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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60)

13화

“그만 웃고 나가.”

한성은 사방이 지뢰밭 같은 기분이었다. 엉뚱한 생각에 울고 있는 해와 그 모습이 우습다며 엎어져서 웃고 있는 현무나 그 사이에 당황한 얼굴로 서 있는 지찬까지.

“아흐, 넌…… 큽, 방금 온 손님한테 크흐흑, 나가라고 그러냐.”

“네가 손님이야?”

한성의 불퉁거리는 말투에 내심 놀란 지찬이 둘 사이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능글맞게 웃고만 있는 줄 알았더니 새로운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괜찮은가 걱정돼서 온 건데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

신발을 마저 벗어 두고 거실로 올라온 현무가 어느새 해의 옆자리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여전히 동그란 눈에 눈물방울을 매달고 훌쩍이던 해는 현무의 등장에 입을 비죽이며 고개를 숙였다.

“현무 님은 왜 웃으세요. 전 진짜 심각하단 말이에요.”

“알아, 네가 한성이 엄청 걱정하는 거.”

“알면서 그렇게 박장대소하셨어요!”

“아아, 하지만 고자, 큽…… 고자는 아닐 테니 걱정하지 마. 물론 나도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니지 않을까? 에이, 저렇게 사지 멀쩡한데.”

대놓고 한성을 향한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웃음을 못 참겠는 듯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간헐적으로 어깨를 떨고 있었지만, 해를 쓰다듬는 상냥한 손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들키지 않게 고개를 돌려 조용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지찬은 해의 실망한 얼굴에 마음이 아파 겨우겨우 입을 뗐다.

“저, 음, 해님? 걱정하시는 고자는 아닙니다. 확실해요. 활기찼어요. 괜찮으니까 그만 울…….”

“푸하학!”

해의 표정이 밝아짐과 동시에 현무의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찬은 아뿔싸, 왜 굳이 이런 이야기를 내 입으로 했을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다시 주워 담기엔 늦어버렸다. 게다가 현무가 웃을 때 옆에 선 한성의 사레들린 듯한 헛기침 소리를 들었다.

옆을 바라보기엔 굉장히 난처해진 지금 이 시점에 왜 또 배가 고픈지, 배꼽시계는 때를 가리지 않고 눈치도 없었다.

소파에 앉은 해를 달래 주던 재순의 얼굴도 붉어진 게 눈에 보였다. 그제야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인 것인지 쓰나미 같은 후회가 밀려왔다.

‘신이면 한 오 분 전으로 시간 돌리는 건 안 되나.’

“그건 안 될 일이지, 나의 반려 님께서 이리 인정을 해주셨는데.”

어느새 한성의 팔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속삭여 왔다.

“그럼, 저는 식사 준비할게요.”

지찬은 재순이 일어나서 주방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 허리에 둘린 한성의 팔을 손으로 찰싹 때렸다.

“떨어지죠.”

순순히 물러나는 한성의 모습에 여전히 웃고 있던 현무가 입을 떡 벌렸다. 해도 그런 한성의 모습에 작은 두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와, 내가 뭘 본 거지.”

“세상에…….”

이게 그렇게들 놀랄 일인가 싶은 지찬이 한성을 돌아보자 그는 그저 능글거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지찬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 서 있지 말고, 식사 준비가 될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지.”

자리로 이끄는 한성을 따라 소파에 앉자 맞은편에 앉은 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근데 반려 님, 이런 거…… 여쭤봐도 되나요?”

“아, 네?”

“각인, 정말 하지 않으신 게 맞아요?”

“아…… 네. 뭐 아직.”

“해야, 그건 천천히.”

“천천히가 아니에요. 한성 님도 이게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지 아시잖아요. 각인을 못 하시면 힘도 못 찾으실 테고, 그러면 한성 님뿐만 아니라 반려 님도 위험…….”

“해야.”

낮게 깔린 한성의 목소리가 그만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 말에 해는 입을 다물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만 했다.

“왜 해한테 그래. 다 너 걱정해서 그러는 건데. 사실이잖아, 사방신 중에 각성을 못 한 신은 너뿐이야. 이게 지금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서도 자꾸 미루고 있잖아.”

오가는 대화의 무게가 조금씩 무거워짐을 느낀 지찬은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불편해졌다.

“한성의 반려 님, 각인에 대한 건 얘기 들었어요?”

“아, 네. 그냥 초야…… 랄까, 뭐 그렇다고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중요한 건 쏙 빼놓고 덮어놨구나.”

“그만해. 아직 그렇게 급하진 않아.”

한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현무의 말을 막았지만, 현무는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말씀해 주세요. 듣겠습니다. 저도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지찬의 단호한 말에 현무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말이 통하는 반려 님이셨네. 아마 초야 때문에 덮어놓고 그냥 넘겨 버린 것 같으니 알려 줄게요.”

“하아…… 난 잠시 나갔다 와야겠군.”

“어딜 가요?”

‘지금 이 타이밍에 어딜 도망가?’라는 뉘앙스로 지찬이 바라보자 한성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아아, 다녀와. 반려 님은 내가 안전하게 모시고 이야기나 나누고 있을게.”

“네가 더 위험하거든.”

“설마, 그럴 리가. 나는 친절한 안내자라고.”

손을 들어 살랑살랑 흔드는 모양새를 보며 인상을 찌푸린 한성이 그새 표정을 바꾸고 제 옆의 지찬을 바라봤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구나. 식사하고, 이놈의 말은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아…… 알았어요.”

지찬은 일부러 자리를 피하는 모습은 아닌 것 같아 한마디 덧붙이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바라보는 눈길에 불안함이 묻어났다.

갑자기 다른 신과 함께 있으려니, 어색하기도 하고 그나마 제일 여러 번 본 한성이 없다는 게 조금 불안해지려던 차였다.

사실 이게 인간이면 그냥 사회생활하듯 하면 되는 것인데,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무언가가 좀 낯선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가려던 한성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지찬의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를 쓸어 넘겨 줬다.

“다녀올게.”

아주 순식간이었다. 이마에 닿은 한성의 입술이 온전한 온기로 닿았다 떨어졌다. 그 모습에 경악하는 해와 현무의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게 있는 지찬을 바라보고 픽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다녀올게.’

얼마 만에 듣는 말일까. 흔하고 쉬운 이 말이 지찬의 인생에선 공백이 너무나도 길었다. 다녀오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모두 사라졌다.

순식간에 빠져 버릴 것 같은 어두운 상념에서 벗어났다. 눈을 깜빡이고 이미 사라진 현관문을 바라봤다.

입술이 닿은 이마에서 자꾸 아지랑이 같은 무언가가 간질거리는 듯해 지찬은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크흠, 잘못 찾아왔나 본데.”

“그러게요. 저 한성 님의 저런 모습 처음 봐요.”

“그래, 이번엔 네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닐까?”

맞은편에서 소곤거리는 현무와 해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잠깐 다른 생각에 빠지려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가장 커다란 방해꾼인 한성이 나갔으니, 이 일에 관해 객관적으로 들어 봐야 할 차례였다.

“이제 말씀해 주세요. 사실 그냥 사방신에게 반려가 있고, 힘이 반으로 나뉘었고, 초야로 각인해야 각성이 된다…… 이것밖에 알지 못해요. 그 외에 뭐가 더 있는 건가요?”

* * *

어제 입었던 남방과 면바지는 깨끗하게 세탁이 되어 돌아왔고, 부담스러울 정도의 칼 주름이 손끝을 반겼다.

내 옷이지만 내 옷이 아닌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으면서 한성의 집을 나온 지 불과 2분도 지나지 않았다. 무겁게 닫히는 문을 멀뚱히 바라보고 섰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터덜터덜 걸었다.

“호랑이 굴치곤 엄청 크네.”

제가 말하고도 우스워서 픽 웃었다. 담장을 따라 걷는데 바람이 시원하게 머리카락을 넘겼다. 뜨거운 여름이었지만 담장 아래 그늘 덕에 무덥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담장을 넘어 늘어진 초록 잎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작은 잎들이 모여 하늘을 가렸다. 흔들리는 그 너머로 새하얀 구름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반쪽짜리 힘이라 제 구역 관리하기도 벅찰 거야.’

‘한성 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리하고 계세요…….’

아무리 강하다 한들 반쪽짜리의 힘이 온전한 하나의 힘보다 강하겠는가. 현무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다고 한다.

‘청룡과의 관계가 제일 문제야. 극과 극이거든. 그쪽에서 언제 한성을 노릴지 알 수 없어.’

그래서 지금 이 상태로는 서쪽의 백호의 구역도 그리고 한성도 위험하다고 말이다. 그의 반려인 그 역시 오랜 시간 한성의 옆에서 각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윤회해 다시 돌아올 준비를 할 거라고 했다.

“윤회라…… 그럼 내가 처음이 아닌가…….”

지찬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담장을 따라 쭉 걷다 보면 큰 길이 나올 거라고 하더니 끝도 없는 것 같다. 주변을 휘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앞을 보자 몇 걸음 앞에 작은 아이 하나가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분명 주변을 둘러보기 전엔 없었던 아이였다.

계속된 그늘이라 그런가, 조금 서늘한 느낌이 팔에 달라붙었다. 한쪽 팔을 손바닥으로 쓱 문지르며 지나가는데 아이의 차림새가 영 마음에 걸렸다.

매미가 정신 사납게 울어 대는 이 한여름에 두꺼운 털로 짜인 붉은색의 니트와 청바지를 입고 주저앉아 무릎을 세운 채 미동도 없는 아이가 신경이 쓰였다.

아이를 지나쳐 걷다 반걸음도 못 가고 발을 우뚝 세웠다.

“혹시, 엄마 잃어버렸니.”

지찬의 목소리에 작은 어깨가 움찔하고 떨려 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든 아이는 새하얀 얼굴의 앳된 남자아이였다. 기껏해야 예닐곱 살 정도 되었을까 하는 아이는 눈물이 그렁한 모습으로 지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도, 형아도…….”

조그마한 입술이 들썩거리다 내뱉은 말은 저게 전부였다.

지찬이 아이의 앞에 쭈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경찰서로 데려다줄까? 아니면, 엄마 전화번호 기억나는 거 있니?”

입술을 꾹 닫고 고개를 도리질 치는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는데, 갑자기 엄청난 바람이 몰아쳤다. 작은 모래 알갱이가 눈을 찌른 느낌에 눈을 비비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데 앞에 앉은 아이가 사라졌다.

“어?”

엉거주춤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일자로 쭉 뻗은 담장이라 어느 곳에도 숨을 곳이 없었다. 뛰어갔다 한들 그 작은 아이의 발걸음으로는 눈에 보였을 게 뻔했다.

바람에 휘말려 갔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를 만나고 나더니 별 생소리도 다 한다며 그는 피식 웃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습기를 머금은 풀잎 향기가 지찬의 뒤를 감쌌다.

“나의 반려 님, 어딜 가던 중인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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