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거대한 저택은 대를 이어 내려온 오래된 곳이었다. 덕분에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는 중요한 부분들이 꽤 산적해 있었다.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사임한 전 집사를 제외하면 그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었다. 전 집사가 후임으로 점찍어 놓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라일이 이 허울만 좋은 저택에는 별다른 미련이 없다는 게 제일 큰 이유였다. 그의 부모가 어처구니없게 죽어 발견된 곳도 이 저택이다. 저택을 차지하고 있는 게 베르무스가를 장악한 사람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도시의 펜트하우스로 거처를 옮겼으리라.
어쨌든 이번만큼은 집사의 행동이 거슬릴 정도로 도를 넘었다. 특히나 해진과 관련한 실수가 너무 잦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라일은 가차 없이 그 사실을 지적했다.
“저번부터 실망하게 하는군.”
“……죄송합니다.”
집사는 얼른 허리를 숙이며 베르무스가의 젊은 주인에게 충성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걸 묵묵히 내려다보던 라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묘한 찜찜함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
며칠이 지났다.
아직 머리가 조금 무겁지만 라일은 꽤 바쁜 일정들을 소화해 냈다. 그는 자신의 건강 상태에 따라 주가가 요동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조금 불편해도 숨기며 생활하는 데는 익숙했다.
다만 오늘은 회장실에 중년 남성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알파인 그는 아까부터 불편한 낯을 숨기지 않은 채 일에 몰두하고 있는 라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후…….”
그러거나 말거나 급한 일을 끝마친 라일이 드디어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잊고 있었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남자가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이 녀석, 어른을 이렇게 모셔 두고…….”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제가 모신 게 아니라 멋대로 쳐들어오신 거 아닙니까. 제 비서 한 명까지 매수해 가면서.”
“…….”
다니엘 베르무스는 두툼한 턱을 움찔하며 라일의 기색을 살폈다. 그저 숙부라는 관계를 이용해서 억지로 찾아온 듯 꾸몄는데 그가 비서를 매수해 놨다는 건 또 어찌 알았다는 말인가.
그를 향해 건방지게 턱짓하는 라일을 보면서 다니엘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 어린 녀석이 이렇게나 성장할 줄이야.
라일의 아버지이자 그의 형이 갑작스럽게 죽고 난 뒤 다니엘은 잠깐 큰 꿈을 꾸었다. 아직 어렸던 라일을 대신해서 이 거대한 베르무스가의 주인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속도로 성장한 라일은 금방 그의 자리를 치고 올라왔다. 막대한 유산 상속 소송 끝에 다니엘은 패배했다. 그날 이후로 라일은 이렇게 줄곧 시건방진 태도를 고수하고 있어 다니엘은 더욱 화를 삼키지 못했다.
“용건은요?”
피곤하다는 듯 라일은 미간을 문질렀다. 앞에 앉은 다니엘은 그야말로 금방 터질 것처럼 시뻘건 얼굴이었다. 그나마 바로 내쫓지 않고 이렇게 상대를 해 주는 게 친족에 대한 예의라는 걸 왜 모를까.
어쨌든 베르무스의 일원답게 다니엘은 금방 제 표정을 수습했다. 그리곤 이내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라일을 떠보는 말을 던졌다.
“요새 저택으로 오메가를 많이 불러들인다는 소리가 있더구나.”
순식간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바쁜 사람의 집무실에 찾아와 고작 하는 얘기가 이런 것이라니.
친족 회의에서 라일의 이런 상태를 신경 쓰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구심점이 될 적통 후계자를 원하는 건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과연 그게 이렇게 연락도 없이 쳐들어와서 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말인지 라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그 혐오증은 좀 나아진 게냐.”
“신경 끄시죠. 할 말이 그게 다면 나가세요.”
“네 녀석은 정말…….”
열등감으로 가득한 그의 숙부는 때로 제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욕심을 내곤 했다. 그의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패배하더니 아직까지 이렇게 욕심에 휘둘린다.
더는 참아 줄 수 없었던 라일은 즉시 경호원을 호출했다. 그가 호출한 게 뭔지 알아챈 숙부는 벌떡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끌려 나가기 전에 먼저 제 발로 사라졌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알파 같은 그 모습에 라일은 혐오스러운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회장님.”
“들어와.”
나가는 숙부에게 간단하게 인사한 비서가 그를 불렀다. 책상으로 돌아가려던 라일은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아까 일을 일단락하긴 했으니 잠깐 머리를 식힐 요량이었다.
“매수된 비서는 해고해.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찾아오는 짓은 못 하게 하도록.”
“접근을 완전히 막습니까?”
“아니, 약속을 잡게 해.”
“알겠습니다. 매수된 쪽은 좀 전에 사직 처리해 두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끓어올랐던 감정을 내리눌렀다. 부모님의 장례식에 와서 그를 먹음직스러운 음식이라도 된 양 바라보던 친족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혐오는 그가 가장 잘 떠올리는 감정 중 하나였다. 주변 환경이 그렇게 이끌었기에.
그 뒤로도 비서는 숙부 앞이라 함부로 내보일 수 없었던 중요 안건들을 보고했다. 라일은 적절한 지시를 내리며 오후 일정을 고민했다.
그때 비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무언가를 확인한 비서가 제 업무용 서류철에 메모를 남겼다.
“무슨 일이지?”
“아, 브라이트 씨의 퇴원일이라 차를 보내려고 합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잔잔한 파동이 라일을 훑고 지나갔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오늘, 빗방울이 집무실의 큰 창을 다닥다닥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해진은 그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얌전히 있다는 보고는 이따금 들었는데 오늘이 퇴원이었군.
“같이 가지.”
“네?”
놀란 듯 되묻는 비서를 보며 라일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은 또 충동으로 가득했다.
“퇴근하면서 데리고 가지. 병원이 이 근처니까. 계약서 마무리도 있고.”
그러나 이번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저택으로 가는 길목에 병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어차피 해진과의 계약을 마무리 지으려면 오늘 얼굴을 한 번 맞대기는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한 번 되물었던 비서는 이내 의문을 지우고 충실하게 대답했다. 창밖의 거센 빗방울에 시선을 던지면서 라일은 이 충동을 애써 무시했다.
***
“…….”
“…….”
숨 막히는 정적이 차 안을 지배했다. 분위기를 간파한 비서는 종종 뒷좌석의 눈치를 살피며 손에 든 태블릿을 조작했다. 라일의 일이 끝났다고 해서 그의 일까지 끝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퇴원 후 차가 온다는 소리에 기다리고 있던 해진은 그 안에 라일이 있어서 잠깐 당황했다. 다만 조수석의 비서를 보며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얌전히 올라탔다.
페로몬 해소를 할 때가 아니면 마주친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나마 페로몬 해소도 얼굴을 맞대며 한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라일의 페로몬은 늘 잘 갈무리되었다. 덕분에 해진은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는 페로몬을 조절한다거나 그 느낌을 읽는 것엔 서툴렀다. 베타밖에 없는 집안에서 성인이 다 되어서야 겨우 열성으로 발현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자동차는 별 탈 없이 저택에 들어섰다. 차에서 내려서면서 해진은 문득 해방감을 느꼈다. 뒤에서 그 페로몬을 라일이 유심히 읽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가시죠.”
비서가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마중 나왔던 집사도 방을 안내하기 위해 그 옆에 동행했다. 라일과 함께 온 해진을 몰래 살피는 집사의 눈길에는 미미한 경악이 서려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다시 긴 침묵의 길이 시작되었다. 치료를 받았다지만 오랜만에 걸어서 그런지 다리가 조금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더 쑤시는 것도 사고 후유증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다리를 끄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해진은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 문득 다리를 향한 시선이 느껴져서 옆을 돌아보았다.
“……?”
그러나 옆에 있는 라일은 묵묵히 앞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해진은 연이어 의아함을 느꼈다. 제가 원래 있던 방도 아니고 응접실도 아닌 곳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번도 간 적 없는 본관 쪽이었다.
그곳에 있는 커다란 손님방 앞에서 라일이 문득 말했다.
“앞으로 이 방을 쓰도록 해.”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서니 꽤 신경 쓴 듯한 방의 내부가 드러났다. 환한 내부와 밖이 잘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인상적이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물을 바라보던 해진은 뭔가 석연찮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굳이 이 저택으로 향하는 차를 탈 때부터 말이다.
“…….”
방에 들어서며 라일은 무심코 해진의 표정을 살폈다. 의아함을 담은 그 표정을 보면서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이내 창밖까지 한 번 훑어본 해진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짧게 드러났던 흥미는 덧없이 흩어졌다.
그 얼굴이 또 금방이라도 텅 비어 버릴 것 같아서 라일은 문득 초조함을 느꼈다.
“계약서입니다.”
안내를 마친 집사가 돌아가자 비서는 방에 딸린 작은 응접실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개인 화장실만 겨우 딸려 있던 이전 방을 기억하는 해진은 어색하게 그곳의 소파에 앉았다.
부드러운 천이 손끝에 스치니 더욱 어색하기만 하다. 너무 넓어서 화장실까지는 한눈에 닿지도 않는 좋은 방을 굳이 왜 자신에게 주는 걸까.
어차피 무슨 방이든 그에겐 상관없긴 했다.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다면 이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