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20화 (20/101)

#20

“왜지?”

“열성이라면 이 임시방편도 소용없습니다. 애초에 과하게 나온 페로몬이 우연히 작용하는 거니까요. 열성에겐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

그의 인생의 유일한 변수가 자꾸만 톡톡 그의 신경을 거슬렸다. 부모님이 일찍 사고로 가 버리고 상속 전쟁에 휘말렸을 때도 라일은 의구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예상을 실현할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해진에 관한 것은 자꾸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최근 들어 바뀌어 버린 녀석의 태도뿐만이 아니다. 라일 자신의 이상한 행동도 문제였다.

애써 의문을 접어 둔 채 그는 다시 물었다.

“혹시 자주 접촉하는 것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나?”

“흐음. 농밀한 접촉이 자주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 열성 오메가와 상성이 아주 잘 맞을 경우가 되겠지요.”

묘하게 의사의 말이 귓바퀴에 매달려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시계를 흘끗 주시한 라일은 최근 그를 가장 충동적으로 만들었던 사안을 상담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이 지나칠 정도로 거북하다는 소리를 해도 될까.

이건 라일의 위치에서는 퍽 위험한 말이었다. 만약 해진 이외에는 안 된다는 식의 소문이 퍼지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이 의사는 기본적으로 신뢰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결국 그는 당분간 더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오메가가 거북한 건 라일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한때 이 지나친 거부감 때문에 병원의 상담을 받은 적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빨리 해소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지금도 위험 상태입니다.”

“그러지.”

떠나는 그를 보며 의사가 차트를 정리했다. 그리곤 그나마 희망적인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두통 문제는 그리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두통이 심해지면 문제지만, 애초에 페로몬 작용에 민감하신 것도 있으니까요.”

“그래.”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나빠지는 것은 아니라니 다행인 일이었다. 페로몬 해소 따위에 조금이라도 덜 시간을 빼앗길 수 있다면 그에게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다.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다른 중요한 일이 아주 많으니 말이다.

톡톡 거슬리는 잔상을 밀어내며 그렇게 라일은 병원을 나섰다. 그러나 의지와는 다르게 갑작스레 떠오른 해진의 얼굴이 머리 한구석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

늦은 밤 저택으로 돌아온 라일은 오랜만에 피로를 느꼈다. 페로몬 체증 자체가 해소된 건 아니라는 의사의 말이 맞는 듯했다.

저택의 입구에는 주인을 맞이하러 나온 사용인들이 서 있었다. 늦은 밤에는 이제 제법 겨울의 냄새가 공기를 떠돌았다. 머릿속으로 겨울에 있을 중요한 업무 사항들을 체크하던 라일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었다.

건조한 공기 사이로 문득 해진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해진이 조금 전 이 장소를 지나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진은 뭘 하고 있지?”

무의식중에 멈췄던 발걸음은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그의 곁에 따라붙어 보고를 하던 집사가 뭔가를 생각하듯 시선을 멀리 던졌다.

“계속 방에 있습니다.”

집사의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미적지근한 불쾌함이 라일을 감쌌다. 해진은 조금 전 이곳에 다녀간 것이 아니던가. 방에 있는 거면 있는 거지 계속 방에 있다는 대답은 또 뭐란 말인가.

무심결에 떠올린 질문은 그 가벼운 시작과는 다르게 이런저런 꼬임을 만들어 냈다. 그가 말없이 계속 걷기만 하자 집사가 슬쩍 눈치를 살피곤 물었다.

“준비를 시킬까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라일은 다시 우뚝 다리를 멈추었다.

“주인님?”

꼭 까슬거리는 무언가가 눈꺼풀 안쪽에 콕 박힌 것 같았다. 평소에는 분명 별 존재감이 없다가도 잘못 시선을 돌리는 순간 더할 나위 없이 거슬려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저택에 도착했기에 라일은 미련 없이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그리곤 서늘하게 묻는다.

“왜 그간 진의 옷을 직접 벗긴 거지? 그런 과한 명령까진 한 적이 없는데.”

“네? 저, 전 다 주인님을 위해서.”

집사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지는 게 거슬렸다. 열성 알파인 그는 페로몬 하나 간수하지 못 하고 쩔쩔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걸 보니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라일은 분명 끈과 안대를 준비하라고만 명령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해진은 아예 묶인 상태로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곤 했다. 당연하지만 라일은 그 과정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편리하다고만 느꼈다.

집사는 그를 잘 보필하고자 의도했으리라. 그 행동이 다소 과한 감이 있더라도 말이다. 여기까지 떠올렸음에도 라일은 저도 모르게 집사를 매섭게 질책할 뻔했다. 그게 해진에게 지나치게 모욕적일 거란 생각은 안 해 봤냐고.

그러나 그 까슬한 말이 혀끝에서 튀어 나가기 전에 라일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모욕을 운운하기엔 애초에 손을 묶으라고 시킨 자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이 또한 이상한 감상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그런 계약을 했고 라일은 충분한 대가를 지급했다.

이제 와서 이리도 신경 쓰이는 듯 굴어야 할 이유가 있던가.

“……앞으로는 그 일엔 관여하지 마. 내 말만 전하고 넌 그 방에 들어가지 말도록.”

가까스로 이성적인 판단을 한 라일은 그저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 안 그래도 3개월조차 채우지 않고 나갈 듯 구는 해진이었다. 계약서를 작성할 당시 직접 말할 정도라면 지금까지 이 과정이 못내 거슬렸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못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딘가 목이라도 졸린 듯 해괴한 목소리로 집사는 대답했다. 의아하게 그걸 내려다보던 라일은 이내 상황을 깨닫고 혀를 찼다. 어느새 자신이 잔뜩 화가 난 페로몬을 근처에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부를 필요 없어.”

의사의 조언대로 페로몬 체증 문제가 심각할 정도인지 조절도 잘 안 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라일은 해진을 부르지 않은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두통도 없으니 아직은 조금 여유가 있겠지 판단했을 뿐.

다만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라일의 생각과는 다르게, 미약한 분노의 페로몬은 잔향처럼 남아 계속 집사를 압박했다.

***

휴일이 찾아왔다. 보통 한 해의 대부분을 일로 보내는 라일에겐 흔하지 않은 날이다. 물론 휴일이라곤 해도 집에서 일을 처리한다는 뜻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오늘은 모처럼 화창한 해가 뜬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라일은 오랜만에 본관 안쪽의 뜰에서 아침 식탁을 맞이했다.

이곳 헤비레인의 사람들은 해가 뜨면 대부분 밖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만큼 따사로운 햇살이 귀한 도시였다. 여기서 나고 자란 라일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본관의 건물은 사각형으로 이 안뜰을 둘러싸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게 아닌 이상 외부에서는 본관 안뜰이라는 내밀한 영역을 염탐할 수 없는 구조였다.

덕분에 라일은 마음 놓고 앞에 놓인 서류철을 탐독했다. 놀랍게도 그에겐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휴일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활자를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데 머리 위쪽에서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금은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사용인들조차 돌아다니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올려다본 곳에는 뜻밖에도 해진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

“…….”

이 저택은 오래된 곳이라 높이가 높지 않았다. 덕분에 상대의 표정까지 바라볼 수 있는 거리라서 둘은 서로를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해진은 드물게 놀라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왜인지 그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된 라일은 적절한 말을 꺼내지 못한 채 한참이나 그렇게 올려다봐야 했다.

그러나 모처럼 드러난 생동감은 천천히 그 숨을 죽이듯 사라졌다. 해진이 점점 제 안의 감정을 죽여 가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그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덤덤한 부름이 그를 일깨웠기 때문이다.

“베르무스 씨.”

‘라일.’

“…….”

딱 한 번 불린 이름이 왜 이 순간에 생각나는 걸까.

“할 말 있으십니까?”

계약서에 사인한 뒤 해진은 다시 정중한 태도를 견지하려는 듯 굴었다. 그게 나쁜 일이 아닐 텐데 라일은 퍽 이상한 감상이 저를 감싸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의 변화는 어느 순간부터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처럼 막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대신 그는 앞에 놓인 커피로 목을 축였다. 따뜻한 액체가 안쪽을 어루만지니 차갑게 얼었던 정신이 깨어났다.

그의 행동이 뭔가 말을 하기 전의 준비라고 생각했는지 해진은 여전히 멀뚱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진짜 뭔가 말을 꺼내야 할 상황이 된 라일이 곤란하게 낯을 찡그린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녀석의 얼굴이 이전보다도 더 해쓱해진 것 같기도 하다.

“식사는 했나?”

문득 해진의 방을 쓸데없이 이 본관에 배치했다는 후회를 하며 라일은 입을 열었다. 마침 그의 앞에도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던 터라 자연스레 흘러간 생각이었다.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해진의 말을 듣는 순간 라일은 이런저런 상념을 자연스럽게 잊었다.

아직 안 먹었다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다니.

불쑥 드는 의문은 곧 불쾌함을 부채질했다. 어느 날 보았던,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해진의 몸이 불쑥 떠오른다. 그렇게 접촉을 자제했는데도 손바닥에는 그 딱딱한 감촉이 기다렸다는 듯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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