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꼭 이 저택에 계속 머물러야 합니까? 저번에 빌려 둔 방도 멀지 않아 괜찮을 텐데.”
가볍게 말을 꺼낸 해진은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짐을 다 버리고 나왔던 허름한 단기 룸과의 거리를 가늠이라도 하듯이. 오늘따라 유리창을 다독이는 빗소리가 퍽 거세게 느껴졌다.
말을 하고 보니 퍽 좋은 생각처럼 느껴졌다. 맨 처음 계약할 때야 이 자리가 무척 절실해서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 다른 생각도 떠올려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마지못해 계약에 응하긴 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휘둘리는 짓을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해진의 말을 듣는 순간 라일은 밖의 거센 빗줄기가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눅눅하고 거대한 불쾌함.
“안 돼.”
“하지만…….”
“진, 이 저택에 있는 게 조건이야.”
“…….”
저도 모르게 강하게 내뱉고 난 뒤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어느새 해진의 텅 빈 눈길이 그를 향한다. 이 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미약하게 진동하던 그의 페로몬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파르르 흩어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기대 따윈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짐은 이미 챙겨 놨으니, 허튼 생각하지 마.”
밖이 이리도 습한데 목구멍 안쪽은 말라붙어서 쩍쩍 달라붙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러나 그 모든 걸 애써 무시한 라일은 그저 녀석을 압박할 따름이었다. 그런 건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이.
거센 라일의 말투에도 해진은 그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동의했을 뿐이다.
저를 비켜 나가는 그 시선을 왜인지 잡아채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올라왔다. 그러나 최근 이런 충동에 익숙해진 라일은 가까스로 그걸 내리누를 수 있었다.
곁에서 둘의 이야기를 지켜보던 비서가 슬쩍 눈치를 보고는 해진의 옆에 펜을 내려놓았다.
아무 말도 없이 그는 제 앞에 놓인 종이를 들었다. 방금 제 제안이 거절당했으니 무어라 한마디 할 법한데도 말이다.
열성인 해진은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가 사락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진득하니 긴 계약서를 읽는 동안 옅은 페로몬이 방 안에 희미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페로몬이라면 응당 담고 있는 미약한 감정이 왜인지 그에게는 없었다. 그저 한없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기만 하는 무미건조한 체향.
라일은 왜인지 아까보다도 한층 이 방 안이 건조해졌다고 느꼈다.
“보상 방안은 5페이지에 자세히 적어 두었습니다.”
“…….”
그 뒤로도 비서는 라일을 대신해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다. 그 모든 설명에도 해진은 그저 계약서를 한 장 한 장 넘길 뿐이다.
서류를 들고 있는 하얀 손을 라일은 무심코 쳐다보았다. 작고 힘이 없었지만 흔들림 없이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는 손이다. 그가 기억하는 손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는데.
서류를 무심히 내려다보는 그 눈길이 이상하게 성의가 없다는 생각이 들 무렵, 계약서 중간에서 멈춘 해진은 그대로 서류를 내려놓았다. 원하는 조항은 찾았으니 더 볼 필요도 없다는 태도였다.
비서가 말한 보상 방안은 해진이 멈춘 바로 뒷장이었다.
그대로 서류를 내려놓은 해진은 펜을 들었다. 그리곤 서류의 서명란을 톡톡 두드리며 무언가 생각을 정리한다. 끝까지 읽어 보지도 않는 저 무모함에 라일이 인상을 쓰자 해진이 불쑥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걸 할 때, 제 손을 묶는 건 수갑으로 바꿔 줬으면 좋겠는데요.”
“……뭐?”
무얼 말하는지는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묶지 말라는 소리도 아닌 이상한 제안에 라일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 표정을 살피던 해진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 라일은 저도 모르게 등줄기를 긴장시켰으나 정작 해진은 피곤하게 눈을 내리깐 탓에 그의 동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적어도 혼자 준비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집사 앞에서 옷을 벗고 싶지 않습니다.”
“뭐, 라고……?”
그 순간 라일을 덮친 건 깨달음이었다.
집사가 해진의 양손을 묶는 건 알고 있었다. 라일이 간과한 사실은 그 상태로 해진이 옷도 벗으려면 필연적으로 집사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그간 관심이 없던 라일은 그저 편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일전에 해진 대신 이곳에 왔던 열성 오메가가 옷을 입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를.
지금까지 알파인 집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해진을 벗기고 묶도록 만든 꼴이었다. 그리고 볼품없이 꼼짝도 못 하는 녀석의 수습마저 그런 수치 속에서 이루어졌을 테지.
다름 아닌 라일 그 자신이 명령한 결과였다.
“안 됩니까?”
“……그러지.”
아까부터 저 눈길을 잡아채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던 라일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곤란하게 시선을 돌렸다. 왜인지 똑바로 해진을 마주 보기가 거북했다.
분명 녀석이 뭘 감내하든 그가 알 바 아니었는데, 왜 이제야.
급기야 창밖에서는 천둥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그에 맞춰 거센 빗줄기가 한층 창문을 매섭게 내리쳤다. 숨만 들이쉬어도 비 냄새가 나는 날이다. 그런데도 라일은 슬쩍 입가를 가린 채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부터 버거울 정도로 목이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의 대답을 들은 해진은 덤덤히 펜을 들어 서류에 사인했다. 저 손이 덜덜 떨리던 순간이 그 위에 겹쳐 보였다.
“……계약이 성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계약서를 끝까지 보지도 않는 해진을 마찬가지로 신경 쓰던 비서가 머뭇거리다 선언했다.
해진은 여전히 막대한 보상 쪽에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였다.
***
찜찜함이 남았는지 비서는 서류철을 잘 갈무리해서 직접 해진에게 건네주었다. 시간이 날 때 뒷부분을 꼭 보라는 정중한 말과 함께. 그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위아래로 흔들리는 그의 고개는 깃털보다도 가벼웠다.
볼일이 끝났으면 나와야 한다. 그런데도 라일은 어쩐지 제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다고만 느껴졌다. 의아한 해진의 시선을 뒤로 맞으며 방을 나서자, 먼저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그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회장님.”
“…….”
대답은 없었으나 오래 라일의 곁에서 일한 비서는 그게 무언의 긍정임을 알았다. 마치 아까 해진이 힘없이 그들을 외면함으로써 무언의 긍정을 했던 것처럼.
잠깐 앞으로 할 말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지 가늠하던 비서는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라일과 베르무스의 이익을 위해 못 할 게 없는 자신이라도 해진에게 부채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초법적인 영역을 간혹 오가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베르무스 기업의 기본은 법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납치까지 당한 해진은 동의할 수 없겠으나 그래도 이렇게 끝까지 계약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해진이 파악한 것처럼 너무 큰 힘의 격차 앞에서는 오히려 이런 계약이 보호막이 된다. 계약을 빌미로 약자를 핍박하는 건 어중간한 격차 앞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베르무스는 이런 종이 증거 따위 남기지 않고 해진을 휘두를 힘이 차고 넘쳤다.
그러니 방금 해진의 지난 5년간의 단면을 본 비서는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는 특히나 성별이 더 명확히 구분된 베타이기에, 이런 추행이나 마찬가지인 일에는 다소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나 계약은 해진과 라일 사이의 문제였으니까.
“그런 방법까지 종용하는 건 과한 처사입니다. 늦게 발현했다고는 하나 오메가이시니까요.”
말을 꺼내면서도 비서는 유심히 라일의 표정을 살폈다. 회장은 아까부터 어딘가 갈급한 얼굴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게 꼭 도망이라도 치는 느낌이라 비서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알아.”
뜻 모를 긍정에 비서는 인상을 썼다. 라일이 알고도 그런 건지 이제 알아차린 건지 무언가 모호하다. 그러나 둘 중 무엇이든 사실 상관없었다. 그의 상사는 고작 이런 걸로 가책을 느낄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비서는 덤덤하게 혹 놓치고 있을 만한 점을 짚어 보았다. 어차피 그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였다. 그의 말을 라일이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비서가 취해야 할 태도가 조금 더 명확해지리라.
“조금 적응하실 시간을 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직 건강 문제도 있고요.”
그러나 그 순간 라일이 급히 옮기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비서의 다리가 꼬일 만큼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진의 몸은, 아직도 좋지 않나?”
“당분간은 영양 섭취가 중요하고 과격한 움직임은 삼가는 게 좋다는 의사 소견입니다.”
불쑥 손을 들어 올린 라일이 제 입가를 감쌌다.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되는 것처럼.
그걸 지금까지 흔히 있던 두통이라고 판단한 비서가 휴대폰을 들었다. 만약 해진에게 시간을 줄 작정이라면 약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 테니까.
“괜찮으십니까? 바로 약을 준비할까요?”
페로몬을 억지로 해소하는 약이었다. 그 작용에서 볼 수 있듯이 몸에 썩 좋지는 않았다. 만약 부작용만 없었다면 이리 힘들게 오메가와의 결합을 시도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비서의 말에 라일은 눈에 띄게 흠칫 놀랐다. 번뜩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이 순간만큼은 당황을 능숙하게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어느 순간 두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
“……아.”
문득 눈을 뜬 해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요즘 들어 까무룩 잠들었다가 흠칫 놀라며 깨어나는 게 일과였다. 그만큼 하는 일이 없었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으나 라일은 그를 찾지 않았다. 그렇게 집요하게 계약서를 들이밀기에 사인하는 순간 그 방에 끌려가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