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맨 처음 해진이 이 저택의 가십거리가 되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집사는 같은 열성 주제에 과분한 대우를 받는 오메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견디지 못하고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다른 콧대 높은 오메가들처럼.
그러니 집사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저택을 떠도는 소문에는 퍽 일리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집사는 점점 해진이 저렇게 꾀병을 부리는 게 탐탁지 않았다.
***
툭툭 가슴께를 쳐 보아도 답답한 속은 내려가지 않았다. 해진은 억지로 물 한 모금을 넘기며 허리를 펴고 앉았다.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먹으려니 아주 고역이었다.
라일은 왜 아무 말이 없을까.
며칠이나 지났으나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계약 이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화를 낼 것이라 여겼는데 말이다.
다시 그날 상황을 생각하니 등에서 식은땀이 올라왔다. 간신히 물 한 모금을 더 마신 해진은 반사적으로 떨리는 손을 이불 위로 꾹 내리눌렀다.
미처 깨닫지 못할 땐 차라리 괜찮았다. 그러나 한번 그곳에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후에는 이미 늦었다. 그는 도무지 공포에 휩싸이지 않고서는 그 방에 다가갈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다 늦어 버렸다는 걸 알지만, 고작 생각이나 의지로는 해결되지 않는 두려움이 해진의 뇌를 마비시켰다. 급기야 이제는 병원까지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어쩌면 라일은 이대로 저를 놓아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단단히 망가진 걸 봤으니까.
그러나 파르르 떠올랐던 희망은 덧없이 공기 중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익숙한 불길함이 허공에서 해진을 노려본다. 마치 그가 밥을 제대로 먹는지 감시하듯 지켜보는 사용인들의 눈길처럼.
왜 갑자기 이렇게까지 그의 식사를 억지로 챙기는 걸까.
***
아침부터 라일을 엄습한 두통은 약을 먹어도 가라앉지 않았다. 끝내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라일은 하는 수 없이 오후 일정을 모두 미룬 채 저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급할 땐 이런 휴식이라도 조금은 도움 되었으니까.
“후…….”
최근 들어 컨디션 난조가 잦다. 가까스로 버티고는 있으나 틈을 보이면 필연적으로 귀찮은 일들이 생긴다. 사사건건 참견하길 좋아하는 그의 작은아버지 같은 사람이 들러붙기 좋은 환경이 되는 것이다.
샤워 후 방 안의 소파에 털썩 앉은 라일은 무의식중에 해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부턴가 종종 떠오르는 해진의 잔상은 이제는 습관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몸이 뭘 원하는지는 뻔했다. 페로몬을 당장이라도 쏟아내자는 거겠지.
정말이지 귀찮은 몸이었다. 다시 옅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이완시켰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린다.
“들어와.”
“주인님.”
집사는 눈치껏 필요한 것들을 챙겨 왔다. 그리고 좋지 않은 안색으로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주인을 보며 지금 가장 필요할 오메가를 입에 올렸다.
“브라이트 씨를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뭐?”
문득 해진의 부모가 죽었는데도 라일을 우선시하던 집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 방에만 들어가도 경기를 일으키는 녀석에게 대체 뭘 하라는 거지.
아무리 집사의 충성심을 인정한다지만 조금 과하다. 계속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집사의 행동들이 오늘따라 두드러졌다. 안 그래도 찌르는 듯한 고통으로 예민한 상태라서 라일은 화를 숨기지 않았다.
“집사.”
“네, 주인님.”
게다가 라일은 이미 해진을 가만히 두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었다. 이건 집사의 권한을 넘어서는 건방진 짓이었다. 그가 다 죽어가는 녀석에게 손대는 파렴치한 짓을 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지금 이따위 말을 해서는 안 되리라.
그래서 거칠게 집사를 다그쳤다. 실수는 그 정도면 차고 넘쳤다.
“내가 진을 가만히 두라고 분명 얘기했을 텐데. 감히 명령을 우습게 아는 건가?”
“하오나, 주인님의 몸 상태가…….”
몸 상태가 걱정이라면 다른 오메가를 부르라는 소리를 해야 맞다. 저렇게 방 밖으로 나올 생각도 못 하는 해진을 부르겠다는 매정한 소리가 아니라.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집사의 알파 페로몬도 유난히 거슬렸다. 다시는 저 입에 해진의 이름을 담지 않길 바랄 정도로 불쾌하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나가 봐.”
“……알겠습니다.”
집사는 순순히 고개를 숙이곤 뒤로 물러났다. 라일은 짜증스럽게 다시 의자에 길게 기대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의 동요가 커서 그런지 머리가 다시 쪼개질 듯 아팠다.
그 와중에도 라일은 집사의 태도에 대해 좀 더 명확한 조치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자꾸만 톡톡 거슬리던 감각들이 일순 송곳처럼 그의 머리를 찌르는 듯했다. 역시 내일 출근 직전에 다시 한번 단단히 당부해야겠다.
일단 지금은 이 정도로 명확하게 말해 두었으니 괜찮으리라. 집사는 늘 그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순종해 왔으니까.
그래서 라일은 이 무의식적인 믿음이 끝내 무슨 일을 만들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집사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라일의 행동이 최근 무척 이상하다.
페로몬 체증이 심해지면 일에 지장이 간다. 그의 주인은 일에 지장이 가는 걸 그 무엇보다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고작 오메가의 투정 따위를 이렇게까지 봐줄 이유가 없었다. 라일이 본격적으로 회장 자리에 앉은 이후에는 건강 문제로 일찍 저택에 돌아온 일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였다.
특히나 저 열성 오메가 놈을 싸고도는 모습이 집사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귀찮아하는 주인을 위해 매번 하던 ‘준비’도 그만두게 하더니, 어느 순간 오메가 놈의 식사를 챙기라고 성화였다. 저게 꼭 제 짝을 챙기는 알파 같지 않은가. 그도 열성이지만 알파이기에 이런 종류의 경계에는 민감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선대의 일로 혐오감이 짙어도 제 주인은 어쩔 수 없는 알파였다. 애초에 같은 알파로서 주인을 동경하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오메가를 멀리하는 걸 집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페로몬이 섞이면 자연스럽게 반응하게 되는 것을 뭐 하러 참는단 말인가.
어쨌든 주인이 매번 페로몬 해소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느니 이쪽이 훨씬 나았다. 문제는 하필 그 대상이 해진이라는 점이었다.
집사는 다시 초조하게 손바닥을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저택의 운전사 자리에 넣어 준 친척은 아직 무사히 근무하고 있었다. 본래 저택의 사용인들은 철저하게 신원 검사를 해야 들어올 수 있었다. 이건 분명한 집사의 월권행위였다.
오메가가 말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듣고도 주인이 무시했는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만약 운전사를 문제 삼을 거라면 진작에 조치가 취해졌을 터.
문제는 그 운전사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집사는 얼마 전에 또 해진의 옷장에서 옷가지가 사라졌다는 걸 보고 받았다. 한번 도둑질에 맛 들인 사용인들이 그새를 못 참고 건드려 버린 것이다. 한 놈은 특히 옷을 가지고 나오는 장면을 오메가에게 정면으로 들키기도 했다고.
“병신 같은 새끼들…….”
할 거면 흔적이 안 남게 해야지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주인이 직접 명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일을 저지르면 곤란하다. 게다가 해진의 방이 본관으로 옮긴 이상 함부로 드나들면 자칫 큰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멍청한 사용인들은 정도를 몰랐다. 뒤늦게 알아차린 집사가 되돌리려고 했을 땐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저번 계약 당시 해진을 병원으로 데려가지 못했던 것, 그의 물건을 횡령한 것 등등. 해진과 얽힌 집사의 과오가 너무 많았다. 분명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들이 뒤를 돌았을 땐 어느새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무거운 잘못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집사를 향해 위태로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행여 주인이 저 오메가를 계속 곁에 두기라도 한다면.
“안 되지, 그건 안 돼…….”
그랬다가는 평생을 바쳐 온 이 일을 잃게 되리라. 단순히 실직으로 끝나면 다행이었다. 자칫하면 노후 자금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소송에 휘말리리라.
만약 해진을 내쫓을 수 있다면?
“…….”
그 하나만 사라진다면 아무것도 들키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라일이 한번 오메가에 대한 혐오를 조금 해결했다면 다른 오메가에게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해진이 하루라도 빨리 이 저택을 나가 줘야 했다. 행여 라일이 애먼 알파의 소유욕이라도 깨닫기 전에.
문득 정신을 차린 집사는 다급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방으로 가는 길은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한적했다.
“흠흠.”
아니지. 그는 지금 고작 제가 한 일이 들킬까 봐 이러는 게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주인을 위해서였다.
선친이 너무 일찍 가 버린 탓에 집사는 주인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본 유일한 어른이었다. 전대 집사도 그 사건 이후로 급히 사임했기 때문이다.
물론 라일은 어른의 손길이 필요한 그런 아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집사는 이 순간 자신이 라일을 위해 무슨 수를 써야 한다는 생각을 공고히 했다. 그의 주인이 페로몬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 있지 않은가.
설령 처음으로 주인의 명령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마침 좋은 방법이 하나 있었다. 어느새 제 방에 도착한 집사는 구석진 서랍장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투명하고 무미 무취의, 무언가에 타 넣기 좋아 보이는.
“……이거라면.”
오메가용 히트 사이클 유도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