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러나 자꾸만 모진 말로 기껏 잊으려는 상처를 헤집는 라일에게, 해진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용인들이 그렇게 행동한 게 정말 라일의 탓이 아닐까?
“저택에서의 제 대우는, 직접 집사에게 그렇게 명령하신 겁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해진은 제 입으로 그 비참한 행로를 다시 짚어 낼 생각은 없었다. 지금 일일이 다 언급한다고 한들 과연 라일이 믿어 줄지 의문이다. 당장 해진이 옷가지를 내다 판 적 따윈 없다는 말도 무시당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가 조금이라도 의지가 있다면 이 질문에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 볼 터다. 그의 서러움을 돌아볼 생각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해진은 오히려 말을 뱉으면서 점점 기대를 죽여 나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애초에 라일이 해진을 이해하겠다고 과거를 들추는 일 따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지난 5년간의 제 생활도요.”
“그래.”
“그렇군요.”
그래서 그렇군요,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꼭 허공으로 사라지듯 옅었다.
뜬금없는 소리를 뱉은 해진은 그대로 창밖으로 고요히 시선을 돌렸다. 거부감을 내뿜던 페로몬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푹 죽어 버렸다.
그러나 잔잔해진 차 안의 공기를 호흡하며 라일은 한층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오히려 이 존재감 없는 페로몬이 그에게 더 큰 벽을 쌓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때마침 차가 병원 앞에 들어섰다. 기사가 덤덤히 도착을 알리고 나서야 라일은 정신을 차렸다. 자꾸만 비이성적인 행동이 늘어나는 것이, 꼭 머리가 고장이라도 난 듯싶었다.
밖에는 비서에게 미리 연락받은 경호원이 해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에서의 볼일이 끝나면 해진을 저택으로 다시 데리고 올 것이다.
그런데도 라일은 무표정하게 차 문을 열고 내리는 해진의 팔을 무심코 움켜쥐고 말았다.
“허튼짓할 생각은 하지 마.”
“…….”
녀석의 시선은 잡힌 제 팔을 봤다가 밖의 경호원으로 향했다. 라일이 해 둔 조치를 직접 보란 듯이.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순순히 해진을 놔주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녀석은 인사 한마디 없이 내려 병원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라일은 홀린 듯 지켜보았다. 해진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어색했다. 바짓단은 여전히 발목이 다 드러나 시린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그 어색한 걸음걸이처럼 라일은 무언가 어긋남을 느꼈다. 이제는 해진이 옷을 팔아 치울 이유가 없을 텐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하고.
해진은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넥타이가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
“아, 글쎄. 일부러 미적대더라니까.”
“왜?”
“앞에 주인님이 출근 중이신 건 어찌 알고, 마주치려고 발악하는 거지.”
“더럽다 정말. 그렇게 돈 벌고 싶을까.”
꺄르르 울리는 웃음소리에 안 맞게 험한 말이 오갔다. 본관 안쪽 뜰을 다듬는 사용인들의 대화 소리가 지나치게 잘 들렸다. 머리 바로 위에 해진의 방이 있다는 걸, 저들이 과연 모를까.
“기어코 주인님 차도 얻어 타고 말이야. 갑자기 그만두더니, 무슨 낯짝으로 다시 돌아왔을까? 혹시 더 큰 걸 노리나. 열성 주제에.”
“어이없다, 정말.”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지금 당장 해진이 고개를 내밀어도 과연 저 험담을 그만둘지도 의문이다.
맥없이 침대에 늘어져서 그 대화를 듣던 해진은 그저 반대로 돌아누웠다. 희미하게 보이던 밖의 풍경마저 사라지고 대신 삭막한 방 내부가 시야에 가득 찼다.
며칠 전 라일과 함께 차를 타고 가며 느꼈던 희미한 분노조차 흔적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날 검진 결과를 들은 뒤부터 해진은 도무지 기운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이대로라면 평생 제대로 못 걸을지도 모릅니다. 주의하셔야겠군요.’
정처 없이 떠돈 뒤에도 관리를 소홀하게 한 탓일까. 의사는 무심히 뒤에 버티고 서 있는 경호원을 한번 바라보고는 발목에서 문제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본래라면 사고 후 수술을 받자마자 꾸준한 물리치료로 관리해 줬어야 했다. 그러나 해진은 목발을 짚은 채 부모님을 살릴 돈을 빌리러 돌아다녀야 했다. 당연히 다리는 뒷전이었다.
분명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그 진단을 들으니 기분이 푹푹 땅으로 꺼지기만 했다. 이런 젊은 나이에 다리까지 말썽이라니. 앞으로는 정말 노동으로는 먹고살지 못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해진은 병원에 대한 거부감만 한층 뚜렷하게 간직한 채 돌아와야 했다. 경호원이 그를 감시하며 저택으로 인도하는 것이 차라리 달가울 정도였다. 진료를 마치고 나와 병원 냄새를 맡는 순간 해진은 정말 제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을 느꼈으니까.
가족들이 없으니 자신이 한없이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심정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애초에 고아였던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 준 건 가족들이다. 부모님은 해진의 이런 생각을 매번 엄하게 나무라셨다. 그는 그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면서.
그런데 그런 부모님은 이제 없었다.
결국 도돌이표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지나치게 우울한 감정이 해진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이게 전부 비이성적인 감상인 걸 깨달았으나 그뿐이다. 정작 그 상태를 벗어나야겠다는 의욕은 솟아나질 않았다.
문 앞으로 트레이가 굴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집사가 분노로 점철된 페로몬을 흩뿌리고 간 다음에는 여느 때처럼 해진의 방문 앞에 성의 없이 트레이가 놓이곤 했다.
퍽 거칠게 문 앞에 놓이는 음식 트레이 소리에 해진은 기운 없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지금 빨리 가져오지 않으면 또 음식이 사라질 텐데.
“…….”
오늘은 특히나 일어나기가 힘들어서 식사 시간을 놓쳤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미 음식이 사라졌을 게 뻔해서 해진은 문을 열어 보지도 않았다.
병원에 다녀온 뒤 며칠간, 점점 늦어지던 기상 시간은 급기야 오후 늦은 시간까지 미뤄지고 말았다. 점심조차 지난 시간에 눈을 떠 버린 것이다. 침대는 꼭 모래 늪이라도 된 것 같이 해진을 빨아들였다. 흐린 하늘은 오후인지 아침인지도 불분명해서 시간을 보고 새벽녘으로 착각할 뻔했다.
배가 고프니 이렇게 기운이 없는 거다. 해진은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머릿속의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영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흘러가는 빗물처럼 덧없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배 속에 거대한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허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식욕은 전혀 없어서 그의 안에 기묘한 뒤틀림을 만들어 냈다.
그 무거운 기분을 관조하던 해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자도 자도 잠이 왔다.
***
“그럼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퇴근한 라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려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그는 여전히 바빴고 친척들은 틈을 계속 노렸으며 사회가 그에게 무거운 책임을 요구하는 것도 한결같았다.
그리고 해진은 잠잠했다.
라일에게 그간 생긴 변화는 한 가지였다. 이따금 해진을 떠올린다는 것. 물론 한없이 거슬린다는 감정이 주로 들었다. 애써 잔상같이 떠오르는 얼굴은 억지로 밀어낼 때가 더 많았다. 그리고 이제는 꿈을 꾸지 않았다.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라일은 생각했다. 머리는 슬슬 다시 무거워져 조만간 페로몬 해소를 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릴 뿐.
본관에 들어서 이 늦은 시간에 트레이를 치우는 사용인을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그리 생각했다.
“거기.”
“네, 주인님.”
“그건 뭐지?”
“아……, 브라이트 씨 방에서 치우는 중입니다.”
본관에서 식사를 할 만한 인물은 지금 해진과 그밖에 없다. 그러니 음식 트레이를 보고 해진을 떠올린 건 당연했다.
그런데 사용인이 트레이를 치우는 시간이 묘하게 거슬렸다. 뚜벅뚜벅 사용인이 쥐고 있는 트레이 앞까지 다가간 라일은, 지체 없이 음식을 덮고 있던 뚜껑을 열었다.
전혀 손도 대지 않은 음식들이 환하게 밝혀 둔 복도 조명 아래 드러난다.
“진에게 갔던 음식이라고?”
“네, 주인님.”
사용인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도무지 못 먹을 만한 음식들이 아니다. 꽤 신경 쓴 듯한 플레이팅까지 라일이 보기엔 흠잡을 곳이 없다.
그런데 또, 음식을 걸렀다고.
묵묵히 쥐고 있던 것을 툭 내려놓은 라일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 가던 그의 방 쪽이 아니라 해진이 묵고 있는 곳을 향해서.
천천히 뚜벅이는 발걸음 소리는 걸음마다 불쾌함을 담고 있었다. 차에서 쓴소리 좀 했다고 이렇게 나오는 건가. 그의 관심을 끌려는 수작이라면 유효했다. 라일은 도무지 해진의 얼굴을 보고 한마디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상태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적당히 불쾌한 기분으로 해진의 방 앞에 도착한 라일은 그만 와락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그의 방 앞에 아침부터 쌓인 트레이가 두 개나 더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여실히 알려주면서.
그걸 깨닫자마자 라일은 도무지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앙상한 해진의 발목이, 움직일 때마다 부딪히던 뼈 같은 것이 제멋대로 그의 머릿속을 떠다닌다.
응접실을 지나 침실 문에 거칠게 노크를 해도 안쪽은 묵묵부답이었다. 사용인들의 방문도 이런 식으로 거절한 거겠지.
“진, 문 열어.”
그가 소리 내 말을 하고 나서야 안쪽에서는 미약한 소음이 났다. 다리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달칵 문이 열린다. 소리를 보니 방문도 잠가 두었던 게 분명하다.
“……베르무스 씨.”
“몸 관리를 똑바로 하라고 했을 텐데. 뭐 하는 짓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