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60)

44화

오랜만에 업무를 보려니 적응이 안 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보다 첫 방문 거래처에서 점장의 신세 한탄을 듣다 보니 더 진이 빠지는 것 같았다.

이유인즉, 대신 업무를 처리하러 왔던 이 대리의 말투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거에서 시작된 거라고 했다.

물론 다른 쪽의 이야기를 듣질 못했으니 무어라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일단은 거래하고 있는 쪽에서 불만이 생기면 그 역시 매출에 지장을 주게 된다.

본래 성격이 나쁘거나 삐뚤어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지찬이 푹 숙이고 들어가자 금세 마음을 풀긴 했지만, 이 이야기는 한참이나 회자될 것 같았다.

“내가 지찬 씨 아니었으면 진짜 때려치울 뻔했다니까?”

“하하, 그러셨어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덥기도 하고 업무가 많아서 조금 그랬나 봐요. 맘씨 좋은 사장님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그래,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는 거지. 근데 지찬 씨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잖아. 내가 얼마나 서운했다고. 하필 와도 그런 사람이 와서, 응? 난 지찬 씨가 담당 바꾼 줄 알았잖아.”

“죄송해요. 이번에 신상품 이벤트 하는데 사은품 조달 좀 넉넉하게 해드릴게요.”

“역시, 지찬 씨밖에 없어. 근데 휴가 동안 무슨 일 있었어?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하하…… 무슨 일은요. 별일 없었어요. 건강합니다.”

무슨 일, 아주 많았지요. 호랑이 반려가 되고 청룡도 만나고, 해태도 보고요. 별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아마 휴가 동안 겪었던 일을 풀어놓자면 어디 판타지 소설 한 권은 나올 겁니다.

지찬은 속으로나마 주절거려 봤다. 아마, 누구에게든 이 사실을 털어놓으면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니냐는 둥 소리가 나올 게 뻔했다.

유난히 피곤한 월요일의 처음을 부질없는 불평 듣기부터 시작해 하루의 반을 소모했다. 씩씩하게 인사하고 나와서 길을 걷는 데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일단 본사에 들어가서 업무 파악을 하고 밀린 서류 처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 간당간당하게 걸쳐져 점심을 먹고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대충 때우고 갈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려 님, 반려 님.”

자기 좀 보라고 쉴 새 없이 반려 님을 외치는 새 한 마리를 그냥 무시한 채 걷자니, 주변 사람에겐 그냥 짹짹거리는 소리로 들리는지 다들 한 번씩 나무 위를 쳐다보며 지나가고 있었다.

등골이 쭈뼛하게 대체 왜 길거리에서들 부르고 난리인지.

정류장이 코앞인데 발걸음을 옮겨 조금 좁다란 골목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따라온 새가 어깨 위로 앉는다.

“아, 대체 왜 길거리에서 그러고 계세요.”

“반려 님, 어디 가시는 겝니까.”

“회사요. 저 일 하고 있잖아요. 그만 좀 부르세요.”

“저 앞에 공사 중이라 차가 밀리던데.”

“아, 어차피 본사 들어가는 거라 조금 늦어도 상관은 없어요.”

“난 또, 워낙 바쁘게 다니시니 반려 님 가시는 길에 방해라도 될까 하여…….”

‘진짜, 새 주제에 왜 이렇게 목소리가 묵직해.’

다행히 속마음을 읽는 능력까진 없는지 어깨에 앉은 새는 몸을 흔들고 한쪽 날개를 펴서 깃털을 다듬고 있었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저한테 자꾸 말 거시면 그게 더 곤란해요.”

“어차피 인간들은 못 듣습니다.”

“제가 듣잖아요. 길에서 새랑 얘기 나누고 있으면 뭐라고 보겠어요.”

“그럼 앞으로는 새인 척하고 말만 전달하면 되겠군요.”

‘그쪽, 새 맞거든요. 새인 척은 또 뭐예요.’

지찬은 갑자기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고맙습니다. 제가 아직 이런 쪽엔 적응이 안 돼서요. 새 님의 길잡이 없이도 불편함 없이 잘 살았으니까, 너무 신경 써 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반려 님이 곤란해하시는데 어찌 그냥 지나치겠습니까.”

‘아뇨…… 그쪽이 말 거는 게 제일 곤란해요.’

대놓고 말할 수 없음이 이렇게나 답답한 일이었다니. 아무리 영업사원 n년의 경력이라고 하지만, 이건 인간도 아니고 저보다 오래 살았을 법한 새 님에게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네, 일단…… 저는 회사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오신 김에 볼일 보시고…… 네, 뭐…… 조심히 다니세요.”

어색한 손가락으로 새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자 새가 손끝에 귀엽게 비비적거리고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로 인사하고 날아갔다.

지찬은 골목에서 가방을 끌어안고 주저앉은 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게 시작일 것만 같단 말이지.”

우리네 짐승님들은 어찌나 오지랖이 넓은지.

기운이 빠지는 느낌에 가만히 있으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앞에 공사 중이면 지금 버스 타고 가도 점심시간이 지날 테니 근처 아무 데서나 한 끼 해결하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다.

* * *

“한성 님, 혹시 저기 방 잠그셨어요?”

“음?”

“2층에 두 번째 방이요. 거기에 제가 곶감 말린 걸 넣어 뒀는데 문이 안 열리네요. 열쇠도 찾아도 없고.”

“아아, 열쇠 여기 있어.”

가장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한성이 열쇠 꾸러미를 재순에게 건네줬다. 그 모습에 의아한 재순이 열쇠 꾸러미를 받아 들고 2층으로 올라서다 말고 뒤돌아 한성을 바라봤다.

“어머. 설마, 각방 때문에 잠그신 거예요?”

“크흡.”

가만히 앉아 차를 홀짝이던 한성이 그 말에 사레들린 듯 기침을 했다. 그 모습에 재순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가를 가리며 2층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복도를 지나면서 문고리를 돌려 보니 모든 방이 잠겨 있었다. 단 한 군데, 한성이 쓰는 침실만 제외하고 말이다.

아침부터 각방이니 어쩌니 하면서 투덕거리며 내려오던 둘을 떠올리며 재순이 다시 한번 웃었다.

“세상에, 각방 쓰기 싫으셔서 이런 일까지 하시고, 은근히 귀여우시다니까.”

한성이 그리 원하니 도움을 줘 볼까? 하고 생각한 재순이 방에서 곶감을 챙겨 들고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주방으로 내려왔다.

“그나저나, 거실 소파도 넓어서 여기서 주무시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

그 생각은 못 했던 건지 들고 있던 약과를 툭 떨구는 한성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는 재순은 빨래를 챙겨 들고 뒤뜰로 나갔다.

볕이 좋아서 빨래 너는 맛이 나는 이런 날씨를 좋아하는 재순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 안을 힐끔 바라보니 한성이 정신 사납게 주방과 창고를 들락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거실은 잠그지도 못하고 어쩌시려나.

몇십 년을 지켜봐 왔지만 저렇게나 당황하는 모습을 처음 본 재순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그를 저렇게 움직이게 한 것은 역시나 반려 님 덕분이겠지.

제가 한성을 만나기 전부터,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왔을 신들의 생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우연하고도 기묘한 만남으로 연결된 인연 속에서의 한성은 생의 즐거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늘 같은 자리에서 차를 마시고, 같은 자리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자신의 얼굴에도, 이 커다란 집에도 조금씩 나이테가 새겨졌지만, 그는 여전했다.

신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 라는 뜬구름 잡는 생각도 해봤었지만, 지켜보는 한성을 보아선 딱히 그 삶의 이유 따위는 없어 보였다.

처음부터 계속 외로웠고, 무심했고, 아름다웠다.

그의 외로움을 반려가 채워 줄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바뀐 한성의 모습을 보니 마치 그들의 어미가 된 것처럼 마음이 좋았다.

무료했던 그의 삶을 조금씩 흔들고, 채워 나가고 있음이 보였으니까 말이다.

빨래를 탁탁 털어 곱게 널어 두고, ‘딸랑’ 하고 맑은 소리를 내는 풍경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앞으로도 부디, 행복하셨으면.’

어쩐지 마음을 도닥이는 듯한 그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으며 이름 모를 신들에게 빌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지친 표정의 지찬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걸어오는 내내 답답했던지 야무지게 맸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입었던 재킷은 한쪽 팔에 걸친 채 들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녀왔어요? 오랜만에 출근이라 많이 힘들었죠?”

“네, 오늘은 유난히 피곤하네요. 그나저나 한성은요?”

“아, 창고에서 뭐 찾는 것 같던데…… 금방 나올 거예요. 배고프죠? 금방 식사 준비 할게요.”

“감사합니다.”

어쩐지 집에 들어왔는데도 코빼기도 안 비치는 한성이 의아하긴 했지만, 금방 생각을 접고 완전히 녹다운된 지찬은 소파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이곳에 며칠이나 있었다고 이렇게나 편안한 건지. 설핏 웃음도 나왔지만, 그것도 역시 지친 안면 근육이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자고 싶다는 생각에 살짝 고개를 틀어 편안한 자세를 취하는데 한성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온 게야?”

“……네.”

“많이 피곤해?”

“조금요?”

눈을 감은 채 묻는 말에 힘없이 대답하자 한성이 쯧, 하고 혀를 차고선 지찬의 옆에 풀썩 앉았다.

“옷 갈아입을 힘도 없는 게야?”

“아아, 조금만…… 이따가요.”

말하면서 더 깊숙이 몸을 파묻는 지찬을 보던 한성이 일어나 번쩍 들어 올렸다.

“으응? 왜요.”

“씻겨 줄게. 밥 먹고 일찍 쉬자꾸나.”

놀랄 힘도 없는 지찬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한성의 목에 팔을 감아 안겼다.

“괜찮은데…….”

말로만 괜찮을 뿐이지 어디든 눕기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깊은 수마에 빠져들 것만 같은 지찬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한성이 소리 없이 웃으며 2층으로 향했다.

침대에 눕혀 타이를 빼는데, 정말 나른하게 누워 있는 지찬의 모습에 자꾸만 아래가 반응했다. 늘 단정하게 목까지 채웠던 단추도 두 개나 풀어 놓은 모습마저도 자극적으로 다가와 침이 꿀떡 삼켜졌다.

사이사이에 언뜻 비치는 쇄골과 하얀 피부, 그리고 목 아래에서 툭툭 튀어 오르는 맥박의 움직임까지.

힘들다고 한 아이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인가 싶어 한성은 미간을 팍 찌푸리고는 건전한 생각만 하려 노력했다. 곱게 씻기고, 밥을 먹이고, 그리고…….

“하아…….”

“……왜요?”

건전한 생각, 건전한 생각. 저 산 너머에 냇가가 있었는데 거기에 커다란 바위가 그렇게 예뻤다. 선녀가 목욕하고 간다던 그곳에서 지찬이 목욕하면.

아, 다시, 건전한 생각. 건전한 생각.

“아니, 아니야.”

단추를 하나, 둘. 툭툭 풀어 헤치는데 천천히 드러나는 지찬의 고운 피부가 눈 둘 곳을 없게 만들었다.

와이셔츠에서 팔을 잡아 빼자 몸을 살짝 틀어 도와주는 지찬의 작은 몸짓에도 쿵, 쿵 심장이 울렸다.

한두 번 본 몸이 아닌데도 어찌 이리 제 몸을 동하게 만드는지 모를 이 요사스러운 반려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누워 있을 뿐이었다.

바지를 내려 브리프 한 장 남긴 채 벗기고 나서야 욕실에 물을 채우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낭패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깨문 한성이 빠른 발걸음으로 욕조에 물을 틀고 다시 나왔을 땐 지찬이 침대에 걸터앉은 상태였다.

“일어난 게야?”

“왜 안 해요?”

“어?”

“거기, 이미 섰는데? 어제 내가 하지 말라 그래서 참고 있는 거예요?”

“어어?”

“착하네.”

“반려 님.”

“빨리, 씻겨 줘요.”

“어? 어. 가자.”

안아 달라고 팔을 들어 올린 지찬에게 다가가 들어 올렸다. 욕실로 향하는 사이에 한성에게 착 감겨 귓가에 더운 숨을 뱉는 지찬이 조용히 속삭였다.

“한성 향기 맡으니까, 나도 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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