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가장 좋은 건 역시 이대로 멀리 사라지는 것이리라.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해진은 금방 깨달았다.
그는 지금 제 상태가 살얼음 낀 호수 같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그 저택에서 버틸 때와는 달랐다. 기절했을 때처럼 사소한 것으로도 그는 금방 부서지기 쉬운 상태였다.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다 한들 깨어지는 아픔까지 못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차라리 라일이 건네는 거래를 받는 게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번에 그를 무작정 납치했듯이 라일에겐 얼마든지 초법적인 행동으로 해진을 강제할 방법이 있었다. 연고 없는 그의 존재가 법적으로 사라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사라지는 건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더 아파야 하는 건 못내 두려웠다.
그러니 이 현실에서 라일이 제시하는 계약은 그야말로 해진을 보호하는 장치나 다름없었다. 몇 번이고 도망만 치다가 겨우 돌아본 계약서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왜 삼 개월이지.”
“별 이유는 없습니다.”
“너무 짧아.”
“짧지 않아요. 그때까지 못 구하는 건, 그쪽의 능력 부족이죠.”
“…….”
다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해진은 한정 없이 그곳에 잡혀 있고 싶지 않았다. 오만한 라일의 성질을 건드리는 말을 부러 입에 담았다. 오기로라도 그의 의견에 승낙해 주길 바라며. 까슬까슬한 입술이 그사이 찢어져 피 맛이 났다.
약간의 고통을 감내한 뒤 평안을 기다리는 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향이었다. 손목에 매달린 링거가 꼭 라일과 몸을 섞을 때처럼 그를 묶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후……. 그러지.”
눈을 뜨자마자 텅 빈 얼굴로 천장만 보던 해진은 분명 눈앞에 있는데도 금방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페로몬이 뇌까지 침범하다 못해 그의 눈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대뜸 그렇게 피해 다니던 계약까지 승낙한다고 하니 라일은 슬며시 긴장되었다. 바라 마지않던 상황인데 해진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무슨 속내인지 자못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쓰러진 녀석을 기다리며 라일은 나름대로 제 몸 상태에 대해 분석도 해 본 참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한 가지 페로몬만 해소에 이용하다 보니 굳어져 버린 건 아닐까. 그러면 일단 해진을 저택에 들인 뒤 서서히 다른 페로몬으로 중화하면 되리라. 앞으로는 조금 귀찮아도 너무 한 계약만 유지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러니 어쨌든 조건부라도 승낙하는 편이 이롭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삼 개월이라는 단어가 까슬까슬하게 고막에 박혀서 무척 거슬렸다.
“그리고 예전처럼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조항이 필요합니다.”
해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를 자극하는 말을 쏟아냈다. 삼 개월조차 보장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라일은 갑자기 서늘한 겨울 공기가 병실 안을 침범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안 돼. 기한은 꼭 채워.”
“그 조항이 없다면 계약서가 제게 무슨 의미가 있죠?”
“…….”
파르르 흩어지는 목소리였으나 그 내용은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라일은 아까부터 거슬리는 저 입술을 바라보았다. 툭 터져 나와 밴 피가 어두운 병실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싫다면 그냥 묶어 놓고 강제로라도 하세요. 그쪽이 제안했던 것처럼.”
그 거칠거칠한 작은 입술에서 나온 소리가 이상하게 라일의 심장을 찔렀다.
제가 뱉은 말이 저렇게 잔인한 어조였던가.
“……그 조항은 이번에도 넣도록 하지.”
어쩔 수 없이 라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밤사이 난리를 친 게 무색하지 않은 성과였다. 일단 지금은 이 정도로 물러날 때라고 판단했다.
“쉬도록 해.”
짧게 내뱉은 그는 미련 없이 뒤로 돌았다. 볼일이 끝났으니 더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지금까지 뚜렷한 목적 없이 이 병실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
스르륵 닫히는 병실 문을 보면서 해진은 깊게 깊게 제 속으로 침잠했다.
조항 하나까지 따지고 들었으나 계약서는 늘 그랬듯 그를 지켜 준 적이 없었다. 삼 개월이라는 기간 또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라일에게는 그때 가서 얼마든지 말을 바꾸어 해진을 억류할 힘이 있었다.
라일이 먼저 원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이번처럼 어설픈 행보로는 소용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 그리고 왜인지 라일은 당장 그를 놓아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는 덤덤히 생각했다.
이 저택에서 나가려면 다음엔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그리고 해진은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
“계약서를 준비해. 조건은 마지막으로 해진에게 제시했던 걸 전부 넣어. 기간은 3개월.”
기간이 이렇게 짧게 설정된 이상 제시했던 조건을 모두 지킬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해진은 솔직히 말하면 그가 제시하는 모든 물질적인 부분엔 관심이 없었다. 계약의 끝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래서 더 오기가 난 나머지 라일은 필요 이상의 보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주어진 것들이 실감 나지 않아서 저리 초연한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손에 쥔 것들을 깨닫는다면 포기하기 힘들어질 테지.
“시가지의 빌딩 소유권과 레인 타워의 펜트하우스를 여전히 포함합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묵묵히 라일이 말하는 조건들을 메모하던 비서가 잠시 멈칫했다. 3개월로 단축된 기간을 고려한다면 지나치게 과한 처사였다. 대도시 헤비레인의 시가지는 돈이 있어도 땅이나 건물을 사지 못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해진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도록 조항을 짜라고 했을 때 비서는 조언해야 했다.
“해당 조건들은 삼 개월의 계약 기간을 채우는 경우로 한정하시죠. 약속된 금전적인 보수는 그 경우에도 변함없이 지급하시고요.”
“……그렇게 해.”
그제야 조금 감정적인 대응을 했다는 걸 깨달은 라일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메모하는 비서 앞에서 그는 계속 텅 빈 병실을 훑던 해진의 눈길을 떠올렸다. 건조하기가 사막의 공기 같은 페로몬과 시선이었다.
“그리고 외출할 때 행선지를 반드시 알리도록 조항을 짜 놔. ……위치 추적기가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따로 보고하도록.”
“네. 회장님.”
에둘러 말했으나 비서는 단번에 알아듣고 메모를 이어 나갔다. 이번에 해진을 쫓으면서 있었던 일들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저번 계약엔 왜 개인 생활비 조항이 없었지?”
“일단 브라이트 씨의 양친에게 들어가는 병원비가 적지 않은 액수였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저택 안에서의 생활은 부족함 없이 지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요.”
“그랬지.”
“그럼에도 혹시 생활비 문제가 불거진다면 그걸 구실로 새롭게 계약을 유리하게 끌어오려고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그렇군.”
문득 변호사 하나 없이 계약서에 사인하던 작은 손이 불쑥 떠오른다. 미미하게 떨리는 그 하얀 손을 자신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생활비 조항을 넣을까요? 이번엔 병원비 지급이 주목표가 아니라서 불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그래. 그때와는 다르니 신경 쓸 것 없겠지.”
어차피 저택에서의 생활은 불편함이 없으리라. 라일은 까만 광택이 나는 책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 짜증 나는 거슬림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가.
그때 메모를 끝마친 비서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라일이 기어코 해진과 재계약을 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미뤄 두었던 보고 몇 가지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몸이 건강한 오메가를 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일단 가장 먼저 비서의 머리를 스친 건 얼마 전 했던 해진의 피검사 내용이었다. 회장은 페로몬이 옅고 건강한 오메가를 원했다. 상대에게 건강 문제가 생겨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걸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진은 이제 여러모로 라일이 지금까지 고수하던 조건에 적합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 의중이야 어찌 되었든 일단 해진의 몸 상태는 관련 사항이 되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보고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런데?”
“일단 저번 피검사 결과 영양실조가 위험한 수준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이번에 병원 신세를 졌을 때도 비슷했고요.”
“……영양실조?”
“네. 이번에 입원한 병원에서도 여러 문제를 알려 왔습니다. 그러니 지금 브라이트 씨는 계약을 진행하기에 적합한 몸 상태는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괜찮으시다면 다른 건강한 오메가를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이 말을 길게 꺼내며 비서는 라일의 기색을 신중하게 살폈다. 그는 어차피 고용주의 말을 성실하게 실행하는 사람이지, 가치 판단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회장의 가치가 바뀐다면 저 또한 우선순위를 새롭게 짜면 될 일이었다. 이번에 결정되는 사안을 토대로 저번부터 묘하게 어긋나는 듯한 라일의 심중을 새롭게 이해하면 될 듯싶었다.
한편 비서가 하는 말을 들으며 라일은 아주 기가 찬 심정이었다. 해진이 그의 저택을 떠나 있던 건 고작 한 달이 안 되는 기간이었다. 그사이 대체 몸을 어떻게 굴렸기에 영양실조란 말인가.
“설마 약이라도 손댄 건가.”
세상 텅 빈 표정이나 비틀거리는 몸을 보면 의심스러웠다. 갑작스럽게 해진의 행적을 추적해야 하는 건 아닌지 짜증이 치솟았다. 그사이 어떤 새끼를 만나서 엉겨 붙었을지 어찌 안단 말인가. 단순히 찜찜함을 떠나 불쾌한 심정마저 라일을 감쌌다.
그러나 그의 오해를 불식하듯 비서는 다른 자료를 건네며 덤덤히 첨언했다.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