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3화 (3/101)

#3

“이상입니다.”

“나가 봐.”

라일은 보고를 마친 비서를 쳐다보지도 않고 명령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보좌하는 비서는 그런 태도가 익숙한지 조용히 방을 나섰다.

한참이나 사각거리는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그의 새파란 두 눈은 잠시도 서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베르무스 가문은 원래도 경제를 주름잡는 대기업을 운영했으나 라일이 회장 자리에 앉은 이후로 그 덩치를 한껏 불렸다.

잠깐 고개를 든 라일이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완벽하게 넘긴 금발이 살짝 흐트러지고 나서야 그는 미간을 짓누르던 손을 뗐다. 이 빌어먹을 페로몬 정체가 저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좀 더 일 효율이 높아질 것이라 자조하면서.

반질거리는 까맣고 거대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고통을 감내하던 그는 문득 해진의 검은 머리칼을 떠올렸다. 그저 우연한 일이었다. 이 책상을 쓴 지 그리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겨우 한 번 떠올릴 만큼 평소 같지 않은 사고의 흐름이었다.

검은 머리칼과 대비되는 하얀 얼굴, 하얀 몸이 불쑥 제멋대로 튀어나오더니 어제의 그 볼품없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

계약으로 휘두르고는 있으나, 필요 이상의 모멸감을 줄 생각은 없었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잡는 게 귀찮다는 이유로 상대의 두 팔을 묶을 때 이런 생각을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라일은 그런 일반인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베르무스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그의 부모가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일찍 세상을 뜬 뒤, 방계의 거센 공격에도 그 자리를 지켜낸 젊은 주인이다. 처음에는 무작정 그의 자리를 빼앗으려던 친족들도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여야 할 정도로 라일의 능력은 뛰어났다.

혹자는 라일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명령하며 나왔을 거란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다들 그가 우성 알파라는 형질에 어울리는 인간이라고 하지만 라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오메가이든 베타이든 이 자리를 꿰차고 말았을 테니까.

그렇게 다시 검은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라일은 해진의 두 눈이 머리칼과 같은 검은색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해진의 맨 얼굴을 본 지가 무척 오래되었다는 사실 또한.

지금까지는 볼일이 끝난 뒤에는 해진이 어떻게 하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제 그렇게 볼품없이 구겨진 모습만 보이지 않았어도, 허리를 흔들 때마다 녀석의 엉덩이뼈가 느껴질 정도로 마르지만 않았어도 이런 무관심은 계속되었을 터다.

그나저나 지금까지 그런 꼴을 집사가 계속 수습했던가?

이 사실을 떠올린 라일은 순간 멈칫했다. 톡톡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도 우뚝 멈추었다. 불가해한 감상이 연기처럼 아스라이 가슴 속에 퍼져 나갔다.

다리가 풀린 건지 영 움직이지도 못하던데 그 적나라한 꼴을 다 보았겠군. 아니지, 집사가 알아서 처신했으리라. 수치심 같은 쓸데없는 불평이 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다시금 사고는 이어졌다. 뚝 끊겼던 손가락의 울림도 계속되었다. 라일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던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생각을 이어 나갔다. 어느새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파여 있었다.

그런데 녀석은 왜 그렇게 말랐지?

짧으면 이틀에 한 번은 몸을 섞는 관계였다. 아무리 오메가가 싫든 간에 라일은 해진의 몸에 빠삭할 수밖에 없었다. 매번 얼굴을 마주하긴커녕 엎어 둔 자세로 이용만 하고 오는 삭막한 관계라도 말이다.

한 손에 거의 반이나 가려지던 가느다란 허리가 툭 상념을 찢고 튀어나왔다. 허리를 흔들면 거칠게 반탄력이 느껴질 정도로 말라 있던 엉덩이도.

그러고 보면 그간 계약했던 오메가 중 해진은 아주 특이한 축에 속했다. 일단 그의 저택에서 무려 5년이나 버틴 것이 그랬다. 자존심이 강한 오메가들은 라일의 이런 취급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이 급해도 말이다.

그에 반하면 해진은 아주 쓸모 있는 계약 파트너였다. 그가 필요할 때 말고는 해진의 얼굴을 본 일조차 없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이런 모멸적인 계약이라도 응하는 오메가 중에서는 라일에게 다른 종류의 관심을 갈구할 목적으로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에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해진의 가치는 더욱 빛이 났다.

그런데 그의 저택에서 생활하며 그렇게 마르다니. 이유 모를 불쾌함이 좀 더 진하게 가슴속을 물들였다. 라일은 베르무스 가문이 반쯤 억류하고 있는 손님을 핍박까지 하고 있다는 식의 소문은 원하지 않았다. 진위 여부를 떠나 평판에 도움 되지 않으니까.

다시 펜을 들어 올리며 라일은 해진에게 다시 한번 몸 관리에 대한 계약 내용을 일러 줘야겠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그리 계약 이행에 소홀한지는 모르겠으나 라일이 알 바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딱 지금 같이 얼굴 맞댈 일이 없는 관계가 마음에 든다는 점이니까.

이렇게 잠깐 연기처럼 번졌던 해진에 관한 관심은 피어오를 때처럼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손에 서류를 든 라일의 얼굴에는 잠깐 느꼈던 의문도 불쾌함도 흔적이 없었다.

***

“오늘은 꼭 가야 하는 날이에요.”

“아, 글쎄.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그러게 미리 말하라고 했잖아.”

“사흘 전에 분명 말씀드렸다니까요!”

“난 못 들었는데? 근데 씨발, 어디서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어?”

덩치 큰 운전사가 위협하듯 해진의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이럴 때면 동양인 특유의 작은 체구가 서러워진다. 그래도 해진은 포기하지 못하고 벌벌 떨며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오늘은 하필 돌아오는 병원비 결제 날이어서 꼭 가야 했다. 물론 돈은 베르무스가에서 빠짐없이 제공되고 있었고 해진이 하는 사인은 그저 형식적인 절차였다.

그러나 그런 형식이라도 해진은 절실했다. 애초에 병원에서는 해진이 돈을 싸서 들고 온다 한들 양부모님의 치료에 그리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나마 베르무스가(家) 산하의 병원으로 옮기고 나서는 나아졌으나, 허공에 아까운 돈을 쏟아붓는다는 의사들의 눈길은 해진을 늘 위축시켰다.

“가야 해요. 이건 계약에도 있는…….”

“아, 거 높으신 분이랑 한 계약은 내가 알 턱이 있나. 어쨌든 난 오늘 차 끌고 나가라는 지시를 못 받았다니까?”

서러움이 치고 올라왔지만, 해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이 모멸적인 계약에 그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으면서 내건 조건은 하나였다. 주기적으로 양부모님의 병문안을 가게 해 줄 것.

그에 따른 차량을 제공하겠다고 한 건 라일이었다. 아마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감시하려는 목적이었겠지만. 그 목적이야 어쨌든, 계약마저 이리 소홀하게 취급하다니.

해진이 서럽건 말건 운전사는 담배를 꺼내며 그를 향해 이죽거렸다. 처음에는 뭔 오메가를 모시고 병원을 가라기에 주인이 아끼는 정부라도 되는가 싶었더랬다. 소문과는 다르게 베르무스의 주인도 알파 새끼긴 했구나 싶었고.

그러나 집사의 인맥으로 들어온 운전사는 곧 저택을 기웃거리며 소문을 주워들었다. 알고 보니 이 오메가 새끼는 그저 알파가 좆질하는 데 이용하는 도구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사용인들은 이미 저 좋을 대로 이 작은 동양인 오메가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5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들의 고용주는 단 한 번도 오메가를 신경 쓰지 않았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운전사의 태도도 정해졌다. 2주에 한 번 꼬박꼬박 그 먼 거리를 갔다가 대기해야 하는 일이 귀찮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제는 심지어 새벽까지 술을 퍼부어 댔기에 숙취가 있었다. 오메가가 뭔 희망을 품고 병원을 그리 꼬박꼬박 가는지는 모르지만 뻔했다. 혹시라도 애라도 배지 않았나 보러 가는 거겠지. 그 생각을 하니 더욱더 앞에서 바락바락 계약 운운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일을 얻으며 집사가 2주에 한 번 오메가를 알아서 병원에 데려다주고 오라는 소리를 했다는 사실도 그냥 편히 무시했다. 어차피 저 오메가가 어디에 떠들어 댈 주제가 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씨발.”

얼굴은 굳힌 해진은 걸쭉하게 쏟아지는 운전사의 욕설을 담담하게 들었다. 1년 전에 바뀐 이 운전사는 겨우 2주에 한 번 나서는 해진의 외출을 무척이나 귀찮아했다. 그 사실이 티가 나다 못해 냉대로 돌아왔지만, 묵묵히 참았다. 그에게 필요한 건 말 그대로 이동 수단이었을 뿐이니까.

“여하튼 난 모르는 일이라고.”

“……알았어요.”

서러움을 누른 채 해진은 뒤돌았다. 그 명령이 문제라면 지금 당장 집사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차라리 집사가 그저 일이 바빠 잊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씨팔, 몸 파는 애새끼 주제에 더럽게 뻣뻣하게 굴어.”

“…….”

등 뒤로 서늘하게 들리는 욕설에도 해진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여기서 대꾸를 해 봐야 그에겐 남는 게 없었다. 그리고 아마 저건 사용인들이 그를 어떻게 보는지 아주 단적으로 설명하는 표현이리라.

쿨럭, 마른기침이 올라왔다. 찬 기온에 너무 오래 나와 있던 탓이다. 으슬으슬하던 몸이 기어코 고장을 일으킬 모양이라 더 초조해졌다. 라일은 그의 몸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했으니 오늘 병원에 간 김에 진찰도 받으려고 했는데.

서둘러 집사를 찾아 저택 안으로 들어갔으나 대체 어디에 갔는지 그는 자리에 없었다. 그의 행방을 물어도 사용인들은 속 시원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해진은 온 저택을 돌아다녔다. 만나는 사용인마다 냉대를 감내하며 집사의 행방을 물었다. 그런데도 소득이 없었다. 하다못해 집사가 어디를 나갔는지라도 알려주면 좋을 텐데.

한참이나 집사를 찾던 해진은 시간을 보곤 좌절했다. 이제 당장 출발해도 면회 시간에 맞출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결국 그날 입원한 부모님을 보러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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