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왔군.”
힘없이 고개를 돌리니 라일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그의 일정을 알고 있는 해진은 일말의 의아함을 느꼈다. 그가 한가하게 저택이 있을 시간이 아니었기에.
그렇다고 그 이유를 물을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라일이 사용인들을 다 모아 놓고 공언했듯이 말이다. 그래서 해진은 그저 무표정하게 라일을 바라만 보았다.
“…….”
중요한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라일은 가벼운 걸음으로 저택에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바로 또 회사에 나가 봐야 했다. 러트가 끝난 후라 아주 오랜만에 머리가 상쾌했다.
그렇게 저택으로 들어서는데 해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 오늘이었다는 게 기억났다. 해진에게 배정된 방이 저택의 외관에서도 상당히 구석진 곳이라는 걸 문득 깨닫는다.
일부러 모른 척하고 제 갈 길을 가기엔 상황이 조금 공교로웠다. 아무래도 그의 사용인이 무척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고 말았으니까.
그날 해진이 급히 병원으로 사라진 뒤, 라일은 집사의 행동을 거세게 추궁했다. 일반인과 퍽 어긋난 그의 상식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짓거리였기 때문이다.
집사는 나름대로 변명거리가 있었다. 해진의 양친이 위독하다는 연락은 그가 이 저택에 온 뒤로 몇 번이나 있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고비를 잘 넘겼기에 이번에도 잘 넘어갈 거라고 홀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일은 제 눈치를 보며 말하는 집사의 모습에서 그 이면의 심리를 꿰뚫었다.
가끔 라일을 상대하는 알파에게서 흔히 보이는 태도였다. 그의 위압적인 페로몬에 눌려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열성인 집사는 이번에 러트에 빠진 라일의 페로몬에 된통 당해 방해하지 말라는 명령이 제일 중요하다는 듯 굴고 있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이번에 베르무스의 사람들이 해진에게 퍽 몹쓸 짓을 했다는 데는 이의가 없었다. 집사의 얼굴에 남은 불편한 표정은 그 때문이라 라일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해진에게 장례식 비용과 위로금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바쁘게 외국으로 나가는 와중에도 꽃을 보내 성의를 표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을 해진은 그 돈들을 전부 거부했다고 했다.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한 꽃이 싸늘한 장례식장을 모욕할 수도 있다는 점을, 라일은 더더욱 몰랐다.
“…….”
“…….”
분명 그 일에 대해 적당히 수습하려고 불러 세웠을 터다. 괜한 치기로 돈을 거부하는 짓도 하지 말라고 얘기해 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해진의 텅 빈 두 눈을 마주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 느슨하게 해 둔 걸로는 부족했는지 넥타이가 조금 졸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목 주변을 매만지며 라일은 다시 해진의 행색을 살폈다. 흠뻑 젖은 채로 돌아다니는 꼴을 보니 어지간히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라일은 드물게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돌리기 전, 그는 지나가듯 해진에게 말을 던졌다.
“아, 계약서는 나중에 다시 작성하도록 하지.”
말을 하고 나니 이 또한 필요한 사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서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뀌는 상황이었다. 해진이 이 저택에 남으려면 계약서의 조항부터 손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 언제부턴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해진의 입술이 스르륵 열렸다. 비를 맞아서 파르스름한 입술이었다.
“계약은 그만둘 겁니다.”
라일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가느다랗게 남아 있던 무언가가 희미한 소리를 내며 부스러졌다. 여태 남아 있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해진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너무 지쳤다.
“뭐? 갑자기 무슨 소리지.”
그는 뜻밖에도 해진의 말에 반발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미약한 감정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겠다. 왜 해진이 이 저택에 남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사실 그만둘 생각을 하며 돌아온 건 아니었다. 그저 차가 이쪽으로 움직였을 뿐이다. 그러나 라일의 말을 들으니 그가 이곳에 남을 이유 또한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꼭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었으니까.
라일은 미간을 구기며 그에게 성큼 다가왔다. 자신과는 다르게 비에 젖지 않은 그의 발끝을 보며 해진은 덤덤히 말했다.
“계약서에는 분명,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하.”
갑작스러운 불쾌함이 라일을 감쌌다. 러트가 끝난 상태에서는 퍽 거센 감정이기도 했다.
이유는 쉽게 나왔다. 그가 고작 오메가 따위를 하나 잡자고 협상을 하는 꼴이었으니까 말이다. 애초에 해진이 계약 대상이 된 건 열성이라 미미한 페로몬과 가장 돈이 절실한 그 배경 덕분이었다. 그게 사라진 지금 해진은 통제할 길 없는 귀찮은 오메가일 뿐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중요한 이유가 사라졌군.
여기까지 생각한 라일은 다시 차가운 이성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해진은 더는 최우선 협상 대상이 아니었다. 본인도 그렇게 의사를 밝혔다면 잡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 이만 내 저택에서 꺼져.”
다시 넥타이를 매만지며 라일은 뒤로 돌았다. 5년이나 살을 맞댄 사이치고는 퍽 건조한 끝이었다. 그게 무척 마음에 든다고 라일의 이성이 생각했다. 아직 남아 있는 불쾌한 감정이 조금 이상했으나 이 또한 사라지리라.
그러나 그가 채 몇 걸음 떼기도 전에 해진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불쾌함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라일은 아예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서재로 향했다. 도무지 목 근처가 거슬려서 넥타이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당연하지만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
라일과의 계약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그래서 해진은 바로 제 방의 물건들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짙은 비구름에 해는 보이지 않았으나 이미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해진은 굳이 내일까지 기다렸다가 이 저택을 나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꼭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작은 기계라도 된 느낌이었다. 무언가가 심각하게 빠져나간 허탈함을 느끼며 그는 터덜터덜 저택 밖으로 향했다. 차를 얻어 탈 기대는 처음부터 가지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급한 발걸음이 들린다. 집사였다.
“브, 브라이트 씨. 지금 가시는 겁니까.”
찾을 때는 그렇게 마주치기가 힘들던 집사의 얼굴이 이 저택을 나가기로 한 순간에는 참 쉽게도 보였다.
“네.”
어차피 젖은 것, 해진은 우산도 들고 있지 않았다. 입고 있는 건 아직 검은 상복이었고 손에 들린 낡은 캐리어는 이 저택에 들고 들어왔던 물건이었다. 그 속의 몇 없는 옷가지도 전부 그가 가져왔던 것들뿐이다.
혹시 물건이라도 훔쳐 갈까 봐 그를 불러 세운 걸까. 그런 의문을 띄며 집사를 보니 그가 살찐 몸을 움찔거렸다.
“저기, 그게…….”
우산도 없는 해진의 가라앉은 눈길에 집사는 흠칫 놀라더니 제가 쓰고 있던 우산을 건넸다.
그의 얼굴에는 운전사와 비슷한 초조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죄책감이 대부분이었으나 그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이 없지는 않았다. 운전사를 봤을 때처럼 해진은 그가 원하는 게 뭔지 아주 잘 알았다.
그러나 그 또한 해진이 알 바가 아니지 않은가.
“차를 준비시키겠습니다.”
미약한 온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해진은 다시 집사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곤 이내 모든 호의를 무시한 채 뒤돌아서 제 갈 길을 갔다.
그저 모든 게 귀찮았다.
<챕터 2>
“…….”
벌써 며칠째 말을 하지 않았다. 밥도 그저 굶주림으로 죽을 것 같을 때 한 번씩 비스킷이나 씹어 삼킬 뿐이다. 그러다 보니 점점 무언가를 먹으려고 입을 여는 주기도 길어졌다.
먼지 냄새가 나는 소파에 누워 있던 해진은 희미한 빛이 들이치는 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루 대부분을 이렇게 보내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돈은 이 작은 방을 임시로 빌리는 데 반 이상 빠져나가 버렸다. 걷느라 다리가 아픈 나머지 라일의 저택에서 그리 멀어지지도 못했다. 다만 물리적인 거리는 어차피 상관없었다. 해진은 그저 한계까지 걸어온 이곳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 뒤로는 멍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눈물이 끝내 흐르지 않아서 그는 죄책감을 느꼈다. 부모님을 살리는 일이 그렇게도 힘들고 지쳤던가. 눈물 하나 흘리지 못할 만큼.
이렇게 생각하면 몸에서 더욱 힘이 빠져나갔다. 어쩌다가 물이라도 마시려고 일어나면 머리가 핑 도는 일도 많아졌다. 그런데도 아무런 의욕이 없어서 누웠다가 앉았다가를 반복했다.
살아가야 하는데.
형이 이 꼴을 본다면 분명 잔소리가 심했으리라. 해진은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퍽 잘하는 아이였다. 사고가 나기 전 입학 허가를 받은 대학도 꽤 괜찮은 곳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미리 걸어 두었던 입학금은 마찬가지로 병원비로 모두 소진되었다. 어차피 해진도 상처가 심했기에 회복했을 땐 대학 입학을 맞추지 못할 만큼 한참 늦은 뒤였다.
이래저래 앞길은 어둡기만 했다. 양부모의 보호 아래 안온하게 살던 해진은 어른이 되자마자 배워야 할 것들은 배우지 못했다. 심지어 사고가 나기 거의 직전에 발현한 터라 형질에 관한 것에도 무지했다. 지난 5년간 그의 일상은 베르무스 저택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 다였다.
그러니 아이도 어른도 아닌 미묘한 정신상태로 도시에 돌아온 해진은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이 방의 주인 또한 어리숙한 그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청사진도 역시 없다.
그저 거대한 허무에 삼켜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만이 해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때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