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제 저 모퉁이만 돌면 은행이 나온다. 서둘러 병원으로 가서 부모님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마음이 따스해진다. 병원비 결제도 하루 늦었지만 별 탈 없이 처리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겨우 무거운 다리를 끌며 시가지에 들어섰을 때였다. 그의 근처에 고급 차량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쳐다볼 만큼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해진은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였다. 차에서 내린 경호원이 그를 부르기 전까지.
“브라이트 씨.”
“…….”
해진은 그저 고요히 저를 부른 사람을 돌아보았다.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다. 많고 많은 병원에 가야 하는 날 중에 왜 하필 오늘인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베르무스 씨가 찾으십니다.”
“병원에 들렀다가 가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경호원들은 그를 에워쌌다. 애초에 해진이 무슨 말을 하든 들어 줄 생각이 없던 것처럼.
저보다 머리 하나씩은 큰 경호원들 사이에서 해진은 무척이나 무력하고 또 작았다. 입을 몇 번이나 달싹이는 사이 그는 우악스럽게 팔이 붙들려 차로 끌려가야 했다.
탁 닫히는 차 문 사이로 여전히 흐린 하늘이 보였다. 해진은 그저 한숨을 속으로 삼키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
***
“아직인가?”
“찾았다고 합니다.”
출근 후 급작스럽게 시작된 두통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점심 무렵부터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슬리기 시작했다. 러트의 징조였다.
서둘러 일을 정리하며 라일은 냉철하게 제 상태를 파악했다. 형질은 이래서 불편했다. 태초에 대체 왜 알파와 오메가를 한 쌍으로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불합리한 몸 구조였다. 종종 이 유전자가 혐오스러운 오메가의 구멍에 성기를 쑤셔 넣는 것 이상을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해서, 라일은 머리끝까지 짜증으로 차오른 상태였다.
그래서 급히 저택으로 돌아왔는데 해진이 제 자리에 없었다. 그가 늘 필요할 때 제 자리에 있겠다고 계약한 녀석이.
자연스럽게 해진의 까만 머리칼을 떠올리자 두통이 엄습했다. 지난 5년간 해진은 단 한 번도 라일이 필요할 때 그 자리에 없던 적이 없다. 아마 녀석도 그의 러트가 가까운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이럴 때 경솔하게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다니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그때 그가 보낸 차가 정원으로 들어선다. 경호원들에게 팔을 잡힌 해진이 그 안에서 질질 끌려 나오는 게 보였다. 마치 가기 싫은 곳에 억지로 끌려오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라일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
그사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해진을 내려다보던 라일은 무심결에 경호원의 팔을 거칠게 쳐냈다. 경호원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지만 해진의 고개는 푹 내려간 채 올라오질 않는다.
그게 이상하게 화가 났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그 자리에 있는 게 우리 계약일 텐데.”
“계약은……!”
다시 그 얼굴이다. 그날 밤에 보여주었던 한껏 서러운 얼굴.
머리가 다시 미친 듯이 지끈거렸다. 순간적으로 사위가 느려지며 해진의 얼굴이 조각처럼 그의 망막에 박혀 들었다. 러트가 기어코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페로몬은 반 박자 빠르다더니 며칠간 그리도 몸 상태가 예민했던 게 주기보다 빠르게 올 러트 때문이었던 건가.
“보는 눈이 많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주인님.”
그때 잽싸게 끼어든 집사가 라일에게 말했다. 덕분에 무어라 더 말하려던 해진의 입도 막혀 버렸다. 대신 원망의 눈길이 이번엔 집사를 향했다.
지금 제 말이 무시당했다고 저러는 건가. 라일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대로 해진의 멱살을 잡아 저택 안으로 당겼다. 도무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해진을 그저 있어야 할 제 자리에 돌려놔야겠다는 비이성적인 강박이 그를 조종한다.
녀석은 조금 버둥거리며 질질 끌려갔다. 한쪽 다리를 의도적으로 더 끌고 있는 듯한 모습이 라일의 심기를 거슬렀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그들이 가는 길에 있던 사용인들이 전부 사라졌다. 집사도 해진을 준비시키겠다고 같이 오다가 눈치를 보고 물러났다. 벌거벗은 자신을 묶을 때마다 기분 나쁘게 훑는 집사의 시선이 꺼림칙했기에 해진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흉흉한 기색으로 제 멱살을 쥔 라일을 보니 저절로 몸이 벌벌 떨렸다. 위압적인 페로몬이 온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벼, 병원에 가야 해요. 결제가…….”
그런데도 겨우 말을 꺼내자 앞서가던 라일이 걸음을 딱 멈추었다. 그제야 자신이 우악스럽게 해진을 이끌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툭 손을 놓았다. 어느새 모든 사람이 사라진 복도에 둘만 남으니 정신이 돌아온다.
평소 이상으로 거친 제 행동은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극단적으로 알려주었다. 이래서 알파의 몸은 불편하다. 고작 페로몬이 정체된 것으로 이성적인 행동이 되질 않으니까.
“그딴 건 형식뿐인 거 알잖아. 끝나고 가.”
“하지만……!”
겨우 자제심을 찾으려던 라일의 심기가 더욱 사나워졌다. 매번 말 한마디 더 보태는 일 없이 고분고분하던 해진의 이런 모습은 톡톡 튀어 오르듯 그를 자극했다. 지난 5년간 신경 쓰지 않았던 녀석의 존재감이 마치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단번에 드러나기라도 하듯이.
라일은 두통을 호소하는 제 미간을 꾹꾹 누르며 가까스로 이성적인 대응을 했다.
“오늘이 계약서에 명시된 날인가?”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가 문제야.”
짧은 인내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해진의 얼굴을 떠올렸던 그날처럼 덧없이.
그렇게 러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라일은 평소 페로몬 관리를 칼같이 하는 타입이었다. 그는 오메가를 혐오하지만 형질 하나 믿고 으스대는 알파들도 한심하게 본다. 따라서 자신도 우성 알파인 것이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페로몬 갈무리를 자랑했다.
그랬던 그의 주변에서 흉흉한 기색의 페로몬이 마구 날뛰고 있었다. 우성인 형질 때문에 라일은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아주 거친 러트 기간을 보내야 했다. 그걸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해진의 얼굴이 금방 해쓱해졌다.
주기보다 러트가 조금 빨리 왔구나.
“……끝나면 병원에 가게 해 주세요.”
자신의 역할이 무언지 해진은 똑똑히 알았다. 그래서 가까스로 서러움을 삼켜냈다. 이건 익숙한 일이니까.
일단 끝내고 다녀오도록 해야겠다. 며칠은 늦어지겠지만, 이번에야말로 라일에게 직접 말해 계약에 있는 병원 스케줄을 잘 지키도록 해야지.
동등한 계약이라고 하나 실상 해진은 그저 약자일 뿐이었다. 서러움이나 불만은 일단 내리누르는 게 익숙할 만큼.
“알아서 해, 그건.”
해진이 제 안에서 어떤 배려를 했는지도 모른 채 라일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계약에 따라 2주에 한 번 성실하게 병문안을 가고 있을 해진이 이러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해진의 팔목을 잡아채 앞으로 거침없이 걸었다.
오늘따라 너른 저택이 짜증 나기만 했다. 페로몬에 휘둘리는 몸이 영 거북하면서도 익숙하게 해진의 체향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들이 매번 몸을 섞는 방에 들어가자 깔끔하게 정리된 방 안이 보였다. 그곳에 다다르고 나서야 해진은 눈앞이 캄캄하게 바뀌는 걸 느꼈다.
이제 라일의 페로몬은 무겁게 방 안을 짓누를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러트는 일반적인 페로몬 배출과 다르게 며칠이나 이어진다. 그 매서운 몸짓을 직접 받아낼 생각을 하니 벌써 힘에 부쳤다.
해진은 파르르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옷을 천천히 벗었다. 집사의 더러운 눈길을 받으며 벗는 건 무척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라일의 새파란 눈동자 앞에서는 그보다 더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왜인지 급속도로 말이 없어진 그가 해진의 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해진은 얼른 옆에 놓여 있는 안대를 뒤집어썼다. 평소처럼 아예 아무것도 안 보이면 좀 나으리라. 푹신한 침대에 앉으니 몸이 푹 꺼지는 느낌이 났다.
그리곤 머뭇거리다가 옆에 있던 줄을 들어 라일이 있을 방향으로 건넸다. 손은 혼자 묶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어서 해진은 크게 당황한 상태였다.
커다란 손이 줄을 받아 가며 손끝이 스쳤다. 눈앞이 새까매지자 이런 감각들이 더 예민해져서 도피하려던 해진의 의도는 실패했다. 괜히 라일의 시선이 그의 나신으로 내리꽂히는 기분마저 선명하게 든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라일은 아주 귀찮다는 듯이 줄을 받아 갔을 테니까.
반사적으로 엎드려서 두 팔을 뒤로 돌리던 해진이 퍼뜩 놀라서 다시 앞으로 돌아섰다. 지금 라일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지만 며칠이나 뒤로 묶인 채 버틸 자신이 솔직히 없었다. 아까 빗속을 오래 걸었더니 몸이 너무 으슬으슬하다. 다친 발목에는 거의 감각이 없었다.
“앞, 앞으로.”
라일은 한 번도 해진을 때린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야말로 뺨을 맞을지도 모른다. 제 눈이 가려진 게 다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해진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보던 라일은 제 손에 들린 줄로 시선을 보냈다. 앞으로 내민 해진의 두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목에는 미처 지워지지 못하고 쌓인 멍들이 덕지덕지 내려앉아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듯 많은 멍이 이상하게 자꾸 라일의 시선을 끌었다. 이제 와 해진을 이렇게 다뤄 왔던 것에 죄책감 따위를 가지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라일은 그만한 대가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때 페로몬 체증으로 인해 그야말로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아픔이 시작되었다. 미간을 문지른 라일이 어쨌든 이번에 묶는 건 되었다고 차갑게 내뱉으려는 찰나였다. 누군가 방의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