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같이 들어선 보안 팀장은 알 만하다는 얼굴로 어딘가에 연락을 넣었다. 멍하니 옷방 안을 살피며 라일은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이리도 멍청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던가.
“……가린 건 녀석의 눈인데, 정작 내가 눈먼 병신이었군.”
해진이 계약서에 쓰여 있는 막대한 보상 따위를 읽어보지도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녀석에겐 계약서 전체가 믿을 만한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여태 그랬던 대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살게 해 줄 테니까, 계약해.’
자신이 이따위 오만한 말을 던졌을 때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라일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
저택의 소동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라일은 더 발 빠르고 단호하게 움직였다.
일단 미뤄 두었던 회사 업무를 몰아서 처리했다. 갑작스럽게 건강 문제로 사라진 회장이 다시 나타나 흉흉한 기색으로 일을 처리하자 본사 건물의 직원들은 눈치를 살펴야 했다.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달려들고 있었지만 라일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이 혼란스러운 감각이 자꾸만 충동질을 일삼는다.
급한 일만 대충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라일은 서재로 가려던 발걸음을 다급하게 돌렸다. 일단 이 빌어먹을 저택에 도착하고 보니 해진의 소식이 궁금해서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기에.
억류된 집사가 애타게 그를 만나야겠다고 난동을 부리고 있다지만 전부 무시했다.
“사용인 중 몇몇이 그간 있었던 일들을 실토했습니다.”
급히 걸음을 옮기며 듣는 정황은 더욱 기가 막혔다. 베르무스가의 본 저택에서 손님이 배를 곯을 것이라, 대체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고작 어젯밤부터 몇 끼를 굶었을 뿐인데 이리도 쉽게 무너졌다. 고작 몇 시간의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해진의 바짝 마른 몸이, 툭 불거져 겨울 찬 바람을 다 맞고 있던 발목이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가 맨 처음 발견한 화면에서 사용인들은 퍽 자연스럽게도 트레이를 도로 거둬 갔었다. 마치 하루 이틀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놈들을 화면으로 추적해 보았으나 곧 CCTV가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노크도 없이 거둬 간 그 트레이를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해진에게 갔던 그릇들이 비어서 뒤늦게 주방으로 돌아갔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정작 그 음식의 주인인 해진은 그날 내내 굶주렸는데 말이다.
그래서 라일은 이번엔 음식과 관련된 것들을 추적했다.
나온 결과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고작 2년. 그들이 사람 하나를 먹이는 것보다 굶기는 게 편하다는 걸 알아차린 시간이었다.
이 저택에 들어온 해진은 고작 2년 만에 늘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녀석의 계좌에는 유난히 병원 근처의 ATM에서 현금을 인출한 기록이 많았다. 시기는 늘 비슷하다. 2주에 한 번 부모님의 병문안을 가는 날.
병원 측의 CCTV 기록까지 싹 뒤진 결과 늘 병원에 있는 작은 마트에서 돈을 쓴 정황이 발견되었다. 다리가 아픈 녀석에게 저택은 한 번 들어가면 잠깐 밖에 나오는 것도 힘든 곳이었다. 굶주린 배를 겨우 채우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양실조라는 진단이 만성적인 문제였다는 비서의 보고가 떠오른다. 저를 피해 도망친 해진이 약을 했는지 오해나 하던 태평한 자신이 떠오른다.
그게 저택의 문제인 것도 모르고, 해진에게 몸 관리나 하라며 호되게 굴던 자신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가장 최근까지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던가. 그 마른 뼈마디가 떠오를 때마다 라일은 도무지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의 대담한 짓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말씀하신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핀 결과 예상대로 사용인들 몇의 계좌가 이상했습니다. 저택에서 지급한 것 이상의 현금이 종종 입금되거나 씀씀이가 크더군요.”
이렇게 많은 인원을 강제로 억류하고 있는 건 당연하게도 문제가 된다. 그러나 라일은 이 순간 모든 걸 힘으로 찍어 누를 생각을 공고히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겨우 곰곰이 씹어 내린 끝에야 이 기이한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분노였다. 라일은 지금 저택을 페로몬으로 다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속에서 무언가 끓는 걸 느꼈다. 단지 이유를 알 수 없어 겨우 억누르고 있을 뿐.
“그리고 문제의 약은 아무래도 브라이트 씨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애초에 브라이트 씨가 회장님의 방으로 향한 걸 목격했다는 증언은 거짓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집사가 해진을 강제로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라고 하더군요.”
이 증언을 얻는 과정에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일들이 왕왕 벌어졌다. 그러나 라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도록 명령했고 비서는 착실하게 그것을 따랐다.
“그렇게 거짓 증언을 하도록 한 건, 집사라고 합니다. 아마 약을 탄 것도 그가 아닐까 추측합니다만…….”
5년이나 이어진 이 기가 막힌 행보에 비서도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개인에 대한 학대와 범죄를 넘어, 베르무스라는 이름 아래에 벌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다.
대체 이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을까.
왜 여태 아무것도 몰랐을까.
“또한 계약 위반을 저지른 운전사는 집사의 친인척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고용과 관련된 경비 업체 측의 문제도 발견되어 지금 조치 중입니다. 본사 쪽의 인원을 조금 끌어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
저택의 안팎으로 문제가 없는 곳이 없었다. 애초에 적당한 구실만 하면 된다고는 생각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그렇게 죽어 나자빠진 이후 라일은 이곳을 철저하게 잠자는 곳으로만 사용했다. 일이 너무 바쁠 때면 펜트하우스에 머무르는 일도 많았다. 일 년의 절반은 출장 중이기에 더욱더 저택은 단순한 침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건 라일만의 부모님을 모독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베르무스라는 이름을 그저 허울 좋게만 남겨 둔다는 의미로 말이다.
호시탐탐 라일을 견제하던 친척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그가 이리도 홀대하는 상징적인 장소지만 너희는 평생 이곳에 발 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
그런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격정으로 라일은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자신이 대체 해진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일단 걸었다.
그때 계속 보고를 이어 가던 비서가 돌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압수된 집사와 운전사의 휴대폰에서 브라이트 씨의 입막음을 도모한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실제로 협박을 당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
그 말에 라일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비서는 혹시 해진이 여태 잠자코 있었던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염려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라일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만약 그랬다면 차라리 좀 더 숨기려고 들었을 터다. 심지어 해진에게는 더는 약점이 될 만한 부분들이 없었다. 이전에야 가족들로 협박을 당했을지 모른다고 쉬이 상상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제 혼자가 된 해진은 더는 잃을 게 없으니 그간 당한 설움을 표출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해진은 왜, 다시 저택에 돌아온 후에도 그 모든 걸 참고만 있었을까.
“회장님, 아직 깨어나셨다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닌…….”
“조용히 해.”
한번 자각한 분노가 꼭 멋대로 흩뿌린 페로몬처럼 공기 중으로 넘실거렸다. 지금 그가 해진에게 이따위 추궁을 할 상황이 아닌 걸 분명 안다.
그런데도 라일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운전사 앞에서 물러나던 녀석의 뒷모습이 생각나 미칠 지경이었다.
도무지, 지금 당장 해진을 보지 않고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제 앞을 가로막는 비서를 완전히 물린 라일은 기어코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 그는 1층에 있는 손님방을 임시로 사용하고 있었다. 방과 연결된 응접실을 거침없이 지나 녀석이 있을 침실 문을 두드린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으나 무작정 들이닥쳤다.
그런데 막상 들어간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분명히 이곳에 누워 있어야 하는데.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는 이불이 흐트러진 채 비어 있다. 거대한 방은 본래도 가구가 그리 많지 않아 휑한 느낌을 주는데, 이상하게 그 여백이 가슴에 날아와 박힌다.
둥둥 울리는 심장이 익숙하다는 듯 라일을 충동질했다. 거센 빗소리가 하나하나 전부 천둥소리인 양 그를 호되게 질타한다.
해진이 사라졌다.
“……진.”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굳어 있던 라일은 홀린 듯 해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방에는 있어야 할 사람이 없었다.
“의사!”
재빨리 다시 밖으로 뛰쳐나간 라일이 성난 음성으로 의사를 찾았다. 옆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의사가 놀란 얼굴로 달려 나왔다.
“진은 어디 있지?”
“네? 아직 주무시고 계실 텐데…….”
“뭐?”
모르는 사이 해진을 다른 방으로 옮겼으리라 여겼던 라일은 의사가 정확히 그가 나온 방 쪽을 바라보자 단단히 굳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게 언제야.”
“대략 한 시간쯤 전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
걱정스럽게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물었다. 라일은 휙 고개를 돌려 그에게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추궁했다.
“안에 진이 없어. 내가 분명 경호를 명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