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인생에서 고꾸라진 사람은 이따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걸 라일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자신은 그저 엎어진 자세 그대로 있고 싶을 뿐이다.
이제 와서 라일에게 이런 제 사정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양극단에 서 있는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물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를.
“저한테 왜 이러는 거죠?”
단번에 대답이 나올 거라 믿었다. 해진에게는 미처 설명할 가치를 못 느꼈겠지만 라일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고.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입을 딱 다문 채 이쪽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 일말의 틈새가 해진은 의아하다.
“……너만큼 편리한 상대가 없어서 그럴 뿐이야.”
다만 이어지는 말에 해진은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피식 흘렸다. 잠깐 흘러들어왔던 의문점은 모래알처럼 사락사락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래, 쓸 만하긴 했겠지.
해진의 절박함은 그런 식으로 표출되었으리라. 아마 열성인 자신은 히트 사이클마저 적어서 좋았을 테니까. 라일은 오메가가 오메가답게 구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러니 히트 사이클을 맞아 눅진해진 오메가 따위는 질색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저택에서 맨 처음 히트를 맞았던 날 공교롭게도 해진을 안았던 라일은 크게 불쾌해했다. 어쩔 수 없이 질척거리는 몸을 보며 혐오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안대를 썼음에도 그 혐오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뒤로 불규칙하긴 해도 몇 번이나 더 히트가 왔다. 그 기간을 라일은 철저히 피했고 해진은 약을 먹으며 버텨 내야 했다. 그렇게 히트가 끝나면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다시 그 방으로 가 라일을 받아내야 했다.
그러니 이런 그가 편리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겠지.”
덤덤하게 말하는 해진의 고개가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텅 빈 시선을 마주하는 것도 짜증 나지만 그 시선이 정작 티 나게 다른 곳으로 향하면 이번엔 갈증이 났다.
이해 못 할 제 상태를 보면서도 라일은 애써 감정을 가라앉혔다. 충동적이었으나 저택에 무작정 데려온 건 후회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드시 해야 했던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늦은 밤이라 넥타이 따윈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목 근처가 불편하다. 무언가 걸리기라도 한 듯 라일은 제 목을 더듬거렸다. 당연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라일은 이 꺼림칙하고 불길한 기분은 애써 무시했다. 그리곤 아까부터 별다른 대꾸도 없는 해진에게 차갑게 말했다.
“어차피 이따위로 떠돌다가 죽을 거면, 나한테 쓰라고.”
뜻밖에도 그건 해진에게 일종의 해답처럼 들렸다. 이 기묘한 평안의 정체가 그랬던가.
그나저나 몸이 한껏 바닥으로 끌려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부어오른 목구멍은 꽉 막힌 채 알싸한 통증을 냈다. 몸이 여러모로 한계에 부딪혀 떠오른 생각은 금방 허공으로 흩어졌다.
“진.”
대답도 없이 묘한 표정이나 짓는 해진을 보며 라일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신경질적으로 그들 사이에 놓인 테이블을 짚었다. 이상하게 저 표정 하나에 기껏 눌러두었던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앞에 계약서를 집어 던지며 라일은 계약을 종용했다. 어차피 사람을 억지로라도 데려온 이상 어떻게든 설득을 해내야 했다. 이 순간 라일에게 다른 오메가를 찾는다는 옵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태 그랬던 대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살게 해 줄 테니까, 계약해.”
“…….”
무심결에 해진은 라일이 생각보다도 퍽 뻔뻔하다는 묘한 감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자조의 웃음이 새어 나온다. 저렇게 표현할 만큼 이 저택에서의 삶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폐로 들어가는 숨이 이상하게 잘 나오지 못했다. 몸의 주인처럼 그저 그곳에 머무르겠다고 고집이라도 부리는 듯하다. 그는 제 앞에 던져진 하얀 종이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힘겹게 눈을 돌리니 천장의 샹들리에가 이상하게 부옇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아까부터 저도 모르게 해진의 속눈썹 한 가닥까지 세밀하게 관찰하던 라일은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옅은 해진의 페로몬은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채 그저 바닥으로 흘러내리기만 했다.
이상한 조급증이 인 라일은 협박이라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열었다. 혀끝에서 튀어 나가는 말이 이상하게 거칠거칠하게 느껴졌다.
“아니면 내가 널 억지로 범하길 바라나?”
해진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의 감정 소모는 너무 버겁다. 지금의 그가 버텨 내지 못하리라. 게다가 해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라일은 정말 필요하다면 억지로라도 그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여기까지 생각하니 갑자기 숨이 턱 막힌다. 그제야 자신이 정말 이 저택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곳으로 끌려왔다. 앞에는 계약을 빙자한 구속이 놓여 있었다. 종이 계약서가 그의 목을 조르기라도 하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에서는 구역질이 일었다. 뒤통수는 시린 호수의 얼음에 부딪힌 듯 차갑게 아팠다.
해진은 라일이 다시 그를 부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맨 처음 이곳에서 계약했을 때처럼.
“……진?”
이번엔 이 잔인한 말을 버텨 낼 만한 절박함이 해진에겐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해진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진!”
바닥에 충돌하는 몸에는 무서우리만큼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기절하기 직전 바라본 라일은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파리한 얼굴로 누워 있는 해진은 이따금 숨을 쉬는지 확인해야 할 정도로 고요했다.
응접실에서 그대로 쓰러진 해진을 저도 모르게 품에 들었을 땐 이미 펄펄 끓는 고열이 있었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비서가 빠르게 움직인 덕에 병원까지는 금방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라일은 오전 업무도 미룬 채 해진이 눈을 뜨길 기다렸다.
어젯밤은 충동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이렇게 업무를 미룬 이 순간조차 충동이다. 이동 시간까지 분 단위로 체크할 정도로 라일은 매사를 계획성 있게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해진과 관련된 일은 오래전부터 그의 계획과 어긋났다. 러트나 페로몬 체증이라는 건 치밀하게 시기를 계산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이런 쓸데없는 제 형질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여전히 해진은 그에게 있어서 비일상적인 존재였다.
남들과는 사뭇 다른 사고체계를 가진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 상황은 퍽 불합리하다는 걸 안다. 사실 해진에게는 이 계약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휘청이다가 길에서 객사한들, 그건 그의 인생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라일은 이 상황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해진이 그에게 이유를 물었을 땐 그 또한 해답을 찾고 싶었다. 눈앞에 일단 해진을 두면 알 수 있으리라는 가정은 산산이 조각난 지 오래였다. 그는 아직도 왜 해진과 계약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양이 된 해진을 놓아줄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상하다.
어차피 납치라는 극단적인 수를 쓴 마당에, 라일이 이대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해진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으리라. 그걸 알면서도 어쩐지 무언가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든 무시하면 그만인데 말이다.
왜 제게 바라는 게 이토록 없을까.
“…….”
공교롭게도 해진이 눈을 뜬 건 라일이 한참 복잡한 속내를 고찰할 때였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바라본 하얀 천장은 낯익었다. 익숙한 병원 냄새가 해진을 긴장하게 했다. 그러나 습관적인 긴장은 이내 허탈하게 풀어졌다.
이제 그의 가족은 병원에 있지 않았다. 병원의 문턱을 넘을 때마다 다가올지도 모르는 불행을 걱정해야 하는 일은 이제 없었다. 이미 불행에 삼켜진 사람은 이래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모양이었다. 그 자신이 지금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건 썩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건조해서 뻑뻑한 눈을 억지로 돌리며 해진은 방 안을 훑어보았다. 의자에 앉은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놀랄 법도 하지만 해진은 힘없이 시선을 돌릴 뿐이다.
물론 간호인도 아닌 라일이 아직 그의 곁에 있는 건 의외였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왜인지 이 계약을 하기 전까지는 라일은 계속 이상할 모양이었다.
그는 석상이라도 된 듯 해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팔목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옆을 보니 링거가 달려 있었다. 그에게 주사되고 있는 링거 팩에는 베르무스 제약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이상하게 눈앞의 라일보다 링거 팩의 로고가 그를 둔중하게 치고 지나갔다. 매서운 현실의 깨달음이었다. 베르무스 기업 산하의 병원에서 베르무스 제약의 링거를 맞으며 해진은 억지로 이 상황을 이해해야 했다.
라일이 먼저 원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계속 그렇게 못 본 척할 건가?”
어딘가 성난 물음에 해진의 시선이 맥없이 그쪽으로 흘러갔다. 그의 존재를 무시한 건 아니었는데 퍽 이상한 반응이었다.
벌떡 일어난 라일이 해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라일의 구두 소리와 똑똑 떨어지는 링거의 물소리를 들으며 해진은 서러움을 다시 삼켜내야 했다. 잔뜩 부은 목 때문에 그 익숙한 행동이 무척 힘들었다.
그래도 억지로 입을 열어 본다.
“삼 개월.”
“……뭐?”
“계약은 삼 개월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