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아, 급히 인력 보충이 필요해서 잠시 자리를…….”
기실 해진에게 위해를 가할 만한 모든 인물이 파티 홀에 억류되어 있기에 행한 조치였다. 그러나 번뜩이는 라일의 눈빛을 본 비서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우선순위가 이쪽이 아니었던 듯하다.
“죄송합니다. 향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으로는 안 그래도 최근 중요하게 다뤄지던 해진의 위치를 조금 더 위쪽으로 조정했다.
“당장 입구 쪽에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비서의 말을 들으며 라일은 해진의 부재가 확실해졌다는 걸 비로소 느꼈다.
아까부터 빙글빙글 돌던 세상이 걷잡을 수 없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여전히 단단히 땅을 딛고 서 있었으나 시야는 놀라울 정도로 어지럽다.
세찬 빗소리가 저택의 안쪽까지 침범하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라일은 세찬 빗소리보다 제 심장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
거칠게 낮아진 목소리가 초조하게도 저택을 울렸다.
***
바로 저택의 입구를 확인했으나 일단 정문으로는 통과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대로 멍청하게 서서 소식만 기다릴 수 없던 라일은 다시 해진이 누워 있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이 방에도 작지만 개인 욕실이 딸려 있다는 걸 겨우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어쩌면 깨어난 그가 욕실에 갔을 수도 있는데, 그쪽을 먼저 확인하지 않았다니 멍청한 짓이었다. 당장 침대가 비어 있는 것을 보니 머릿속도 덩달아 텅 비었다는 듯 말이다.
무언지 모를 희망으로 다리가 점점 빨라졌다. 그러나 막상 방에 들어서자마자 라일은 초조하게 얼굴을 쓸어내려야 했다. 활짝 열린 욕실은 한눈에도 안이 비어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뱃속이 잔뜩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꼭 누가 달군 쇠로 제 명치를 푹 찌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쩔 줄을 모르고 라일은 무의식중에 해진의 페로몬을 따라 침대 근처까지 다가갔다.
그렇게 다리가 침대까지 도달한 순간, 그의 시선이 휙 창문 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거센 비가 내리는 날, 창문이 왜인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해진의 페로몬이 그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라일은 단번에 달려가 창틀을 뛰어넘었다. 한번 인식하고 나니 해진의 페로몬이 기이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 방의 창은 본관 안쪽의 뜰로 이어지고 있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나서고 나니 몸으로 사정없이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런데도 라일은 다급한 심정에 그대로 몸을 움직였다. 희미하고 애처로울 정도로 옅은 해진의 페로몬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가 계속되면 페로몬도 곧 사라진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라일은 우산 따위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거침없이 뛰었다. 그의 구둣발에 치인 웅덩이가 사방으로 흙탕물을 튀기며 날뛰었다. 화초까지 마구 짓밟으며 뛰다 보니 어느 순간 잔디가 잔뜩 흐트러진 장소가 보였다.
꼭 그곳에서 누군가 엎어졌던 것처럼.
“진!”
세상이 붉어졌다. 우중충하게 내려앉은 비가 온 마당을 회색빛으로 물들이고 있을 텐데도 그랬다. 이때부터 라일은 반쯤 미친 사람처럼 안뜰을 헤매고 다녔다. 가느다란 거미줄처럼 잔뜩 흩어진 해진의 페로몬을 따라서.
이런 빗속에서는 페로몬이 금방 흩어지기 마련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묘한 상황을 깨닫지 못한 채 라일은 추격을 계속했다. 성급한 발걸음이 어느새 본관 저택의 뒤로 이어진 숲 근처까지 닿았다.
다급하게 건물을 돌아 그곳에 발 디딘 순간 라일은 눈을 크게 떠야 했다. 하얀 옷을 입은 해진이 비틀비틀 걸어가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걸 인지한 순간에는 이미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무거운 비가 오는 날, 해진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터덜터덜 걷고 있다.
“진!”
부름에도 뒤돌아보는 일 없이 비척비척 움직이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니 자꾸만 화가 치밀었다. 그대로 일단 해진의 행방을 확인하고 나니 붉게 물들었던 세상이 겨우 제 색을 되찾았다.
그 걸음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게다가 목적도 없이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다. 저 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숲이 있을 뿐인데.
금방 따라잡은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일단 그 어깨를 잡아챘다.
“진, 멈춰!”
거칠게 몸을 잡아 돌리니 그제야 겨우 그 공허한 시선이 라일을 향했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그는 일순 말을 잃었다.
분명 숨을 쉬고자 해진을 찾았는데 라일은 반대로 숨이 턱 막혔다.
그사이 쫄딱 젖은 해진은 우연히 마주쳤던 어느 날처럼 처량한 모습이었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힌 몸은 퍼렇게 질려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꼴을 기가 막혀서 노려보던 라일의 시선이 해진의 발치를 향했다. 실내화조차 없이 맨발로 잔디밭을 가로지른 탓에 아주 엉망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툭 불거진 그 발목이 보이자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아까 자각한 이 분노는 퍽 쉽게도 그의 안을 잠식했다. 라일은 겨우 숨을 크게 들이켜며 의식적으로 진정하려 했다.
그러나 손바닥에 닿는 해진의 몸이 너무 야위어서, 그 체온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가 성난 페로몬까지 갈무리하지 못할 정도로 격양된 순간이었다.
“제가,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파르르 제 피부에 닿는 숨결이 무척 아팠다.
희미하지만 끈질기게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해진의 페로몬이 어느새 빗줄기보다 강하게 느껴진다. 그게 담고 있는 건 한없이 서러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 감정마저 자기주장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덧없이 흩어지기 일쑤였다.
멍하니 그런 해진의 모습을 살피던 라일은 역시 숨통이 턱 틀어막혔다는 걸 깨달았다. 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묻고 싶었던 말들이 쑥 들어갔다. 생각해 보니 여태 잠들어 있던 해진이 마지막으로 겪었던 일이 무엇인지 기억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알아.”
“…….”
한숨처럼, 라일은 참담한 어조로 해진에게 말했다. 그따위 오해로 이렇게 잡으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때였다. 저도 모르게 훑듯 해진의 온몸을 살피던 그의 시선이 녀석의 한쪽 팔로 향한 것은. 링거를 그냥 잡아 빼 버렸는지 피가 배어 나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톡 흘러나온 핏방울은 해진을 찾고 겨우 돌아왔던 그의 시야를 다시 붉게 물들였다. 그 한 방울이 꼭 내리고 있는 무거운 비에 잔뜩 번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일단 들어가.”
다급하다. 일단 이 무거운 비 아래에 있는 해진을 지붕 밑으로 보내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그가 입은 하얀 옷은 비에 잔뜩 젖어 몸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여전히 마르고 작은 몸이었다. 오랫동안 봐서 손에 닿는 감촉마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몸이었다.
그 윤곽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라일은 반사적으로 제 웃옷을 벗어 주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그 또한 엉망진창으로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일단 해진의 다치지 않은 팔뚝을 잡은 채 저택 쪽으로 걸었다. 무거운 비는 라일의 속까지 금방 스며들었다. 태어나 이렇게 비를 맞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라일은 왜인지 이 발끝까지 젖어 들어가는 감각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 미약하게 저항하는 힘이 느껴졌다. 그는 해진이 저택 밖으로 가려는 듯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는 걸 다시 상기했다. 그 방향이 틀렸기에 망정이지 이 정도 거리라면 저택은 확실하게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애써 그 힘을 무시하며 라일은 계속 앞으로 걸었다. 뻣뻣하게 굳은 목은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녀석의 얼굴에 무슨 표정이 떠올라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몇 번 뒤로 물러나려던 해진은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인지 비틀거렸다. 모든 걸 애써 무시하려던 라일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무의식중에 그 하얀 발목에 시선을 주었던 라일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아.”
그는 그대로 해진의 무릎 뒤로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휘청이는 몸이 아무런 저항도 못 한 채 붕 떠오른다. 쏟아지는 빗물보다도 무게감이 옅어 라일은 턱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이를 악물어야 했다.
반사적으로 저항하던 해진은 그 순간 맥을 탁 놓고 말았다. 애초에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으니까.
다리가 바닥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해진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눈을 뜨자마자 손에 링거가 꽂혀 있어서 일단 두려움에 빠졌던 그는 저도 모르게 도망쳤다.
다만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 중간이 생각나지 않았다. 잠깐 기억이 사라진 뒤에 앞을 보니 숲이 보였다. 이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해진은 계속 앞으로 걸었다.
숲에는 호수가 있겠지. 그래서 자신이 여길 걷고 있었나 보다.
그들이 저택에 다시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해진은 분명 오래 걸었던 것 같은데 돌아오는 게 너무 순식간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의사를 불러!”
저택에 돌아가자 비서가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우왕좌왕하며 누군가를 찾으러 갔다. 해진은 제 귀에 들린 의사라는 단어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라일은 거침없이 그가 떠나온 방으로 들어섰다. 일단 침대에 해진을 내려놓은 그는, 앙상한 양어깨를 꽉 쥐는 것으로 녀석이 저를 바라보게 했다.
마주친 눈은 왜인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어두운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꼴로 나간 거야.”
왜 라일이 화를 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진은 아주 오랜 잠 끝에 눈을 떴고 비참했다. 그리고 무심코 바라본 쪽에 창문이 있었을 뿐이다.
이 저택으로 끌려오던 날이 생각났다. 자신이 잠든 지 얼마나 되었지? 벌써 며칠이나 흘러가 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