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21화 (21/101)

#21

들고 있던 커피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라일이 해진을 향해 매섭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도 몸 관리를 똑바로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몇 번을 더 지적해야 그 문제로 거슬리지 않을지, 문득 짜증이 났다. 라일의 근처에는 그의 말을 무시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가 두 번 이상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기에 그런 이들은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해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라일은 미묘하게 납득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번에 해진을 데려온 순간 어느 정도는 해진의 중요성을 증명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걸 믿고 저리 구는 걸까.

“음식 투정을 얼마나 더 할 생각이야. 적당히 하고 제대로 챙겨 먹도록.”

“음식 투정이요?”

덤덤히 되묻는 얼굴이 더욱 짜증을 부채질한다. 계약서를 들고 의사를 물을 때도 원하는 것 하나 말하지 않던 해진이었다. 분명 집사에게도 비슷하게 행동했으리라고 라일은 지레짐작했다.

“그래. 저번 계약 때처럼 까다롭게 굴지 말고 원하는 음식이 있으면 집사에게 말해. 네 고향의 음식이든 뭐든.”

해진은 피곤해서 제때 트레이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 음식 투정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오래도록 굶을 때 쓴물이 올라오는 감각이 그의 속을 치고 갔다. 원래도 입맛이 없어서 아침을 거를 생각이었으나 이걸로 더욱 식욕이 사라진다.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밥을 먹는 정도로 허한 속을 달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러니 잘 받지도 않는 음식을 억지로 삼킬 필요는 없었다.

어처구니가 조금 없었으나 화가 나진 않았다. 분연히 올라오려던 감정은 이내 기운이 없어 쓰러지듯 파스스 흩어졌으니까.

다만 물끄러미 라일의 빛나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고민했을 뿐이다. 집사가 안 하던 짓을 하던 게 그가 명령해서였구나.

집사의 행동과 라일의 말이 어쩌다 겹친 우연이라는 걸 모르는 해진은 작은 오해의 싹을 틔웠다. 그간 라일이 자신에게 아예 무관심하다고만 생각했는데, 해진이 어떻게 방치당하고 있는지 조금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의 검은 머리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해진이 외국인일 거란 착각을 많이 한다. 흔하지 않은 외양이니 어쩔 수 없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의 신상 명세를 해진보다도 자세히 보고 받았을 라일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느낌이 달랐다.

이 어설픈 무관심처럼.

거북한 냄새가 올라오던 음식 트레이가 생각났다. 불쾌하게 덕지덕지 묻어 있던 집사의 페로몬도. 그건 해진에게 호의보다는 그저 무관심으로 만들어진 폭력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받아서 억지로 삼켰어야 했단 말인가. 고작 자신이 까다롭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

“뭐야.”

그 텅 빈 눈길을 받으며 라일은 짜증스럽게 뇌까렸다. 녀석이 그저 고요하게 라일을 바라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 선 말을 뱉었으니 뭐라도 반응이 돌아왔어야 정상인데.

소름 끼칠 정도로 무표정한 해진의 얼굴을 보니 이상하게 초조한 조바심이 불쑥 올라왔다. 아까 마신 게 커피가 아니라 각성제라도 된 듯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녀석이 끔찍하리만큼 텅 비어 있어서 어쩐지 아득하게 추락할 것 같았다.

“제 고향은 이 도시입니다. 베르무스 씨.”

모처럼 날씨가 좋으니 일부러 창문을 열었으리라. 그러나 해진은 미련 없이 창문을 닫고 이내 커튼까지 닫아 버렸다. 행여 조금의 시선이라도 라일에게 닿지 않도록.

그 꽁꽁 싸맨 창문을 보며 라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명백한 거부감이 둘 사이의 거리를 넘어 넘실넘실 느껴졌다.

갑자기 화창하던 하늘이 어두워진 기분이 들었다.

***

해 질 녘이 다 되어서야 라일은 서재로 돌아왔다. 꽤 오래 그곳에 머물렀지만, 해진의 창문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커튼까지 빈틈없이 두른 해진의 방은 멀리서 저택을 봤을 때 무척 눈에 띄었다. 맑은 하늘을 맞이해 투명한 창들이 즐비한 저택 한가운데, 홀로 점이라도 찍은 듯 신경 거슬리게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의 저택인데 저리도 불편한 티를 내니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괜한 오기로 라일은 점심까지 그 자리에서 해결했다.

그렇게 돌아온 서재에서 라일은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다가 서랍 하나를 열었다. 해진에 관련된 서류가 있는 자리였다.

“……고향이 정말 이곳이었군.”

검은 머리를 보고 해외에서 입양이라도 된 줄 알았는데 해진은 처음부터 이곳에서 자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분명 이전에도 검토했던 서류였으나 솔직히 이 순간까지 잊고 있었다. 그에게는 하등 필요 없는 정보였으니까.

차라리 그의 오해에 기분 나쁜 티를 냈으면 나았을까. 무미건조하게 제 고향이 여기라고 말하고 사라지는 해진의 잔상은 귀찮게도 오래 그의 머릿속을 머물렀다.

그때 집사가 그의 서재 문을 두드렸다. 라일의 짧은 허락에 들어온 그는 정중한 말씨로 입을 열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원하시는 음식이 있으십니까, 주인님.”

그때까지 해진의 사진이 박힌 서류를 보던 라일은 아까부터 거슬리던 점을 물었다.

“진은 식사했나?”

“아, 그것이…….”

집사는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곤 한참 생각을 거듭하고 나서야 대답을 꺼내두었다.

“아침부터 거르신 걸로 압니다.”

다시 톡, 라일의 눈앞에 까슬까슬한 감각이 돌아다녔다. 추측으로 말하는 집사의 말이 이상하게 불쾌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해진이 끝내 그 빌어먹을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네 역할을 똑똑히 일러두지 않았던가.”

서슬 퍼런 그의 음성에 집사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내 무척 억울하다는 투로 항변했다.

“제가 브라이트 씨의 고향 음식까지 준비해 갔으나 입도 대지 않고 밖으로 내치셨습니다. 최선을 다하고는 있습니다만…….”

톡톡 까끌까끌하던 감촉은 집사의 말에 금방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집사는 나름대로 손님 대접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게 뻔하지 않은가.

서류철의 글자를 훑던 라일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집사에게 새로운 정보를 던져 주었다. 그 또한 방금 알게 된 것들을.

“진은 이곳 출신이니 그냥 평범한 음식을 준비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불쾌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집사가 영 보지도 못한 음식만 계속 가져다줬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해진의 마른 몸은 그저 그 한 마디로 변명할 수 있을 만한 몰골이 아니었다.

성가신 문제를 앞두고 해답이 없어서 라일은 다소 거친 손길로 해진에 관한 서류를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

“무슨 일이시죠.”

오늘도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해진은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밥은 나름대로 성실하게 챙겨 먹었다. 라일이 자꾸 지적하는 것도 귀찮았지만 그도 무작정 제 몸만 학대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들어오는 트레이를 거르지 않고 적게나마 먹긴 했다.

지금까지 누워 있었으나 아예 잠들 준비를 하려고 몸을 씻고 나왔을 때였다. 무척 수상하게 제 방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 사용인 하나와 마주친 건.

“아……, 잠깐 청소를.”

“청소는 아까 한 거로 아는데요.”

사용인의 품에는 빳빳한 새 옷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걸어 나오던 곳은 이 방 응접실에 연결된 옷 방이었다.

“흠흠. 청소입니다.”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빤히 보면서도 사용인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어째 옷 방에 옷이 제대로 가득 찼다 했더니 도로 가져갈 작정이었나 보다. 만사가 다 귀찮아진 해진은 그냥 몸을 돌려 침실로 사라졌다. 침실 문은 잠그고 자야지, 여상히 생각하면서.

“씨발, 더럽게 눈치 주네.”

뒤통수를 향해 작게 소곤거리는 말은 그냥 무시했다. 어차피 그의 물건도 아닌데 가져가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

그런대로 흐린 아침,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 해진은 저택 밖을 향해 걸었다.

다리 문제로 병원에 가야 한다는데 정작 이 넓은 저택을 걷느라 다리가 상할 것 같은 불합리한 구조였다. 그러나 애초에 병원 예약조차 제 의지로 잡은 적 없는 해진은 그저 비서가 보낸 사람에게 이끌려서 저택 현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번에야 눈을 뜨니 병원이었으나 사실 해진은 제 발로 병원을 찾아가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다. 특히나 그 먼 곳까지 가서 이제는 없는 것들을 상기해야 하는 순간이 끔찍했다.

그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가 짜증 나는지 비서의 말을 전하러 온 사용인은 자꾸만 흰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고작 그 눈길이 무섭다고 다리를 혹사하는 것 또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결국 해진은 묵묵히 제 느릿한 걸음을 고수해야 했다.

다만 차가 있다는 곳에 도착하고 나니 그 결정이 못내 후회되었다. 하필이면 라일의 출근 시간과 겹쳤는지 멀리서도 그의 화려한 금발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

사용인들이 저택 앞에서 질서 있게 움직이는 걸 본 순간 해진은 걸음을 돌렸다. 구석진 곳에서 조금 기다리다가 라일이 떠나면 앞으로 나갈 작정이었다. 그를 안내하던 이는 여기까지 왔으니 제 일은 끝났다며 바쁘게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해진이 뒤를 도는 순간 거짓말처럼 라일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혼자 저택의 어두운 곳으로 느릿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순간 라일은 다급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저택 사람의 대부분이 이쪽에 몰린 이때, 해진이 홀로 구석진 곳으로 향하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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