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컥.
순간 느껴지는 둔통에 화수가 배를 끌어안으며 상체를 숙였다.
“뭐야?!”
막 방 문을 열고 들어서던 여설이 기겁해서 달려왔다.
“배가 아픈 거야?”
“그런 거 아냐.”
숨을 고른 화수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지만 여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원을 부를게. 잠시만-”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냥 두면 그대로 튀어나갈 기세라 화수가 황급히 여설의 팔을 붙들었다. 여설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춘 건 단순히 화수의 팔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제 팔을 붙들고 있는 화수의 손에 닿아 있었으므로. 시선을 느낀 화수가 슬그머니 손을 물리며 덧붙였다.
“그냥, 배를 좀 찬 거야.”
“배를 차다니 누가-, 아.”
무슨 변명을 해도 믿지 않겠다는 기세로 되묻던 여설이 뒤늦게 뭔가를 깨닫는다.
“배를 벌써 차?”
되묻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벌써라니. 찬 지 한참 되었는데.”
화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투덜거리자, 여설의 시선이 화수의 부른 배를 향했다.
“사내아인가 봐. 벌써부터 이리 발길질을 해대는 것을 보니.”
“…….”
얌전하다가도 한 번씩 이리 사람을 놀래켰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사실 예고 없이 들어오는 공격이 더 난감했다. 게다가 야행성인 어미를 빼닮았는지 밤에 주로 활동하는 녀석 때문에 자다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가.”
배를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리자 엉거주춤 서 있던 여설이 털썩 바닥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름은 지었어?”
“…….”
“그래도 짓긴 지었나 보네.”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줄 알았더니. 대답은 없었지만 표정변화가 없는 화수의 반응으로 짐작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뭔데?”
“…….”
“알았어, 알았어. 내가 괜한 것을 물었-”
“샤샤.”
화수의 머뭇거리는 반응을 알려주기 싫어서라고 짐작한 여설이 곧바로 한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물음이 물러나기 전, 화수가 입을 열었다.
아…….
사실 물으면서도 대답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화수의 입에서 나온 그것이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임을 깨닫는 데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예쁘네.”
“…….”
“부르기도 편하고.”
“……그래?”
시큰둥하게 대꾸하긴 했지만 그것이 멋쩍어하는 반응임을 이제는 여설도 알 듯했다. 어미는 어미인 모양이었다. 아이 이름이 예쁘다는 말에 입꼬리가 슬쩍 위를 향해 있는 화수를 보니 여설 역시 입꼬리가 자꾸만 말려 올라갔다.
여설의 시선이 다시금 화수의 배를 향했다. 그리고 방금 들었던 그 이름을 가만히 되뇌었다.
“샤샤.”
순간,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것을 본 여설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그런 여설을 향해 화수가 급히 덧붙인다.
“네가 마음에 드나 봐.”
“…….”
“방금, 대답했거든.”
그제야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진 이유를 알아차렸다. 굳었던 눈동자가 이내 휘둥그레진다.
“참말이야?”
이번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여설의 표정은 확연히 밝아져 있었다.
“참말로 날 좋아하는 거 같아?”
“대답했다고 했지, 좋아한다고는 안 했는데.”
“……꼭 그리 초를 쳐야겠어?”
호를 그렸던 눈꼬리가 단숨에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며 화수가 피식, 하고 웃었다. 얄밉다는 듯 눈을 흘기던 여설도 이내 표정이 풀렸다. 솔직히 화수가 웃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런 기분을 녀석에게 알려줄 생각은 결코 없었지만.
“만져볼래?”
여설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 하지만 정작 제안을 한 화수의 표정은 태연했다. 순간 제가 지금 헛것을 들었나, 싶을 만큼. 큰 눈만 깜빡이던 여설이 겨우 입술을 열었다.
“지금.”
“그럼 언제 만지려고.”
사실 여설은 지금 뭐라고 했냐고 되물으려던 것이었지만, 화수는 지금 만져도 되냐는 질문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까칠한 반응이었으나 이번엔 화도 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근처에 누가 오는 것도 싫어하던 녀석이 무려 제 몸에 손을 대는 걸 허락했다는 데 너무 놀라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천천히 여설이 손을 내뻗었다. 얇은 천 위로 의외로 단단한 배가 느껴졌다. 좀 더 말랑말랑 할 줄 알았는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화수가 툭, 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불러봐, 이름.”
아마도 조금 전 얼굴을 굳혔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서툰 화수를 이제는 여설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도톰한 입술이 벌어졌다.
“샤샤야.”
“…….”
“이모야, 여설 이모.”
여설의 입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 이모라는 호칭에 화수의 미간이 다시금 구겨졌다. 네가 왜 이모야. 하지만 불만을 토로하려고 입을 열려던 순간.
“맞지?!”
멈칫한 화수를 대신해 여설이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대답한 거 맞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연신 묻는 커다란 목소리에 화수의 눈매가 더 일그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 하지만 그러면서도 배에 닿은 손을 물리지는 않는다. 그 커다란 소리에 반응하듯 배 속의 아이가 발을 꾹 내밀었기 때문이다.
“정말 발로 차는구나.”
“그럼 거짓말일까 봐.”
다소 과하다 싶을 만치 극적인 반응에 불퉁하게 받아쳤지만, 지금 여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좀 더 뻥뻥 차는 건 줄 알았는데.”
사실 공을 차듯 뻥뻥 찬다기보다는 쭉, 밖으로 발바닥을 내미는 것에 가까웠다.
“안이 좁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여설의 시선이 이번엔 화수를 향했다.
“하긴, 이리 말랐으니 좁을 만도 하지.”
“…….”
“그러니 좀, 팍팍 좀 먹으란 말이야. 새 모이도 아니고.”
“…….”
갑자기 튄 불똥에 반응할 틈도 없이 여설이 가져온 소반을 화수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다소 억울하기는 했지만 화수도 수저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안이 좁다는 말에는 화수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샤샤면.”
순순히 수저를 입으로 가져가는 화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여설이 불쑥 다시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 여설이 뒷말을 이었다.
“리 샤오 총감의 아이인거지?”
“…….”
꿀꺽. 입안에 밀어 넣은 죽을 씹지도 않고 삼켰다. 그러고는 다시 수저로 죽을 떠서 입안으로 가져갔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없이 죽만 씹어 삼켰다. 화수의 묵묵부답에도 여설도 더는 묻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들으려고 물은 것도 아니었다.
“체하겠다.”
여설이 화수의 앞으로 동치미 그릇을 밀었다.
“안 뺏어 먹으니까, 이것도 먹어가면서 먹어.”
달그락. 수저가 맑은 동치미 국물을 떴다. 딱 알맞게 익은 새콤한 국물이 입안에 가득 찼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는 화수를 보고 여설이 물었다.
“왜. 맛이 이상해?”
“아니.”
하지만 고개를 내젓는 화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괜찮은데?”
“…….”
“못 믿겠으면 먹어보든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여설에 화수가 아예 그릇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누가 못 믿겠대?”
여설이 그릇을 도로 밀었다.
“말을 해도 하여간.”
투덜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다시 수저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물론 수저가 다시 동치미 국물로 향하는 일은 없었다.
* * *
“여기 서명하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압수한 소지품들을 담아놓는 바구니에서 시계를 집어 팔목에 찼다. 두툼했던 지갑이 홀쭉해져 있었지만 문제 삼지 않고 그것도 상의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철컹.
경비병이 열어주는 문을 통과해 나오던 진도현의 걸음이 멈칫했다. 예상 밖의 얼굴이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멈췄던 걸음이 다시 내딛어진다. 긴 다리는 단 몇 걸음 만에 카이와의 거리를 완전히 좁혔다.
“며칠은 썩어야 될 줄 알았는데 덕분에 살았습니다, 카이 사무관.”
빈정거리는 것이라기엔 반가워하는 표정은 진심이었다. 역시나 속을 알 수 없는 사내. 진도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이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명령대로 처리했을 뿐입니다.”
리 샤오의 언급에 진도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번에도 곧 예의 빙글거리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아주,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이번엔 분명, 빈정거림이었다. 무표정이던 카이가 입을 열었다.
“진 사장님.”
“예.”
“입조심 좀 하셔야겠습니다.”
물론 그 말이 지금만을 일컫는 것이 아님을 진도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슨 소문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리 샤오 님을 거부한 쪽은 화수 님이었습니다. 반응이 늦었던 건 그런 이유였습니다. 아니었다면, 결코 그분을 놓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리 샤오는 진도현의 추궁에도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싶어 그런 것이겠지만, 이성을 잃고 따라 뛰어들려는 리 샤오를 막아선 책임이 있는 카이로서는 그런 진도현의 오해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잖아.”
하지만 진도현은 태연했다.
“제 새끼를 죽이려고 한 사람인데.”
“…….”
일순 카이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지는 걸 진도현이 놓칠 리가 없었다. 역시나.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말입니다. 분명 녀석은 리 샤오 님이 자신의 아이라서, 저 같은 것에서 자신의 씨가 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어서 없애버리려고 한 것이라 했단 말입니다.”
“…….”
“정작 본인은 자신이 아비인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난감한 것은 카이도 마찬가지였다. 화수가 아이를 없애려 했음을 알아차린 건 알았지만, 그런 오해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그러진 것일까. 평온해 보였던 두 사람의 그 순간들이 사실은 대충 얼어붙은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것이었음을 그제야 카이는 깨달았다. 묘하게 아슬아슬해 보이던 두 사람의 모습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늘 초조해하던 리 샤오의 기분 역시. 마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끼운 듯이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화수 님이 먹는 약에 비소를 타기는 했으나, 이유는 다릅니다.”
“…….”
녀석이 약이라면 질색했던 연유를 이제야 알았다. 제가 녀석을 속이고 비소를 먹였던 일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신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모든 것이 리 샤오가 중심에 있었다.
“대체 어떤 연유면, 멋대로 남의 배 속의 아이를 죽여버려도 되는 겁니까.”
사실 리 샤오에게 연유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벌레 한 마리를 죽이는 데 무슨 연유가 필요한가. 그냥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없애버릴 수도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왜 이리 화가 나는 것인지, 진도현은 알 수가 없었다.
“그 연유라면, 진 사장님도 알고 계실 텐데요.”
반면 되묻는 카이의 반응은 침착하기만 했다. 진도현의 미간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건 또 무슨.”
“화수 님의 몸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진 사장님도 모르지 않잖습니까.”
“…….”
모르지 않았다. 죽더라도 제 품에서 죽게 하면 했지, 리 샤오에게 빼앗기는 건 견딜 수 없다고 그 먼 곳까지 녀석을 데려가려고 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카이는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너 역시, 다 알고 있지 않았냐고, 그런 네가 화를 낼 자격이 있냐고. 그리 말하고 있었다. 대놓고 아픈 곳을 찔리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솔직히, 무척 아팠다.
“의원조차 가망은 없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아이를 낳지 않아도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고. 그러니 차라리 아이라도 살리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지요.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다면 그나마 살 가능성이 높은 쪽을 살리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
“하지만 그런 확률이나, 가능성으로는 제로인 화수 님을 살리기로 하신 겁니다. 물론 말씀하신 대로 그게, 멋대로 아이를 지워도 되는 이유가 된다고 확언할 수 없지만.”
“…….”
“적어도, 화수 님을 살리려고 한 선택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
사실 진도현도 알고 있었다. 이리도 화가 나는 것은 리 샤오 때문이 아니라는 걸. 그저 외면하고 싶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진도현에 카이도 입을 다물었다. 카이 역시도 그제야 리 샤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배 속의 아이가 리 샤오의 아이였다면, 조금은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실을 화수에게 알리고, 그를 설득했겠지. 카이가 아는 리 샤오라면 분명 그리했을 터였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화수가 마음을 준 이가 다른 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리 샤오는 누구보다도 비이성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것이 화수를 위하는 길이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만드는 선택이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천하의 리 샤오가 두려워서 아무것도 묻지 못할 만큼, 누군가에게 빠져 있었다는 걸. 아마 리 샤오 스스로도 알지 못했으리라.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참담한 기분을 애써 누르며 카이가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저벅저벅, 그 발소리가 작아지고, 그리고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진도현은 미동이 없었다. 잘 닦아놓은 복도에 검은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 * *
“카이.”
나직한 음성에 카이가 고개를 틀었다.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리 샤오가 한발 빨랐다.
“차 세워.”
“왜, 그러십니까.”
“그냥 좀 걷고 싶어서.”
빗줄기는 가늘었지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카이는 말리는 대신 운전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차가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리 샤오가 먼저 차 문을 열었다. 먼저 우산을 들고 내리려던 카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황급히 그 뒤를 따라 내렸다.
“멀찍이 따라와.”
물론 내리기 직전, 운전병을 향해 그리 일러두는 것도 잊지 않고서.
촥-!
곧바로 뒤따라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리 샤오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우산을 편 카이가 빠르게 발을 놀렸다. 거리가 좁혀지기 무섭게 뒤에 서서 리 샤오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었다. 부슬거리는 빗방울이 어깨와 머리에 잔뜩 맺혀 있었다.
조금 내려갔던 물의 수위가 다시 높아져 있었다. 물론 그날의 수위만큼 높지는 않았다.
“카이.”
한참 만이었다. 개울이 흐르는 방향으로 말없이 걷기만 하던 리 샤오가 불쑥 입을 연 것은.
“……예.”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대답이 조금 늦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개울에 바짝 붙어 걷는 리 샤오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런 카이의 불안을 리 샤오도 알고 있었던 모양.
“왜. 내가 뛰어들기라도 할까 봐?”
“아닙니다.”
아차 싶었던 카이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이미 리 샤오는 다음 주제로 넘어간 뒤였다.
“참 독한 녀석이지 않아?”
“…….”
“곤 주제에.”
“…….”
하지만 이번엔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리 샤오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모양이지만.
“그래서 그런가.”
“……뭐가, 말입니까.”
말을 해놓고 가만히 불어난 개울물을 보고 있는 리 샤오에 카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작은 소용돌이들이 생겼다가 사라진다. 동시에 생겼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물거품을 보며 리 샤오가 툭, 하고 뒷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녀석이 죽은 것 같지가 않단 말이지.”
“…….”
“그 독한 녀석이 죽었다면, 이리 얌전할 리가 없잖아. 물귀신이라도 되어서 찾아왔을 녀석인데. 안 그래?”
“대장.”
“걱정 마. 정신 놓은 거 아니니까.”
“…….”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 녀석이, 아직은, 살아 있는 것 같은 기분.”
“…….”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위로에는 젬병이었다. 설령 무슨 말을 한들 위로가 되겠냐마는. 차라리 그런 생각으로 조금이나마 리 샤오의 기분이 가벼워진다면, 나쁘지 않겠다 싶기도 했다.
“그만 차에 타는 게 좋겠습니다. 빗줄기가 굵어집니다.”
투둑투둑,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고 있었다.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린 리 샤오가 이번엔 순순히 걸음을 틀었다. 카이의 불안을 알아차린 까닭이었다. 그 때였다.
“저기, 나으리.”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앞을 무언가 불쑥 막아선 것은.
“누구냐.”
경계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리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낡은 짚단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우비를 뒤집어쓴 한 사내였다. 언뜻 보아도 마흔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그는 어디서 이미 한잔 걸친 상태인지 걸음이 불안했다.
“혹, 물귀신 때문에 나오신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아무래도 술 취한 주정뱅이가 두 사람의 행색을 보고 뭐라도 얻을 것이 있나 싶어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냥 무시하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사실 이건 리 샤오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사내를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그런 카이의 배려를 알 리 없는 주정뱅이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맞지요?”
연신 비틀거리는 두 다리로 뒷걸음질 치며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며칠 전, 순경들에게 그것을 알려준 것이 바로 접니다요. 평소와 다른 것이나, 이상한 것을 본 것이 생각나면 알리라고 해서 그날 본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히 알렸습니다만, 술 취해서 헛것을 본 것이라고 제 말을 비웃고 가버리지 뭡니까. 허나 저는 알았지요. 그놈들이 그 목격담을 분명 상부에 보고하고, 그 공을 제 놈들이 차지하려는 수작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것이라면 카이가 지시한 것이었다. 꼭 특별한 것이 아니라도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이상하거나, 평소와는 다른 뭔가를 본 것이 있으면 보고하라고, 그러면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겠다는 공고를 낸 상태였다. 가끔은 이리 별 것 아닌 곳에서도 예상치 못한 정보가 나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닐 경우가 더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었다.
“그래서. 뭘 봤다는 거지?”
아마 사내가 오해한 것과 달리 순경들은 그의 말을 주정뱅이의 헛소리라고 여기고 그대로 무시한 모양이었다. 무시할 땐 끈질기게 굴던 사내가 정작 카이가 관심을 보이자 오히려 딴청을 피웠다.
“목격한 것을 알리면, 보상도 주고 한다고 하던데.”
“쓸 만한 것이면, 보상을 해주지.”
“참말이시지요?!”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마.”
시간을 끌면, 보상도 없다는 말이었다.
“암요. 암요.”
히죽, 이를 드러낸 사내가 굽실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얼마 전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밤이었지요. 국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에 술 한 잔 걸치다 보니, 아, 정말로 딱, 한 잔만 했을 뿐입니다요. 제가 이래봬도 술은 딱 절제를 해서-”
딴 길로 새려던 사내가 카이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보고 황급히 본래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꽤 늦어졌지요. 부랴부랴 국밥 한 그릇 싸가지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것을 보았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뭘.”
이 헛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나 조금 짜증이 나려는 찰나, 누가 듣기라도 할까 사내가 잔뜩 목소리를 죽인 채 덧붙였다.
“물귀신, 말입니다요.”
“…….”
“참말입니다요. 제가 분명, 요 개울에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온 물귀신이 천천히 도로를 가로질러 커다란 대문 틈으로 사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니까요.”
“그만 가시죠.”
괜한 시간낭비를 했다 싶어 도로 발길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다급해진 사내가 꽥 소리를 내지르듯 빠르게 다음 말을 내뱉는다.
“요상한 건 그 물귀신이 허연 소복을 입은 계집이 아니라, 말끔한 양장을 입은 사내였다는 거지요. 내 그래서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니까요.”
그리고 그 순간, 리 샤오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어디서.”
휙, 하고 멱살이 잡힌 사내가 반사적으로 바동거렸지만 리 샤오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강하게 붙들린 탓에 숨 쉬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어디냐고 물었어.”
하지만 사내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영원히 목소리를 내지 못하리라는 걸. 사내가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래, 저, 쪽, 사, 사거리 지나, 크, 큰, 유곽이, 있는-”
제대로 된 문장은 아니었지만 더듬거리며 내뱉는 단어로 그곳이 어딘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거리를 지나 개울가에 위치한 유곽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홍매루였다.
* * *
“전방위 배치 완료했습니다.”
포위는 조용히, 하지만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일개 중대가 일사불란하게 홍매루를 에워쌌다.
환하게 켜져 있는 홍등을 보며 카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감시를 붙여놓았음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였다. 수상한 움직임은 전혀 없었고, 매일 정상적으로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고를 받고 있어 완전히 방심했다. 화수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리 샤오는 분명 홍매루와 진도현을 주시하라 명령을 내렸으니까.
“리 샤오 님.”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갈 거라 여겼던 리 샤오는 정작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저 활짝 열린 대문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화수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저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평소라면 이미 포위를 하기도 전에 들어갔을 리 샤오가 이상하게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수색을, 시작할까요.”
검은 우산을 리 샤오 쪽으로 좀 더 기울이며 카이가 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미 다 젖은 옷이며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카이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만이 카이를 조급하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굳게 닫혀 있던 리 샤오의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둬.”
처음엔 잘못 들은 것인 줄 알았다.
“예?”
“들어가지 마.”
“…….”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깨달은 카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제야 카이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우산 위를 두들기는 빗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 * *
“주, 주인어른!”
귀신이라도 본 낯색으로 달려오는 집사에 한조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이냐.”
“밖에, 군인들이, 새까맣게 홍매루를 에워싸고 있습니다요.”
“…….”
“아무래도 화수를, 화수를 잡으러 온 모양입니다. 이를, 어찌합니까.”
숨이 차 헐떡이면서도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런 집사영감과 달리 한조는 미간을 구긴 것이 고작.
“주인어른.”
당장 군인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가타부타 말도 없이 미간만 구기고 있는 한조가 답답했던 집사영감이 재촉하듯 그를 불렀다.
“뒷문은.”
겨우 한조의 입이 열렸지만 이번엔 집사영감의 대답이 시원찮았다.
“그곳도 이미, 군인들이…….”
어두운 데다 비까지 내려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라 실제 모습보다 훨씬 더 위협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새까맣게 에워쌌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우비를 뒤집어쓴 군인들이 두 겹, 많게는 세 겹으로 대열을 짜서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포위망을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기가 막히게도 그리 많은 인원이 움직였는데, 전혀 눈치채지를 못했다. 홍등을 정리하러 나갔다가 어둠 속에서 시커먼 무리를 보는 순간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순간 화수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아마 그것이 자신의 황천길행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금도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따라와.”
그리 말한 한조가 휙, 하고 방향을 틀었다. 그 뒤를 집사영감의 잰걸음이 따랐다. 아이고, 우리 화수 어찌하누. 자꾸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평소라면 그런 집사를 못마땅해하면서 곧바로 입단속을 했을 한조였지만 이번엔 아무런 저지도 하지 않았다.
왔구나.
드륵.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조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화수는 예감했다. 어떻게, 라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이 평화가 그리 오래가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 행운이 자신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지금이 마음은 편했다.
“안 됩니다, 한조 어른!”
타다닥,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여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늦게 상황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류와 초하의 모습도 그 뒤로 보였다.
“뭐가.”
앞뒤 다 잘라먹은 외침에 한조가 얼굴을 구기며 되물었다.
“대체 뭐가 안 된다는 거지.”
“화수를 버리시면 안 된다고요.”
“…….”
기가 막히다는 듯 미간을 구기는 한조에 여설의 사납던 눈매가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왔다.
“화수를 제 발로 나가게 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물론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지 않은 채였지만.
“지하창고에, 사람 하나 숨어 있을 공간 정도는 있을 것이야.”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여설의 질문을 무시한 한조가 화수를 향해 나직이 말을 이어간다.
“지금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일단 거기에 몸을 숨긴 뒤에 뒷일을 도모하는 것이-”
“됐어.”
하지만 이번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화수가 한조의 말을 잘랐다.
“지금까지 내치치 않고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영감.”
“무슨 소리야, 너.”
그런 화수를 여설이 말리고 나섰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솔직히, 나도 나가라는 말을 하려고 온 줄 알았거든.”
피식, 웃는 화수의 표정은 평온했다. 여유로운 것과는 좀 달랐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 포기해버린 사람의 것에 가까웠다. 그를 알아차린 여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숨겨주겠다고 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고마워, 영감.”
빈정거리는 말이 아니라, 솔직히 조금 감동했다. 한조가 홍매루를 얼마나 제 목숨처럼 여기는지를 뻔히 아는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가게를 위험하게 만드는 선택을 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으니까. 영감도 늙은 모양이네. 한조가 들으면 기가 막혀할 생각을 태연히 하면서 화수가 다시금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참말이야? 참말로, 이대로 그냥 포기하겠다고?”
지금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화수뿐이었다. 묻는 여설이 오히려 더 괴로워 보였다. 여기까지. 여기까지였다.
“그래도 내 발로 순순히는 못 나가지.”
더 이상 숨지 않기로 했지만, 제 발로 순순히 나가줄 생각도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순순히 가준단 말인가. 버티고 버티다, 질질 끌려 나가는 한이 있어도 리 샤오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너덜너덜해졌지만, 그래도 한 줌 남은 자존심.
“괜찮겠어?”
포기하는 건 안 된다고 했으면서 버티겠다는 화수의 말은 또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화수는 태연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임산부를.
물론 마지막 순간, 보았던 리 샤오를 생각하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듯하지도 않지만. 하지만 무서울 것도 없었다. 리 샤오에게 죽지 않아도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태평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 때였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무색하게도 전혀 소리를 죽이지 않은 발소리가 바로 코앞까지 와 있었다. 모두 숨을 멈췄다. 딱딱하게 굳은 채, 서로 시선만 주고받고 있으려니 발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없습니까? 집사어른?”
탁, 탁, 탁, 탁, 기가 막히게도 빗소리인 줄로만 알았던 그 소리는 다름 아닌 노인이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이번엔 조금 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들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없는 노인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의 다 낡은 우비에서 나무 바닥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한조의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 * *
“그냥, 들여보내시는 겁니까.”
내내 보고만 있던 카이가 입을 열었다.
철컥. 철컥.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사내를 향해 일제히 총이 겨눠졌다. 하지만 상대는 전혀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이내 밝혀졌다.
탁, 탁, 탁, 탁.
긴 나무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기며 걷는 노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봉사였다. 겁 없이 무장한 군인들을 향해 접근한 것이 아니라 아예 지금의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조금 전에 비해 경계는 확연히 누그러졌지만 병사들을 물리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가 내딛는 발의 방향은 분명 홍매루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사들이 봉사의 앞을 가로막으려는 순간.
“물러나.”
리 샤오가 그들을 저지했다. 그의 간단한 손짓 한 번에 대열이 신속하게 틈을 벌렸다. 그러고는 그가 지나간 직후, 다시금 견고하게 틈을 메운다. 그런 기척을 노인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쏟아지는 비에 기척이 많이 감춰진 덕이었다.
탁, 탁, 탁, 탁.
조금 전 자신이 어떤 위험천만한 순간을 헤쳐 나왔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노인은 천천히, 하지만 결코 멈추는 일 없이 홍매루 대문 앞에 도달했다.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비를 맞고 서 있던 노인이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의 기척이 없자 슬그머니 앞으로 손을 내뻗었다.
휘휘, 흔드는 손에 걸리는 것이 없는 부분을 확인하곤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제야 문이 활짝 열린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노인이 이내 지팡이로 발아래 문지방을 확인한 뒤 그 문을 넘었다.
더듬더듬 바닥을 짚어 가는 노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카이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리 샤오 님.”
물론 리 샤오의 생각에 반대하거나, 저지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가 알고 싶었다. 보통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감도 오질 않았다.
“녀석이 도망친 건, 배 속의 녀석이 내 씨가 아니어서라고 생각했거든.”
다행히, 이번엔 리 샤오도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활짝 열린 대문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한시도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당연히 내가 싫어서라고, 생각했단 말이지.”
“…….”
마치 눈을 떼면, 화수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하듯이.
“헌데, 내 씨인데도, 도망친 거면, 나를 좋아하는데도, 도망친 거라면, 어찌해야 하지?”
“…….”
“나는 녀석을 어찌 잡아둬야 하는 거지?”
“…….”
“잡아둘 수는 있는 걸까.”
“…….”
그제야 카이도 리 샤오가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할 수 없는 거였다.
“각인조차도, 녀석을 잡아둘 수 없는 거라면.”
이제는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화수는 리 샤오에게 각인이 되어 있었고 아이도 리 샤오의 씨이니 더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그리 단순히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오해를 한 쪽은 리 샤오였지만, 화수는 아니었다. 단순히 아이를 지키려고 도망쳤다기에는 그 전부터 화수는 리 샤오에게 각인된 사실을 숨기지 않았던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던, 오히려 두 사람이 평화로웠던 그 순간에도. 그게 카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애초에 각인된 곤이, 감히 붕에게 반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각인된 곤은 붕에게 귀속된다. 그건, 본능이었다. 단순히 육체적인 귀속뿐만이 아니라,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게 또 화수답기도 했다. 그가 그리 단순한 사내가 아니라는 걸, 예측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사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지금 녀석을 억지로 끌고 간다고 해도, 또 도망치려고 하겠지.”
두려움. 리 샤오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천하의 리 샤오가.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험해봤으니까. 이미 한 번 잃어버렸던 기억이, 상실을 경험해본 몸이, 본능적으로 리 샤오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거였다. 한 번 더, 그런 경험을 하면, 그땐 정말 견딜 수 없으리라는 걸 머리보다도, 몸이 먼저 알아차린 탓이었다.
카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카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한 번 더, 녀석이 없어진다면, 그땐, 정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화수가 살아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 * *
“대체 무슨 꿍꿍이야.”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리는 화수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기 때문이다.
당장 쳐들어와 저를 끌고 갈 것이라 여겼던 리 샤오는 그날 이후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그렇다고 홍매루를 에워싼 군대를 물리지도 않았다. 아무리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라지만, 언제든 리 샤오의 손짓 하나에 곧바로 움직일 수 있는 완전무장의 군대가 이리 코앞에서 대기 중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 것인지는,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었다. 직접 행동을 취하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사람을 괴롭히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순순히 제 발로 나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는데, 이대로라면 제 발로 뛰쳐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을 보니.
“화수야.”
휙, 하고 고개를 꺾자, 소반을 든 집사가 들어오고 있었다.
“둬.”
그나마 좀 돌아왔던 식욕이 다시 뚝 떨어졌다. 날이 더운 데다, 며칠 계속되는 비로 습한 공기마저 불쾌하게 들러붙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입덧 때문에 못 먹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랄까.
“좀 이따 먹을게.”
어제는 그나마 시원한 콩국에 소면도 조금 먹었다. 물론 오늘은 콩국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지만.
“그리 말하고 점심도 걸러놓고선.”
처음엔 완전히 겁을 집어먹었던 집사도 어느새 적응을 했는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며칠 지켜본 바로, 그들이 특별히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주변을 에워싸고 있지만, 또 드나드는 사람까지 막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들어오는 사람은 전혀 상관하지 않아, 오기만 한다면 손님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손님이 온다면 말이지만. 어쨌든 그런 점으로 보아 홍매루 안에 있는 이들을 고립시켜 그대로 말려 죽이겠다는 의도는 없다고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
인간은 본시 적응의 동물이었다. 살아남으려면 그래야만 했고. 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것은 화수 하나였다.
“그러지 말고, 이것 좀 먹어봐.”
“…….”
소반을 내려놓은 집사가 억지로 화수를 끌어와 앉혔다.
“뭔데.”
처음엔 쉽게 당겨지지 않던 몸이 이내 못 이기는 척 끌려온다. 집사영감의 얼굴 위로 기쁜 기색이 번졌다. 덮어놓은 밥보자기를 휙, 하고 걷자 뽀얀 찰떡이 모습을 드러냈다.
“꿀떡.”
“…….”
흥건한 사탕물에서 달큼한 냄새가 풍기는 그것은 분명, 시장통에서만 파는 꿀떡이었다. 물론 그것을 싼 포장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너 이거 좋아한다며.”
물끄러미 보고 있는 화수를 음식에 대한 관심이라고 여긴 집사영감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꼬지에 떡을 하나 찍어 내밀었다.
“어여.”
뽀얀 속살에서 단물이 뚝뚝, 떨어졌다.
“누가 그래?”
“응?”
“나 이거 좋아한다고 누가 그랬냐고.”
“…….”
집사영감은 거짓말에 영 재주가 없었다. 당황한 낯색을 전혀 숨기지 못하는 집사영감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머릿속을 스치는 것들이 있었다.
오늘은 꿀떡. 어제는 콩국, 그 전날은 단팥죽, 그 전전날은 다디단 수박화채였지.
식욕이 없다가도 그것들은 잘만 넘어갔다.
왜 그것을 이제야 알았을까. 화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앞에 놓인 꿀떡을 포장째 집어 든 화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화수야. 그건 왜.”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 굳어 있던 집사가 황급히 화수를 붙들었지만 이미 그는 장지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아이고, 화수야. 어딜, 가려고.”
주저앉아 있던 집사도 황급히 일어나 그런 화수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좀처럼 화수와의 거리가 좁혀지질 않았다. 기운 없이 늘어져 있던 녀석이 어디서 저런 기운이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주륵주륵, 화수가 걸음을 옮기는 경로를 따라 흘러내린 사탕물이 나무 바닥에 흥건했다. 진득진득한 것이 집사의 발에 들러붙었다. 그 발로 다시 다른 바닥을 짚을 순 없어 멈춰 서서 버선을 벗는 사이, 이미 화수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물론 녀석이 움직인 경로는 떨어진 사탕물로 알 수 있었다.
설마. 아무리 겁 없는 녀석이라도, 제 발로 호랑이를 만나러 가진 않겠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벗어 든 버선을 움켜쥐고 걷는 집사영감의 걸음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 * *
열린 대문으로 누군가 나오고 있었다. 으레 홍매루를 드나드는 이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확인한 카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사실 알아보지 못하려야 못 알아볼 수도 없는 얼굴을 몇 번이고 확인하느라 반응이 다소 늦었다.
철컥.
뒷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꺽은 시야에 리 샤오는 이미 차 밖, 화수의 앞으로 성큼 다가선 뒤였으므로. 리 샤오의 손에는 펼치지도 않은 우산이 들려 있었다. 그제야 카이도 화수가 우산도 없이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걸어오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당신, 뭐 하자는 거야.”
카이가 뒤따라 내렸을 때는 이미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겨우 두세 발자국 정도. 뒤따르던 카이로선 리 샤오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마주 오는 화수의 표정은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낯설었다. 이리도 화가 나 있는 화수는 본 적이 없었다.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내였음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일었지만, 카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퍽, 하고 뭔가가 리 샤오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투두둑,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서야 그 뭔가가 떡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의문은 남았다. 설마 그것을 피하지 못해 맞은 것은 아닐 테고, 왜 그것을 그냥 맞고 있었나, 하는 의문.
하지만 그 역시도 금세 풀렸다.
화수의 머리 위로 우산이 드리워져 있었다. 화수가 그것을 던지는 순간, 리 샤오는 우산을 펼쳐 비를 막아주었던 것. 하지만 화수의 표정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험악해져 있었다.
“이딴 것이나 손에 쥐여 주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습니까?”
“…….”
좋았다. 그에게는 별것 아닌, 그저 불쌍한 거지에게 던져주는 동전 하나에 불과한 싸구려 동정인 줄도 모르고, 고작 이런 작은 것들에 또 마음이 흔들렸다. 사실 리 샤오는 속이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저 혼자 멋대로 착각해버린 것일 뿐. 그것이 이리 미친 듯이 화가 나는 이유였다.
다시는 착각하고 싶지 않았다. 고작 이런 것에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이리 화가 날 이유도 없었다. 흔들렸기 때문에, 순간 착각해버렸기 때문에 이리 화가 난 것이다. 리 샤오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느끼는 분노였다.
“아니면, 여기에도 비소를 탔습니까?”
“…….”
화수의 날 선 물음에도 리 샤오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제 눈앞에 선 화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마치, 제 앞에 선 이가, 제 눈앞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리고 시선을 떼는 순간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화수를 눈에 담고 있었다.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뭐라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고 다시금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아이고, 화수야.”
헐레벌떡 뒤쫓아 나온 집사영감이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달려오느라 벗겨진 화수의 신 한 짝이 들려 있었다.
“이, 무슨.”
바닥을 나뒹구는 떡 조각, 사탕물로 범벅이 된 리 샤오의 상의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화수의 성질머리를 잘 아는 집사영감으로서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집사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이마가 바닥에 닿을 기세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이 더 맞았다.
“잡아 가든, 죽이든, 하려면 빨리 해버리란 말입니다. 사람을 이리 쥐몰이 하듯 붙잡아놓고 피 말리지 말고.”
살려달라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아예 죽여달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었다. 완전히 겁을 상실한 화수의 태도에 집사의 얼굴이 더 사색이 되었다. 리 샤오가 언제 검을 빼 들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
“아이고, 리 샤오 님, 지금 이 녀석이 제정신이 아닙니다. 사흘 밤낮을 앓아누웠다가 일어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지금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니 아무쪼록, 리 샤오 님께서-”
제발 살려달라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던 집사가 멈칫했다. 제 앞으로 리 샤오의 손이 내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는 집사에게 카이가 손을 가리키는 신호를 주었다.
“이것, 말입니까.”
반사적으로 손에 들린 신을 들어 보이며 묻자, 리 샤오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제야 집사영감도 그 내민 손의 의미가 신을 달라는 뜻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슥. 신을 가져간 리 샤오가 이번엔 반대로 들고 있던 우산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영문을 몰라 가만히 서 있는 집사를 대신해 카이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우산이 화수의 머리 위로 제대로 씌워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리 샤오는 화수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주춤.
당황한 화수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리 샤오는 물러서는 화수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발치에 놓았던 신을 좀 더 당겨주었을 뿐이다. 그러고는 화수가 다시 물러날 거라 여겼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리 샤오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신을…….”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다 못한 카이가 입을 열었다. 화수가 신을 신지 않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리 샤오라 화수를 설득하기로 한 것이다. 젖은 흙바닥을 그냥 딛었던 발이 시커멨다. 신이 벗겨지는 것도 모를 만큼 정신이 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화수가 신발에 발을 꿰었다. 하지만 퉁퉁 부운 발은 쉽게 꿰어지지 않고 몇 번이고 헛발질을 해야 했다. 그런 화수의 발을 리 샤오가 조심스럽게 잡았다. 더러운 것이 잔뜩 묻어 있는 발이었지만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정작 움츠러든 쪽은 화수였다.
“안심해.”
신을 발에 꿰어주며 툭, 하고 내뱉는 음성.
“억지로 끌고 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
무릎을 펴 일어나는 리 샤오의 시선이 바닥을 나뒹구는 하얀 떡 조각에 닿아 있었다.
“비소를 타지도 않았어.”
“…….”
그저 잘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녀석이 뭘 좋아하고, 뭘 원하는지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아는 것을 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대체.”
마주한 눈동자가 차가웠다. 차라리 화를 낼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그리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뭐 하자는 겁니까.”
그러게. 뭘 하자는 걸까. 리 샤오도 알 수가 없어졌다. 녀석을 억지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놓아줄 수도 없었다.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오히려 녀석을 잃고 헤매던 그때보다, 녀석을 찾은 지금이 더 두려웠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니 리 샤오도 정말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사과부터,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보다 못한 카이가 끼어들었다. 리 샤오가 먼저 해명을 할 리는 없으니 물꼬를 틔어주자, 싶었던 것. 하지만 카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화수 님께 묻지도 않고 아이를 지우려고 했던 것은, 아무리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거라면 사과할 생각 없어.”
아무리 자신이 물꼬를 틔어주어도, 당사자가 그럴 생각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 * *
“화수야.”
감고 있던 눈이 천천히 들렸다. 뿌연 시야가 선명해지는 데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일어나서, 누가 왔는지 좀 봐봐.”
집사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인영人影.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컹했다. 하지만 이내 낯익은 얼굴이 선명해지고, 긴장했던 화수의 어깨가 주저앉는다.
“진 사장.”
놀랍게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진도현이었다.
“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빙글거리는 얼굴이 얄미웠지만 화수는 얼굴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용케도 들어왔네.”
화수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어느새 머리가 제법 길어 있었다.
“혹시 몰래 들어온 거야?”
“아니,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왔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변에 화수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나도 입구에서 막아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런 저지가 없더라고.”
“…….”
정말 뭐 하자는 거야. 괜스레 짜증이 일었다.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지는 화수를 물끄러미 보던 진도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얼굴은 좋네. 내 집에서 지낼 때보다.”
“…….”
“뭐 고맙다는 인사는 됐어.”
“할 생각도 없었습니다만?”
피식. 진도현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제야 화수가 살아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나저나.”
진도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입가에 번져 있던 미소는 여전했지만, 눈동자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뭐가.”
“왜 이러고 있는 거냐고.”
저 역시도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물론 그 질문의 상대는 전혀 다른 이였지만.
“오해는 다 풀린 것 아니었어?”
“……오해는 무슨 오해.”
불퉁하게 받아치는 화수에 진도현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물론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빙글거리는 눈동자로 돌아가 있었지만.
“배 속의 아이가 내 아이라는 오해. 각인된 것도 모르던데.”
“…….”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되묻는 화수의 얼굴이 핼쑥했다.
“다 말한 거야?!”
“그래도 첫사랑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
물론 해버릴까 생각도 했었다. 리 샤오가 좀 더 괴로워하기를 원했으니까. 하지만 차마 하지 못한 것은 화수 때문이었다. 녀석이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비밀을 제 맘대로 까발리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아주 다행한 일이었지만.
“리 샤오 총감이 아이를 없애려고 한 것도, 다 너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럼, 모든 오해는 해결된 것 아니냐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날 위해서 한 것이라고?”
“뭐야, 그것도 못 들었어?”
“못 들었어!”
물론 듣지 못한 것이 그뿐만은 아니었지만. 진도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의원에게, 네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결정한 모양이더라.”
물론 화수에게 미리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아이가 아닌 진도현의 아이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거기까지 변명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 정도도 사실은 화수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한 것이지, 아니었다면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직 진도현은 화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든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않고 낚아챌 예정이었다. 물론 그땐 화수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그럼 그 말이.”
“화수 님께 묻지도 않고 아이를 지우려고 했던 것은, 아무리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카이의 그 말이 아마도 이 말인 모양이었다. 뒤늦게 며칠 전 대화를 기억해낸 화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사과할 생각이 없다던 리 샤오의 말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좀더, 제대로 대화를 해보는 게 어때.”
뭔가를 떠올리고 얼굴을 찌푸리는 화수에, 진도현도 대강의 상황을 파악했다.
“그거 알아, 화수야?”
“…….”
“그렇게 계속 포기해버리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어.”
“…….”
그래서 녀석이 좋았다. 모든 것에 초연한 녀석이, 바라는 것도 욕심도 없는 녀석이, 진도현은 그렇게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녀석은 초연한 것이 아니라, 아예 포기해버린 거였다. 겁이 나서,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 것이었다.
세상엔 미련이라곤 없는 녀석이라, 그리 가버렸구나, 그렇게 여겼었다. 그게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그러니, 하나쯤은, 녀석을 잡아두는, 미련이 철철 넘치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럼 적어도, 녀석이 다시 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계속 이런 상태로 있을 순 없잖아?”
“…….”
물론 리 샤오와 화수 두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배 속의 아이가 있었다. 그것을 화수가 모를 리 없었다.
화수가 침묵했다. 하지만 꼭 소리를 내어 들어야 대답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만족한 듯 씽긋 웃은 진도현이 손을 내뻗었다. 따뜻한 손이 화수의 볼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썩 내키지 않으면, 그냥 나한테 오는 선택지도 있어.”
“배 타는 거 싫어.”
불퉁하게 내뱉는 화수를 향해 진도현이 되물었다.
“내가 아니라 리 샤오 총감이었어도?”
“…….”
피식. 이리 정직한 녀석이 어찌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또 화수답기도 했다. 각인되었으면서 이리도 제멋대로일 수 있는 곤은 녀석이 유일할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뒤로 물릴 때였다.
“고마워.”
“…….”
불쑥, 내뱉는 말에 처음으로 진도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화수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굳어 있는 진도현을 향해 뒷말이 이어졌다.
“비밀로 해줘서.”
“…….”
이번 역시 리 샤오가 관련된 인사였지만 이번만큼은 진도현도 거슬리지 않았다.
“나도.”
“…….”
의아한 표정을 짓는 화수에 이번에 진도현이 덧붙였다.
“살아줘서, 고마워.”
진심이었다.
* * *
톡톡.
가볍게 유리를 두들기자 굳게 닫혀 있던 차 창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곧바로 사나운 눈동자와 마주쳤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딱 이런 눈빛이리라. 이리도 싫은 것을 용케 그냥 들여보냈다 싶었다.
그래도 지난번에 만났을 때 아무 감정도 담지 않고 있던 눈보다는 나았다. 그땐 그 눈이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오히려 평온한 상태의 것이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보다 지금이 더 좋았다. 적어도 지금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으로는 보이니까. 꿈틀거리는 눈동자를 향해 진도현이 입을 열었다.
“들어가보셔야겠습니다.”
사납게 일렁이던 눈동자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번졌다. 그것을 진도현도 놓치지 않았다.
“빨리요.”
진도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 문이 벌컥, 열렸다. 튀어나오듯 차에서 내린 리 샤오는 이미 홍매루 대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카이 사무관은 그냥 계시지요.”
뒤따라 내리려는 카이를 저지하며 진도현이 열리는 앞문을 도로 밀어 닫았다. 카이가 항의했다. 하지만 진도현은 태연했다.
“무슨 짓입니까.”
“이럴 땐 당사자들끼리 해결하게 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게 무슨. 태평한 진도현의 대꾸에 카이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나직이 되묻는다.
“화수 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 전엔-”
말을 하던 카이가 이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매를 일그러트린다. 그런 카이를 향해 진도현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전 그저 빨리 들어가보시라는 말만 했을 뿐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오해할 만한 뉘앙스를 풍긴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괜찮을까요.”
하지만 카이도 더는 거기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았다. 당사자끼리 해결하게 두어야 한다는 진도현의 의견에 카이 역시 동의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해결이 될지는 미지수였지만.
“저야 모르죠.”
다소 무책임한 대꾸에 카이의 표정이 다시금 굳었다. 하지만 진도현은 태연했다.
“알 게 뭡니까.”
“…….”
마지막까지 수색을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리 샤오가 화수는 죽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였다. 아니었다면, 제게는 전혀 득이 없고 남 좋을 일만, 스스로 할 하등의 이유가 없잖은가.
“이왕이면 괜찮지 않게 끝나면 더 좋고.”
농담처럼 진심을 내뱉은 진도현이 자동차에서 멀어졌다. 그런 진도현을 카이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 시선은 이미 조금 전 리 샤오가 사라진 대문을 향해 있었다. 그것 말고는 카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쓸모없어진 홍등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구조가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기껏해야 리 샤오의 본가에 비하면 비루한 수준의 크기였다. 그럼에도 그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벽을 다 부수면서 가로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 그리하는 쪽이 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
한 번 멈추지도 않고, 속도를 늦추는 법도 없었던 걸음이 느릿해진 것은 코끝에 닿는 달큰한 냄새를 맡았을 때였다. 내 것. 내 암컷의 냄새. 가슴이 앓아 내렸다. 안도감과 동시에 불안이 리 샤오를 휘감았다.
저벅저벅.
속도는 늦췄지만 멈추지 않은 걸음으로 달큰한 향이 새어 나오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의식이었다. 두렵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둥근 아치형의 장지문을 보는 순간 다시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차마 그 문을 열지 못하고,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못하고 리 샤오가 그리 대치하고 서 있던 그때였다.
드르륵.
거짓말처럼 장지문이 열렸다. 그리고 휘둥그레진 새까만 눈동자를 보는 순간, 마구 날뛰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왜, 여기에.”
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쪽은 화수였다. 기척을 느끼고 나온 것인가 했는데 놀란 표정을 보니 아니었던 모양.
“괜찮은 건가.”
사실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 샤오는 화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무슨.”
전혀 예상치 못한 리 샤오의 등장도 놀라울 판에, 이번엔 전혀 까닭을 모르겠는 질문까지. 화수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을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진 사장.
미간이 살풋 구겨졌다. 하여간 멋대로 구는 건 알아줘야 했다.
“무슨 말을 어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
당연히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리 샤오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않았다. 별일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 곧바로 돌아가버릴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리 샤오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뭘, 어쩌라는 건가.
스윽.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고개를 살짝 숙였지만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들어오시겠습니까.”
말 그대로 예의상 한 말이었다.
진 사장의 충고대로 이야기를 나누긴 해야겠지만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질 않았다. 물론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준비가 될 것 같지도 않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었다. 그건 리 샤오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것을 증명하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 앞을 지키고만 서 있는 리 샤오에, 들어올 것 아니면 돌아가라는 말을 에둘러 한 것이었다. 아무리 화수라도 그럼 이제 더 할 말 없으면 돌아가라는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으니. 하지만 그것이 리 샤오에게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줄은 화수도 몰랐다.
성큼.
기다렸다는 듯 한 발 내딛는 리 샤오에 화수의 눈매가 다시금 구겨졌다. 그럼에도 한 발 뒤로 물러서 길을 내어주는 것도 잊지는 않는다.
“둬.”
방 안이 어수선한 것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단 한 번도 거슬리지 않던 것이 이상하게 민망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황급히 이부자리를 한쪽으로 밀어놓는 화수를 리 샤오가 말렸다. 집어 들었던 베개를 도로 내려놓았다.
“괜찮다면.”
“…….”
대충 맨바닥에 자리를 잡은 리 샤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의원을 들여보내고 싶은데.”
“…….”
내내 하고 싶던 이야기였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여기를 드나들고 있는 봉사 노인은 정식으로 의술을 배운 적이 없는 이였다. 감시의 눈에 걸려들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안 그래도 그런 이에게 녀석을 맡겨놓는 것이 거슬렸는데 조금 전 일로 마음을 굳혔다. 적어도 제대로 된 의원이라도 붙여놓아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화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한 결정이었다.
“의원이라면, 이미 있습니다만.”
하지만 이번 역시 돌아온 것은 거절. 리 샤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피한 쪽은 뜻밖에도 리 샤오였다.
“그렇군.”
강제로라도 들여보내겠다고 할 줄 알았던 리 샤오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말로만 물러난 것이 아니라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할 얘기가 끝이 났으니 일어난 것이지만 덕분에 당황한 쪽은 화수였다.
“정말 알았다는 겁니까, 아니면 맘대로 하겠다는 겁니까.”
“…….”
뒤따라 일어난 화수가 따져 물었다. 리 샤오의 걸음이 멈췄다. 마주한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화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한 발 뒤로 물러선 쪽은 리 샤오였다.
“내 맘대로 할 거였으면 이리, 있지도 않았겠지.”
낮은 한숨과도 같은 대답.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까칠했다. 몇 날 며칠을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이곳을 지키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와중에도 그것을 놓치지 못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리 있으실 겁니까.”
“글쎄.”
내내 묻고 싶었다. 대체 뭘 어쩌자는 거냐고.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다소 모호한 대답이었다.
“아마도, 네가 여기 있는 한.”
마치 그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리 샤오가 이내 간단히 결론을 냈다.
“제가 평생 이리 있겠다 하면요.”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묻는 화수에도 리 샤오는 크게 상관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관없어, 평생이라도.”
진심이었으니까. 숨도 잘 쉬어지지 않던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관, 없습니까?”
“그래. 상관없어.”
기가 막혔다. 리 샤오의 담담한 말투가 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이번엔 화수가 뭐라 한마디 받아치기도 전에 리 샤오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만 않으면 돼.”
“…….”
화수의 눈매가 기름해졌다. 그제야 화수도 리 샤오가 말한 상관없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달싹이던 입술이 천천히, 소리를 만들어냈다.
“전 싫습니다.”
“…….”
시커먼 심해가 뒤척이는 것을 보며 화수가 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평생, 이리 지내는 건.”
“…….”
뿌옇게 일어나던 흙탕물이 천천히 다시 가라앉는다. 그것을 확인한 화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한 가지만 물어도 됩니까.”
“…….”
대답은 없었지만 사실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주한 새까만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한 채 화수가 물었다.
“왜, 사과하지 않겠다고 하신 겁니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히 돌아왔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
그러니 사과도 할 수 없었다. 고작 미안하다는 말로,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각오하고 결정한 일이었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하찮아서, 굳이 사과할 필요도 없다는 건 아니란 말이군요.”
“…….”
제 행동이 그런 오해를 일으킬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하지만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리 샤오는 알지 못했다. 이 기회를 놓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줄은.
“그나저나.”
“…….”
“괜찮으시겠습니까.”
“…….”
“아이는 질색이시잖습니까.”
“…….”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미 주제가 넘어가버린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번 대답은 놓치지 않았다.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그건 그러네요.”
피식, 하고 화수가 웃었다.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리 샤오는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 웃음을 흘리던 화수가 갑자기 얼굴을 굳힌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왜.”
“별것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굳은 리 샤오의 얼굴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다. 좀처럼 경계를 풀지 않는 리 샤오를 보고 화수가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질색이라는 말이,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누가, 라는 질문은 그대로 입안으로 삼켜졌다. 화수의 난감한 시선이 부푼 배를 향해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제법, 발길질이 매섭거든요.”
덧붙이는 설명에 그제야 리 샤오도 상황을 파악했다.
“벌써, 발길질을 하는 건가.”
“벌써라니요. 한참 되었습니다.”
“한참이라면 언제부터?”
“어, 글쎄, 언제였더라.”
물론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태동은 느낀 날, 그것으로 저를 쫓는 리 샤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으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사실대로 모두 털어놓을 수가 없을 뿐.
“만져보실래요.”
“…….”
빤히 저를 보는 시선이 무표정했다. 어깨를 으쓱인 화수가 제안을 뒤로 물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싫으면-”
슥.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배에 닿았다. 천 위로도 느껴지는 뜨끈한 체온.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배 속의 아이가 발을 쭉 내밀었다. 마치, 나 여기 있어요, 라고 대답하기라도 하듯 내민 발은 리 샤오의 손바닥과 정확히 맞닿았다.
리 샤오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눈썹이 꿈틀거리다 이내 다시 좁혀지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화수는 놓치지 않았다.
“이제 좀 후회가 되십니까.”
화수가 물었다.
“아니.”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화수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런 화수를 리 샤오가 가만히 응시했다. 물론 배를 감싼 손은 물리지 않은 채였다.
* * *
“리 샤오 님.”
카이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땐 이미 리 샤오는 퇴근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카이가 급히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 보고드렸던 인력거꾼 말입니다.”
막, 벗어두었던 상의를 왼팔에 꿰고 있던 리 샤오가 고개만 살짝 들어 카이를 본다. 기다리고 있던 카이가 마저 보고를 이었다.
“지금 밖에서 대기 중이라서 말입니다.”
“내일, 오라고 해.”
고개를 내저은 리 샤오가 집무실을 가로지른다. 꿰어 입은 상의 단추는 잠그지도 않은 채였다. 리 샤오가 이리 급히 서두르는 이유를 카이도 모르지 않았다.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화수는 여전히 홍매루에서 지내고 있었고, 그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 군대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라면 그나마 차에서 보던 집무를 집무실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 정도.
카이가 보기에도 화수는 도망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걸 리 샤오도 모르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지만,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카이로서는 지켜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것이.”
그대로 집무실을 나서려는 리 샤오의 앞을 막아서자 검은 눈동자에 날이 섰다. 무의식적인 반응이었지만 당하는 입장으로서는 등줄기가 쭈뼛서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노려보는 시선은 여전히 사나웠다.
“내일 오라는 말 못 들었나?”
“실은.”
하지만 카이도 무려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리 샤오의 앞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보고를 드리지 못했습니다만, 그가 도성에 올라온 것이 벌써 몇 주 전입니다.”
“…….”
보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를 리 샤오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내일은 꼭 집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해서 말입니다.”
늙은 어미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했다. 더 이상은 카이도 무작정 그를 잡아둘 수가 없었다.
“아니면 다른 이에게 조사를 하라-”
“들어오라고 해.”
못마땅한 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허락이 떨어졌다.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내키지 않았던 모양.
“들어오시죠.”
열린 문틈으로 허름한 차림의 중년의 사내가 주춤거리며 들어섰다. 안 그래도 주눅이 잔뜩 든 사내는 소파에 앉은 리 샤오를 보고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런 사내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지금 리 샤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패기는 카이조차 움츠러들게 할 만큼 흉흉했으니까. 아마도 초조함에서 무의식적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겠지만 그 사실을 사내가 알 리 없었다.
“묻는 질문에 아는 대로만 대답하면 됩니다.”
카이가 해줄 수 있는 충고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안 그래도 굽은 어깨를 더 궁글린 사내가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가면을 쓴, 이를 태운 적이 있다고?”
리 샤오가 사내를 찬찬히 훑으며 물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다면 이런 눈빛일 게 분명했다. 사내가 황급히 들었던 고개를 푹 숙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예, 예.”
“무슨 가면이었지?”
“여, 여우 가면이었습니다요. 그 시장 자판에서 파는, 싸구려, 가면, 이었는데-”
“…….”
말을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주절주절, 묻지도 않은 것까지 내뱉는 사내에 리 샤오의 표정이 다시금 험악해졌다. 그것을 본 카이가 사내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찌른 것뿐인데도 사내는 칼에 찔리기라도 한 듯 기겁을 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입은 다물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묻는 질문에만 답하세요.”
“예. 예.”
지금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좀 더 편안한 대화가 가능했을 텐데.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여우 가면을, 어디서 태웠지?”
“시장 입구에서, 태웠습니다요.”
“어디로 가서 내려줬는지도 기억하나?”
“예, 물론입니다요.”
“…….”
“그것이, 홍매루라는 유곽이었습니다요.”
사나워지는 눈매에 황급히 뒷말을 이었지만 오히려 리 샤오의 눈빛은 조금 전보다 더 흉흉해져 있었다. 그것을 오해한 것인지 사내가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정말입니다요, 제가 똑똑히,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들 거라는 말은 못 들었나?”
“제,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사내가 펄쩍 뛰었다.
“그 사내가, 분명, 홍매루로 가자고 했고, 제가 그 유곽의 집사에게 삯까지 받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요.”
“……사내?”
조금 누그러졌던 리 샤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지만 머리를 조아린 사내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사내의 입이 다시금 벌어졌다.
“예, 사내였습니다요. 옷은 계집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사내의 것이라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가 얼굴을 보았지요. 처음엔 제가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아주, 어여쁜 사내였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기억하고 있습지요.”
이번에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었지만 이번엔 카이도 그런 사내를 저지하지 않았다. 리 샤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햇살이 좋았다.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눅눅해진 이불이며 옷가지들을 들고 나와 볕을 쐬었다. 화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화수가 이부자리를 드는 일은 없었다. 저보다 훨씬 더 조그만 여인들에게 병자는 얌전히 대청마루에 앉아 볕이나 쬐라며 이불과 비슷한 취급을 당했으나 크게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대청마루에 기대앉아 커다란 들통에 밀린 빨래거리들을 집어넣고 그것을 밟는 이들을 구경했다. 꺄르륵, 꺄르륵, 어여쁜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바람이 일었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담뿍 담긴 여름 바람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자신에게 이리 완벽한 날이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런 행운이 자신에게 올 리가 없는데.
눈앞의 사내를 마주하고서야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너무나 예상대로여서 웃음이 났다. 이건 또 이것대로 완벽한 마무리다 싶어서.
“또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것이 리 샤오의 기분을 더 상하게 만들리라는 걸 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나름 꾹꾹 눌러 참고 있었지만 채 갈무리되지 못한 패기가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우리, 이제 괜찮은 것 아니었습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평소보다 훨씬 낮아진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허나 화수는 저를 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체 언제 말할 생각이었지?”
다행히 리 샤오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니까, 뭘 말입니까.”
“네가, 여우 가면이었다는 걸.”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담담히 내뱉는 말투가 처음으로 도움이 되었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있던 화수가 겨우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떨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것은 리 샤오에게 고려대상도 되지 않았다. 화수가 그리 나올 줄 예상했다는 듯 그저 나직이 중얼거렸을 뿐이다.
“여우 가면이 뭐냐고 묻지 않는군.”
“…….”
그제야 화수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모르는 척을 할 거면 애초에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물었어야 했다. 더 이상 부인도 못하는 화수를, 리 샤오가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숨을 내뱉듯 툭, 하고 내뱉는다.
“왜, 그렇게 너만 보면 화가 났을까.”
“…….”
“그땐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거든.”
“…….”
“난 분명 네가 처음인데, 너는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구는 거야.”
“…….”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럴 거라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냥 체념해버리는 거, 아니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는 느낌, 그게 그렇게 기분 더러울 수가 없었거든.”
바로 지금처럼.
반짝이던 눈동자가 이내 빛을 잃는다. 늘 그랬다. 녀석은 늘 선을 정해두고, 거기까지만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 나 때문이었던 거지.”
“…….”
내내 떨쳐지지 않던 불안의 정체가 이제야 선명해졌다. 모든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용서하지 않은 거지? 다 괜찮은 듯이 그리 지나갔지만, 실은 그냥 포기해버렸던 거지?”
“…….”
“그날처럼.”
새까만 동공이 확장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 조그만 머리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게 리 샤오를 미치게 했다.
“무슨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생각은 바꿔먹는 게 좋을 거야.”
“잠깐-”
내내 침묵하던 화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목소리는 리 샤오의 귀에는 전혀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주한 리 샤오의 눈은 화수를 향해 있었지만, 초점이 전혀 맞질 않았다.
“멋대로 사라지면 그땐 여기 홍매루뿐만 아니라, 너와 관련된 이들이라면 다 죽여버릴 거니까.”
“리 샤오 님.”
음산하게 경고하는 리 샤오의 등 뒤로 패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못할 것 같아? 그럼 한번 해보든지.”
“리 샤오 님!”
그런 리 샤오를 진정시키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지금은 리 샤오의 입을 막아야 한다, 그것 말고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멱살을 붙잡은 화수가 제 쪽으로 리 샤오를 바싹 끌어당겼다.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내 말도 좀 들으란 말입니다, 빌어먹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입술을 뗀 화수가 버럭 소리쳤다. 그제야 마주한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괜찮은 척했던 게 아니라, 정말 괜찮았던 겁니다.”
여전히 불신의 눈빛인 것과는 별개로.
“정말이란 말입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날, 리 샤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더 이상 자신이 그에게 화가 나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거짓말을 한 이유를 알기도 전이었다. 분명 머리끝까지 화가 났었는데, 이 이상 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었는데, 그 순간 눈에 들어오는 건 그의 손에 감긴 붕대였다. 몇 번이고, 묻고 싶은 것을 겨우 눌러 참은 것은 화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말하지 않았지?”
“…….”
“기회는 많았잖아.”
“…….”
“하다못해 조금 전에라도 솔직히 인정해야 했어. 헌데, 하지 않았지.”
“…….”
“대체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지?”
낮은 한숨과도 같은 물음. 그 순간 닫혀 있던 화수의 입술이 열렸다.
“평생.”
그 대답에 가라앉았던 눈동자가 다시금 새파랗게 일어났지만 화수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비밀로 했을 겁니다.”
“…….”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으나 실제로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치 온몸이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
“화수야.”
“별것도 아니었으니까요.”
필사적으로 아닌 척하고 있을 뿐. 화수가 애써 태연을 가장한 목소리로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냥, 잠깐 스친, 기억도 나지 않는 그런 만남이었잖습니까.”
“너는, 그랬나?”
“…….”
“네게는, 잠깐 스친, 기억도 나지 않는 그런 만남이었나?”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순간 사람을 놀리는 것인가 싶었지만 따지듯 묻는 화수에도 리 샤오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화수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설마.
“제가 아니라, 리 샤오 님을 말하는 거잖습니까.”
“난 그런 적 없어.”
“무슨-”
“한 번도, 잊은 적 없다고 말했어.”
“…….”
“그러니까, 대답해.”
“…….”
“너는 잊고 싶은 일이었냐고 물었어.”
기가 막혔다.
“그걸 꼭 제 입으로 말해야 합니까.”
“말해.”
“그날 일을 잊지도 못한다는 증거가 이리도 분명하게 있는데, 그걸 기어코, 제 입으로 들으셔야겠습니까?”
“몰라, 모르겠어.”
“…….”
“모르겠어, 화수야.”
이번만큼은 알겠다. 다 알면서 기어코 제 입으로 대답을 듣겠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천천히 리 샤오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던 손이 아래로 떨궈졌다. 그것을 제게서 떨어져나가려는 것이라 여긴 리 샤오가 그런 화수의 손목을 붙들었다. 한 손에 들어오고도 남는 앙상한 손목.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을 꽉 쥐지도, 그렇다고 놓아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화수는 리 샤오에게서 물러서려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니라고 부인도 못한단 말입니다.”
“…….”
그저, 힘이 빠져버린 거였다. 겨우 버티고 있었던 마지막 기운마저 사라져버렸다. 그것뿐이었다.
“댁을 연모한다는 증거가, 아니라고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이리 뻔히 있는데, 만천하에 외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그걸, 꼭 제 입으로 들어야겠습니까.”
“…….”
리 샤오도 그런 줄 알았다. 각인만 하면, 내 것이 되는 줄 알았다. 내 것이니까, 그거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어리석게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
“평생 처음으로 가져본, 따뜻한 기억이란 말입니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살고 싶어지는, 유일한 기억. 그것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부정당할까 봐, 겁이 났다. 설사 그것이 자신 혼자만의 착각일지라도, 그냥 소중히 숨겨두고 싶었다.
“그런 기억을 나는 왜 잊었을 거라 생각했지?”
“…….”
“내게도 그럴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
“……그랬습니까?”
그런데 왜. 그날 오지 않았습니까?
화수는 묻고 싶은 것을 입안으로 삼켰다. 늘 그랬듯. 하지만 차오르는 눈물만큼은 삼킬 수가 없었다. 두 손이 붙잡혀 어찌해볼 수도 없는 사이, 툭, 하고 물기가 볼을 타고 흘렀다. 한번 터진 둑은 어찌할 수 없듯이, 눈물이 쏟아졌다.
툭, 툭, 툭, 고인 물방울이 연신 볼의 물기를 덧그린다. 흠뻑 젖은 볼을 타고 내려 턱에 고였던 눈물이 리 샤오의 가슴께로 떨어졌다.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그것이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심장을 돌로 두들겨 맞고 있는 것 같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후회했어.”
화수의 눈이 커졌다.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았어야 했다고. 멋대로라도, 싫다고 해도 그냥 그때 데려갔었다면 이리 오래 찾아 헤매는 일도 없었을 텐데.”
“…….”
붙들고 있던 손목을 놓고 천천히 올라온 손이 화수의 볼을 쓸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조각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묻고 싶어졌다.
왜, 그날 오지 않았던 건지.
혹, 연유가 있었던 건 아닌지.
어쩌면 제가 생각했던 최악의 경우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하려면 물어야 했다. 설사 꼴사나운 모습이 되더라도. 지금 제가 묻지 않으면 평생, 이대로 눈앞의 사내를 믿지 못할 테다.
“헌데 어째서.”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었다. 눈앞의 이 사내를 한번 믿어보고 싶었다.
“그날 데리러 오지 않았습니까.”
“…….”
“어째서, 오지 않았습니까?”
원망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리 샤오에 혹 책망의 말투가 되었나 싶어 화수가 황급히 덧붙인다.
“원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연유가 있는 거면-”
“그날, 나왔던 거야?”
하지만 리 샤오가 굳어 있었던 것은 전혀 다른 이유였다.
“나왔었어?”
“…….”
이번엔 화수의 표정이 굳었다. 그제야 조금 전부터 묘하게 어긋나 있던 대화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실은 그냥 포기해버렸던 거지?”
“그날처럼.”
“멋대로라도, 싫다고 해도 그냥 그때 데려갔었다면.”
조금 전 그냥 흘려보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비가 왔습니다.”
“…….”
“아침부터 올 줄 알고 있었으면서, 나갈 땐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서.”
“…….”
“비라면 질색인데, 내리는 것도 몰랐지요.”
“…….”
그날의 기억.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애초에 문신처럼 눈에 박혀서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었다.
“예, 나갔어요.”
“…….”
“혹, 제가 늦었던 겁니까?”
두려웠다. 제 탓이었을까 봐. 제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를 놓쳐버린 이유가 실은 자신이 머뭇거린 탓이었을까 봐. 그게 가장 두려웠다.
“아니.”
흔들리는 눈동자를 향해 리 샤오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 잘못이야.”
“…….”
“다 내 잘못이야.”
“…….”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까, 화수야.”
“…….”
“울지 마, 제발.”
그 애원하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제가 다시 울고 있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화수도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화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새하얀 손가락 사이로, 물기가 흘러넘쳤다. 이미 몸은 제 통제를 넘어섰다.
그런 화수를 리 샤오가 당겨 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저항 없이 끌려오는 몸을 꽉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화수야.”
그리 나직이 속삭인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떨궈진다.
“화수야.”
이마, 손끝, 손마디, 손등까지 천천히 내려온 입술이 두 손에 가려진 화수의 입술 언저리에 닿았을 때. 리 샤오가 가만히 화수의 두 손목을 붙잡았다.
“화수야.”
괜찮다는 듯, 안심해도 된다는 듯. 얼굴을 감싸 쥐고 있던 두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화수야.”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눈물은 괴롭힘을 당할 때보다 다정하게 건네는 말에 더 쉽게 흐르는 법이었다. 애초에 울음을 멈출 생각이라면, 이리도 다정하게 저를 부르면 안 되는 거였다.
“그만. 그만 부르십시오.”
이번엔 화수가 애원했다. 그리 애원하는 화수의 눈에서는 연신 눈물이 툭, 툭, 툭, 떨궈지고 있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화수의 이름을 속삭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화수야.”
마치 지금까지 부르지 못했던 것까지 모두 보상받겠다는 듯. 애달픈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화수야.”
화수가 눈을 감았다. 주륵, 주륵, 물기가 볼을 덧그렸다. 꾹꾹 눌러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터지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리 샤오를 당겼다. 달큰한 입술이 입술을 눌러왔다.
어느 때보다도 다디단 입맞춤이었다.
“잠깐.”
리 샤오의 상의 단추를 풀던 화수의 손이 멈칫한다. 몇 번이고 각도를 달리해 겹치던 입술이 떨어졌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리 샤오의 옷자락을 붙든 채, 화수가 따져 물었다.
“혹, 내키지 않으십니까.”
물론 지금 상황에서 물을 질문은 아니었지만 몸이 달아 헐떡이는 자신과는 달리 리 샤오는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 질문에 난감한 듯 미간을 찌푸린 것을 보니 더더욱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괜한 우려였다는 듯, 리 샤오가 손을 내뻗었다.
툭.
반사적으로 움츠러든 화수의 볼을 가볍게 두들긴 리 샤오가 나직이 내뱉는다.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걸까.”
기가 막힌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얼굴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완전히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조금 전 분명 제 눈으로 리 샤오의 눈에 어린 난감한 기색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 화수의 눈빛을 알아차린 리 샤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어.”
“…….”
“적당히 조절할 자신이.”
조금 전과는 달리 확 가라앉은 목소리. 그 안에서도 난감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이번엔 화수도 불안하지 않았다.
“적당히가 가능하면, 오히려 곤란합니다만.”
“농담인 거 같나?”
“농담이면 곤란하다니까요.”
겁이라고는 전혀 없는 화수에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이미 리 샤오의 속내를 안 지금은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이리 보여도, 쉽게 부서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유리로 된 인형이 아니란 말입니다.”
“…….”
“그러니, 리 샤오 님.”
“…….”
“이리했는데도 더 머뭇거리시면 싫어서 버티시는 것이라-”
다행히 이번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이 휙, 하고 당겨졌다. 화수도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갔다.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빌어먹을.”
마주한 눈동자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화수의 옷을 벗기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화수도 조금 전 풀다 만 상의 단추를 마저 끌렀다. 그 사이, 옷고름만 풀면 되는 화수의 옷이 먼저 벗겨졌다.
툭.
어깨에 걸쳐져 있던 옷이 맨바닥에 떨궈진다. 반사적으로 든 시선에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조금 전, 머뭇거리던 그 눈동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일렁이는 눈동자. 저를 잡아먹을 준비를 끝낸 짐승의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화수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금방이라도 제게 달려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눈동자가 겨우 이성을 붙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기다려, 상태의 짐승처럼. 그것이 이리도 기분 좋은 일일 줄은 몰랐다.
두꺼운 혀가 밀고 들어왔다.
목구멍까지 가득 채운 살덩이가 도망치던 화수를 붙들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뭉개듯 비볐다. 그러더니 혀를 쭉 빤다. 뿌리가 아릿했지만 화수는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혀를 내주었다. 제 입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뜨거운 곳에서 다시금 혀를 빨렸다. 몇 번이고, 빨고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제자리로 돌아왔을 땐 입안 전체가 달궈진 것처럼 얼얼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번엔 각도를 달리해 다시금 혀가 들어왔다. 확실히 제 것보다는 굵고 큰 살덩이였다. 사실 리 샤오가 저보다 큰 것이 이뿐만은 아니었지만.
츄읍, 춥, 츱.
질척이는 젖은 소리가 야했다. 입안에 삼키지 못한 침이 잔뜩 고였다. 하지만 그것을 삼킬 틈도 없었다. 마치 물속에서 혀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리 샤오와의 입맞춤은 늘 그랬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리 샤오가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윗입을 꿰뚫리는 것뿐인데, 벌써부터 허리 아래가 저릿저릿했다.
아.
주춤주춤 밀리던 발치에 이부자리가 걸렸다. 반나절 햇살을 받아 뽀송뽀송해진 이불이었다. 순간적으로 그 위로 올라서는 것을 망설인 것은 오직 그 이유였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당장이라도 자신을 한입에 삼킬 기회만 노리고 있는 야생동물 앞에서는 더더욱.
“힉-.”
미는 힘을 견디지 못한 몸이 휙, 하고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푹신하고 뽀송뽀송한 이불이 있어 다행이었다. 물론, 제가 뒤로 넘어가는 순간 허리를 단단히 받쳐주는 두 개의 팔이 없었다면 이리 안심할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스윽.
턱을 타고 내려간 입술이 화수의 목젖을 이로 긁었다. 아. 가늘게 벌어진 입에서 달뜬 숨이 새어 나왔다. 입술로 닿는 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아주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모든 감각이 곤두선 몸은 별것 아닌 자극에도 허리가 앓아 내렸다. 사실 닿지 않을 때도 사정은 비슷했었다.
츱.
이번엔 입술. 살짝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젖은 열기에 차라리 이로 긁어내리는 쪽이 더 나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흣.”
깨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천천히 아래로 더듬어 내려오던 입술이 젖꼭지를 물었던 것. 입술로 가볍게 문 것이지만 사실 지금은 차라리 깨물리는 쪽이 나았다. 콩벌레처럼 둥글게 말리는 가슴께를 리 샤오가 손으로 꾹, 눌렀다. 그러면서도 입에 문 것을 혀로 진득하게 짓눌렀다가 이내 쭉, 하고 빨았다.
힉.
등줄기가 확 조여들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확 꺼지는 기분에 화수가 저도 모르게 리 샤오의 어깨를 밀었다. 물론 그만두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에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일 뿐. 그리고 그런 화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리 샤오는 물러나지 않았다.
쭉쭉, 빨았다가 혀로 빙글인다. 도드라진 젖꼭지를 축축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섬세하게 더듬는다. 끝을 세워 모양대로 더듬다가 이내 뭉개뜨릴 듯 꾹꾹, 짓누르고, 다시 가볍게 할짝인다. 아아. 그럴 때마다 화수의 벌어진 입에서 달큰한 숨이 새어 나왔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빨리는 곳은 분명 젖꼭지인데, 근질근질대는 건 아래쪽이었다. 아랫배가 묵직했다. 아직 손도 대지 않은 곳이 벌써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엉덩이를 들썩이고 싶었다. 사타구니를 맞대고 마구 비비고 싶었다. 그나마 아직은 이성이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측.
그 때 거짓말처럼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론 그런 안도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뜨거운 입안에 감싸 있던 젖꼭지가 서늘해졌다. 진분홍색의 젖꼭지가 바짝 섰다. 화수가 고개를 외로 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응시하는 리 샤오의 시선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화수가 헐떡이며 물었다.
“계속, 그리, 보고만 계실 겁니까.”
자신은 시선만으로도 이리 흥분했는데. 묘하게 느껴지는 온도차가 썩 기분 좋지 않았다.
하지만 똑바로 고개를 돌려 마주했다면 알았을 것이다. 리 샤오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욕망을 꾹꾹 누르고 있는지를. 당장이라도 이 몸을 벌리고 제 것을 박아 넣고 싶었다.
제 것이라고, 감히 누구도 탐할 엄두도 내지 않게 잔뜩 제 것으로 온몸을 채워놓고 싶었다. 본능을 억지로 누르느라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화수야.”
그럼에도 리 샤오가 이리 필사적으로 본능을 누르고 있는 이유는.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온전히, 화수였다.
“말해봐.”
멋대로 하고 싶다, 망가트리고 싶다는 욕구와 동시에 상냥하게 대해주고 싶다, 소중하게 다루고 싶다는 욕망이 공존하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걸.”
천천히 고개를 틀었던 화수도 그제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의 눈동자를 확인했다. 못마땅하던 기분이 그제야 조금 누그러졌다. 냉정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저 표정이 사실은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표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처음으로 눈앞의 사내가 사랑스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송곳니 한 번이면 제 숨통을 끊을 수도 있는 거대한 맹수를 앞에 두고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화수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리 샤오 님은요.”
화수가 손을 뻗었다. 사실 리 샤오의 볼에 닿기에는 먼 거리였지만 반쯤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내뻗은 손에 리 샤오의 볼이 닿았다. 닿은 정도가 아니라 볼 전체가 만져졌다. 화수가 손을 움직인 그 순간, 리 샤오는 이미 상체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역시도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닌 무의식이었다.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눈앞의 짐승이, 정말로 제게 마음을 내어주었다는 것이. 가슴이 앓아 내렸다.
“리 샤오 님은, 어찌하고 싶으십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말을 하려던 리 샤오가 이내 멈칫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마주한 눈이 눈꼬리를 접었다.
“제가 원하는 것이, 리 샤오 님과 왜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제야 리 샤오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화수의 눈 아래 점이 짙어졌다.
못 당하겠군.
애초에 자신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자신을 멋대로 굴게 해준 건 화수였다. 그것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하지만 그리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는 리 샤오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올려다보는 화수의 눈매가 사나워진다. 사실 제 아래 깔린 상태에서도 겁이라고는 먹지 않는 녀석은 화수가 처음이었다. 시선을 피하는 법도 없었다. 그게 그리도 못마땅하더니, 지금은 그런 태도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결국 참지 못한 화수가 폭발하듯 입을 열었다.
“아셨으면, 그만 좀, 뜸들이고-”
사실 애원하고 싶은 기분을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 만약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이번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술을 먹혔다.
꾹꾹, 짓누르듯 눌러오는 입술에도 화수는 버티지 않고 입술을 열었다. 입안이 가득 찼다. 사타구니가 문질러졌다. 입안은 더 가득 찼다. 밭은 숨이 맞닿은 입안으로 사그라졌다.
집요해.
늘 그랬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행위임에도 리 샤오는 단 한 번도 입맞춤을 잊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집요하기까지 했다. 처음, 저를 안았을 때조차도. 꽉 감은 눈꺼풀 안으로 물기가 차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생리적인 눈물이었다.
츱, 츠읍.
몇 번이고 각도를 달리해 겹쳐진다. 살덩이가 비벼졌다. 살살 굴리다가 으깨버릴 듯 짓이긴다. 입안을 가득 채웠다가 입천장을 문지른다. 연약한 살이 문질러질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오싹댔다.
숨을 어떻게 쉬는 거였더라.
자꾸만 호흡이 엉켰다. 처음도 아닌데, 숨 쉬는 방법도, 손을 어찌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손을 리 샤오가 제 목을 감게 했다. 단단한 목에 두 팔을 감자, 입맞춤이 거칠어졌다. 삼키지 못한 침이 입안에 고였다. 혀가 움직일 때마다 젖은 소리가 커졌다. 그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숨, 좀. 뒤로 물러서려는 화수를 리 샤오는 용납하지 않았다.
힉.
혀를 물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경고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쯕.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안달나게 하지 마.”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부족한 공기를 들이켜는 것이 우선이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거의 닿을 듯이 떨어졌던 입술은 짧은 경고와 함께 도로 달려들었으므로.
츠윽, 츱, 츠윽.
젖은 살덩이가 맞부딪힐 때마다 내는 그 질척이는 소리가 꼭 아래를 꿰뚫리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화수는 눈을 꽉 감았다. 그런다고 아래로 몰리는 열기를 어쩔 수는 없었지만. 아래가 녹아내렸다. 흐물흐물해진 입구가 급기야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허리 아래가 부들부들 경련했다. 어떻게, 좀.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화수가 애원했다.
슥.
허리춤에 묶어놓은 끈이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은 여전히 맞닿은 채였다. 아래가 서늘해지는 것으로 마지막 남은 속옷이 벗겨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제 것을 단단한 손이 쥐어왔다. 델 듯이 뜨거운 손바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
반쯤 선 것을 쥐고 한번 흔들었을 뿐인데, 눈앞이 쑥 꺼졌다. 아아. 어찌할 틈도 없었다. 이제는 완전히 기립한 것을 쥐고 리 샤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잠깐.
다급해진 화수가 뒤늦게 외쳤지만 그런 외침은 맞닿은 입안에서 그대로 사그라졌다. 그마저도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제대로 된 단어를 내뱉을 수가 없어졌다.
아아, 아.
슥슥,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달뜬 신음이 쏟아졌다. 확 조여들었던 허벅지 안쪽 근육이 뒤늦게 벌벌 떨렸다. 그리고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토정했다. 눈앞이 훅, 꺼졌다.
쯕,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제 입술에서 난 것이라는 건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도 지분댄 입술임에도 아쉽다는 듯 혀로 윗입술을 들어 올려 그것을 잘근잘근 깨물고 나서야 뒤로 물러섰다.
그러는 중에도 리 샤오는 부들부들 떠는 화수의 것을 달래듯 부드럽게 쥐고 흔들었다. 조금 남아 있던 정액들이 투둑, 투둑, 배 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꽉꽉, 참고 있던 숨이 뒤늦게 새어 나왔다. 젖은 몸이 축 늘어졌다. 등줄기가 척척했다.
슥.
늘어진 화수의 성기를 놓은 리 샤오가 이번엔 한쪽 무릎을 잡아 올렸다. 쯕. 아래가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화수는 저항하지 않았다. 사실 저항할 힘이 없었다는 말이 더 맞았다.
푹, 주름을 더듬던 손가락이 옴폭한 구멍을 파고들었다.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마디 하나가 쑥 들어왔다. 흐물흐물해져 있던 입구가 뒤늦게 손가락을 씹었다. 오물거리며 씹는 입을 떨어트리고 빙글인 손가락이 각도를 달리해 더 깊은 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아아.
화수의 입에서 한숨 같은 숨이 새어 나왔다. 다시금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엉덩이 아래가 척척했다. 손가락이 마디 끝까지 들어왔다. 입구에 다른 손가락들이 느껴졌다. 밀어 넣은 손가락을 빙글거린다. 내벽이 떨어져나갔다 이내 맹렬히 달라붙는다.
하지만 달라붙는 살덩이를 떨쳐내듯 손가락이 밖으로 빠졌다. 슥슥슥, 손가락이 들락인다. 아아,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화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속도는 더 빨라졌다. 화수의 정액으로 젖은 손가락은 어렵지 않게 미끄러져 들어왔다가 미끄러져 나갔다. 쫀득하게 달라붙던 내벽도 어느새 길이 났다.
힉.
질척한 소리가 조금 커졌다고 생각한 순간 손가락이 숫자를 늘렸다. 천천히, 하지만 집요하게 아래를 벌린 결과 두 개도 빠듯하게 들어오던 아래가 어느새 세 개째 손가락까지 삼키고 있었다. 사타구니가 근질근질했다. 척척한 정액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름 있어?”
접은 무릎을 깨물며, 리 샤오가 물었다.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리 샤오가 피식, 하고 웃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길 바라면, 그리 웃으면 안 되었다. 길고 서늘해진 눈매, 그린 듯 곧게 뻗은 콧날, 베일 듯 날카로운 턱 선, 안 그래도 잘나디잘난 얼굴이, 심지어 웃고 있었다. 선명한 시야에 들어온 얼굴을 보며 화수가 불만을 토로했지만, 정작 헐떡이며 내뱉은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저, 서랍에.”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서랍을 리 샤오가 뒤집었다. 작은 향유병을 가지고 돌아온 리 샤오가 그것을 열었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달큰한 향유향이 코끝에 느껴졌다. 그것을 리 샤오가 그대로 화수의 사타구니에 쏟아부었다.
“차가워?”
흠칫, 하고 놀라는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리 샤오가 물었다. 한여름 기온에 그것이 차가울 리 없었다. 그저 온몸이 예민해져 그 별것 아닌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뿐이었다.
“괜찮으니까, 얼른.”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다 필요 없으니, 그냥 넣으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가 그리 말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리 샤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까닭만은 아니었다. 소중하게 대해지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어색해 미칠 노릇인 것과는 별개로.
쭉.
벌게진 화수의 귓불을 리 샤오가 가볍게 빨았다. 웃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화수는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꼬았다. 잘근잘근, 리 샤오가 이를 세워 귓불을 깨물었다. 등줄기가 오싹오싹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리 샤오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측, 구부린 손가락으로 아래를 벌리고 이번엔 아예 그곳에 병 입구를 가져다 댔다.
흣.
기름이 울컥 쏟아져 들어왔다. 물론 다 삼키지 못하고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 더 많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왈칵, 왈칵, 들이부어지는 기름을 입구도 버티지 못하고 삼켰다. 달큰한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리 샤오가 사타구니를 바싹 붙였다. 이미 바짝 선 성기가 뜨거웠다. 바짝 서다 못해 핏줄까지 울룩불룩하게 도드라진 것이 엉덩이를 마주 문질렀다. 단단한 끝이 구멍에 걸렸다. 기름을 머금은 입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조금만 힘을 주어 밀면 제 것을 한 번에 끝까지도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구멍이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그대로 잡아 넣고 싶은 본능을 억눌렀다.
“얼굴 보고 하고 싶은데.”
아래는 터질 것 같았지만 의외로 나오는 목소리는 태연했다.
“이 자세로, 괜찮겠어?”
그제야 리 샤오가 망설이는 이유를 화수도 알아차렸다. 부른 배를 생각하면 정상위보다 엎드린 후배위가 더 편한 것이 사실이지만 화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수 역시, 리 샤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꽤 오랫동안 이 각도에서 이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게 화수도 못내 아쉬웠으니까. 그런 기색을 리 샤오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배가 눌리면, 말해.”
허락이 떨어졌으니, 리 샤오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꾹, 꾹, 입구를 누르고 있던 기둥의 뿌리를 잡고 그대로 허리를 밀었다. 하지만 처음엔 삼키는 듯하던 입구가 튕겨내듯 그것을 밀어냈다. 물론 익숙한 일이었다.
리 샤오가 화수의 한쪽 무릎을 더 위로 접어 올렸다. 입구가 벌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리 샤오가 다시 허리를 밀었다. 조금 전과 달리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듯, 체중까지 실어 밀자, 버티던 입구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툭, 하고 벌어졌다.
“으-아.”
주륵, 굵은 성기가 그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맹렬히 저항하던 것과 달리 한번 열린 몸은 속수무책이었다. 기름칠을 해놓은 데다 이미 한 번 사정했던 몸 안은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하아.
흐물대던 안이 뒤늦게 성기를 조였다. 제 것을 터트릴 기세로 조이는 쫀득한 감각에 리 샤오가 낮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헐떡이고 있는 화수에게 나직이 속삭인다.
“화수야.”
대답은 없었다.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건 누구보다도 리 샤오가 더 잘 알았다. 대신 허공을 부유하던 시선이 자신에게로 맞춰졌다. 그제야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화수야.”
올려다보던 눈가가 무너진다.
“화수야.”
붉게 물드는 귓불과 목덜미를 핥듯이 더듬는다. 눈앞의 목덜미가 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화수야.”
“그만 좀, 부르십시오.”
“화수야.”
“…….”
자신을 물고 있는 입구가 기둥을 쭉쭉 빨았다. 붉은 기가 가슴께로, 번진다. 결국 견디지 못한 화수가 애원했다.
“리 샤오 님, 제발.”
“리.”
“…….”
“리, 라고 불러.”
그때처럼. 당황한 낯색이 이내 찌푸려진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는 않았다. 버텨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까.
“리.”
조금은 자포자기한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화수가 입을 열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리.”
매달리듯 이름을 부른 화수가 아래를 조였다.
빨리. 제발, 그만 애태우고, 좀.
사실 반쯤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이런 것은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시선 한 번에, 고작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도 쌀 것 같다니. 이런 색사는 경험한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온전히 기분 탓만이 아니라는 듯 이미 한 번 사정한 화수의 것이 반쯤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리 샤오가 원망스러웠다. 허나 아쉬운 건 제 쪽이었다. 화수가 리 샤오의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 다시금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빌어먹을.”
리 샤오가 짓이기듯,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쑥, 거칠게 뒤로 빠졌던 기둥이 한 번에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힉-!”
아래를 두들겨 맞은 충격에 잠시 멍하게 있는 사이, 다시금 뒤로 빠졌던 성기가 미끄덩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 애를 태웠던 사람이 맞나 싶게 찍어 누르는 리 샤오의 표정은 전혀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화수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안도했다. 저만 애가 타서 어쩔 줄 모르는 것보다야 이쪽이 훨씬 안심이 되었다. 기껏 본능을 필사적으로 누르고 있었던 리 샤오로서는 억울한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지금의 리 샤오는 그런 것을 알아차릴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밤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아으-흣-.”
다시금 리 샤오가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분명 조금 전과 같은 것이 들어오는데, 안을 채우는 부피는 전혀 달랐다. 위로 밀려 올렸던 무릎이 옆으로 벌어졌다. 그 바람에 살짝 빠졌던 성기를 콱,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화수가 고개를 내저으며 진저리를 쳤다.
“아, 흐으.”
아래가 다 녹아버린 것 같았다. 그리 녹은 아래를 단단한 성기가 마구 휘젓는다. 그럴 때마다 이미 녹아 있던 아래가 다시금 녹는 감각. 그리고 그것이 기분 탓만은 아니라는 듯 들락이는 곳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더 짙어지고 있었다.
질척질척.
마치 물속에서 살덩이가 들척이고 있는 소리. 하지만 부끄럽다는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 같은 게 없다는 말이 맞았다. 자꾸만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아, 아, 아-.”
푹, 푹, 푹, 굵고 긴 기둥이 안을 마구 쑤신다. 미끄덩거리며 긴 성기가 안을 꽉꽉 채울 때마다 진저리를 쳤지만 소용은 없었다. 웅크리는 몸을 고정시킨 리 샤오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안을 쑤셨다. 그때마다 머릿속도 하얗게 변했다.
“힉, 익……, 으아, 아. 아…….”
자꾸만 호흡이 엉켰다. 박자가 엉망이었다. 거칠게 들어올 줄 알고 잠시 숨을 멈추면 리 샤오도 움직임을 멈췄다. 숨을 참지 못하고 내뱉으면 그제야 리 샤오가 미끄덩거리며 들어왔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눈앞이 자꾸만 쑥쑥, 꺼졌다. 꺼지는 것만이 아니라 까맣고, 하얗게 부서졌다. 이미 더는 젖을 수도 없이 흥건히 젖은 눈썹이 애처롭게 경련했다. 그것을 리 샤오가 입술로 눌렀다.
춥.
부드럽게 눈가를 빠는 입술에 이번엔 화수의 눈꺼풀이 부들거렸다. 한일자의 입술을 가르고 나온 혀가 눈가를 훑는다. 뜨끈한 것이 리 샤오 때문인지, 고장난 제 눈물샘 때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아으응-.”
물론 다정한 상반신과 달리 하반신은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거칠고 빨랐다.
“힉.”
슥, 뒤로 빠졌던 성기가 퍽, 하고 뿌리 끝까지 한 번에 들어와 박혔다. 반사적으로 벌어지는 입술 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델 듯이 뜨거운 살덩이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입을 맞닿은 채 다시금 허리를 쳐올린다.
퍽, 하고 엉덩이를 두들겨 맞는 기분에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맞닿은 입안으로 신음이 쏟아졌다. 리 샤오의 것을 물고 있던 내벽이 마구 요동쳤다. 오물대며 물고 있던 기둥을 숫제 쭉쭉 빨았다.
하아. 낮은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었던 리 샤오가 콱, 하고 화수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힉.
그러고는 움츠러드는 엉덩이를 양옆으로 갈랐다.
측.
달라붙은 살이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입구는 떨어졌지만 안은 오히려 더 쭉쭉 달라붙었다. 리 샤오가 허리를 궁글렸다. 달라붙었던 것들이 떨어져나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 뺐다. 내벽들이 딸려 나오는 기분에 화수가 몸을 움츠렸지만 벌어진 입구로 다시금 리 샤오의 성기가 박혀 들어왔다.
“힉. 익.”
사실 입술이 떨어진 것도 몰랐다. 헐떡이는 입술로 신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입술이 떨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달큰한 입술은 어느새 화수의 귓불을 쭉쭉 빨고 있었다. 리 샤오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물론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상반신만은 아니었지만.
“아, 아, 으-, 아-, 아!”
아래가 뜨거웠다. 엉덩이가 묵직했다. 마치 달군 쇳덩이가 들어 있는 것처럼 아래가 들끓었다. 분명 아래쪽으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데, 그럼에도 리 샤오가 들어올 때마다, 아랫배가 올라붙었다. 처음엔 단단하게 뭉쳐졌다 풀리는 것을 반복했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없이 계속해서 단단하게 올라붙은 채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아으으-.”
바짝 서 있던 화수의 것에서 묽은 액이 줄줄 새고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잔뜩 발기한 귀두가 시뻘겠다. 움찔움찔, 경련하는 성기를 단단한 손이 쥐었다.
“가도 돼.”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하지만 리 샤오의 허락에도 화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싫, 습니다.”
헐떡이는 숨 사이로 단어를 내뱉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마주한 눈동자가 확 가라앉는 것을 목격한 화수가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혼자서는.”
“…….”
눈매가 일그러진다. 물론 기분이 상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아래 품고 있던 것이 부피를 늘렸다.
여기서 더 커질 수도 있는 것이었나. 난감한 기분마저 들었지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착하게 군 상이야.”
무슨, 하고 되묻기도 전에 리 샤오가 뿜어낸 패기가 단숨에 화수를 휘감았다.
눈앞이 어찔했다. 코끝으로 달큰한 향이 밀려 들어왔다. 아래로 리 샤오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지금이 더 자극적이었다. 아래가 끓는 물처럼 들끓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아으으-”
그런 몸을 리 샤오가 벌리고 들어왔다. 벌어진 허벅지 안쪽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안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흐물흐물해진 내벽이 기분 좋았다. 물론 리 샤오의 입꼬리가 올라간 이유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힉.”
허리를 잡아 빼자 주륵, 하고 번들거리는 성기가 미끄러져 나왔다. 이번엔 벌어져 있던 두 다리를 모아 제 어깨에 얹게 한 뒤, 바닥을 긁고 있는 화수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가는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얽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려오는 손가락이 애틋했다. 물론 애틋한 것과는 별개로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대로 단단히 고정시킨 손을 아래로 당겼다. 동시에 순순히 끌려 내려오는 방향과 반대로 허리를 깊이 질러 넣었다.
“흣-!”
온몸이 확 조여들었다. 하지만 아래를 들락이는 움직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빠르게 들락인다. 슥슥슥, 바르작거리는 손을 꽉 붙들고 리 샤오는 깊고 강하게, 화수의 몸을 뚫고 또 뚫었다.
“힉. 익. 으, 아-”
연결 부위에 하얀 거품이 일었다. 부글거리며 새어 나온 거품이 이내 물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꼭 제 몸이 거품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 아, 아. 으. 아. 응……!
푹, 푹, 푹, 굵고 긴 기둥이 안을 파고들 때마다 머리를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너무 심하게 느끼면 그것이 통증처럼 느껴진다는 걸 화수도 잘 알고 있었다. 리 샤오와의 색사는 늘 그랬으니까. 그래서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이리 좋은 것이, 제게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제는 머리마저 녹아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눈앞이 번쩍였다. 마치 눈앞에서 폭죽이 터지고 있는 것처럼. 귀까지 먹먹했다.
“아읏으. ……읏.”
벌어진 입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온몸의 솜털이 다 서 있었다. 예민해진 살갗이 따끔거렸다. 아래가 벌렁거렸다. 그러다가도 쭉쭉, 문 것을 빨았다.
힘들어.
몸에서 힘을 빼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몸이 제 통제를 벗어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호흡이 엉망이었다. 언제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꽉 붙든 손은 놓치지 않는다. 저를 이리 괴롭게 만드는 이가 바로 리 샤오인데도. 오히려 필사적으로 그 손에 매달렸다.
그런 화수를 리 샤오가 마주 잡았다. 단순히 마주 잡은 것이 아니라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손가락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강하게 옭아맸다.
이상했다.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그 손길에, 오히려 숨통이 트였다. 아무래도 머리가 어찌 된 것이 분명했다.
주륵.
감지도 않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릿했던 시야가 분명해지는 순간, 화수의 입술이 열렸다.
“리.”
의식하고 내뱉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이가 엄마를 찾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것은 한번 내뱉기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리.”
그 순간이었다. 하아, 하고 낮은 숨을 내쉰 리 샤오가 퍽, 하고 허리를 쳐 올렸다. 굵고 단단한 귀두가 안을 주욱, 긁어 올렸다.
-!
허공을 부유하고 있던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이번엔 신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감각 없는 아래가 빠듯하게 차는 기분은 기묘했다. 머리는 모든 활동을 정지해버린 와중에도 아래는 착실하게 리 샤오의 것을 꽉꽉 물고 있었다. 물론 리 샤오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뒤로 뺐다.
퍽.
도망치는 허리를 꽉 누르며 리 샤오가 잡아 뺐던 성기를 다시 한 번에 집어넣었다. 사실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리 샤오도 지금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나마 제 아래 깔린 것을 망가트리면 안 된다는 본능만큼은 남아 있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거였다. 안을 휘젓는 성기에 화수가 자지러졌다.
“아으으.”
“흣.”
짐승의 그르렁거림과 같은 낮은 신음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뜨거운 정액이 안을 흠뻑 적셨다. 사정이었다.
더 젖을 수도 없을 것 같았던 안이, 그득 차올랐다. 꾸직꾸직,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에서 정액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마주한 눈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곧바로 리 샤오가 붙든 손을 제 쪽으로 당기며 한 번 더 허리를 질러 넣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이미 더 들어갈 수도 없게 한계까지 삼킨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리 샤오는 한 치의 틈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깊숙이 성기를 집어넣었다. 동시에 바싹 다가선 입술이 속삭인다.
“화수야.”
아아. 리 샤오가 뿜어내는 어떤 패기보다도 달큰한 속삭임. 그것이 제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리 샤오를 물고 있던 입구에서 정액이 줄줄 새어 나왔다. 벌렁이는 주름 때문이었다. 물론 그걸 리 샤오가 모를 리 없었다. 퇴로가 모두 막힌 탓에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감는 것 말고는 없었다.
“화수야.”
꽉 감은 눈앞이 쑥 꺼졌다. 발가락이 곱았다. 두 번째 사정이었다.
사실 쏟아져 나온 정액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리 샤오의 것을 물고 있는 곳에서 정액이 줄줄 새어 나왔다. 마치, 뒤로 싸고 있는 것 같았다.
츱. 상체를 숙인 리 샤오가 화수의 입술을 찾아 벌렸다. 벌어진 입안에 혀가 가득 찼다. 윗입도, 아랫입도, 리 샤오가 들어차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허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긴 밤의 시작이었다.
* * *
-!
순간 머리끝이 쭈뼛하고 섰다. 옆자리를 더듬던 리 샤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빈 옆자리를 확인한 리 샤오의 눈은 자다 일어난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흉흉했다. 하지만 그 때였다.
“왜 그러십니까.”
불쑥, 어둠을 가르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소리가 난 쪽으로 리 샤오의 고개가 휙 꺾였다. 기가 막히게도 녀석은 정원으로 난 장지문을 열어놓고 그 문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험한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제가 누구 때문에 이리 심장이 멎을 뻔했는데. 일견 태평해 보이기까지 한 녀석의 얼굴을 보니 기가 막혔다.
“맞아.”
하지만 정작 리 샤오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런 불만이 아닌 순순한 대답이었다.
“아주, 무서운 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새까만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리 샤오 님도 무서운 것이 있으십니까.”
“…….”
하지만 이번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화수를 응시했을 뿐. 리 샤오의 침묵에 화수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시선만 마주한다.
“그래서.”
대치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쪽은 리 샤오였다.
“대체 자다 말고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
그리고 천천히 화수를 향해 걸어온다. 바닥을 나뒹구는 침의를 집어 드는 것도 잊지 않고서.
“제발 자게 해달라고, 엉엉 울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
화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리 샤오는 장지문 앞까지 와 있었다.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지더니, 이내 어깨 위로 침의가 둘러졌다. 어깨가 따뜻했다. 그제야 리 샤오가 집어 든 그것이 저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괜찮은데.”
하지만 화수가 침의를 여미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리 샤오의 시선은 문밖으로 향한 뒤였다.
“비가, 오는군.”
투둑. 투둑.
기와로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굵었다.
이런 빗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깊이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이리 깊이 잠을 잔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통 잠을 자지 못했으니까. 물론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리 샤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래서 깬 건가?”
“…….”
리 샤오의 물음에 마주한 화수의 눈동자 위로 의아한 기색이 번진다.
“비, 싫어하잖아.”
“…….”
“천둥도, 어두운 것도.”
“…….”
“나도.”
천천히 커지던 눈에 당황한 기색이 번지는 것을 보며, 리 샤오가 덧붙였다.
“알아.”
“…….”
“넌 무섭다는 말을, 싫다고 하잖아.”
“…….”
어떻게 알았을까. 정작 저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리 샤오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왜 그리도 비가, 천둥이 싫었었는지. 왜 그리, 무서웠는지.
“아니요.”
하지만 그럼에도 화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싫지 않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적어도 비만큼은.”
리 샤오의 눈동자에 실망한 기색이 번지는 것을 본 화수가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오늘, 비가 왔으니까.”
“…….”
“이제 나한테도 떠올려도 좋을 기억 하나는 생겼으니까.”
“…….”
“그러니까 이제 무섭지 않습니다.”
가슴이 뛰었다. 제대로 전달이 되었을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내가 전하고 싶은 마음이.
초조했다. 기대를 하지 않을 땐 전혀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이제는 다 신경이 쓰였다. 상대의 표정, 눈빛, 행동, 모든 반응에 신경이 곤두섰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 없는 얼굴인데도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그 때였다.
“욕심이 없군.”
굳게 닫혀 있던 리 샤오의 입술이 툭, 하고 열렸다.
“고작 하나라니.”
“…….”
“정말 그거면 돼?”
하나면 충분했다. 리 샤오가 그리 되묻기 전까지는.
“말해봐.”
슥.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가만히 손이 내뻗어졌다. 커다란 손을 화수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내뻗은 리 샤오의 손이 화수의 볼을 감쌌다.
“그래도, 됩니까?”
내가 그런 욕심을 내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질문의 끝을 듣기라도 한 듯 리 샤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돼.”
그렇구나. 되는구나. 마치 구원처럼 리 샤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을 굽혀 앉은 리 샤오가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화수야.”
어째서일까. 그저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어째서 울고 싶어지는 걸까. 그것을 알기나 하는지 리 샤오는 다시금 화수의 이름을 되뇌었다.
“화수야.”
화수가 눈을 감았다. 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화수의 노력을 리 샤오는 단숨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너는, 내 것이야.”
파르르, 파르르, 애처롭게 경련하는 눈꺼풀을 리 샤오가 내리눌렀다. 내 것이라고, 각인을 하듯.
“나는, 네 것이고.”
눈꺼풀, 콧잔등, 코끝, 그리고 윗입술까지 입맞춤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미 각인 같은 건 할 필요 없는데도, 리 샤오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연신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속삭였다.
“너를 연모하고 있어, 화수야.”
대답하고 싶었다. 저도 마찬가지라고. 단 한 번도 아니었던 적이 없다고. 하지만 쏟아지는 눈물에 화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화수의 입술에, 리 샤오가 입을 맞췄다. 다 알고 있다는 듯. 가만히.
결국, 화수가 울음을 터트렸다.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어본 적 없는 화수가.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이번에는 리 샤오도 울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화수를 품에 안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괜찮아.
괜찮아, 화수야.
누구도 해준 적 없는 따듯한 위로. 단단한 품. 비 냄새가 나는 입맞춤.
영원히 각인될 두 번째 기억이었다.
* * *
팔락팔락.
시원해. 열이 오른 얼굴로 바람이 일었다. 단선團扇에서 나는 종이 향이 코끝에서 일렁였다. 몸이 축축 늘어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왜.”
눈을 뜨자마자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했다.
“뭐 필요한 것이라도?”
저를 내려다보며 그리 묻는 사내를 화수는 가만히 올려다볼 뿐이다. 리 샤오도 이번엔 그런 화수를 재촉하지 않았다. 나른히 뜬 눈매로 아직 선잠이 든 상태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꿈인 줄, 알았습니다.”
“…….”
그리 말하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멍한 얼굴을 리 샤오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내렸다. 콧잔등, 입술 끝, 턱을 순서대로 솜털보다 가벼운 손길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입술을 열었다.
“안심해. 꿈 아니니까.”
정작 본인도 꿈일까 봐, 혹 자고 일어났을 때 녀석이 품에 없을까 봐 잠들지 못하고 있었으면서. 그래도 다행히 그 말이 화수를 안심시킨 모양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안심한 사람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어디, 가지 마십시오.”
끔뻑이던 눈을 감으면서도 화수는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지.”
물론 리 샤오가 그러마, 하고 대답을 했을 때는 이미 수마를 이기지 못한 화수의 입에서는 색색이는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저를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이 이리도 가슴이 뜨끈해지는 일일 줄 몰랐다. 아마도 평생 알지 못했을 테지. 녀석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리 생각하니, 가슴이 앓아 내렸다.
팔락팔락.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단선은 한 번도 멈추거나 속도가 느릿해지는 일은 없었다. 더운 여름의 한복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