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진.”
아까부터 제대로 된 대답도 없는 해진의 상태가 라일은 몹시 불안했다. 활활 분출되는 분노와는 별개로 이상한 초조함이 그를 갉아먹는다. 쥐고 있는 양어깨에서 떨림이 느껴지자 그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들어 해진의 몸을 감쌌다.
자꾸 비척비척 비 사이를 걸어가던 그 뒷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이렇게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는 해진을 보고 있는 순간에도.
그때 품에 들어 올린 뒤부터 묘하게 얌전하던 해진의 눈빛이 다시 텅 빈 허공으로 돌아갔다. 메마른 목소리가 툭 갈라져 라일을 향해 기어 온다.
“지금은, 계약을 이행하긴 힘듭니다. 베르무스 씨.”
또 페로몬 해소가 필요해지기라도 했나 보다. 해진은 라일이 저를 이렇게 다급하게 찾을 이유가 그것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뭐? 난 그저……!”
그저,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해진을 걱정해서 한 말이라고? 이렇게 거센 비가 내리는 날 왜 우산도 신발도 없이 그렇게 처량하게 있었냐고?
네 잘못이 아니니까 이렇게 도망칠 게 아니라 이쪽에 화를 내는 게 맞지 않느냐고.
이런 알량한 동정 따위를 입에 담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라일은 난생처음 면목 없다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절절하게 이해했다.
이 저택이 녀석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는가. 너덜너덜하게 나부끼는 낙엽처럼.
그래서 라일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까 파삭하는 소리와 함께 불붙은 분노는 이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찌릿찌릿한 감각은 해진의 페로몬을 양분 삼아 자꾸만 부피를 키워 갔다.
이 파리한 안색이 화가 날수록 라일은 다른 질문을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잔디밭에 새겨진 불규칙한 발자국이 꼭 그의 머릿속을 헤집은 것처럼. 망설이던 그는 결국 한숨처럼 튀어 나가는 마지막 의문을 막지 못했다.
왜 화를 내지 않고 스스로를 갉아먹기만 했는지.
“……왜 그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적어도 중요한 계약사항은 내가 무시하지 못했을 텐데.”
“…….”
이러면 안 된다. 미약한 이성이 그에게 비명을 질렀다. 사실 이 분노는 해진에게 흘러 들어갈 것이 아니었다. 그의 무능이며 무관심이 낳은 문제였다. 그러니 피해자인 해진에게는 이런 질문이 가당치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감정이 툭툭 치밀어 올랐다. 잠깐 저택을 떠났을 때 계약 내용을 당당하게 챙기던 모습을 생각하면 자꾸만 의구심이 남았다. 왜, 똑바로 계약을 지키라고 라일에게 요구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그래도 지난 5년간 한마디라도 했으면 무언가가 바뀌지 않았겠는가. 일이 이 지경까지는 안 가지 않았을까.
자신이 녀석을 이렇게 망가트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면 뭐가 바뀌죠?”
그의 이런 질문에도 해진은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공허하게 되물을 뿐이다.
“뭐라도 바뀌었겠지!”
결국 라일은 애먼 화를 이 방에 쏟아내고 말았다. 그제야 허공만 보던 해진의 눈길이 다시 그를 향한다. 아까와는 다르게 미약하게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다시 그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분명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 습윤한 빗줄기가 여전히 내리는 것만 같았다.
“전 이미 말을 하러 갔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죠.”
“뭐……?”
그 순간 라일의 머릿속에는 해진이 퇴근하는 저를 불러 세웠던 밤이 지나갔다.
희미한 달빛이 그 서러운 얼굴을 비추던 밤이 생각났다. 해진이 그를 애타게 기다렸던 그날은 라일도 직접 목격했다. 그 서러운 하루의 흔적을 죽어버린 영상으로 내내 재생하지 않았던가.
아, 네가 내게 왔었구나.
그의 부모를 보러 가지 못했다고 말하러 온 날이었을 것이다. 집사는 온종일 찾아도 그의 간절함을 무시했기에 궁여지책으로 라일을 기다렸으리라.
지난 5년을 굶고 추위에 떨며 괄시를 당해도 참던 녀석이, 참다못해 겨우 용기를 낸 날이었을 것이다.
라일은 그걸 단 한마디로 무시했다.
‘우리가 이렇게, 사사롭게 얘기할 사이던가?’
지금 라일을 더욱 목 조르는 건,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한들 바뀌는 게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는 당연하게 해진을 무시할 것이고 해진은 당연하게 시들어 가리라. 그의 해묵은 원망만 쌓여 있는 이 어두운 저택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요.”
쐐기를 박듯 말하는 해진의 음성에 라일은 반사적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저택을 전부 휩쓸어 대던 분노는 끝내 종착점을 찾았다. 갈 곳을 잃고 또 애먼 곳으로 향하려던 눈먼 원망이.
저택이 해진을 이렇게 만든 게 아니었다. 그저 라일의 탓이었다.
해진을 이곳에 처박아 놓고 한 번도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라일이 오롯한 가해자였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음성이 입을 막고 있는 제 손바닥에 닿았다. 그 축축한 감촉에 놀란 라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해진은 앞에서 라일이 무슨 페로몬을 내뿜든 그저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비에 잔뜩 젖어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 순간 실제로 목이 졸리는 느낌이 나서 라일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첩첩 쌓인 무형의 기운이 그의 목을 조른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가까스로 돌아본 그곳에는 과거의 제 행동들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당기고 있다.
“…….”
이 모습은 확실히 이상하긴 했는지 해진이 처음으로 미약한 감정을 내비쳤다. 라일의 이런 동요가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그 저변에는 라일에게 정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무심함이 녹아 있었다.
그걸 깨닫자 라일은 더는 이 방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비겁하게도.
“……앞으로는.”
“…….”
“앞으로는, 바뀔 거야.”
가까스로 되다 만 한마디만 뱉은 채 라일은 다급하게 뒤돌아섰다.
그러나 말을 뱉으면서도, 과연 제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
“회장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라일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어째서인지, 옅은 해진의 페로몬은 비까지 맞았는데 끈질기게 그에게 묻어 있었다. 온몸을 잠식한 빗물보다도 끈끈하게.
갑자기 쫄딱 젖어서 직접 해진을 찾아 나타난 그를 보고 비서는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덩달아 도망친 환자를 찾아 헤매다가 돌아온 의사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를 보자마자 라일은 해진을 떠올렸다. 아주 자연스럽게.
“……지금 비를 맞았어. 옷을 갈아입게 하고, 방 온도를 높여 놔. 그다음에 팔의 상처를 돌보도록.”
“네, 회장님.”
의사는 상처라는 소리에 의아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지만 비서가 호출한 임시 사용인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서는 걸음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해진은 지금 너무 약해져 있기에 맨몸으로 비를 맞았다면 정말 빨리 조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빠른 움직임을 보며 라일은 축축하게 늘어지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빗물이 흥건하게 그의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비서는 전화를 걸며 라일의 방에 갈아입을 새 옷을 준비시켰다. 갑작스럽게 사용인들을 새로 고용하고 경비 업체를 갈아치우느라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비서가 일하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떼던 라일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진의 방 창문은, 앞으로도 잘 닫아 두라고 해.”
“창문을요? 네, 회장님.”
비가 오는 날 여윈 몸으로 밖을 맴도는 해진의 모습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눅눅하게 젖어 드는 옷가지처럼 라일은 묘한 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진이, 자신의 방이 바뀐 걸 알고 있었나?”
“음, 보고드린 바대로 이 방에 오기 전부터 줄곧 정신을 잃고 계셨던 걸로 압니다.”
“…….”
일단 눈을 뜨고 창문으로 다가가는 순간 방이 바뀐 걸 당연히 알아챘으리라.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게 맞았다.
그런데도 라일은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창틀을 넘는 해진의 페로몬이, 퍽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던 것 같아서.
먹먹한 무언가가 목구멍에 쿡 박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기는 것도 잊은 채, 라일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진에게 지금 상황 설명을 해 주도록 해.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신경 쓰고, 필요하다면 인력 충원도 고려해. ……경호도 빈틈없이 해 둬.”
“네, 알겠습니다.”
겨우 다시 앞으로 향하는 걸음이 이리도 무거울 수가 없었다. 마치 해진의 몫까지 비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아까 제자리를 찾은 분노가 그의 가슴을 꿰뚫은 뒤 홀연히 씨앗 하나를 남기고 가 버렸다. 해진을 찾느라 흘러들어온 비는 속에 단단히 박힌 씨앗을 보듬기 시작했다.
조만간 꼭 싹을 틔워 내려는 듯이.
***
“제일 먼저 사실을 실토했던 몇 명이 법정에서 브라이트 씨에 대한 학대 사실을 증언하겠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직접 가담한 적이 없다면서 선처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가담한 적이 없다니, 전부 헛소리였다. 직접 모든 이를 의심하며 억류한 건 라일이었으나 조사를 하면 할수록, 어째서 그의 귀에 이토록 아무 소문이 들리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해진이 이곳에 온 초반에는 이따금 사용인들의 개인 SNS 등에 흔적이 흘러나오곤 했다. 횡령한 옷가지나 식자재, 어떨 땐 배정된 비품과 자금까지.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런 흔적들은 놀라울 정도로 사라져 갔다. 해진에 대한 대우가 나아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걸 정확히 인식하고 입조심을 시작한 것이었다.