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19/21)

18.

“대체 생각이 있으십니까.”

홍 의원의 질책이 쏟아졌지만 리 샤오는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다. 변명도 하지 않는 리 샤오를 대신해 입을 연 것은 화수였다.

“다, 제가 졸라 그리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리 샤오를 의식해 꾹꾹 참고 있던 터라 결국 불똥이 그대로 화수에게로 튀었다.

“화수 님도 똑같습니다. 배 속에 아이를 가진 분이, 어찌 그리 생각이 없으십니까.”

“…….”

“이 몸으로 달아나신 것도 모자라, 겁도 없이 빗물에 뛰어들기까지 하셨다면서요.”

“……죄송합니다.”

그제야 단순히 색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물론 제 발로 뛰어든 적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위험한 행동이었다는 것에는 반박할 수 없어 화수가 조용히 잘못을 인정했다.

“별일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애기씨에게 무슨 변이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홍 의원.”

그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리 샤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쯤 해둬.”

자신을 탓할 때는 신경도 쓰지 않더니, 화수가 혼이 나는 것은 보기 싫었던 모양.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지만 자신을 향한 눈동자가 사나워져 있는 것을 확인한 홍 의원이 이크, 하고 뒤늦게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그래서.”

“…….”

“상태가 심각한 거야?”

“뭐, 다행히 지금은 탈진을 하신 것이니 충분히 수분을 보충하고, 푹 쉬시면, 기력은 곧 돌아오실 겁니다.”

리 샤오의 눈빛이 더 사나워진다. 그럼 심각한 상태도 아닌데 그리 잔소리를 늘어놓았던 거냐고,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리 샤오를 향해 홍 의원이 억울하다는 듯 덧붙였다.

“괜찮아지더라도, 몸에 무리가 되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

그제야 리 샤오의 사나운 기색도 조금 누그러진다. 물론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눈빛은 분명히 전달되어 홍 의원은 조용히 맥을 짚던 손목을 이불 속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정작 침묵을 깬 것은 화수였다.

“제가, 어찌하면 됩니까?”

무슨. 질문의 의미를 되묻기도 전에 화수의 뒷말이 이어졌다.

“아이를, 낳고 싶습니다.”

“…….”

“가능하다면, 제 손으로 키우고도 싶구요. 제 몸 상태가 어떤지는 압니다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

홍 의원의 얼굴의 주름들이 짙어졌다. 대답해줄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솔직히 화수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늘, 세상에 미련 따위는 없다는 듯 굴던 사내가 아니던가.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성가셔하듯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그런 사내가 아이 때문에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사실 믿을 수가 없었다.

“전혀, 없습니까.”

대답이 없자 오해한 모양이었다. 태연하던 눈동자가 단숨에 무너지는 것을 본 순간 홍 의원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후우, 낮은 한숨을 내쉰 홍 의원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리 샤오의 뜨거운 시선도 느껴졌다. 숨을 죽인 채, 자신의 대답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벌써 둘이나 되었다. 어깨를 으쓱인 홍 의원이 뒷말을 이었다.

“솔직히 예전 같았으면 없다고 딱 잘라 말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으니까요.”

물음표가 떠오르는 화수를 향해 홍 의원이 설명을 더한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본인이 그럴 마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환자 본인의 의집니다. 헌데 이제는 그럴 마음이 생긴 것 같으니, 조금 안심입니다.”

“…….”

사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화수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리 버티고 있는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그러니, 그 기적이 조금은 더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어디 한번 해보죠. 저도 두 분의 애기씨를 만나 뵙고 싶으니까요.”

마지막 부분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을 편히 두셔야 합니다. 쓸데없는 걱정 같은 건 미뤄두고, 좋은 것만 보시고, 좋은 것만 드시면서, 즐겁게 지내셔야 합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인 것 같아도, 사실 몸에 가장 독이 되는 것이 바로 혼곤한 정신이었다. 마음이 평온해야, 육신도 평안해지는 법이었다.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하죠.”

잘 먹고, 잘 자고, 마음 편히 지내는 것. 사실 뭔가 엄청난 것들을 해내야 할 거라고 잔뜩 각오한 화수로서는 맥이 풀릴 만큼 아주 간단한 것들이다 싶었다. 홍 의원이 덧붙이는 말들을 듣기 전까진.

“물론, 지금보다 배는 더 드셔야겠지만요.”

솔직히 가능만 하다면 세 배, 네 배쯤 먹어주면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화수가 홍 의원의 머릿속을 읽을 수 없어 다행이었다.

“뭐야?”

문을 열고 들어선 류가 화수의 앞에 소반을 내려놓았다. 대접에 담긴 뽀얀 국물이 찰랑였지만, 한 방울도 넘치지는 않았다.

“뭐냐고.”

“잉어탕이래.”

열린 문틈으로 삐죽 얼굴을 내민 이는 다름 아닌 여설이었다. 그녀에게서 잉어탕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어휴, 저거 봐, 저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꼬리를 샐쭉하게 올린 여설이 설명을 덧붙였다.

“류가 직접 잡아 와서, 밤새 곤 거야.”

사실 화수는 비린 것이라면 질색이었다. 그런데 생선을 구운 것도 아니고, 무려 고아낸 국이라니.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류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임산부한테 엄청 좋은 거래.”

설명을 할 수 없는 류를 대신해 이번에도 여설이 한마디 더 거들었지만, 그녀 역시도 소용없을 거라 생각했다. 꼭 입맛이 까탈스러운 화수가 아니더라도 여설 본인도 이건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류가 자신을 위해 저런 정성을 들여준다면 또 다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히익.”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에 여설이 기겁했다. 화수가 한 번 망설이지도 않고 그릇을 집어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 입술에 닿기 직전, 그릇이 허공에서 멈췄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눈으로 묻는-눈동자가 평소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화수에 여설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난, 신경 안 써도 돼.”

두 손까지 흔드는 여설에 입술을 삐죽인 화수가 이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꿀꺽꿀꺽.

코를 막은 채, 단숨에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운 화수가 그것을 내려놓았다. 물론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릇은 분명 비어 있었다.

“줘.”

제가 직접 낚시까지 해서 잡아 오고, 그리고 하룻밤 꼬박 고아내기는 했지만 사실 화수가 그것을 먹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은 류도 마찬가지였다. 멍하게 서 있는 류를 향해 화수가 손을 내밀었다.

“그거 나 먹으라고 가져온 거 아냐?”

아, 옥춘玉瑃. 그제야 챙겨 온 색색의 옥춘을 기억해낸 류가 그것을 내밀었다. 싸놓은 헝겊을 풀어헤쳐 빨갛고 하얀 커다란 옥춘을 거의 입안에 욱여넣다시피 했다. 입안이 아릴 정도로 단 사탕을 입안에 가득 물고도 화수의 구겨진 미간의 주름은 좀처럼 펴지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비리다는 말일 거였다.

“이거 좀.”

아드득, 입안의 옥춘을 씹으며 화수가 소반을 밀었다. 사실 냄새가 나도 그릇보다는 제 입안에서 더 나겠지만, 그릇을 보는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알아차린 류가 이번엔 재빨리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황급히 문밖으로 나갔다.

“괜찮아?”

자신은 먹지도 않았으면서도 묻는 여설의 표정이 화수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궁금하면 먹어보든지.”

“그걸 내가 왜 먹니. 너 먹으라고 저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을.”

“…….”

“오해하지 마. 질투하는 거 아니야.”

“알았어.”

“정말이야.”

“알았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는데도 심기가 상한 것인지 여설은 팩, 하고 돌아섰다.

역시 어렵네.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게 이리도 어려운 일인지 예전엔 몰랐다. 하지만 당연했다. 애초에 예전엔 남과 잘 지낼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까.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아드득, 아드득, 입안에 남은 옥춘을 열심히 씹고 있을 때였다.

“고마워.”

가버린 줄 알았던 여설이 다시금 삐죽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욕이면 몰라도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 몰랐던 터라,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수를 향해 여설이 뒷말을 덧붙였다.

“버리지 않고 먹어줘서.”

아.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진다. 사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쪽은 자신이었다.

“안 먹어줬으면 류가 실망했을 거야.”

“……임산부한테 좋은 거라길래.”

하지만 늘 서툴렀다.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았다.

“맞아, 그러니까 빼먹지 말고 꼭꼭 챙겨 먹어.”

그런 자신을 내칠 만도 하건만. 툴툴거리면서도 늘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이가 여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고마-”

“가마솥 한가득 끓여뒀으니까, 하루에 세 번 꼭꼭 먹어야 해.”

“뭐?”

물론 그 한 발은 채 떼기도 전에 도로 후퇴해버렸지만.

“하루에 세 번 꼭꼭 먹어야-”

“그거 말고, 전에.”

“가마솥 한가득 끓여뒀다는 거?”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한 마리 잡아 온 거 아니었어?”

낯색까지 허옇게 질리는 화수를 향해 여설이 무심히 대꾸했다.

“한 마리 가지고 누구 코에 붙여.”

“내 코!”

참지 못한 화수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그제야 여설이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것이 여인의 기분이었다.

“그건 또 뭡니까.”

문을 열고 들어서던 리 샤오의 걸음이 멈칫했다. 묘하게 화수의 표정에 날이 선 것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하지만 곧 화수도 자신의 반응이 다소 예민했다는 걸 자각했다.

“오늘따라, 뭘 먹이려는 사람이 많아서.”

어깨를 늘어트리는 화수의 목소리가 조금 지친 듯 들렸다. 그제야 리 샤오도 멈췄던 걸음을 다시 내딛어 장지문을 넘어왔다.

“뭘, 사 오셨습니까?”

“억지로 먹을 것 없어.”

“아닙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

그제야 리 샤오가 들고 온 종이상자를 내려놓았다. 당겨 앉은 화수가 그것을 열었다. 부스럭 부스럭, 열심히 손을 놀리던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종이상자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새하얀 크림에 빨간 딸기-물론 모양만 딸기인 젤리-가 올려진 케이크였다. 게다가 자신이 보았던 조그만 조각이 아닌 무려 온전한 원 모양의 한 판.

케이크에서 풍기는 달큰한 향에 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본래 이리 큰 것이었습니까?”

“아마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묻는 화수를 향해 리 샤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봐.”

그러고는 아까워서 먹지도 못하고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는 화수의 앞으로 상자를 슬쩍 밀었다. 힉. 그 바람에 손가락에 새하얀 크림이 묻었다. 모양이 망가진 것이 아쉬웠지만 손가락은 이미 입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쪽, 조금 묻은 것을 빨았을 뿐인데, 달큰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맛이었다.

“이것부터 먹어.”

아예 딸기를 집어 든 손을 입가로 가져왔다.

“좋아하잖아.”

“그건, 나중에, 먹을 거였단 말입니다.”

“어서.”

망설이는 화수를 재촉하자 그제야 입술이 열렸다. 쫀득한 딸기 젤리가 입안에 가득 찼다. 아까워 살살 굴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씹었다. 쫀득쫀득한 딸기를 먹는 기분이었다. 묵과는 또 달랐다. 신기한 식감에 열중해 씹다 보니,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입안의 젤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쉬운 마음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입안을 몇 번 더 씹었다. 그런 화수의 입가에 빨간 딸기가 하나 더 내밀어졌다.

“괜찮은데.”

이번에는 망설임이 짧았다. 민망한 듯 중얼거리면서도 화수가 입을 벌렸다. 젤리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더 붉고 투명한 입술이 빨간 젤리를 물었다. 하얀 크림이 붉은 입술에 묻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그 시선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리 샤오 님도 하나, 드십시오.”

한 번 권하지도 않고 저 혼자 먹고 있었다는 걸 자각한 화수가 뒤늦게 상자를 리 샤오 쪽으로 밀었다. 됐다며, 고개를 내저을 줄 알았던 리 샤오가 의외로 되묻는다.

“그래도 되나?”

“그럼요. 어차피 잔뜩 있고, 애초에 리 샤오 님이 사 오신 것이잖습니까.”

안 물었으면 어쩔 뻔했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리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리 샤오의 손이 화수의 턱을 잡아 올렸다. 응? 의아해하면서도 이끄는 대로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측.

혀가 윗입술을 밀듯이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들리는 윗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달군.”

입술이 물러날 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굳어 있던 화수가 뒤늦게 리 샤오가 맛본 것이 제 입술에 묻은 크림이었음을 깨달았다. 빨린 것은 입술인데 이상하게 귓불이 뜨끈했다.

“묻었으면, 묻었다고 말씀해주시면 될 것을.”

이미 묻은 것은 리 샤오의 입안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민망한 기분에 입술을 가리고 화수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리 샤오는 태연했다.

“먹어보라길래 허락인 줄 알았지.”

“…….”

아무리 봐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다른 이와도 이리 달큰한 짓을 했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대체 누구와 이런 걸 했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화수야-”

벌컥, 문을 열고 화수를 부르는 여설 덕분이었다. 물론 화수의 다행한 기분과는 별개로 리 샤오와 눈이 마주친 여설은 어쩔 줄 모르고 그대로 굳었다.

“아, 죄, 죄송해요. 오셨는지, 모르고-”

사실 리 샤오는 크게 기분이 상한 기색이 아니었지만 그의 무표정을 대놓고 견딜 수 있는 이는 화수밖에 없었다.

“왜?”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여설을 보다 못한 화수가 물었다.

“어?”

“무슨 일이냐고.”

이리 온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고, 묻자 그제야 여설도 용건을 떠올렸다.

“그게, 그러니까, 수박화채, 먹겠냐고.”

사실 일단 물으니 대답부터 한 것이지만, 여설도 이미 화수의 앞에 놓인 케이크를 보았다.

“아…….”

난감해하는 화수의 표정까지.

“그럼, 난, 가볼게.”

사실 하루 종일 비위 상하는 것을 먹게 해서 마음에 걸려 여설이 직접 만든 화채였다. 시원한 수박은 화수가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물론 괜한 짓이었지만.

“저기, 잠깐만!”

곧바로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여설을 화수가 급히 붙들었다. 그러고는 리 샤오를 향해 물었다.

“혹, 이것, 나눠 먹어도 될까요?”

“네게 준 것이니, 어찌할지도 네 맘이지.”

화수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종이상자째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화수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거, 가져가서 나눠 먹어.”

“이게, 무언데?”

관심 없는 척 물었지만, 사실 여설은 케이크에서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이름을 말해주려던 화수가 슬쩍 뒤를 돌았다.

“……뭐였죠?”

“케이크.”

리 샤오의 대답에 곧바로 고개를 바로 한 화수가 대답했다.

“케이크.”

나도 귀 있거든? 평소라면 받아쳤을 여설도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케이크라면 여설도 들은 적이 있었다. 상점가에 새로 생겼다는 다방茶房은 홍매루 여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저희는 듣도 보도 못한 서양식 음료와 음식을 판다더라. 외국에서 신문물을 배운 사내들은 기방이 아닌 그곳에서 점잖게 술을 마신다더라. 소문은 자자했지만 소문을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그들 중 누구도 그곳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진짜 딸기는 아니고, 묵 같은 건데.”

“……묵?”

“묵이랑은 또 완전히 다른데, 아, 일단 먹어봐. 이건 먹어봐야 해.”

설명을 해주려고 했지만 사실 본인도 제대로 맛을 본 것이 몇 번 되지 않았다. 결국 직접 먹어보라는 말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떠안기듯 상자를 건네주자 여설도 그것을 소중히 받아 들었다.

“네 것도 잘라 올게.”

“아, 그럼, 고맙고.”

위에 빨간 딸기 장식이 듬성듬성하긴 했지만 손도 대지 않은 완벽한 형태인 것을 알아차린 여설이 말했다. 거절하지 않는 화수를 보니 묻기를 잘한 모양이었다.

“리 샤오 님, 것도, 잘라 올까요.”

“리 샤오 님은.”

“그래주면 고맙겠군.”

이번에도 거절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본 이는 화수였다. 하지만 리 샤오는 태연했다.

“꼭 위에 딸기가 있는 것으로.”

요구조건까지 덧붙이는 리 샤오에 화수의 눈이 좀 더 커졌지만 뒤에 선 여설은 알 리 없었다.

“예, 꼭 있는 쪽으로 잘라 올게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여설이 후다닥, 그곳을 벗어났다. 물론 그런 여설을 붙잡는 이는 없었다.

* * *

살랑살랑.

바람에 일렁이는 강아지풀처럼-볕을 받아 더 그래 보였다- 움직이던 꼬리가 순간 멈칫했다. 일광욕을 하며 축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후다닥, 담장 쪽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런 나비의 모습에 화수가 슬쩍 고개를 꺾었다. 화수 역시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서 일광욕 중이었다.

“이젠 고양이도 키우는 거야?”

진도현이었다. 경계를 푼 화수가 고개를 내젓는다.

“그럴 리가.”

그리 부인하면서도 훌쩍, 담장 위로 뛰어올라 모습을 감추는 나비를 보는 화수의 눈동자에 아쉬운 기색이 서려 있었다. 물론 어느새 옆으로 와서 선 진도현 쪽으로 고개를 틀었을 때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지만.

“퍽 한가하신 모양입니다, 진 사장님.”

힐끔, 진도현을 올려다보며 화수가 한마디 한다. 밖에서 대기 중인 비서가 들었다면 참으로 억울했을 일이지만 화수가 그런 사정을 알 리는 없으니까.

“그리 말하면 섭섭하지. 내가 얼마나 바쁜 일정을 미루고 시간을 낸 것인데.”

그리 말하면서도 크게 표정변화는 없었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호를 그리고 있는 입꼬리. 얄미울 때도 있지만 그 느긋한 웃음을 띤 진도현을 화수도 좋아했다.

“예예. 퍽 감사하네요.”

“감사의 인사는 좀 이른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미간을 살풋 찌푸리는 화수를 확인한 진도현이 슬쩍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가리고 있던 문틈이 드러났다.

-!

찌푸려져 있던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화수답지 않은 반응이었지만 진도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미 눈꼬리는 반달로 접은 채였다. 하지만 화수에게 진도현의 표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뒤늦게 화수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급히 일어나느라, 균형을 잃은 무릎이 앞으로 꺾였다. 그런 화수에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여인도 놀라 한달음에 달려왔다. 물론 앞으로 고꾸라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휘청이는 것을 본 진도현이 누구보다도 빨리 화수를 꽉 붙들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을 기함하게 해놓고 정작 본인은 감흥이 없었다. 기가 막히긴 했지만 진도현도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옆에서 시중들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미 돌봐줄 사람은 차고 넘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진도현이 그녀를 데리고 온 이유가 있었다.

“너도 편해했었고.”

좀처럼 곁을 내주는 법이 없는 화수가 아니던가. 그런 화수가 그녀에게는 어느새 몸을 맡기고 있었다. 화수는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진도현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본인 의사는 물어본 거야?”

화수의 물음에 진도현은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했다. 만약 싫었다면 상대의 의사를 확인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리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든지.”

고개를 까딱이는 진도현에 화수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보기엔 허름해도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서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선한 눈동자가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화수가 머뭇거리며 입을 떼었다.

“그때,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와서-”

하지만 그 말은 제대로 끝을 맺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화수의 볼을 감쌌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얼굴, 어깨, 팔, 손, 여기저기를 더듬듯 확인한 뒤에야 그녀는 안심한 듯 눈물을 왈칵 쏟았다.

“네가 어찌 되었을까 봐, 엄청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야.”

당황한 표정의 화수에게 진도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제야 화수의 표정도 누그러진다.

“게다가 오늘 오면서도 네가 혹여 싫다고 거절할까 봐, 잔뜩 긴장하기도 했고.”

낡은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저까지 목이 메었다. 그녀와 자신이 지낸 기간은 고작해야 한 달여도 되지 않는 짧은 날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자신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부담스러웠을 그녀의 걱정이 지금은 온전히 고마웠다. 가슴 한구석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차오르는 기분. 썩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화수를 향해 진도현이 물었다.

“어떻게 할까?”

답을 다 알면서도 굳이 묻는 진도현이 얄미웠다.

“돌려보내?”

하지만 이번만큼은 화수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안 그래도 흠뻑 젖은 옷소매가 더욱더 젖어들었다.

“그래서.”

바쁘긴 한지 가겠다며 곧바로 장지문을 나서던 진도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고맙다는 인사는?”

정작 고맙다는 인사를 받지 못한 사실이 생각났던 것.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꾸였다.

“미안해서 준비한 선물이었던 거, 아냐?”

“미안해? 내가?”

여느 때처럼 시치미를 떼는 반응도 아니라 뒤늦게 화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멋대로 말해버린 게 미안해서 굳이 이렇게까지 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진 사장이 말한 거 아니었어? 내가 여우 가면 쓴 그 사람이었다는 거.”

“내가 그딴 소리를 왜 해.”

누구 좋으라고. 물론 뒷말은 입안으로 삼켰지만 화수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왜. 내가 그랬대?”

하지만 진도현의 질문에 되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그럼 어떻게 알았지?”

전혀 다른 질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이없다는 듯 진도현이 대꾸했지만 정작 질문을 한 화수에게 그런 그의 불만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 * *

흠흠.

낮은 헛기침을 한 카이가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장지문 너머에서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잠시 대기하던 카이가 한 번 더 헛기침을 했다. 흠흠, 하지만 정작 목소리가 들려온 쪽은 바로 제 등 뒤에서였다.

“뭐 하십니까?”

휙, 하고 몸을 틀자 소리도 없이 와 있던 화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리 샤오 님께서는…….”

“방에 안 계십니까?”

카이가 난감한 얼굴로 묻자 그제야 화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장지문을 열었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방 안을 확인한 화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들어가서 기다리시죠.”

따로 어디 간다는 말은 없었으니 곧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화수가 손짓을 하며 권했지만 카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뭐.”

화수도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어깨를 으쓱이고 걸음을 옮긴다. 드륵. 살짝 열었던 문을 좀 더 열어젖힌 화수가 막 문지방을 넘으려다 멈칫한다. 잠시 고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화수가 도로 카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예.”

카이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질문한 화수는 쉽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사실 화수가 뭔가를 망설이는 모습은 제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말고는 카이도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뭔가를 부탁하려는 것이라 싶어 카이가 답지 않게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달싹이던 화수의 입술이 열렸다.

“혹, 제가 여우 가면이라는 걸 어찌 안 것인지, 물어도 될까요.”

물론 카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익숙하기도 했다. 늘 예상을 빗나가는 사내였으니까, 화수는.

“리 샤오 님께서, 아무 말씀 안 하셨습니까.”

“그땐, 경황이 없어서.”

게다가 당연히 진 사장의 짓이라고 생각했었다. 카이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허면, 직접 여쭙는 것이…….”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는 카이에 화수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알겠습니다. 제가 곤란한 질문을 했군요.”

의외로 순순히 포기하고 물러서는 화수에 오히려 난감해진 쪽은 카이였다. 사실 리 샤오의 성격상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구구절절 설명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잠시만.”

“…….”

포기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리던 화수가 몸을 바로 했다. 눈이 마주쳤다. 카이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결심했다는 듯 반듯한 입술이 열린다.

“사실, 리 샤오 님은 계속해서 그날 만났던 분을 찾고 계셨습니다.”

주제넘은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도 모르고, 아니 정확히는 화수에게 알려지지 않고 묻히는 것은 리 샤오에게 너무 가혹하다 싶었다. 카이가 답지 않게 주제넘은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였다.

“전장에서만 계시던 분이, 이곳으로 난 발령을 거부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지요.”

화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날, 두 분이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리 샤오 님은 가지 못하셨습니다.”

“…….”

“전날 할아버님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바로 출발하셨어야 됐거든요.”

“…….”

“하지만 분명 다음 날 그곳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혹 늦을지도 모르니, 절대 자리를 비우지 말고 기다렸다가 데려오라고. 몇 번을 당부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그 앞 가게 유리에 전하는 쪽지도 붙여두었지요.”

그러고도 차마 떼지 못하는 리 샤오의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 카이였다. 그것이 이리 먼 길을 돌아오게 만드는 까닭이 될 줄도 모르고. 그 때였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군.”

고저 없이 낮게 깔린 목소리가 불쑥 끼어든 것은. 일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공기가 싸늘해졌다. 굳어버린 두 사람 중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화수였다. 소리가 난 쪽으로 향하는 목에서 우드득, 소리가 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카이 님은, 제가 물어 답을 해주신 것뿐입니다.”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뒤늦게 정신이 든 카이도 허리를 깊이 숙였다. 당연히 불호령이 내려올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하고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작 리 샤오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예상외로 담담했다.

“그리 궁금하면 나한테 직접 물었으면 되잖아.”

“대답을 안 해주실 것 같아서요.”

“…….”

겁이라고는 없는 화수 역시 담담하게 대꾸했다. 사실 마주한 리 샤오의 표정로 그리 화가 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덕분이었지만. 그리고 그런 화수의 대답이 정곡을 찔렀는지 잠시 리 샤오의 침묵이 이어졌다.

“계속 저리 두실 겁니까.”

화수의 물음에 그제야 리 샤오의 입이 다시 열렸다.

“카이. 일어나.”

카이가 굽혔던 허리를 바로 했다. 고개를 들기 무섭게 일렁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기분이었지만 다행히 리 샤오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가봐.”

순순히 물러가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허면, 그만 가보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였던 카이가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물론 리 샤오를 찾아온 용건은 잊지 않았지만, 지금 그것을 언급할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카이의 발소리마저 사라지자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래서.”

다행히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리 샤오였다.

“뭐가 궁금한데.”

조금 전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제 말에 대한 반박임을 뒤늦게 화수도 알아차렸다.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화수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 연유가 있었다는 걸.”

묻고 싶은 것이 잔뜩이었다.

“대신 사람을 보냈다는 건요. 쪽지까지 남겼다면서, 왜 아무런 변명도 안 했습니까.”

따져 묻는 화수와 달리 리 샤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퍽 담담한 것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건 변함이 없잖아.”

그저 제 잘못이라고 했다. 변명 한마디 없이. 이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이렇게까지 했다는 것도 모르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담담히, 그리 내뱉는 리 샤오를 화수는 가만히 응시했다. 그제야 조금은 리 샤오라는 사내를 알 것 같았다. 자신만큼이나, 아니 자신보다도 더 답답한 구석이 있는 사내였다.

“그날 처음으로, 여장도 하지 않고, 가면도 쓰지 않은 모습으로 나갔습니다.”

해서 찾을 수가 없었던 거였다. 그들이 찾던 사람은 가면을 쓴, 여성이었으니까.

“쪽지가 있는 것을 알았어도, 읽지 못했을 겁니다.”

글이라고는 모르는 까막눈이니까.

“허니,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

그제야 리 샤오도 화수가 하려고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수많은 우연이 겹쳐 생긴 엇갈림이지, 누구도, 잘못한 이는 없습니다.”

“…….”

“아시겠습니까?”

내내 침묵하던 리 샤오가 툭, 하고 대답을 토해냈다.

“그래.”

이상하게 그 순간 내내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던 짐덩이가 조금은 덜어진 기분이었다.

“알겠어.”

올려다보는 눈을 마주한 채 리 샤오가 고개를 숙였다. 동그란 이마 위로 그림자가 졌다. 눈을 감은 화수의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이 아래로 내려왔다. 미간, 콧잔등, 코끝.

“그런데.”

그리고 마지막 입술에 닿기 직전. 화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리 샤오는 가만히 화수의 뒷말을 기다렸다.

“왜 한 번도 가면을 쓰고 있는 이유를 묻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그건?”

아주 잠깐의 틈도 견딜 수 없다는 듯 화수가 재촉하자 그제야 리 샤오도 뒷말을 덧붙인다.

“차마 보여주지 못할 만큼 박색인가 보다 했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리 샤오에 화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박색이라도 상관없으셨던 겁니까?”

“아마도?”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묻는 화수에도 리 샤오는 무심히 대답했다. 사실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런가 보다, 했을 뿐. 꽃이 왜 이리 생겼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리 샤오의 속내를 알 리 없는 화수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쉬우시겠습니다. 박색이어도 상관없었던 그녀가 아니라.”

빈정거리는 말투, 찌푸려진 눈매. 묘하게 기분이 상한 기색이 드러나는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던 리 샤오가 설마, 하면서도 되묻는다.

“혹시, 질투하는 거야?”

“왜요. 저는, 하면 안 됩니까?”

이번엔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물론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게, 본인이라는 건 알고 있는 거지?”

“…….”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묻는 리 샤오에 화수의 입술이 꾹 닫혔다.

저도 알고 있었다. 기막혀하는 리 샤오의 기분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하지만 얼굴도 한 번 보지 않은 이를, 심지어 박색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각인을 했다니. 그것이 자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묘하게 기분을 가라앉혔다.

“관두지요.”

물론 화수 역시도 이런 기분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있었다. 그것이 꼴사납다는 것도. 그럼에도 좀처럼 자신의 기분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괜찮은 척, 초연한 척하는 것에 익숙한 화수인데도 지금은 그것이 전혀 되질 않았다. 그래서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돌렸다. 리 샤오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더 유치한 소리를 내뱉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화수를 리 샤오가 놓아줄 리가 없었다. 붙잡은 화수의 팔을 제 쪽으로 돌린 리 샤오가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그저, 잘 살고 있는지만 확인하려고 한 거야.”

아니, 분명한 변명이었다.

“묻지도 않고 멋대로 각인해버렸으니까.”

제 이기심으로 안 그래도 힘든 이를 더 힘들게 해버린 것은 아닐까. 부채감이 더 컸다.

“그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마주한 새까만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 리 샤오가 곧바로 뒷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눈에 알아봤던 거지.”

“…….”

“내 것을.”

불안이 누그러지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제 마음의 일렁임도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제야 리 샤오도 조금 숨 쉬는 것이 편해졌다. 참았던 숨을 내뱉는 것처럼 가만히 가만히 단어를 내뱉었다.

“어떤 겉껍질을 하고 있든, 사내든, 여인이든, 박색이든, 미인이든,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어.”

이상했다. 고작 말 한마디에, 마구 뒤틀리던 기분이 단숨에 잦아들었다. 화수는 사람의 말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가 하는 말은 이상하게 믿고 싶었다. 믿음이 가는 말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믿고 싶었다. 물론 화수를 그리 만드는 이는 리 샤오뿐이었다. 늘 리 샤오의 앞에서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합격인가?”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꼬리가 살짝 누그러진 그 미묘한 차이를 리 샤오는 놓치지 않았다. 확인하는 리 샤오에 화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슬아슬하게, 요.”

“다행이군.”

이건 진심이었다. 물론 그리 내뱉는 리 샤오의 얼굴에는 그런 티가 전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화수가 투덜거렸다.

“잘 빠져나가시네요.”

피식. 하는 바람소리가 일었다. 저도 모르게 따라 올라가는 입술을 꾹 누르며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덕분에 리 샤오의 눈동자에 단숨에 웃음기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허면.”

“질문은 이제 그만.”

화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한 리 샤오가 그대로 화수의 입술을 눌렀다. 사실 말을 꺼내긴 했지만 뭔가를 물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의 상황이 어색해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연 것에 불과했다. 화수도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벌어진 입안으로 젖은 살덩이가 들어왔다. 입안이 가득 차는 감각에 리 샤오의 팔에 매달려 있던 손이 꽉 쥐어졌다. 달큰한 향이 쏟아졌다. 아아. 허리 아래가 앓아 내렸다. 주저앉고 싶은 화수의 기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허리를 감싸 안은 리 샤오가 그대로 화수를 밀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중에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탁.

리 샤오가 문지방을 넘는 순간에 맞춰 장지문이 닫혔다. 물론 얇은 창호지만으로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지만, 리 샤오가 뿜어내는 패기를 알면서도 이 앞을 얼쩡거릴 만큼 겁을 상실한 이는 없었다.

모두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 * *

“이게 다, 뭐야?”

아침부터 유난히 소란스럽다 싶었더니. 방 문 앞에 켜켜이 쌓여 있는 상자들을 본 화수가 눈매를 찌푸렸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여러 가지 물건들은 착실하게 숫자를 늘리고 있었고.

“다 네 앞으로 온 선물이야, 화수야.”

짐꾼들에게 내려놓을 자리를 지정해주고 있던 집사영감이 신이 나서 설명을 해주었지만 화수의 눈매는 여전히 찌푸린 채였다.

“나한테? 누가?”

“어, 그러니까, 이 비단은 내무국 부장이 보낸 것이고, 이 영지버섯은, 식산국장이 보낸 것인데, 이것 좀 봐라, 내 생전 이리 큰 영지는 처음 보았다니까. 상품上品 중에서도 최고 특상품이 분명해.”

“…….”

사람 머리통보다 큰 영지버섯을 흔들어 보이는 집사영감에도 화수는 크게 감흥이 없었다. 정작 시선도 집사영감이 아닌 그 어깨 너머를 향해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못마땅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한조에게.

그러다 마침 제 쪽으로 방향을 튼 한조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 나 좀 보자.”

그러고는 방 안으로 휙, 하고 들어가버린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집사를 향해 어깨를 으쓱여 보인 화수도 그 뒤를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그래서.”

탁. 문이 닫히기도 전에 한조의 입이 열렸다.

“대체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게야?”

“글쎄.”

화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남의 일인 양 시큰둥한 화수에 한조의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결국 최후의 통첩이 내려졌다.

“리 샤오 님의 오해도 풀린 듯하니, 이제 그만 돌아가.”

사실 이 정도면 한조 치고 오래 참아준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한조를 잘 아는 화수인지라 서운하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나가라고 한 본인은 조금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배 속의 아이에게도 그게 좋아.”

피식. 답지 않게 변명까지 덧붙이는 한조에 화수가 피식하고 웃었다. 사실 변명만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을 친절히 설명할 한조도 아니었다. 그저 웃음을 흘리는 화수를 향해 눈을 흘긴 한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물론 기분이 상해서는 아니었고, 그저 용건이 모두 끝났기 때문이다.

후다닥. 문고리를 잡는 것과 동시에 문에 바짝 붙어 있던 집사가 황급히 뒤로 물러서는 소리가 들렸다.

“집사.”

“예예.”

문을 열고 나온 한조의 부름에 집사영감이 황급히 어깨를 둥글렸다.

“저 녀석 짐들 싸서 보내.”

“예?”

하지만 이내 머리 위에서 들려온 한조의 명령에 도로 고개가 바싹 들렸다. 등잔만 해진 눈으로 집사가 되묻는다.

“지금, 당장이요?”

사실 무슨 이야기냐고 되물어야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몰래 엿들은 걸 숨겨야 한다는 사실도 잊었다.

“보낼 땐 보내더라도, 오늘 하룻밤이라도 재워서 내일 보내는 것이-.”

“오늘 가나, 내일 가나. 무에가 다르다고. 이미 충분히 오래 있었어.”

“그럼, 저녁이라도 먹여서 보내게-”

“설마 정무총감의 댁에서 밥을 굶길까 봐?”

“그래도…….”

좀처럼 한조가 내리는 지시에 토를 다는 법이 없는 집사영감이 아니던가. 그런 집사가 답지 않게 하루, 아니면 한나절이라도 미뤄달라 거듭 애원했다. 그만큼 갑작스럽고, 아쉬운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집사의 거듭되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이미 내려진 결정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괜찮아, 집사영감.”

아쉬워 어쩔 줄 모르는 집사영감을 달랜 것은 화수였다.

“영감 말대로 해.”

아쉽고 서운한 것은 집사영감뿐인 모양이었다.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화수를 보며 집사영감도 더는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어깨를 늘어트린 채 몸을 돌리려는 집사를 향해 화수가 덧붙인다.

“아, 저것들은 챙기지 말고 그냥 둬. 그동안 숙박비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당연하지.”

고개를 내젓던 집사영감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한조는 태연했다. 이번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집사영감뿐이었다. 하지만 그 머뭇거림도 그리 길진 못했다.

“뭐 하고 있어? 얼른 짐 챙기지 않고.”

“예예.”

집사영감의 걸음이 빨라졌지만 단순히 한조의 재촉 때문만은 아니었다. 뭐라도 하나 더 챙겨 보내려면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무에가 그리 급하다고.”

여설이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이번엔 초하도 그런 여설의 옆구리를 찌르며 만류하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헤어짐이 아쉬운 것은 다들 같은 마음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화수만 제외하고.

“갈게.”

본의 아니게 한조에게 쫓겨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사실 화수도 이쪽이 좋았다. 하루씩이나 머물면서 헤어질 준비를 하는 건 영 성미에 맞지 않았다. 신을 꿰어 신은 화수가 몸을 돌렸다.

“나오지 마.”

그러고는 뒤따라 나오려는 사람들을 만류한다.

“왜에.”

여설이 빽 소리를 내질렀지만 단호한 화수의 표정에 결국 포기한 듯 어깨를 늘어트린다.

“몸 조심해.”

“알았어.”

“밥 좀 많이 먹고.”

“내가 알아서 해.”

“어휴, 저 싸가지.”

아무래도 미운 정이 단단히 든 모양이었다. 기가 막히다는 듯 눈을 흘기는 여설이 조금은 귀여워 보이는 것을 보니. 퍽 곤란했다. 곤란한 기분을 들키고 싶지 않아 화수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가아.”

돌아선 등 뒤로 여설의 인사가 들려왔다. 그 잠깐 사이,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었다. 기가 막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울컥, 했다. 고집스럽게 입술을 꽉 깨문 채 제 발치만 보며 걸었다.

그렇게 몇 걸음 걸었을까. 몇 번이고 망설이던 화수가 결국 발길을 틀었다.

다들 현관문 앞에 서서 화수를 보고 있었다.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선 제가 뭐가 예쁘다고.

“왜?”

심지어 화수가 돌아설 줄 전혀 예상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을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입술이 움직였다.

“또 올게.”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약속.

그것도 다음을, 다음번을, 화수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순간 여설이 왈칵 눈물을 쏟았다. 화수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번졌다. 보다 못한 초하가 여설을 대신해 대답했다.

“꼭이요.”

하지만 그리 대답한 초하도 결국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말았다. 꼭. 말은 하지 않았지만 류도, 집사영감도 다 같은 마음이었다.

“잠깐, 잠시만요!”

끼이익.

화수의 말에 달리던 차가 멈춰 섰다. 흙먼지가 자욱했지만, 멈춰 선 차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이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차 문을 열고 나오자 집사영감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이거, 가져가.”

숨을 헐떡이면서도 집사영감이 고집스럽게 내민 것은 금빛 비단 천으로 싸놓은 바구니였다.

“영감이 알면 어쩌려고.”

화수도 낯이 익은 그것은 분명, 선물로 들어왔던 영지버섯 바구니였다. 집사영감이 감탄하며 들고 흔들었던 것이라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화수의 걱정에도 집사영감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걱정 마. 주인어른께서 챙기라 한 것이야.”

그 말에 화수의 고개가 꺾였다. 그사이 집사영감은 바구니를 차에 실었다. 화수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이 그것을 받아 들고 품에 꼭 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고 상체를 바로 했다.

“화수야?”

그리고 뒤늦게 차 문을 붙잡고 있던 화수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두리번거리는 시야에 화수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맞은편 끝에 서 있던 한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것까지.

“뛰지 마.”

화수의 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본 한조가 한마디 한다. 물론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 화수도 아니지만.

“얼굴도 못 보고 가는 줄 알았잖아.”

“맨날천날 본 얼굴. 새삼스럽게 뭘 또 보고 말고 해.”

“그건 그래.”

고개를 주억거리는 화수에 한조의 얼굴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어여 가라.”

재촉하는 한조에 화수가 피식, 웃었다. 그 바람에 눈 밑 눈물점이 검어진다.

저걸 빼줬어야 했는데, 그럼 저 팔자가 조금은 편해졌을까.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인생은 늘 그랬다. 늘, 아쉬운 것투성이였다. 늙어빠진 몸뚱이라 이제는 그런 것쯤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늙어 두꺼워진 낯가죽은 그런 감정들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게 해준다는 점이었다.

“고마워, 영감.”

화수가 답지 않게 감사인사를 했다. 물론 그 감사인사가 영지 바구니에 대한 감사만이 아니라는 건 한조도 잘 알고 있었다.

“비싼 거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

“내가 준 걸로, 지금 생색내는 거야?”

기막히다는 듯 투덜거리는 화수를 한조가 불쑥 불러 세웠다.

“화수야.”

“응?”

이미 뒤돌아섰던 화수가 고개만 틀어 대답했다.

“죽지 마라.”

“…….”

“죽지 마.”

툭, 하고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 잠시 굳어 있던 화수가 뒤늦게 피식, 하고 웃었다.

“걱정 마. 내가 영감보다는 오래 살 거니까.”

“…….”

“그러니까 영감도 오래 살아.”

눈물점이 도드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었다. 뒤돌아선 화수가 멈춰서 있는 차로 돌아갔다.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탁. 기다렸다는 듯 집사가 차 문을 닫자 차 바퀴가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일었다.

차가 사라지고,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한조도 집사영감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 *

“어디 있어.”

“방에 계십니다.”

벗어 던진 신발이 현관을 나뒹굴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집사조차 이미 복도를 가로지르는 리 샤오의 걸음을 뒤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쿵쿵쿵쿵.

바닥을 짓찧는 소리인지, 제 심장에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리 샤오는 내딛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칫.

멈추는 법이 없던 걸음이 정작 방 앞에서 멈칫했다. 이상하게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문을 열었는데, 녀석이 없으면 어쩌지. 그런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이상하게 녀석만 관련되면 종종 이런 불안으로 제대로 된 사고를 하는 것이 어려웠다.

“리 샤오 님?”

머뭇거리고 있는 리 샤오가 이상했던지 집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정작 리 샤오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리 샤오의 시선은 장지문 너머에 박혀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발 대신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문고리를 잡아, 옆으로 밀었다.

드륵.

열리는 문틈으로 화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숨을 내쉬고야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쪽은 화수였다.

“영감한테, 쫓겨났어요.”

괜스레 불퉁해진 말투. 뒤늦게 주인도 없는 방에 멋대로 들어와 있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정작 리 샤오에게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쫓겨나?”

리 샤오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가는 것을 본 화수가 황급히 변명하듯 덧붙인다.

“아니, 진짜 쫓겨난 건 아니고, 제 발로 나왔어요. 남의 영업장에서 너무 오래 있기도 했고.”

“…….”

“게다가 오늘은 선물 폭탄까지 쏟아져서. 영감도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었을 겁니다.”

화수가 좀 더 자세히 상황을 설명하자 그제야 리 샤오도 납득한 모양이었다. 물론 결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간 듯했지만.

“그 집, 사 줄까?”

농담이라기엔 묻는 리 샤오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뇨. 됐습니다.”

혹여나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정말 사버릴 기세라, 곧바로 딱 잘라 거절했다. 물론 그런 화수의 거절이 리 샤오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이지만.

“좋아하잖아, 그 정원이 있는 방.”

“…….”

순간 화수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뭐야. 설마 했는데. 미간을 찌푸린 채 화수가 되물었다.

“리 샤오 님은 제가 그곳에서 지냈으면 좋겠습니까?”

“네가 그러고 싶다면.”

“…….”

“난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미간의 주름은 사라졌지만 이번엔 난감한 듯 눈매를 가늘게 떴다. 잠시 고민하던 화수가 이번엔 질문을 조금 바꿨다.

“여기서 지내고 싶다고 하면요?”

“…….”

헌데 이번엔 대답이 곧바로 돌아오지 않는다. 왠지 초조해지는 기분을 억누르며 화수가 되물었다.

“왜요. 여긴 안 됩니까?”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아니면요?”

답지 않게 대답을 머뭇거리는 리 샤오를 화수가 따지듯 재촉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은 그런 이유였나, 싶어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기 싫어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정작 리 샤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전혀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다.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제가요?”

님이 아니고요?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리 샤오가 왜 제게 한 번도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는 알 듯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래서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으신 겁니까?”

“…….”

그거야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실 예전엔 녀석이 싫어하든 말든 제 마음대로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게 잘 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행동이 녀석으로 하여금 이런 오해를 하게 할 줄은 몰랐다.

“전 또 제가 여기 오는 게 내키지 않나 했잖습니까.”

차라리 제 속을 드러내 보여주는 쪽이 더 편할 것 같았다. 당연했다. 리 샤오는 살면서 상대의 기분을 맞추려는 노력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사실 그럴 필요 자체가 없었다. 늘 리 샤오에게 맞추는 건 상대였고, 설사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굳이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누군가와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리 샤오가 난생처음으로 누군가의 기분을 살피고, 심지어 자신을 억눌러서라도 화수에게 맞추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어려울 수밖에. 물론 그런 존재는 아마도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화수가 유일무이할 터였다.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을 줄 알았어.”

“…….”

“그곳에서 훨씬, 편해 보였거든.”

“뭐, 편한 것은 사실이지요.”

당연했다. 평생 살아온 곳이니. 하지만 순순히 긍정하는 화수에 리 샤오의 표정이 가라앉는다. 그것을 본 화수가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돌아와서야 알겠더군요. 이제 여기가 더 편해졌다는 걸.”

사실 화수도 돌아오고서야 알았다. 고작 여기서 지낸 것은 몇 달도 되지 않는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놓이고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제 물건 같은 건, 다 버려버렸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 치워진 것이 없었다. 순간 제가 잠시 외출했다 돌아온 것인가 착각할 정도로 제가 쓰던 물건, 옷가지, 심지어 늘 저를 위해 펴놓았던 이부자리까지 그대로였다.

홍매루가 익숙하고 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잠시 다니러 온 손님처럼 느껴진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익숙한 방 안 어디에도 이제 자신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그게 당연해서, 서운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돌아와 이 방을 보기 전까지는.

여기가 바로 네 방이라고, 그러니 여기에 있어도 된다고, 더는 혼자 떠돌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리 해두고선, 묻지도 않으셨습니까.”

제가 오지 않았다면, 제가 먼저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하지만 정작 리 샤오에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리 샤오가 신경 쓰는 건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네가, 싫다고 하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어.”

툭, 하고 내뱉는 진심. 그 말에 거짓이라고는 없었다. 알았다는 듯 화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그리 싫어하시니, 앞으로 싫다는 말은 되도록 삼가도록 하지요.”

진짜 싫다는 것도 아니고 예를 들어 말했을 뿐인데도 화수의 입에서 싫어,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리 샤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사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자각이 없으니 더 무서웠다.

슥.

화수가 손을 내밀었다. 말로 안 된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리 샤오가 다가왔다. 다가온 리 샤오의 허리를 감싸 안자 그도 그런 화수를 제 쪽으로 바싹 당겨 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자 달큰한 향이 훅 풍겼다. 리 샤오의 냄새였다.

“정말, 사두지 않아도 되겠어?”

기분 좋은 패기를 뿜어내며 리 샤오가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원하는 것이 있어도 포기하는 데 익숙한 화수가 혹 이번에도 그런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저 깨달았을 뿐이다. 제가 홍매루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단순히 그 장소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걸. 그러니 단순히 그곳을 사서 가진다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화수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이 좋아요.”

이곳이 좋았다. 누구 때문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화수의 고백에 리 샤오의 입술이 화수의 이마에 닿았다. 마치, 잘했다고, 착하다고 칭찬도장을 찍듯.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평소라면 생각만 하고 입안으로 삼켰을 말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리 샤오 님이 자란 곳에서, 우리 아이도 자랐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이. 화수를 내려다보던 리 샤오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패기에 취한 화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물론 검은 눈동자가 단숨에 새파랗게 일어난 것도.

“리 샤오 님?”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을 땐 이미 늦었다. 붙잡힌 턱이 위로 들렸다. 입술이 닿기도 전에 입안으로 혀가 먼저 들어왔다. 도망치는 혀를 감아 그대로 쭉쭉 빨았다. 입안을 휘젓고, 입천장을 긁고, 맞닿은 혀를 마구 비볐다.

아, 아. 맞닿은 입안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미는 힘에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화수의 무릎 뒤쪽이 소파에 닿았다. 안 그래도 힘이 빠진 무릎이 그대로 꺾였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는 일은 없었다.

힉.

단단한 두 팔이 화수의 엉덩이를 꽉 붙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 쪽으로 당겨 노골적으로 사타구니를 비볐다. 옷 너머로도 델 듯한 뜨거운 기운이 확연히 느껴졌다. 화수도 마주 비비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붙든 엉덩이를 가를 때마다 벌써부터 뒤가 벌렁댔다.

어떻게 좀.

화수가 애원했다. 물론 입 밖으로 소리를 낼 수는 없었지만 마치 그 말을 들은 것처럼 리 샤오가 향기를 뿜어냈다. 그 향기로 입안이, 온몸이 꽉꽉 채워지고 있었다.

리.

화수가 애원했다. 이번에도 소리는 입안으로 사그라들었지만 리 샤오는 들은 것처럼 더 진하게 패기를 내뿜었다. 아아아. 화수가 진저리를 쳤다.

리 샤오에 질식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질식돼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리 샤오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운명이었다.

* * *

끙.

숨이 찼다. 눈도 뜨지 못한 채 허리를 튼 화수가 턱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었다. 잠결에 저도 모르게 자세가 바뀌었던 모양이다. 만삭인 몸뚱이는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몸을 뒤집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다 힘에 부쳤다. 내내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는데, 다시 뒤척일 생각을 하니 짜증이 일었다.

……어?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던 화수가 뭔가를 감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흐릿하던 눈의 초점이 분명해졌다. 반쯤 몸을 일으킨 화수가 그대로 엉금엉금 기었다. 흐트러진 침의가 어깨에서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길고 가는 손가락에 닿은 장지문을 옆으로 밀었다.

힉.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차가운 기운이 확 풍겨들었다. 하지만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화수의 시선은 홀린 듯 온통 새하얘진 세상을 응시했다.

눈이었다.

어쩐지. 지난밤 유난히도 공기가 차갑다 했더니. 소리도 없이 내린 눈은 이미 대청마루 난간에도, 정원에도, 담벼락 기와 위에도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할 만큼 알알이 쌓인 눈이 꼭 만개한 꽃송이 같았다.

탁.

코앞에서 장지문이 도로 닫혔다. 순간,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돌아보는 얼굴에 경계심은 없었다.

“저 때문에 깨셨습니까.”

자는 사람을 두고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한겨울에도 침의 하나만 걸치고 자는 리 샤오가 그런 이유로 달려왔을 리 없었지만.

미안한 기색으로 묻는 화수를 리 샤오가 기가 막히다는 듯 내려다본다.

“고뿔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러면서도 결국 흘러내린 화수의 침의를 끌어 올려 꼼꼼히 여몄다. 정작 본인은 그 침의조차 입지 않은 상태였으면서 말이다.

“눈이 옵니다.”

화수가 여민 침의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제야 리 샤오도 고개를 조금 전 자신이 닫았던 문 쪽으로 꺾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쉬운 기색이 어린 얼굴을 가만히 보던 리 샤오가 손을 뻗어 두꺼운 솜이불을 가져왔다.

드륵. 머리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꼭꼭 여미는 것을 보고서야 리 샤오가 정원 쪽으로 난 장지문을 열었다. 화수가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리 샤오는 정원이 있는 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괜찮다고 했지만 화수가 옮긴 방을 퍽 마음에 들어한다는 걸 리 샤오는 알고 있었다. 올 봄엔 홍매루의 매화나무를 이곳으로 옮겨 올 계획이었다.

“눈이군.”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리 샤오도 짧은 감상을 툭, 하고 토해냈다.

리 샤오도 눈은 오랜만이었다. 리 샤오가 전전하던 전장은, 늘 가뭄이었다. 비도 오지 않는 황폐한 땅에 눈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본국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러니 리 샤오도 거진 몇 년 만에 보는 눈이었다.

“안 추우십니까.”

눈이 와 포근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맨살로 맞기엔 공기가 차가웠다. 정작 반라로 선 리 샤오에게서는 전혀 그런 기색을 느낄 수 없었지만.

“왜, 추워?”

오히려 되묻는 리 샤오에 화수가 피식, 하고 웃었다. 사실 리 샤오의 체온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다는 건 누구보다도 화수가 잘 알고 있었다. 그 몸을 매일 밤 인간 화로로 잘 활용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네. 춥습니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리 샤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을 벌렸다. 살짝 주저앉은 눈꼬리 아래 검은 점이 도드라졌다. 리 샤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물론 그러면서도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슥. 무릎을 굽혀 앉은 리 샤오가 화수를 끌어안았다. 벌려진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대신 이불째로 당겨 안았다. 몸을 맞대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차가워진 살갗이 화수의 체온을 빼앗는 건 더 질색이었다.

“혹, 눈사람 만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온전히 몸에 힘을 빼고 기댄 화수가 불쑥 물었다.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리 샤오는 순순히 대답했다.

“있지.”

“참말이요?”

물어놓고는 정작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지는 화수를 향해 리 샤오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 형님들이랑 서로 누가 더 큰 눈사람을 만드나 경쟁했었어.”

“그래서.”

형님이 있었다는 건 차치하고.

“누가 이겼습니까?”

“당연히 나지.”

대답은 하지만 그런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리 샤오의 진지한 표정에 화수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왜. 눈사람 만들어줘?”

“아니요.”

혹 눈사람이 만들고 싶어졌나 싶어 물었지만 정작 화수에게서 돌아온 것은 즉답.

“전 됐습니다.”

그냥 됐습니다도 아니고 전, 됐습니다. 묘하게 걸리는 대답에 눈매를 찌푸리고 있으려니 화수의 입이 다시 열렸다.

“아이가 태어나면, 리 샤오 님이 만들어주시면 되겠네요.”

“…….”

“전, 사실, 만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사실 그것을 한 번도 아쉽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아이가 만들어 달라 하면 어쩌나, 불쑥 걱정이 되었던 것. 웃긴 것이 저는 전혀 아쉽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가 하지 못하는 건 싫었다.

“별걱정을 다하는군.”

“…….”

“해보지 않아도, 만들 수 있어. 그냥 굴리기만 하면 돼.”

“…….”

“정히 걱정되면, 미리 연습해보든지.”

“……”

“시간은 많으니까.”

시간은 많으니까. 리 샤오가 무심히 내뱉은 그 말을 입안으로 가만히 되뇌었다. 별것 아닌 말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화수가 힘이 들어갔던 어깨를 늘어트렸다. 온전히 몸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패기 좀, 뿜어보십시요.”

마치 향수라도 뿜어보라는 듯한 당당한 요구에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물론 그런 못마땅한 표정과는 별개로 이미 리 샤오의 몸에서는 패기가 조심스럽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눈내음에 리 샤오의 패기가 뒤섞였다.

기분 좋아.

마치 따뜻한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 지금 같아서는 아주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한 바로 그 순간, 화수의 입에서 색색 고른 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휙.

대청마루 위로 노란 털북숭이가 뛰어올랐다. 평소와 달리 소복이 쌓인 눈 덕분에 마루를 딛는 묵직한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폭폭폭, 두툼한 다리로 새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다가오던 나비가 이내 걸음을 멈췄다.

냐-앙!

불안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왔다 갔다 하던 나비가 이내 마주한 맹수를 향해 항의하듯 울음을 울었다. 리 샤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끄응.

하지만 괴로운 듯 화수의 입에서 새어 나온 낮은 신음소리에 리 샤오가 급히 패기를 억눌렀다. 그 틈에 거리를 좁힌 노란 털북숭이가 방 안으로 쏙 들어왔다. 그러고는 두 사람의, 정확히는 화수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경계하듯 리 샤오의 눈치를 살폈지만 사실 리 샤오는 녀석이 시끄럽게 울거나 해서 화수를 깨우지만 않으면 다른 것은 상관없었다.

슥슥, 이미 리 샤오의 시선이 제게서 물러난 것을 확인한 나비가 젖은 발을 핥았다. 하지만 연신 움직이는 이마며 등에도 물방울은 잔뜩 맺혀 있었다. 털에 묻어 있던 눈이 따뜻한 방 안에 들어오자 녹아버린 탓이었다.

사악사악, 젖은 털을 고르는 소리가 꼭 눈송이가 내려앉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 * *

휙휙.

뒤로 물러나라는 손짓에 화수가 화로에서 떨어졌다. 엉덩이를 뒤로 물리는 화수를 확인한 뒤에야 양양댁이 화로에서 이미 식은 돌은 꺼내고, 그 자리를 새로 달궈 온 돌로 채워 넣었다. 매번 돌을 달궈야 하고, 또 그것을 꼬박꼬박 시간 맞춰 교체하는 것이 번거로울 만도 한데 양양댁은 싫은 내색 한 번 한 적이 없고, 시간을 깜빡한 일도 없었다. 오히려 아직 쓸 만한 상태인데도 교체를 하려고 해서 화수가 말린 적이 더 많았다. 아직 괜찮으니 두라는 말보다 입이 심심하다는 말이 효과적이라는 것도 경험으로 터득한 것이었다.

시뻘겋게 달궈진 돌을 화로 안에 다 집어넣은 양양댁이 이번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섬주섬 펼친 주머니 안에서 뭔가를 한 움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화로 안에 뿌리듯 집어넣었다.

타닥타닥.

마치 장작을 넣은 것처럼 타는 소리가 났다. 물론 향은 나무 타는 냄새와는 완전히 다른 달큰한 향이었지만.

노란 호박.

그녀가 한 움큼 쥐어 화로 속에 집어넣은 것은 다름 아닌 호박이었다. 물론 보석으로 쓰기에는 다소 질이 떨어지는 작은 크기의 결정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석은 보석이었다. 아무리 몸에 좋다 해도 이리 값비싼 것을 고작 불에 태우는 용도로 쓰다니. 화수로서는 좀처럼 따라가기 힘든 부자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오히려 이런 것은 양양댁이 더 익숙해 보였다.

타닥타닥.

익숙해지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타는 소리와 향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좋았다. 돈이 좋긴 좋구나. 다시금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화수였다.

엉덩이를 당겨 앉은 화수가 화로에 손을 쬐는 사이 양양댁이 뒤에 두었던 쟁반을 가져왔다. 상보를 벗겨내자 가지런히 놓인 말린 가래떡이 보였다.

휙휙.

화로 위에 석쇠를 놓고, 그 위에 차곡차곡 가래떡을 올렸다. 그러고는 연신 타지 않게 굴렸다.

“안 뜨거워?”

젓가락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이리저리 떡을 굴리며 굽는 그녀를 향해 화수가 물었다. 묻는 화수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지만 정작 양양댁의 표정은 평온했다.

새하얀 가래떡에 검은 점들이 생겨났다. 말랑말랑해지다 못해 부글부글 거품이 이는 것처럼 떡이 부풀었다. 몇 번 더 굴린 뒤에 양양댁이 떡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후후, 불어 식힌 떡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에야 조청 그릇에 푹 찍었다.

그리고 내미는 가래떡을 받아 든 화수가 말없이 한입 베어 물었다.

바삭.

잘 구워진 떡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쫀득하고 뜨거운 가래떡을 입안에서 굴렸다. 지금도 이리 뜨거운 것을 어찌 손으로 굽고 집어 주었나 싶었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이미 다음 떡을 꺼내 식히고 있었지만.

“양양댁도 먹어.”

내미는 것을 화수가 되돌렸다.

“어차피 이거 나 혼자 다 못 먹어.”

화수는 입이 짧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에 음식은 늘 넉넉하게 준비했다. 중간중간 주전부리도 쉬지 않고 가져왔다. 그런 그녀의 노력이 뼈만 앙상하던 몸이 조금이나마 살집을 늘리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음에는 이견이 없었다.

“어서.”

난처해하던 그녀도 고소한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들고 있던 가래떡을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갔다. 바삭, 하고 베어진 떡의 속살은 쫄깃쫄깃했다.

“여기.”

맨 떡만 먹고 있으려니-사실 그것만 먹어도 맛있었다- 조청 그릇이 앞으로 밀려왔다. 이번엔 머뭇거림이 그리 길지 않았다. 만들 때나 주걱에 붙은 것을 떼어 먹었지 이리 그릇에 담긴 것을, 그것도 이리 담뿍 찍어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입안에 엿당이 쩍쩍 붙었다.

“맛있네.”

입안에 든 것을 연신 오물거리던 화수가 나직이 감상을 털어놓았다. 좀처럼 맛있다는 말을 하는 법이 없는 화수의 칭찬에 양양댁의 입꼬리가 수줍게 올라갔다. 석쇠 위의 가래떡을 굴리는 손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하나라도 더 입에 넣어주고 싶은 어미의 마음이었다.

* * *

“언제 오셨습니까?”

인기척에 눈을 뜬 화수가 옷을 벗고 있던 리 샤오를 향해 묻는다. 소파에 잠시 앉아 있는다는 게 그새 잠이 들었던 모양. 앉아 조는 건 이제는 일상이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니 시간만 나면 졸았다. 얼마 전엔 욕탕에 앉아 있다 조는 바람에 식겁한 일도 있었다. 그 일로 혼자 욕탕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당했다.

윽.

몸을 일으키던 화수가 얼굴을 찌푸리며 도로 주저앉았다.

“왜.”

소리는 입안으로 삼켰는데 귀신같이 알아차린 리 샤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뇨.”

리 샤오의 굳은 표정에 화수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좀 다리에 쥐가 나서.”

다행히 굳은 표정은 조금 누그러졌지만 거리를 좁히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리 샤오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여기?”

화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 샤오가 두 손으로 그의 오른 발을 감싸 쥐었다. 퉁퉁 부운 발이 꼴사나웠지만 방법은 없었다.

한 손으로 발목을 잡아 고정시킨 뒤 손가락으로 종아리 뒤쪽을 꾹꾹, 눌러 올라온다. 귀신같이 뭉친 곳을 찾아 부드럽게 마사지를 했다. 끙.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파?”

“아뇨.”

아프지만 동시에 시원했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개를 내젓는 화수에도 누르는 압은 조금 느슨해졌다.

하아. 무릎 뒤까지 올라왔던 손이 다시 아래로 내려갔을 땐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사이 발목으로 내려간 손이 이번엔 퉁퉁 부은 발을 감싸 쥐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그런 리 샤오를 화수가 만류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발등, 발가락, 발바닥까지 꼼꼼히 주무른 뒤에야 리 샤오는 화수의 발을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때였다.

흠흠.

기다렸다는 듯 장지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들어와.”

무릎으로 서 있던 리 샤오가 몸을 일으키며 대꾸하자 드르륵, 장지문이 열렸다. 카이였다.

“지금 출발하셔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습니다.”

화수를 향해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대신한 카이가 용건을 털어놓았다.

“축하 화환 정도로 끝내지.”

“그래도 명색이 새로운 내무국장의 취임을 축하하는 자리인데, 총감께서 얼굴도 비추지 않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사실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옷을 갈아입고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화수의 얼굴을 보고 나니 나가고 싶지 않았던 것.

“저 때문이라면, 다녀오십시오.”

물론 그런 리 샤오의 기분을 알 리 없는 화수는 카이를 거들고 나섰다.

“이런 몸으로 어딜 가겠습니까.”

그저 농으로 한 말이었지만,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딱딱하게 굳은 리 샤오의 표정을 깨닫고 화수가 웃음기를 완전히 지은 후 말을 정정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요.”

항복하듯 두 손까지 들어 보이면서. 하지만 이번에도 별 소용은 없었다.

“난, 네가 얌전히 기다린다는 말이 더 무서운데.”

의외로 뒤끝이 긴 사내였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화수가 서랍장을 뒤적였다. 잘 정리된 넥타이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꺼내 들었다. 슥. 그리고 그것을 리 샤오의 목에 걸며 물었다.

“그럼 얌전히 기다리지 말까요.”

“…….”

단숨에 새파랗게 이는 눈동자를 화수는 개의치 않고 마주했다.

“예?”

제가 고개를 내저을 거라고는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눈동자. 그런 녀석이 못마땅한 것과는 별개로 리 샤오의 입술은 곧바로 열렸다. 당연했다.

“기다려.”

“…….”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리 샤오의 당부에 화수가 목에 걸어둔 넥타이를 당겼다. 이번 역시 못마땅해하면서도 순순히 아래로 끌려 내려온 리 샤오의 입술에 화수가 입을 맞췄다. 측, 젖은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화수가 속삭였다.

“예. 그리하지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약속이었다.

* * *

“왜 그러십니까.”

차에 오르려다 말고 멈춰 선 리 샤오를 향해 카이가 물었다. 혹 마음이 바뀌어 도로 집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하려는 것일까 봐 카이의 얼굴 위로 긴장이 번졌다. 물론 리 샤오의 입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지만.

“눈이 내릴 것 같아.”

확실히 공기가 차가웠다. 리 샤오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입김이 바람에 사그라진다.

“그렇군요.”

시커먼 밤하늘을 올려다본 카이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니, 조금이라도 빨리 다녀오는 것이.”

출발을 빨리하면, 그만큼 돌아오는 시간도 빨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리 말하는 카이에 리 샤오도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흘낏.

차에 오르기 직전, 리 샤오의 시선이 한 번 더 집을 향했다. 길어야 한 시진.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 게다가 설혹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바로 돌아오면 될 일이었다. 괜한 염려였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탁.

하지만 차 문은 닫혔다. 천천히 미끄러지던 자동차가 이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과 거의 동시였다.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나부끼기 시작한 것은. 리 샤오의 예상이 맞았다.

* * *

“상태는?”

바퀴를 살피던 운전병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카이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카이의 발길이 뒷좌석으로 향했다.

“잠시 눈발이 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야 할 듯합니다.”

폭설이었다. 그 잠깐 서 있는 사이에도 카이의 머리와 어깨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주먹만 한 눈이 말 그대로 쏟아지고 있었다. 시야조차 확보가 되지 않았다. 사실 상황은 출발할 때부터 비슷해 모두 만류했지만 리 샤오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산달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던 것인데,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화수의 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리 샤오는 잠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제가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평생을 보았지만 리 샤오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것이 카이는 더 무서웠다. 그래서 말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리 출발한 차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멈춰 섰다. 이미 사람 무릎까지 쌓인 눈 속에서 바퀴가 헛돌았다.

“리 샤오 님.”

무릎을 괴고 있던 리 샤오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표정은 무표정했다. 정면 유리를 통해 보이는 것은 말 그대로 쏟아지는 눈발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무시무시한 기세는 고스란히 느껴졌다.

허나 지금 리 샤오는 사실 그것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그런데 어째서 이리 멈춰 서 있는 거지?

“홍 의원도 있고, 돌봐줄 이들이 곁에 있습니다. 화수 님 혼자 계신 것이 아니니, 너무 초조해하지 마시고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셔도-”

그리 말하면서도 사실 무의미한 말을 떠들고 있다는 걸 카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 샤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초조한 기색은 한 발 떨어진 카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으므로.

지금으로써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이유였다. 허나 리 샤오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무심히 내리는 눈을 노려보던 리 샤오가 차 밖으로 발을 내딛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바퀴라도 보러 나오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던 카이의 고개가 빠르게 꺾였다.

“리 샤오 님?”

저를 스친 리 샤오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은 차 앞머리가 향하고 있는 방향, 정확히는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카이는 빠르게 리 샤오를 뒤쫓았다.

“리 샤오 님.”

카이가 리 샤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눈을 뚫고 가는 건 무립니다.”

“비켜.”

어둠 속에서 새파란 한 쌍의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을 냈다. 하지만 카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리 샤오라도 맨몸으로 이 눈 속을 헤치고 간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안 됩니다.”

“카이.”

차라리 흉흉하게 빛을 낼 때가 나았다. 버석버석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카이는 직감했다. 리 샤오를 말릴 수 없다는 걸.

“기다릴 거야.”

내색도 않고. 하지만 분명 저를 기다릴 게 틀림없었다. 그런 녀석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다.

“이번에도 녀석 혼자 기다리게 할 순 없어.”

이상했다. 이리 눈발이 휘날리는데, 전혀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불덩이를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 속이, 새까맣게 탄 속이, 서서히 부서지는 걸, 리 샤오는 겨우 견디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카이가 한발 뒤로 물러섰다.

“대신.”

팍-! 차 안에서 우산을 꺼내 든 카이가 그것을 폈다.

“혼자는 못 가십니다.”

* * *

어?

양양댁이 가져다준 조린 밤을 콕, 찍어 입으로 가져가던 화수가 문득 고개를 틀었다. 작은 나무꼬지는 내려놓고 슬그머니 일어나 장지문을 밀었다.

-!

눈이 말 그대로 쏟아지고 있었다. 눈송이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어린아이 주먹만 했다.

돌아올 때 괜찮으려나.

내린 눈이 벌써 발목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 쳐진 나뭇가지를 보며 화수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내쉬는 숨에 새어 나온 하얀 입김이 사그라졌다. 그 잠깐 새 어깨가 써늘했다. 괜히 고뿔이라도 들면 큰일이라 붙잡고 있던 문을 도로 닫으려고 할 때였다.

멈칫. 어둠 속에서 뭔가를 발견한 화수가 그대로 멈췄다. 허연 눈을 잔뜩 뒤집어쓴 노란 털뭉치.

‘나비야?’

그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였다면 제가 부르지 않아도 다가왔을 녀석이 눈이 쏟아지는 정원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화수가 닫으려던 문을 도로 열었다.

‘나비야, 거기서 뭐 해. 이리 와.’

대청마루까지 나온 화수가 다시금 녀석을 불렀지만 이번에도 반응이 없었다. 녀석의 꼭 감은 눈 위로 눈발이 쌓였다. 왠지 모를 불안한 기분.

‘너 진짜.’

화수가 마루 끝에 섰다. 초조한 기분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런 화수를 오해한 것인지 내내 웅크리고 있던 녀석이 경계하듯 몸을 일으켰다. 아. 화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비틀대며 뒤로 물러서는 녀석이 오른쪽 앞발을 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녀석이 웅크리고 있던 눈 위로 붉은 물이 들어 있는 것을 본 화수가 급히 대청마루 아래로 발을 디뎠다. 제 몸의 무게중심이 그리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잊고서.

-!

아래 쌓여 있던 눈을 밟는 순간, 그대로 몸이 미끄러졌다.

‘윽.’

미끄러지는 순간 바닥을 짚었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 쥐는 바람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씨발, 놀래라.’

아릿하게 울리는 둔통이 있었지만 잔뜩 쌓인 눈 덕분인지 통증은 그리 크지 않았다. 사실 아픈 것보다 놀란 것이 더 컸다. 잘게 심호흡을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 때였다.

‘너.’

그리 부를 땐 오지도 않던 녀석이 어느새 제 발치에 와 있었다.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제가 넘어졌다고 이리 달려온 것을 보니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봐봐. 어딜 다친 거야.’

몸을 일으킨 화수가 녀석을 안아 들었다. 의외로 반항 없이 축 늘어진 녀석의 앞발을 확인하자 피딱지가 앉은 것이 보였다. 쌓인 눈 때문에 바닥에 위험한 것이 있는 것을 모르고 밟은 모양이었다. 다행히 상처는 그리 깊지 않은 것을 확인한 화수가 대청마루로 올라왔다.

‘아. 녀석이 좀 다쳤어.’

마침 마실 것을 가지러 갔던 양양댁도 돌아왔다. 문 앞에 선 양양댁을 향해 화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 심각한 건 아니고.’

얼굴이 핼쑥해지는 양양댁을 향해 화수가 뒷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양양댁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기겁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화수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시선이 제가 안고 있는 나비가 아닌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화수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대청마루 위, 얕게 쌓인 눈이 시뻘갰다. 그것이 제 다리 사이에서 새어 나온 것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양수였다.

빌어먹을.

화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무릎이 꺾이는 화수를 본 양양댁이 달려왔다. 하지만 그녀의 힘으로 주저앉는 화수를 어쩌지는 못했다. 그저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천천히 바닥에 앉을 수 있도록 붙잡는 것이 고작이었다.

땡땡땡땡땡.

그녀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종을 꺼내 마구 흔들었다. 누운 화수의 위로 눈발이 마구 쏟아졌다. 그것을 막기 위해 양양댁이 화수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품은 따뜻했다.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몸이 자꾸만 가라앉았다. 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했는데.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도 화수의 걱정은 그것뿐이었다. 허나 그 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 * *

“여기 데운 물과 영견.”

문을 열고 나온 홍 의원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곧장 뒤돌아 가는 홍 의원을 집사가 붙들었다.

“어찌, 괜찮겠는가.”

“…….”

“홍 의원!”

대답이 없는 홍 의원에 집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하필이면 리 샤오가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더 큰일이었다. 굳게 닫혔던 홍 의원의 입술이 겨우 열렸다.

“리 샤오 님은, 오고 계십니까?”

하지만 집사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네만.”

출발은 진즉 했다고 했다. 하지만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을 보며 집사가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눈 때문에 중간에 발이 묶인 것이리라. 얼굴에 가득한 주름이 더 깊어졌다.

“빨리 오시라 하십시오.”

더 묻는 대신 그리 당부한 홍 의원이 잰걸음으로 방 안으로 사라졌다. 집사도 그런 홍 의원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을 향해 일렀다.

“물을 더 가져와라. 영견뿐만 아니라 이 집에 있는 깨끗한 천이란 천은 몽땅 챙겨오고.”

지시를 받은 시종들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너는 여기 잠시 있거라. 다시 연통을 해보고 올 터이니.”

어린 시종을 세워놓은 집사가 걸음을 내딛었다.

아아악-

잠시 멈췄던 진통이 다시 시작된 모양이었다. 순간 멈칫했던 걸음이 다시 내딛어진 순간에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라져 있었다.

“리 샤오, 님은요?”

축 늘어져 있던 화수가 가만히 물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홍 의원이 고개를 내젓는다. 물기가 어린 눈동자에 실망의 빛이 번졌다.

“눈에 발이 묶이신 모양입니다.”

홍 의원의 변명에 화수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제가 가라고 등을 떠밀지 않았던가. 그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다만,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사이를 못 참고 사고를 친 거냐고 얼굴을 찌푸리겠지만, 사실 그 못마땅해하는 얼굴이 화수는 좋았다.

빨리 오지.

옆에서 있던 양양댁이 영견으로 화수의 젖은 이마를 닦았다.

나 힘든데.

화수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파르르, 경련했다.

“이제, 거의 다 되었습니다.”

다시금 진통이 일었다. 제법 간격을 두고 오던 진통이 이제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왔다. 이불을 움켜쥔 손가락이 새하얗게 부서졌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잔인한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홍 의원도 어쩔 수 없었다. 헐떡이는 화수의 볼을 양양댁이 쓰다듬었다.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애틋하기까지 한 손길에 화수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엄마.

엄마.

단 한 번도 부른 적 없었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왜 지금 이리도 입안에서 맴도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제 어미도, 이리 배 아파 자신을 낳았을 거라 생각하니, 속이 앓아 내렸다. 어쩔 줄 모르고 이불만 움켜쥐고 있는 화수의 손을, 굳은살투성이인 손이 감싸 쥐었다.

엄마.

평생 분칠 말고는 해본 적이 없던 제 어미의 손과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데, 이상하게 화수는 그 손이 꼭 제 어미의 손처럼 느껴졌다. 진짜 제 어미는 단 한 번도 이리 따뜻하게 제 손을 쥐어준 적이 없는데. 퍽 이상한 일이었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줄줄 흘렀다. 볼이 흥건했다.

“정신 놓지 마세요. 꼭 붙잡으십시오.”

아득해지는 의식을 붙들듯 화수가 그 손을 꽉 쥐었다. 양양댁은 다른 손으로 화수의 손을 덮었다. 차가워진 손등을 몇 번이고 쓸었다.

힘을 내세요.

힘을, 내십시오.

제발.

그리 말하는 것처럼.

후우.

심호흡을 한 화수가 남아 있는 힘을 쥐어짰다.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기분을 느낀 것과 동시에 울음소리가 쏟아졌다.

“건강한 도련님입니다!”

그리 말하는 홍 의원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섞여 있었다.

하아. 화수가 낮은 숨을 토해냈다. 눈을 떠 아기를 보고 싶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것이 화수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 * *

“도련님?”

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툭툭, 내딛는 걸음마다 리 샤오의 몸에서 눈뭉치가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집사가 멍하게 서 있는 사이, 이미 바로 앞까지 다가온 리 샤오가 가장 묻고 싶었던 것부터 확인했다.

“화수는?”

“…….”

일순 집사의 얼굴 위로 번지는 난감한 기색을 리 샤오는 놓치지 못했다. 더 묻는 대신 걸음을 내딛었다. 그 때였다.

“집사어른!”

맞은편에서 시종이 달려오고 있었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다급히 저를 부르는 외침이 고작이었지만 집사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아이는 제가 조금 전 자리를 비우면서 대신 문 앞에 세워두고 온 시종이었다.

“화수 님이, 화수 님이!”

물론 그런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리 샤오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만으로도 다른 설명은 필요 없었다.

“화수 님! 정신 차리십시오. 화수 님!”

장지문 너머 아기 울음소리와 홍 의원의 외침이 뒤섞여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드륵.

리 샤오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리 샤오를 멍하니 보고 있던 홍 의원이 뒤늦게 손을 뻗어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새파랗게 일어나는 눈을 향해 홍 의원이 다급하게 설명했다.

“그리 눈을 뒤집어쓰고는 안 됩니다.”

안 그래도 기력이라고는 한 톨도 남지 않은 화수였다.

그제야 리 샤오도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깨달았다. 온몸이 눈 투성이였다. 장갑을 벗은 리 샤오가 코트를 벗어 던졌다. 눈덩이가 된 코트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면서도 발은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물론 옷만 벗어 던졌다고, 꽁꽁 언 몸에서 흘러나오는 한기까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홍 의원도 더는 리 샤오를 저지하지 않았다.

툭.

리 샤오가 가만히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런 리 샤오를 본 양양댁이 뒤로 물러났다. 리 샤오가 화수를 안아 들었다. 한없이 조심스러운 움직임에 누구도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화수야.”

리 샤오가 축 늘어진 화수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땀에 전 머리칼이, 화수가 홀로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를 가늠케 했다.

“화수야.”

가슴이 앓아 내렸다.

“가지 마.”

마른 몸을 꽉 끌어안으며 리 샤오가 애원했다.

“나만 두고, 가지 마.”

두 번은, 견딜 수가 없었다. 녀석이 없는 세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을 감은 화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미 의식을 잃은 화수에게 리 샤오의 목소리는 전혀 닿지 않았다.

“제발.”

사지가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녀석이, 자신이라는 걸. 화수는 자신이었다. 그러니,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패기 좀, 뿜어보십시오.”

화수의 말이 생각난 것은. 리 샤오가 화수의 이마를 꾹 눌렀다.

“리 샤오 님?”

순간 리 샤오가 뿜는 패기를 알아차린 홍 의원이 기겁해서 일어났다.

“끼어들지 마십시오.”

그런 홍 의원을 말린 것은 카이였다. 뒤늦게 나타난 카이는 리 샤오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몰골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알아서 하실 겁니다.”

화수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리 샤오가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런 카이의 예상대로, 리 샤오가 뿜어내는 패기는 믿기 힘들 정도로 억눌러져 있었다. 사실 리 샤오 정도 되는 붕鵬은 오히려 폭주하는 쪽이 억누르는 것보다 쉬웠다. 애초에 패기를 이리 억누를 일 자체가 없으니까. 그런데 리 샤오는 분명 그리하고 있었다.

솜털처럼, 가볍게, 패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직접 보면서도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진짜 믿기 어려운 일은 다음 순간 일어났다.

움찔.

내리깔려 있던 속눈썹이 움직였다고 생각한 순간, 거짓말처럼 화수가 눈을 떴다.

“왜.”

목소리가 다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리 샤오를 보는 눈동자의 초점은 선명했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가슴까지 뻐근해지는 숨을 몰아쉬고서야 리 샤오는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만히 화수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달싹이던 그의 입술이 마저 열렸다.

“왜 이리 몸이 차갑습니까.”

“…….”

턱, 하고 숨이 다시 막히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왜 이제야 왔냐는 물음일 줄 알았다. 어째서 이제야 왔냐고, 왜 저를 이리 혼자 두었냐고, 그리 원망하는 말을 쏟아낼 줄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너는.

“그 눈을, 헤치고 왔습니까.”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새까만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 샤오가 그 눈꺼풀 위로 입술을 내렸다. 다가오는 입술을 본 화수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약조한 대로.”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화수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어디 가지 않고 얌전히, 있었습니다.”

“그래.”

눈꺼풀을 누르고 있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힘들어서. 힘이 들어서, 이젠 정말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한 그 마지막 순간. 거짓말처럼 저를 휘감던 달큰한 내음.

“착하다.”

감은 화수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착하다, 우리 화수.”

그리도 보고 싶었던, 내 것의 냄새였다.

영원히 그칠 것 같지 않던 눈이, 그치고 있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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