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11화 (11/101)

#11

당연하지만 라일은 그렇게 세세한 조항 따위는 기억하지 않았다. 집사나 비서가 처리해야 할 범주의 일이었으니까. 해진이 2주에 한 번 병원에 가야 한다는 걸 기억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첫 만남 때 녀석이 벌벌 떨면서도 입에 담은 게 그 조항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막막했다. 그는 개인적인 원한을 사는 덴 익숙했으나 그 원한을 푸는 데 심력을 쏟아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해진이 진짜 그를 원망이라도 했다면 차라리 일이 쉬웠을 터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며 나열하면서도 해진은 그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곤란하다.

인상을 찌푸리며 라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나 도무지 제어되지 않는다.

근 2주 이 방에서 거의 떠나지 않은 걸로 아는데 해진의 페로몬은 너무 옅어서 방 밖까지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그의 마음처럼 꼭꼭 숨겨 두기라도 한 듯이.

해진의 페로몬을 떠올리니 이상하게 목이 마르다.

“그럼 고소라도 하든지.”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죠.”

고소 운운하는 말에 해진은 무심코 자조의 미소를 흘렸다. 베르무스가를 상대로 법적 소송이라니, 차라리 돌 하나를 쥔 채 밀림에 떨어지는 편이 훨씬 삶의 질이 좋으리라.

역시 잠깐 욱해서 이렇게 의미 없는 항변을 하는 게 아니었다. 해진은 다시 한번 절감했다. 계약으로 묶여 있다 한들 그는 한없는 약자였다.

불만을 토로해 봐야 바뀌는 건 없었다.

“…….”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던 라일은 해진의 입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몸이 이대로 굳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페로몬처럼 옅게 드러났다 사라져 버린 미소가 잔상처럼 남았다. 녀석의 입가는 언제 움직였냐는 듯 고요하기만 했는데. 라일은 아까부터 타오르는 목구멍 안쪽을 의식하며 말을 골랐다. 자조의 미소를 흘린 해진은 어째 조금 더 지친 기색이었다.

그 모습이 꼭 이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어쩐지 입을 떼기가 힘들었다.

“회장님. 가져왔습니다.”

“…….”

그때 아래에서 대기하던 비서가 뭔가를 들고 올라왔다. 또 계약서인가 싶어서 심드렁히 비서를 바라봤던 해진은 그 손에 들린 주사기를 보고 라일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선이 제게 향하자 라일은 입이 한층 더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러나 차가운 이성이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읊어 주었다.

“피검사를 좀 해야겠어.”

“…….”

“……마지막에 노팅을 해서, 확인차 검사가 필요해.”

본래 러트가 끝나자마자 확인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해진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는 바람에 잊고 있었지만.

라일은 급기야 혼란을 느꼈다. 잊고 있었으나 그가 해진에게 노팅했다는 걸 상기한 이후로는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노팅은 알파의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행위였다. 그저 본능이 자극받은 걸로는 끌어낼 수 없다. 그게 단지 유희가 목적이든 임신이 목적이든 알파의 의지가 중요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라일은 그 누구에게라도 노팅할 의지가 없었다.

“하아…….”

해진은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밀었다. 눈치껏 자리를 잡은 비서가 들고 있던 주사기로 해진의 피를 채취했다.

녀석이 순순하게 구는데도 라일은 어쩐지 저 시선을 받아내기가 어렵다는 감상을 받았다. 그 한숨은 너무나도 무거워서 흡사 그를 직접 두드리기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해진의 입장에서야 이 일방적인 행위에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 보상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들어줄 용의도 있었다.

“이제 됐죠?”

“……그래.”

그러나 피가 배어 나오는 팔을 문지르며 해진은 덤덤히 말했다. 역시나, 라일에게 받아 올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그의 팔목에는 아직까지도 희미한 멍이 남아 있었다. 몇몇 흔적은 너무 오래도록 묶였다 풀리기를 반복해서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라일의 시선은 해진의 팔에 집요하게 머물렀다. 머릿속으로는 계산이 한창이다. 일단은 잠깐 물러나는 편이 좋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짝 물러섰다. 기다렸다는 듯 해진은 문을 닫았다.

“…….”

문을 닫고 나서도 그 앞에 한참 서 있던 해진은 생각에 빠졌다. 왜인지, 이게 끝이 아닐 것 같아서 곤란했다.

라일이 대체 왜 저렇게 나오는지 궁금하긴 했다. 잊고 있던 노팅을 떠올리니 그 행동들이 영 이해가 안 간다.

그런데 그걸 꼭 알아야 할까?

해진이 그 저택에 남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처럼 이 의문도 해결해야겠다는 의지가 솟지 않았다. 해진이 원하는 건 하나였다. 그저 안온하게 침몰하기만을 바랄 뿐.

여기까지 떠올린 해진은 아주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다.

지혈하던 솜을 툭 쓰레기통에 버린 해진은 작은 식탁에 아무렇게나 두었던 지갑을 챙겨 들었다. 캐리어에서는 가장 두꺼운 옷을 꺼내 입고 나머지는 곳곳에 보란 듯이 펼쳐두었다. 가장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던 가족사진은 일부러 따로 빼내어 품에 넣었다.

그렇게 다른 짐은 챙기지 않은 해진은 가뿐하게 방 밖으로 나왔다. 너무 오랜만이라 계단을 내려가는 게 조금 힘에 부쳤다. 일 층에 내려선 뒤에는 방에 머무를 기한부터 연장했다. 다시 가지고 있던 돈의 태반이 사라졌다.

그 뒤로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옆 건물에 있는 식료품 가게로 향했다. 어차피 어제부터 방에는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가게로 들어선 해진은 식료품을 조금 살피다가 곧장 뒷문으로 향했다. 뒷문 바로 밖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때마침 버스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뒷문을 나선 해진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대로 버스로 올라탔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더라도 해진을 따라올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

해진은 버스에 앉아 묵묵히 겨울 냄새가 나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움직였더니 발목이 다시 시큰거렸다.

남은 짐이 아쉬웠으나 저 방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

“……진짜 있었군.”

계약서를 차근히 살피던 라일은 혀를 찼다. 녀석의 말대로 병원에서 소식이 들어올 경우 해진에게 즉시 알릴 것을 규정한 조항이 있었다.

물론 어길 시 보상 방안도 없는 허울만 좋은 말이었다. 그 밑에 있는 다른 조항과 엮는다면 라일의 변호사는 성의 없는 사과 한 줄 담긴 편지로도 이 사안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더라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첫 계약을 할 당시 해진은 변호사도 대동하지 않았다. 얼핏 기억하기로는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녀석은 갓 퇴원해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니던 상황이었다. 무언가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리라.

그걸 빤히 보면서 무시한 건 라일이었다.

지금보다 살짝 앳된 얼굴의 해진의 모습이 떠오른다. 계약서에 사인하며 벌벌 떨고 있는 하얀 손도.

“…….”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라일도 속이 썩 편치는 않았다. 겨우겨우 끌어낸 감정적인 반응과 함께 나온 소리를 보면 해진은 이 조항들 하나하나에 꽤 의지하고 있던 모양이니까. 실제로 라일 또한 조항을 잘 준수할 것을 매번 요구하기도 했고.

“회장님.”

“말해.”

그때 그의 집무실로 들어선 비서가 입을 열었다. 손에는 급히 연락을 받은 듯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일단 브라이트 씨의 피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려하시던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

알파와 오메가가 임신하려면 꼭 노팅이라는 과정이 필요했다. 노팅을 한다고 무조건 임신하는 건 아니지만 노팅을 하지 않으면 100%라고 할 정도로 임신할 수 없다. 다만 러트나 히트 사이클 기간에는 미약하게나마 확률이 올라갔다.

해진이 임신 가능성이 낮은 열성이라 망정이지 곤란한 일이 생길 뻔했다. 그는 아직 결혼도 후계도 생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제 유전자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도 질색이었다. 차라리 결혼을 포기하면 포기했지, 방종하게 구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러니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인데 어쩐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상한 감정을 갈무리하며 라일은 비서에게 눈짓했다. 할 말이 더 남은 기색이었으니까.

그러나 덤덤하게 흘러나온 말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브라이트 씨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뭐?”

“주기적으로 브라이트 씨의 위치를 보고하던 경호원에 의하면 방에 돌아오지 않은 지 이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틀?”

라일이 해진을 만나고 온 게 이틀 전이었다. 왜 첫날 행방이 묘연할 때 연락이 없었는지, 갑작스럽게 불쾌한 기분이 치고 올라온다.

그런 그의 표정을 잘 읽어낸 비서가 간단하게 덧붙였다.

“첫날 이미 체크는 했으나 방을 연장한 채로 외출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 정도 더 기다렸다가 보고를 올린 겁니다.”

“그래도 왜……!”

여기까지 말하던 라일은 입을 딱 다물었다.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아서.

해진은 협상 대상이긴 하나 집중 감시 대상은 아니었다. 경호원이 하루에 한 번 그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도 추후 협상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을 뿐이다. 그러니 이들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가슴이 마구 요동쳤다. 꼭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도 벌어진 양 구는 제 심정을 내리누르며 라일은 미간을 문질렀다. 잠깐 잠잠하던 두통이 다시 발작 증세를 일으킨다.

“아니, 됐어. 그 판단이 옳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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