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하얀 개가 어느 집의 대문 앞에 섰다. 철옹성같이 묵직한 대문이 스르르 열리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안엔 문을 열어준 문지기였는지 왼쪽 팔에 완장을 찬 남자가 개를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하얀 털을 빛내던 개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외관이 작은 어린아이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고운 색동저고리를 입고서 댕기를 땋은 작은 여자아이였다.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건지 헐레벌떡 뛰어 집 안으로 들어간 아이가 거실에 널브러지듯 앉아 있는 한성과 현무를 발견하고 그의 곁에 섰다.
“한성 님, 반려 님께 뺨을 맞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뭐? 진짜? 반려 손도 못 잡아 보고 뺨부터 맞았다고?”
“시끄러워. 손은 잡아 봤거든?”
“그럼 손잡았다고 뺨을 맞으신 겁니까?”
“와, 그 반려 엄청나네. 천하의 백호 뺨을 때리는 자가 나타날 줄이야.”
“아니야, 아니라고. 뺨은 무슨.”
귀찮은 듯 손사래를 치면서 말하는 한성의 눈은 떠질 줄 몰랐다. 애가 타는 건 작은 아이뿐인 듯했다.
“반려 님이라고 편드시는 겁니까?”
“해야, 아니야. 이 녀석 뺨 맞은 게 창피해서 그럴걸?”
걱정인지 즐거움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해가 현무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듯 두 손을 손뼉 치듯 부딪쳤다.
“아하!”
“아니라니까! 야! 넌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짜증을 못 이긴 한성이 벌떡 일어나 앉아 현무에게 손가락질하자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까부터 있었는데? 재순 씨가 약과 준다고 했단 말이야.”
“약과 지금 계속 처먹고 있잖아.”
“으음, 이건 너랑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재순 씨가 차려 준 다과.”
“난 너랑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는데.”
“와, 진짜 너무하네. 계속 떠들어도 무시한 게 누군데.”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듣지.”
한성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소파 등받이 쪽으로 몸을 틀어 팔을 기댔다.
“왜요. 무슨 얘기 중이셨는데요?”
해가 해맑은 모습으로 현무 옆에 앉아 약과를 하나 집어 들어 한입 베어 물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응, 역시 재순 씨 약과는 정말 맛있어요!”
“그렇지? 어디 가서 사 먹어도 이런 맛이 안 나. 재순 씨가 최고야.”
“남의 가족 탐내지 말고, 네 반려한테나 해달라고 해.”
맛있게 먹는 해의 모습을 바라보던 한성이 현무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넉넉하게 싸 달라고 할 테니 달에게도 가져가거라.”
“고맙습니다. 백호 님!”
“달이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거야?”
현무의 물음에 해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약과를 든 손이 스르륵 내려가 작은 손으로 치마를 꾹 움켜잡았다.
“내키지 않는다니 강요할 수는 없지 않으냐. 너희가 그렇게 된 것도 다 내 불찰 때문이니 달이 그리 하는 것도 이해한다.”
“백호 님 때문이 아닙니다. 달이도 그걸 알아요. 알지만…… 알지만, 아직 쉽지 않은가 봅니다.”
“그래, 알고 있다. 너무 괘념치 말아라.”
한성의 부드러운 음성에 해가 희미한 미소로 화답했다. 제 자매인 달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나저나, 무슨 얘기를 나누고 계셨습니까?”
“아, 내가 반려와 초야를 치르는 법을 알려 주고 있었지.”
“……하아.”
화제를 돌려 이야기를 바꾸자 현무가 냉큼 대답했지만, 한성은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영문인 줄 몰라 갸우뚱하는 해를 바라보던 현무가 실실 웃기 시작했다.
“연회가 바로 코앞인데 반려와 초야를 치를 생각조차 안 하기에. 이 몸이 친히 알려드리고 있었지.”
“누가 거북이 말을 들을 줄 알고.”
코웃음 치는 한성의 모습에 약과 하나를 모두 입에 욱여넣은 현무가 손을 탈탈 털었다.
“아여어오 모 하으 이아 아오아(알면서도 못 하는 네가 바보야)!”
“맞아요! 한성 님, 연회가 언제인 줄 아십니까? 바로 이틀 뒤라고요!”
“초야는 마음이 닿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 아직도 혼란스러워 날 밀어내는 반려에게 억지를 부릴 순 없지.”
해와 현무의 입장에선 속 답답한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회는 사방신의 반려가 모두 나타난 기념으로 열리는 자리였고, 그 자리는 초야를 치러 각성을 한 반려여야 갈 수가 있었다.
온통 신의 결계로 이루어진 곳이라 그 공간에서 버틸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연회 때는 어찌하시려고요? 반려 님 안 모시고 가실 건가요?”
“방장산 영감에게 물어보니 내 힘을 조금 나누어주면 가능하기도 하다는구나.”
“굳이 그렇게 힘들게 할 필요가 있나?”
반려를 아끼는 마음이야 이해한다지만, 어차피 반려로 태어난 자의 숙명인데 그것을 자꾸 미루고 지켜 내려고 하는 백호의 모습이 의아했다.
원래부터 제 구역에 들인 자들에겐 한없이 평화롭고 자비롭기로 유명한 백호였다. 그만큼 ‘제 것’에 대한 경계가 뚜렷해서 함부로 선을 넘는 것들에 대한 응징은 가차 없었다.
이따금 그의 영역 안으로 곧잘 침범하는 인간 외의 것들이 종종 있었다.
한성은 그럴 때면 자신의 울타리 안에 속한 모든 것들을 위해 무심함으로 가면을 쓰고 있는 그의 소유욕을 확인하고 오곤 했다.
그의 아래에선 모두가 평등했고, 모두가 평안했다.
하지만 그 평안을 깨는 게 작은 조약돌이라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제 것과 아닌 것에 대한 경계를 긋고 사는 한성이 지금의 반려에겐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지켜만 본다니.
“해님도 오셨네요.”
“재순 씨!”
주방에서 작은 꾸러미를 들고 나온 재순이 해에게 알은척을 하자 해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걸렸다.
“해에게도 약과를 넉넉하게 준비해 주세요.”
“이런, 어쩌죠. 만들어 둔 건 이게 다인데…….”
재순이 난감한 듯 해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나이는 이곳에 있는 중에 제일 많아 보이지만, 그녀만이 유일한 인간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를 전전하던 그녀를 거둬들여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까지 모두 지켜본 이들이었다.
백호의 집에서 살림을 맡아 해왔지만,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였다.
“그럼 그건 해가 가져가거라.”
“에? 하지만, 현무 님이…….”
“아냐. 됐어. 오늘은 해에게 양보하지. 지금 먹은 것으로도 충분해.”
작은 소녀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몸 둘 바를 몰라 하자 현무가 보기 좋게 웃어 보였다.
“죄송해요. 다음엔 꼭 넉넉하게 만들어 둘게요.”
“이게 다 걸핏하면 약과만 축내는 저 거북이 잘못이지.”
“내가 언제 축냈다고 그러냐! 다, 네게 좋은 정보를 주고 얻어 가는 거지. 틀리다고, 틀려!”
바락거리는 현무를 가볍게 무시한 한성이 재순의 손에 있던 작은 꾸러미를 해에게 건네줬다.
“달이도 약과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가져가서 함께 먹거라.”
“감사해요. 백호 님, 현무 님. 그리고 재순 씨도 늘 맛있는 약과 챙겨 주셔서 고마워요.”
“해님과 달님이 드실 약과라면 전혀 힘들지 않아요. 당연한 일인걸요.”
재순은 자기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을 작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자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안쓰러운 신들.
안타까운 신들.
신수가 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에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팠을 그들에게, 재순이 해줄 일이라고는 고작 약과를 만들어주는 일뿐이었다.
그게 한없이 미안했고, 그것을 고마워해 주는 이들에게 한없이 감사했다.
* * *
집을 나선 지찬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제도 출근길에 마주쳤으니 오늘도 있을 것 같았다. 잠깐이라도 넋을 놓으면 어느 순간 나타나 제 옆에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익숙한 향기가 같이 딸려 왔다. 인기척 하나 없지만, 뒤에 있을 게 분명했다.
며칠 사이에 익숙한 향기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어쩌겠는가. 이상하게 망할 호랑이의 향기가 유독 코끝을 쫓아다니며 괴롭히고 있었다.
지찬이 가장 좋아하는 향기였다. 이슬이 내려앉아 어딘가 습기를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그런 풀 냄새. 공원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냄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어제 청룡의 반려가 나타났을 때 옆을 파고들었던 한성에게서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바로 이 향기, 이 냄새.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면 온몸 구석구석 훑고 지나가는,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이는 그런 것 말이다.
왜인지 모르게 자꾸 이 향기가 편안해지고 있었다. 아무도 없던 일상에 작은 조약돌 하나가 툭 떨어졌다. 잔잔하던 호숫가에 파동을 일으킨 작은 조약돌이 등 뒤를 지켜 서고 있다.
바람 빠지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인가.
“날씨가 좋네요.”
“아하, 우연이 참,”
여전히 멋들어진 슈트에 잘 정돈된 머리, 그리고 올곧게 마주하는 기묘한 눈빛. 희미하게 웃는 미소.
“됐거든요.”
“그대에게 청할 게 있어서…….”
지찬이 걷던 걸음을 멈춘 채 한성을 바라봤다. 미간에 주름을 달고서.
한성은 어쩐지 그 작은 주름을 손가락을 펴 살살 문질러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손대기도 겁이 나는 그런 상대. 입맛을 다시며 바라보니 지찬의 눈빛이 매서워져 있었다.
“초야 얘기 또 했담 봐요. 턱도 없어. 반려 취소는 못 한답니까?”
“반려 취소는 안 돼, 아니, 못 해. 그리고 초야는 천천히, 그러니 너무 성내지 마시게.”
“하아…… 청할 게 뭔데요. 반려보다 더한 건 없겠지.”
지찬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랑이할 시간도 기운도 없었다. 아니, 너무 황당해서 그럴 의욕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데.”
“그놈의 반려, 연회. 신 세계는 참 바쁘네요.”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그래서 더 거부감이 드는 것일 터였다.
“빠질 수 없는 자리라 함께 가야 해.”
“안 간다고 버티면?”
“벼락을 맞을 수도?”
“미치겠네. 자기들 멋대로 반려로 만들어 놓고 안 하면 벼락을 친다니.”
“그건 내 관할이 아니라 잘 모르겠…….”
“아니, 이봐요. 백호 님? 아는 게 대체 뭐세요? 내가 반려라는 것밖에 몰라요?”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흘러나오는데도 한성은 꿈쩍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대가 내 반려라는 건 잘 알고 있지. 그리고 벼락을 맞을 일도 없을 거야. 나는 나의 세계에 들어온 자는 끝까지 지켜 내기로 약속했거든.”
그래, 이 올곧은 시선이었다. 늘 항상.
바보 온달처럼 굴며 멍청이 같은 농담을 건넬 때도 항상 이렇게 시선만은 올곧게 바라봤다.
“그게 설령 저 위에 있는 신을 적으로 돌린다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