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31화 (31/101)

#31

저렇게 아픈 다리를 이끌어 가며 찾는 상대는 뻔했다. 집사를 찾아 계약에 쓰여 있는 제 권리를 주장하고자 했겠지.

해가 질 무렵까지 녀석의 검은 머리는 영상 속에서 나부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늘 저택에 상주해야 할 집사를, 저리도 오래 찾지 못하다니 말이다.

모든 사용인은 현재 대외적으로는 저택의 중요한 행사를 위해 퇴근을 하지 못했다. 거대한 파티 홀에 전부 억류된 사용인들은 이제야 상황을 깨닫고 거세게 반발했으나 라일은 완고했다. 영상을 확인하면 할수록 그 의지는 굳어지기만 했다.

전부가 한통속으로 보였다. 아픈 녀석을 낄낄대며 바라보고 있던 한 사용인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덕분에 저택뿐만이 아니라 본사의 업무까지 마비되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 빌어먹을 감정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갈 길을 찾지 못한다면 지금 당장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이따금 제 행동이 어딘가 지나치게 거세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당장 라일의 의지까지는 바꾸지 못했다.

해일 같은 감정에 잠식된 와중에도 하염없이 영상 속의 해진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어서.

“……저게 언제지?”

“브라이트 씨의 양친이 돌아가시기 사흘 전입니다. 이전 계약이 종료되기 전, 마지막 방문 예정일이었습니다.”

“…….”

영상을 바라보는 라일의 눈이 잔잔하게 떨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침통함을 감추지 못한 비서가 덧붙였다.

“……확인해 보니 저 날 결국 병원에 가지 못하셨습니다. 저희 측의 계약 위반입니다.”

“…….”

‘오늘이 계약서에 명시된 날인가?’

저택으로 잡혀 오다시피 한 해진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물었던 건 그의 부모가 죽기 이틀 전이었다. 라일은 이제야 녀석이 왜 그날 운전사도 없이 도시를 멋대로 헤매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목도했다.

‘그럼 뭐가 문제야.’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내뱉었던 말 뒤에 녀석이 지었던 표정도.

그러고 보면, 허름한 모텔에 주저앉은 해진을 다시 찾아갔을 때도 이상한 일은 있었다. 그때의 해진은 분명 라일이 계약서의 ‘의무들’을 위반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저 말실수라 여겼는데, 실제로 저택 측이 위반한 계약은 한 가지가 아니었던 거다.

대체 녀석 부모의 죽음과 관련해 몇 번의 죄를 지은 건지 가늠조차 힘들다. 그걸 알아야 보상이든 뭐든 시도를 할 텐데.

라일은 아까부터 진탕인 머릿속을 도무지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문제가 생겼다면 해결한다. 그의 오랜 습관이자 능력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도무지 명확한 방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라일은 다시 운전사가 해진에게 폭언하는 영상을 재생시켰다. 지금처럼 초연한 게 아니라 조금이나마 반발하는 그 모습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녀석에게는 그만큼 가족이 소중한 사람들이었으리라. 저런 모욕을 감수하면서도 행여 불이익이 돌아올까 말대꾸조차 강하게 못 할 정도로, 절실한 사람들이었으리라.

그걸 전부 짓밟은 죄를 대체 어떻게 가늠해야 한단 말인가.

“진은, 뭘 하고 있지?”

저택에서 있던 일을 확인하면서 라일은 이따금 발작적으로 물었다. 본의 아니게 라일과 거친 히트 사이클을 보내느라 해진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건강한 상태도 아니었기에 아예 무너져 내린 것이다.

혹 깨어났을 때를 대비해 가운을 입지 않은 의사가 상주하며 그을 돌보고 있었다. 안쪽의 고통이 심할 테니 차라리 수면제로 자는 편이 낫다고 했다. 애초에 잠들지 않으면 바늘을 꽂을 수 없는 상태였다. 영양 보충을 위해서라도 해진은 줄곧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좀 전에 확인한 결과 아직 주무시고 있다고 합니다.”

예상대로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비서는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매번 라일에게 그 상태를 확인시켜 주었다.

참담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라일은, 눈치를 보던 보안 팀장이 내미는 영상을 받아 들었다. 해진이 CCTV에 잡히는 영상을 간추려서 온 모양이었다. 추적하는 이 영상 속의 인물이 누군지 보안 팀장은 섣불리 묻지 않았다.

저택은 도시의 문화유산으로 취급될 만큼 오래된 곳이었다. 그래서 내부에는 중요한 장소를 빼고는 CCTV가 없었다. 그 대신 베르무스가는 사용인들을 눈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방법이었으나 라일은 이를 의도적으로 방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택 내부의 일에 이렇게 관심을 보일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모든 것들은 어차피 회사 건물이나 펜트하우스 쪽에 있었기에.

보안 팀장이 넘긴 영상을 거칠게 쓸어 넘기던 라일은 문득 이상한 걸 발견했다.

이건 뭐지.

담벼락에 붙은 CCTV 중 하나에 공교롭게도 해진의 방이 가까스로 잡혔다. 외부 감시 목적으로 만든 카메라에 잡힐 정도라니. 라일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해진이 본래 쓰던 방이 얼마나 구석진 곳에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식사 시간인지 녀석의 방문 앞으로 사용인들이 음식 트레이를 끌고 왔다.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용인들이 저들끼리 무언가 두런거렸다. 먼 곳이라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깐 몇 마디 주고받던 그들은 이상하게 노크 한 번 없이 다시 트레이를 들고 떠났다.

무언가를 잘못 가져온 것일까. 의아한 마음에 한참이나 그것을 보다 보니 뜻밖에도 방문이 살짝 열렸다. 그 사이로 불쑥 나오는 하얀 얼굴은 해진이다. 라일이 기이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영상 속의 그는 방 밖을 한 번 짧게 확인하고는 기운 없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사용인들이 수거해 간 트레이는 아무리 영상을 뒤로 돌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순간 라일은 바깥에서 쏟아붓는 빗물이 제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감각을 느꼈다.

“진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장면은 없나.”

“식당 말씀이십니까.”

“그래.”

라일의 뜬금없는 소리에 보안 팀장은 제가 들고 있던 장비를 뒤졌다. 그리곤 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브라이트 씨는 한 번도 식당에서 식사한 적이 없으십니다.”

“……한 번도 없다니. 지난 5년간, 한 번도?”

“네. 회장님. 애초에 브라이트 씨는 카메라가 설치된 주요 장소에는 거의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저택 내부에서의 활동이 적으셨던 걸로 추정됩니다.”

오늘은 하필 또 무거운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 이렇게 무거운 비가 도시를 점령하리라.

완벽하게 습도 조절이 되고 있을 저택 내부의 공기가 이리도 눅눅하게 피부를 옥죌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라일은 선연한 촉감이 저를 잔뜩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그 말이 없는 모습을 잠깐 쳐다보던 보안 팀장이 몇 가지 사진을 내밀었다. CCTV의 영상을 캡처해 둔 것들이었다.

“말씀하신 사안과는 관련이 없을지 모르나, 한 가지 이상한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뭐지.”

“몇몇 사용인들이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 특이사항을 보이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러나 일단 기록상의 재산 목록에 결품이 난 부분은 없어서 지금 일일이 실제 물품과 목록, 그리고 사용인 출근 기록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내미는 사진들은 몇 년 전의 같은 날 오전과 오후에 찍힌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몇몇 사람은 옷이 바뀌었고, 또 어떤 사람은 가방의 부피가 달라져 있었다.

한두 번이었다면 눈에 띌 리가 없었다. 그러나 특정 시기를 기점으로 꽤 많은 사용인이 이런 이상행동을 보였다. 빠르게 영상을 재생하는 보안팀에서 특이사항을 눈치챌 정도로 말이다.

대체 이 빌어먹을 저택에서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건지. 인상을 쓰며 사진들을 휙휙 넘기던 라일은 문득 손을 멈추었다.

‘옷장에 입을 만한 게 없더군요.’

빗소리를 뚫고 해진의 말이 천둥처럼 고막을 파고들었다.

밖에서는 타이밍도 좋게 실제 천둥이 하늘을 울렸다. 그 고함 같은 소리를 들으며 라일은 홀린 듯 태블릿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곤 방 밖으로 향했다.

“회장님?”

하나둘 옮기는 발걸음은 이전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성급했다. 고작 한 번 갔던 것뿐인데 녀석의 방으로 향하는 걸음은 익숙하기까지 했다. 뒤에서 놀란 비서와 보안 팀장이 따라붙었으나 라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해진이 쓰던 손님방까지 도착한 라일은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해진은 어차피 지금 다른 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집사가 이곳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는 바람에 방이 엉망인데, 그걸 치워야 할 사용인들도 전부 억류된 탓이다.

저번과는 다르게 응접실에 연결된 모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중 해진이 쓰던 침실 쪽을 잠깐 바라본 라일은 반대로 돌아섰다. 이 호화로운 손님방에 딸린 옷방 쪽이었다.

옷으로 가득해야 할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라일은, 이내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볼품없는 풍경이 그를 반겼다. 본래라면 이 공간은 손님의 편의에 맞춰 각종 의복들이 가득 들어차 있어야 했다. 계절별로 옷을 바꾸는 건 물론, 손님의 기호에 맞게 다양한 소품까지 맞춰 둘 수 있도록 베르무스의 격에 맞는 관례가 존재했다.

그러나 목도리나 시계 같은 작은 소품이 놓여야 할 칸은 아예 비어 있었다. 간단한 보석류와 커프스가 있는 곳도 공허하기만 하다.

기본 셔츠가 걸려 있어야 할 공간도 군데군데 흐트러진 채 비어 있었다. 심지어 한쪽에 외투가 가득 있어야 할 부분에는 지금 계절에 맞는 옷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마치 도적 떼라도 한바탕 휩쓸고 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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