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챕터 4>
“정신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
제 방에 딸린 응접실에 라일은 지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더러워진 옷가지를 갈아입을 정신도 없어 보였다. 평소 칼 같은 자기관리를 하던 라일답지 않게.
그 초췌한 모습을 곁눈질하던 비서가 재차 입을 열었다.
“거부감이 심하셔서 혈액검사를 하진 못했으나, ……겉보기에도 영양 문제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문제가 식욕 저하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으니 앞으로 신경을 쓰는 편이 좋겠습니다.”
해진은 지금 병원이 아닌 본관의 제 방에 누워 있었다. 급히 달려온 차를 타고 라일이 직접 병원에 데려갔으나 그곳에 다다르는 순간 다시 죽을 듯이 자지러졌기 때문이다.
‘병원은, 싫어, 안 돼.’
두려움으로 점철된 그 페로몬에 라일은 질식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급히 의사를 차 안까지 불러 해진의 상태를 살폈다. 그 순간에도 해진은 몸을 뒤틀어 가며 온몸으로 모든 것을 거부했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라는 소리에 그들은 그대로 차를 돌려 저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왕진을 나온 의사가 천천히 진찰한 결과 트라우마 소견이 나왔다. 라일은 최대한 자세히 해진의 급작스러웠던 상태를 묘사했다. 그러자 최근 들어 해당 장소에서 정신적 충격을 받을 일이 있었냐는 질문이 돌아온다. 라일은 그저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미, 안해요, 못 가서…….’
기절하기 직전 해진이 뱉은 말은 어디를 향한 것인지 너무나도 명확했다. 아무래도 부모의 부고를 늦게 들은 사실이 라일의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부모가 죽은 뒤 바쁘게 움직인 기억밖에 없던 그는 그 사실이 못내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그렇게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이.
그가 직접 움직이는 바람에 외부의 눈을 가려야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새벽에 덩달아 끌려 나온 비서는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수액이라도 맞는 편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주삿바늘에 거부감이 있으신 듯합니다.”
파리한 해진의 얼굴을 떠올리자 심장 부근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마침 주삿바늘 소리를 들으니 꼭 말에 찔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주삿바늘뿐만이 아니라 해진은 의사의 하얀 가운에도 발작을 일으키려고 했다. 덕분에 왕진 나온 의사는 최대한 병원을 연상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그를 살펴야 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내내 해진의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라일은 고민에 빠졌다. 아직도 풀썩 쓰러지던 해진을 잡아낸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건 해진을 그 방으로 직접 우악스럽게 끌고 갔던 손이기도 했다. 자신이 직접 해진을 그 트라우마의 한 가운데에 던져 넣었다.
녀석이 좀 마른 게 무에 대수라고, 그렇게 화가 났었을까.
“…….”
불쑥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올라올 듯 굴어서 라일은 다급하게 제 입가를 가렸다. 잔잔한 떨림이 피부를 타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니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무언가 확연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저 한때의 충동이나 이상 반응 정도로 여겼던 상황이 이리도 오래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해진의 상태에 초연하게 굴 수가 없었다. 더욱이 녀석이 마지막으로 뱉은 말을 생각하면 더더욱.
문득 상성이 잘 맞는 오메가를 만났냐고 물었던 의사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납득 가는 해설이겠지.
“이대로 계약을 파기하게 되면 보상 방안 등을 다시 조율해야 합니다. ……한 번도 계약 이행을 하지 않은 상태라서 위약금도 청구할 수 있습니다만, 어찌할까요.”
고민에 빠져 있던 라일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비서도 제가 내뱉는 말이 못내 죄책감이 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아니, 그러지 마.”
다급하게 대답하면서 라일은 눈을 감았다. 다시 무언가 울컥 솟아오르려고 했다. 해진의 파리한 얼굴이 눈을 감을 때마다 눈꺼풀 안쪽에 붙은 듯 떠나지 않았다. 다시 숨통이 조여든다. 형언할 수 없는 의아함과 혼란 속에서 라일은 가까스로 하나의 감정을 떠올렸다.
짙은 두려움.
이건 라일의 감정이 아니었다. 해진의 페로몬이 잔향처럼 그에게 맴돌고 있을 뿐이다. 녀석이 쓰러지며 온몸으로 내뿜던 건 좌절이 무겁게 섞인 두려움이었다. 그게 마치 라일에게 고스란히 옮기라도 한 양 옅고 옅은 그 페로몬은 끈질기게도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덕분에 파리하게 숨을 못 쉬던 해진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앞으로도 해진을 상대로 법률 소송은 없도록 조치해.”
“네. 그리고 회장님의 페로몬 해소도 시급합니다. 의사가 전언을 보냈더군요.”
“……알아.”
비서도 이런 상황에서 차가운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라일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해진에게 미안한 마음과는 별개로 할 일은 해내야 했다.
“브라이트 씨의 의료 지원은 부족함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그리고 새 계약자를 알아보겠습니다.”
대충 의사와 라일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들은 비서는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해진에게 이 이상 계약을 강요하는 건 정말 못 할 짓이라고. 그러니 다음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라일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그건 일단, 조금만 기다려 보지.”
“회장님, 브라이트 씨는 현재…….”
“알아. 진을 억지로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야.”
미간을 거칠게 문지르며 라일은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엉망인 제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 그는 해진이 쓰러진 다음부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비서의 판단이 옳다. 그의 이성이 외치고 있었다. 컨디션을 제대로 유지하고 싶다면 당장이라도 거부감은 조금 밀어 두고 새로운 계약자를 찾으라고.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런데 괜찮지 않았다. 도무지 그 무엇도 괜찮지 않았다. 이 이해할 수 없는 몸 상태를 헤아리며 라일은 차분히 두 눈을 감았다.
어쩐지 해진이 제 발로 이 저택을 나갔다 돌아온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진은?”
“……여전히 방에 있습니다.”
라일은 잠들기 직전, 망설이다가 집사를 불러 해진의 상황을 물었다.
벌써 녀석이 발작을 일으킨 지 이틀이나 지났다. 본래는 해진이 일어나면 바로 얼굴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라일은 기묘한 망설임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걸 깨달았다.
한 번도 이런 불확실성에 붙잡힌 적 없던 그는 일단 제자리에 멈춰 서는 걸 택했다. 고작 얼굴 한 번 보러 가는 길이 자꾸만 신중해진다.
좋은 핑곗거리도 있었다. 해진이 그렇게 트라우마에 시달릴 정도로 고통받는다는 걸 아는 이상, 라일은 그걸 책임져야 했다. 계약과는 별개로 해진의 향후 치료 계획이나 보상 방안 등을 비서가 새로이 짜내고 있었다. 그러니 그게 완성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접 들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핑계보다는 묘한 예감이 그의 발걸음을 짓눌렀다. 왜인지 해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많은 것이 바뀔 것 같아서.
“…….”
이제 라일은 자신의 이런 감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해진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어긋나기만 했던 그의 판단이었으니까. 과연 이렇게까지 고민해야 하는 문제인가.
그런데 해진의 얼굴을 마주하면, 그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진의 식사를 잘 챙기도록 해. 부족함 없도록.”
“……네, 주인님.”
결국 그는 다시 판단을 보류하는 선택을 했다. 제 안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헤아리느라 라일은 집사의 표정이 묘하다는 걸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
“또 안 먹었다고?”
“네. 집사님.”
해진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트레이는 거의 양이 줄지 않았다. 그걸 보며 집사는 짜증스럽게 욕설을 속으로 삼켰다.
식사를 잘 챙기라는 라일의 당부를, 집사는 억지로라도 밥을 먹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따라서 이번엔 휘하의 사용인들에게 트레이를 앞에 두는 게 아니라 직접 가지고 들어가게 했다. 그리곤 그 앞에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 지켜보게 했다. 행여 해진이 다른 짓거리를 하지 못하도록.
오메가는 집사를 내쫓았을 때처럼 건방지게 굴었으나 라일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이제 저 쓸데없는 투정을 받아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이후로는 오메가도 저항을 관두곤 밥을 챙겨 먹었다. 비록 탐탁지 않게 적은 양이라도 말이다.
“빌어먹을.”
저택에는 해진이 쓰러진 사건이 퍽 미묘하게 소문났다. 집사가 호출을 받고 급히 달려갔을 땐 이미 라일이 해진을 안은 채 건물 바깥까지 나왔을 때였다.
그 이후 병원을 가는 듯하더니 뜬금없이 금방 돌아왔다. 그리곤 수액 하나 안 끼고는 며칠째 침대에서 나오질 않는 것이다.
라일이 직접 집사만 불러 트라우마 때문이라 설명해 주었으나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런 트라우마가 있다면 대체 이 저택에는 왜 돌아왔단 말인가.
해진이 납치되다시피 돌아온 걸 모르는 집사는, 그가 부모님의 죽음으로 트라우마를 가질 것이라면 이곳에 돌아오지도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덕분에 가지고 있던 일말의 죄책감도 합리화한 지 오래였다.
또다시 집사의 묵인 아래 이래저래 소문은 살을 붙여 갔다. 마치 해진이 라일을 압박하기 위해 꾀병이라도 부린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간 이 저택에 온 오메가들은 참 다양한 방법으로 라일을 압박하기 위해 애썼으니 자연스러운 추측이기도 했다. 집사는 그런 말들을 막기는커녕 곁에서 심기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아 소문을 더욱 부채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