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런, 시간이…….”
멍하니 일어나서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힘을 짜내던 해진은 문득 시간을 보고 다급해졌다. 늦잠을 자 버린 것이다. 어제 저녁도 먹지 못하고 침대 위로 끌려간 탓에 무척 허기가 졌다. 그런데 식사 시간을 넘긴 걸 보자 초조해졌다.
서둘러 실내화를 신은 그가 문 앞으로 다가선 그때였다. 밖에서 불만이 가득한 말소리가 들렸다.
“씨발. 시간이 몇 시인데 쳐 자는 거야.”
“팔자 좋네.”
“하긴 좆집이 그렇지 뭐.”
문고리까지 뻗었던 해진의 손이 얼어붙은 듯 멈추었다. 남자들의 목소리는 거침없이 방문을 넘어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행여 해진이 들을까 걱정하는 기색조차 없다.
“씨발, 이걸 깨워야 하나?”
“놔둬. 뭐 그렇게까지 해줘야 하나.”
“그래. 지가 배가 고프면 기어 나오겠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초반에는 그래도 자못 거리감 있게 행동하던 사용인들은 점점 그 태도를 바꿔 갔다.
성인이 되자마자 이 저택에 들어와 늘 기죽어 있던 해진의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절박한 그 심정이 새어 나왔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해진이 받아 가는 막대한 금액이 사용인들 사이에 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정말 몸 하나로 굴러먹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 저택에서의 일이 목숨처럼 중요한 해진은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항변 한 번 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취급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역시 라일의 태도였다. 오메가가 평소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에.
“이건 어떡할까?”
“뭘 물어. 우리가 가져가자. 저 자식이야 뭐 알아서 먹을 텐데.”
음식을 담은 트레이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들으면서도 해진은 꼼짝하지 못하고 문 앞에 동상처럼 서 있었다.
이곳에 온 5년간, 해진은 한 번도 주방에 가서 음식을 요청해 본 일이 없었다. 방으로 늦은 식사를 가져다 달라는 말 또한. 요청한다고 과연 들어줄지도 의문이었다.
행여 저택에 있는 라일과 마주칠 걸 우려한 탓인지 그의 모든 식사는 이렇게 방 앞으로 가져다주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시간에 맞춰 방문 앞에 두는 트레이를 제때 가져가지 않는다면 금방 사라지곤 했다.
그러니 저들도 알 것이다. 저 음식을 두고 가지 않으면 오늘도 해진이 굶고 말 것이라는 점을.
“…….”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움직이지 못한 해진은 겨우 한숨을 삼켰다. 궁여지책으로 방 안에 비치된 물을 따라 마시며 속을 달랜다. 이렇게 음식을 빨리 치워 버리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앞으로가 큰일이었다.
해진은 사춘기에 발현하는 다른 알파, 오메가와는 다르게 열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발현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발현 시기답게 열성이었지만 그 형질로 부모님의 병원비를 대는 처지에서는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내 바닥을 보이는 물을 단번에 들이켜면서 해진은 생각을 거듭했다. 뒤늦게나마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건 행운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부모님의 목숨줄을 붙잡고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
“……다행인 거야.”
다짐처럼 내뱉은 말은 아주 작고 초라해서 그의 작은 방을 채 맴돌지 못하고 사라졌다.
***
그들의 섹스는 보통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오늘따라 해진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았던 라일이 짓씹듯 내뱉었다.
“후……. 몸 관리 제대로 안 하나? 너무 말랐잖아.”
“윽.”
그러면서 보란 듯이 거칠게 허리를 흔들었다. 개 같은 자세로 반쯤 얼굴을 침대에 박은 채 흔들리던 해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말대로 뼈가 부딪히는 바람에 퍽 고통스러웠다.
말은 꺼냈으나 저게 변명을 하라는 질문이 아닌 건 잘 알았다. 라일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가차 없이 지적하곤 했다. 평생을 위에서 살아온 사람답게.
그래서 해진은 늘 그랬듯 입술을 깨물어 가며 흔들렸다. 혹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고통으로 인한 신음성도 참은 채 말이다.
지금 여기서 소리를 잘못 냈다가는 입까지 막힐지도 모른다. 맨 처음 몸을 섞을 때 고통으로 울부짖던 해진에게 라일이 했던 소리를 그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입이 찢어지고 싶지 않으면 닥쳐. 듣기 싫으니까.’
그 뒤로도 라일은 한참이나 저 좋을 대로 해진을 붙잡고 박아 댔다.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거친 정사였다. 익숙해져서 무덤덤해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해진은 늘 곤욕을 치러야 했다.
“후…….”
라일에겐 이것이 그저 매일 결재해야 하는 서류와 마찬가지였다. 알파에게 꼭 필요한 게 아니었다면, 오메가와 몸을 섞는 귀찮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다만 심드렁한 머릿속과는 다르게 라일의 성기는 퍽 매섭게 해진의 구멍을 파고들었다. 필요 이상으로 해진의 몸에 손을 대는 일은 없었지만, 눈길은 이따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툭 튀어나온 해진의 어깨뼈를 훑곤 했다.
한참 몸을 움직이던 라일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까부터 허벅지에 닿는 해진의 마른 몸이 퍽 거슬린 탓이다.
“쳇.”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지 라일은 한층 거세게 허리를 흔들었다. 빨리 끝내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괴물 같은 체력의 라일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 행위도 끝이 났다. 점점 느려지다가 해진의 안에서 성의 없이 툭툭 허리를 쳐올리는 움직임이 이 고통의 끝을 알린다.
자신이 라일의 버릇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는 게 못내 끔찍하지만 해진은 그저 눈을 감았다. 안대로 가려진 시야는 눈을 감으나 뜨나 아득하기만 하다.
사정이 끝난 후 라일은 여느 때처럼 붙잡고 있던 해진을 휙 팽개친 채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볼썽사나운 신음을 흘리는 건 막을 수 있었다.
얼굴이 차가운 대리석에 반쯤 걸쳐지는 어정쩡한 자세였지만 그래도 끝이 났으니 됐다. 해진은 기껏 신음까지 참아 놓고는 저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
평소처럼 욕실로 거침없이 향하던 라일의 걸음이 우뚝 멈춘 것도 그때였다. 그제야 바짝 긴장한 해진은 몸을 일으키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번 주는 다시 병원비를 내야 하는 주였다. 지금 그를 언짢게 만들면 안 되는데.
“뭐지.”
그러나 해진의 걱정과는 다르게 이 방을 이용한 지 5년 만에 처음 뒤를 돌아본 라일은 그저 인상을 구기고 있었을 뿐이다.
안도의 한숨 소리가 귀에 거슬려 돌아보자 해진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꼴로 침대 구석에 아슬하게 처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매사에 무관심한 라일도 무심코 혀를 찰 정도로 볼품없는 모양이었다. 왜 저러고 있지 싶어서 한참 쳐다보는데도 움직이질 않는다. 그제야 라일은 뒤로 묶인 해진의 두 손목을 바라보았다.
아, 저것 때문인가.
아주 작은 변덕으로 라일은 욕실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해진에게 다가갔다. 그 평소답지 않은 관심에 해진이 바짝 긴장하는 것도 모른 채.
두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라일은 후회했다. 귀찮은 일이다. 초반에 라일이 명령하긴 했으나 오메가의 두 손을 묶고 안대를 씌우는 건 집사 선에서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는 한 번도 해진의 이런 상태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오메가와 교접하면서 해소되는 페로몬 작용뿐이니까.
짜증스럽게 두 걸음 더 떼어 해진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보이지도 않으면서 두렵다는 듯 위를 올려다보는 해진의 하얀 얼굴이, 공교롭게도 라일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이 안대 근처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작은 얼굴은 땀으로 촉촉이 젖어 애처로운 모양으로 흔들리고 있다. 꽤 오랜만에 제대로 보는 해진의 모습에 라일은 무심코 생각했다.
저 두 눈이 머리칼처럼 검은색이던가?
충동적으로 안대에 손을 뻗자 해진이 갑자기 깜짝 놀라며 목을 움츠렸다. 마치 맞을 것을 예상하고 웅크리는 사람처럼.
덕분에 허공에서 딱 멈춘 제 손을 보며 라일은 혀를 찼다. 이게 무슨 짓인지.
슬쩍 걸음을 옮긴 그는 단단하게 묶여 있던 해진의 두 팔을 거칠게 풀어냈다. 이상하게 며칠 전부터 그리 좋지 않은 제 성질머리가 좀 더 예민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시 욕실로 향하는데도 해진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몸을 보면 춥기라도 한 모양인데 움직이지도 않고, 이상한 일이었다.
“진. 이 정도 해 줬으면 얼른 꺼져.”
“…….”
차가운 라일의 음성에 해진은 버둥거렸다. 그러나 오늘도 험하게 다뤄진 탓에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어제는 밥도 제대로 못 먹은 탓이다. 설상가상으로 또 큰 비가 오려는지 사고로 다친 왼쪽 다리가 시큰거렸다.
라일은 해진의 이름을 멋대로 불렀다. 저건 다정한 애칭 따위가 아니었다. 맨 처음 계약서를 두고 마주한 라일은 해진의 이국적인 이름을 거슬려 했다. 그리곤 물건에 이름이라도 붙이듯 무심히도 말을 이었다.
‘귀찮은 이름이군. 그냥 진으로 부르지.’
익숙하지 않은 방식의 이름을 굳이 공들여 발음해 줄 이유가 없다는 태도였다. 라일과의 첫 대면에서, 해진은 제 안의 무언가가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양부모님이 공들여 지어 준 이름 또한 이 저택에서는 덩달아 박살이 나 버렸다.
어쨌든 지금은 빨리 움직여야 했다. 왜인지 그의 고용주가 오늘은 얌전히 안도하는 꼴도 보기 싫어하니까.
다만 해진의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제멋대로 굴었다. 두 팔은 자유로워졌으나 급히 걸음을 옮기다가 무릎이 풀썩 꺾여 버린 탓이다.
그런 해진을 라일은 짜증스럽게 보고 있었다. 매번 고분고분하기에 잘 쓰고 있는 오메가인데 오늘따라 퍽 행동이 굼뜨지 않은가. 이걸 구실로 뭐라도 요구하면 귀찮은데.
그러다가 문득 해진의 다리가 쉴 새 없이 경련하는 걸 발견했다. 그제야 정사로 다리가 풀렸다는 걸 깨달은 라일은 그대로 관심을 꺼 버렸다. 그리고 아까 돌렸던 발걸음 그대로 샤워룸으로 들어갔다.
그로서는 정말 아주 오랜만에 길게도 변덕을 부린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