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27화 (27/101)

#27

원래는 콧대 높게 구는 오메가와 재미를 보려고 사 둔 비싼 약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장 라일의 이상 반응도 해결하고 눈에 거슬리는 오메가도 처리할 좋은 방법이 아닌가.

분명 페로몬 정체를 해소해 정신이 든 라일은 다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리라. 애초에 집사는 이걸 자신이 먹였다는 것도 숨기고 해진에게 뒤집어씌울 작정이었다.

가끔 어떤 열성 오메가들은 실낱같은 희망으로 히트 사이클을 이용하곤 했다. 본래는 노팅 없이는 임신 확률이 극히 낮지만, 러트나 히트 사이클 기간에는 장담할 수 없었다. 특히나 히트 페로몬에 정신이 나간 알파가 혹 흥분해서 노팅이라도 하면 금상첨화라는 생각으로, 오메가들은 종종 이런 짓을 벌인다고 들었다.

라일은 본래도 오메가가 질척거리는 걸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해진의 히트 사이클 때도 거부감을 보였던 걸 집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해진이 히트로 인해 오메가 티를 잔뜩 낸다면 혐오감을 다시 일깨우리라.

게다가 정신이 들었을 때, 녀석이 임신이라도 할 작정으로 덤벼들었다는 걸 알면 분명 크게 분노해 내치겠지.

이 모든 건 어디까지나, 라일을 위해서였다.

***

저녁이 다 된 시간, 멍하니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와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해진은 흠칫 놀란 몸을 진정시키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날의 노크 소리가 아니라며 스스로를 애써 다독였다.

그러나 이윽고 문이 열리고 집사의 검은 양복이 보이는 순간, 해진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브라이트 씨.”

“…….”

지난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음식 트레이가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식사 시간이 되면 사용인들은 해진의 허락도 없이 방에 불쑥불쑥 들어오곤 했다. 마치 그의 거부는 의미가 없다는 것처럼.

그러다가 오늘은 아예 집사가 나타났다. 저번에 나가라고 단호하게 내보낸 뒤로는 해진과 마주치는 것도 피하던 사람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또 만면에 웃음을 걸고 등장한 그가 보기 싫었다. 트라우마를 애써 억누른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저 트레이도 싫다. 본래 이렇게까지 음식을 거를 생각이 아니었어도 거부감이 들 만한 일이었다. 며칠째 저 자리에 서서 사용인들이 그를 감시하는 것도 거북했다. 그저 가만히 있고 싶을 뿐인데 왜 이리도 그를 가만두지 않는 걸까.

“자, 어서 드시죠. 너무 적게 드시면 안 됩니다.”

“……나중에…….”

“브라이트 씨.”

“…….”

다른 사용인도 거북한 마당에 집사를 앞에 두고 태연히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 방금 또 그날의 일을 떠올린 탓에 그렇잖아도 없던 입맛이 싹 사라졌다.

그래서 며칠 체념으로 순응하던 해진은 오랜만에 거부감을 내비쳤다. 그 순간 웃음기를 싹 지운 집사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억지로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과한 악력에 해진은 무심코 인상을 썼다. 그런데도 집사는 음식까지 하나 집어서 그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주인님께서 잘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르셔야죠.”

“윽…….”

억지로 입 안에 들어온 고기를 씹으며 해진은 뒤로 물러났다. 다행스럽게도 이 이상 할 생각은 없는지 집사는 한 발 물러났다. 덕분에 해진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입에 들어온 것을 씹어야 했다. 거북함과 서러움을 고기와 함께 목구멍으로 삼킨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

아직도 귓가에는 그날의 노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집사의 검은 옷이 눈을 감아도 불쑥불쑥 그의 상념을 침범할 때가 많았다.

“자, 천천히 드시죠. 어서.”

“…….”

포크를 쥔 손이 미미하게 떨리는 걸 해진은 억지로 힘주어 버텼다. 차라리 빨리 입에 욱여넣는다면 집사도 빨리 나가겠지 생각하면서.

집사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런 해진을 지켜보았다. 한 입씩 넘길수록 해진은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참아야 했다. 앞에 놓인 음식이 무슨 맛인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 드셨군요.”

“…….”

마지막 고기를 삼킨 해진은 입을 가린 채 대꾸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음식을 다 비웠다는 사실이 마음에 드는지 집사는 미소를 지으며 트레이를 수거해 갔다.

방 밖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해진은 다시 답답한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집사까지 나서서 저렇게 행동하는 걸 보니, 라일이 이번엔 참 단단히도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좀 마른 게 무에 대수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이렇게 억지로 밥을 먹여서 뭘 하려고.

그날 해진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거북한 속이 자꾸만 안에서 요동쳤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그냥 이 저택을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서러움과 함께 억눌렀다. 차라리 라일이 식사 따위를 챙기지 않았다면 이대로 놓아줄 거란 희망을 품었을 텐데.

그렇게 한참이나 괴로움에 시달린 끝에 잠든 깊은 밤. 갑자기 몸에서 괴로운 열기가 솟기 시작했다.

***

“흐윽…….”

심장이 아플 만큼 거세게 뛰었다. 온몸이 뜨거워서 벅벅 긁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꿎은 옷 위를 잡아 뜯어도 이 쥐어짜는 듯한 고통은 가시질 않았다.

오메가로 발현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이 감각은 몇 번밖에 겪어 보지 못했다. 그래도 해진은 이게 히트 사이클의 전조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만 멍한 머리는 그 와중에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히트 사이클 주기가 불규칙하다 한들, 며칠 전부터는 먼저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변화하곤 했기 때문이다. 분명 저녁까지만 해도 히트 사이클이 올 만한 몸 상태는 아니었는데.

최근에 심적으로 동요할 일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끔은 이런 갑작스러운 히트 사이클도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해진은 자꾸만 억지로 제 입에 음식을 욱여넣던 집사가 떠올라 불안함을 감추질 못했다. 제 몸에서 페로몬이 마구 뻗쳐올라 허공으로 흩어지는 게 꼭 비죽비죽한 가시가 몸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것 같다.

이윽고 달도 없는 어두운 밤, 그의 방문이 갑작스레 열렸다.

“……흥. 꼴에 오메가라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멋대로 들어온 집사를 보며 해진은 절망에서 허우적거렸다.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은 왜 항상 빗나가질 않는 걸까.

“일어나.”

“시, 싫…….”

“조용히 해. 성가시게 굴기는. 쯧.”

한 손으로는 손수건을 쥔 탓에 집사는 한 손으로만 해진을 붙잡아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 그런데도 해진은 그 악력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부실한 몸 상태에 더해 집사의 알파 페로몬이 찍어 누르듯 그를 잠식했기 때문이다.

집사도 같은 열성이라 평소라면 어느 정도 거부를 했을 텐데, 히트 사이클이 온 상황에서는 그저 정신을 차리기도 버거웠다.

“아, 윽……!”

해진이 중간에 엎어지든 말든 집사는 계속 우악스럽게 그를 잡아끌었다. 침대에서 막 끌려 나온 모양새로 해진은 긴 복도를 비참하게 질질 끌려갔다.

처음에는 집사가 자신을 겁간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내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보며 해진은 점점 까맣게 가라앉는 정신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라일의 페로몬을 접촉한다면 정말이지 큰일이 날 텐데.

다만 생각과는 다르게 해진의 몸은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사용인들은 없는 어두운 복도라서 이 비참한 꼴을 널리 안 보이는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이 상황에서도 다른 이의 시선을 걱정해야 한다는 게 해진은 한없이 고통스러웠다.

이윽고 한 번도 들어선 적 없는 낯선 방문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저 안에 라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이러려고 그렇게 억지로 밥을 먹였구나.

몇 번이고 속으로 자문해 보아도 이 상황은 라일의 의지일 게 뻔했다. 억지로 히트 사이클을 일으키는 약까지 먹이고 편하게 안으려는 수작이었을까. 자신이 제대로 계약을 이행할 수 없어서, 그 싫은 히트 사이클마저 이용할 생각을 했을까.

“으, 시, 싫어. 제발…….”

“후…….”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함에 해진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는 사실이 그를 한층 좌절하게 했다. 부모님의 죽음에도 흘리지 못하던 눈물을 결국 비참함에 몰려 뚝뚝 떨구고 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서글펐다.

“얌전히 들어가.”

“윽.”

중간중간 음욕에 찬 눈길로 해진을 쳐다보던 집사는 가까스로 그를 라일의 방 응접실에 집어 던졌다.

힘없이 몸에 닿는 카펫의 감촉을 느끼는 사이 뒤에서 문이 철컥 닫혔다. 번뜩 고개를 든 해진은 얼른 돌아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밖에서 잠그기라도 했는지 헛손질만 할 뿐이었다.

“안 돼…….”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라일의 침실과 이어진 거대한 응접실이 눈에 들어온다. 곳곳에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방문들이 많이 보였다. 분명 처음 보는 구조였으나 해진은 너무나도 손쉽게 라일의 침실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페로몬 때문에.

“흐, 으……, 흑.”

무릎이 덜덜 떨렸다. 다리 사이에는 기분 나쁜 열기가 몰려들고 있었다. 히트 사이클을 몇 번 겪지 못한 해진은 이런 자극적인 감각에 전혀 면역이 없었다. 그나마 한 번 실수로 라일과 히트를 보낸 뒤로는 전조 증상이 오자마자 미리 약을 먹곤 했으니까.

잠깐 정신이 아득해진다. 눈을 감았다 뜨니 자신이 어느새 라일의 방문 앞까지 기어 왔다는 걸 깨달았다. 푹신하게 감겨드는 카펫의 감촉마저 자극적이었다. 내뿜는 숨결이 너무나도 뜨거워서 날숨에 얼굴이 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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