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보는 중
그런데 조금 전까지 어여쁜 신음을 흘리던 해진이 어딘가 이상했다. 그리고 느껴지는 건 극도의 흥분 사이에 간간이 숨어 있는 두려움.
왜 날 두려워하지.
이성이 마비된 라일은 본능으로 판단했다. 자신이 해진과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그저 눈앞의 그에게 매몰되어 있었다.
아직까지 해진의 페로몬은 알파의 음심을 유혹하는 빛을 띠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그는 일단 그 얼굴을 보는 건 포기하고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비 내음을 닮은 해진의 페로몬이 그런 본능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온몸 구석구석까지 전부 저릿해질 정도로 강렬한 쾌감은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했던 종류였다. 본능에 잠식된 라일은 홀린 듯이 계속 해진의 몸을 탐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처럼.
특히나 이 자세는 묘한 익숙함마저 느껴진다. 제 아래 깔린 해진을 으스러지듯 끌어안으며 라일은 뼈가 툭 불거진 어깨를 애무했다. 익숙한 자세와는 다르게 사뭇 낯선 감촉이다. 입술 끝에 보드랍게 들러붙는 피부와 체향이 낯설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때 다시 크게 흠칫 놀란 해진에게서 감정이 쏟아졌다. 또, 두려움.
갑작스럽게 저를 거부하고 또 두려워하는 페로몬에 라일은 위기감을 느꼈다. 집착으로 끈적하게 뭉친 본능의 밑바닥이 고개를 쳐들었다. 처음으로 찾은 안식이었다. 그가 혐오감을 느끼지 않은 유일한 페로몬이었다.
무엇보다, 해진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놓치면 안 된다.
“아, 으, 아……!”
그 일념 하나로 라일은 본능에 저를 맡겼다. 크게 놀란 듯 앞으로 기어가려는 해진을 꽉 붙잡았다. 진작 이렇게 품 안에 가득 안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스쳤다.
그의 성기 끝이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질척하게 젖은 해진의 안쪽은 예전과는 달리 수월하게 그의 성기를 삼켜냈다. 빠짐없이 제 아래를 감싸는 해진의 내벽에 라일은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다는 열망을 감추지 않았다.
“아, 아읏, 흐, 으…….”
파들파들 떨리는 해진의 몸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래서 라일은 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불쑥 성기의 끝부분이 길어지다가 안쪽의 살짝 막힌 부분을 퉁퉁 건드렸다. 이윽고 성기는 제가 가야 할 길을 찾아냈다.
오메가의 자궁구를 거칠게 열어젖힌 성기는 그대로 그 속으로 진입했다. 그리곤 다시는 나가지 않을 것처럼 제 체구를 점점 동그랗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아, 아……, 아……!”
해진의 몸은 이제 라일까지 흔들릴 정도로 크게 요동쳤다. 엎드린 자세가 조금 부담이 된다는 걸 발견한 그는 해진을 끌어당겨 옆으로 눕게 했다.
더듬더듬 그러쥐고 있던 손을 내리자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가 느껴진다. 자신으로 꽉 찬 그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큰 충족감을 알려주었다.
놓쳐서는 안 된다. 절대로.
“흐윽…….”
그렇게 몇 시간이나 라일은 해진의 안쪽을 차지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제가 쏟아낸 정액이 해진의 속을 가득 채워 흘러넘칠 때까지. 집요하게.
***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해진은 바싹 마른 자신을 느꼈다. 이리도 버석버석하니 불이 쉬이 붙는 것도 당연하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눅눅한 욕정에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사이 몸속을 맴돌던 페로몬이 잔뜩 빠져나간 것 같았다.
뻑뻑한 눈을 돌리다가 자신이 아직도 라일의 침대 위라는 걸 눈치챘다. 창밖은 이미 어슴푸레한 색깔이다. 먹먹한 머리로도 해진은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곁에는 라일이 잠들어 있었다. 정사가 끝나고 제 곁에 잠들어 있는 라일이라니, 제게 사근사근한 사용인들만큼 비현실적이다. 그제야 해진은 겨우 깨달았다. 그 역시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그 이유마저 고민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다. 해진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다시피 내려가 제 옷을 찾았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것들을 주워 입는데 온몸이 끈적거렸다. 지금 느끼는 비참함이 잔뜩 들러붙은 것처럼.
라일이 왜 제 옆에서 잠까지 청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페로몬이 다 해소된 이상 곧 정신을 차리리라. 그러면 애꿎은 해진만 제 방에서 꺼지지 않았다는 질책을 듣겠지. 너덜너덜한 제 몸을, 더는 질책 근처에 둘 수가 없었다.
겨우 옷을 대충 꿰입으니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이 바로 앞이었다. 해진은 충동적으로 창틀을 짚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순간 아래로 보이는 땅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
벌벌 떨리는 손은 차마 창문을 열지 못했다. 몇 번이고 머리로는 창문을 열어젖히는 상상을 했으나, 끝내 그러질 못했다.
고민만 하는 사이, 어느새 너른 초원이 보이는 저편에서는 해가 떠올랐다. 희미하기만 하던 지평선이 어느 순간 팍하고 터지듯 빛으로 휩싸였다. 여태 어두웠던 것이 다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한참이나 그걸 바라보던 해진은 겨우 뒤로 돌아 비척비척 걸었다. 돌아갈 곳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 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에 잔뜩 고인 라일의 페로몬을 헤치고 나오니 아팠다. 그저, 모든 곳이.
***
“…….”
반짝 눈을 뜬 순간 라일이 느낀 건 극도의 청량함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그는 한 번도 묵직한 페로몬의 영향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특히나 ‘그 사건’으로 우성화된 페로몬은 갈수록 질풍노도처럼 날뛰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이런 증상은 심화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리도 맑은 정신이라니.
얼떨떨하게 몸을 일으킨 라일은 정신과는 다르게 몸은 몹시 찝찝하다는 걸 느꼈다. 평소 덥게 자는 걸 선호하지 않기에 무척이나 이상한 상태였다.
그리고 침대 옆은 비어 있었다.
청량함을 느낀 것도 잠시, 그의 페로몬이 극도의 불안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심장에는 갑자기 추를 욱여넣은 듯 묵직한 감각이 둔중하게 들었다.
누군가가 누워 있었던 듯 푹 파인 자리를 보며 라일의 머리는 어젯밤을 회상했다. 모처럼 맑아진 머리는 기민하게 돌아가며 필요한 모든 것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하나도 남김없이, 어제 이곳에서 해진과 무엇을 했는지.
“……이게 무슨.”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말았다.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를 멋대로 안은 것도 모자라 노팅까지 하다니. 그것도 그 행위 자체에 트라우마를 안고 쓰러진 사람을 말이다.
우성인 자신은, 힘들긴 해도 해진의 히트 사이클도 버텨 냈어야 했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본능에 저를 맡길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감각이 그를 쥐어짜듯 괴롭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런데 왜 옆이 비어 있지?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라일은 무의식중에 침대 밑으로 내려섰다. 가운을 꿰입는 손길은 성급했다. 다리가 의지를 미처 보내기도 전에 절로 움직였다.
해진은, 어디 있지.
문을 박차고 나간 라일은 홀린 듯이 움직였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으면서도 걸음걸이의 방향은 퍽 확고했다. 이상하게도 해진의 페로몬이 마치 공기 중에 색을 칠해 둔 듯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페로몬은 불안하게 방 밖으로 향해 있었다. 그것을 따라 라일은 다급하게 복도로 나왔다. 드문드문 움직이던 다리는 이내 흡사 달리는 것처럼 빨라졌다. 이게 이상한 걸 알면서도 그는 점점 빨라지는 걸음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거의 기다시피 걸어갔는지 해진의 페로몬은 유난히 바닥에 쓸쓸하게 고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계단에서는 한층 얼룩덜룩해지는 그 궤적을 보며 라일은 끝 모를 갈급함을 느꼈다. 머지않아 그는 페로몬이 가장 짙게 느껴지는 곳으로 다다랐다. 새로 배정한 해진의 방이었다.
녀석의 방이 이렇게 멀었나?
“똑바로 서! 감히 이 저택에서 이런 짓을!”
라일은 불안한 페로몬의 궤적을 보며 저택 어딘가에 해진이 쓰러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녀석의 방에서는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집사의 목소리가 무슨 일인지 복도 밖까지 커다랗게 흘러나왔다. 멀리서부터 해진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개방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막연한 불안감이 넘실댄다. 기이한 감각에 라일은 인상을 쓰며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방 밖에서 비죽비죽 웃음을 흘리며 안쪽을 바라보던 사용인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라일을 보고 당황한 낯을 했다. 그들은 얼른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가렸으나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사용인의 얼굴이 왜인지 라일의 시야에 콱 박혀 들었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매, 조롱의 의미를 확연하게 담은 눈빛들.
그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라일의 시선이 오랫동안 사용인들의 뒤통수에 들러붙었다. 사위가 이상할 정도로 느릿하게 흘러간다. 발걸음은 아직도 이리 다급한데 흘러가는 시간은 홀로 느려지기로 한 것 같았다.
그렇게 해진의 방에 들어서 시선을 앞으로 한 그 순간, 라일은 고요히 숨을 삼켰다.
“네놈이 한 짓을 내가 똑똑히 보고할 거다. 어떻게……, 아니, 주인님!”
“…….”
심장 박동 소리가 너무 커서 집사가 지르는 소리는 거의 듣지 못했다. 시선은 계속 침대 위에 있는 해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처참하게도 너덜너덜한 해진에게.
집사에게 한쪽 멱살을 잡힌 해진은 종이 인형처럼 침대 위를 나부끼고 있었다. 집사가 소리를 지르며 그를 계속 이리저리 흔들었기 때문이다. 숨이 막히는지 양손을 들어 올린 모습은 힘이 없었다. 대충 꿰입은 옷은 마치 라일의 방에 찾아왔던 밤처럼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렇게 드러난 해진의 상반신에는 라일이 남겨 둔 붉은 흔적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