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챕터 1>
여느 때처럼 서러운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다.
해진은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채로 엎드려 있었다. 두 손이 등 뒤로 묶여서 어깨로 몸을 지탱해야 하는 무척 힘든 자세였다. 묶여 있는 그의 손을 손잡이처럼 쥔 라일은 강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신음을 목구멍으로 끅끅 삼켜내는 해진의 사정 따윈 봐주지 않은 채.
“윽.”
이윽고 거친 정사가 끝나자마자 해진은 침대 밖으로 밀려났다. 사실 밀려났다는 건 퍽 점잖은 표현이다. 라일은 늘 다 쓴 기구를 밖으로 툭 던지는 것과 다르지 않은 손짓으로 그를 밀어냈으니까.
그는 라일의 자상한 손길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 다만 두 손이 묶인 상태에서는 속절없이 바닥을 뒹구는 것밖엔 도리가 없어서 문제였다. 오늘도 제 볼에 닿는 차가운 대리석의 감촉에 해진은 이를 악물었다.
바닥을 딛는 발소리가 몇 번 들리고 이어 샤워기의 거센 물소리가 들렸다. 눈도 가려져 있기에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라일의 성정상 아마 뒤에 남겨진 해진의 상태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갔을 확률이 높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보려고 꿈틀거리면서, 해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켜냈다. 어차피 이 저택에서는 겉으로 불만을 드러내 봐야 바뀌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울음을 닮아 있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는 게 익숙했다.
그가 이렇게 비참한 몰골로 관계를 맺는 건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라일은 지독한 오메가 혐오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메가 따위가 감히 섹스 중에 라일을 붙잡거나 할퀴는 걸 용납할 수 없었을 뿐이다. 안대도 비슷한 이유였다.
그렇게 마치 인형처럼 휘둘리는 게 해진이 아는 섹스의 전부였다. 이 또한 계약이었으니까.
한참을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우성 알파답게 라일은 침대 위에서 무척 거칠었다. 어쩌면 페로몬 문제 때문에 싫어하는 오메가와 몸을 섞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정사가 끝난 뒤에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오늘은 하필 잘못 떨어져서 팔까지 꺾여 버렸다. 결국 부질없는 발버둥을 하던 해진은 바닥에 모로 누웠다. 몸에 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곳은 둘이 몸을 섞는 전용 방이었고 라일은 볼일이 끝나면 샤워룸에 딸린 다른 문으로 나갔다. 그래서 계약 초기에는 이렇게 침대 밖에 떨어진 채로 밤새 방치당하는 일도 많았다.
“어휴.”
그때 샤워룸이 아닌 다른 쪽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한숨 섞인 사용인의 목소리도. 아마 해진이 금방 나오지 않아서 들어와 본 모양이었다.
“씨발, 더럽게 진짜.”
“…….”
사용인은 내뱉은 말대로 더러운 걸 처리하듯 해진의 손을 짜증스럽게 풀어 주었다. 그리곤 바로 방 밖으로 휙 나가 버렸다.
익숙한 홀대에 씁쓸하게 입매를 비틀던 해진은 일부러 느릿하게 안대를 벗어 내렸다. 그 혐오스러운 표정까지 굳이 바라볼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몇 시간 만에 다시 시야를 되찾았을 땐 당연하게도 방엔 혼자 남아 있었다.
늘 그랬듯이.
***
알파는 뛰어난 유전자를 상징하는 형질이다. 그중 우성 형질을 달고 있는 이들은 빼어난 미모까지 무기로 들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파는 어느 나라에서나 사회 상류 계층을 독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곳 엘타주의 헤비레인 시티도 마찬가지다.
다만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알파에게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바로 주기적으로 페로몬을 배출해 줘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알파의 페로몬 배출에는 필연적으로 오메가와의 성행위가 필요했다.
해진은 본래 베타였다가 너무 늦은 나이에 오메가로 발현하는 바람에 형질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알파가 페로몬을 적절히 배출하지 못하면 정확히 뭐가 문제가 되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오래도록 몸을 섞지 않으면 라일이 무척 난폭해지는 걸 몸으로 겪다 보니, 이게 필요한 일이기는 하구나 싶었다.
어쨌든 보통의 알파라면 적절하게 오메가를 만나며 해소될 일이었다. 다만 왜인지 오메가를 극도로 혐오하는 라일은 저택에 두고 주기적으로 페로몬 해소를 할 오메가를 구했다.
이 모멸적인 계약을 받아들인 건 돈이 절실했던 해진이었다.
라일 베르무스. 이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베르무스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 그들이 있는 도시 헤비레인은 베르무스 본가의 대저택이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라일 베르무스가 해진을 고용한 곳이었다.
우성 알파답게 라일은 수려한 외모를 자랑했다. 늘 완벽함을 자랑하는 슈트 차림은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매체를 도배하기도 했다. 오메가뿐만이 아니라 베타들까지 선망의 눈길로 들러붙는 알파. 그렇기에 이런 그의 오메가 혐오는 더욱 이질적으로 두드러졌다.
제 방으로 돌아와 가까스로 몸을 씻은 해진은 침대 위에 올라가 몸을 웅크렸다. 라일이 멀리 출장을 다녀오느라 며칠 만에 하게 된 페로몬 해소였다. 덕분에 오늘의 계약 수행도 고역이었다. 어찌나 거칠게도 박아대는지 다리가 다 저릿저릿했다.
이 저택에 들어온 지도 벌써 5년이다. 해진은 이 공간을 자신의 방이라고는 말하고 있으나 도무지 안주할 집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의 방은 늘 삭막하다.
“……형, 나 힘들어.”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형에게 투정 부리듯 혼잣말을 해 본다. 차라리 형이 살아 있을 때 좀 더 어리광을 부려 볼걸, 후회는 아무리 빨리 움켜쥐어도 언제나 늦었다.
이 계약은 분명 모멸적이다. 알파가 뛰어난 것처럼 오메가도 못지않게 그 유전적 뛰어남을 발휘하는 계층이다. 그러니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페로몬 배출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겠다는 식의 계약은 불합리했다.
하지만 해진은 받아들여야 했다. 이 계약으로 받는 막대한 돈이 아니라면 가족을 살릴 수 없었으니까.
그냥 흔해 빠진 비극이었다. 누군가의 동정 하나 제대로 사기 힘든 그런 사고.
해진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은 이 나라에서 흔하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버려진 해진은 뚜렷하게 이국적인 외모 덕에 열 살이 넘도록 입양을 가지 못했다. 세상이 얼마나 힘들고 비정한지 억지로 깨닫게 되는 나이였다.
애정에 목마른 채 해진이 홀로 설 준비를 시작할 때였다. 양부모님이 그를 입양하겠다고 한 것은.
브라이트가(家)의 마음씨 좋은 부부는 해진이 있는 고아원에서 오래도록 봉사활동을 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늘 이런 해진이 눈에 밟혔고, 결국 입양처가 정해지지 않자 해진을 직접 데려가기로 했다.
입양 후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시간이었다. 진짜 가족처럼 그를 혼내고 아껴 주는 부모님, 가끔은 싸우기도 하고 의지할 수 있는 형.
해진의 이름은 양부모님이 직접 지어다 준 것이었다. 그는 동양계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뿌리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부모는 열심히 찾은 끝에 그에게 모국으로 추측되는 나라의 말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해진은 석양이라는 뜻이라고 하더구나.’
‘우리 가문 이름은 브라이트니까, 넌 해가 진 뒤에도 늘 빛나는 사람이야.’
가족들은 신나서 그에게 이름에 대해 소감을 남겼다. 나중에 알아보니 제대로 된 문법도 아니고 끼워 맞춘 것에 가까웠으나 해진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 누군가가 이름을 지어 준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러려니 하지 말 걸 그랬다. 이렇게 빛으로 가득한 이름을 짓지 말아 달라고 할 걸 그랬다. 그는 지금 빛나기는커녕 스러지는 존재에 가까웠으니까.
해진이 성인이 된 기념으로 가족들은 외식하러 차를 타고 나가다가 봉변을 당했다.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이 그들이 타고 있던 차를 덮친 건 순식간이었다.
형은 해진을 끌어안은 채로 죽었다. 양부모님은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나 그날 이후로 혼수상태였다. 병원에서는 진작 포기한 그들의 생명줄을 아득바득 지켜 낸 건 전적으로 해진의 노력이었다.
“형, 나 진짜 힘들어…….”
어둡고 숨 막히는 저택의 한구석에서 해진은 아득하게 추락했다. 이불 속으로 한없이 몸을 웅크리고 나서야 겨우 지친 정신에 휴식이 찾아왔다.
***
다음 날 눈 뜨자마자 해진은 낭패감을 느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라일은 해진이 언제나 완벽한 몸 상태로 대기하고 있기를 원했다. 바쁜 그는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해진의 시간에 돈을 지불했으니까.
어제 차가운 바닥에 그리 오래 누워 있진 않았는데, 가족과 함께 사고를 당한 뒤로는 이렇게 잔병치레가 많아졌다. 괜히 라일의 눈에 띄어 심기를 거스르기 전에 얼른 몸 상태를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윽.”
오래도록 묶였던 손목에는 또 멍이 들었다. 침대를 짚고 일어나다가 시큰함을 느낀 해진이 속으로 신음성을 삼켰다.
어제도 침대 위에서 라일은 유난히 거칠었다. 출장 때문에 페로몬 해소가 시급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상태가 예민한 것에 가깝다. 그러고 보니 곧 라일의 러트 기간이 다가온다. 아무래도 5년이나 이 집에서 버티고 있다 보니 싫어도 이런 셈에는 빨라진다.
당장 이번 주는 아니겠지.
이번 주말에는 부모님을 보러 병원에 가기로 했다. 라일의 눈치를 보느라 자주 가진 못하지만, 계약서에 명시한 덕에 주기적으로 다녀올 수는 있었다. 병원비가 밀리지 않았고 병원의 최상급 서비스를 받는 것도 라일과의 계약 덕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