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옆에서 그에게 일정 보고를 하던 비서가 놀라서 그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불안정한 걸음걸이를 따라 흔들리는 검은 머리칼을 보는 순간 라일은 본능적으로 일단 잡아야 한다고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모퉁이를 돌아서려는 해진의 팔을 거칠게 잡아챈 다음이었다.
“아……!”
“어딜 가는 거지.”
형언할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라일을 조종했다. 일단 거칠게 윽박지르고 나서야 어처구니없다는 해진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무언가 오해했다는 걸 깨달은 동시에, 라일은 제 행동이 무척이나 이상하다는 걸 인식했다.
“브라이트 씨.”
재빨리 따라붙은 비서가 일단 해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비서의 오묘한 시선은 라일이 아직까지 꽉 붙잡고 있는 해진의 팔로 향했다.
“회장님. 브라이트 씨를 같이 모실까요?”
분위기를 파악하던 그는 눈치껏 물었다. 일전에도 해진의 병원이 동선에 포함되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던 라일이니까.
“……어딜?”
“오늘 병원 진료가 있으십니다. 제가 차를 준비할 테니 이쪽으로 와 주십사 아침에 사람을 보냈고요.”
유능한 비서답게 그는 적절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건넬 줄 알았다. 제가 무언가 오해했다는 걸 깨달은 라일은 곤란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마주 보고 있던 해진의 무심한 시선이 아직 그를 붙잡고 있는 팔로 툭 떨어지고 나서야 몸에 힘을 풀었다.
시선에 무게가 있는 것처럼 그의 손도 저절로 떨어졌다. 제 꼴이 퍽 이상하고 또 어처구니가 없어서 라일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곤 됐다는 소리와 함께 물러나려고 했을 때였다.
“전 괜찮습니다.”
해진은 잡혀 있던 제 팔을 만지작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눈앞에 순간적으로 커튼 뒤로 사라지는 녀석의 잔상이 떠오른다. 지금은 대놓고 거부감을 나타내는 페로몬까지 내보내고 있어서 한층 그를 자극한다.
그날 기어코 식사를 거르다니.
“같이 가도록 하지.”
“…….”
오기로 짜증을 담은 대답을 하니 해진의 눈빛에 금방 불만이 깃들었다. 텅 빈 눈동자로 세상 다 산 것처럼 굴 때와는 또 다른 감각이 라일을 침범했다.
“가시죠.”
적절하게 끼어든 비서가 한쪽을 가리키며 해진을 쳐다보았다. 차가 있는 쪽을 바라보니 저택 사용인들의 시선이 찌를 듯 그를 향한다.
거북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해진은 라일의 차에 올라타야 했다. 늘 그랬듯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었을 테니.
***
소리 없는 한숨을 쉬는 해진을 라일은 거의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차를 탄 순간부터 녀석은 줄곧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거부감이 역력한 페로몬이 흘러 다닌다. 짜증스러울 정도로 라일에게 보란 듯이 감정을 내뿜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폐가 꽉 막힌 듯 답답하기만 했다. 그 진한 페로몬을 지적하려고 라일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다 문득 의아한 생각이 라일의 머리를 스쳤다.
해진의 페로몬이 이렇게 진했던가?
애초에 해진이 그의 저택에 오래 머물렀던 건 페로몬이 선천적으로 무척 옅었기 때문이다. 열성 오메가 중에서도 늦게 발현한 덕에 해진은 페로몬의 양 자체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저렇게 페로몬 조절이 미숙한데도 라일의 신경을 여태 거스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강해진 그 존재감에 라일은 인상을 썼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 순간 다시는 예전처럼 느낄 수가 없었다. 점점 진해지는 페로몬이 폐를 점령할 듯 굴었다.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탓에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해진은 왜인지 낡은 재킷을 입은 채였다.
계절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라일은 취급하지도 않는 싸구려인 것을 보니 직접 가져온 옷이리라. 심지어 바짓단은 살짝 짧은 듯 앙상한 흰 발목을 다 내보이고 있었다.
녀석의 페로몬에 잠식되며 천천히 그 꼴을 관찰한 라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번에 창문을 닫았을 때처럼 반항심이 여실히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금 시위라도 하는 건가.
“일부러 지급된 옷은 피하는 건가?”
불만을 가질 만한 상황이라는 건 라일도 알았다. 다만 무시했을 뿐이다. 저 선연한 거부감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거슬리기 시작했으니까.
뜬금없는 말에 멍하니 창밖을 보던 해진이 고개를 돌렸다. 라일이 무척 심기 불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옷차림으로 지적한 건 또 처음이라 의외이긴 하다. 그러나 해진은 이내 덤덤하게 맞받아쳤다. 안타깝게도 이제 해진에게는 그의 비위를 맞춰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어차피 제 물건은 아니니까요.”
여실히 벽이 느껴지는 페로몬은 한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그에게 전했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라일이 삐딱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계약서에 있던 대가에 눈길도 주지 않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가 주는 건 뭐든 의미가 없다는 것처럼.
“지급했으면 네 것이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쓸데없는 자존심이라도 부리는 건가?”
“……자존심. 그럴 리가요.”
헛소리나 다름없는 라일의 말에 해진은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자존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해진에게 남아 있을까. 그에게 지금 남은 건 그저 안간힘뿐이었다. 적어도 이 저택에서 다시 쓰러지지 말고 제 발로 나가자는 미약한 오기 정도.
해진이라고 청승맞게 이런 옷을 입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사용인의 옷 도둑질을 무시한 날부터 옷장은 점점 비어 갔다. 급기야 오늘 아침에는 이 계절에 맞는 두꺼운 옷은 전부 사라졌을 만큼 말이다.
집사가 애써 그에게 웃으며 다가왔을 때 무시한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는 걸까, 아니면 이 또한 라일의 묵인일까.
“그게 바로 쓸데없는 자존심이라는 거지. 주는 걸 입어.”
그가 사정을 알든 모르든 해진의 입장에서는 불쾌한 일일 수밖에 없다. 왜 여기서 해진이 이런 비난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고자질 따위를 해서 무언가 바뀔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해진은 예전부터 이어진 계약 위반 사항을 라일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하려고 했던 순간 좌절되었던 경험도 그를 매번 주저앉혔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라일이 입을 다물어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해진은 덤덤하게 제 상황을 알려주었다.
“옷장에 입을 만한 게 없더군요.”
그 사정을 모르는 라일은 이 순간에도 해진이 그저 그를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집사에게 일러 직접 해진의 방을 채우라고 말한 게 얼마 전이었다. 그의 상식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소리를 해진이 입에 담으니 아까 떠올린 반항심만 머릿속을 맴돈다.
특히나 해진이 저렇게 강한 거부의 페로몬을 내보내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왜. 이번엔 팔 만한 옷이 없었나?”
비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해진에게 물었다. 마침 집사가 해진이 제가 지급한 것들을 팔아 치우곤 했다는 사실까지 들었으니까 말이다.
생활비도 없이 어떻게 지냈나 싶었는데 해답이 보이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긴 아무리 의식주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수중에 돈이 없으면 힘들지 않았겠는가. 통장 잔고가 그 모양이었던 걸 떠올리면 그마저도 시원찮은 수완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전에 지급한 옷들도 팔아 치웠다고 들었어. 뭐, 사정이 있었으니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야.”
“그런 적 없습니다만.”
애써 그의 상황을 이해해 보려 했으나 무덤덤한 얼굴로 시치미를 떼는 얼굴이 가증스러웠다. 결국 짜증을 이기지 못한 라일은 미간을 찌푸리며 해진을 다그쳤다. 대체 어디까지 장단을 맞춰 줘야 한단 말인가.
“귀찮게 또 자존심을 세우는군. 눈감아 줄 테니 알량한 변명은 집어치워.”
말을 다 꺼내 놓고 나서야 라일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냥 지금처럼 계속 무시하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해진이 서러운 얼굴이라도 내보인다면 일이 거추장스러워질 게 뻔했다. 누군가를 달래야 한다는 이 상황 자체가 그는 거북했다. 역시 계약서 조항에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말은 넣지 말았어야 했는데.
창밖으로 돌아가려던 해진의 시선은 라일에게 똑바로 날아들었다. 다만 한없이 텅 비어서 그 속에 빗물까지 담아낼 듯한 얼굴로.
갑자기 어느 날엔가 느꼈던 갈증이 그를 엄습했다. 거북하고 익숙하지 않은 감정에 몰린 라일은 해진을 더 자극하는 쪽을 택했다. 차라리 녀석이 화를 내는 편이 더 낫겠다고 무심코 생각하면서.
“더 변명하고 싶나?”
아까부터 이해할 수 없는 역정을 내는 라일을 보면서 해진은 생각에 잠겼다.
집사를 시켜 이상한 음식을 보낼 때도 느꼈으나, 라일은 해진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가 식사를 못 한다거나 옷이 부족했다는 것 정도는 말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라일은 기껏 해진이 진실을 입에 담아도 들을 의지가 없었다.
애초에 해진보다는 오래도록 그에게 충성한 집사의 말을 더 믿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진도 그건 알았다.
그렇다면 그 집사가 이렇게 해진에게 모질게 굴도록 만든 건 누구일까.
해진은 정말이지 라일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원망이라는 감정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지금의 종잇장 같은 해진이 들기엔 버거웠다. 그러니 라일이 그저 철저하게 무관심해서 저를 자극하지 말고 얌전히 놓아주길 바란다.
지금 당장은 왜인지 편리한 해진을 곁에 두고 싶어 하지만, 곧 그가 무조건 감내하던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아 주기를 바란다. 다시 보니 마냥 편리하지만은 않다며 자연스럽게 계약도 끝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