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
다소 놀란 해진이 그 심정과는 다르게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으로는 집사가 방문을 두드리던 그 한낮의 일이 생각났다. 저렇게 노크 소리가 들린 뒤 찾아온 소식이 연이어 떠오르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노크 소리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울렸다. 그제야 정신 차린 해진이 힘겹게 문으로 다가갔다. 그를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빌린 기간도 앞으로 2주나 더 남았으니 집주인이 찾아오진 않았으리라.
문 앞까지 느릿하게 다가간 해진이 머뭇거리는 걸 아는지, 노크 소리는 또다시 울렸다. 이쯤 되면 안에 누가 있으리라는 걸 확신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던 해진은 문을 열었다. 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브라이트 씨.”
“…….”
몇 번인가 얼굴을 본 적 있던 라일의 개인 비서였다. 계약할 때나 라일이 그를 부를 때 마주했던 얼굴이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 뜻밖의 손님이라 해진은 무심코 인상을 찌푸렸다.
“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급히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비서는 제 명함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맨 처음 그에게 계약을 제시하러 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얼떨결에 명함을 받은 해진이 느릿하게 비서의 얼굴을 바라본다. 비서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베르무스 씨께서 다시 한번 계약을 논의하자는 의사를 전하셨습니다.”
“……계약이요?”
“네. 조건은 이전보다 더 후하게 맞춰 주신다고 했습니다. 혹시 특별히 바라는 점이 있다면 계약서에 명시해 주시겠다고도 하셨고요.”
“…….”
비서는 이해 못 할 소리를 한참이나 더 떠들었다. 일단 그가 잠자코 들으니 계약서 초안을 살펴보라며 손에 건네주려고도 했다. 제 앞에 들이밀어진 서류를 보니 맨 처음 라일을 보러 갔을 때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흥미가 없었다.
“안 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비서는 순순히 물러갔다. 문을 닫고 잠그는 동시에 해진은 비서의 명함을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넣었다.
다시 소파에 누워 먼지 냄새를 맡으니 익숙한 우울이 그를 감싸 주었다.
그렇게 끝나는 듯싶었다.
***
달칵 문 닫히는 소리가 무거웠다. 벌써 다섯 번째로 비서의 명함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해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
찾아올 때마다 비서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점점 조건을 하나둘 늘리며 해진을 회유하려고 들었다. 우연히 문 옆 쓰레기통에 들어 있는 제 명함을 본 뒤로는 이렇게 빠짐없이 명함을 손에 쥐여 주고는 돌아갔다.
이해할 수 없는 비서의 행동에 해진의 머리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처음엔 새로운 계약 후보를 찾다가 급해져서 그에게 왔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늘어나는 조건은 잘 모르는 그가 보기에도 비서의 역량을 벗어난 것들이었다. 라일이 직접 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라일은 애초에 해진이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지금 제시받은 조건이라면 잘 살던 오메가라도 혹할 만한 것들이었다. 굳이 해진이 아니어도 된다.
뭔가 이상하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그의 한계였다. 이상한 걸 알았다고 한들 저 계약에 응할 생각은 없었다. 비록 길을 잃은 그에게 퍽 안온한 생활을 보장해 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딱히 라일에게 화가 남은 건 아니었다. 해진은 그저 놀라울 정도로 매사에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분노하는 건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비서가 돌아간 뒤 이틀은 잠잠했다. 해진은 다시 무기력하게 소파에 누워 있는 나날을 보냈다.
다시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을 땐, 비서가 참 끈질기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대체 그에게 뭘 원하고 이렇게 찾아온단 말인가.
그러나 거칠게 문 두드리는 소리는 비서의 정중한 행동과는 사뭇 달랐다. 뒤이어 들리는 목소리에 해진은 아주 오랜만에 놀랐다.
“진. 문 열어.”
***
라일은 꿈을 꾸었다.
벌써 며칠째 같은 꿈이었다. 미세하게 다른 장면을 담고 있으나 공통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해진이다.
서러운 얼굴로 억지로 차에서 내리는 해진의 모습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이건 그사이 잘못 조작된 기억에 불과하다. 그때 녀석은 퍽 덤덤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고, 서러운 얼굴은 그 뒤에나 반짝이는 번개처럼 드러났다 사라졌을 뿐이다.
그런데 녀석이 그때 왜 그런 얼굴을 했더라.
‘지난밤 브라이트 씨의 양친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집사의 말이 웅웅 울린다. 그리고 서러운 얼굴을 하던 해진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시금 그를 덮치는 거대한 원망의 눈길 속에서 라일은 허우적거렸다. 몸이 제 말을 듣지 않았고 망망대해 같은 감정 속에 휘말렸다.
그깟 표정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
“……!”
겨우 몸을 일으킨 라일은 아직 새벽녘인 창밖을 보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몸에는 땀이 흥건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비에 흠뻑 젖은 해진의 모습처럼.
“하.”
몇 번이나 반복되는 일이지만 여전히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작 해진을 이 저택에 둔 5년간은 한 번도 꿈에서 그를 본 일이 없었는데 이제 와 이게 무슨 일인지.
게다가 머리가 한껏 무거웠다. 본래라면 러트가 끝난 뒤에는 한동안 머리가 맑아야 했다. 이번에도 분명 그런 상쾌한 기분으로 중요한 회담까지 성공리에 마치고 왔다. 그러나 예상보다도 일찍 몸 상태가 무너지려고 했다.
정확히는 집사가 해진이 떠났다는 보고를 한 뒤로부터.
페로몬 체증은 알파에게 흔히 있는 증상이다. 오래도록 페로몬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페로몬 샘에 묶인 페로몬들이 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단순히 외부로 감정 페로몬을 쏟는 건 소용이 없다. 알파와 오메가가 성행위를 해야만 풀리는 특이한 현상이었다.
본래라면 페로몬 체증은 그리 치명적이지 않다. 뇌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들 그저 졸린 것처럼 멍해지는 현상에 불과하다. 게다가 보통 알파는 오메가와 연애를 하거나 몸을 섞으며 이런 현상을 자연스럽게 해소한다.
그러나 라일은 우성이라는 형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우수한 페로몬은 몸을 우수하게도 만들지만, 남들보다 페로몬이 체증되는 속도도 빠르게 했다. 그리고 뇌가 단순히 멍한 게 아니라 고통스러운 두통을 유발하는 점이 가장 걸림돌이다.
만약 라일이 일반적인 알파처럼 오메가를 안는 데 거리낌이 없다면 이마저 별문제는 아니었을 터다. 그 행위를 혐오하는 라일이기에 그야말로 형질이 발목을 잡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후…….”
당연하지만 이런 현상은 비밀이다. 그의 자리는 공고했음에도 방계들이 호시탐탐 이 자리를 노리는 건 여전했다. 우성은 흔하지 않았고 라일처럼 오메가를 혐오하는 우성은 더더욱 흔하지 않았기에 비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아마 당장 페로몬을 해소할 길이 없어 몸이 이상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
방에 비치된 차가운 물을 마시며 라일은 제 상태를 판단했다. 꿈에 하필 해진이 보이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거라고.
그러나 다음 날 기껏 새 계약을 맺을 오메가를 마주한 순간, 이런 라일의 생각은 박살이 났다.
***
“……다른 오메가를 알아볼까요?”
“……그래.”
짧은 면담 자리에서 맡은 오메가의 페로몬은 그야말로 구역질이 났다. 화려하게 한껏 치장하고 온 그 생김새가 뭘 바라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정도였다.
그걸 애써 무시하며 버티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미소를 띤 오메가가 제 페로몬을 라일에게 흘리는 순간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쫓아.’
오메가가 처절하게 그에게 매달리려 했으나 경호원들이 한발 빨랐다. 그 목소리조차 퍽 귀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며 라일은 자리를 벗어났다.
그 후로도 다섯이 넘는 오메가가 저택을 다녀갔으나 라일의 이런 증상은 낫질 않았다. 오히려 한층 심해지기만 해서, 같은 공간에 오메가가 있다는 사실조차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오메가를 혐오한다고 한들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기이한 일이었다.
덕분에 당장이라도 화장실에 달려가 토악질을 하고 싶은 걸 참으며 라일은 비서에게 명령해야 했다.
“……해진을 찾아. 새 계약을 하자고 해.”
“네. 회장님.”
분명 옅어서 존재감조차 없었을 해진의 페로몬은 이상하게도 무척 또렷하게 기억났다.
***
“이번에도 거절했다고?”
“네. 아무래도 정말 의향이 없으신 듯한데, 새로운 오메가를 찾아보시는 편이…….”
“…….”
그러나 계약 기간 내내 고분고분하던 해진은 이번만큼은 라일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비서를 보내 과하다 싶을 정도의 조건을 불렀음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제 녀석에게 돈이 절실하지 않다는 건 안다. 다만 라일이 제시한 건 돈이 절실하지 않은 인간들도 한 번쯤 고려해 볼 만한 사안들이었다. 심지어 비서에 의하면 해진은 고민조차 길게 하지 않고 거절을 했다고.
대체 뭘 노리는 걸까.
해진의 재정 상태는 뻔했다. 그사이 지금껏 들어간 병원비를 모두 돌려받는 수준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빈털터리일 게 뻔했다. 집도 돈도 없는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텐데도.
심지어 그와 계약이 끝나는 순간부터 저택을 나갔다더니, 정작 지척에 있는 단기 룸에 머물고 있었다. 그 가까운 거리를 보며 라일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해진이 협상을 위해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있다고 말이다.
“하. 직접 오라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