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렇게까지 열심히 도망갈 필요가 있을까.
자신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지 해진은 곰곰이 생각을 거듭했다. 라일의 말처럼 임신이 걱정이긴 했으나 어차피 자신은 열성이었다. 잘 모르지만 분명 임신은 쉽지 않다고 했다. 심지어 그는 페로몬 조절조차 마음껏 못하는 실정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런 무거운 주제를 생각할 여유가 해진에게는 없었다.
계약할 오메가를 구하지 못했다면 아직 그를 찾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라일은 이렇게 대놓고 피하는 사람까지 쫓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방까지 쫓아온 건 여전히 의외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해도 되겠지.
사실 이런저런 핑계를 댄 것에 가까웠다. 요 며칠은 물만 겨우 먹을 정도로 몸을 혹사했기에 지친 것도 사실이다.
돈을 꺼내 잘 갈무리한 해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오래된 모텔을 발견했다. 만에 하나를 위해 이 기계와 떨어진 곳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터덜터덜 다리를 움직였다. 한쪽 다리가 질질 끌리며 낙엽 사이로 흔적을 만든다.
자신이 뭐라고 라일이 여태 저를 쫓겠는가.
멀리 가기엔 지금 해진은 너무 지쳐 있었다.
***
빛나는 호수의 물결이 반짝반짝 어린 해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보육원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태어나서 이렇게 멀리 나온 건 처음이었다. 커다란 양아버지의 자동차도, 지나오는 길에 본 커다란 마트도 온통 신기한 일투성이였다.
모처럼 하늘에 해가 쨍하게 떠오른 날이었다. 아직 집에서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던 해진에게 부모님은 소풍을 가자고 했다.
수줍게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가족들은 모두 분주해졌다. 아버지는 소풍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러 차고로 향했고 어머니는 수선을 떨며 부엌으로 갔다. 형은 자신이 아끼는 장난감 상자를 내밀며 해진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말해 주었다.
이 도시에서는 흔하지 않은 좋은 날씨였다. 외진 곳에 있는 이 호수는 사실 그다지 풍경이 다채롭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사람들도 없어서 우리 가족만의 비밀 장소라며 아버지가 익살맞게 윙크했다. 실제로 그날도 해진의 가족들만 호수 근처에 피크닉 매트를 펴고 앉아 있었다.
비밀 장소에 초대받고 나니 정말 가족이 된 것 같았다. 하늘은 푸른색이고 어머니가 싸 온 샌드위치는 천상의 맛이었다.
그야말로 찬란한 날이었다.
“……진……!”
“아…….”
아주 오랜만에 본 그리운 광경이 호수의 물결처럼 사라졌다. 먹먹하게 눈을 뜬 해진은 어둡고 곰팡내 나는 천장을 보며 서러움을 삼켜냈다. 익숙하게.
“문 열어!”
멍한 정신 사이를 거세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침범했다. 삐걱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킨 해진이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온다.
순간 해진은 그의 찬란한 기억이 어두운 악몽으로 덮여 버린 게 아닌지 고민했다.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라일을 두려워하고 또 미워할 만한 힘이 남아 있었나?
그러다가 거세게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겨우 몸을 일으킨 해진이 멍하니 문만 바라보고 있는 사이 덜컥 잠금쇠가 돌아갔다.
그 소리에 해진은 이게 현실이라는 걸 깨닫는다.
“…….”
끼이익 문이 열리자 근처에서 숙박하고 있던 투숙객들이 소란을 향해 거센 욕설을 던졌다. 어둠을 등진 누군가와 함께 서늘한 밤공기가 해진의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기껏 품에서 자아낸 얼마간의 온기는 덧없이 흩어져 버렸다.
아무 말 없이 저를 내려다보는 라일과 눈이 마주쳤다. 그 와중에도 해진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실없는 생각을 했다. 늘 오만하게 굴던 그가 좀 전엔 퍽 절박하게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는가 하고 말이다.
“진.”
“…….”
밖에서 굴러다니던 초라한 모습 그대로 해진은 침대 위에 구겨져 있었다. 그걸 발견한 라일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계단을 급히 올라오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린다.
해진이 돈을 인출하고 얼마 뒤, 정보를 입수한 비서는 흔적을 찾았음을 라일에게 보고했다. 돈을 움직인다는 건 곧 법을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인 시대였다. 라일에게 뒷배 하나 없는 타인의 개인정보를 캐내는 건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 쉬웠다.
그렇게 기다리면 되었을 일이다. 그런데도 라일은 가만히 저택에서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렸을 땐 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어둠이 까맣게 내려온 밤, 라일은 마지막으로 해진이 멈춰 섰다는 은행 인출기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녀석이 남아 있는 돈을 전부 인출했다는 사실이 못내 찜찜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 근처를 수색하던 경호원이 해진이 멀리 가지 못하고 모텔에 숙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해 왔다. 동양인의 얼굴도 까만 머리칼도 흔하지 않은 도시다. 해진은 일단 흔적만 남긴다면 얼마든지 추적하기 쉬운 상대였다.
그걸 들은 뒤로는 라일은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경호원들이 주인을 돈으로 매수해 열쇠를 얻어내기도 전에 먼저 여기까지 올라왔다.
자신도 왜 이리 급히 움직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일 스스로도 자신이 놀라운데 오히려 침입을 받은 해진은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저 덤덤하고 텅 빈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
건조한 공기가 온통 목구멍으로 쑤셔박혔는지 이상하게 목이 탔다.
“적당히 하고 돌아와.”
돌아오라니.
해진은 멍하니 흘러가는 머릿속으로도 반발심을 느꼈다. 거긴 해진의 집이 아니었다. 그의 따사로운 집은 진작에 처참하게 모르는 사람 손에 넘어갔다. 그런데 어찌 그곳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이란 말인가.
며칠이나 굶었다가 몸을 녹이지도 못한 채 잠들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이라 해진은 도무지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긴 내 집이 아니야.”
“…….”
분명 눈이 마주치고 있는데도 라일은 해진이 저를 보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페로몬이 쌓이다 못해 뇌를 찔러 대고 있었다. 이 방에 들어선 순간 시작된, 무저갱처럼 끝 모를 갈증에 라일은 머리가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원하는 게 뭐야. 말해.”
으르렁거리듯 흘러나오는 라일의 말에 해진은 슬쩍 시선을 바깥으로 던졌다.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경호원이 근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그는 홀린 듯 내뱉었다. 너무 작아서 늦가을 밤사이로 덧없이 흘러가 버릴 만한 목소리였다.
“사라지고 싶어.”
“……미치겠군.”
라일은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의 이성이 판단하기를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초조함이 몸을 잠식한다.
어두운 방 안에 무너져 있는 해진은 너무 작았다. 그대로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래서 사라지고 싶다는 속삭임을 듣는 순간 라일은 자신이 더는 참을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성큼 녀석을 향해 다가간다. 덕분에 그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몰려드는데도 해진은 덤덤한 기색이었다. 그게 오히려 더 라일을 자극하는 바람에 그는 짓씹듯 곁에 있는 이에게 명령했다.
“데려가.”
일반인을 납치라도 하는 상황이었으나 경호원은 의문 없이 앞으로 나섰다. 해진이 제게 가까이 오는 남자를 무심결에 바라보자 경호원은 반사적으로 손을 위로 들었다. 그대로 녀석을 기절시키려는 몸짓이었다.
경호원의 움직임을 발견하는 순간 라일은 저도 모르게 제지했다.
“잠깐.”
굳어 버린 경호원이 의문의 눈길을 내보이기도 전에 라일은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리곤 침대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는 녀석을 그대로 들어 올린다.
“아.”
맥없는 소리와 함께 해진은 그의 어깨에 걸쳐졌다. 잠깐 저항하려고 버둥거렸으나 힘에서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조차 몇 번 움직이지 못하고 힘이 빠졌는지 녀석은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돌아가지.”
그래서 라일은 해진을 들어 올린 순간 헷갈렸다. 남 일처럼 제대로 버둥거리지도 않는 해진이 짜증 나는 건지, 생각보다도 더 가벼운 이 무게가 짜증 나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어서.
계약을 일방적으로 끝낸 해진은, 그렇게 거의 한 달 만에 라일의 손에 끌려갔다.
<챕터 3>
엉덩이에 닿는 푹신한 소파의 감촉이 멍한 해진의 정신을 일깨웠다. 맨 처음 라일과 계약할 때와 똑같은 응접실, 똑같은 가구였다.
결국 이 저택으로 돌아왔구나.
“…….”
설마하니 라일이 그를 직접 들어다 납치라도 하듯 끌고 올 줄은 몰랐다. 여러모로 의외의 상황에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갔다.
다만 며칠이나 굶은 몸이 몸살이라도 걸린 것인지 영 기운이 나질 않았다. 싸구려 모텔답게 난방 장치도 어째 시원찮더라니.
끌려들어 온 응접실의 문 쪽을 무의식중에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던 라일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뒤쪽에 서 있는 비서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매번 눈앞에서 명함을 버려도 무표정한 사람이었기에 해진은 그 얼굴이 퍽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계약해.”
“…….”
그놈의 계약. 라일은 왜 자꾸 해진을 찾는 것일까.
라일에게 지난 5년간 존재감이 옅었던 해진이 최근 톡톡 거슬리는 것처럼, 해진에게는 그간 저를 방치하던 라일의 이런 관심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비서는 올 때마다 조건을 늘어놓기나 했지, 특별한 사정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설마하니 피검사에 문제가 있었을까. 아니지, 만약 그런 거였다면 여기로 끌려오는 게 아니라 바로 병원으로 향했으리라.
“원하는 게 뭐야. 사라지겠다는 개소리 말고 원하는 걸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