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7화 (7/101)

#7

“…….”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어서 해진은 길게 누워 있었다. 팔은 자유로웠다. 무슨 변덕인지 러트가 끝나자마자 라일이 바로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샤워룸에서는 익숙한 소음이 들렸다.

얼핏 라일이 하는 통화를 듣자니 이틀이 지난 모양이었다. 목 한쪽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해진은 인상을 썼다. 하반신은 그냥 감각이 없었다. 이런 접촉은 한 적이 없었는데 라일은 단 한 번이지만 해진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놓았다.

평소에도 묵직하게 밀려 들어오는 탓에 얼얼한 아래쪽이, 노팅까지 하는 바람에 잔뜩 혹사당했다. 서둘러 제 방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그대로 흩어질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라일이 나와서 꺼지라고 할 것만 같았다. 물론 그가 다시 이 방으로 돌아올 리가 없는데도 해진은 괜한 걱정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대체 어쩌자고 노팅을 한 걸까.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해진은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그렇게 사소한 이변으로 지나가는 듯했다.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이상하게 밖에 서 있는 사람이 해진의 심장에 대고 직접 노크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해진은 당황한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샤워하고 곧바로 가 버릴 줄 알았던 라일이 불쑥 다시 방으로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어…….”

안대가 스르륵 내려가 있던 터라 해진은 아주 오랜만에 탄탄하게 근육이 붙은 라일의 몸을 보았다. 제 아래를 무지막지하게 헤집었을 그의 성기도. 미처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해진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고 해도 라일이 왜 이쪽으로 돌아왔지.

무심히 해진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라일은 가운을 걸쳤다. 회사에 급한 일이 터지긴 한 모양이라 짐작하며 그대로 문을 열 작정이었다.

그렇게 두 발자국을 채 떼기도 전에 라일은 침대로 돌아왔다. 그리곤 거칠게 이불을 들어 해진의 머리부터 덮어 버렸다.

“……?”

어리둥절한 그 표정을 보며 라일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 러트로 모든 페로몬은 해소되었을 텐데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인지.

빨리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이 페로몬 가득한 방에 처박혀 있으니 아직도 영향을 받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거칠게 방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방문 밖에는 그의 비서가 아닌 집사가 서 있었다. 어딘가 어두운 표정으로.

“뭐야.”

“저, 주인님.”

“말해.”

그의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집사는 안절부절못하는 낯이었다. 의아함에 이불 속에서 머리를 슬쩍 내민 해진이 그를 바라본 것도 그때였다.

해진과 눈이 마주친 집사는 순간적으로 그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무거운 음색으로 라일에게 말했다.

“지난밤 브라이트 씨의 양친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뭐?”

순간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해진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집사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가 너무 지친 나머지 헛것이 들리는 모양이었다.

뜻밖의 소식에 인상을 구긴 라일은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어젯밤?”

지금은 환한 대낮이었다. 어젯밤에 들어온 부고 소식을 왜 이제 전한단 말인가.

그의 서늘한 의문을 바라본 집사가 다급하게 변명을 내뱉었다. 들을수록 라일조차 기가 차는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사, 사실 시작하기 전 제가 급히 찾아왔을 때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던 건데…….”

“그런데?”

해진의 두 손을 묶기 전 다급하게 찾아왔던 집사가 그제야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회사 일이 아무리 바쁘다고 한들 감히 대답도 듣지 않고 그가 있는 방문을 열 리가 없었다. 그때 이미 해진의 부모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와서 서둘러 달려왔던 거다.

그런데 왜 멍청하게 그냥 돌아갔단 말인가.

“바, 방해하지 말라고 하셔서.”

어처구니없는 변명에 라일은 기가 막혀 집사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그가 안하무인에 가까운 사람이라 한들, 부모가 죽어가는 오메가를 묶어 놓고 러트를 보낼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그 이후에도 문제였다. 부고 소식이 들렸으면 중간에라도 보고를 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마치 그의 볼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들이닥치다니. 믿고 일을 맡겼던 집사가 돌아버린 건 아닌지 라일은 심각하게 고뇌에 빠졌다.

일이 귀찮게 되었군.

이 곤란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고 라일은 무심코 뒤에 있는 해진을 돌아보았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처럼 침대 위에 무너져 있던 해진도 서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눈이 마주한 순간, 라일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해진이 그를 만나고 처음으로 두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강한 원망의 눈길이 그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지난 5년간 그렇게 몸을 섞었는데 라일은 해진과 눈이 제대로 마주친 게 처음이라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무거운 빗줄기 같은 원망이 쉴 새 없이 그에게 흘러 들어왔다. 그 강한 감정이 몸을 꿰뚫고 지나가자 온몸에는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거대한 빗물이 목까지 찰랑찰랑 차올라 그를 흠뻑 적셨다. 코끝에는 해진의 옅은 페로몬이 스쳤다.

어처구니없는 집사의 조치에 떠올렸던 상념들은 해진이 쏟아내는 음울한 빗줄기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어쩐지, 몹시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차를 준비시켜.”

그래서 라일은 간신히 한 마디를 더 할 수 있었을 뿐이다.

***

장례식엔 베르무스가에서 보낸 화려한 조화(弔花)가 도착했다.

하늘에선 무거운 비가 쉴 새 없이 내렸다.

그리고 라일은 오지 않았다.

***

부모님의 장례를 마친 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에 몸을 실었다. 베르무스 가문에서 보내준 분수에 맞지 않는 차 뒷좌석에 앉아 우울하게 비를 뿌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장례식 내내 무거운 비가 왔다. 이맘때의 헤비레인에서는 흔한 광경이지만 해진은 그래도 저 대신 하늘이 울어 주고 있노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해진은 조문객 하나 없는 싸늘한 장례식장에서 외로이 웅크리고 있었을 뿐이다.

형의 장례식에는 그래도 많은 사람이 왔다. 브라이트 부부는 이 우울한 도시의 햇살 같은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혼수상태에 빠진 두 부부와 일찍 가 버린 형을 가엽게 여기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 받은 후원으로 첫 병원비를 낼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만 긴 투병 기간은 그런 햇살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몇몇 사람은 이번에도 연락해 주었으나 장례식장까진 오지 못했다. 해진은 그런 사람들을 전부 이해했다. 입원 초기에는 그래도 병원까지 이따금 찾아와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이 이상의 온정은 솔직히 사치라고 생각한다.

무거운 빗속에서 연기로 변하는 부모님을 보며, 해진은 하염없이 비를 맞고만 있었다. 그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자신이 무척 지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흠. 브라이트 씨.”

“…….”

해진은 저를 부르는 운전사에게 무심한 눈길을 보냈다. 문득 이 도시에 브라이트가 저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저기, 그 저번에는…….”

“…….”

공교롭게도 베르무스 가문이 그에게 보내준 운전사는 얼마 전 해진이 병문안도 가지 못하게 했던 그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건 해진이 부모님의 얼굴을 볼 마지막 기회였다.

“그, 그것이…….”

백미러로 눈이 마주친 운전사가 곤란한 낯을 했다. 묵묵히 그가 했던 폭언들을 떠올리지만, 이상하게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서 덩그러니 놓인 인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해진을 직접 부모님이 돌아가신 병원과 장례식장에 태워다 준 건 저 운전사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오랜 시간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답게 눈치 빠른 어른으로 자라난 해진은 저 곤란한 낯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알았다.

그러나 그걸 해진이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정말이지 단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그냥 무심히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을 뿐이었다. 당장 저 운전사가 욕설을 내뱉는다고 한들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뜻밖에도 운전사는 무척 조용했고, 차는 이윽고 베르무스가의 본 저택으로 들어섰다.

“…….”

그래. 해진은 이곳으로 돌아와야 했다. 당장 갈 곳이 없었으니까.

멍하니 도착한 차 안에 앉아 있던 해진은 한참이나 그렇게 앉아 있다가 겨우 내렸다. 왜인지 안절부절못하고 눈치만 보던 운전사가 잽싸게 내려 그의 차 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아마 갈 길을 잃은 채 그렇게 하염없이 앉아 있었으리라.

그래도 일단 땅에 발을 디디니 알아서 움직였다. 운전사가 서둘러 우산을 내밀었지만, 해진은 그 또한 무시하고 걸었다. 터덜터덜 발 가는 대로 움직이니 그가 사용하는 방이 코앞이다.

그가 자랐던 따스한 집은 병원비 마련을 위해 이미 팔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마음이 축날 땐 보러 갈 부모님이 병원에라도 계셨으니까.

그런데 이제 돌아갈 곳이 없구나.

해진은 방문을 열지도 못하고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저택으로 향하는 그 짧은 사이 몸은 흠뻑 젖어 버렸다. 발목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한없이 눅눅한 감각 속에서 해진은 깨달았다.

혼자 남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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