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1/21)

[BL] 꼬까신 (화대 (花代) 외전)

1.

뾱. 뾱. 뾱.

손바닥만 한 조그만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우도 그 소리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뾱뾱뾱, 뾱뾱뾱뾱.

소리의 간격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뒤뚱뒤뚱, 밥상다리보다 짧은 두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통통한 몸이 뒤뚱거린다. 누구나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가게 하는 광경이었다. 혹여나 넘어지기라도 할까 그 뒤를 바싹 붙어 걷고 있는 한 사람만 빼고. 물론 화수는 아니었다.

홀짝.

오히려 화수는 대청마루에 선 채 태평하게 양양댁이 손에 쥐여 준 대추차를 홀짝이는 중이었다.

뾱뾱뾱뾱뾱-

박자가 점점 엇박이 된다 싶었는데, 리우가 결국 균형을 잃고 기우뚱했다. 문제는 그게 하필이면 리우를 내내 주시하고 있던 양양댁이 아주 잠깐 흘러내린 치맛자락을 고쳐 쥐던 순간이었다는 거였다.

꿍.

어찌할 틈도 없이 조그만 몸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기함한 양양댁이 후다닥 앞으로가서 리우를 안아 올렸다. 흙투성이가 된 옷도 옷이지만 그보다는 새빨개진 손바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연약한 아이의 살갗은 조그만 마찰에도 쉽게 붉어지는 법이었지만 양양댁의 얼굴이 괴롭다는 듯 일그러졌다. 살짝 숨이 찬 화수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온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다쳤어?”

사실 대답을 들을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빠르게 양양댁이 호호 바람을 불어주고 있는 손바닥을 확인한다. 다행히 생채기까지는 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힝.”

하지만 정작 양양댁이 호호 바람을 불어줄 때까지만 해도 멀뚱히 눈만 깜빡이고 있던 리우가 뒤늦게 달려온 화수를 보자 급 칭얼대기 시작했다.

“엄마아.”

얼른 자기를 안으라는 듯 두 팔까지 쭉 내뻗으며. 엄살이라는 걸 알면서도 화수는 그런 리우를 품에 안았다. 그렇게 답삭 안겨오는 아이의 엉덩이를 추어올리다가 양양댁과 눈이 마주쳤다. 화수는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양양댁을 향해 괜찮다는 듯 한마디 한다.

“괜찮아. 조금 빨개진 건데 뭐.”

“…….”

사실 이건 깜짝 놀라 한달음에 달려온 본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양양댁의 어두워진 낯 색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낸 통통한 손바닥에 핏기가 비췄기 때문이다. 아마 얇게 생채기도 난 모양이었다.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화수라도 진짜 침질을 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고 한 말인데 하필이면 그 순간 집사가 등장할 게 뭔가.

“다치셨습니까?! 어쩌다가요?!”

“…걷다가 좀 넘어진 것뿐이에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는 양양댁의 앞으로 나서며 화수가 대신 변명했지만 집사의 일그러진 표정은 여전했다.

“뭘 하고 섰어! 얼른 가서 홍 의원을 모셔 오지 않고!”

“네, 네!”

화수를 향해 화를 낼 수는 없으니 불똥은 괜한 곳으로 튀었다. 뒤에 서 있던 시종이 황급히 뒤돌아 달려가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겨우 이 정도 상처로 홍 의원까지 부르는 건-”

“상처에 침을 바르는 건 아주 비위생적인 행동입니다.”

“…….”

너무 호들갑인 거 아니냐고 한마디 하려다, 본전도 못 건졌다. 화수가 조용히 입을 꾹 다물자 집사가 손을 내밀었다.

“무거우니 애기씨는 제가 안지요.”

“안 대.”

물론 거절한 건 화수가 아니었다. 말도 잘 못하면서 싫다는 의사표현만큼은 아주 똑 부러졌다. 단호하게 거절한 것도 모자라 아예 그 짧은 팔로 화수의 목을 꽉 끌어안는다.

“제가 안고 갈게요.”

난감해진 화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지만 사실 집사는 전혀 기분이 상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제 안 된다는 말도 할 줄 아십니까.”

아마 저에게 배운 말인 듯했다. 이 집에서 화수 말고는 리우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허면 신은 제가-”

“으으응-”

이번엔 한발 물러선 집사가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신을 벗기려고 하자 난리가 났다. 발을 오므려 숨기고 싶은데 아직은 팔다리가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볼이 부풀어 오른다.

“괜찮아. 가져가는 거 아니야. 벗었다가 밖에 나올 때 다시 신자.”

“아아, 안 대. 내 꼬, 내 꼬.”

어지간히 신발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화수가 말하면 순순히 수긍하는 리우가 이리 고집을 피우는 걸 보면 말이다.

“신은 밖에서만 신는 거야.”

“아니야.”

기어코 짧은 다리를 구겨 양반다리로 신발을 숨긴 리우가 당당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사실 이럴 때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자꾸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집사 할아버지가 이놈 한다.”

슬그머니 집사의 눈치가 보여 입꼬리를 꾹 눌렀다. 아무리 예뻐도 흙 묻은 신발을 신고 집 안에 들어서는 걸 봐주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사의 대꾸는 완전히 예상을 빗나갔다.

“이놈 안 할 겁니다만.”

오히려 무슨 소리냐며, 왜 저를 나쁜 사람을 만드냐는 집사의 눈빛에 오히려 억울해진 쪽은 화수였다.

“바닥에 묻은 흙만 좀 털면 되지요. 너는 가서 젖은 천을 챙겨 와라.”

“…….”

손을 휘저으며 또 다른 시종을 향해 그리 지시한 집사가 다시금 흐물흐물해진 얼굴로 리우에게 말을 걸었다.

“이 신이 그리 마음에 드셨습니까.”

“히잉.”

하지만 아직 그렇게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리우는 또 제 신발을 노리는 건 줄 알고 울상이 되었다. 그런 리우를 양양댁이 달랜다. 늘 그랬듯 말을 못 하는 대신 투박한 손으로 리우의 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자 불룩했던 볼이 조금 가라앉았다.

“으으응.”

물론 경계를 완전히 푼 건 아니라 집사가 시종이 가져온 젖은 천을 건네받는 것을 본 순간 도로 눈동자가 커졌다.

“가. 가아.”

꼬깃꼬깃 접고 있던 발을 몸으로 덮으며 이마를 화수의 가슴팍에 붙였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제 것을 지키는 법을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가져가는 거 아니야. 닦기만 할 거야.”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화수도 거들었지만 별 도움은 안 됐다.

“으응, 아니야. 아니.”

난감해하던 화수의 얼굴이 이내 살풋 찌푸려진다. 그도 그럴 것이.

“수건으로 하지, 왜 손으로.”

양양댁이 맨손으로 신발 바닥을 털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덕분에 신을 벗기려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한 리우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풀렸지만 말이다.

“후, 후-”

후우, 후우, 양양댁이 손으로 털면서 입으로 바람을 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리우가 그것을 따라한다. 흉내 내는 것이라 실제 바람을 부는 대신 소리만 비슷하게 내는 게 고작이었지만 양양댁은 그마저도 대단하다는 듯 다정하게 웃었다.

그녀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건 리우인데 어째서 제 심장이 이리도 따뜻해지는 것인가. 화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어딜 얼마나.”

홍 의원이 왔었다는 말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던 리 샤오가 고개를 틀었다.

“뛰다가 넘어져서 손바닥이 좀 까졌을 뿐이에요.”

순간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황급히 설명을 덧붙이자 그제야 리 샤오도 느슨해진다. 사실 심각할 정도라면 화수가 이리 태평한 얼굴일 리 없으니 애초에 괜한 걱정이었지만 리 샤오도 어쩔 수가 없었다. 생채기 하나에도 가슴이 철렁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니까.

“울진 않았어?”

“네, 뭐. 좀 놀란 것 같긴 했지만.”

톡, 톡, 긴 손가락으로 단추를 잠그던 리 샤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런데 벌써 뛰어다니기 시작한 건가?”

협탁을 잡고도 한 걸음 걸으면 도로 주저앉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걷는 걸 넘어서 뛰기까지 한다니. 아무리 하루가 다르게 크는 게 어린아이라지만 요 며칠 밀린 일정 때문에 정신없는 사이 또 훌쩍 커버린 모양이었다. 눈 깜짝하면 스치듯 지나가버리는 시간들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넘어진 거지요.”

걸음마도 겨우 뗀 녀석이 갑자기 뛰려고 하는 바람에 난 사단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불퉁해지는 화수의 볼을 리 샤오가 손등으로 쓸어내린다.

“원래 넘어지고 다치면서 배우는 거니까.”

안타깝지만 그건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었다. 알면서도 아픈 게 또 부모 마음인 법이지만.

“그 말씀 집사어른께도 좀 해주시면 좋겠네요.”

피식. 시시콜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듣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되었다. 화수는 집사가 너무 과민반응이라고 못마땅해하지만 정작 집사가 그렇게 된 이유의 대부분이 본인 때문이라는 건 모를 터였다. 바로 옆에서 숨이 넘어가는 것을 본 사람은 리 샤오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화수의 목숨과 바꿀 뻔한 작고 소중한 아기. 아마 리우가 장성이 되어도 늘 그날의 아기로 여겨질 터였다.

“그러지.”

그럼에도 리 샤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요. 이러다가 버릇이 아주 나빠지겠습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리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화수였다. 허니 화수가 싫어하는 걸 할 리가 없었다.

“몰라서 하시는 말입니다. 오늘만 해도 신을 벗지 않겠다고 얼마나 고집을 피우던지.”

“그래?”

“결국 종일 신을 신은 채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겨우 잠든 후에야 벗길 수 있었다니까요.”

“…….”

이번엔 리 샤오도 좀 놀랐다. 물론 리우가 고집을 피웠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고, 집사가 그걸 그냥 두었다는 게 놀라웠기 때문이다. 아끼는 마룻바닥 위를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게 리우였다.

“누굴 닮은 모양이지.”

순한 것 같아도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점이 눈앞의 누구를 똑 닮았다. 살풋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리 샤오의 모습에 화수가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며 되묻는다.

“그 누구가 혹시 접니까?”

“왜. 찔려?”

도발하듯 되묻는 리 샤오를 보고 화수가 억울하다는 듯 반박한다.

“집사어른이 그러셨거든요? 딱 리 샤오 님 어릴 때 판박이라고.”

“나?”

“평소엔 고집도 안 부리고 순하다가도 한번 마음에 든 건 절대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던데요.”

“……그런가.”

생각해 보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보셔도 소용없습니다.”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항의라고 여긴 모양이다. 어림없다는 듯 턱을 치켜 올리는 화수의 입술에 리 샤오가 입술을 꾹 눌렀다.

“뭐 하시는 겁니까.”

심각한 대화를 하다 말고 갑자기. 황당해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리 샤오가 오히려 되물었다.

“그러라고 치켜 올린 거 아니었어?”

“아니거든요?!”

“그래서, 안 된다고?”

“…아니라고 했지 누가 안 된다고 했습니까.”

피식. 리 샤오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살짝 돌아간 턱을 손가락으로 붙잡아 올렸다. 안 그래도 그린 듯한 턱 선이 더 예리해진다. 이마, 미간, 콧대로 이어지는 선을 눈으로 덧그린다. 코끝을 훑고 인중을 지나 도톰하게 올라온 입술을 보니 절로 갈증이 일었다. 살짝 맛을 봤더니 더 기갈이 났다.

얼른.

조르듯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애가 타는 건 리 샤오만은 아니었으니까.

츕.

입술이 맞닿았다. 젖은 입술이 닿는 감촉이 쫀득했다. 설탕물을 바른 사탕처럼 탱글탱글한 윗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물었다가 놓으면서 그 아래로 혀를 밀어 넣고 가지런한 치아를 훑는다.

“끙.”

살결도 아니고 딱딱한 치아를 훑는 건데도 이상하게 간질이는 느낌이 났다. 스스스, 등줄기의 솜털이 다 섰다.

쑥.

치아를 훑어 내려온 혀가 벌어진 틈을 벌리며 들어왔다. 두툼한 살덩이가 입안을 가득 채운다. 뜨거웠다. 방금 전까지 그런 평범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츕, 츄웁.

델 듯이 뜨거운 살덩이가 입안을 휘젓는다. 문지르고 안을 채운다.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고였다. 질척하고 흐물흐물해지는 것이 꼭 입안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런 기분이 드는 게 꼭 윗입만은 아니었다.

쯔윽, 측.

아래쪽 입도 슬금슬금 물기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점점 밑이 빠지는 기분에 무릎이 꺾였다. 하지만 진작 그런 기색을 알아차린 리 샤오가 주저앉으려는 화수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이미 맞닿아 있어서 더 닿을 수도 없는 입술을 더욱 단단히 눌러왔다. 한 치의 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끙.

혀가 밀고 들어와 목구멍 안쪽까지 꽉 찼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화수는 리 샤오에게 매달렸다. 발아래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이 바로 리 샤온데, 그런 그에게 매달린다는 게 퍽 모순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는 것도, 구원하는 것도 리 샤오만이 할 수 있으니까.

끄응.

리 샤오 역시 사정 봐줄 생각은 없었다. 더 깊이 혀를 집어넣으며 팔에 매달린 화수의 손을 떼어내 제 목에 두르게 했다. 손을 천천히 내려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아-, 아….

맞닿은 사타구니가 거칠게 비벼진다. 얇은 천 너머로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다음 수순을 알고 있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 뒷구멍이 오물거리고 내벽이 흐물흐물해졌다.

오싹오싹. 온몸의 신경이 쭈뼛하고 다 서는 감각. 가만히 있어도 허리 아래가 앓아 내렸다. 밭은 숨이 쏟아졌다. 물론 헐떡이는 숨결까지도 모두 리 샤오의 입안으로 삼켜졌지만.

툭.

미는 힘에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새 발치에 미리 깔아둔 이불이 걸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 잠깐-, 만요.”

솔직히 밀어내는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화수가 보인 거부의 몸짓 하나에 리 샤오는 그대로 일시정지. 검은 눈동자에서는 아직 갈무리되지 못한 흥분이 그대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몸은 분명 기다려 상태였다.

하아. 하아. 떨어진 입술을 벌려 잠시 헐떡이던 숨을 고르던 화수가 내뱉은 말은 고작.

“저녁은, 드셨습니까?”

흉포하게 날뛰고 싶어 하는 짐승을 겨우 내리누르며 화수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던 입장에서는 퍽 기가 막히는 질문이었다.

“먹었지, 그럼.”

그럼에도 대답은 또 착실하게 해주는 리 샤오다.

“시간이 몇 신데.”

“그렇지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순간 스치는 실망한 기색을 리 샤오가 놓칠 리 없었다. 살짝 미간을 좁히더니 다시 묻는다.

“혹시, 기다렸어?”

“오늘은 그리 늦지 않을 거라고 하셔서.”

“…….”

사실 요 며칠 아침저녁으로 얼굴만 겨우 본 것이 리우뿐만은 아니었다. 리 샤오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진다.

“다들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제가 기다린다고 한 거예요. 그리고 양양댁이 간식거리는 챙겨 줘서 배는 전혀 안 고픕니다.”

불똥이 집사나 양양댁에게 튀지 않도록 급히 변명을 덧붙인다. 그제야 조금 가라앉는 눈동자.

“뭐 먹었는데.”

“삶은 계란이요.”

“…….”

“식혜도 한 사발 먹었고요.”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고 나름 자랑스럽게 말했다가 리 샤오에게 비웃음만 당했다.

“고작 그거 가지고 배가 차?”

“차던데요.”

보통은 어릴 때 못 먹고 자란 사람일수록 식탐이 많다던데 이상하게 화수는 그 반대였다. 하루 종일 화전 몇 점이 고작이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늘 넘치게 배를 채우고 있는데도 다들 성에 안 차는 모양이었다.

“밥부터 먹어.”

“리 샤오 님은요?”

미련 없이 돌아서서 집사를 부르려는 리 샤오를 화수가 급히 붙든다.

“리 샤오 님은 안 드실 거냐고요.”

“걱정 마. 옆에 있어줄 테니까.”

“그냥 있기 심심하시잖아요.”

“별로.”

“…….”

묘하게 어긋난다 싶던 대화가 아예 끊겼다. 답답하다는 듯 콧잔등을 구기는 화수를 보고 리 샤오가 다시 묻는다.

“같이 먹어줘?”

“이미 저녁은 드셨다면서요.”

“…….”

이것도 답이 아니었나. 난감해진 리 샤오가 옆으로 슬쩍 고개를 기울이는데 화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제안을 해왔다.

“그럼 리 샤오 님은 간단히 한잔 하실래요?”

“…….”

“마침 오늘 낮에 영도에서 사람이 다녀간 것 같던데.”

“…….”

그제야 답지 않게 화수가 저녁식사에 집착한 이유를 리 샤오도 깨닫는다.

“꿍꿍이가 있었군.”

“꿍꿍이라니요?!”

영도라면 리 샤오의 집안 소유인 주조장이 있는 지역이었다. 이미 리 샤오가 태어나기 전부터 맡아서 운영하는 이가 따로 있던 터라 평소에는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1년에 한 번 그 해에 첫 수확한 쌀로 빚은 술을 보내올 때가 되서야 그게 있었지, 하고 존재감을 자각하곤 했다.

작년에도 이맘때쯤 첫 술을 보내왔었지. 그땐 배 속에 샤샤가 있을 때라 화수는 술을 채웠던 잔에 코를 박고 남은 향기만 킁킁대는 게 고작이었지만. 하도 아쉬워하기에 내년엔 꼭 마시게 해주마 약속을 했었더랬다.

“앉아만 계시면 심심하실까 봐 그런 거지요.”

화수가 억울하다는 듯 펄쩍 뛰었지만 변명을 덧붙일 때의 시선은 분명 슬그머니 빗겨나 있었다.

“뭐, 그렇다고 치지.”

늘 무심한 쪽은 자신이었다. 화수가 한 번 한 약속은 잊어버리는 법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

매달리듯 올려다보는 화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리 샤오는 미련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집사.”

화수가 저녁을 거른 일을 잊지 않은 집사가 막 문 앞에서 기척을 내려던 참이었다.

“네.”

순간 놀라긴 했지만 기척도 내지 않았는데 어찌 아셨냐는 질문은 되돌리지 않았다. 화수가 있을 때 리 샤오의 감각이 얼마나 예민해지는지는 집사도 익히 잘 알고 있었으므로.

“술상 좀 봐.”

“술상, 이요.”

하지만 바로 이어진 리 샤오의 지시에는 질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밥상도 아니고 술상이라니.

“아.”

하지만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집사를 목격한 리 샤오가 실수했다는 듯 덧붙였다.

“안주도 넉넉히.”

물론 집사가 원한 덧붙임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쪼르륵.

도기로 된 주전자를 기울이자 경쾌한 소리를 내며 투명한 액체가 쏟아진다. 동시에 잘 익은 술에서 나는 향긋한 내음이 코끝에 머금어진다. 그 향기만으로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때요? 아주 잘 익었지요?”

술로 가득 채운 술잔을 들어 올리자, 따를 때부터 눈을 떼지 못하던 화수가 질문 세례를 퍼붓는다. 심지어 술잔이 리 샤오의 입술에 닿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사실 애초에 리 샤오는 집어 든 술잔을 제 입으로 가져갈 생각이 없었다.

탁.

하나밖에 없는 술잔이 화수의 앞에 놓였다. 등잔만 해진 눈이 이내 천천히 반달로 접힌다. 하지만 냉큼 잔을 집어 들려고 손을 내뻗었을 때였다.

“안주부터.”

새하얀 손을 내리누른 리 샤오가 조건을 덧붙인다.

“무슨 안주를 술도 안 마시고 먼저 먹습니까.”

바로 코앞에서 과자를 빼앗긴 기분에 화수가 불퉁하게 항의했지만 리 샤오의 반응은 단호했다.

“싫으면 상 도로 물리라고 할까?”

“싫다고는 안 했는데요.”

이게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화수는 재빠르게 반항을 포기하고는 바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원래가 안 되는 일에 길게 미련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화수는.

그리고 그 젓가락으로 가장 먼저 집어 든 건 얇게 포를 뜬 민어를 노란 계란옷을 입혀 기름에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낸 민어전이었다. 한입 크기의 전을 입안으로 밀어 넣자 고소한 기름 향이 먼저 입맛을 확 돋운다. 이어 야들야들한 생선살이 씹지도 않았는데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리 샤오 님도 하나 드셔보세요.”

이거 진짜 맛있어요. 화수가 말하기 전부터 살짝 구겨진 미간이나, 평소보다 빨라진 오물거리는 속도만으로 이미 짐작한 바였다.

“됐어.”

“치사하게, 저는 안주부터라고 하셔놓고 리 샤오 님은 술만 드시겠다고요?”

까다로운 녀석의 입맛에 맞는 안주를 빼앗고 싶지 않아 거절한 것인데, 다르게 오해한 모양이었다. 물론 리 샤오는 그런 것들을 시시콜콜 변명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억울하면 끼니를 거르지 말았어야지.”

“……삶은 달걀 먹었다니까요.”

“그게 밥은 아니잖아.”

“…….”

억울했지만 반박할 말도 없었다. 짜증나.

“이제 마셔도 되지요?”

볼을 부풀린 화수가 민어전을 하나 더 집어 입에 욱여넣더니 당당하게 잔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못 마시게 막으면 그땐 진짜 물어버리겠다는 각오로 말했지만 리 샤오는 전혀 말릴 생각이 없었다.

“물론.”

정작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리 샤오의 모습에 살짝 머쓱해진 화수가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크.

아까워서 다 마시지도 못하고 1/3쯤 머금은 술을 꿀꺽 삼키자 알싸한 기운이 그대로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께까지 퍼진다.

“그렇게 좋아?”

여운을 음미하고 있는 화수를 물끄러미 보던 리 샤오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묻는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횟수로 치면 거진 3년 만에 맛보는 술이었다. 사실 봄부터 체력은 많이 회복되어 마시려고만 했으면 한두 잔 정도는 여름부터도 가능했겠지만, 이유식을 먹기 시작했음에도 가끔 젖을 찾는 리우 때문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는 매달려 만지작거리긴 해도 더는 물고 빨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이제야 그럴 생각이 든 거였다.

제 어미 피를 물려받았으니, 당연히 제게도 모성애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세상엔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천만다행히도.

“그런데 혹시 술 도수가 좀 높나?”

화수가 마시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리 샤오가 불쑥 물어온다.

“아니요. 딱 좋은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천천히 마시고 있어?”

“아껴 마시는 거거든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화수가 좋아하는 소리 중 하나였다.

“술은 넉넉할 텐데.”

“당연히 넉넉하지요.”

혹 이게 다일까 봐 걱정하는 건가 싶었지만 화수가 걱정하는 건 술의 양이 아니었다.

“너무 빨리 줄면 집사어른께서 의심하실 것 아닙니까.”

“…….”

화수가 리 샤오가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린 이유가 다 있었다. 절대 술은 안 된다. 조금 전 준비된 술상을 두고 가면서 몇 번이나 당부를 하고 갔는지 모른다. 사람은 둘인데 술잔은 하나밖에 없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다음번엔 아예 옆에 서서 감시하실지도 모르잖아요.”

솔직히 화수도 잔소리 정도는 아무렇지 않지만, 아예 못 마시게 될까 봐 조심하는 거였다. 하지만 리 샤오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는 반응이다.

“그럼 그땐 바깥에서 나가서 마시지, 뭐.”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게 뭐 있어. 리 샤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화수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말려 올라간다. 그렇게 좋아하는 걸 여태 어찌 참았나, 싶었다.

“그러니까 마시고 싶으면 눈치 보지 말고 마셔.”

“…….”

툭, 하고 가볍게 내뱉는 말투였지만 리 샤오가 진심이 아닌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살짝 심장께가 간질간질해지는 기분. 하지만 그 달큰한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신 한 모금에 안주도 하나씩.”

화수의 눈매가 기름해졌다. 더한 분이 여기 계셨네.

“배부르게 해서 못 마시게 할 계획이셨던 겁니까?”

“그럴 리가.”

기가 막히다는 항의에도 리 샤오는 태연히 젓가락을 들어 떡갈비를 집었다.

“뭐든 편식하면 안 된다는 거지.”

“…….”

친히 입술 바로 앞까지 마중 나온 떡갈비에 불만 가득한 얼굴이긴 했지만 결국 화수도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잊지 않고 술잔에 남은 술까지 야무지게 털어 넣었지만 말이다.

“아주 기분 좋으신가 봅니다?”

“어. 좋아.”

대놓고 시비조였지만 리 샤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화수 네 입에 음식 들어가는 거만큼 보기 좋은 게 없거든.”

“…….”

말 그대로 방심하고 있다 완전히 허를 찔렸다.

일부러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는 말도 아니라 그저 있는 사실을 나열하듯 담담히 되뇌는 투라 더 그랬다.

예전이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반박했겠지만 이제는 화수도 안다. 저 역시도 리우의 입에 먹을 게 들어가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른 기분을 느끼니까.

“그러니까.”

쪼르륵, 다시금 주전자를 기울여 빈 잔을 채운 리 샤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다.

“좀 봐줘.”

“…….”

아아. 이렇게 나오는 건 반칙이지.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목 언저리가 꽉 막힌 것처럼 아릿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화수는 머뭇거리다 손을 내뻗었다. 집어 든 술잔을 입술로 가져가 입안에 머금는다. 그리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임과 동시에 리 샤오의 옷을 잡아당겼다.

-!

부드러운 입술이 닿기 무섭게 벌어진 입안으로 화수가 머금었던 술을 흘려 넣는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하던 리 샤오도 이내 화수의 의도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흘러들어 오는 술을 받아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번엔 스스로 쭉, 빨아 당겼다. 빨아 당기는 힘에 남은 술과 함께 화수의 혀도 딸려 들어갔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향기가 술 향기인지 화수의 살 내음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리 샤오를 미치게 하는 향이라는 건 확실했다.

측. 츠윽.

리 샤오가 그 혀를 감아 비볐다. 이미 술은 다 마시고 없는데도 젖은 소리는 여전했다. 빨았다가, 이로 긁었다가, 다시 비비고, 그렇게 몇 번을 물고 빨던 혀를 놓아준 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상이 위험하게 덜컹였을 때였다.

“그리 소중한 걸 어떻게 나눠 마셨어?”

가장 먼저 주전자부터 사수한 화수를 보고 리 샤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화수는 태연했다.

“리 샤오 님 입에 맛난 거 들어가는 게 좋기는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렇군.”

갑작스레 -그런 것 치고는 바로 반응했지만- 입을 맞춰온 연유를 그제야 알아차렸다. 차라리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쪽이 더 능숙한 화수였다.

“허면 안주는 뭘로 드실래요.”

물론 거기에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아. 아-”

퍽, 퍽, 퍽, 강하게 쳐올리는 힘에 상체가 무너진다. 팔에 힘을 줘 버텨보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이마와 가슴이 이불에 닿았다. 리 샤오가 아래에 손을 넣어 붙잡고 있는 엉덩이만 바싹 들린 상태였다.

“읏……, 으-!”

아래서 위로 들어오던 성기가 자세가 바뀌어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듯 들어왔다. 덕분에 안 그래도 빠듯하던 성기의 부피가 늘어난 것 같았다. 그런 기분과는 상관없이 이미 젖은 내벽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커다란 성기를 한 번에 쭉쭉 잘만 받아먹었지만 말이다.

“응-, 으으….”

슥, 뺐다가 푹, 찔러 넣는다. 자세 때문에 꺾인 엉덩이와 허리의 경계 사이에 옴폭한 보조개가 생겼다가 사라진다. 손이 닿는 곳마다 낙인이라도 찍히는 것처럼 열꽃이 핀다.

온통 새빨개진 등을 훑는 리 샤오의 시선이 짙어졌다. 평소에도 잘 빨개지는 몸이지만 술기운이 돌아 그런지 온몸이 다 잘 익은 홍시마냥 달아올라 있었다. 바닥을 딛고 있는 발가락이며 이불 섶을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까지, 안 빨간 곳이 없었다.

하아. 미치겠네.

밑이 다시금 부피를 늘렸다. 솔직히 이건 리 샤오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삼키고 있는 화수의 사정은 좀 달랐지만 말이다.

“잠, 흐읏-”

하지만 제대로 된 항의도 불가능했다. 도망치는 간 더더욱 힘들었다. 화수의 두 다리 사이에 몸을 끼우고 오므릴 수 없도록 단단히 고정한 리 샤오가 한 번 더 허리를 밀었기 때문이다. 부피를 더 키운 성기가 한 번에 미끄덩거리며 들어왔다. 벌어진 입에서는 신음이 쏟아졌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순간 성기가 그대로 배를 꿰뚫고 나올 것 같았다.

“왜.”

춥. 깊은 삽입으로 진저리를 치는 화수의 목덜미에 입을 맞춘 리 샤오가 묻는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냐고. 다정한 행동이었지만 대답에 따라 언제고 이를 세울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뜨거, 워.”

다행히 목덜미를 누른 건 입술이었다.

“더워?”

“아니.”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리 샤오가 확인하듯 되묻자 화수는 고개를 내젖는다.

“리 샤오 님 자지가, 너무 뜨거워요.”

“…….”

심지어 유혹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게 더 문제였다.

“화수야.”

낮은 한숨을 내쉬듯 화수의 이름을 되뇐 리 샤오가 사실관계를 정정해 준다.

“뜨거운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온몸에 열이 올라 있지만, 그중에서도 저를 꽉 물고 있는 안이 가장 절절 끓는 중이었다.

“거짓, 흣….”

덕분에 몇 번을 들락여도 아래의 조임이 처음과 비슷했다. 평소라면 몇 번 들락이는 것만으로 이미 매끈하게 길이 날 내벽이 몇 번을 꿰뚫어도 처음 넣을 때처럼 다시 좁아졌다.

“이것 봐.”

자세 때문에 조금 빠졌던 것을 도로 욱여넣으며 리 샤오가 속삭인다.

“끓는 물처럼 부글거리잖아.”

“…아으-읏….”

거짓말이라고 반박하고 싶지만 진짜 천천히 벌어지는 안에서 부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제가 들어도 야해빠진 소리였다. 꽉 감은 눈 안으로 열기가 모였다.

“화수야.”

“아…, 아-”

푹, 푹, 들린 엉덩이 안으로 연신 굵은 성기가 들락였다. 앞으로 밀려야 하는 몸이 고정된 탓에 아래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힘들어?”

찌꺽. 기둥이 잘게 빠졌다.

“아-, 으응….”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벌어진 입에서 새어 나오는 건 신음뿐이었다. 그걸 오해한 걸까. 리 샤오가 뒤로 물러나는 게 느껴졌다.

“아, 안 돼.”

화수가 도리질 치며 엉덩이를 조이자 빠지던 성기가 멈칫한다.

“싫, 습니다, 빼지 마세요.”

“…….”

“네?”

애원하듯 매달리는 화수에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무슨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리 샤오는 그만둘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겨우 이불에 비벼졌다고 붉게 자국이 난 볼이 거슬려 자세만 뒤집으려고 한 거였다. 그런 남의 속도 모르고 이게.

“알았어.”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일지 몰라도 사실 리 샤오 역시 이미 한계였다.

“알았으니까 그만 조여. 자지 터지겠어.”

“……힉.”

리 샤오가 씹듯이 내뱉은 그 말이 채 화수의 뇌에서 제대로 이해되기도 전에 붙잡힌 손이 뒤로 당겨졌다. 그대로 상체가 들리고 화수는 무릎으로 선 자세가 되었다.

“으으…….”

동시에 반쯤 빠졌던 성기가 다시 안으로 박혀 들어갔다. 새하얀 손가락이 제게 매달린다. 두 팔이 뒤로 꺾인 탓에 날갯죽지 뼈가 도드라졌다. 금방이라도 거기서 날개가 돋아나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늘 이리 불안한 건가. 날개를 펴 날아가 버리는 화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리 샤오의 눈동자에 새파란 불이 일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이성적인 리 샤오지만 화수만 관련되면 누구보다 비이성적으로 바뀌었다.

“아, 아-”

돋아나는 날개를 찢어발기는 상상을 하며 리 샤오가 거칠게 허릿짓을 했다.

“도망가지 마.”

“…너무 깊게, 들어와, 서.”

도망치지 말라는 리 샤오의 그 말을 몸을 빼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헐떡이면서도 더듬더듬 변명하는 화수를 리 샤오는 더 강한 힘으로 당겨 안았다.

등과 가슴이 맞닿는 자세가 되자 화수의 사타구니가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다행히 바싹 선 화수의 성기의 끝에서 점액질의 액이 질금질금 새고 있었다. 허릿짓이 더 거칠어졌다.

“아, 아응, 으으, 읏, 흣…….”

턱턱, 엉덩이를 쳐올릴 때마다 몸이 앞으로 밀렸지만 붙잡힌 손 때문에 도로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그러면 반동 때문에 더 깊은 곳까지 꿰뚫리고.

“읏, 아, 아…….”

뜨거운 게 리 샤오가 아니라니. 화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뜨거운데. 마치 벌겋게 달궈진 쇠막대처럼 제 안을 다 짓이기고 있는데.

“흣-, 읏, 으, 아, 흣….”

그럼에도 벌어진 입에서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신음이 고작이었다. 한 번 숨 쉴 박자를 놓치니 그다음은 계속 숨이 모자랐다. 아무리 열심히 숨을 들이켜도 턱 끝까지 차오른 숨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화수야.”

열이 너무 올라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걸까.

“화수야.”

고작 제 이름을 불린 것뿐인데, 배 속이 홧홧했다.

“좋아?”

“으응-, 응-”

입으로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는 화수를 대신해 다른 곳이 나섰다. 질금질금 귀두 끝에서 아래로 성기를 따라 흐르던 것이 툭, 툭, 이불 위로 방울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거의 터지기 일보 직전인 화수를 알아차린 리 샤오가 그대로 화수를 주저앉혔다.

“힉-!”

순간적으로 몸이 뒤로 넘어가는 감각에 놀란 화수가 숨을 들이켰지만, 사실 오히려 자세는 더 안정적이 되었다. 바닥에 앉은 리 샤오의 위로 겹쳐 앉는 자세가 되었으므로. 물론 리 샤오는 더 넓고 깊게 들어왔다. 안 그래도 빠듯한 것이 체중까지 실리니 엉덩이 안쪽이 터질 것 같았다.

“으, 으으. 아….”

“쉬. 괜찮아. 쉬.”

벌벌 떠는 화수를 꽉 붙든 리 샤오가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물론 아래는 전혀 다정하지 않은 허릿짓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지만.

“……힛-.”

쑥, 붙잡은 허리를 위로 들었다가 도로 푹, 하고 앉힌다. 오그라들었던 안이 느슨해지기도 전에 배 속이 가득 찼다. 눈앞이 뿌옇다.

“흣…….”

한 번 더 허리가 들렸다. 뽑히듯 나갔다가 이내 박혀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없었다. 응? 하고 힘을 뺀 순간, 엇박으로 들어왔다.

-!

이번엔 신음도 내지 못했다. 통증과 쾌감이 동시에 머릿속을 휘저었다. 바닥을 딛고 있는 발가락이 곱았다.

“아, 응, 으, 응……, 으-.”

벌어진 입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미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는 리 샤오는 쉬지 않고, 안을 쑤셔댔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리, 리-”

뜨거워. 하지만 이제는 뜨거운 게 제 아래를 들락이는 리 샤오인지, 받아들이고 있는 제 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아래가 녹고 있다는 것 말고는.

“싸도 돼.”

몸을 완전히 내맡긴 화수의 귓가에 리 샤오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투둑. 툭. 화수의 성기 끝에서 정액이 튀어 올랐다.

동시에 아래가 꽉 다물렸다. 박혀 있는 제 것이 터질 것처럼 조여들었지만 리 샤오는 크게 허리를 궁글렸다.

“안-, 아직, 가고 있…….”

“조금만. 금방 쌀게.”

진저리를 치는 화수의 턱을 꺾어 입을 맞췄다. 혀를 빨며 허리를 뺐다.

“아으으…….”

내벽이 요동쳤다. 입구가 쭉쭉, 기둥을 빨아 당겼다. 그대로 아래를 먹히고 있는 기분이었다.

“화수야.”

퍽. 사정감으로 꽉꽉 물어대는 내벽을 벌리며 제 성기를 가장 깊은 곳까지 밀어 넣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물고 있던 끝이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천천히 제 성기 주변으로 얇은 막이 생기는 것도.

“사랑해.”

한 번 더 화수의 안이 확 조여들었다. 꾸직꾸직, 커다란 성기와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려 있는 곳에서 뜨거운 액체가 새어 나왔다. 앞도 아니고 뒤로 줄줄 싸는 기분에 화수가 급히 구멍을 조이려고 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줄줄 흘러내린 액체로 이불이 흥건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저는 리 샤오의 무릎 위에 앉아 있어 축축한 이불이 닿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물론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삑, 삑, 삑, 삑.

처음엔 어디서 새끼 고양이가 우나 싶었다. 그런데 그 미약하던 소리가 점점 커진다. 게다가 소리가 날 때마다 마룻바닥도 울리고 있었다.

발소리구나, 깨달은 리 샤오가 몸을 일으켰다.

드륵.

그러고는 누구냐는 질문도 없이 장지문부터 열었다. 사실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겁도 없이 이 집 마룻바닥 위를 신발을 신은 채 다닐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으므로.

“빠빠.”

문을 열자마자 냅다 다리에 매달려오는 조그만 머리통.

“헤.”

대롱대롱 매달린 채 고개만 바짝 든 리우가 눈을 맞추며 웃는다. 웃을 때면 반달로 휘는 눈매가 딱 화수였다. 이제 힘든지 저를 안으라고, 두 팔을 뻗는 리우를 허리를 굽혀 안아 든 리 샤오가 통통한 볼을 가볍게 쓸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누구와는 달리 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인 리우지만, 오늘은 유난히 이른 시간이었다.

“엄마. 엄-마.”

뭘 알아듣고 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아빠를 봤으니, 엄마를 찾는 건 그냥 당연한 수순이었다.

“샤샵니까?”

문제는 그 부름에 기절하듯 잠들어 있던 화수가 깨버렸다는 거였다. 누가 흔들어 깨워도 잘 일어나지 못할 만큼 잠귀가 어두운 화수지만, 제 새끼가 저를 찾는 소리는 놓치는 법이 없었다.

“끙.”

“일어나지 마.”

화수가 끙끙대면서도 일어나려 하자, 리 샤오가 급히 걸음을 돌려 그쪽으로 되돌아간다. 물론 열린 문 틈새로 찬바람이라도 들까 장지문을 꼭꼭 여미는 것도 잊지 않고서.

리 샤오는 일어나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몸을 일으켜 앉은 화수를 보자마자 리우가 내려달라고 바동대기 시작한다.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대변하듯 짧은 두 다리가 허공에서 힘차게 휘저어진다. 이리 달라고 두 팔을 벌리는 화수를 보고 결국 리 샤오도 리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바로 화수에게 넘겨주지는 않고 일단 바닥에 두 발을 딛게 했다. 신이 나서 바동대는 발에 혹시라도 화수가 차이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리우는 뼈대가 굵은 리 샤오를 닮아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의 힘이 좋았다.

게다가 다른 고집은 없는데 뭐든 제가 직접 하려는 고집이 있다 보니 지금보다 더 꼬물이 시절, 제가 하겠다고 휘두른 주먹에 맞아 화수의 얼굴에 멍이 든 적도 있었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저 제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쓰려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그 이후 리 샤오는 리우가 화수에게 가려고 흥분할 때면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정작 한참 얼굴에 시퍼런 멍을 달고 다녔던 당사자인 화수는 긴장은커녕 그 일을 기억도 못 하는 것 같았지만.

삑, 삐빅.

리 샤오가 바닥에 내려놓기 무섭게 후다닥 달려가던 리우가 이불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진다. 화수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정작 넘어진 당사자는 잘됐다는 듯 그대로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왔다. 그러고는 화수에게 답삭 안긴다.

“맘마. 맘.”

똥강아지같이 품을 파고드는 리우를 당겨 제 무릎 위에 앉히던 화수가 이내 멈칫한다. 리우가 신고 있는 신발의 왼쪽 오른쪽이 반대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미간을 찌푸린 화수가 리우를 향해 물었다.

“리우야. 너 여기 어떻게 온 거야?”

질문을 하긴 했지만 사실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리 물으면서도 정작 화수의 시선이 향한 곳은 리 샤오였다. 고개를 든 화수와 눈이 마주치자 리 샤오가 어깨를 으쓱인다.

“리우밖에 못 봤어.”

혹 리 샤오가 양양댁을 돌려보냈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진짜로.

“정말 여기까지 너 혼자서 걸어온 거야?”

복도를 따라 쭉 걸어오기만 하면 된다고는 해도 리우가 자는 방과 이 방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다. 그걸 이 조그만 발로, 그것도 혼자 걸어왔다니. 그것 말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이어 복도를 가로지르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온 건.

아.

화수의 미간이 한 번 더 구겨진다. 리우가 여기까지 혼자 걸어왔다는 사실을 대견해하느라 지금 기함하고 있을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있어.”

급히 일어나려는 화수를 대신해 리 샤오가 한 번 더 장지문을 열었다.

드르륵. 문을 열자 하얗게 질린 얼굴이 다가선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양양댁을 위해 리 샤오가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괜찮아. 리우, 여기 있어.”

허겁지겁 안을 살피던 양양댁의 눈에 화수의 품에 안긴 리우가 들어왔다. 그제야 긴장감이 풀렸는지 양양댁이 무릎을 휘청댔다.

“양양댁!”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줄 알았으나 다행히 옆에 서 있던 리 샤오가 급히 양양댁을 붙잡아 그런 불상사는 면했다. 화수의 얼굴에도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많이 놀랐지.”

금방 넘어질 뻔했음에도 다시 안으로 들어서는 걸음이 급했다. 하지만 그만큼 놀랐다는 말이기도 했다.

“일어나서 혼자 여기까지 걸어왔나 봐.”

자리를 비운 건 아주 잠깐이었다. 분명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갔는데 돌아오니 리우가 사라져 있었다. 사실 누가 데려간 것만 아니면 이 집 안 어딘가에 있겠지만 그래도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그 때였다. 어쩔 줄 모르고 굳어 있던 양양댁의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주 먼 곳에서, 그것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그맣게 나지만 분명 어제 하루 종일 들었던 삑삑거리는 소리였다.

그제야 어젯밤 겨우 잠든 사이에 벗겨서 리우의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아 두었던 신발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리우가 좋아하는 신발을 신고 갈 곳이라면 한 곳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게 한달음에 달려오면서도 혹여라도 여기에 없으면 어쩌나,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리우야. 여기 올 거면 할머니랑 같이 와야지. 할머니 놀라셨잖아.”

“…….”

절레절레, 리우를 혼내는 화수에게 양양댁이 급히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화수의 품에 안긴 리우의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진짜 여기까지 혼자 걸어오셨습니까?

아이는 늘 어른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자라는 법이지만 이 아기씨는 유난히 더 그랬다.

조금만 천천히 크시지. 무에 그리 급하시다고. 다시는 올 수 없을 시간들이 양양댁은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새까만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손길이 애틋했다.

“으응.”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한 방에 다 있으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화수의 가슴께에 통통한 볼을 비비며 엎드린 리우가 입에 문 엄지손가락을 쪽쪽 빤다.

“리우 잘 거야?”

“코, 코오.”

벌써 눈이 반쯤 감겼다.

“응, 코오 해.”

피곤할 만도 했다. 신발 신을 생각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데다 저 혼자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얼마나 용을 썼겠는가. 덤덤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안아 든 몸이 축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냥 여기서 재울게.”

양양댁이 데려가겠다는 의미로 손을 뻗었지만 화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아침은 조금 재운 뒤에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양양댁도 조용히 손을 물렸다.

“으으응.”

그러다 신발에 손이 닿았던 모양이다. 거의 감겼던 리우의 눈이 도로 번쩍 떠진다.

“걱정 마. 네 거 안 가져가.”

“으응, 아냐.”

한 번 경험해 봤다고 쉽게 경계를 풀지 않는다.

“안 가져간다니까?”

“…아니야, …히잉.”

잠은 오는데, 제 신을 누가 가져갈까 불안은 하고. 짜증과 속상함으로 턱에 호두알까지 생겼다. 말 그대로 잠투정이었다.

“리우.”

난감해하는 화수를 위해 리 샤오가 나섰다.

“잡아.”

그냥 벗겨버리려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리 샤오가 선택한 방법은 간단했다. 손가락을 빨고 있지 않은 남는 손으로 신발을 붙잡게 해준 것. 보는 사람 눈에는 한없이 불편해 보이는 자세였지만 본인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곧바로 감탄의 눈빛을 보내는 화수에게 리 샤오가 어깨를 으쓱인다.

“손에 쥐여 주는 게 제일 빨라.”

같은 샤샤라 그런가. 늘 저보다 리 샤오가 리우의 마음을 더 잘 알아차리곤 했다.

“그런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이 점점 감기는 리우의 엉덩이를 더 바싹 당겨 안았을 때였다.

“못 보던 신발이네.”

멈칫.

툭, 지나가듯 가볍게 내뱉는 리 샤오의 말에 화수가 일순 몸을 굳힌다.

“그게….”

살짝 난감해하는 화수를 대신해 리 샤오가 다시 되묻는다.

“진 사장이야?”

“…….”

“……네.”

사실 말을 꺼낼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흔치 않은 모양인 데다 심지어 소리까지 나는 신발이라니. 적어도 이곳에서 파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니 다른 나라들을 왔다 갔다 하는 장사치가 생각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보내준 사람 성의가 있으니까 한 번만 신겨 본다는 게.”

진짜 한 번만 신겨보고 다시 넣어둘 참이었다. 그러면 리 샤오의 눈에 띌 일이 없을 텐데 굳이 선물이 왔다고 말해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리우가 그 선물을 이리도 마음에 들어 할 줄은 화수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누가 뭐래?”

난감한 얼굴로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는 화수에게 리 샤오가 툭, 하고 한마디 내뱉는다.

“…네?”

“신기고 싶으면 신기는 거지. 내 눈치를 왜 봐.”

“하지만 진 사장 싫어하시잖습니까.”

“…물건은 죄가 없으니까.”

싫긴 싫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제 곧 뛰어다니기 시작하면 그게 꼭 필요해질 테니까.”

그건 그랬다. 이제 겨우 시작인 지금도 이런데, 여기서 뜀박질까지 하게 되면 얼마나 어른들을 고생시킬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러니 이 소리 나는 신발이 반드시 필요한 건 맞았다.

“진짜,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도 영 마음이 불편해 화수가 한 번 더 물었지만 리 샤오는 고개를 까딱인다.

“내가 안 괜찮다고 하면 뺏을 순 있겠어?”

“…없지요.”

리 샤오의 시선을 따라가자 이미 잠들어 고개가 꺾이면서도 손에 쥔 신발만은 절대 놓지 앉는 리우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인정해야 했다. 자신들의 싫음은 아이의 좋음을 이길 수 없다는 걸.

* * *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낮은 덥더니 이제는 해가 뜬 한낮 공기에서 제법 찬 기운이 느껴졌다.

“고냥아!”

얼마 남지 않은 가을볕이 아쉬운 건 나비도 마찬가지인지, 해가 가장 잘 드는 담장 위 기와지붕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라면 화수의 방 앞 대청마루에 자리를 잡았겠지만 방 안에 리우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탓이었다.

“인누, 인누 와.”

정원으로 난 장지문을 열고 나온 리우가 고사리 같은 손을 꼬물거리며 연신 불러대지만 나비는 뉘 집 개가 짖냐는 반응이다. 심지어 이쪽을 향해 있던 몸을 뒤집어 아예 등지고 누워버려서 보는 리우만 애가 탄다.

“내가. 아니, 내가아.”

양양댁이 대청마루에서 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만 안아 내려주겠다는데도 제가 내려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쿵.

기어코 제 고집대로 혼자 내려가다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놀란 건 양양댁과 화수뿐. 정작 당사자는 벌떡 일어나 담장 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삑삑삑삑.

요란한 신발 소리가 거슬렸는지 누워 있던 녀석이 휙 몸을 일으켰다.

멈칫.

혹 그대로 가버릴까 봐 겁이 났는지 리우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급히 손에 든 떡뻥-말린 떡국 떡을 뻥튀기 기계로 튀긴 과자-를 쭉 내밀며 말했다.

“이거 주까?”

먹을 것으로 꼬시는 건 어디서 배웠대. 피식, 웃음을 흘린 화수가 조언을 해준다.

“리우야, 나비는 떡 못 먹어.”

“왜에? 맛있어.”

“너는 맛있어도 나비는 맛없을 걸?”

“왜에?”

제 입에 맛있다고 남에게도 다 맛있는 건 아니라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러는 사이 나비가 몸을 일으키고는 앞발을 쭉 내밀어 기지개를 폈다.

털썩.

그대로 가버리려는 건가 했는데 의외로 기지개만 펴고 도로 조금 전 그 자리에 눕는다. 저런 걸 보면 또 리우를 그리 싫어하지는 않는단 말이지.

“화수 님.”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나비를 목이 빠져라 보고 있는 리우를 구경하느라 바로 뒤까지 사람이 온 것도 몰랐다. 고개를 돌리자 시종이 용건을 전했다.

“곧 차가 도착한답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리된 모양이었다. 상관없으니 그냥 두라고 여유롭게 말했던 것과 달리 리 샤오는 카이에게 진 사장이 보낸 것과 비슷한 신발을 구하라고 지시했고, 어제 그 신발이 구둣방에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은 참이었다.

이미 한 시진 전에 연락을 받은 집사에게서 외출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어놓고선 그 새 깜빡해 버렸다.

“10분, 아니 5분이면 된다고 해줘.”

그사이 이미 상황 파악이 끝난 양양댁은 리우를 안고 대청마루로 올라서고 있었다.

“으~응~”

나비랑 더 놀고 싶은데,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끙끙대는 리우를 화수가 달랬다.

“차 타고 꼬까신 사러 갈 건데. 리우는 여기 있을 거야?”

“빠방?”

“응. 빠방.”

리우가 나비만큼이나 좋아하는 게 자동차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리우도 더는 불만이 없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굼뜬 화수를 재촉까지 한다.

“어야 가자.”

집사가 봤으면 아주 뿌듯해했을 광경이었다.

“어어, 샤샤 안 돼!”

무릎에 안고 있던 리우를 내려놓고 뒤따라 내리는 사이, 리우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차 뒤쪽으로 사라지는 리우를 깜짝 놀란 화수가 급히 뒤쫓는다.

“화수야?”

발소리가 갑자기 멈춰 무슨 일인가 했는데, 다행히 리우가 스스로 걸음을 멈춘 거였다. 물론 그 앞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던 까닭이지만. 십년감수한 기분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이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영감?”

그제야 화수도 달려 나가는 리우를 붙잡아준 사람이 홍매루의 집사영감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나야 시장에 장보러 나왔지.”

하긴. 당연히 볼일이 있어 나온 것이겠지. 저도 모르게 묻고 나서 생각하니 퍽 어이없는 질문이다 싶었다. 오랜만에 보는 집사가 너무 반가웠던 탓이다.

“우리 애기씨셨구만.”

조그만 애기가 보호자도 없이 혼자 달려 나오기에 급히 멈춰 세우고 본 거였다. 그런데 화수의 아이였다니. 제가 못 봤으면 어쩔 뻔했나,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 조그맣던 애기씨가 이리 크셨습니까.”

“많이 컸지?”

집사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리우를 매일 보는 저도 하루하루가 다른 게 보이는 데 올 초에 보고 가을이 다 되어서야 보는 집사영감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화수와 대화를 하면서도 내내 화수의 다리에 매달린 채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리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집사가 천천히 리우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경계심을 풀기 위해 삐걱거리는 무릎까지 굽혔으나 영 반응은 시원찮다.

“안녕하세요, 해야지.”

“안냐.”

보다 못한 화수가 나섰다. 그제야 경계하던 리우도 동그랗게 주먹 쥐고 있던 손가락을 쫙 펴서 흔들었다.

“이제는 그리 혼자 달려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 큰일 나십니다. 당부를 하면서도 집사영감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화수 너도.”

끙. 굽혔던 무릎을 펴 일어난 집사영감이 이번엔 화수를 향해서도 한 소리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내가 뭐얼.”

“잠깐이라고 방심하면 안 돼.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져 버릴 수 있는 게 이 나이 때 애기씨들이니까.”

“…알았어.”

확실히 방심했던 게 맞다. 순순히 반성하는 화수를 보고 집사영감도 더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사실 누구보다 놀란 게 화수일 테니까. 대신 조금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속삭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애기씨랑 둘만 나왔어?”

그게 뭐라고 목소리까지 죽여가며 묻나 싶었지만 영감은 늘 제가 소박이라도 맞을까 걱정이 많았다.

“샤샤 신발 사러 나온 거야.”

“…….”

“리 샤오 님은 상점으로 바로 오실 거고.”

“아아. 그랬구나. 그랬어.”

내내 굳어 있던 표정이 리 샤오의 이름이 나오고서야 완전히 풀렸다. 하여간 영감, 별걱정을 다 해. 어이없다는 듯 화수가 투덜거렸지만 이미 집사영감의 관심은 애기씨에게로 돌아간 뒤였다.

“요 쪼끄만 발에 신을 신발을 사러 나오셨습니까.”

그렇게 말을 걸며 가볍게 턱을 들썩이던 집사영감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애기씨 신을 왜 거꾸로 신겼어?”

왼발 오른발이 뒤바뀐 채 신겨져 있다는 걸 깨달은 집사영감이 묻는다. 하지만 정말 그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이 바로 화수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집에서 나오기 전에도 바꿔 신기려다가 난리가 나서 그냥 포기한 거니까.”

“아아.”

그제야 알 만하다는 듯 집사영감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이제 한참 고집 피우실 나이지.”

말로 하니 그냥 귀여운 땡깡 정도로 들리겠지만, 직접 그 고집을 겪은 입장에서는 절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바꿔 신겨주기만 한다는데도 절대 안 된단다.

저는 신발 안에 모래 한 알만 들어와도 거슬리는데, 바닥이 아예 반대여서 맞지 않는 신을 신고 불편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건 안 그러는데 유독 이 신발에만 그렇게 집착을 한다니까?”

누굴 닮았지, 진짜. 그렇게 투덜거리는 화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집사영감이 한마디 되뇌었다.

“딱 화수 너네.”

“내가?”

“그래. 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잔뜩 억울해진 화수가 반박을 하고 나섰다.

“난 어렸을 때 물건에 집착 같은 거 없었거든?”

“기억 안 나?”

하지만 집사영감은 오히려 그걸 왜 기억 못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꾹- 미간을 구긴 화수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러니까 뭐가-”

“그 구두.”

멈칫. 집사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화수는 그대로 일시정지. 하지만 그런 화수의 침묵을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한 집사영감이 한 번 더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어느 날 갑자기 네가 예뻐서 샀다며 신고 왔던 아가씨 구두 있잖아. 네가 돈이 어딨어서 그 비싼 신발을 샀냐고, 그동안 몰래 딴 주머니라도 차고 있었냐고 한조어른께 엄청 혼이 났었잖아.”

“…….”

하지만 사실 집사영감이 생각한 것처럼 기억하지 못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걸, 영감이 어떻게 알아?”

소중히 여기는 티를 낸 적이 없는데. 혹 제게 소중한 물건이라는 걸 알면 누가 가져가버릴까 봐 일부러 더 아닌 척했었는데. 그걸 영감이 어떻게 아느냐고, 놀란 눈으로 묻는 화수를 조용히 바라보던 집사영감이 툭, 하고 마음을 내뱉는다.

“그걸 어떻게 몰라.”

* * *

“영감! 집사영감!”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 창고에 쟁여 놓은 식재료들을 한 번 더 확인하던 참이었다. 누가 이리 다급히 저를 찾으며 뛰어오나 했더니.

“화수야?”

화수를 본 집사영감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아는 화수는 이리 큰 소리를 내는 법도, 다급하게 뛰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 무슨 일인데.”

“내 신, 못 봤어?”

얼마나 급히 뛰어왔는지 목까지 차오른 숨에 연신 헐떡이면서도 고집스럽게 질문을 잇는다.

“왜. 없어?”

“없으니까 찾지!”

짜증을 내는 화수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건 초조함이었다.

“어디 뒀는데 그래.”

“분명 어제 저녁에 댓돌에 올려 놓았는데.”

“대청 아래로 굴러들어 간 거 아니고?”

“없어.”

불퉁하게 대꾸하는 화수의 모습에 결국 집사영감도 보고 있던 장부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거봐. 없다니까.”

아무리 대청마루 아래를 샅샅이 살펴도 먼지나 나뭇잎 더미가 고작이었다.

“누가 신고 간 거 아니야?”

“그걸 누가 신고 가.”

“…….”

처음엔 다들 탐을 낼 만큼 예쁜 구두였으나 이제는 고물장수도 안 가져갈 물건이 된 지 오래다. 너무 오래 자주 신은 까닭도 있지만, 뭣보다 해가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걸 어떻게든 신겠다고 꾸역꾸역 발을 구겨 넣은 탓이었다.

“어이, 혹 여기 댓돌 위에 있던 구두 못 봤나?”

마침 별채로 들어오는 시종을 향해 물었다. 사실 구두가 아니라 걸레짝이라고 해야 알아듣지 않을까 싶었으나 다행히 시종은 곧바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낡은 여자 구두요?”

“그래, 그거.”

“그거라면 좀 전에 어제 들어온 신입이 들고 가던데.”

“어디로?!”

불쑥 끼어든 건 화수였다. 한낮에 이리 활동적인 화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지라 시종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래도 입은 멈추지 않고 주절주절 대답을 이어간다.

타닥.

“화수야!”

그 시종의 답변이 다 끝나기도 전에 화수는 이미 소각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화수야.”

혹 소각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게 아닐까 겁을 먹었던 것과는 달리 멈춰선 화수는 활활 타는 소각장 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신입을 향해 집사영감이 일단 확인부터 한다.

“구두는?”

“그게, 저 안에.”

대답을 하면서 화수의 눈치를 보는 것을 보니 먼저 도착한 화수에게도 이미 같은 대답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제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도 알아차렸을 테고.

“멋대로 신발까지 태워버리면 어떻게 해.”

뒤따라온 시종이 무슨 짓이냐고 야단을 쳤지만 그 역시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게, 쓰레기는 다 태워버리라 하셔서.”

“…….”

피식. 일순 찾아온 침묵을 깬 건 화수였다.

“죄송해요.”

뒤늦게 아차 싶었던지 신입이 허리를 90도로 굽혀 사과했다. 하지만 사실 화수는 진짜 웃겨서 웃은 것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쓰레기로 보일 만도 했지.”

“정말 죄송합니다.”

물론 그런 화수의 모습이 신입을 더욱더 쫄아붙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저 진짜 여기 잘리면 안 돼요. 구둣값은 제가 일해서 갚을 테니까-”

“됐어.”

“네?”

돈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까 그만두라는 건가 싶었는데, 오히려 정반대였다.

“어차피 버리려고 했어. 다 낡았고. 이제는 내 발에 맞지도 않는 거.”

어라? 신입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럼.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거듭 확인하듯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들을 수 없었다. 이미 화수는 발길을 돌린 뒤였으므로.

“가, 감사해요! 진짜, 감사합니다!”

저만치 멀어진 화수의 등 뒤에 대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 신입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지만, 집사영감의 표정은 전혀 그렇질 못했다. 그게 이상했던지 나이 든 시종이 물어온다.

“왜 그러십니까?”

사실 신발 주인인 화수가 괜찮다고 했으니 아무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그 다 낡아빠진 신발을 신겠다고, 맞지도 않는 발을 구겨 넣고 다니는 걸 안 봐도 되니 잘되었다고 해야 맞았다. 그럼에도 어째서 자꾸만 저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이 이리도 눈에 밟히는 걸까.

“무슨 문제라도….”

“아니, 아무 문제도 없어.”

하지만 다시금 불안해진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신입을 보니 더는 대답을 미룰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들 이제 가서 일들 봐.”

* * *

“그 이후로 시간만 나면 소각장 앞을 서성였잖아, 너.”

내가 그랬구나. 그건 화수도 자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차라리 애기씨처럼 울고불고 고집 피우는 게 좋은 거야. 축 쳐진 어깨로 텅 빈 소각장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보다야 백번 낫지. 암.”

“…….”

예전이었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제는 안다. 만약 리우가 가만히 텅 빈 소각장을 보고 있을 장면을 생각하니,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이게 좋아도 작아진 건 신으시면 안 됩니다. 어미처럼 발가락이 못나지면 큰일이니까요.”

“무슨 소리야?”

리우를 향해 당부하는 집사영감의 말에 이번엔 화수도 반박을 하고 나섰다.

“내 발은 신발 때문이 아니라 원래도-”

“어……?”

하지만 이내 집사의 시선이 저를 향해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뭘 보는-”

처음에는 가늘었다. 하지만 고개를 쭉 빼 제 어깨 너머를 보는 눈이 점점 커지는 걸 보고 화수가 고개를 틀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제 어깨를 감싸는 커다란 손이 아니었다면.

“여기서 뭐 해.”

리 샤오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었던 모양이다. 설마 다 들은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턱을 들어 올리자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리 샤오와 눈이 마주쳤다.

“벌써 와 계셨습니까.”

다행히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온한 검은 눈동자. 그제야 화수도 조금 마음을 놓았다.

“분명 차 도착한 소리는 났는데, 아무도 들어오질 않아서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그, 그러니까, 이건 화수 탓이 아니라 제가, 늙은이가 오랜만에 애기씨를 뵈어 반가운 마음에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탓입니다.

자신이 멋대로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알면서도 집사영감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저를 향한 리 샤오의 시선은 다정했다.

“아이고, 네네, 리 샤오 님도, 그간 잘 계셨지요.”

얼떨떨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놓았다. 사실 집사영감도 리 샤오가 화수를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는지는 그간 익히 보아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걱정을 거둘 수 없는 건 귀이 하는 마음만큼이나 쉽게 차가워지는 마음도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늙으면 세상 사는 게 좀 편해질 줄 알았는데. 보고 들은 것이 많으니 오히려 무서운 것만 많아진다.

“저는 가볼 테니, 두 분 볼일 보십시오.”

“가게?”

이 녀석이 욕심이라도 좀 부릴 줄 아는 녀석이면 걱정이 좀 덜할까. 집사영감이 되묻는 화수의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가야지. 할 일이 태산이야.”

하긴. 사실 저보다 집사영감이 훨씬 더 바쁜 사람이었다. 화수도 더는 가겠다는 집사영감을 붙잡지 않았다.

“그럼 애기씨,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엄마 말 잘 듣고 더 무럭무럭 자라 계십시오.”

“가?”

다른 긴 말들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간다는 말만큼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네, 가려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집사영감에게 리우가 손을 흔들었다.

“어여가아.”

이제는 낯이 좀 익었다고, 화수가 시키지도 않은 눈이 반달이 되는 눈웃음까지 보여주며. 집사영감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가 번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그래도 마음에는 드는 모양이네요.”

바꿔 신는 건 절대 싫지만 새 신발 역시 마음에 드나 보다. 두 손으로 꼭 끌어안고서 내려놓지 않는다.

“다행이네.”

혹 기분이 상상하지는 않았을까 리 샤오의 기분을 살피는데 다행히 그런 눈치는 아니었다. 안심의 한숨을 내쉬느라 고개를 틀었는데, 그러다 시선이 진열대를 향했던 모양이다.

“마음에 드시면 한번 신어보세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구둣방 직원이 얼른 화수의 시선이 닿았던 구두를 꺼내 온다.

“아뇨. 전-”

“신어봐.”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던 화수가 놀라 급히 고개를 내저었으나 리 샤오까지 고개를 까딱이며 한마디 거든다. 눈치 빠른 직원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그녀가 냉큼 들고 있던 신발을 화수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발 한번 넣어보시겠어요?”

“아뇨, 이미 구두는 많아서…….”

“아무리 많아도 이 구두와 비슷한 건 없으실 걸요? 이번에 아기 도련님 신발과 함께 서양에서 들어온 최신상 구두랍니다.”

확실히 진열대 위에 있을 때부터 제일 눈에 띄기는 했다. 하지만 신고 다닐 신발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새 신발을 사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물론 이런 미약한 저항으로는 남다른 장사 수환을 가진 그녀를 당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머,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요?”

“…….”

일단 모든 손님에게 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 정도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지금은 확실히 진심이 담긴 감탄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가만히 제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는 화수에 리 샤오가 확인하듯 묻는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인정하긴 싫지만 솔직히 예쁘긴 했다. 신자마자 발에 착 감기는 게, 가죽도 질 좋은 걸 쓴 듯했다. 복잡한 표정으로 제 발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리우가 삑삑거리며 달려왔다.

“아 이쁘다.”

어른들 눈에 예쁜 건 아이들 눈에도 예뻐 보이는 모양이었다. 직원 옆에 쪼그리고 앉은 리우는 화수가 신은 신발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화수가 나비의 털은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이렇게 아, 이쁘다, 하며 쓰다듬는 거라고 했더니 그 뒤로 예쁜 것만 보면 일단 쓰다듬고 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지요? 아기 도련님 눈에도 예뻐 보이시지요?”

“뽀~.”

“아이고, 귀여우셔라.”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여, 그녀의 말을 따라하는 리우에게 직원이 사르륵 녹는다. 저건 또 어디서 배웠대. 적어도 제가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리 샤오일 리는 더더욱 없겠지만. 그러다 직원과 다시 눈이 딱 마주쳤다.

“사이즈는 어떠세요? 제가 보기엔 딱 맞는 거 같은데.”

제 발에 딱 맞긴 했다. 구두 모양 자체가 앞코가 얄상하게 빠진 터라 발가락 있는 곳이 좀 조이는 느낌이 드는 게 아주 살짝 거슬리는 것만 빼면.

하지만 뭐 애초에 구두라는 게 편한 신발도 아니고, 심지어 손님이 주는 신발은 제 발에 크든 작든 어떻게든 신어야 하던 때도 있었으니까. 거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주 편한 축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일어나 봐.”

꼬물꼬물 발가락을 움직여보고 있는 화수의 앞으로 리 샤오가 손을 내민다. 제 손을 잡고 일어나라는 의미임을 깨달은 화수가 그 손에 제 손을 포갰다.

“좀 작군.”

그렇게 가게 안을 몇 걸음 걸었을까. 리 샤오가 먼저 고개를 내젓는다.

“발에 맞게 수선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사장님께 여쭤봐야 하겠지만, 아무리 빨라도 아마, 최소 한 달 정도는 소요될 거예요. 이전 일정들이 워낙 많이 밀려 있어서.”

“일주일 안으로 당기면 가격을 열 배로 쳐주지.”

리 샤오의 파격적인 제안에 적잖이 놀란 듯 했지만 곧 능숙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일단, 사장님께 여쭤보겠습니다.”

하지만 리 샤오의 제안에 눈이 휘둥그레진 건 직원만은 아니었다.

“그냥, 신어도 되는데요.”

안 맞는 것도 아니고 조금 불편한 건데. 신다 보면 자연스럽게 늘어날 텐데 무려 열 배나 값을 치르고 고치겠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편한 걸 어떻게 그냥 신어.”

하지만 리 샤오 역시 그런 화수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레까지 당기면 스무 배.”

“참말, 이십니까?”

놀란 직원의 눈이 거의 튀어 나오기 직전이었다. 이번엔 직원도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반면 화수는 차분해졌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이 한마디 더 했다간 이번엔 스무 배가, 삼십 배로 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늘 화수의 불길한 예감은 잘 맞는 편이었다.

“집으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차가 다시 멈춘 건 구둣방에서 출발한 지 5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들를 곳이 있어서.”

“어디를-”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밖을 확인하던 화수의 눈이 조금 커진다.

“여기는.”

분명 화수도 아는 곳이었다.

“여름 동안 판매가 중단됐던 딸기케이크가 다시 개시되었다길래.”

고급스러운 홍색과 금색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가게는 바로 다방茶房이었다. 종종 리 샤오가 딸기 케이크를 사다 줘서 집에서라도 먹긴 했지만 직접 가게를 온 건 처음 와보고 두 번째였다. 고개를 다시 제 쪽으로 꺾는 화수를 마주한 리 샤오가 묻는다.

“싫어?”

이미 반달로 휜 눈꼬리로, 답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직접 확인을 하는 리 샤오가 얄미웠지만 화수도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좋지요. 너무 좋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가게 안쪽에서 직원이 나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마도 차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리우의 손을 잡고 천천히 들어가던 화수가 걸음을 멈춘다. 물론 정확히는 리우가 걸음을 멈춘 거지만. 두 사람이 뒤쳐지자 걸음을 멈춘 리 샤오도 되돌아본다.

“바닥이, 이상한 모양입니다.”

저도 처음 왔을 때 가게 바닥 전체에 깔린 자줏빛의 카펫이 꽤나 낯설었던 기억이 났다. 그 말에 리 샤오가 피식, 낮은 웃음을 흘린다.

“이리 와.”

그러더니 손을 뻗어 리우를 안아 들었다. 제가 걷겠다고 또 난리가 나지 않을까 걱정한 것과 달리 리우는 순순히 리 샤오의 목에 매달렸다.

“말씀하신 자리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직원이 안내한 자리는 예전에 왔을 때 화수와 리 샤오가 앉았던 그 테이블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어? 이상하다? 자리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화수에게 리 샤오가 물었다.

“왜?”

“전에는 메뉴판을 줬던 것 같아서요.”

“…….”

“보면서 시키려고 했는데.”

물론 글은 여전히 못 읽지만 여기에서 뭘 파는지는 아니까. 남들처럼 저도 메뉴판을 읽을 줄 아는 듯이 하며 시킬 생각이었는데. 살짝 실망한 듯 볼이 부푸는 화수의 모습에 리 샤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미안.”

“리 샤오 님이 미안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내가 미리 주문해 뒀거든. 그래서 메뉴판은 안 가져온 거야.”

“아….”

리 샤오 나름대로는 글을 못 읽는 화수를 배려한다고 한 행동이었으나, 아직도 제가 화수를 잘 모른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다음번엔, 꼭 그렇게 하게 해줄게.”

“괜찮은데.”

“꼭.”

거듭 약조를 하는 리 샤오에, 괜찮다고 고개를 내젓던 화수도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한다.

“에피타이졉니다.”

준비된 음식이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 상에 준비된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올려 내보내는 홍매루와 달리 이곳은 한 번에 한 접시가 원칙인 모양이었다.

“이건 아기 손님이 드실 야채 스프입니다.”

안 그래도 리우는 어쩌나 싶었는데. 뽀얀 스프가 담긴 그릇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맘마. 맘.”

리우 역시 본능적으로 그게 제 밥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입을 오물거리며 빨리 달라고 재촉을 해온다.

“잠깐만.”

일단 뜨겁지 않은지 확인부터 하려는데 눈치 빠른 직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미리 식혀 두었으니 바로 먹이셔도 되실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화수는 곧바로 리우의 몫으로 준비된 작은 티스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스프를 떠서 일단 제 입술에 확인을 했다. 식혔다는 직원의 말을 못 믿어서는 아니고 습관 같은 거였다.

“엄마, 맘마. 맘-마.”

그걸 먹는 거라고 오해했는지 리우가 다급히 고개를 쭉 뺀다. 밥 때가 좀 지나긴 했다. 스프를 먹이는 화수의 손이 급해졌다.

“더 줘?”

뭐든 잘 먹는 편이지만 그래도 확인하는 걸 잊지 않는다. 쫍쫍, 입안에 있는 것은 다 먹고 입술에 묻은 것까지 혀로 날름거리는 모습을 보니,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편식은 안하는 편이지만 리우는 호불호가 분명한 타입이었다.

“맘맘.”

아기 새마냥 연신 입을 벌리는 리우에, 마음이 급해진 화수가 스프를 스푼 가득 떴다. 하지만 그러기엔 티스푼이 좀 작았다.

“줘.”

입으로 들어가는 양보다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양이 더 많은 것을 본 리 샤오가 손을 내밀었다.

“차라리 제가 안고-”

“줘.”

차라리 리 샤오가 안고 있는 리우를 제가 안고 먹이려고 했지만 그대로 기각.

“맘, 맘.”

밥 달라고 조르는 아기 새의 재촉에 결국 스프를 그릇째 넘길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려나. 집에서는 리 샤오가 돌아오기 전에 먼저 밥을 먹이기 때문에 리 샤오가 리우의 밥을 먹이거나 할 기회가 없었다. 아무리 리우가 순하다고는 해도 그리 쉽지는 않을 텐데. 걱정이 되어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화수가 잠시 뒤, 한마디를 내뱉는다.

“잘하십니다?”

심지어 저보다 더 능숙해 보이기까지.

“저 몰래 어디서 애라도 키워보셨나 봅니다?”

살짝 기분이 상해 보이는 화수의 모습에 리 샤오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진짜 궁금해?”

란다. 당연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어이없어 할 줄 알았던 터라 화수도 살짝 당황했다.

“리 샤오 님이 그렇게 나오면 전혀 농담처럼 안 들리는데요.”

“농담 아닌데.”

“…….”

이쯤 되니 화수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는다. 리 샤오가 좋다고 달려드는 여인이 한둘이 아니었을 테니,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제 눈에도 이리 멋진데, 남들 눈에 그게 안보이겠는가.

“그럼, 진짜로-”

“본가에 조카들이 있다고 내가 말 안 했어?”

빠르게 뛰던 심장이 푸슈슉, 바람 빠진 공처럼 쪼그라든다.

“안 했거든요?!”

“이상하네. 말한 줄 알았는데.”

“…….”

생각해 보니 위로 형제가 있고 리 샤오가 막내라는 말은 들었다. 그러니, 당연히 조카도 있겠지.

“이러시깁니까?”

뒤늦게 모든 상황을 파악한 화수가 따져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리 샤오의 웃음소리뿐. 은근 이런 것 보면 막내가 맞았다. 농담 같은 건 못 할 것 같은 얼굴로 저러니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다행히 그 순간 이 민망한 상황을 타개해 줄 구원자가 나타났다.

“오늘의 메인 메뉴인, 송아지 스테이크입니다.”

음식이 이토록 반갑게 느껴지는 건 아마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저는, 더는 못 먹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그리 많이 먹지 못하는 화수의 눈에도 음식 양이 너무 적게 보였다. 그 큼지막한 접시에 나오는 거라고는 고작 한두 점이 다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왜 한 접시에 한두 점밖에 나오지 않는지 알 듯했다. 이것보다 더 많이 나오면 분명 손님들 대부분이 배가 터져버릴 테니까.

“음식은 됐으니까, 디저트로 준비해 줘.”

화수가 항복 선언을 하자 리 샤오가 빈 접시를 가져가는 직원에게 메뉴를 변경해 줄 것을 요청했다.

“디저트고 뭐고, 더는 아무것도 못 먹는다니까요. 물도 못 마시겠어요.”

부른 배를 부여잡고 헉헉대던 -예전, 리우를 배 속에 품고 있던 때와 비슷한 압박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화수가 질색을 한다. 오랜만에 먹을 수 있게 된 딸기 케이크가 아쉽긴 했지만 솔직히 지금은 물 한 모금도 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리 샤오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이래도?”

“아무리 딸기 케이크로 꼬시셔도-”

반박을 하던 화수의 시선이 직원이 들고 온 쟁반 위에 꽂힌다.

“이거.”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화수가 더듬더듬 직원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막 그 앞에 유리컵을 내려놓던 직원이 씽긋 웃으며 질문에 대답한다.

“네, 위스킵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화수가 고개를 틀었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미 화수를 빤히 보고 있던 리 샤오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나중에 사 주겠다고 약속했었잖아.”

“…….”

기억 안 나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리 샤오를 보니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늘 드시던 게, 뭔데요?”

“위스키.”

“…….”

“나중에 사 주지.”

“약속하신 겁니다.”

순간 영상기속 필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날의 기억. 그걸 떠올린 화수의 눈이 조금 커진다. 그 반응에 리 샤오는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기억 안 나?”

“…….”

안 날 리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걸 리 샤오가 기억하고 있을 줄 생각도 못 했을 뿐이다. 당시 리 샤오는 그냥 지나가듯 한 말이었던 걸 제가 멋대로 약속이라고 둔갑시켜 버린 거였다. 그런데 그걸 리 샤오도 약속이라고 여겨줬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또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리 샤오 님도 기억하고 계신지 몰랐습니다.”

화수는 감격해서 되뇐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들은 리 샤오는 썩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역시.”

“네?”

게다가 알 수 없는 말을 되뇌기까지. 화수가 그 까닭을 물었지만 돌아온 건 화제를 전환시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

“마실 수는 있겠어?”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당연히 마셔야지요.”

“물도 못 마시겠다면서.”

“물은 못 마시지만, 이건 술이잖습니까.”

“다른가?”

“당연히 다르지요.”

“…….”

“술은 발효시켜 만든 것이니 소화에 도움이 되잖습니까.”

“알겠어.”

“아시겠-”

“어떻게든 마시겠다는 네 의지는 확실히 알겠군.”

“…….”

“마셔도 된다는 말이야.”

눈치를 보는 화수에게 다행히 허락이 떨어졌다. 리 샤오의 말에 끝나기도 전에 화수가 냉큼 제 앞에 놓인 유리잔을 집어 든다. 자존심 같은 건 이 아름다운 술잔 앞에서 전혀 필요 없는 거였으니까.

꿀꺽.

맑고 투명한 호박색의 액체를 한 모금 머금어 삼키자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러면서 목까지 찼던 음식물들까지 같이 끌려 내려간다.

진짜 소화에 도움이 되는 거 맞다니까.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다시금 술잔을 기울이는데, 그때까지 리 샤오의 품에 얌전히 앉아 있던 리우가 갑자기 몸을 뒤튼다.

“으으응.”

“리우, 왜?”

“엄마, 엄마.”

“이리 올래?”

내내 얌전히 잘 있다 하필이면 왜 꼭 이 순간이냐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일단 술잔은 내려놓는다. 하지만 이리 오라며 손을 내미는 화수에도 리우는 두 발을 동동 구른다.

“내려가고 싶은 거야.”

제게 오려는 것도 아니면 그럼 왜 그러나 싶었으나 리 샤오는 바로 알아차린다. 알고 보니 이제 배도 채웠겠다, 낯선 이 공간도 익숙해졌겠다, 리 샤오의 무릎에서 내려가 제 발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어어, 안 돼. 얌전히 있어야지.”

몸을 쭉 펴 미끄러지는 리우를 화수가 혼내는데, 누군가 급히 테이블로 다가온다.

“음식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셨습니까.”

조용히 해달라는 주의를 주러 온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모양.

어?

뒤늦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화수의 눈이 조금 커진다. 낯이 익은 얼굴.

“오랜만에 함께 오신다고 해서, 나름 더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요.”

예전에 왔을 때 화수가 먹을 수 있는 딸기 케이크를 챙겨 준 주방장이었다. 아마 마지막 접시를 그냥 돌려보낸 게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걱정마. 덕분에 평소보다 배는 더 먹었었으니까.”

“그렇습니까.”

화수치고 제법 많이 먹었다는 걸 아는 리 샤오는 전혀 불만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럼에도 주방장의 시선은 화수를 향한다. 화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주 배가 터지기 직전이에요.”

“하하.”

배가 터질 것 같다는 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지만 주방장은 화수의 말을 기분 좋은 농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화수도 굳이 그걸 정정하지는 않았다.

“으으응.”

낯선 사람의 등장에 잠시 멈췄던 리우의 투정이 다시 이어졌다.

“이 도련님이 그때 그 배 속에 있었던.”

그러자 그렇게 투정 부리는 리우를 본 주방장이 화수에게 확인하듯 묻는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주방장의 얼굴 가득 반가운 기색이 번진다.

“어찌, 이번엔 음식이 입맛에 맞으셨습니까.”

지난번 입덧 때문에 먹지 못하고 그대로 돌려보냈던 스튜를 기억하고 하는 말이었다. 분명 그건 화수가 아니라 리우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거니까. 재치만점인 물음에 피식, 웃음을 흘린 화수가 이번에도 리우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 것 같네요.”

입맛에 맞다 못해 스프 한 그릇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고, 주방장이 리우를 위해 직접 구웠다는 빵도 두 덩이나 먹어치웠다.

“그런데 이렇게 잘생긴 도련님이 왜 이리 심통이 나셨을까요.”

짝짝, 리우의 관심을 돌리려고 두툼한 두 손으로 박수를 치자 그런 주방장을 리우가 뚫어져라 본다.

“어디, 저쪽에 뭐가 있는지 보러 가보실래요?”

일단 관심을 끈 뒤 이번엔 손을 내밀어 리 샤오에게서 리우를 데려간다. 어딜 가자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리우도 순순히 주방장에게 안겼다. 그런 리우와 주방장을 보던 화수가 물었다.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다른 손님이요?”

괜히 가게에 폐가 되지 않을까 싶어 물은 것이었으나 오히려 주방장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게.

“오늘 여기 리 샤오 님이 통째로 빌리신 거라, 특별히 다른 손님께 폐가 될 일은 없는데요.”

애초에 손님이 없으니까. 하지만 화수는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통째로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화수의 모습에 이번엔 주방장이 리 샤오를 향해 확인하듯 묻는다.

“말씀 안 하셨습니까?”

“굳이 말해야 하나?”

“…….”

물론 말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보통은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라고 하는 일이니까. 상대 모르게 할 거면 굳이 왜 그렇게까지 하나 싶지만 또 리 샤오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주방장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화수를 향해 물었다.

“한 잔 더 드릴까요.”

“네.”

물론 그 와중에도 대답은 조금의 텀도 없는 즉답.

“여기.”

손을 들어 보인 주방장이 직원에게 화수의 빈 잔을 치우고 위스키를 가득 채운 새 잔으로 바꿔줄 것을 지시했다.

“도련님은 잠시 제가 봐드릴 테니, 편히 한잔들 하십시오.”

그러고는 가게 안쪽으로 리우를 데리고 사라졌다.

“진짜 통째로 빌리셨습니까?”

“…….”

어쩐지 이 넓은 가게에 손님이 너무 없더라니. 그것도 모르고 저 혼자서 가게가 생각보다 장사가 안 되는 모양이라고 걱정했는데, 세상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왜요?”

“여긴 술집이라 술담배 하는 손님들도 있을 테니. 리우한테 안 좋을 것 같아서.”

“안 오는 선택지는 없는 겁니까?”

“없지.”

“…….”

“너를 데리고 와야 하니까.”

결국 모든 게 저를 위해서였다는 말이었다. 아아. 또다. 또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뭐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그런 당연한 건 왜 묻느냐는 얼굴로 리 샤오가 제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혹시 리 샤오 님이 담배를 끊으신 것도 리우 때문입니까?”

“아니.”

그나마 그건 리우 때문이 아니었구나. 고개를 내젓는 리 샤오에 안심한 것도 잠시.

“담배 끊은 적이 없는데?”

덧붙이는 말에 화수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닙니까? 하지만 계속 피우시는 거 못 봤는데요.”

“그건.”

그건? 말을 하다 말고 저를 빤히 보고만 있는 시선에 화수가 재촉하듯 되묻자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혼자만 피우냐고, 네가 치사하다고 투덜거릴 것 같더라고.”

“제가 언제-”

“네가 물에 빠져서 찾지 못하고 있었을 때.”

“…….”

억울해하던 화수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안 그럴게요.”

화수가 불쑥, 내뱉는다.

“치사하다고 안 그럴 테니까, 피우고 싶으면 피우셔도 됩니다.”

“…….”

“제가 피우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혹 오해할까 봐 급히 덧붙였지만 리 샤오가 화수를 빤히 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럼 나도,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

“뭐든지요.”

한 번 망설이지도 않았다. 리 샤오가 자신에게 뭘 부탁하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솔직히 이런 곳을 통째로 빌리거나 비싼 구두를 살 능력은 없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꼭 들어주고 싶었다. 아니, 설사 제가 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어떻게 해서든 이건 꼭 들어주고 싶었다.

“참지 마.”

하지만 정작 리 샤오가 화수에게 원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참지 마.”

“…….”

들었구나. 다 들었던 거구나. 화수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떠진다.

“조금만 불편해도 짜증내고.”

“…….”

“티끌 같은 생채기도 아프다고 말해 줘.”

“…….”

“부탁이야.”

이걸 부탁이라고 해도 되나? 이건 저만 좋은 거잖은가. 그런데 왜 이 남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듯이 애원하는 것인가. 화수의 눈이 깜빡인다.

“제발.”

그리고 순식간에 무너지는 리 샤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순식간에 눈앞이 뿌예진다.

안 돼. 울지 마. 해야 할 말이 있어. 그러니까 울면 안 돼. 울지 마. 그렇게 다그치며 목까지 차오른 울음을 꾹 눌렀다.

“영감이, 잘못 안 겁니다.”

“…….”

“제 발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못났었습니다. 리 샤오 님이 주신 그 신 때문이 아니라.”

주룩. 참고 참았던 눈물이 기어코 볼을 타고 흐른다.

그건 제가 미련해서 그런 거였다. 정작 신을 수 있을 땐 닳아버릴까 봐 아까워서 신지도 못하고, 매일 밤 꺼내 발만 집어넣었다가 도로 넣어두었다. 그렇게 금방 작아져버릴 줄 모르고서. 그럴 줄 알았으면 실컷 신어라도 볼 걸, 뒤늦게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늘 그랬다. 늘 제게는 이 정도 욕심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다.

애초에 네가 욕심 낼 것이 아니었다고, 감히 너 같은 거한테 이게 가당키나 하냐고 그리 말하는 것 같아서 말도 안 되는 오기를 부렸더랬다. 그래서 더 고집스럽게 발을 구겨 넣고 다녔다. 미련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덕분에 발톱이 빠지고 발가락이 굽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았다면 저는 분명 견딜 수가 없었을 테니까. 화수가 유일하게 후회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이 사람을 이리 괴롭게 할 일이 될 줄 알았다면 그러지 말 걸 그랬다.

“후회했어.”

흐릿했다 또렷해지는 시야에 리 샤오의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이 들어왔다.

“내가 신발을 사 줘서 너를 놓쳐버린 건가 싶어서.”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화수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늘 목적지 없이 한 발 내딛는 것만 생각하며 살던 인생이었다. 물 위에 뜬 부표처럼 그저 흘러가게 두는 삶이었다. 깊이 생각하면 더 이상 발을 떼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화수의 인생에 유일한 나침반이 되어준 선물이었다.

그만하고 싶을 때 그 신발을 준 사람을 떠올리면 그래도 한 발은 더 내딛을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조금만 더 가면, 한 발만 더 내딛으면 그 사람이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실낱같은 희망. 그것만으로도 화수는 뒷걸음질 치지 않고 앞으로 걸을 수 있었다.

“그 신이 없었으면, 길을 잃었을 겁니다.”

말을 하는 화수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화수를 향해 리 샤오가 두 팔을 벌렸다. 마치 리우에게 하듯.

그걸 본 화수 역시 리우가 제게 그러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리 샤오에게 달려가 안겼다. 리 샤오는 그런 화수를 안아 무릎에 앉히고, 화수의 두 발을 제 발 위에 얹게 했다. 이상했다. 분명 신을 신고 있는데, 그럼에도 발이 따뜻했다.

내 꼬까신.

화수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세상 그 어떤 신보다 귀하고 좋은 내 꼬까신은 바로 리 샤오였다는 걸.

“울어?”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는데, 어찌 알았을까. 쪼르르 달려온 리우가 묻는다.

“왜에?”

“아니. 우는 거 아니야.”

화수가 고개를 내저었지만 리우의 땡그래진 눈은 그대로였다.

“울지 마.”

“응, 알겠어.”

화수가 갑자기 울어 놀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의젓하게 화수를 달랜다. 리 샤오가 그런 리우까지 안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울지 마.”

제 품에 찰싹 붙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볼을 만지작거리는 -아마 눈물을 닦아주는 리 샤오를 따라 하는 것일 터였다- 리우에 화수가 그 손을 가져와 입술을 맞췄다. 간지럽다고 꺄르륵 웃음을 터트리는 또 하나의 귀하디귀한 내 꼬까신.

이제는 더 이상 아무리 추운 겨울이 와도 홀로 차가운 눈길을 맨발로 걷는 일은 없을 터였다.

<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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