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덕분에 그저 누워서 시간을 죽이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다. 조금 더 기운이 남아 있었다면 이런저런 일을 시도했겠으나 의지가 없었다.
쓸데없이 높은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진은 멍하니 그곳의 정교한 무늬를 헤아렸다. 설득이 잘 되어 외부에서 묵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당연하지만 해진은 라일이 못 박은 조건들을 협박으로 알아들었다.
하다못해 원래 쓰던 방이라도 배정되었다면 편했으리라. 방이 너무 광활한 탓일까, 해진은 자신이 더욱더 작게 쪼그라들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원래 방은 저택의 외부로 통하는 길과 더 가까워서 좋았다. 새 방 따위 귀찮기만 한 일이다. 당장 무언가 시도할 생각은 없어도 이렇게 저택 가장 안쪽에 있으면 곤란했다.
누워 있던 해진은 손만 움직여 침대 매트리스 깊숙한 곳을 파헤쳤다. 그곳에 톡 걸리는 지갑을 꺼내 안을 살피자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사진과 약간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제자리에 숨겨 두면서 해진은 생각에 빠졌다. 그에게는 어차피 신용카드가 없었으나 있다 한들 쓸 수 없으리라. 이번에 발각된 건 아무래도 현금 인출 기계를 이용했기 때문일 테니까.
그러니 이 현금은 마지막 기회가 될 터. 당연하지만 라일이 제시하겠다고 한 물질적인 부분은 기대도 하지 않는다.
가장 좋은 건 이대로 3개월만 버티면 라일이 알아서 그를 쫓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별 힘을 뺄 필요도 없이 무사히 걸어 나갈 수 있으리라.
그러나 만약 이 계획이 어그러진다면.
그 상황을 상상하던 해진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먼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휴…….”
무심코 라일의 이상행동을 떠올린 그는 그냥 한숨을 쉬며 도로 자리에 누웠다. 갇혀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그저 무너지지 않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여전히 그 이상은 버겁다.
필요해지면 알아서 부르겠지.
다시 천장의 무늬를 따라 그릴 수 있을 때까지 눈으로 훑던 그의 귀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긴장했던 해진은 힘없이 누워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라일의 부름이라면 그가 대답하지 않아도 강제로 문을 열 것이다.
예상대로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집사였다. 웬일인지 그는 직접 음식을 올린 트레이를 밀고 있었다.
“브라이트 씨. 식사입니다.”
“…….”
해진은 무심코 인상을 썼다. 집사가 겨우 그의 식사를 직접 챙기겠다고 온 것도,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연 것도 모두 불쾌했기 때문이다.
이 저택에서 집사를 마주하는 매 순간은 모두 불쾌함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지금 되지도 않는 미소를 띤 채 방 안으로 걸어오는 모습은 더 보기 거북했다.
“식사량이 적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혹시 몰라 동향의 음식을 준비해 보았는데, 어떠신지요.”
‘천박한 오메가 주제에 말이 많군. 널 잘 벗겨서 묶어 두라는 게 주인님의 명령이다.’
“…….”
그가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 들어 올린 음식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리고 검은 머리긴 해도 이곳에서 나고 자란 해진은 당연히 뭔지도 모를 음식이었다.
“혹시 더 원하시는 음식이 있으시다면…….”
“집사님.”
아무리 불쾌해도 해진은 늘 참아야 했다. 서러움이 밀려오면 목울대를 크게 움직여 삼켜 냈다.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을 땐 이불로 입을 틀어막아 소리를 죽였다. 그러면서 같이 죽인 건 그의 마음과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서러움을 다시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이 저택을 뛰쳐나가고 싶어질 테니까.
설령 무슨 방법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네, 브라이트 씨.”
“나가 주세요.”
“그게, 일전에는…….”
“나가 주세요.”
해진은 그저 덤덤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앵무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집사가 대체 뭘 바라는지는 안다. 일전에 제가 저지른 실수를 라일에게 말하지 말라는 거겠지.
설마하니 라일이 해진의 말을 듣고 그를 처벌할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리라. 단지 그 상황이 계약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고작 제 잘못을 덮기 급급한 이의 사정 따위 해진이 알아줄 필요가 없었다.
이 저택에서 그의 사정을 알아준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집사는 모멸감으로 얼굴을 붉힌 채 물러났다. 다소 강하게 닫히는 방문 소리가 들린다. 이러니 해진은 의문이었다. 자신이 앞에서 욕을 한 것도, 그의 옷을 벗기려 들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큰 모욕감을 느끼다니.
그가 두고 간 음식에서는 거북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심지어 저 음식은 그의 양부모가 찾아다 준 해진의 뿌리와도 상관없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집사가 진득하니 흘려 놓고 간 불쾌한 페로몬까지 맡으며 뭔지도 모를 음식을 먹을 생각은 없었다.
조용히 다가가 음식 뚜껑을 닫은 해진은 트레이를 그대로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곤 비가 들이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 안에 고요한 바람 소리가 흘렀다.
비가 방 안을 침범하는 장면을 침대에서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
방을 나온 집사는 고풍스러운 복도를 걸으며 이를 갈았다. 건방진 창놈 자식이 이렇게 그의 앞에서 뻗댈 줄이야.
갓 성인이 된 해진은 조금 윽박지르는 것으로 무척 고분고분하게 굴곤 했다. 그간 라일과 계약한 오메가들이 저택에서 부리던 행패를 생각하면 아주 손쉬운 손님이었다. 솔직히 주인이나 손대는 고급 창부를 이리저리 벗기는 재미도 은밀하게 즐길 수 있었다.
물론 그간 조금 심하게 방치한 감이 없지 않았다. 다른 사용인들은 몰라도 집사는 해진이 혼수상태인 양부모의 병원비를 갚기 위해 이 저택에 온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동정심을 가져 볼까 했더니, 저렇게 시건방지게 나올 줄이야.
문득 이 저택을 나갔던 날 제 말도 무시한 채 떠나갔던 놈의 얼굴이 떠오른다. 꼴이 가여워서 조금 잘해 줄까 했더니 금방 다른 콧대 높은 오메가처럼 굴지 않는가. 예전의 해진을 생각하면 조금 어르고 달래는 걸로 금방 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와 같은 열성인 주제에 짜증이 났다. 열성 형질 따위로는 제 주인에게 그다지 도움도 되지 않을 텐데, 너무 과분한 방까지 받지 않았는가.
까드득 이를 갈며 집사는 인상을 찡그렸다. 라일이 무슨 생각으로 다시 해진을 데려왔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해진이 다시 사라지는 편이 자신의 사소한 실책도 가릴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결말이리라. 될 수 있으면 빠르게 말이다. 집사는 이것이 그의 주인을 위한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그전에 저 시건방진 태도는 조금 눌러 줄 필요가 있었다. 라일이 없는 저택에선 집사인 그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던가.
빌미만 생긴다면 오메가가 제 발로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이게 다 이 저택의 주인을 위해서였다.
***
“잠은 잘 주무십니까?”
“그런대로.”
이리저리 붙어 있던 기계가 떨어졌다. 라일은 흐트러졌던 옷을 가다듬으며 그의 주치의 앞에 앉았다.
“특별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일은 없으시고요.”
“알잖나. 내 스트레스라고 하면 이 빌어먹을 페로몬뿐인 걸.”
최근 들어 몸 상태에 여러모로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 라일은 은밀히 병원을 찾았다. 지금까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찾은 적은 있었으나 두통이 없어서 의사를 찾은 건 처음이었다.
의사는 당황한 모양새였으나 금방 평정을 되찾고 진찰을 시작했다. 그는 라일의 페로몬 체증 현상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작은 사안이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특히나 해진을 저택에 데려온 순간 두통이 사라졌다는 건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해진과 러트를 보낸 후 페로몬 해소를 한 번도 하지 못했다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그랬다.
“으음. 일단 페로몬 체증 상태가 호전된 건 아닙니다.”
출력된 그의 검사 결과를 보며 의사는 진단했다. 그 소리에 라일은 미약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혹시라도 오메가와 몸을 섞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생긴 건 아닐까 싶었는데 그런 행운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왜 두통이 없지.”
그렇다면 이 호전된 듯 보이는 상태는 이상 반응이 맞았다. 조금의 불확실성도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라일은 의사에게 적합한 해답을 요구했다.
침착하게 검사 결과를 살피던 의사는 안경을 추어올렸다.
“일단 두통이 해소된 건 상성이 잘 맞는 오메가의 페로몬에 접촉해서 일시적으로 일어난 현상일 수 있습니다.”
“…….”
무심코 해진을 떠올린 라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성이 잘 맞는다니, 꽤 곤란한 일이 아니던가.
“물론 이건 미미하고 일시적인 방법일 뿐입니다. 아무래도 성관계로 하는 페로몬 해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죠. 혹시 최근에 우성 오메가를 만나셨습니까?”
당연하지만 오메가를 힘들게 안는 것보다 그냥 같은 방에 앉아 있는 게 훨씬 낫다. 미미한 방법이라도 절실했던 라일은 실망의 감정을 애써 숨겼다.
마지막 옷 단추를 끼우며 그저 무미건조하게 해진을 떠올린다.
“아니. 계약한 건 열성 오메가야.”
그러나 별 기대 없이 한 말에 의사는 주름진 눈을 치켜뜨며 의아함을 표했다.
“열성이요? 으음……, 그건 이상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