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마침 잘 오셨습니다. 글쎄, 오늘 청소를 하다가 이 방에서 이걸 발견했지 뭡니까.”
집사가 그를 향해 뭘 내밀었으나 라일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해진의 몸에 있던 붉은 흔적이 마치 물감처럼 번져 그의 시야를 잠식했다. 밝은 파스텔 색조로 꾸며 둔 해진의 방이 온통 끔찍한 피로 물들기라도 한 것처럼.
라일은 마치 고장이 난 것처럼 터벅터벅 앞으로 걸었다. 분명 청량하기 그지없던 머릿속은 이미 핏빛으로 진탕이 된 지 오래였다. 녀석의 얼굴은 몸에 핀 열꽃처럼 붉었다. 숨이 막히는 건지 열이 나는 건지 모호한 얼굴이었다.
그때였다. 이리저리 혼몽하게 나부끼던 해진의 시선이 아주 느릿하게 라일에게 향한 것은.
그 눈동자는 원망조차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이놈이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당장 쫓아내야……, 끄으으, 왜, 왜 그러…….”
어느새 해진의 바로 앞까지 도착한 라일은 아까부터 거슬리던 집사의 팔부터 잡아챘다. 부러트릴 듯 가해지는 거센 압력에 집사는 금방 꼬리를 말고 해진의 멱살을 놓아 버렸다.
바람에 지는 낙엽처럼 녀석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침대로 툭 떨어진다. 제 손에 잡혀 있던 집사의 팔을 더러운 것처럼 털어낸 라일이 저도 모르게 그를 받아 들었다.
마치 라일을 쳐다본 게 마지막 기력이었다는 것처럼 해진은 두 눈을 꼭 감은 채였다. 새까만 속눈썹은 불규칙적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품에 넣은 그 몸은 불덩이 같았다.
“주인님, 혹 불편하신 곳이라도…….”
“……불러.”
“네?”
멍청하게 되묻는 소리가 들리자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감각이 들었다. 줄곧 해진에게만 고정했던 시선을 겨우 집사 쪽으로 돌린다. 이제 라일은 제 시야를 온통 잠식했던 붉은색이 걷잡을 수 없이 짙어짐을 느꼈다.
그의 요동치는 감정에 따라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페로몬이 방 안을 메웠다. 베타인 사람들도 무심코 한기를 느낄 정도로 진한 파동이었다.
“의사를 불러! 당장!”
“네, 네!”
그의 분노 가득한 고함에 문 쪽에 서 있던 사용인 하나가 뛰쳐나갔다. 다른 이들은 이 상황이 무척 뜻밖이라는 듯 얼어붙은 채로 라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일은 그 반응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뜻밖이라니. 이렇게 해진을 구경거리인 양 지켜보고 있던 것도 모자라, 의사를 부르는 게 의외라는 저 반응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그의 혼란과는 다르게 심장은 착실하게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축 늘어진 해진의 무게감은 너무나도 가벼워서 오히려 라일을 숨이 막힐 정도로 잔뜩 짓누르고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짓들이야.”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겨우 짓눌린 목소리를 내었지만, 그의 질문은 공허하게 방 안을 맴돌 뿐이었다.
거세게 내뿜고 있는 페로몬과는 다르게.
***
숨 막히는 침묵이 라일의 서재를 지배했다. 급히 저택으로 불려 온 비서는 아까부터 찌릿한 감각이 피부를 찌르는 걸 느꼈다. 베타인 제가 느낄 정도니, 알파인 집사는 아주 숨이 막힐 지경이리라. 그 증거로 책상 앞에 서 있는 집사는 거의 목이 졸린 듯한 얼굴이었다.
본래라면 페로몬을 한 가닥까지 철저히 관리하는 라일이다. 이 순간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하다는 증거였다. 그의 숙부가 베르무스라는 이름에 먹칠을 해 가면서까지 라일을 공격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톡톡 책상 위를 두드리는 소리는 그 사나운 페로몬과는 반대로 무척이나 일관적이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울리는 저 소리가 그래서 더 소름 끼친다고, 비서는 무심코 생각했다.
그나저나 집사가 말한 게 사실일까. 비서의 시선이 라일이 아까부터 노려보고 있는 작은 병으로 향했다.
“다시 말해 봐.”
“그……, 오, 메가 놈의 방에서, 흠흠, 발견한 겁니다. 화장실 구석에, 크흠, 숨겨 두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주변에서 들어 봐 아는데, 히트 사이클 유도제인 게 틀림없습니다.”
목이 졸린 듯 더듬거리던 집사는 마지막에 가서는 제법 의연하게 말을 마쳤다. 그걸 발견한 자신이 못내 자랑스럽다는 듯 애써 허리를 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물론 곁에 선 비서가 보기엔 부질없는 짓거리였다.
라일의 시선은 계속 작은 유리병에만 못 박혀 있었다.
“진이 저런 걸 구해 올 시간이 있었나?”
다시 침묵하던 라일이 불쑥 물었다. 그의 질문에 집사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것이……,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소름 끼치게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손가락이 뚝 멈췄다.
“나가 봐.”
“네. 그 오메가 놈은…….”
“나가 봐. 진은 그대로 두고.”
“……네.”
어딘가 다급한 목소리로 집사가 물었으나 라일은 차갑게 명령하기만 했다. 고개를 조아린 집사는 이 페로몬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게 기꺼운 듯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집사의 말에 의하면 해진이 직접 저 히트 사이클 유도제를 먹고 라일의 방으로 향했다고 한다. 비서가 해진이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냐는 질문을 던졌을 땐, 뻔하다는 듯 임신이 목적이었던 것 아니겠냐고 집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몇 번을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약병은 확실한 증거로 해진의 방에서 발견되었다. 해진이 밤중에 몰래 라일의 방으로 향하는 걸 봤다는 사용인의 증언도 있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해진이, 차라리 정신을 잃고 계약을 이행하자고 이런 짓을 했을까.
“…….”
석연치가 않았다.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해진이 이곳에 돌아온 뒤 라일의 눈꺼풀 안쪽에 자리 잡은 티끌은 이제 눈동자를 살라 먹을 듯 존재감을 키웠다.
안 그래도 날이 밝는 대로 집사에게 태도를 똑바로 하라고 일러둘 작정이었다. 그러나 간밤에 일어난 일이 너무 예상 밖이 아니던가.
해진이 진짜로, 저걸 제 손으로 삼켰다고?
“어찌할까요. 회장님.”
“…….”
비서의 시선도 계속 이 약병을 향하고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리고 라일은 한 가지 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집사는 왜, 해진을 잘 모르고 있을까.
그의 성격 따위를 파악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약병을 구하러 나갈 시간이 있었냐는 물음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게 거슬렸다. 매번 녀석이 식사했냐는 물음에는 바로바로 대답이 나온 적이 없었다. 손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왜 항상 모르고 있었을까.
“진에게 경호를 붙여. 그리고, 사용인들을 전부 억류해.”
“……전부 말씀이십니까.”
어찌할지 묻긴 했으나 라일의 명령은 퍽 급작스러웠다. 사용인을 전부, 그것도 억류하라니. 저택은 거대한 만큼 많은 수의 고용인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부’라는 말에는 방금 결정적인 증거를 가져온 집사까지 포함되었다.
“그래.”
비서의 되물음에도 라일은 덤덤하게 긍정을 내비쳤다. 일단 고개를 숙이며 외부의 경호팀에 연락을 취하던 비서는 다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라일의 명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사해.”
“뭘 조사할까요.”
줄곧 유리병에 향하고 있던 라일의 시선이 겨우 비서를 향해 올라갔다. 무표정하게 유리병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제게 닿는 사나운 눈매를 보며 비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앞으로 아주 큰 일이 벌어질 것이란 예감이 든다.
“진이 이 집에 온 뒤로 있었던 모든 일을.”
라일은 자신이 근본적인 무언가를 놓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차마 페로몬조차 갈무리하지 못한 그는 이제서야 참담하게 인정했다. 그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겨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이, 계속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참으로 때늦은 자각이었다.
<챕터 5>
‘아, 거 높으신 분이랑 한 계약은 내가 알 턱이 있나. 어쨌든 난 오늘 차 끌고 나가라는 명령을 못 받았다니까?’
“…….”
라일의 시선은 업무용 태블릿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에서 떨어지질 못했다.
차고지로 사용되는 공간은 저택을 빙 두른 높은 담에 맞닿아 있었다. 담에는 감시를 위한 CCTV가 있지만, 사용인 대부분은 그것이 녹음까지 된다는 점은 모른다.
참으로 오랜만에 라일은 저택 내외부의 영상을 담당하는 보안팀을 호출해야 했다. 저택까지 그들을 불러들이는 건,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위를 확인한 날 이후 14년 만에 처음이었다.
보안팀과 경호팀은 일부러 분리해 두었기에 저택의 모든 감시 자료는 베르무스 본사의 보안팀으로 전송된다. 저택의 경호팀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자료를 조작할 우려가 있기에 선대가 해 둔 조처였다. 물론 라일은 그건 핑계에 불과하고 아버지의 의심병이 도진 결과라는 걸 안다.
당시에도 부모님이 죽어가는 장면을 뽑아 와 어린 라일에게 보여줘야 했던 보안 팀장은, 이제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서재로 들어서며 이 저택이 어딘가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높기만 한 무정한 담벼락은 이 어린 주인에게 매번 몹쓸 장면만 보여주게 만들지 않는가.
‘씨팔, 몸 파는 애새끼 주제에 더럽게 뻣뻣하게 굴어.’
운전자로 보이는 인물 앞에 선 해진이, 라일은 참 작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저런 어이없는 폭언을 듣고도 녀석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영상에서 물러났다.
그 뒤로도 한참, 비슷한 시간대의 영상 속에는 해진이 이곳저곳에서 등장했다. 그런데 얼핏 화면 구석에 걸치는 장면만 봐도 누구 하나 제대로 해진을 상대하는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