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런 회장을 쳐다보던 비서는 조심스럽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의 상사는 오만하고 제멋대로 굴 때가 많긴 해도 같이 일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상황은 늘 객관적으로 판단해 주며 상과 벌이 확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베타인 그를 오로지 실력 하나만 보고 높은 자리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해진 브라이트와 관련된 일에서는 종종 그 판단력이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제 이런 촉을 잘 정리하며 비서는 서류를 넘겼다.
해진은 임신이 아니었다. 열성은 원래 임신이 힘들다고 했다. 그 외에도 해진의 피검사는 많은 정보를 주고 있었다. 가령 그가 현재 다소 위중한 영양실조 상태라는 것.
잠깐 고민하던 비서는 이내 해진 브라이트에 대한 정보를 갈무리했다. 다시 생각해도 라일이 불필요한 정보라고 쏘아붙일 만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향후 방침을 찾기 위해 덤덤하게 라일에게 물었다.
“이제 어찌할까요?”
언젠가 녀석의 머리칼을 떠올리게 했던 검은 책상을 두드리며 라일은 생각에 잠겼다. 다시 협상을 위해 찾아가려 했지만, 굳이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 쫓아갈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이성적인 생각을 주워섬기는데도 이상하게 미간은 펴질 줄은 몰랐다. 처음 계약할 땐 세상 절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해진은, 이제 단호하게 필요 없다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물론 해진의 동기가 저열한 금전 욕심이 아닌 건 잘 알고 있다. 실제로 협상 조건을 위해 조사해 본 결과 그가 지급한 계약의 대가는 거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병원비로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막강한 정보력으로 훔쳐본 해진의 통장에는 고작 몇 주를 버티기도 힘든 돈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까지 흘러가듯 생각하던 라일은 잠깐 멈칫했다. 이건 즉, 지난 5년간 해진은 저 자신을 위한 돈은 전혀 남기지 못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당연하지만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 따윈 라일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생각을 지워 버렸다. 어차피 그의 저택에서 생활하는 데 돈이 필요한 일이 있었을 리 없다. 그런 기본적인 문제가 있었다면 그의 귀에 들어왔으리라.
해진에 관해서는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된다. 익숙하지 않은 현상에 라일은 큰 불쾌함을 느꼈다.
톡톡 일정하게 두드리던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회장님?”
“일단, 찾아내.”
그런데도 일단 해진을 눈앞에 돌려놓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
해진은 마냥 앞으로 걸었다.
일단은 도망치듯 나왔으나 그리 불안하진 않았다. 손에서 더는 놓칠 게 없는 사람은 용감해진다더니 자신이 딱 그 모양이라고 해진은 덤덤히 생각했다.
늦가을이었던 계절은 어느새 겨울로 성큼성큼 달려가고 있었다. 그저 제자리에 주저앉고만 싶은 그는, 계절이 저를 두고 달려가 버린다는 생각도 덧없이 흘려보냈다.
가장 두꺼운 옷을 입긴 했으나 바람이 퍽 매섭게 품을 파고들었다. 안에 있는 가족사진을 끌어안듯이 해진은 몸을 웅크렸다.
라일이 매년 지급해 주었던 옷은 좀 더 따뜻하고 가벼웠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어차피 그의 것이 아니니 아쉬워할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가장 두꺼웠던 코트는 몇 번 구경도 못 한 사이 어느새 방에서 사라졌다.
버스를 이리저리 옮겨 타다 보니 도시 외곽이 나왔다. 적당히 먹을 걸 산 뒤에는 그저 걸었다. 갈 곳이 없어서 길 위를 걸었다.
“엄마!”
“뛰면 다쳐.”
그러다가 다리에 감각이 거의 사라질 즈음 해진은 벤치를 발견해 앉았다. 앞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아이들 놀이기구가 몇 개 놓여 있는 동네에 흔히 딸린 공원이었다.
작은 아이가 엄마를 향해 달려간다. 베타인 중년 여성이 걱정스레 말하면서도 아이를 위해 활짝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 작은 동작에서 해진은 어렵지 않게 그의 양부모님을 떠올렸다.
‘해진!’
햇살 같았던 어머니는 그를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아 주는 걸 좋아했다. 사춘기 무렵에는 해진도 조금 질색하는 티를 냈다. 친구들이 다 그랬으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품을 잃고 나서야 자신이 그걸 무척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바보같이, 그러지 말걸.
입양되기 전엔 저 모습이 무척 부러웠더랬다. 그래도 입양된 이후에는 한 번도 저런 장면을 멍하니 쳐다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도 남부럽지 않은 가족이 있었으니까.
다시 저 모습을 홀린 듯 보게 될 줄이야.
아직도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해진은 무서웠다.
***
“아직 못 찾았다고?”
마지막으로 해진과 러트를 보낸 지 3주가 흘렀다. 그나마 러트 후라서 오래 버틴 것이지 아니었다면 진작 페로몬 체증으로 병원 신세를 졌으리라. 그나마도 이번에는 미약한 두통이 끊이지 않아 고통은 그대로였다. 기껏 요란한 러트를 보낸 의미가 없었다.
해진을 찾으라고 명하긴 했으나 당연히 라일은 다른 오메가를 계속 섭외했다.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막상 해진을 찾으면 계약은커녕 그대로 무시할 가능성도 컸다.
언제까지나 계약할 오메가를 마주하고 앉을 시간도 없어서 이번엔 그냥 비서에게 일임했다. 적당히 열성으로 구해 두라는 말과 함께. 막상 해소가 갈급한 시기가 되면 이 거부감도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어제, 페로몬 해소를 위해 저택에 갔던 라일은 기어코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이 불쾌한 짓을 또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난 채로 라일은 그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페로몬이 쌓일 대로 쌓여 머리가 멍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진과 몸을 섞던 방에 해진과 같은 열성 오메가가 앉아 있었다.
해진처럼 눈을 가리고 양팔을 묶은 오메가는 긴장한 기색이었다. 왜인지 옷은 아직 입은 채라 라일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옷을 벗기기까지 해야 하는 귀찮음에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라일이 이런 수고도 할 필요 없이 효율적으로 협조하는 해진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그러니까 저 오메가는, 해진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라일은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다. 거센 거부감이 그의 명치를 누를 정도로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통약으로 하루를 버틴 지금 라일은 짜증을 달랠 길이 없었다. 해진의 행방이 아직도 묘연했다.
“아무래도 현금만 사용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CCTV 근처를 잘 다니지도 않고 휴대폰은 내내 꺼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연고가 있을 만한 곳이 없어서 수색에 어려움이 따른다고 하더군요.”
“하.”
그간 한 번도 해진에 대한 수색을 묻지 않았던 라일이다. 덕분에 비서는 뒷전으로 미뤄 두었던 해진의 정보를 잔뜩 업무용 태블릿에 띄웠다.
밀려드는 두통을 참으며 라일은 침묵했다. 해진의 행동이 여러모로 이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임신했다는 결과라도 나왔다면 이해가 됐으리라. 그의 아이를 목적으로 도망치고 있다면 충분한 이유가 되니까.
그런데 자신과의 계약이 이렇게 거부감이 들었단 말인가. 얼마 남지도 않은 짐마저 전부 버리고 도망갈 정도로?
‘필요 없어.’
환청 같은 해진의 말이 울리는 순간 두통이 묵직하게 가슴 쪽으로 내려왔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그는 더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저 찾아서 앞에 두면 명확해지겠지.
“브라이트 씨가 두고 간 짐들은 어찌할까요.”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 놔.”
해진은 곧 찾아낼 수 있으리라. 어차피 이 도시에서 그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무겁게 가라앉은 라일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
“……얼마 안 남았네.”
떠돌다 보니 퍽 외진 곳까지 와 버렸다. 기온은 그사이 더 떨어져서 간단한 말을 하는 와중에도 허연 입김이 계속 나왔다.
해진은 멍하니 안개 낀 숲을 바라보다 다시 ATM의 화면을 쳐다보았다. 당장 다음 주를 걱정해야 하는 적은 돈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집도 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상황인데 말이다.
막연한 건조함이 코끝을 스친다. 이제 곧 한겨울이었다. 거센 비로 유명한 이 도시의 겨울에는 함박눈이 흩뿌려지기도 했다.
그러니 겨울은 스러지기 딱 좋은 계절이었다. 어디 가서 객사라도 한들 눈이 그를 덮어 줄 테니.
잠깐 고민하던 해진은 그냥 남아 있는 돈을 전부 인출해 버렸다. 애초에 인출기를 찾기 어려운 외곽까지 온 데다가 여러 번 나눠서 뽑을 만한 재산도 아니었으니까.
막연하게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니 표지판 하나가 그의 시선을 잡아챘다. 스노우 레이크. 언젠가 가족들과 함께 소풍을 왔던 외지의 호수였다.
그걸 보니 뜬금없이 호수가 보고 싶어졌다. 막상 가서 텅 빈 곳에 혼자 있다는 걸 실감하면 혹시 눈물이라도 날까 싶어서.
기계음을 내며 돈을 뱉는 인출기를 바라보던 해진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잔뜩 흐리고 온도도 제법 싸늘한 것이 내일도 비가 올 것 같다. 눈이 오려면 아직 조금 더 있어야 하겠지.
지금까지는 나름 이런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잘 돌아다녔다. 미약한 불길함 때문에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다리의 고통도 잊고 다닐 수 있었다. 5년 만에 바깥 구경을 한 탓인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라일은 그사이 한 번도 그를 찾아오지 못했다. 찾지 못한 것인지 찾지 않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