를 들었다.
“왜.”
“아닙니다. 그럼 알아보지요.”
그제야 카이도 발길을 돌렸다. 어쨌든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카이가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 * *
병신 같은 놈.
룽오 부장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그냥 꺼내서 쏘기만 하면 되는 걸. 그 쉬운 걸 못해서 죽어 나자빠지다니. 앉아 있던 룽오 부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걸음에서 초조함이 배어났다.
더 짜증스러운 건 리 샤오의 반응이었다.
제 새끼까지 밴 화수가 제 눈앞에서 죽어버렸는데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리 샤오가 이성을 잃었던 건 그날 잠깐이었을 뿐, 이내 이성을 찾고 오히려 평소보다 더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차피 죽어버린 것을 어쩌겠나 싶은 것이겠지. 냉혈한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묘하게 제 예상과 어긋나는 일련의 상황들이 다소 찝찝했다. 일을 꾸민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예상한 범주 내에서 상황이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전혀, 오히려 너무 예상 밖으로만 전개되니 별다른 일이 없어도 좀처럼 안심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 어차피 그놈과 자신을 연결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말을 연신 중얼거린다. 사실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홍위에게 쥐여 주었던 총도 미리 은밀한 경로를 통해서 구해놓은 것이었다. 그러니 걱정할 것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리 샤오라도 증거도 없이 경무부장인 자신을 어쩌지는 못할 테니까. 그렇게 되뇌면서도 자리를 왔다 갔다 하는 룽오 부장의 눈의 초점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때였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병사들 뒤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카이였다.
“이 무슨 무롄가, 카이 사무관?!”
흔들리던 룽오 부장의 눈동자가 선명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리되니 오히려 잘되었다 싶었다. 막연히 불안해하고 있는 것보다는 이 기회에 이번 일이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확실히 해두는 편이 더 낫겠다는 계산이 선 덕분이었다.
“감히 내 방에 무장한 병사들을 대동하고 들어와?”
“저는 그저 체포명령에 따르는 것뿐, 개인적인 사감은 없습니다. 조용히 따르시면 저들이 나서는 일은 없을 겁니다. 피차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내키지 않으니까요.”
“체포명령?”
단순히 경위조사도 아니고, 체포명령이라는 말에 룽오 부장의 당당하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무슨 연유로, 감히 경무부장을 체포한단 말이야?”
“연유는 본인이 제일 잘 아실 텐데요.”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남창새끼가 죽은 일과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관련이 있다면 증거를 가져오든지.”
당연히 화수 때문이라 여겨 당당하게 받아쳤다. 하지만 정작 상대인 카이는 룽오 부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반응.
“저야말로 무슨 오해를 하신지 모르겠지만, 굳이 궁금해하시니 고지해드리자면 경무국장 독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시는 겁니다.”
“……뭐?”
이번만큼은 아무리 표정을 숨기는 데 도가 튼 룽오 부장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카이의 입에서 나온 사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경무국장 독살 사건이라니. 그게 대체 언제 적 사건인데. 이번 사건에 대해서만 변명을 준비했기에 예상치 못한 기습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더듬더듬 겨우 말을 내뱉고는 있었지만 사실 룽오 부장도 자신이 무슨 변명을 내뱉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에 반해 그런 반응쯤은 모두 예상했다는 듯 카이가 내뱉는 말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실종되었던 정무국장님의 비서를 다시 찾아내어, 룽오 부장께서 시킨 일이었다는 증언을 확보해서 말입니다.”
“……모함이야. 이건 모함이라고!”
“모함인지 아닌지는, 취조를 해보면 나오겠지요. 길면 하루, 짧으면 한나절이면 본인 잠자리 사정까지 나불대게 만드는 정무국 내 취조실이 아닙니까.”
“…….”
싸악, 룽오 부장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까딱. 카이의 신호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룽오 부장에게로 다가갔다.
“잠깐, 잠깐! 독약을 쓴 건, 분명, 화수, 그 남창새끼였다고! 약을 처방해줬다는 의원도-”
거기까지 비명 같은 변명을 늘어놓던 룽오 부장이 이내 말을 멈췄다. 제 말을 뒷받침해줄 그 의원은 이미 죽었다는 걸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오래전 일이고, 확실하게 처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적어도 화수가 범인이라는 의심은 떠넘겼으니 되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뒤처리가 제대로 되었는지 꼼꼼히 확인하지 않았던 것도 기억이 났다.
“죽었지.”
말을 하다 말고 굳어 있는 룽오 부장을 대신해 말을 마무리 지어준 이는 카이가 아니었다. 이질적인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리 샤오를 중심으로 홍해가 갈라지듯 저절로 길이 났다. 다가오는 그를 보는 룽오 부장의 눈이 점점 커졌다. 눈동자에 담긴 공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타고나길 약삭빠르게 타고난 본성으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총감, 아무래도 뭔가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는 모양-”
휙.
리 샤오가 무심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툭. 변명을 늘어놓던 룽오 부장이 기묘한 소리에 고개를 바닥으로 내렸다. 바닥을 나뒹구는 손목을 보고서야 그것이 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으아아악-!”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카이가 빠르게 옷을 벗어 그의 팔을 감쌌다. 순식간에 상의가 검붉은색으로 젖어들고, 다 머금어지지 못한 피는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우웩.
그의 팔을 잡아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뒤집어썼던 병사가 아연실색해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이내 바닥을 뒹구는 손을 보고 결국 속의 것을 게워냈다. 다들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확 풍기는 피비린내와 꾸역꾸역 떨어지는 핏물을 보고 태연할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꼭 말로 하면 못 알아 처먹지.”
표정변화가 없는 것은 리 샤오뿐이었다. 검을 휘두를 때도, 손목을 잘라내버린 지금도, 리 샤오의 표정만 봐서는 방금 전 타인의 손목을 잘라낸 사람이라고는 결코 짐작할 수 없을 터였다.
“아쉽지만, 혀를 잘라버리면 대답을 할 수 없을 테니까.”
아니었다면 혀를 잘라버렸을 텐데. 아쉽다는 말을 태연히 내뱉는 리 샤오에 룽오 부장의 몸이 벌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솔직히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전장에서 이름 꽤나 날렸다고 해도 어차피 전투를 지휘한 것이 고작일 테고 실제로 대면한 리 샤오는 상대를 힘으로 억누르지도, 집안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지도 않았으니까. 상대가 점점 만만해졌고, 그런 리 샤오가 너무나 손쉽게 정무총감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것이 배알이 꼴렸다. 아직도 국장 대행인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더더욱.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운이 좋군.”
휙, 칼을 가볍게 털어낸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칼에 묻어 있던 붉은 피가 바닥에 죽 그어졌다.
“물어볼 것이 아주 많아서 말이야.”
피를 뒤집어쓴 채 씽긋 웃는 리 샤오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 같았다. 그제야 룽오 부장도 자신이 리 샤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미 잘려나간 손목처럼,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 * *
“여기.”
카이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물론 리 샤오도 손수건이 있겠지만 튄 피를 닦지도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을 보다 못해 꺼내 들었다. 평소 리 샤오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제 이 정도는 신기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흘낏, 닫히는 문틈으로 이미 이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저 거대한 고깃덩어리처럼 보이는 룽오 부장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카이가 물었다. 한나절을 버티지 못한다는 룽오 부장의 장담처럼 묻지도 않은 것까지 스스로 다 털어놓는 데에는 몇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모든 것을 순순히 털어놓는다고 심신이 편해지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대를 이리 잔인하게 대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만큼 원한이 깊다는 의미겠지만.
“살려둬.”
손가락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리 샤오의 입에서 흘러나온 명령은 조금 의외의 것이었다. 당연히 처리해버리라는 명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의아해하는 카이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뒷말이 덧붙여졌다.
“온몸이 썩어 문드러져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게 둬.”
“예.”
그제야 납득한 카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오는군.”
계단을 올라오기 무섭게 들려온 소리는 빗소리였다. 투둑 투둑, 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피비린내가 더 짙어졌다 했더니 습도가 높아진 탓이었던 모양. 복도를 가로지르던 리 샤오의 걸음이 멈췄다. 시선이 향한 곳은 커다란 창이었다. 쏟아지는 비를 보는 표정이 무심했다. 얼굴에 튄 핏자국만 아니면 조금 전 지하실에서 일어난 일들은 꿈이라도 꾼 것인가 싶을 정도로 무심한 얼굴이었다. 카이 역시도 그 시선을 따라 창밖을 응시했다. 이제는 빗방울이 아니라 위에서 물을 들이붓듯이 창을 따라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수색은.”
“예?”
이번에도 질문은 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덕분에 내용을 인식하는 것이 조금 늦었다.
“녀석을 찾는 건 어떻게 되고 있냐고.”
“그게, 아직, 보고 들어온 것이 없습니다.”
사실 이제는 시신을 찾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던 터라, 카이도 답지 않게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덧붙였다.
“수색 인원을 좀 더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다행히 리 샤오는 그런 카이의 당황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시선은 비가 내리는 창밖에 둔 채 리 샤오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아마, 지금은 찾기 힘들 거야.”
“…….”
“녀석은 비를 싫어하니까.”
순간, 카이의 눈매가 좁혀졌다. 불안했지만 차마 제 입으로는 묻지 못한 것을 흘낏 뒤를 돌아본 리 샤오가 말했다.
“왜. 내가 정신이라도 놓은 것 같아?”
“아닙니다.”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지만 솔직히 순간적으로 그런 건가 싶었다. 피식, 하고 리 샤오가 웃는 것을 보고서야 그제야 그 말이 중의적인 표현이었음을 알아차렸지만 조금 전에는 정말로 등줄기가 오싹했다.
“카이.”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리 샤오가 가만히 카이의 이름을 부른 것은. 물론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다.
“예.”
“…….”
“말씀하십시오.”
저를 불러놓고 정작 아무 말이 없는 것을 제 대답을 듣지 못해서라고 여긴 카이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더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등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 녀석 말이야.”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불쑥, 내뱉는 말에 카이도 긴장했다.
“어떻게, 생겼었지?”
“……예?”
요즘의 리 샤오는 늘 예상 가능한 범주를 벗어났지만 이런 물음이 되돌아올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덕분에 딱딱하게 굳었던 어깨가 내려앉았지만 난감한 기분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경도를 더했을 뿐.
“마지막 순간, 마주쳤던 그 눈동자는 너무 선명한데.”
“…….”
“녀석 얼굴이, 생각이 안 나.”
“…….”
“녀석이 어떻게 웃었는지, 아니, 녀석이 나를 보고 웃은 적은 없었나?”
“…….”
“뭐, 건방진 표정이나 화가 난 표정이라도, 적어도 그때 그 나를 거부하는 눈동자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떠올리고 싶은데, 왤까. 왜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걸까.”
“…….”
이상하다는 듯 나직이 중얼거리는 리 샤오에 카이는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리 샤오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다. 더 이상 리 샤오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느새 어두워진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창을 두들기는 빗소리만이 적막한 복도를 가득 채울 뿐이었다.
* * *
“누구야.”
장지문 너머로 기척을 알아차린 리 샤오가 몸도 돌리지 않고 나직이 묻는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 카이.”
드륵. 들어오라, 허락의 말은 없었지만 장지문이 열렸다. 막 입고 있던 제복을 벗고 침의로 환복한 리 샤오가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확인하듯 물었다.
“찾은 거야?”
“그런 것은 아니고.”
뒤늦게 리 샤오의 오해를 알아차린 카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제야 조금 숨 쉬는 것이 편해졌다.
“그럼?”
다른 보고할 거리가 있는 건가. 제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집사도 아닌 카이가 이리 온 것을 보면 당연히 그런 이유겠거니 싶었다.
슥.
무심코 묻는 리 샤오의 앞에 뭔가가 내밀어졌다. 그것을 확인한 리 샤오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사실 받은 지는 좀 되었는데, 당시에 이걸 드릴 상황이 아니어서.”
변명처럼 중얼거리는 카이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사진 몇 장.
몇 달 전 의상실에서 리 샤오의 생일을 기념해 찍었던 사진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을 굳이 지금 이리 리 샤오에게 가져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셔서.”
당시에 억지로기는 했지만 화수도 사진을 찍었고, 당연하게도 그 모습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가 내민 사진의 맨 윗장에 잔뜩 긴장한 표정의 화수가 찍혀 있었다.
“이렇게, 생겼었나.”
사진을 받아 들지도 못하고 한참을 보고만 있던 리 샤오가 툭, 하고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 하지만 리 샤오의 시선은 사진에서 떨어질 줄은 몰랐다. 이렇게 생겼었구나.
눈이, 코가, 입술이, 그제야 겨우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런 리 샤오의 반응을 카이는 다르게 이해했다.
“긴장하셔서, 표정이 굳어, 낯서실 겁니다.”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었다. 세상 무서운 것이라고는 없는 듯 굴던 녀석이. 어린아이처럼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믿고 있는 것이 퍽 기가 막혔다. 그땐 그저 골려줄 생각으로 억지로 찍게 했는데, 그것이 이리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다.
사실 그 표정이 낯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게는 낯익은 표정이었다. 저를 볼 때 녀석은 늘 그런 표정이었으니까. 싫은 사람이니 당연했다. 그런 주제에 제 앞을 잘도 얼쩡거렸지만. 무심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건 좀 더 익숙하실 겁니다.”
그리 덧붙이며 카이가 들고 있던 사진뭉치에서 다른 사진을 꺼내 들었다. 리 샤오의 눈이 조금 커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이땐 그래도 긴장이 좀 풀리신 모양이니까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
그러니까 리 샤오와 화수가 나란히 앞을 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카이는 그 표정이 더 익숙할 것이라고 했지만 리 샤오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리 샤오의 시선이 사진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이유였다.
“웃을 줄도 아네.”
다소 긴장하긴 했지만 분명, 웃고 있었다. 화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 버석버석한 모래가 비벼지는 것처럼 목 언저리가 아팠지만 리 샤오는 눈도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사진 속 화수를 응시했다. 마치 눈을 떼는 순간, 그 얼굴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이리, 웃는 건 못하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제 옆에서, 이리 웃고 있었단 말이지. 물론 녀석의 웃음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사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 사진을 보고서야, 저는 녀석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웃음을 보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럴 리가요.”
보다 못한 카이가 입을 열었다.
“제가 볼 땐, 늘, 웃고 계셨는걸요.”
이상하다는 듯 덧붙였지만, 카이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본 것은 등 돌린 리 샤오를 보는 화수의 얼굴이었음을. 물론 그것을 깨달았다고 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지만.
* * *
“……님.”
누군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겹 막이 씌워진 듯 감이 멀던 목소리가 선명해진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리 샤오 님?”
그제야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감았던 눈을 뜨자-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도 그제야 자각했다- 곧바로 보인 것은 딱딱하게 굳은 카이의 얼굴이었다.
“왜.”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그제야 카이도 굳었던 어깨를 늘어트린다. 평소라면 차가 멈추었을 때 눈을 떴을 텐데, 먼저 내린 카이가 뒷문을 열고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를 때까지도 반응이 없었다. 덕분에 좀처럼 놀라는 일이 없는 카이가 이리 기겁한 얼굴을 하게 만들었다는 걸 리 샤오가 알 리 없었다. 물론 리 샤오에게 그런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으니 가만히 중얼거리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깊이, 잠드셨던 모양입니다.”
“내가?”
하지만 정작 리 샤오는 카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지만 카이도 더는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는 리 샤오의 앞을 가로막지 않도록 가만히 한 발 뒤로 물러섰을 뿐.
“오셨습니까.”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던 집사가 계단을 오르는 리 샤오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그런 집사를 보는 리 샤오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마중은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
정확히 그만두라고 한 시점이 언제였는지 모르지 않는 터라, 집사가 황급히 변명을 덧붙인다.
“부러 나와 있던 것은 아니고, 정원 정리를 위해 나와 있던 차에 차 소리가 나서 나와본 것뿐입니다.”
“…….”
집사의 굽은 어깨가 더 웅크러졌으나 리 샤오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더 이상 그리 두는 것은 내키지 않았던지 리 샤오가 말없이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제야 허리를 굽히고 있던 집사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뭐지?”
하지만 정원을 가로지르던 리 샤오의 걸음이 다시 멈췄다. 정원 구석에서 뭔가를 태우고 있는 시종들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지나쳤을 집안일에 리 샤오가 관심을 보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 쓰레기를 태우는 중입니다.”
그 때였다. 불쑥, 리 샤오가 가던 방향을 튼 것은.
“도련님?”
당황한 것은 그를 따르던 집사뿐만이 아니었다. 단숨에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리 샤오에 시종들도 당황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 이내 일렬로 서서 주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리 샤오의 시선은 전혀 그들에게 닿아 있지 않았다. 물론 고개를 푹 숙인 이들에게는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는 선명하게 귀에 들어와 박혔다.
“도련님?!”
영문도 모르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그들 역시 기겁해서 소리를 내지른 집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리 샤오가 맨손으로 자신들이 태우던 옷가지를 꺼내고 있었던 것. 눈이 휘둥그레지고 얼굴 위로 경악의 빛이 번졌다. 눈으로 보면서도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제가 꺼내겠습니다.”
말릴 새도 없었다. 설사 그럴 틈이 있었다고 해도 리 샤오를 말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카이의 만류에도 리 샤오는 불 속을 헤집고 있었다.
“뭣들 하고 있는 게야, 어서, 불을, 불을 끄지 않고!”
집사의 명령에 멍청하게 서 있던 시종들도 그제야 모닥불로 달려들었다. 물을 떠 올 정신도 없어 발로 밟거나, 주변의 흙을 퍼 덮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은 다행히도 빠른 속도로 꺼졌다.
순간 찾아온 적막. 모두의 시선은 리 샤오에게 닿아 있었다.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듯 다들 경악한 표정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리 샤오는 태연했다. 결코 그 표정만 봐서는 방금 불 속에 손을 집어넣은 사람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누구야.”
아연실색해 있는 이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도 리 샤오였다.
“누가 멋대로 내 물건에 손을 댔지?”
묻는 목소리는 여상했지만, 다들 서로 시선만 주고받을 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사실 이곳에 감히 리 샤오의 물건을 멋대로 손을 댈 수 있는 이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자신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하면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점점 공기가 희박해지는 듯해 숨 쉬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접니다.”
결국 제 발로 나선 것은 집사였다.
“제가, 치우라 명했습니다.”
아. 카이의 눈매가 일그러진다. 그제야 카이도 리 샤오의 손에 들린 타다 만 옷가지의 주인이 누군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연했다. 이미 불에 반쯤 타서 시커멓게 변한 것을 단번에 알아본 게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허나 곁에 죽은 사람의 물건을 너무 오래 두면, 좋지 않습니다.”
사실 치워두라고 하기는 했지만 태워버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전해지는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모양. 허나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내내 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시기를 잡지 못해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놓은 집사였다. 물론 썩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집사.”
“예.”
“오늘부로 해고야.”
“……예?”
물론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귀로 들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되묻는 집사를 그저 둔 채 리 샤오는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조금 커졌던 주름진 눈매가 이내 천천히 주저앉는다. 뒤쫓아 가지는 못하고 그 뒷모습을 눈으로만 쫓는 집사를 향해 카이가 한마디 덧붙였다.
“홧김에, 한 말이실 겁니다.”
“…….”
무표정한 얼굴로 툭, 하고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말이 그냥 화가 나서 내뱉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집사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평생을 보아온 리 샤오였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그런 말을 홧김에 내뱉을 성격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무릎이 꺾이는 기분.
“그나저나, 손부터 확인을 해야 할 것인데.”
하지만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으면서도 집사는 리 샤오의 손에 난 상처를 걱정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있어 멀쩡해 보였지만 불 속에 집어넣은 손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일단, 제가 가보겠습니다.”
손도 손이지만, 사실 리 샤오 자체가 걱정스러운 카이였다. 카이 역시 빠르게 집 안으로 리 샤오를 따라 사라졌다.
“집사어른!”
뒤늦게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는 집사를 시종들이 황급히 부축했다.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했다.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이 집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는 집사였으니까.
하지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괜찮은 줄 알았다. 보기엔 너무나 멀쩡해 보였으니까. 오히려 지난번 화수가 창고에 갇혔을 때보다도 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괜찮을 리가 없는데. 그것을 왜 몰랐을까. 집사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할 말을 잊지 않았다.
“어서, 가서, 홍 의원을, 오시라 해.”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아도,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태연히 불 속에 손을 집어넣던 리 샤오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카이는 장지문을 열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아니, 적막하다는 말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리 샤오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타다 만 옷가지는 가지런히 개켜져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것에서 그는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리 샤오는 가만히 가라앉고 있었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한 속도로. 그것을 어떻게 멈춰야 할지, 카이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손 좀 보여주십시오.”
우선은, 겉에 난 상처부터.
“집사어른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차가운 물을 담아놓은 대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개켜놓은 화수의 옷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리고 리 샤오의 손을 가져와 살폈다. 다행히 리 샤오는 거부하지 않고 카이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손을 내주었다. 사실 내주었다기보다는 멋대로 하게 두었다는 쪽이 더 맞았지만.
“아프지도 않으십니까.”
사실 예상했던 것보다는 괜찮았지만, 시뻘건 손바닥에는 징그러울 정도로 수포가 잔뜩 일어나 있었다. 처음엔 자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을 텐데. 카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정작 당사자는 시종일관 무표정이다.
“글쎄.”
무심한 얼굴로 제 손바닥을 보는 얼굴이 꼭 이게 왜 이리된 것이지, 하는 표정이었다. 카이의 눈매가 더 가늘어졌다.
“담그고 계십시오.”
손등에 난 상처가 겨우 아물어간다 싶었더니. 낮은 한숨을 내쉰 카이가 잠시 입을 닫았다.
“진심은 아니셨지요.”
언제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 꺼낸 말이었다. 적어도 이번엔 무슨 소리냐는 반응은 아니었다.
“이 집이 집사어른이 평생 지낸 곳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리 샤오 님.”
“카이.”
“예.”
“시끄러워.”
“……죄송합니다.”
나직이 내뱉는 그 말에 카이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시끄러워. 그리 내뱉는 말이 단순히 집사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만이 아님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 샤오는 지쳐 있었다. 나직이 내뱉은 그 목소리가, 모래알처럼 버석버석했다. 사흘 밤낮을 멈추지 않고 계속된 전투에서도 이리 지친 기색은 본 적이 없었다.
공기가 무거웠다. 단순히 장마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 * *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불쑥, 예고도 없이 들려온 소리에 집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름 기척을 숨긴다고 숨겼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리 샤오가 유난히 타인의 기척에 예민한 탓이겠지만.
“죄송합니다.”
어차피 들킨 것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집사가 앞으로 나섰다. 나직이 들려온 리 샤오의 목소리가 그리 날이 서 있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식사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몸상하십니다.”
“…….”
하지만 정원 쪽을 향한 시선이 이쪽을 향하는 일은 없었다. 집사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벌을 서는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던 집사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늙은이가 노망이 났던 모양입니다.”
“…….”
“아무쪼록, 너그럽게-”
“집사.”
“……예.”
내내 말이 없을 땐 뭐라도 한마디 해주기를 바랐는데, 막상 이름이 불리고 나니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연신 눈치를 살피는 집사에게 리 샤오가 툭,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먹어도 될까.”
“…….”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라 순간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 있으려니 리 샤오가 다시 묻는다.
“안 되나?”
“그럴 리가요. 얼른 가서, 차려오겠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집사가 뒤늦게 고개까지 크게 내저었다. 집사의 얼굴 위로 화색이 번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예.”
뭐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덧붙이는 리 샤오에 무심코 집사가 되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집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멋대로 죽이지 마.”
“…….”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멋대로, 죽을 녀석도 아니지만.”
“……죄송, 합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집사가 한 박자 늦게 허리를 굽혔다. 듣는 이는 등줄기가 서늘했지만, 정작 리 샤오는 조금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다.
“뭐 해?”
“예?”
“다녀오려던 것 아니었어?”
“예. 예, 얼른, 차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집사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설마. 여즉 화수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멀쩡한 정신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소리 내어 물을 수가 없었다. 혹 다시금 리 샤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까 봐 겁이 났다기보다는, 솔직히 자신의 생각이 맞을까 봐서. 그래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식사부터. 집사가 빠르게 걸음을 내딛었다. 집사에게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하얀 옷을 입고 있던 진주매珍珠梅 나무는 어느새 푸른 잎으로 환복을 한 뒤였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곳을 좋아했었다.
틈만 나면, 이곳에 와서 꽃을 구경하곤 했다. 자신은 그런 녀석을 구경했고.
매화나무라 오해한 듯했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은 이유는 적어도 이 집에 녀석이 좋아하는 것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싶었기 때문이다. 답답해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모르는 척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녀석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리도 초조했던 걸까. 이상하게 녀석만 보면 화가 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초조함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 리 샤오였다.
야아옹.
나무를 올려다보던 리 샤오가 미간을 살풋 찌푸린다. 잘못 본 것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가장 높은 나뭇가지 위에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묘하게 낯이 익었다.
야아옹!
리 샤오가 자신을 발견했다는 걸 녀석도 알아차렸는지 조금 전보다 울음소리가 더 커져 있었다. 투둑, 그 자리를 왔다 갔다 할 때마다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부러지지 않고, 크게 휘어진 채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지만.
탁.
대청마루에서 마당으로 걸음을 내딛은 것은 단순한 변덕이었다. 사실 새끼고양이도 아니고, 애초에 떨어진다고 해서 크게 다칠 만한 높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리 샤오가 그것을 외면하지 못한 이유는 그 낯익은 고양이를 화수가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고양이 밥 좀 챙겨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창고에 갇힌 주제에 정작 고양이 걱정을 하고 있던 녀석이었다.
맨발로 마당을 가로지른 리 샤오가 손을 뻗었다. 구해달라고 울 때는 언제고 정작 가까이 다가가자 경계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선다.
투둑, 뚝, 끝으로 갈수록 가는 나뭇가지가 연신 불안한 소리를 내며 휘더니 녀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카앙!
균형을 잃은 냥이의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쏟아졌지만 다행히 바닥과 조우하는 일은 없었다. 커다란 손이 떨어지기 직전 노란 털복숭이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녀석도 놀랐는지 작은 심장이 마구 뛰었다. 놀라서인지 아직은 얌전한 녀석을 바닥에 내려놓으려는 찰나.
“도련님?”
돌아온 집사가 리 샤오를 불렀다. 사실 집사가 본 것은 맨발로 정원을 나가 있는 리 샤오였지만. 다른 이의 기척에 얌전하던 녀석이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윽.
날뛰던 녀석의 솜방망이에 붕대로 감아두었던 손을 맞았다. 눈매를 일그러트리는 틈에 마치 액체처럼 녀석이 손아귀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손을 움켜쥔 리 샤오를 보고 집사가 놀라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리 샤오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감아놓은 붕대에 붉은 물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집사의 얼굴이 야차처럼 변했다.
“이놈의 고양이 새끼가!”
리 샤오에게서 도망쳐놓고 정작 바로 코앞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털뭉치를 향해 집사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크게 손을 휘두르며 쫓아내려는 집사를 말리고 나선 것은 리 샤오였다.
“밥은.”
그만두라는 말보다 더 빨리, 집사의 움직임이 멈췄다.
“저기, 가져왔습니다.”
대청마루에 놓인 커다란 상을 향해 리 샤오가 걸어갔다. 그런 리 샤오를 따라 집사도 걸음을 옮겼다. 그래놓고 정작 앉지 않고 상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리 샤오에 집사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혹, 드시고 싶으신 거라도.”
하지만 그 순간 대답 대신 리 샤오는 손으로 뭔가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노릇노릇하게 구운 갈치 한 조각.
그걸 왜.
다행히 집사의 의문은 그리 오래지 않아 풀렸다. 대신 집사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집어 든 그것은 마당으로 휙, 하고 던져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노란 털복숭이가 그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그 귀한 것을.”
집사가 안타까워하는 신음을 흘렸지만, 이미 그것을 문 냥이는 담장 위로 도망쳐버린 뒤였다. 조금 전 나무에서 떨어질까 봐 맨발로 달려가 구해준 입장에서는 다소 기가 막힌 상황이었으나 리 샤오는 크게 기분 상한 기색이 아니었다. 분해하는 쪽은 집사뿐.
“네 이놈. 당장 이리 오지 못해?”
살랑살랑, 그런 집사를 놀리듯 꼬리를 몇 번 양쪽으로 움직이던 냥이가 그대로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피식, 등 뒤에서 바람이 이는 소리가 났다. 오랜만에 듣는 웃음소리였다. 순간 굳었던 집사가 고개를 돌린 것은 분한 척 몇 번 더 담장 너머를 향해 씩씩댄 뒤였다. 전혀 갈치가 아깝지 않았다.
* * *
타닥.
장지문에 기대 있던 화수가 고개를 앞으로 쭉 뺐다. 그러고는 이내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이건 또 어디서 훔쳐왔어.”
입에 물고 있던 커다란 갈치 조각을 화수의 앞에 툭, 하고 내려놓은 나비가 냐아옹 하고 울었다. 누군지 몰라도 오늘 저녁 반찬을 빼앗긴 이에게 애도를 표하는 화수였다.
“난 됐으니까, 너 먹어.”
손사래까지 치는 화수에 그제야 나비도 앞에 놓았던 것을 먹기 시작했다. 저도 배가 고팠을 텐데, 저를 주겠다고 참고 여기까지 물고 온 것이 기특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자랑을 하려고 들고 왔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듯 녀석이 갈치 한 조각을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였다.
“또 또, 밖에 나와 있지.”
순간 등 뒤로 쏟아지는 잔소리에 화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잔뜩 화가 난 여설의 모습이 보였다.
“그냥 좀, 답답해서.”
“찬바람 쐬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의원이!”
변명을 늘어놓아보지만 그런 것이 통할 리가 없었다. 물론 그리 화를 내면서도 여설은 오는 중에 가져온 홑이불을 화수의 어깨에 덮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다 저를 위해 내는 화였다.
“미안.”
그러니 천하의 화수도 어깨를 늘어트리며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야아옹.
어깨를 늘어트리는 화수에 나비가 길게 울었다. 놀리는 것인지, 위로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 * *
끼이익.
굳게 닫혔던 대문이 열렸다. 물론 완전히 다 열린 것은 아니고 사람 하나 지나갈 공간만큼만 삐죽 열린 것이 고작. 그 틈 사이로 먼저 나온 집사영감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고 나서야 뒤따르던 이를 나오게 했다.
‘내일도 이 시간에 오시게.’
그러고는 그의 손에 작은 꾸러미를 쥐여 주며 일렀다. 손으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에, 내내 무표정하던 얼굴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고맙습니다요, 나으리.’
굽은 허리가 몇 번이고 아래로 숙여졌다.
‘인사는 되었으니, 어서 가시게.’
동이 틀 때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는 새벽녘, 지나다니는 이가 있을 시간은 아니었으나 집사영감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재촉에도 노인의 움직임은 느릿느릿했다. 하지만 이번엔 집사도 그것을 타박하지는 않았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봉사였으므로.
탁, 탁, 노인이 손에 쥔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기며 더듬더듬 걸음을 옮기는 것을 지켜보던 집사영감은 이윽고 그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음을 확인하고서야 황급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문이 닫히고 어둠이 내려앉은 뒤로도 탁, 탁, 바닥을 두들기는 메마른 소리는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입단속은.’
힉. 문을 닫고 돌아서던 집사영감이 숨을 삼켰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바로 알아챘으나 어둠 속에서 기척도 없이 서 있는 인영人影에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하지만 집사영감은 불만을 토하기는커녕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단단히, 해두었습니다요.’
그제야 귀신처럼 서 있던 한조도 발길을 돌렸다. 그런 한조의 뒤에 집사영감이 잰걸음으로 빠르게 따라붙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한조가 일렀다.
‘옅게 미음을 쑤어 와. 뭐라도 먹어야 기력을 차리지.’
‘아이쿠, 내 정신 좀 보게.’
한조의 지적을 듣고서야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집사가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쿵쾅거리며 뛰어가는 발소리에도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는 한조였다. 물론 못마땅한 듯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혀 있긴 했지만.
이내 한조의 시선이 반대편 복도 끝을 향한다. 정확히는 그 끝에 있을 방 문이었지만.
[살려줘.]
귀신인 줄 알았다. 물론 지금 몰골이라고 산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핏기라고는 한 톨도 없는 허연 얼굴, 온몸이 흠뻑 젖어 물웅덩이를 만들고 선 모습은, 딱 방금 물에서 올라온 물귀신의 몰골이었다. 그나마 한조가 먼저 봤으니 망정이지 그 모습을 집사영감이 먼저 봤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쓰러져 그대로 저승 문 앞까지 갔을 터였다.
[살려줘, 영감.]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악귀처럼 안광을 번쩍이며 다가온 화수가 한 말은 분명,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미련 같은 건 한 톨도 없어 보이던 녀석이, 그래서 겁이라고는 없이 굴던 녀석이 처음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묘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배 속에 아이가 있어.]
담담히 내뱉는 말이 더 절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한조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가슴이 앓아 내렸다.
[아이는, 아이만이라도, 살리고 싶어.]
내내 아무 대꾸가 없는 한조를 오해하기라도 한 걸까. 화수의 눈동자에 초조한 기색이 번졌다.
[부탁이야, 영감.]
총감이 눈에 불을 켜고 녀석을 찾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도성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녀석 때문에 엉망이 되었던 가게가 겨우 다시 본 궤도를 찾은 것이 채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선 것은 그것이 두려워서도, 망설여져서도 아니었다.
[살려줘, 제발.]
살려달라는 화수의 말이 자신이 아닌, 제 배 속의 아이를 말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이라도 살리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다행이다 싶었지만, 복잡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한조의 복잡한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속삭이듯 애원한 화수가 그대로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화수야!]
툭, 하고 마치 끈이 떨어져버린 인형처럼. 그대로 고꾸라지는 화수를 한조가 끌어안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종잇장 같은 몸이 불덩이였다.
그렇게 쓰러진 화수는 3일 밤낮을 앓았다.
의원은 이 몸으로 이곳까지 제 발로 걸어온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사실 더 큰 기적은 그 난리통에 살아남았다는 것이지만.
다행히 찔린 어깨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대신 여러 군데 긁히고 베인 상처로 안 그래도 얇은 손목이 아주 너덜너덜했다. 모두 밧줄을 끊을 때 생긴 상처였다.
사실 홍위가 내리꽂은 칼은 정확히는 화수의 손목이 아니라 손목을 묶고 있던 밧줄에 박혔다. 그대로 떨어진 덕분에 그 칼로 밧줄을 끊고 탈출할 수가 있었다. 말 그대로 천운이었다.
두 번째 천운은 그대로 떨어져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간 홍위와 달리 화수는 비교적 유한 물살을 타고 내려왔다는 거였다. 이곳 지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늘 어미의 매질에서 도망쳐 숨어 있을 곳을 찾아다녀야 했으니까. 그런 화수에게 장마에 개울물이 넘치지 않도록 따로 내놓은 구멍은, 그리 많은 비가 오지 않을 땐 저를 찾는 어미를 피해 숨어 있기에 아주 최적의 장소였다.
거의 10년은 잊고 있었던 그 구멍의 위치를 화수는 물에 휩쓸려 내려가면서 기억해냈다. 그 구멍의 반대쪽이 어디로 나 있는지도.
반쯤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평소 화수였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했겠지만 지금은 지킬 약속이 있었다.
[여기만 빠져나가면 이건 금방 풀어줄게.]
금방이 너무 오래되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이건 풀어줘야지. 답답하게 꽁꽁 묶인 채 죽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으로 화수는 물살에 쓸려 내려가면서도 최대한 벽 쪽으로 바싹 붙었다.
다행히 그 다음은 예상외로 쉬웠다. 별다른 힘을 주지 않고도 몸은 벽 쪽으로 난 구멍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유속이었다. 안 그래도 시커먼 흙탕물이 더 시커메졌다. 콧속으로, 입안으로 물이 자꾸만 밀고 들어왔다. 숨이 막혔다. 물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제 몸을 움켜쥐고 뒤트는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정말 죽는구나. 처음으로 죽음을 직감한 화수가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
샤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컥.
숨을 토해내는 입안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물구멍의 끝에 도달했다는 걸 깨달았다. 저만치에 낯익은 대문이 보였다. 그 문이 이리도 반갑게 느껴질 줄은 화수도 몰랐다. 벽을 짚고 올라섰다.
주륵, 주륵, 물에 젖은 신발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결국 그것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벽을 탔다. 맨살이 날카로운 돌에 마구 쓸렸지만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에 어서 저곳으로 몸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뚝뚝, 온몸에서 물이 떨어졌다.
물론 그것이 제 몸에서 떨어지는 물인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인지 구별할 수 없었지만. 점점 발걸음이 빨라졌다. 할 수만 있으면 달려갔을 것이다. 절뚝이는 발이 답답했다.
화수가 문에 바짝 다가섰다. 일하는 식솔들이 드나드는 쪽문이었다. 본래는 그 문 역시 단단히 잠겨 있어야 하지만 초저녁잠이 많은 집사영감이 문단속을 자주 깜빡한다는 것도 화수는 잘 알고 있었다.
문고리를 살짝 당겼다가 다시 밀었다.
끼-잉.
밀리는 진동에 화수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린아이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공간이었지만 화수는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숨까지 멈춘 채 문을 닫고 돌아선 순간, 화수의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너.]
한조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니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필이면. 적어도 집사영감이길 바랐는데. 그랬다면 하루 정도는 몰래 숨어 있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물러설 수도 없었다.
여기에서 쫓겨나면 더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매달렸다.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솔직히 그러면서도 한조가 자신을 도와줄 거라는 기대는 사실 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니까. 그저 마지막 발악 같은 거였다. 적어도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었다. 거절당하는 것이 싫어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던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였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으면서도 반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정신을 잃고 쓰러진 상태로 내다 버리진 않겠지, 그런 계산도 있었다.
“왜.”
저를 빤히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한조가 묻는다.
“뭐가.”
하지만 오히려 화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그런 화수를 못마땅한 표정-사실 이 표정이 평상시의 표정이지만-으로 노려보던 한조가 도로 고개를 바로 했다.
그와 동시에 화수도 억지로 짓고 있던 표정을 지웠다. 물론 그러면서도 저 영감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는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도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 화수였지만, 그런 것을 이실직고해봐야 좋을 점이 없었다. 오히려 괘씸하다고 당장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
“허면, 장사는 어찌합니까. 일단, 휴업이라고 써 붙일까요.”
한조가 고개를 바로 하기 무섭게, 잠시 중단되었던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집사영감의 물음에 냉큼 대답한 이는 바로 여설이었다.
“말이 새지 않게 하려면 드나드는 이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으니까요. 주방의 식솔들도 일단-”
“장사를 쉬다니,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어.”
못마땅한 표정으로 침묵만 지키고 있던 한조가 여설의 말을 딱 잘랐다. 물론 그렇다고 얌전히 물러설 여설도 아니지만.
“이 와중에도 장삿속을 내세우십니까?”
“언니.”
여설이 눈꼬리를 사납게 세우며 따져 묻자 보다 못한 초하가 그런 여설을 말리고 나섰다. 하지만 기세가 흉흉해진 여설을 말리기엔 역부족. 옷자락을 당기는 초하를 뿌리치는 여설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아니, 내 말이 틀렸니?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지, 돈이 무에가 그리 중하다고.”
“언니, 밖으로 소리가 다 나가겠어요.”
“…….”
그나마 이 말은 먹힌 모양이었다. 말이 새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해놓고 정작 제 목소리가 문밖을 넘을 만큼 컸다는 사실을 깨달은 여설이 어깨를 움츠린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물론 화수의 방이 본채와는 꽤 거리가 있고 유난히 구석진 곳에 있어 부러 이 방을 찾아온 것이 아니고서는 목소리가 들리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녀석이 없어진 다음 날, 하필 홍매루가 장사를 쉬면, 남들 눈에 어찌 보일까.”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침묵을 깬 것은 한조였다.
“그도 그렇겠네요. 얼마 전에도 수색을 하긴 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는 큰 소란 없이 물러갔었지요.”
아마도 화수가 사라진 직후였을 것이다. 그때는 화수가 도망쳤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때라 영문도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그것이 가장 의심을 피하는 대응방법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두 손을 마주치며 덧붙이는 초하에 여설의 눈꼬리가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왔다.
“알아들었으면, 다들 얼른 가서 손님 받을 채비들을 해. 이때다 싶어 노닥거릴 핑계 대지 말고.”
“…….”
그리 결론을 낸 한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화수를 향해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너는 방에서 꼼짝하지 말고 있고.”
“예, 분부대로 하지요.”
화수가 손까지 들어 보이며 착실하게 대답했지만 한조의 못마땅한 표정은 더 짙어지기만 했다.
“분명 절반은 돈이 아까워서라는 데, 내 한 달 화대의 절반을 건다.”
휙, 하고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사라지는 한조를 삐죽거리며 보고 있던 여설이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들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초하가 한조가 사라진 쪽을 살폈지만 뒤돌아보는 그녀의 눈매 역시 웃고 있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가져다줄게.”
못 본 사이에 반쪽이 된 얼굴이 안쓰럽기도 하고 딴에는 잘해주려고 내민 손이었는데, 그런 여설에게 돌아온 것은 고작.
“집사영감 있는데?”
이것.
역시 화수는 화수였다. 그래도 류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초하뿐. 여설의 눈매가 다시금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누군 뭐 해주고 싶어서 하는 말인 줄 알아?!”
“…….”
“집사영감이 나도 없는 내 방에 자꾸 드나들면 수상해 보일 거 아니야!”
“아.”
그제야 화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화수가 없는 사이, 이 방은 여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기껏 방까지 양보해주었건만 고마운 기색이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화수였다. 물론 뭘 바라고 해준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이리 건방진 태도는 아니지 않은가. 좀 잘 지내보려고 했더니. 이번에도 괜한 짓을 했다.
“관둬, 관둬!”
여설이 팩, 하고 토라져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럼, 나 단술 좀.”
뒤에서 들려온 화수의 목소리에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불퉁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꼭 살로 안 가는 것만.”
“싫으면 관두고-”
“집사영감!”
하지만 화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설이 빽 소리를 내지르며 걸음을 내딛는다. 물론 그 걸음이 주방을 향한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언니가, 앓는 내내 걱정이 많았어요.”
이미 저만치 가버린 여설과 화수를 번갈아 보던 초하가 조용히 한마디 덧붙였다.
“알아.”
무시하거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대답이 돌아오리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돌아온 대답은 순순했다. 초하의 눈이 커져 있었다.
“뭐가 예쁘다고.”
나직이 중얼거리는 화수의 말에 초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어쭈? 기가 막혀하는 눈동자에 초하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전 언니만큼 성격이 좋지 못해서요.”
피식. 이번에도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마른 웃음을 흘리는 화수를 향해 문을 나서기 전 초하가 덧붙였다.
“그래도 다시 보니, 좋네요.”
이번에는 제가 예상한 반응이었을까. 허나 그것을 알 수는 없었다. 제 말을 끝내기 무섭게 초하가 후다닥, 그곳을 도망쳤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친구에게 사탕 하나를 쥐여 주고 후다닥 도망쳐버리는 어린아이처럼. 그 역시도 진심을 전하는 건 서툴렀다.
긁적.
한참을 당황한 표정으로 문을 보던 화수가 볼을 긁었다. 물론 그리 긁적이는 얼굴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편에 속했다.
털썩.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화수가 그대로 뒤로 벌렁 누웠다. 푹신한 이불에 몸이 감싸였다. 어째서일까. 부드럽기는 리 샤오의 집에서 썼던 이불이, 진도현이 구해준 집에서 썼던 침구가 훨씬 더 부드럽고, 질도 그쪽이 훨씬 더 좋을 텐데. 그럼에도 지금의 이불이 훨씬 더 안심이 되었다.
화전 먹고 싶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화수가 피식, 하고 웃었다.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던 것. 조금 전 여설에게 부탁한 것은 단순히 여설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단술이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함께 먹을 쫀득한 화전도 급 당긴다. 이상하지. 이상하게 먹고 싶은 것이 자꾸 떠올랐다. 여기 온 뒤로 입덧도 잦아들었다. 물론 뭔가를 먹으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미음을 먹을 땐 괜찮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연스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먹고 싶지도 않던 장소가 떠올랐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카린을 물에 풀어왔던 아주머니도. 따로 사례도 못 하고 왔네. 뜨거운 물주머니로 찜질도 해줬는데.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을 이어가던 화수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금 열어놓은 창으로 산들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화수의 입에서 색색이며 고른 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의 평온한 오수午睡였다.
* * *
“방에 계십니까.”
복도를 걸어오던 카이를 발견한 집사가 살짝 몸을 굽혔다.
“보고드릴 것이 있어서.”
“좋은 소식인 모양입니다.”
카이의 눈이 커졌다. 어찌 알았냐는 반응이겠지만, 이 시간에 급히 달려온 것 치고는 카이의 표정이 가벼워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덩달아 집사의 표정도 밝아졌다. 리 샤오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다니 어떤 소식인지는 몰라도 일단 반가웠다. 얼른 가보시라 재촉하고 싶었지만 정작 집사는 걸음을 옮기는 카이의 발길을 붙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러는 데는 이유가 다 있었다.
“그쪽이 아니라.”
아. 말끝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으나 카이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진다.
“또 그곳에 계십니까.”
“예. 그곳이 편하신 모양입니다.”
왜인지는,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지만 애써 그것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누구보다 리 샤오를 오래 보아왔던 두 사람도 작금의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누구보다도 리 샤오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낯설고 당황스러운 것인지도 몰랐다.
도저히 현실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아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조작해버리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리 샤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리 샤오는 그 누구보다도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여전히, 잠을 못 주무십니까.”
사라진 화수를 쫓는 동안, 안색이 나쁘다 했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아주 생기가 넘치는 낯색이었다. 그땐 적어도 눈동자만큼은 새파랗게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물론 화수를 붙잡겠다는 의지 덕분이었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이리 불안하지는 않았다.
화수가 사라졌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이었다. 총감이 처리해야 할 업무는 부장이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과중했고, 그것을 리 샤오는 전혀 무리 없이 처리해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런 평온이 더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화수 님이 앉아 계셨던 곳을 보고 계시다가, 동이 트면 그대로 나갈 차비를 하십니다.”
말하는 집사도, 이야기를 듣는 카이도 표정이 어두웠다. 전혀 길이 보이질 않았다. 당연했다. 손만 까딱이면 나라도 가질 수 있는 천하의 리 샤오라도 죽은 사람은 가질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므로. 말없이 무거운 눈빛만 교환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옆으로 비켜서며 카이를 재촉한 쪽은 집사였다.
“가보십시오. 저는 술상을 좀 봐오겠습니다.”
구부정한 몸을 더 궁굴린 집사가 한 발 더 물러서자 카이도 걸음을 내딛었다. 양쪽으로 갈라진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려던 조금 전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음이 가벼웠다.
후다닥.
열린 장지문을 통과하기 직전, 뭔가가 빠르게 움직이는 발소리를 들었다. 빠르게 발을 놀리는 카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황금빛 눈동자를 확인하는 순간, 누그러졌다.
“고양이 밥 좀 챙겨주실 수 있을까요.”
그때 화수가 말한 고양이가 저 녀석인 모양이었다. 물론 저 조그만 녀석은 그날의 소동을 전혀 알 리 없겠지만.
“카이.”
저만치 멀어지긴 했지만 더는 도망치지 않고 몸을 웅크린 채 자리를 잡은 녀석을 보며 기가 막혀하고 있던 카이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름이 불린 것뿐이지만 무슨 볼일이냐는 의미임을 모르지 않는 카이가 한 발 더 다가서며 용건을 밝혔다.
“예. 보고드리는 걸 깜빡한 일이 생각이 나서.”
그리고 여전히 시선은 정원을 향해 둔 리 샤오를 향해 덧붙인다.
“지방으로 내려갔다는 인력거꾼을 찾았습니다.”
“…….”
“그, 여우 가면을 쓴 이를 태웠다는.”
“알아.”
오랜만에 리 샤오의 기분이 좋아질 만한 소식이라 여겨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고 달려온 것인데 아무래도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무표정하기만 한 리 샤오의 얼굴을 난감한 표정으로 보고 있으려니 다행히 그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래서, 태운 이를 어디에서 내려줬다는데?”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
“인력거꾼을 데려오도록 사람을 보내두었습니다. 직접 묻고 싶으실 것 같아.”
“…….”
“……그만둘까요.”
“둬.”
“예, 알겠습니다.”
영 싸늘한 반응에 괜한 짓을 한 것인가 싶어 되물었지만 다행히 그냥 두라는 대꾸가 돌아왔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다른 소식은.”
“예?”
“…….”
“……죄송합니다.”
그제야 카이도 리 샤오가 자신의 보고에 왜 그리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화수 소식인 줄 알았던 거다. 굳은 표정이라 여겼던 것이 사실은 긴장한 표정이었음을 깨달은 카이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런 오해를 하는 것도 당연했다. 업무에 관한 것이라면 아침에 보고를 했을 테니까. 이미 화수는 죽었다고 결론 내버린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였다.
그 때였다. 술상을 보러 갔던 집사가 장지문을 넘었다.
“보고는, 끝나셨습니까.”
“……예.”
사람이 하나 늘었는데, 오히려 리 샤오 혼자 있던 조금 전보다 공기는 더 무거워져 있었다. 들어서던 집사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스치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본래의 태연한 낯색으로 들고 온 상을 내려놓았다.
“허면, 가보겠습니다.”
집사가 부러 두 사람분의 술상을 준비해 왔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카이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물러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리 샤오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집사의 얼굴에서는 아쉬운 기색이 묻어났다.
“그냥 가십니까. 오신 김에 한잔 하고 가시지요.”
“죄송합니다. 급히 할 일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이 밤중에 말입니까.”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이 역시 리 샤오의 술상대라도 되어줄 생각이었다. 생각이 바뀐 것은 바로 직전이었다.
“한시가 급한 일이라서요.”
그제서야 카이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제대로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이 상황은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려면 리 샤오의 눈앞에 진짜 화수의 시신을 가져다 놓아야 했다. 물론 뒷일이 두렵긴 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었다. 어쨌든 바닥을 찍어야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니까. 그리 생각한 카이가 빠르게 장지문을 통과했다.
“좋은 소식이, 아니었습니까.”
쪼르륵. 술을 채운 잔을 내밀며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자 그제야 리 샤오의 시선이 집사를 향했다.
“맞아, 좋은 소식.”
건네받은 술잔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리 샤오가 툭, 하고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좋은 소식이지.”
내내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도 반갑지가 않았다. 아니, 아예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래. 그 사람을 찾고 있었지. 그런 생각밖에는,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마치, 몸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기분. 아무것도 남지 않고, 그저 빈껍데기만 남아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가 막혔다. 그 녀석이 뭐라고. 심지어 다른 사내의 새끼를 밴 녀석이 사라진 것뿐인데, 마치 그 녀석이 자신의 전부였던 것처럼, 온몸이 텅 비어버린 기분이 드는 작금의 상황을 리 샤오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콸콸콸.
이번엔 리 샤오가 직접 주전자를 들어 잔을 채웠다. 그리고 그것을 연거푸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두 번, 세 번, 그리고 그것이 수어 번이 되었을 때 보다 못한 집사가 일단 주전자를 자신이 집어 들었다. 노려보는 시선이 흉흉했지만 집사는 그것을 내놓지는 않았다. 물론 솔직히 뒷걸음질 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천천히만 드시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쪼르륵, 빈 잔을 채우며 집사가 덧붙였다.
당장 목덜미를 뜯겨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무시무시한 기세였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리 샤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대청마루 끝.
환영처럼 누군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흐릿했지만 나른하게 웃으면 짙어지는 눈 밑 점만은 거짓말처럼 선명했다. 흐릿한 환영이라도 계속 보고 싶어 리 샤오는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그리고 가만히, 되뇐다.
“화수야.”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당연한 것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앓아 내렸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친 것 같았다.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싶기도 했다.
“수야.”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외면해도 녀석이 자신의 전부였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서야 깨달았지만, 결국은, 깨닫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껍데기까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 * *
“사장님, 대체 어쩌시려고요.”
안절부절못하는 비서와 달리 진도현은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왜. 내가 설마 총감어른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릴까 봐?”
“힉.”
기겁한 비서가 반사적으로 계단 끝에 선 경비병을 확인한다. 다행히 거기까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살피는 시선에 경비병의 관심이 쏠렸다. 황급히 시선을 떼자 피식, 하고 웃은 진도현이 안심하라는 듯 비서의 어깨를 두들긴다.
“농담이야, 농담.”
물론 완전히 농담만은 아니지만.
“안심해. 아직 죽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그런 분이 형무소에서 나오자마자 이곳을 오셨습니까.”
비서가 기가 막혀하는 것도 당연했다. 무려 총감의 아이를 밴 이를 숨겨준 것도 모자라, 다른 나라로 빼돌리려고 하다 걸리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 사내가 죽어버리기까지 했으니, 이리 멀쩡한 몸으로 형무소를 나온 것 자체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상님이 도와 자유의 몸이 되었으면 리 샤오의 눈에 띄지 않게 쥐 죽은 듯 납작 엎드려 있어도 앞으로의 일이 깜깜한데, 끌려온 것도 아니고 무려 제 발로 집에 들르지도 않고 가장 먼저 온 곳이 리 샤오가 있는 이곳이라니, 그의 성격을 익히 아는 비서로서도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 잘난 면상 한번 보고 갈 거야.”
“그게 꼭 오늘이어야 하는 이유는 없잖습니까.”
겨우 살아나오자마자, 죽겠다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비서의 충고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이미 입구에 멈춘 검은 자동차에서 리 샤오가 모습을 드러낸 뒤였기 때문이다. 비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단순히 리 샤오를 목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순간 진도현의 표정이 차갑게 식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찰나였으나, 분명 진도현이 심사가 틀릴 때 짓는 표정이었다. 늘 계산에 밝고 약삭빠른 사장이지만 가끔 손익을 따지지 않고 막 나갈 때가 있는데 보통은 그런 표정을 지을 때였다. 불길한 예감. 하지만 말릴 틈도 없었다.
“얼굴이 아주 좋으십니다.”
계단을 올라오던 리 샤오의 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진도현을 보는 얼굴은 무표정했다. 오히려 리 샤오의 어깨 너머로 그를 확인한 카이의 미간이 확 구겨져 있었다. 멍청한 사내는 아니라 여겼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가 안에서 아주 말도 안 되는 소식을 하나 들어서 말입니다.”
“진 사장-”
“둬.”
진도현의 입을 막으려는 카이를 리 샤오가 물렸다. 그러고는 진도현을 향해 턱짓을 했다. 어디 한번 지껄여봐, 라는 의미였다. 물론 겁을 먹고 물러설 진도현도 아니었다.
“정말, 죽었습니까?”
“…….”
화수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진도현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녀석이 죽을 리가 없잖은가. 진도현에게 화수는 그런 존재였다. 녀석이라면 분명 살아남아서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 있는 것뿐이라고,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불쑥, 눈앞에 나타나리라, 그리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점 들리는 소문은 절망적이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물에 빠졌다고 했다. 심지어 두 손과 입을 꽁꽁 묶인 채.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결코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도현은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날 화수가 죽는 것을 목격한 이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을 홍위는 이미 뒈져버렸으니, 남은 것은 리 샤오뿐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괴로워서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무표정한 리 샤오에 진도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눈앞의 리 샤오가 너무 멀쩡했다. 녀석이 죽었는데, 그걸 눈앞에서 놓쳐놓고도 이리 아무렇지 않단 말이지. 그럴 거면, 왜 굳이 도망친 녀석을 그리도 미친 듯이 찾았단 말인가. 그냥 두었으면, 지금쯤 천조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 있었을 녀석을. 배알이 꼬였다.
한번 배알이 꼬이면 진도현만큼 막 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설사 상대가 정무총감이라도 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사실 진도현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냥, 그리 죽게 두었습니까?”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상태.
“진 사장!”
슥. 참다못해 나서는 카이를 리 샤오가 말없이 손을 들어 보이며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대답 좀 해보시죠.”
“…….”
“구할 수 있었는데, 그냥 둔 것 아닙니까?”
“…….”
내내 차갑게 식어 있던 리 샤오의 눈동자가 그 질문에 반응했다. 물론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동공이 조금 수축하는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순간 뭔가가 진도현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저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는 게 견딜 수 없을 뿐이야. 그것도 나 같은 남창의 몸에서.”
설마.
“아이를 죽이려고?”
의아했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알려준 병사의 말에 따르면 미끄러지는 화수를 붙잡기 직전 리 샤오가 머뭇거렸다고. 물론 아주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고 제법 거리를 두고 대기하고 있었던 터라 잘못 보았을 수도 있지만.
그제야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추듯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이 살인자.”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그 단어가 채 끝나기도 전에 진도현이 리 샤오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카이가 한발 빨랐다. 이번엔 리 샤오도 그런 카이를 막아서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비서도 황급히 달려들어 진도현을 붙들었다. 하지만 앞과 뒤를 모두 붙들려 버둥거리는 진도현을 흘낏 본 리 샤오가 명령했다.
“놔줘.”
“하지만 리 샤오 님-”
“두 번 말해야 하나?”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인 카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경비병들이 그 신호를 받고 달려왔다.
“데려가서 이 근처에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해.”
경비병들에게 진도현을 인계한 뒤에야 카이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리 샤오의 명령이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리 샤오의 시선은 카이가 아닌 진도현을 향해 있었다.
“진 사장.”
“…….”
“죽은 아이에게 감사하도록 해. 네가 아비가 아니었으면 살려주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지금 제가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가. 카이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정작 리 샤오는 태연했다.
“그것도 이번 한 번이야.”
나직이, 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경고한 리 샤오가 그대로 진도현을 스쳤다. 아니, 스치는 찰나였다. 허를 찔린 듯 멍청한 표정이던 진도현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고 말을 내뱉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멈칫. 리 샤오의 걸음이 멈췄다. 돌아서는 리 샤오는 무표정했지만 만약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눈빛이리라 싶을 만큼 흉포한 눈을 하고 있었다. 힉. 진도현을 붙들고 있던 비서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진도현은 전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로 그럴 것이.
“제 아이인 것이 견딜 수 없어서 죽이려고까지 한 인간이, 이젠 내 아이라고?”
“…….”
성큼 다가선 리 샤오가 진도현의 멱살을 잡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눈앞에서 일렁였다. 붕의 패기였다. 완벽한 상위 포식자의 힘.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진도현은 그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무슨 소리야.”
“이제는 아이 아버지인 것조차 부인하시겠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어!”
피가 머리로 쏠리는지 진도현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다 못해 거무죽죽한 색을 띠었다. 태연한 척하고는 있었지만 그것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패기가 마구 개방되고 있었다. 리 샤오도 의식하고 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 아이가, 내 아이라고?”
진도현의 코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보다 못한 카이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총감. 대답을 들으시려면, 힘을.”
지금만큼은 멋대로 끼어들었다가는 저 역시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날뛰는 짐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가만가만히 목소리를 낮춰 조언하자 그제야 리 샤오가 천천히 패기를 거두었다. 누르던 힘이 단숨에 사라지자 진도현의 무릎이 꺾였다. 다행히 그를 붙들고 있던 이들 덕에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은 피했다.
“내 아이라고?”
진도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눈앞의 사내가 거짓말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결론은 한 가지였다. 빌어먹을 녀석. 손등으로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으며 진도현이 짓이기듯 내뱉었다.
“화수가 제게도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