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16화 (16/101)

#16

“이건……?”

“브라이트 씨의 병원 기록을 간추려서 모아 둔 겁니다. 보시면 저택에서 생활할 때부터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던 걸로 추정됩니다. 섭식장애 쪽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해진은 몰랐으나, 그의 병원 진찰 기록은 착실하게 라일의 비서실로 보고되고 있었다. 건강 문제로 라일의 스케줄이 어그러지면 안 되기 때문에 비서가 알아서 관리하던 것이다. 그는 늘 베르무스 산하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어차피 병문안을 위해 자주 방문했기 때문이다.

“해당 문제가 지속된다면 보고드리려고 모아 두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병원 기록들은 당장 계약 이행에 방해될 정도로 위중한 사안은 아니었기에 비서는 그저 때를 기다렸다. 이 정도의 미미한 사안을 라일에게 보고했다면 전부 ‘쓸모없는’ 정보로 분류되었을 테니까.

“…….”

비서가 건네는 그간 해진의 행적을 본 라일은 그만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고 말았다. 베타인 비서는 못 느꼈겠으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제어하던 페로몬이 다 왈칵 쏟아질 정도였다.

어째 매번 마른 몸이 거슬린다 했더니 결국 이 모양이었다. 짜증스럽게 서류들을 넘기며 라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반응을 유심히 보면서 비서는 객관적인 견해를 제시해 보았다.

“어쨌든 장기 계약에는 적합한 분은 아니신 듯해 말씀드립니다.”

그 말을 무시한 라일은 계속 서류의 내용을 살폈다. 비서가 준비한 요약본을 넘어 언제 무슨 일로 해진이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지 세세한 기록들까지.

기록에 따르면 몸이 아주 약간 안 좋아도 해진은 병원에 잘 갔다. 아마 병문안을 주기적으로 가니 접근성이 좋았던 덕도 있으리라.

그 세심한 발자취를 보면서 라일은 무언가 또 어긋나 있다고 느꼈다. 이렇게 꼬박꼬박 병원은 갈 줄 알면서 왜 정작 몸은 그렇게 마를 때까지 방치했다는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보에 인상을 쓰던 그는 비서가 한쪽에 치워 두는 서류에 문득 눈길을 주었다.

“그건 또 뭐야.”

“아, 그건 이번 병원 입원 시 나온 진단 기록입니다.”

비서가 빼 둔 서류를 홀린 듯 가져온 라일은 이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의심과는 다르게 해진의 약물 검사 등은 깨끗했다. 다만 그저 한없이 몸 상태가 엉망일 뿐.

게다가 뜻밖의 사실까지 그의 눈길을 잡아챈다.

“……진의 다리에 문제가 있었나?”

“네. 사고 후유증입니다. 초기 계약 당시에도 확인했으나 계약 이행에는 지장이 없어서 넘어가셨습니다.”

보고는 들었으나 중요하지 않아서 잊은 모양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왼쪽 발목이 박살이 났다가 수술로 회복된 모양이다.

그 부분을 라일이 유심히 보자 고민하던 비서는 좀 더 덧붙여 말했다. 해진 대신 의사를 만났을 때 들었던 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괜찮지만, 무리하면 안 되는 상태라고 하더군요.”

“…….”

그 순간 라일의 머릿속에는 일부러 한쪽 다리를 끌며 저항하던 해진의 모습이 재생되었다. 그가 녀석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저택 안으로 끌어당길 때의 일이다.

만약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면.

분명 그때 해진은 왜인지 도시를 헤매고 있었다고 했다. 병문안을 가겠다고 저택의 차도 둔 채로 홀로 나갔다고. 그렇다면 필시 무리를 했을 것이다. 정말 일부러 반항하듯 군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주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라일은 천천히 손을 들어 넥타이를 고쳐 맸다.

아무리 매듭을 매만져도 이상하게 목이 답답하다.

***

늦은 밤 저택으로 돌아간 라일은 서재 의자에 깊게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 일정이 어그러진 탓에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잠깐 충동을 부린 것치곤 꽤 번거로운 대가를 치른 것이다.

잠에 빠지기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다. 저택의 일은 대부분 집사에게 일임했으니 이제 해진이 돌아올 것을 알려줘야 했다.

“……브라이트 씨가 말입니까?”

“그렇게 됐어. 준비해 두도록.”

“네. 방은 어떻게…….”

그저 한 마디로 끝날 명령이었는데 집사의 질문이 퍽 이상했다. 어차피 지난 5년간 해진이 살던 방이 있으니 그 주인만 돌아오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일은 문득 녀석의 방이 퍽 외진 곳이었다는걸 떠올렸다.

거긴 해도 들지 않고 저택의 주요 시설과는 너무 멀었지.

“진의 방 상태가 안 좋은가?”

“저기, 그게……. 전부 정리했습니다.”

방 상태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처분했다는 소리가 의아했다. 라일은 금방 침실로 떠나려던 몸을 내리눌렀다. 집사의 안색이 아까부터 퍽 불편해 보였다.

“난 그런 명령은 한 적이 없는데.”

“죄송합니다.”

집사는 즉각 허리를 숙이며 잘못을 빌었으나 라일은 손을 한 번 휘젓고 말았다. 불쑥 이상하다는 생각에 말하긴 했으나, 사실 해진의 방을 유지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최근 들어 라일의 심기도 무척 불편했으니 사소한 문제는 임의대로 처리했으리라. 그는 적당히 이 상황을 흘려들었다.

“그……, 사실 정리랄 것도 없는 것이, 어차피 물건 대부분은 브라이트 씨가 개인적으로 처분하셔서…….”

“……그래?”

다만 피곤함에 이 상황을 대충 흘리는 라일과는 다르게 집사는 바짝 긴장했다.

베르무스가의 총 집사로서 자부심을 가진 그는, 최근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무척 신경 쓰고 있었다. 그의 친척을 운전사 자리에 몰래 앉힌 것도 문제인데 하필이면 그놈이 사고를 쳐 버린 것이다.

아무리 우습더라도 그 오메가가 병원에 가는 건 계약에 명시된 사항이었다. 집사는 그 조건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웬일로 해진이 저를 찾는다는 걸 귀찮아서 무시했는데 설마하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마지막은 그로서도 영 기분이 찜찜한 결말이 나지 않았던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부모의 죽음까지 빠르게 알리지 않은 게 큰 실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무슨 생각인지 아무 말 없이 그만두고 나가서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설마, 돌아오다니.

사실 해진의 방에 남아 있던 물건들은 이미 사용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가져가 버렸다. 본래 사용인들이 본격적으로 해진의 물건에 손을 대는 건 알고 있었으나 집사는 그저 묵인했다. 어차피 그의 선에서 해진에게 지급하는 물건들이었고, 고작 창부 같은 놈에게는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급품도 많았으니까.

다만 그 정도로 그쳤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그간 도둑질에 맛 들인 사용인들이 해진이 떠난 걸 알자마자 일을 쳐 버렸다. 이 또한 베르무스가의 저택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제 와 관련자를 색출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들의 범행 동기를 설명하려면 집사의 오랜 묵인 또한 수면 위로 떠오를 테니.

그러니 무조건 숨겨야 한다. 가능하면 그 오메가가 입을 열기 전에 다시 저택을 제 발로 나가면 더 좋을 터.

“그럼 새로 준비할 것이 많겠군.”

“네, 그렇습니다. 어차피 다시 쓸 만한 상태도 아니어서……. 방은 그대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오해하고 또 혐오감을 느낄 만한 말을 던지니 과연 그의 주인은 크게 인상을 썼다.

가장 최근에 새 오메가를 직접 준비시켜 방에 몰아넣었던 집사는, 평소처럼 옷을 벗기려 하자 욕설을 내뱉던 오메가 놈의 얼굴을 떠올렸다. 최근 이 저택에 방문하는 오메가들이 전부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궁여지책으로 해진을 다시 데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라일은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아니. 방 위치를 옮기지.”

어차피 전부 새로 준비해야 한다면 굳이 그 방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방 위치를 옮기는 것도 고집할 필요가 없었으나 라일은 그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회상할 뿐이었다.

구석진 제 방문 앞에서 비에 쫄딱 젖어 있던 녀석의 모습을.

“본관에 있는 손님방을 주도록 해.”

“……본관 말씀입니까.”

본관은 라일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손님방은 당연하지만 베르무스가의 중요한 손님이 묵는 곳이다.

그의 말을 들은 집사가 황망히 되물었으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차피 베르무스 본 저택까지 모셔야 하는 중요한 손님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어차피 남는 방을 해진에게 준다고 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문제 있나?”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집사의 반응이 어째 이상했다. 아까부터 무언가 톡톡 거슬리듯 그를 자극하는데, 마땅히 짚이는 곳은 없어서 라일은 그저 집사를 바라보았다.

문득 해진의 무척 마른 몸이 떠올랐다.

“그런데, 진이 밥을 많이 걸렀다던데.”

태연한 그의 질문을 들으며 집사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혹시 그 오메가가 무언가를 나불거린 건 아닐까.

조금씩 라일의 눈치를 살피며 최대한 변명이 될 만한 말을 입에 담았다.

“아무래도 브라이트 씨가, 식사를, 잘 안 하시는 편이라…….”

보아하니 예상대로 해진은 퍽 입이 짧게 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라일은 여전히 의문을 가졌다. 아무리 손님이 까탈스럽게 군다고 한들, 그걸 관리하고 맞추는 게 집사의 역할 아니던가.

“그럼 잡아 놓고라도 먹였어야지. 취향이 있다면 맞춰 주고. 그렇게 손님을 대접하는 게 네 역할 아닌가?”

“그, 그것이…….”

집사가 금방 곤란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걸 보면서 라일은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그의 선친 대부터 이 저택에서 일했던 집사는 가끔 이렇게 거슬리게 굴 때가 있었다. 아직도 라일의 어릴 적만 기억하면서 저택 문제는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려고 구는 경우가 왕왕 있었던 것이다. 그런 행동은 이따금 주인의 권위를 미세하게 침범하기도 했다.

라일은 그걸 알면서도 묵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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