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4화 (4/101)

#4

외출하려던 복장 그대로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던 해진은 바깥의 소란을 듣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가 기다리던 소리라는 걸 깨닫자마자 부리나케 몸을 움직여 밖으로 향한다.

사용인들이 집사의 행방을 모르는 게 아니라 그저 해진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 좌절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수중에 들고 있는 돈도 없었기에 혼자서라도 병원에 찾아갈 수가 없었다.

계약의 대가로 받은 돈은 온전히 양부모님의 병원비로 지출되었다. 해진이 가지고 왔던 얼마 되지 않는 돈은 그간 다른 일을 전혀 하지 못했기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도 현금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병원에 가는 건 그가 가진 단 하나의 권리였다. 그런데도 무관심한 라일은 그마저 지켜 주지 않았다.

그간 다른 모든 걸 참아 왔던 해진은 기어코 폭발하고 말았다.

“베르무스 씨!”

저택의 주인이 도착하자 사용인들은 질서정연하게 거대한 대문 앞에 모여들었다. 해진이 말을 걸면 백안시하던 표정과는 다른 정갈한 모습들이었다.

지금 저 앞으로 향하면 내일 또 무수히 많은 조롱이 쏟아질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일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는 집사의 얼굴을 보니, 온종일 해진이 그를 찾았단 걸 알면서도 무시했다는 게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뭐지.”

차를 타고 막 저택의 대문 앞에 내렸던 라일은 귀를 잡아채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밤을 닮은 머리칼을 가진 해진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맨 얼굴에 라일의 시선이 닿았다. 무척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얼굴이다. 무엇보다 해진이 그를 이렇게 불러 세우는 건 지난 5년간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베르무스 씨, 잠시 할 얘기가.”

문득 마지막으로 몸을 겹쳤을 때 미적거리던 녀석의 행동이 생각났다. 그때는 그저 다리가 아파서라고 여겼는데, 진짜 할 이야기가 있었던 걸까.

“너.”

잠깐 의아한 기색을 띠었던 라일이 몸을 굳혔다. 가까이 다가오는 해진의 체향이 오늘따라 진하게 밀려 들어왔다. 오메가의 페로몬이라면 질색부터 하는 라일이었다. 그러나 이 생소한 장소에서 마주하는 해진을 보는 순간 라일은 자신이 어느샌가 이 페로몬에 무척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거부감조차 들지 않아 당황스러울 정도로.

가까스로 상념을 밀어낸 라일은 인상을 썼다. 어쨌든 그간 얌전하다 했더니 때를 보며 이렇게 인내할 수 있는 영악한 성격이었던 걸까.

“베르무스 씨, 오늘…….”

“필요한 게 있으면 집사에게 말해.”

“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사사롭게 얘기할 사이던가?”

“…….”

도무지 말귀를 못 알아듣기에 아주 명확하게 그의 위치를 상기시키는 말을 해 주었다. 라일의 시간은 결코 싸지 않았다. 이렇게 저택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실랑이를 해야 하는 이 순간이 무척이나 불쾌하다.

그러나 그의 말이 떨어지자 해진이 내보인 건 거절당한 오메가가 보일 법한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무거운 비를 닮은 서러운 얼굴.

그건 순간적으로 짧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미 늦은 밤, 구름에 가렸던 달빛이 그런 해진의 하얀 얼굴을 비추었다가 스러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뜻밖의 장면은 라일의 시선을 끌었다. 다만 그조차 아주 잠깐이었고 라일은 이 정도 시간을 낸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전히 동상이라도 된 듯 굳은 채 그를 바라보는 해진을 무시하며 저택으로 들어섰다.

제 등 뒤로, 꽤 오래 시선이 박히는 것도 같았다.

***

“…….”

찰랑이는 위스키 잔을 내려다보던 라일은 인상을 썼다. 잔에 비친 제 얼굴이 슬쩍 일그러지더니 해진의 서러운 얼굴로 문득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게 다 5년이나 얌전히 있다가 이상 반응을 보이는 오메가의 탓이었다. 고분고분한 게 가장 장점인 해진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멋대로 구는 꼴이 퍽 마음에 차지 않는다.

오랜만에 마주한 해진의 얼굴은 여전했다. 동양인 특유의 앳된 얼굴은 시간이 지나도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일 년 대부분이 흐린 도시답게 이곳 헤비레인에서는 밤에도 구름이 달빛을 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 희미한 빛에 의지해 보는 얼굴은 얼마 전 정사가 끝난 후 바라봤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짜증스럽게 술을 들이켜던 라일은 문득 생각했다. 그 서러움을 닮은 표정이 오늘따라 퍽 간절하지 않았는가 하고 말이다.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볼 걸 그랬지.

“……하.”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러트가 다가오긴 하는지 머리가 영 업무에 집중하질 못하고 흐트러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그는 러트 기간을 헤아렸다. 앞으로 고작 며칠이다.

이렇게 불필요한 일에 정신력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보유한 막대한 자금처럼 덩치가 큰 베르무스 기업은 매분 매초가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러트 기간이 있다면 업무에 공백이 생길 테니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을 끌고 왔음에도 해진의 그 얼굴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미미한 두통마저 들 정도로 거슬리는 감각이었다.

어두운 밤에도 놀랍도록 빛나던 그 얼굴, 검은 눈동자.

“…….”

왜인지 목이 타는 기분이 들어서 라일은 그만 마시려던 술을 한 잔 더 따라야 했다.

시린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얼음 사이에서 라일은 다시 해진의 얼굴을 발견했다. 불쾌할 만큼 깨끗한 그 얼굴이.

오메가는 귀찮다. 본능에 휘둘리는 꼴이 알파보다 더한 족속들이다. 선친들의 멍청한 꼴을 이어받고 싶지 않다면 멀리하는 편이 좋다.

해진의 일은 집사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열성 알파인 집사는 오래도록 이 저택을 관리해 온 유능한 사람이었다. 욕심이 조금 많은 게 흠이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충실한 인물이니 라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해진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세심하게 그를 관리하고 있으리라 믿었다.

이 결정이 얼마나 큰 균열을 만들지 알지 못한 채.

***

다음 날, 해진은 홀로 저택 밖으로 나섰다.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방에서 혼자 눈물을 흘렸다. 한 3년째 되는 날부터는 흘리고 싶어도 나오지 않던 메마른 눈물이었다.

다만 몇 방울 툭 떨어진 눈물은 이제 한계라는 듯이 더는 흐르지 않았다. 제 안이 텅 비어 버렸을까 봐 해진은 미미한 두려움에 시달리다 아침을 맞았다.

온 저택에 소문이 퍼졌는지 아침이면 가져다주는 음식도 오지 않았다. 해진이 받는 막대한 계약금들은 그대로 병원비로 소진되었다. 그래서 그는 저택에서 제공되는 의식주에 기대야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애초에 계약서를 작성할 때 다른 부차적인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라일이 직접 말하기도 했었고.

그러나 그런 기본적인 것들이 지켜지지 않은 지는 꽤 되었다. 매일 제공되던 깨끗한 옷가지가 드문드문 오지 않았고 가끔은 직접 방 청소를 해야 할 때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설마 대가문 베르무스에 돈이 없겠는가. 이건 그저 라일의 무관심이 낳은 피해였을 뿐이다. 해진은 어제 자신의 말은 들을 생각조차 없는 라일의 태도에서 그걸 확실하게 느꼈다.

그의 말대로 집사를 다시 찾아 헤맬 수도 있었으나 해진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어제 그런 꼴을 당하고 다시 사용인들을 붙잡고 애걸복걸해야 하는 처지가 너무 서러워서.

그래서 일단 저택 밖으로 나섰다. 통장에는 아직 얼마간의 비상금이 있었다. 은행이 있는 곳까지 걸어서 간 뒤에, 돌아올 때는 돈을 인출해서 택시를 부를 작정이었다.

“춥다.”

늦은 가을 날씨는 한 발을 겨울에 걸치고 있었다. 안개처럼 내리는 가을비가 사위를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그가 있는 도시 헤비레인은 원래부터 거센 비로 유명했다. 늘 회색빛인 하늘은 환하게 빛나는 걸 본 지가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베르무스 가문의 본 저택은 헤비레인의 외곽에 있었다. 보안을 이유로 주변 일대를 전부 초원으로 만드는 과감한 설계를 포함해서 말이다. 땅값이 이 나라에서 가장 비싼 도시에 대저택을 짓는 것부터 베르무스 가문의 재력을 실감케 했다.

그러나 지금 해진에게는 방해만 되는 요소였다. 차가 다니는 도시까지 그야말로 한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난 뒤에는 일부러 오래 걷는 걸 피해 왔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비에 갑작스러운 걸음까지 겹쳐 왼쪽 발목이 시큰거렸다.

추운 늦가을의 비를 헤치며 해진은 끝내 도시에 다다랐다. 발끝이 온통 젖어서 무척 추웠으나 이럴 때일수록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는 걸 헤비레인에 사는 시민들은 잘 알았다.

사실 이렇게 급히 찾아가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서류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하루 이틀 정도 더 기다렸다가 저택에서 제공하는 차를 다시 타는 것도 방법이리라. 아마 집사도 계약에 탈이 나는 것까진 원치 않을 테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급했다. 꼭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힘들지만 노력하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아마 저택에서의 냉대가 못내 마음에 사무친 모양이었다.

사고 이후 바로 혼수상태에 빠진 부모님은 갈수록 야위어 갔다. 늘 푸근하게 해진이 숨이 막히도록 안아 주던 어머니는 이제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으로 겨우 그 질긴 생명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해진은 이들이 이토록 가늘게나마 숨을 쉬고 있는 게 전부 자신을 위해서이리라 믿었다. 이미 한 번 혼자 남겨진 해진이 다시 홀로 남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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